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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4‧24교육투쟁과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폭력의 흔적과 연대의 기억
정영환 鄭榮桓
메이지가꾸인 대학 교양교육센터 교수. 저서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 등이 있음.
chong@gen.meijigakuin.ac.jp
1. 머리말 : 어떤 폭력의 흔적
“북한이라는 나라에 일본이 엄격한 자세를 취하고 필요한 외교 압력을 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재일조선인 교육을 둘러싼 문제를 그와 동일선상에서 파악해도 괜찮을까.” 2010년 2월 24일자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사설에서 조선학교를 고교무상화제도에서 배제하려는 일본정부에 대해 이렇게 이의를 표시했다. 이어서 조선학교는 한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 및 북한의 영향하에 있었지만 “재일조선인의 세대교체가 이뤄졌고 교육 내용은 많이 변했”으며, “북한의 체제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심정으로 아이를 보내는 가정도 늘고 있다”며 이런 변화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설은 2010년 일본사회의 큰 쟁점이던 조선학교에 대한 고교무상화 적용을 두고 ‘적용론’의 입장에서 쓰였다. 당시 민주당정권이 시행한 고교무상화법은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학교도 무상화에 포함하는 것으로, 일본의 외국인학교 정책사상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1 그러나 이 법이 국회에 상정된 직후부터 야당인 자민당은 물론 민주당 내 보수파도 조선학교를 포함하면 북한에 이익을 준다며 격렬하게 비판했다.
조선학교의 교육 내용이 지난 시기와 비교해서 많이 변한 것은 사실이고, 아이를 보내는 부모의 의식이 달라졌다는 지적도 사실이나 필자는 이 사설을 접하고 무척 의아했다. 무상화법은 교육의 내용을 불문하고 일정한 교육과정 조건을 충족하는 학교에 다니는, 외국인을 포함한 학생의 권리를 인정한 것인데 왜 이 사설은 ‘내용의 변화’를 거론하며 배제론을 반박할까. 법이 인정한 학생의 권리를 부정할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지가 문제인데, 왜 그와 무관한 ‘북한과의 관계’라는 배제론자가 만든 잣대를 적용론자마저 공유하는 것일까. 바로 이런 의문이 들었다.
또한 재일조선인사 전공자로서 가장 큰 문제로 여겨진 점은 이 사설에 전후 일본정부의 조선학교 정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지원을 받고 북한의 영향하에 있던 시기와 달리 최근 조선학교는 많이 변했다, 학생들도 축구나 럭비, 권투 대회에 나갈 정도다, 그러니 배제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식의 인식을 적용론자들마저 공유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변하기 전 전후 일본정부의 오래된 조선학교 정책은 타당하고 합리적이었다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의문의 핵심이다.
본고는 이런 인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70여년 전 일본에서 일어난 ‘4·24교육투쟁’에 초점을 맞춰 전후 일본정부가 실시한 조선학교 배제정책의 역사적 기원을 찾아보려 한다. 조선학교가 고교무상화에서 배제된 것은 1990년대 이후 조일(북일) 간 긴장을 배경으로 하는데 직접적으로는 2002년 일본인납치사건 폭로와 이후 이어진 핵과 미사일 실험으로 인한 일본사회의 대북인식 악화가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배제정책은 전후 일본정부가 오랜 기간에 걸쳐 조성한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구조의 토대 위에서 시행되었다. 특히 패전 직후 연합국 점령기에 새로운 교육제도가 정비될 무렵 만들어진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4·24교육투쟁이란 무엇인가. 2차대전 이후에도 일본에 잔류하게 된 약 60만명의 조선인들은 각지에 민족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1948년 1월 24일 문부성 학교교육국장의 이름으로 ‘조선인 설립 학교 취급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통달을 발해 조선인은 일본 법령에 따라야 하며, 조선인 아동은 일본학교에 취학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 결과 같은해 3월 이후에 야마구찌(山口), 오까야마(岡山), 효오고(兵庫), 오오사까(大阪), 토오꾜오(東京) 등에서 지사에 의한 학교 폐쇄명령이 발령된다. 일본정부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대해 재일조선인 단체는 폐쇄명령 철회와 교육 자주성 승인을 요구하며 각지에서 투쟁을 전개했으나, 미군과 일본경찰의 강경한 탄압 앞에 학교 측은 대폭 주장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을 치안당국은 코오베(神戸)·오오사까 사건, 재일조선인 민족교육사에서는 4·24교육투쟁(한신〔阪神〕 교육투쟁)이라 부른다.
1948년에 발생한 이 일련의 사태는 전후 일본정부가 실시한 민족교육 단속의 첫걸음으로 한반도의 분단과 얽히면서 일어났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사건은 일본국헌법 공포나 교육기본법·학교교육법 공포, 점령정책의 역(易)코스 같은 일본현대사의 연표 속에서만 언급될 것이 아니라 제주 4·3사건이나 남북연석회의, 그리고 5·10단독선거와 같은 동시대 한국현대사의 사건들과 함께 기록될 필요가 있다.
1948년 4월 누군가는 코오베에서 경찰서 천장에 매달려 구타당했고, 누군가는 오오사까 공원에서 사살되었다. 왜 그들은 이러한 일을 당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동시대 일본이나 한반도 사람들은 이러한 폭력 행사를 어떻게 보았을까. 천황제국가의 해체와 재편 과정에서 재일조선인이 벌인 자주적인 민족교육운동에 대해 일본정부나 점령군은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했을까. 인간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그 가능성을 발전시키려는 ‘교육’이라는 행위가 왜 이처럼 폭력적인 탄압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까. 또한 이러한 폭력에 대항하는 움직임의 지역적 범위는 어떠했을까. 동시대 한반도 사람들은 해외 ‘동포’들의 고투를 어떻게 보았을까.
2. ‘4·24교육투쟁’이란 무엇인가
재일조선인 민족교육의 시작과 일본정부의 정책
조선 해방 후 재일조선인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각지에 국어강습소를 설립했다. 1945년 10월 15일 창립된 재일본조선인연맹(이하 조련)은 이 학교들을 정리하고 체계화한다. 조련의 통계를 보면 이미 1946년 10월에 학교 수가 500곳을 상회했고 학생 수도 4만명이 넘었다.2 1955년 조총련 결성 이후 초급학교가 100곳을 넘은 적은 없고 학생 수도 최대 2만명이었음을 고려하면3 당시 학교와 학생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일본정부는 이 조선학교들에 대해 처음에는 방임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1948년 이후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1948년 1월 24일 문부성 학교교육국장은 각 도도부현(都道府県) 지사에게 「조선인 설립 학교 취급에 대하여」(이하 1·24통달)라는 통달을 발했다.4 1·24통달은 조선인 아동을 “일본인과 동일하게 시·정·촌(市町村)립이나 사립 소학교 또는 중학교에 취학시켜야 한다”고 한 후, 사립 초중학교 설립은 학교교육법에 따라 도도부현 지사의 인가를 얻어야 하며, 학령 아동의 교육에 대해 각종학교 설립은 인가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1·24통달의 배경에는 점령군의 의향이 있었다. 로버트 리케츠(Robert Ricketts)에 따르면, 미 제8군은 일찍이 조선학교에 주목해 연합국최고사령관(SCAP)민간정보교육국과 대응을 협의해왔다.5 1947년 4월에는 제8군 군정부가 각지의 군정팀에 조선학교를 일본의 교육법에 따라 문부성의 인가를 받게 하도록 명령했다. 오오사까의 군정팀은 조선인 학교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교육”을 한다고 우려했는데, 이는 쿄오또(京都)의 제1군단을 거쳐 SCAP민간정보교육국으로 전달된다. SCAP가 이 보고들에 입각해 조선학교가 일본의 교육정책에 따르도록 문부성에 조치를 강구할 것을 지시하면서 1·24통달이 작성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미군의 압력에 의해 1·24통달이 발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예를 들면 오오사까 군정팀의 맬컴 크레이그(Malcolm Craig)는 조선학교에 관한 일본경찰 관계자의 정보를 그대로 군의 상부에 전달하기도 해 일본의 치안당국이 점령군을 움직인 측면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6
어쨌든 이렇게 발령된 1·24통달은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이로 인해 각지의 조선학교는 기존 상태로 존속하기가 곤란해졌기 때문이다. 한해 전에 일본 문부성은 조선인이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각종학교를 신설할 경우 지사가 이것을 인가하도록 용인한 바 있다. 그런데 1·24통달은 조선인 자제를 취학시킬 의무가 있다는 입장이었지만 학령 아동과 학생의 교육을 행하는 각종학교의 설치를 인정하지 않는 방침을 천명한 것이다. 물론 사립 소학교와 중학교 인가 신청이라는 길은 남겨졌지만, 이 사립 소학교, 중학교에도 학교교육법의 규정이 적용되며 또한 조선어 교육은 ‘과외’만 인정되는 방침이 제시됐다. 조련의 교과서를 사용하며 조선어로 교육하는 학교가 종래대로 인가받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렇다고 인가 신청을 미루면 통달 위반이 된다. 조선학교는 일련의 문부성 통달로 인해 막다른 길로 몰리게 되었다.
학교폐쇄령 반대투쟁
조련은 당연히 이러한 문부성의 방침에 강하게 반발한다. ‘일본의 법령에 따라야 하므로 일본의 소학교, 중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라는 1·24통달은 ‘지나친 기계적 해석이므로 역사적·현실적인 고려’를 해달라고 조련은 문부성에 요청했다.7 일본의 교육법을 무시할 의도는 없고 조선인은 ‘적당한 기회에 귀국해야 하므로 모국어에 의한 각 교과교육이 절실’할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강경정책은 변하지 않았고 그 결과 정부 및 지방자치체와 조련 측은 대립상태로 들어간다. 즉 1948년 3월 이후 1·24통달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야마구찌, 오까야마, 효오고, 그리고 오오사까의 지사는 각 학교에 패쇄령을 내렸다.8 조련은 이에 대항하여 3월 23일 조선인교육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정부에 4개 조건을 인정하면 인가 신청을 할 용의가 있다고 전했다.9 교육용어는 조선어로 행한다, 교과서는 조선인교재편찬위원회가 편찬하고 ‘일본점령군총사령부 민간정보교육국’(CIE)의 검열을 받은 것을 사용한다, 학교 경영관리는 ‘조련학교관리조합연합회’가 맡는다, 일본어를 정규과목으로 채용한다, 이 4개 요구가 위원회 측의 양보할 수 없는 일선이었다. 조련은 각 지방에서 학교폐쇄령 철회투쟁을 벌였고, 야마구찌 등 일부 지역은 명령을 철회하기도 했다.
폐쇄인가, 폐쇄명령 철회인가. 전국의 상황이 요동치는 가운데, 4월 24일 코오베 효오고 현청에는 조선인들이 모여 지사와의 교섭을 요구한다. 장시간에 걸친 교섭 끝에 지사는 불법행위에 대한 재판으로 인해 구금 중인 조선인을 석방할 것, 석방된 법률위반자를 기소하지 않을 것, 조선인 학교에 관한 법원 명령을 취소할 것, 이상의 요구들을 주장한 조선인을 처벌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10 전국에서 세번째 학교 폐쇄명령 취소였다. 당시 조련 효오고 현본부 서기국 위원 김경환(金慶煥)은 이때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런데 5시쯤 되었을까, 지사실에서 우리 대표들이 의기양양해서 나왔다. ‘이겼다, 이겼어!’라는 환성이 터진다. 끈기와 회피의 전략을 썼던 키시다(岸田) 지사나 고루함이 극에 달했던 코데라(小寺) 시장이나 사법 괴물 이찌마루(市丸) 검사정 등도 마침내 우리 대표의 논리 정연한 주장에 굴복해 “조선인학교 폐쇄명령을 철회한다”는 지사 명의의 공문서(…)에 조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위대한 우리들의 승리였다.11
‘4·24’의 날
‘승리의 날’을 축하하기 위해 조련본부로 돌아가 찬술로 축배를 들었던 김경환은 그러나 그 직후에 찾아온 헌병에 의해 사령부로 연행된다. “사령관의 방에는 그날 현지사실에 있었던 키시다 지사, 코데라 시장, 이찌마루 검사정, 후루야마(古山) 경찰국장 등 7~8명의 현과 시 간부들이 옆으로 죽 늘어서서 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헌병들은 김경환이 지사실에 있었는지 지사 일행에게 물었다. 없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는데도 “조련본부 간부의 이름을 모조리 쓰라”고 명령했고(“해방된 조선민족 만세”라고 썼지만), 그후 김경환은 사령부 지하실에 갇혔다. 그후에도 “다음 날 25일 새벽 3시 정도 되자, 지하실로 동포들이 들어오고 또 들어와 초만원이 되었다.” 김경환의 짐작으로 약 200명이 감금되었다고 한다.12
코오베에서 조선학교 폐쇄명령이 철회된 것에 대한 미군의 대응은 보다시피 조선인의 일제검거였다. 1948년 4월 24일 밤 11시에 제8군 코오베 기지 사령관 피어슨 메노어(Pearson Menoher) 준장은 기지 관내에 ‘비상사태선언’을 발령하고 경찰을 헌병사령부의 지휘하에 두는 한편, 지사에게 학교 폐쇄명령 철회를 폭력적으로 요구한 자들을 검거할 것을 지시했다.13 코오베 시내에는 점령기 최초이자 최후의 비상사태선언이 발령돼 코오베 기지 관내는 미군의 직접 점령하에 놓였고, 조선인의 일제검속이 시작된다. 김경환은 가장 초기의 검거자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검거되었을까. 『코오베신문』을 보면 4월 25일 새벽 이미 500명 가까운 검거자가 나온 것을 알 수 있다.(4월 26일자) 다음 날 26일에는 1,200명에 달했고 절정에 달한 것은 28일 오후 5시의 1,973명이다.(4월 30일자) 반대로 27일부터는 석방자도 나오기 시작해 5월 4일에는 석방자 수가 천명을 넘었고, 11일에는 대부분이 석방되었다.(5월 12일자) 헌병과 경찰은 그사이 지사에게 폐쇄명령을 철회하도록 강요한 인물을 찾아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검거해 대면조사를 했던 것이다.
헌병이나 경찰이 검거와 대면조사 과정에서 어떠한 방법을 사용했는지 엿볼 수 있는 자료로 1948년 6월 작성된 「효오고 조교사건 검찰 피해 조사표(兵庫朝教事件檢察被害調査表)」(이하 조사표)가 있다.14 조사표에는 4월 24일부터 5월 3일까지 검거된 164명의 조선인과 4월 25일부터 28일 사이에 검거된 94명의 일본인의 피해조사 기록이 게재되어 있는데, 그중 한명인 김종현의 피해기록은 아래와 같다.
경찰봉에 맞아 체포되었다. 이꾸따(生田) 경찰서에서 천장에 매달아 수갑을 채우고 일본경찰 약 30명 중 두세명이 경찰막대로 가슴을 쳤다. 똑바로 앉게 한 후 또 때렸다. 팔굽혀펴기 자세로 엉덩이를 얻어맞아 [2글자 불명] 부상. 이꾸따 경찰서에서 스미또모(住友) 빌딩으로 가는 도중에 끊임없이 머리를 얻어맞았다.
다른 ‘폭행 고문의 사실’ 기재를 보아도 경찰이나 헌병이 “구타하거나 발로 찼다” “타따미 4장 반짜리 방 안에 41명을 밀어 넣어 호흡이 곤란” “곤봉으로 맞았다” “가족이 울자 집을 불태우겠다고 협박” “권총 5~6발을 맞아 차에 실려갔다. 3장짜리 타따미 위에 19명을 밀어넣어 호흡이 곤란” 등, 검거와 대면조사 그리고 조련 간부의 신원 조사 과정에서 처참한 폭력이 가해진 것을 알 수 있다. ‘4·24’는 ‘승리의 날’에서 ‘탄압의 날’로 변해갔다.
비슷한 시기 오오사까에서도 사건이 발생했다. 4월 26일 오오떼마찌(大手町) 공원에서는 오오사까부(府) 조선인교육문제공동투쟁위원회가 폐쇄령 철회를 요구하는 대회를 개최했고, 교섭위원은 지사와 회견했다.15 그러나 오후 4시에 군정부장 크레이그 대령은 회견 중지와 대회 해산을 명했다. 교섭위원은 대회 참가자에게 해산을 명했으나 일부에서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스즈끼 에이지(鈴木榮二) 오오사까 시경 국장은 방수(放水)와 권총 사용을 명령했다. 경찰은 데모 참가자에게 발포했는데, 그 결과 27명이 중경상을 입고 16세 소년 김태일(金太一)이 사살되었다. 최초의 사망자였다.
4월 27일 새벽 5시에 이번에는 토오꾜오도에서 경찰이 교장 등 학교 책임자 16명을 학교교육법 위반 용의로 체포했다.16 폐쇄명령을 받았는데도 26일까지 수업을 계속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다음 날인 28일에 토오꾜오 군정부는 30일까지 수업을 계속하면 강제 조치를 취하겠다고 학교 측에 전달했다.
코오베, 오오사까, 토오꾜오에서 연이어 벌어진 미군과 경찰의 강경한 단속,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는 학교 폐쇄명령을 지켜보면서 조련은 종전의 투쟁방침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련 토오꾜오 본부는 27일 긴급대책위원회를 개최하고 코오베와 오오사까 같은 투쟁방법을 피해 데모와 대중운동 같은 투쟁방법은 원칙적으로 취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평온하게 해결점을 모색하기로 결정했다.17 조련 중앙총본부의 문교부도 이날 모리또 타쓰오(森戶辰男) 문부대신과의 회담을 신청했다.
그 결과 5월 3일 오후 8시부터 회담이 이루어져 조선인교육대책위원회와 모리또는 “조선인 교육에 관해서는 교육기본법과 학교교육법을 따를 것” “조선인 학교 문제에 대해서는 사립학교로서 자주성이 인정되는 범위 내에 조선인의 독자적인 교육을 행할 것을 전제로 사립학교로서의 인가를 신청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각서’를 5월 5일 교환했다. 같은 날 조련 토오꾜오 본부와 토오꾜오도의 회담도 이루어져 사립학교 인가를 신청하기로 합의했다. 정확히 일본국헌법이 시행되고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후 오오사까나 코오베, 쿄오또 등에서도 각서가 교환돼 조련은 각지에서 사립학교 인가 신청을 추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검거된 사람 중 114명이 ‘폭동’ 참가를 이유로 기소되었다(4명이 무죄).18 재판은 미군의 군사위원회(12명), 코오베 헌병재판소(12명), 오오사까 헌병재판소(12명)와 일본의 코오베 지방재판소(52명), 오오사까 지방재판소(23명)에서 이루어졌다. 1948년 6월 30일 군사위원회가 판결을 내렸는데, 10명은 10~15년의 강제노동형에 처해졌고, 그중 8명은 남한으로 강제송환되었다.
3. 폭력으로서의 ‘4·24’, 연대로서의 ‘4·24’
식민주의와 반공주의의 폭력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옹호투쟁으로 시작된 1948년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4월에 철저한 탄압을 거친 후 5월에 교육기본법과 학교교육법의 틀로 굴복해 들어가며 막을 내렸다. 이 일련의 사건을 당시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그 예로 1948년 7월호 『중앙공론(中央公論)』에 게재된 역사학자 쓰다 소오끼찌(津田左右吉)의 아래 에세이가 있다.19
문제의 핵심은 소동을 일으킨 조선인이 일본에 있으면서 일본국가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은 데 있다. 그것은 우선 그들이 최근 조선인에 대한 일본 관헌의 나약한 태도에 익숙해진 탓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태도가 취해진 데에는 옛날부터 내려온 조선의 교양 없는 민중에게 흔히 보이는 일종의 심리작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것과, 이후에 언급하듯이, 현재 일본의 국가로서의 지위가 급격히 저하됨에 따라 일본인이 일반적으로 이민족에 대해 스스로를 경시하는 기풍을 가지게 된 것, 이 두가지 사정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쓰다는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사료 비판에 기초한 연구로 인해 우익의 공격을 받아 1940년에는 저작이 발매금지 처분을 당하는 등의 탄압을 받은 사상사가였는데, 이때 그는 식민주의적이라고 할 만한 차별적 시선으로 ‘4·24’로 일어난 조선인들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2천명 가까이 검거되었고 다수의 사상자를 낸 경찰과 군대의 단속이라는 폭력을 가한 것으로도 모자라 ‘단속당하는 측’에 문제가 있다는 발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코언(S. Cohen)은 국가의 인권침해를 사람들이 경시할 때의 논법으로, 사건 발생 자체를 부정하는 문자적 부인(literal denial)뿐만 아니라, 사건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며 부정하거나(해석적 부인interpretive denial), 어떤 사건의 심리적·정치적·도덕적 함의를 부정하는 함축적 부인(implicatory denial)을 든다.20 ‘4·24’를 접하고 쓰다가 나타낸 반응은 “조선의 교양 없는 민중”의 ‘심리’ 탓이라는 해석을 제시하며 폭력의 존재에서 눈을 돌리는 2차 부인의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당시에 일본의 전국지는 ‘4·24’를 ‘불법 조선인’의 폭동사건이라는 프레임으로 대서특필했고, 쓰다 같은 식민주의적 시각에 기초한 ‘부인’은 당시 결코 예외적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교육대책위원회가 종래의 주장을 꺾고 문부대신과 ‘각서’를 교환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도 이러한 일본사회의 인식이 있었다. 실제로 조선인교육대책위원회는 ‘각서’를 교환한 이유를 설명할 때 “들고일어난 동포대중한테는 확실히 타협적이라고 비난받을 조건”이라고 인정했다.21 하지만 ‘적의 분열정책’으로 인해 “고립적 상태에서 반동권력의 공격과 일본대중의 반발”을 초래해 불리한 상태에 빠졌고 더욱이 투쟁을 계속해 “마치 특권을 주장하는 듯한 인상을 일본인민들에게 주게 되면 스스로 고립을 초래할 우려”가 있으므로 ‘각서’ 교환에 이르렀다고 했다.
하지만 ‘4·24’에 가해진 폭력을 부인하는 해석 중 훨씬 큰 힘을 가진 것은, 4·24를 “공산주의자의 선동에 의한 폭동”으로 보는 해석이다. 예를 들면 아이헬버거(R. Eichelberger) 중장은 비상사태선언 발령 직후부터 코오베와 오오사까의 ‘폭동’은 “명백히 일본공산당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는 해석을 반복해서 제시했다.22 나아가 4월 28일자 『코오베신문』은 “남한 총선거를 노리고 반미사상을 선동하는 이번 사건”이라는 표제를 달고 “미국인 다수는 이번 사건을 5월 10일 남한 총선거를 앞두고 서로 호응해 반미사상을 선동하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UP통신 특파원의 견해를 보도했다. 교육투쟁을 5·10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폭동’으로 보는 인식이 비상사태선언 직후부터 유포되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검거자의 대면조사 시에 단독선거에 대한 찬반을 경찰이 조사했다는 증언도 있는데, 찬성자만 석방되었다고 조련계 신문은 보도하고 있다.23 단독선거에 대한 태도는 폭력에 노출될지 말지를 가르는 갈림길이었다.
또한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이하 민단)도 이러한 점령군의 영향을 의식한 탓인지 4월 29일 교육문제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24 성명서에서 민단은 “이번 조선국민의 학교교육문제와 관련한 분쟁사건의 장본인은 조련을 장악한 한무리 공산분자와 그 후견인인 일본공산당이다”라고 조련에 책임을 지우고 “본 민단은 중앙과 지방을 불문하고 이번 분쟁사건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여기에 명시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쓰다의 입장과는 달리 반공주의적인 입장에서 나온 비판이었다.
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시선과 냉전형 반공주의적인 인식이 교차하는 지점에 형성되는 것이 외부 공산주의 세력의 지령을 받아 폭동을 꾀하는 조선인이라는 이미지이다. 4월 29일자 『아사히신문』이 게재한 「조선인 밀입국자가 급증」이라는 기사도 그 예다. “종전 이래 제3국인의 밀입국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기사의 옆에는 “문부성에서 논의한 조선학교 문제”라는 표제가 놓인다. 기사의 이러한 배치가 우연에 의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기사로 영국 국립공문서관 소장 외무성 문서 중 ‘ Korean riot in Japan’(일본에서 일어난 조선인 폭동)이라는 제목의 파일이 있다.25 여기에는 주일대사관과 본국 외무성(이하 본성) 사이에서 오간 1948년 ‘조선인 폭동’에 관한 17건의 왕복문서가 수록되어 있는데, 1948년 5월 10일자 기밀문서에서 알바리 개스코인(Alvary Gascoigne) 주일영국대사는 미군 제공 정보에 기초해 조선인 ‘밀입국’과 조선 북부 정치세력과의 관계에 대해 본성에 보고했다. 조선인의 교육문제에 대해 연일 이어지는 보고 속에서 ‘밀입국자 급증’이라는 ‘사실’을 보도한 앞의 기사도 미군의 지시로 게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연대로서의 ‘4·24’
민족교육 옹호를 내건 조선인들의 주장은 치안당국의 폭력적 진압과, 외부 공산주의 세력의 지령을 받아 폭동을 꾀하는 조선인이라는 이미지 속에서 지워져버렸을까. 적어도 당사자였던 조련은 일련의 사건을 그대로 용인하지는 않았다.
조련은 1948년 4월 30일 중앙상임위원회를 소집해 검거자들의 공판투쟁 준비를 위해 협의했다.26 그리고 (1)재판용어를 조선어로 할 것 (2)‘본국’ 변호사 초빙을 위한 여권을 신청할 것 (3)극동위원회 위원에게 재판 입회를 요청할 것 (4)김태일을 사살한 경찰의 잔학함을 국제아동보호협회에 제소할 것을 결정했다.
조련은 (4)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태일을 사살한 경찰의 책임 추궁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48년 7월 15일 오오사까 지방검찰청은 김태일을 사살한 경관의 불기소를 결정한다. 이에 대해 같은 달 28일의 조련 제15회 중앙위원회에서는 조희준(曺喜俊), 이종태(李鐘泰), 이복조(李福祚)를 대표로 선출해 오오사까 지방검찰청에 항의했다.27 3명의 대표는 오오사까 지방검찰청에서 차석검사와 면회하고 항의문을 낭독하고 건넨 후 책임있는 회답을 서면으로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검사는 전례가 없어서 안 된다고 답할 뿐이었다.
이 때문에 조련은 자유법조단과 함께 오오사까에서 탄압받은 피해자들의 기록을 정리해 책임자의 고소·고발을 시도했다. 미즈노 자료 중 파일 「1948년 투쟁 자료 칸사이關西 지방」에는 ‘고소와 고발의 취지’라는 제목이 붙은 등사판 3장 분량의 용지가 스테이플러로 찍혀 있다. 종이 오른쪽 끝에는 손글씨로 ‘오오사까 사건’이라고 쓰여 있다. 고소·고발장은 오오사까부(府)지사, 국가지방경찰 오오사까 본부 경찰대장, 중의원 의원 카따오까 세이이찌(片岡清一), 오오사까 시장, 오오사까시 경찰국장과 “성명 불상의 가해 경찰관”을 1948년 4월 23일과 26일에 “16세 소년 김태일, 14세 소녀 김화순(金花順) 등 저항하지 않은 인민에 대해 살인(형법 199조), 상해(형법 204조), 폭행능학(凌虐, 형법 195조) 등을 가한” 죄로 제소한 것이다.
제목이나 작성자, 작성 일시 등의 정보는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반민주주의적, 군국주의적인 범죄행위를 고소고발해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며, 이로써 우리 나라 민주화의 앞길에 가로놓인 장애를 제거할 것을 기대하는 바이다”로 끝맺었는데, 일본을 ‘우리 나라’로 표현한 점으로 보아 아마도 혁신계 법률가단체인 ‘자유법조단’이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문서에는 1948년 4월 23일과 26일의 피고소인, 피고발인의 이름과 연령, 주소, 장소, 부상 정도 등이 기재된 두 종류의 별표가 첨부되어 있다. 별표의 필두에는 “맹관총창(뇌출혈과 좌창). 뇌피질 표면에서 1.5밀리 깊이에 총창 파임 있음. 뇌피질 좌멸됨. 왼쪽 두골 뇌피질의 경계에 파편 박힘”이라는 김태일 사망에 관한 기록이 있다.
조련의 또다른 중요한 과제는 체포돼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의 공판투쟁이었다. 조선어를 재판용어로 하도록 요구한 후 (2)에서 보듯 ‘본국’의 변호사 초빙을 꾀했다. ‘본국’이란 조선, 특히 이남을 가리켰다. 당시 일본정부의 조선학교 폐쇄령에 대한 조선이나 재외 조선인들의 반발은 강력했다. 서울에서 열린 조선어학회 주최 회의에서는 재일조선민족교육옹호투쟁위원회 결성이 결의되었다.28 더욱이 5월 18일에 평양중앙방송은 북한 김일성대학(현재 김일성종합대학) 부총장의 학교폐쇄령 절대 반대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한다.29 ‘4·24’는 ‘재일’의 틀을 넘어 전민족적으로 확대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본국의 변호사’들에게서 호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련중앙시보(朝連中央時報)』는 서울의 신문 보도에 기초해 조선변호사협회가 코오베 재판소에서 ‘부당한 재판’을 받고 있는 동포를 위해 대책을 강구했으며, 사비로라도 변호하겠다고 지원하는 변호사가 22명 나타났기 때문에 허가 신청을 미군정에 요구해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고 1면에 보도했다(1948.6.11). 앞에서 제시한 변호사 초빙을 포함한 조련의 ‘목표’는 이러한 경과를 보아도 결코 황당무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당시 이남에도 ‘4·24’를 반공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움직임은 유입되고 있었다. 박열(朴烈) 민단 단장의 비서 박성진(朴性鎭)은 4월 16일 학교폐쇄 반대의 목소리가 고양되던 서울에 와 조련 산하 학교는 북한과 연락을 취하는 ‘좌익사상 선전기관’이 되었으며 이것이 교육이 침해당한 커다란 원인이다, “일본정부가 우리 국어를 못 쓰게 했다거나 역사를 못 가르치게 하는 등의 명령을 내린 적은 없다”고 언론에 설명했다.30 민족문화의 억압은 아니다, 책임은 조련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본국의 변호사’들은 이러한 반공주의적인 해석이 나오는 와중에도 코오베 군사재판 ‘피고’의 변호를 지원했다. 『자유신문(自由新聞)』은 “일부에서는 이것을 공산주의자의 선동이라고 하지만” 일반인들은 일본정부가 조선인을 몰아가려는 술책으로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1948.4.28). 물론 당시 조련은 단독정부 수립에 강력히 반대했다. 하지만 오오사까와 코오베를 비롯한 학교폐쇄령에 대한 항의가 이 목적에 종속된 폭동이나 음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코오베 군사위원회는 1948년 6월 30일 김태삼(金台三) 조련 니시(西)코오베 지부위원장에게 중노동 15년의 판결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9명의 피고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본국의 변호사’ 없이 이루어진 이러한 판결 때문에 강한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게 된다. 조련 서울위원회가 항의성명을 낸 것은 물론, 조선교육자협의회도 변호사단 파견을 일축한 미군 당국을 비판했다.31 나아가 조련 기관지에 따르면 『조선일보』가 이 문제를 사설로 다루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해당 사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조련중앙시보』의 번역에 따르면 학교 폐쇄 문제는 일본이 “조선민족과 그 문화의 말살이라는 고금의 역사에 없는 악독한 침략을 자행해온 그 습관의 연장적인 행동”이라고 파악하고 토오꾜오 재판의 전범 용의자한테도 미국의 변호사가 붙어 있는 것을 인용하면서 “단 한 사람의 동포 변호사도 참가시키지 않은 채 최고 15년의 징역이라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라고 변호단 파견 불허를 비판했다고 한다.32 조련의 호소는 확실히 전달되었고, 이는 폭력에 대항하는 연대로서 ‘4·24’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맺음말을 대신하여
조련은 매년 4월 24일을 교육투쟁 기념일로 하기로 1948년 7월 결의했다. 당시 조련 문교부장 원용덕은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33
112만의 동원과 3천여명의 무차별 검속, 36명의 희생자(최고 15년의 중노동)에 총 166년 10개월의 투옥, 효오고, 오오사까에서만 4억 8천만 엔의 손실을 입으면서도 싸운 교육투쟁이, 우리들의 정당한 주장이 아직 관철되지 않은 오늘날, 이 기념일이 설정된 것에 중대한 의의가 있다.
그리고 원용덕은 “어떻게 이날을 기념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싸우며 이날을 맞이하고 어떻게 승리의 기념일로 전취할 것인가”라며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4·24’의 경험은 재일조선인들에게 폭력과 좌절의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은 않다. 투쟁 과정에서 민족교육 의식이 명확해졌고 한반도를 포함한 전국적인 연대가 형성되었다. 이는 3·1운동에 필적하는 공전의 전국적 연대의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효오고 조교사건 검찰 피해 조사표」에 드러난 폭력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 책임을 추궁하려는 자세를 통해 ‘4·24’는 투쟁과 연대의 집합적 기억이 되어갔다.
‘4·24’에서 1년 반이 지난 1949년 9월 8일 조련은 점령군과 일본정부에 의해 단체등규정령(団体等規正令)이 적용되어 모든 조직이 해산당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고 그 국기를 게양했다는 것 외에 ‘코오베와 오오사까 사건’도 해산 이유로 열거되었다.34 그리고 운영 모체가 해산된 것을 이유로 다시 전국의 조선학교가 폐쇄명령을 받았다. 1949년의 제2차 학교 폐쇄이다. 이후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을 거쳐 조선학교가 다시 부활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4·24’의 경험은 재일조선인운동의 기억으로 계승되어간다.
한편 이 시기는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제도적 배제의 역사적 기원이라고 할 만하다. 본고에서 살펴본 1948년의 탄압을 거쳐 일본이 제도적으로 민족교육을 배제하려는 틀은 1950년대에 확립되었다. 2010년 일본의 고교무상화제도 개시 이래 조선학교 학생들은 일관되게 이 제도에서 배제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아사히신문』의 사설이 암시하듯 이러한 역사를 반성하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의 무상화 배제는 훨씬 오래된 역사적 맥락을 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뿐만 아니라 냉전의 형성기인 1948년 민족교육에 가해진 식민주의, 반공주의, 그리고 양자를 결합시킨 다양한 비판적 담론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 재생산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재일조선인의 역사, 조선학교의 역사를 통해 일본과 한반도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그래서 이 지역의 ‘현재’를 더욱 깊이 인식하는 길이 되는 동시에 동아시아 냉전 극복과 평화로운 미래 구상에 힌트를 제공해줄 것이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전환이 모색되는 오늘, 안정적이었던 ‘전후’질서의 대한 향수보다 ‘전후’질서 자체를 다시 근본적으로 물어보는 깊은 사유와 고민이 필요한 것 아닐까.
번역: 임경화(林慶花)/중앙대 접경인문학 연구단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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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무상화제도와 조선학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月刊イオ編集部 編 『高校無償化裁判249人の朝鮮高校生たたかいの記録』, 樹花舎 2015; 月刊イオ編集部 編 『高校無償化裁判 vol. 2 大阪で歴史的勝訴』, 樹花舎 2017 참조. ↩
- 「朝連第五回全體大會提出活動報告書(1948年度)」, 朴慶植 編 『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 第1巻, 不二出版 2000. ↩
- 金徳龍 『朝鮮學校の戰後史1945-1972[増補改訂版]』, 社會評論社 2004, 273~74면. ↩
- 「朝鮮人設立學校の取り扱いについて」(文部省學校教育局長發, 文部省大阪出張所·都道府県知事宛, 1948.1.24), 같은 책 179면. ↩
- ロバ—ト·リケット, 「在日朝鮮人の民族自主權の破壊過程」, 三橋修, 蝦名良亮, ロバ —ト·リケット, 李榮娘 「共同研究: 占領下に於ける對在日朝鮮人管理政策形成過程の研究(一)」, 『青丘學術論集』 6, 韓國文化研究振興財団 1995, 231~36면. ↩
- 같은 글 235면. ↩
- 『朝連中央時報』 1948.3.5. ↩
- 이하 1·24통달에 대한 대응과 학교폐쇄령 철회투쟁에 대해서는 졸저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임경화 옮김, 푸른역사 2019) 제6장 외에 金慶海 『在日朝鮮人民族教育の原点 4·24阪神教育闘争の記録』(田畑書店 1979), 金徳龍 『増補改訂版 朝鮮學校の戰後史1945-1972』(社會評論社 2004) 참조. ↩
- 『解放新聞』 1948.4.25. ↩
- 『解放新聞』 1948.5.1. ↩
- 金慶煥 「四·二四教育闘争の思い出」, 金慶海 編 『在日朝鮮人民族教育擁護闘争資料集』, 明石書店 1988, 421~22면. ↩
- 같은 글 423면. ↩
- 비상사태선언 발령 과정에 대해서는 荒敬 「占領下の治安對策と「非常事態」: 神戸朝鮮人教育擁護闘争を事例に」, 『日本史研究』 336, 1990 참조. ↩
- 이 자료가 포함된 일본공산당 1차 사료군, 통상 미즈노 쓰따(水野津太) 자료(이하 미즈노 자료)는 현재 케이오 의숙대학(慶應義塾大學)과 도오시샤 대학(同志社大學)에 기증되어 있으며, 그 일부는 현재 『전후 일본공산당 관계 자료(戰後日本共産党關係資料)』(마이크로필름판, 전40릴, 不二出版 2007~2008)로 간행되었다. 단 본고에서 언급한 자료는 이 자료집에 수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재일한인역사자료관(在日韓人歴史資料館)이 소장하고 있는 미즈노 자료 마이크로필름을 참조하기 바란다. ↩
- 『解放新聞』 1948.5.1. ↩
- 『解放新聞』 1948.5.1. ↩
- 『朝鮮新報』 1948.5.1. ↩
- ロバ —ト·リケット, 앞의 글 239~40면. ↩
- 津田左右吉 「現下の世相とニホン人の態度」, 『津田左右吉全集』 23, 岩波書店 1965, 212면. ↩
- Stanley Cohen, States of Denial: Knowing about Atrocities and Suffering, Polity Press 2004; 한국어판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왜 국가와 사회는 인권침해를 부인하는가』, 조효제 옮김, 창비 2009. ↩
- 『학교를 지키자!』 1948.5.8. ↩
- 『神戸新聞』 1948.4.27. ↩
- 비상사태선언하에서 재일조선인단체의 동향에 대해서는 졸저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 제6장 참조. ↩
- 『民主新聞』 1948.5.1. ↩
- “Koreans riot in Japan,” FO 371/69923, The National Archives=TNA, Kew, UK. 이 자료에 대해서는 졸고 「イギリス外交文書のなかの「四·二四教育闘争」」, 『明治學院大學教養教育センタ—付属研究所年報: synthesis』 2019년 3월호 참조. ↩
- 『解放新聞』 1948.5.14. ↩
- 『朝連中央時報』 1948.8.6. ↩
- 『경향신문』 1948.4.17. ↩
- 『東京朝聯ニュ—ス』 1948.6.10. ↩
- 『동아일보』 1948.4.25. ↩
- 『조선일보』 1948.7.3. ↩
- 『朝連中央時報』 1948.7.30. ↩
- 『解放新聞』 1948.8.15. ↩
- 조련 해산과 제2차 학교 폐쇄에 대해서는 졸저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 제8장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