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 세계를 알게 된다면
최근 동물 르뽀에 대한 단상
이정숙 李貞淑
현대문학 연구자. 공저 『혁명과 웃음』 『르네상스인 김승옥』 등이 있음.
punky525@hanmail.net
1. 왜, 지금, 동물을?
‘르뽀’(reportage)는 긴급을 요하는 국면에서 발생하는 글쓰기이기에 주제마다 시대성을 지닌다. 르뽀는 다른 장르와 언어 사용법이 다르다는 점에서도 가치있다. 엄밀히 말해 수기나 논픽션과도 르뽀의 말하기 방식은 다르다. 한국문학사에서 ‘현장’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잠입’이 대개 그렇듯, 눈물로 쓰게 되고,1 세상에 알려야 할 진실을 캐내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노라면 존재들의 운명에 기도를 얹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르뽀의 묘미란 이 눈물이 독자에게 직접 전달된다는 데 있다. 확실히 르뽀만이 줄 수 있는 가슴 뛰는 독서경험이 존재하는 것이다. (빠롤 Parole이 아니라 랑그 Langue의 한 측면을 굴착해서) ‘보편’이 된 언어를 해체하고 새로운 담론의 세계로 언어의 한 무더기를 이끌고 가는 의지가 읽는 자의 의지와 만나 세상을 바꾸는 데 쓰이는 과정. 르뽀는 이를 통해 담론에 직접 도전하기를 꿈꾼다. 그것이 ‘동물’과 관련될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한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면 동물을 다룬 르뽀의 화자들은 내면을 직접 훼손당한 체험의 주체로서 비극을 직면한다는 점이다. ‘피로 물든 스페인’2으로 떠나는 쌩떽쥐뻬리(A. Saint-Exupéry)나 1980년 광주 거리의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와는 다른 의미에서 ‘언어도단’의 세계로 진입한 이들은 예기치 않은 ‘군집’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왜 동물일까? 지금까지 동물이 르뽀의 주제로 이토록 부상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 곧 우리 시대를 반영하는 징후일 수 있다는 점을 우선 상기하자.
불과 이년 전 부산에서 1978년생과 1981년생인 마필관리사 두명이 저임금과 고용불안, 다단계 착취구조, 노조탄압, 무한경쟁, 그리고 폭언과 부당한 차별 등 열악한 처우에 자결로써 항거했다. 일년 후, 두 사람의 죽음을 기린 투쟁과정을 담은 백서가 발간되었다. 촛불의 영향 때문인지 일반 시민과 정치권이 폭넓게 연대한 내용이 백서에 담겼는데,3 마필관리사가 목숨을 끊은 것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투쟁’과 ‘열사’의 정치에 기입되기 전에, 우리가 미처 그 억울함을 인지하기 전에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는 많다. 다만 부산경마공원 마필관리사들의 죽음은 비정규직 노동권 문제와 동물권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필관리사의 업무는 말을 길들이고, 훈련시키고, 관리하고, 말에게 레이스를 준비시키는 것이다. 말과의 교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비록 경주에서 말이 지면 관리사 자신이 짓밟히더라도 이들에게 말은 경주기계 이상의 존재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말은 자부심이고 말에게 그들은 친구이자 보호자였을 테니까. 그들이 결국 죽음을 선택하기 전까지 견딘 시간 속에는 가족의 빠듯한 생계에 대한 책임만큼이나 돌보는 말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자부심을 많이 가졌어요. 걔들은 말을 너무 좋아했어요. ‘나는 말이 좋아서 일합니다, 행님’ 항상 그렇게 얘기했었거든요. 걔들이. 말에 대한 사랑이 좀 많았었어요. 둘 다.”(28면)
이른바 ‘동물로의 선회’(animal turn)라는 주제가 최근 유럽과 영미 학계에서 부상하게 된 것은 황정아의 설명대로 동물이 우리 자신의 문제가 됨으로써 동물과 인간을 가르는 경계가 흐려지고 ‘보이지 않던’ 동물이 인식의 가시권에 진입했기 때문이다.4 벌거벗은 존재인 동물을 사유하는 철학적 담론이 인간의 윤리를 끊임없이 문제 삼는 데로 귀결된다는 점은 비록 학계의 ‘동물로의 선회’가 인간 중심주의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해도 현실담론과 지속적으로 통섭할 수 있는 여지와 필요를 남긴다. ‘윤리’의 심급이 실천이라 해도 이러한 실천은 결국 인식의 전회에서 비롯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한편 현실 차원에서 ‘동물로의 선회’를 가속화하는 쟁점은 공장식 사육시스템의 잔혹성 및 집단사육으로 인한 동물전염병의 확산, 해양동물의 생명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환경오염이 인간에게서 비롯하여 오롯이 인간에게로 환원되는 전지구적인 생태 위협으로 현실화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동물권(Animal Rights)의 모토는 인간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주변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자는 인간 중심주의와는 거리를 둔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종차별주의의 뿌리 깊은 편견을 키우기 때문이다. 피터 씽어(Peter Singer)는 동물학대가 인간학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동물에게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종차별주의적인 입장 표명이라고 비판한다.5 이 견지에서는 데카르트는 물론 칸트도 소환되고, 동물실험을 법적으로 규제할 것을 영국 동물학대방지협회(RSPCA)에 촉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하길 거부한 다윈조차도 종차별적 고정관념이 얼마나 공고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지목된다.6 인간의 도덕성을 동물에 대한 태도를 통해 제고시키는 데 기여한 탁월한 이론가 피터 씽어가 동물의 ‘쾌고감수능력’을 주창한 이래, 동물행동학에서 축적된 연구성과들은 동물권 연구의 심화로 이어지는 추세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적 관점의 진전 역시 반려동물에 대해서는 친연적으로 작동할 수 있으나 동물산업의 자본주의적 현실과는 어마어마한 괴리가 있다.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축산 단지에서 비롯되어 근대 세계를 해치는 악은” “탐욕, 오염, 개발을 동반”했으며 이 ‘차가운 악’(cold evil)은 “먼 곳에서부터 영향을 미쳐오고, 기술과 제도의 허울 속 깊은 곳에 모습을 숨기고 있으며, 그로 인한 제도적 결과는 때로 쉽게 사라지지 않거나 전혀 우연한 관계라고 의심되지 않는 가해자나 피해자들로부터 야기된다”고 썼다. 더구나 “이런 악은 개인적인 특성이 없으므로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다.”7 육식을 부추기는 광고에 투항하는 행위는 모두 이 ‘차가운 악’에 연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드러난 일부 수의대의 비윤리적 동물 관리와 실험에서 보듯, ‘뜨거운 악’조차 점차 집단화·구조화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8 이 사례는 ‘뜨거운 악’의 실체가 ‘차가운 악’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드러내는 동시에 윤리적이고 정동적인 형이상학적 사유의 중심에 동물이 있음에도 왜 그것들이 교육제도의 진정한 기준이 되지 못하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이 두개의 악을 조장하는 실체는 무엇이고 누가 여기 가담하고 있는가. 대다수는 이러한 일에 무지하다. 지금 그들이 상상조차 못할 사실들을 담은 르뽀는,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것이 결국 계란, 닭, 돼지, 소, 개의 생명에 대한 문제라면, 아니 계란프라이, 치킨, 삼겹살, 소고기, 보신탕에 대한 완전한 ‘사실’이라면.
2. 생명정치와 생태정치가 교차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
‘동물 홀로코스트’라는 표현은 인간종으로 취급받지 못한 유대인 학살의 참상에서 착안하여 충격요법을 꾀하고 등장했겠지만, 이 표현에 대한 윤리적 논박도 존재하는 모양이다.9 다만 현상적인 차원에서 현재는 분명 인간종이 아닌 ‘생명’을 무차별적으로 잔혹하게 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종’이 아닌 동물을 더는 ‘생명’으로 감각하지 않는 지점까지 도덕성의 임계를 옮긴 21세기 육식자본주의의 본질을 보여준다. 푸꼬의 감옥 묘사에서 비롯한 생명정치적 사유가 긍정의 생명정치가 아니라 ‘죽음의 정치’(thanatopolitics)가 되어버렸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듯,10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격적인 지배를 합리화하는 데 필요한 논리를 제공해온”11 휴머니즘의 회색빛 지적 유희로부터 뼈아픈 반성을 딛고 싱싱한 방향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문선희의 『묻다: 전염병에 의한 동물 살처분 매몰지에 대한 기록』(책공장더불어 2019)은 우리가 처한 절박한 현실을 알려준다.
‘생태’라는 용어가 의미하듯, 소위 ‘밀접하게 연관된 생명들’이라는 관점에서 『묻다』는 동물에 대한 사유가 이 왜 환경에 대한 최적의 사유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묻다』는 구제역과 조류독감 같은 전염병으로 살처분당한 동물사체의 매립지를 추적한 르뽀 사진집이다. 저자는 매립지가 법적으로 사용 가능한 땅으로 허가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그중 한곳을 찾아간다. 매립한 지 3년이 지났다는 땅 위로 하얗게 곰팡이가 피고 땅을 밟으면 여전히 물컹거리는데도 매립지를 덮은 비닐 아래로 봄기운을 알아채고 올라온 초록 싹을 발견했을 때는 자연의 회복력에 반갑기도 했지만, 며칠 안 가 초록색 식물들이 모두 검게 타죽은 것을 발견하고 그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더구나 썩은 토양 주변에서 농사지은 작물이 곧 유통된다는 사실은 이전에는 상상해보지 못한 실체적 두려움이었다. 이때부터 2년간 매립지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저자는 일부 매립지 근처에 생수공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충청도와 강원도에 각각 1곳씩 있고, 경기도에 취수원을 둔 생수업체 14군데 중 8곳이 구제역 매몰지와 같은 마을에 있을뿐더러 그중 2개 업체는 공장과 매몰지가 불과 몇백 미터 거리에 불과했다.
엄밀히 말해 채식도 동물과의 순환 속에서 이루어진다. 동물의 분뇨가 비료로 쓰이던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해도 땅속 미생물과의 순환 속에서 식물이 생장하기 때문이다. 마시는 물도 다르지 않다. 지리산처럼 사나흘이 걸려야 종주할 수 있는 산에 들어가본 사람은 경험했겠지만 식수를 구할 수 있는 물줄기 앞에서 인간이 생태의 작은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생태공원’ 내에서는 설거지가 금지되어 있고, 종주할 때까지 화학용품을 사용해서 씻을 수 없다. 단 며칠간의 ‘고행’으로도 자연 속에 더불어 사는 방식이 얼마나 소중하면서도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우물물은 소중히 여기면서 냇가에 함부로 양잿물을 풀었던 예전의 방식이 옳았던 것만도 아님을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생태적 양식으로 일상을 급전환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생명지속적 발전’을 사유한다는 것은 ‘생명’ 자체를 중심에 두는 생명사상인 동시에 생태적 전환을 위해서 물질생활의 지속적인 요구에 부응할 개발도 필요한 ‘적응과 극복’의 방법론을 요한다.12 생태는 동물과 식물이 어우러진 생명과 연관된다. 전기를 활용해 작동되는 ‘청계천’을 도시‘환경’이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생태’라고 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생태적 전환에 온전히 동조하면서도 에너지전환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다시 근대 과학기술의 활용이라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과학자의 고뇌13가 새삼 참조가 된다.
『묻다』의 성과는 무엇보다, 산 채로 동물을 매립하는 방식의 잔혹함 이전에, 살처분이 얼마나 과학적 지식과 무관한가를 조목조목 밝힌 점에 있다. “격리 후 치료가 아닌 격리 후 매몰”(57면)이라는, 행정당국의 근거 없는 처분에 아연해하는 화자의 반문은 그 결정의 근거를 탐문하게 만든다. 생명과 생태에 대한 제대로 된 고민도 없이 축산물 수출에 유리한 ‘청정국 지위’라는 경제적인 이득만 보고 내려진 이 근시안적인 결정은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우리가 사는 ‘시스템’의 원리를 반추하게 한다.
『묻다』의 사진들은 그 매몰지에 묻힌 동물의 총 숫자를 제목 대신 달고 있다. 죽는 줄도 모르고 난생처음 건강한 흙을 밟고 잠시 기뻐하기도 했다는 돼지들의 숫자는 생명이 지닌 타고난 특성을 외면한 생명정치의 메커니즘이 폭력의 메타포에 지나지 않음을 밝혀준다. 돼지는 체온조절을 위해서 기본적으로 흙목욕이 필요한데, 평생 그런 즐거움을 누린 적 없이 인간의 먹거리가 되기 위해 짧은 기간 좁은 축사에 갇혀 지내다가 겨우 흙을 밟기 무섭게 생매장당한 것이다. 닭과 오리, 돼지 등 죽은 동물의 숫자에 겹쳐지는 얼룩덜룩한 흙더미는 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과연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감내할 수 있을지 자문하게 만든다.
“살殺(죽일 살)+처분處分(행정·사법 관청이 해당 법규를 적용하는 행위)”(174면) “기묘한 단어였다. 의미가 쉽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엄중한 행정절차라는 뉘앙스만은 분명하게 전달된다. 누군가는 이런 부분까지 숙고하고 있는 것일까?”(57면, 강조는 인용자) 이 질문에서 시작한 발걸음이었을 것이다. 『묻다』는 사진과 그에 관한 기록을 담은 얇은 분량의 르뽀집이지만 표지를 여는 순간 만만치 않은 문제의식과 무게감으로 동물에 대한 죄의식을 갚는 씻김굿에 참여하는 독서경험을 준다. 매몰작업의 ‘가담자’들이 『묻다』의 사진전을 방문해 고통을 털어놓고 눈물을 흘리며 때로 도망치듯 떠나는 장면들도 매몰지 서사의 한 부분을 감당한다. 사진전시장까지 이어지는 서사는 내레이터의 육성이 오롯한 다큐멘터리의 말미에 필적한다.
3. 누가, 여기, 왜, 어떻게 가담하고 있는가?
한승태의 『고기로 태어나서』(시대의창 2018)는 ‘노동에세이’라는 명명이 붙은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농장’동물이 취급되는 방식을 본격 고발하는 책이라기보다는 ‘농장’업무를 통한 관찰기에 가깝다. 덕분에 이 르뽀는 ‘평범한’ 공장식 축산농가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았다는 가치가 있다.
『묻다』가 ‘생명’의 본질에 대한 시선으로 희생된 동물들의 죽음을 기록했다면, 『고기로 태어나서』는 상품으로 태어나 식품으로 죽는 동물들의 존재방식에 대해서 다룬다. 작가가 충청도, 전라도, 경기도 일대에서 각각 닭, 돼지, 개를 사육하는 ‘농장’에 피고용인으로 취직하여 작성한 이 기록들은 농장명을 각 장의 제목으로 사용해 동물들이 태어날 때부터 고기의 ‘부위’와 목적에 맞춘 상품형태로 분류되어 길러진다는 점을 드러낸다. ‘산란계 농장’ ‘부화장’ ‘육계농장’(이상 ‘닭고기의 경우’), ‘종돈장’ ‘자돈농장’ ‘비육농장’(이상 ‘돼지고기의 경우’), ‘개농장 1’ ‘개농장 2’(이상 ‘개고기의 경우’) 등. 각각 장과 절의 제목인 이 용어들은 동물을 르뽀로 다루면서 비로소 드러나게 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비속어사전 없이는 읽기 어려운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현암사 1980)14이 대표적이거니와 1970년대 하층민을 다룬 르뽀와 논픽션들이 도시빈민의 생활전선과 공장, 탄광촌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을 문학장에 주입한 사실을 상기하면, 한승태가 집단사육환경에서만 통용되는 ‘못난이’나 ‘쩔뚝이’(상품가치가 없이 작거나 다친 병아리나 닭), ‘도태시키다’(죽이다), ‘에땅’(다른 축사로 돼지를 이동시키는 것), ‘스톨’(정액 주입과 출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모돈이 몸을 움직일 수 없도록 설계된 철제 케이지) 같은 언어들에 기민하게 주목한 점과 이 단어들을 명령어로 행해지는 작업을 순차적으로 상세하게 기록한 점도 그에 못지않게 우리의 인식을 확장한 성과이다.
‘닭, 돼지, 개와 인간의 경계에서 기록하다’라는 부제에 작가의 자의식이 반영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본주의의 생명권력(biopower)이 동물을 생명과 기계 사이에 위치시키고 생산품으로 만들어내는 행태는 ‘경계’의 사유와 직결해볼 수 있는 영역이다. 중국, 태국, 베트남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들 농장의 노동을 담당하는 주요 주체라는 점은 생명권력이 잔인하게 작동하는 ‘저 낮은 곳’에서 간신히 버티는 노동자 또한 도구적으로 쓰이면서 경계적인 위치를 점하는 위태로운 존재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저자는 글을 쓰기 위해 의도적으로 피고용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동물권’이나 생명권을 고려한 입장에 선 사람이라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작업에 짧게라도 종사했다는 점에서 경이로운 동시에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양가적인 태도도 보인다. 사실 독자 입장에서는 그 덕분에 집단사육 환경 전반의 충격적인 실태를 알게 되(었으)며 동물권에 대한 개인의 반성을 촉발하기에 넘칠 만큼 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물건은 그렇게 다루는 거다”라는 고용주의 지시에 따라 화자 자신이 ‘생명’을 처분하는 일에 가담한 이후에도 모종의 인식적 전환에 대한 분명한 지평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작가는 그 어떤 고난의 상황에서도 유머러스한 발설을 멈추지 않는 서술적 특징을 지녔는데, 반어적인 문체만큼이나 쉽사리 감상에 빠지지 않고 세계와 거리를 두겠다는 자세가 나름대로 윤리적인 사유의 장을 독자에게 제공하는 점도 있지만 작가 스스로 인간성이 파괴되는 경험을 했음에도 ‘생명’의 처리방식들에 대해 유보적인 점은 안타깝다. “동물들과 마주하며 지냈던 시간은 나를 약자의 고통에 민감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 반대로 나는 무감각해졌다. 지난 몇 년간 내 삶을 관통한 가장 일관된 정서는 분명 ‘무감각함’일 것이다”(460면)라는 고백이 솔직하게 느껴지는 만큼 동물을 사유하는 사람은 가학적인 노동환경까지 고민해야 한다는 필요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고기로 태어나서’라는 제목은 가학적인 체험 끝에, 그렇게 다루어지는 ‘생명’들을 향해 보내는 송사와 같은 말이다. 이 생명들이 다루어지는 방식은 모두 가학적 엽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무엇보다 가장 엽기적인 것은 이들을 죽이는 방식이다. 정읍의 육계농장에서 사장이 작가에게 명령한 가장 중요한 일도 병아리 죽이기이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놈들은 죽이라는 얘기였는데 내가 머뭇거리자 그가 직접 병아리 다리를 잡고 바닥에 패대기쳤다.”(98면) 심지어 산란계 수평아리들에게 무차별한 매몰 처분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마구잡이로 바구니를 쌓아 분류하기 때문에 “바구니의 층과 층 사이에 끼어 눈이나 내장이 튀어나온 채 죽어 있는 병아리들이 즐비”하고 “살아남은 병아리들은 컨테이너 바닥에서 계속 삐약거리며 돌아다”니는데, “그 위로 계속해서 병아리들을 쏟아”부어서 살처분한다.(89면) 가장 극단의 가학은 개에게 가해지는데, 철제 사다리 꼭대기에 도사견의 목을 걸고 줄을 당겨 산 채로 잔인하게 죽이거나 통상 전기봉 재갈을 물려 죽인다. 죽을 것을 알고 공포에 잠식된 개에 대한 묘사가 그 가학성을 더 부각시킨다.
이 책에도 소개되었듯 식육 동물은 죽음 이전에 이미 공간의 크기와 모양뿐만 아니라 빛과 물, 번식방식까지 인간의 목적에 맞게 도구적으로 조작된 환경에서 살아간다. 성장촉진제와 항생제 주입은 예외 없는 일상이며 전염병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동물의 본성을 거스르는 조치가 이루어진다. 어린 닭의 부리 끝은 제거되며, 새끼 돼지는 생후 일주일이 지나면 이빨이 잘리고 수컷의 경우 거세를 당한다. “수컷은 뒷다리를 옆구리에 붙도록 바싹 당겨 잡으면 항문 아래가 볼록 튀어나온다. 작업을 쉽게 하려면 고환이 선명하게 튀어나오도록 손에 힘을 줘야 하는데 이때 힘 조절을 못 하면 거세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 팀장은 튀어나온 부위를 11자로 자른 다음 고환을 잡아 뜯어냈다. (…) 돼지의 비명 소리가 최고조에 이를 때는 바로 이 순간이었다.”(204~205면) 이 과정이 마취도 없이 행해진다는 점은 어떤 형용사로도 온전히 비판할 수 없을 것 같다.
생육환경이 가장 가혹한 곳은 비육계농장인데 닭을 살찌우는 방식 때문이다. 작은 상자에 서너마리의 닭을 머리만 내밀도록 해서 목표중량까지 살려둔다. 모돈은 스톨에 묶여 종돈의 정액을 주사로 주입받고 새끼 낳는 기계로 3년 정도 산다. 이런 방식으로 ‘키워서’ ‘농장’이라는 명칭의 시설을 유지하는 ‘사장’들은 사룟값 때문에 파산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처분에 매달리고, 그 자신 역시 노예적인 상황에서 살아가는 모순의 구조 속에 처한다.
그런데 작가는 쾌고감수능력이 엄연한 동물을 통각이 없는 물건처럼 다루면서, 분뇨로 인한 오염수가 논밭과 식수로 방류되는 것을 알고도 “개 키우는 게 다 그런 거지 뭐”라고 눈감아주는 개농장 이웃들의 태도를 온정으로 이해한다. “내가 뭐라고 그게 더럽고 끔찍하다고 난리란 말인가? 나는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해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을 이론서 한 귀퉁이에서나 찾을 수 있을 법한 기준을 가지고 폄하하고 있는 걸까? ‘다 그런 거지’라는 말 속엔 내 비난보다 훨씬 더 거대한 존재에게 호소하는 울림이 있었다. 나는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355면) 그러나 생계라는 것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닌 이상 이 대목은, 르뽀라는 장르가 숙명적으로 천착해야 할 ‘리얼리즘’에 대한 작가의 분명한 패배로 볼 수 있다.
작가도 썼듯 ‘좋은 사람’도 동물을 학대한다. “그것은 대부분 동물은 물건이라는 믿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263면) 더구나 개농장은 ‘짬’이라고 하는 음식물쓰레기를 수거해서 이윤을 남기는 구조 속에서 운영된다. 『고기로 태어나서』에서는 개농장을 중심으로 ‘짬’이 엄연한 경제적 네트워크를 이루고 거래된다는 점이 중점적으로 부각된다. 말하자면 이들은 개농장의 개들을 ‘짬’의 하수처리장15으로 활용하여 이득을 남기는 구조에 기생한다. 그러나 상하기 일쑤인 음식물쓰레기에 효소를 탄 것을 평생 먹는 개들의 처지는 그 구조 어디에서도 고려되지 않는다. 이런 구체적인 사실들을 상세하게 안다고 해서 모두가 변하지는 않겠지만, “맛있어서 먹은 것이 자발적인 선택인가”16에 대해서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유에 갇히기 전에 현실 담론의 주체로서 우리 자신을 겹쳐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4. 비질: 담론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도나 해러웨이의 「반려종 선언」만큼 다른 종과의 사랑이 띠는 구체적인 실상을 정확히 규정한 경우는 흔치 않다. 그가 말하는 반려종 간의 관계는 ‘실뜨개’로 표상된다. 만들어가기의 형상이되, 종의 경계를 넘어 서로 헌신적으로 사랑함으로써 두 세계에 속한 타자성이 요구하는 바를 민감하게 배려하면서 공진화(coevolution)하는 사랑 나누기이다. “나는 종 안팎에서 맺어진 모든 윤리적 관계는 관계-속의-타자성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는 가늘고 섬세하며 질긴 실로 뜨개질한 편직물이라고 믿는다”17라는 표현에서 보듯 이 사랑은 종차별을 목표로 삼는 데서 나왔다기보다는 동물과의 사랑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기쁨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자연스럽게 고양된 관계의 미학이다. 해러웨이의 「반려종 선언」에서 목표물이라고 할 만한 것을 굳이 들자면 종차별에 기반한 관습을 문제 삼는 것, 가령 푸꼬가 말한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생명권력을 감옥이 아니라 『개집의 탄생』으로 말하겠다는 데 있다.
‘개는 개답게 키워야 해’ 혹은 ‘개는 원래 그렇게 키우는 거야’라는 생각이 유기견과 개식용 문제를 낳은 근본적인 씨앗이라는 점은, 개와 관련한 네트워크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번식장, 보호소, 개농장, 도살장 그리고 개식용문화 및 축산법과 축산물 위생관리법 등을 두루 통찰한 다음 하재영이 내린 결론이다. 『묻다』와 『고기로 태어나서』가 관찰과 체험의 기록이라면 하재영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은 개와 관련한 장소, 행태, 방식, 입장들을 인터뷰하고 탐사하여 쓴 기록물이다.
흔히들 개농장이 사료관리법과 가축분뇨법을 어긴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지만 개를 사육하고 죽여서 먹는 게 합법인지 불법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개식용 문제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개가 축산법에는 포함되면서 축산물 위생관리법에는 포함되지 않는 동물이라는 점”(하재영, 앞의 책 199면) 때문이다. 개농장은 개를 소유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 개는 축산물 위생관리법의 대상이 아니므로 함부로 도살할 수는 없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도살을 불법으로 보기도 어렵다. 이렇게 모호한 법규정이 딜레마를 낳는 우선 요인이지만 이 애매함을 틈타 개도살과 식용업자들 간의 이윤을 둘러싼 거래가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동물권 운동단체의 활동이 특히 개농장과의 투쟁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동물권 운동단체는 도살장을 급습하여 도살에 사용한 불법적인 도구와 도살장면을 증거물로 확보함으로써 이들을 합법적으로 막을 수 있기 때문에 비질(vigil)을 감행한다. 비질의 원뜻은 ‘불침번’인데, 하재영의 르뽀를 읽기 한달 전 나는 일명 ‘하남 개지옥’이라는 야산에서 불침번을 선 적이 있다. 곧 신축 아파트가 들어설 야산의 개농장을 해소하여 근처에 새로 임시보호소를 만들었기 때문에 구조한 개들을 입양시키는 일을 여름이 끝나기 전에 마무리해야 했다. 건설업체가 고용해준, 임시보호소를 관리하는 용역직원이 퇴근하고 나면 야밤을 틈타 개농장주들이 개들을 빼돌리기 위해 나타날까봐 봉사자들이 여름 동안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섰다.
보호소 불침번 정도가 아니라 개를 구출하기 위해 도살장에 뛰어들 때는 칼이나 도끼 같은 도구를 들고 작업 중인 인부들과 어떤 충돌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언론사를 동행하는 편이 안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메라의 사각지대에서 몸싸움이 벌어져 크게 다치기도 하지만, 폭력을 문제 삼을 도리는 없다. 형법상 불법침입죄가 폭행죄보다 무겁기 때문에 자기가 알아서 치료받아야 한다. 여름이 끝나고, 내내 선뜻 펼치지 못했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긴장된 마음으로 읽었을 때 작은 기쁨이 있었다. 작가가 소리로 듣기만 했다는 그 무시무시한 현장의 영상을 도살장 급습을 통해 여럿 확보한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생태를 무시하고 환경을 인간만을 위한 방공호로 지을 수 없다는 확인 끝에 우리가 결국 도달하게 되는 곳은 영화 「옥자」(봉준호 연출, 2017)가 표상한 미란다 코퍼레이션의 공장식 축산이 리얼한 현실이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다. 사실 「옥자」에 대한 평가는 반려동물의 경험 유무에 따라 나뉜다는 특징이 있다. 경험 축의 두 끝은 분명한 정동적 차이를 보인다. 이 점은 육식과 채식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18 아무튼 인간인 미자와 ‘슈퍼돼지’인 옥자가 나누는 반려종 간의 감정은 영화의 모든 지점에서 과장 없는 실제라는 점만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이 지적하듯, 살아서 도축장을 빠져나가는 개는 없다. “우리는 죽은 것만 팔거든”이라는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 분)의 말은 죽어서만 자본의 가치로 환산되는 육식자본주의의 심급을 적시한다. 이들은 미자와의 거래에서 “우린 열심히 일하는 사업가들이야”라고 말하지만, 현재 미국을 위시해서 세계가 표방하는 살육 가공공장의 실태는 그 대사에서 반어적으로 드러난다. 요컨대 “동물을 착취하는 방식은 전 세계적으로 표준화되어 있다.”(하재영, 앞의 책 211면) 그리고 이민자와 하층계급 노동자가 이 일을 담당한다는 점도 유사하다. 이러한 ‘전형성’에 힘입어, 기업설립자인 미란도의 아버지가 사이코패스라는 점은 그가 월남전 살상무기 제조자였다는 점을 통해서도 메타포를 형성한다. 가부장제 폭력의 반대편에 동물권과 페미니즘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연관하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의 탁월한 점은 ‘언어’에 대한 통찰력이다. 보호소, 자연사, 안락사, 입양과 같은 단어들이 현실에서는 언어가 구축하는 것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이 말들이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고통은 은폐한다”는 점을 아프게 드러낸다. 이 때문에 “언어가 누락한 현실을 발견하고 이미지가 조장한 허상을 거부하는 일은 중요하다.”(144면) 동시에 작가가 마주하는 물음은 언어와 현실이 동떨어져 있을 때의 난제이다. 하재영이 맞닥뜨린 것처럼 이 언어들이 우리의 “현실감각을 재고하게 만드는”19 데 기여한다면 재현의 관건은 무엇일 수 있을까. ‘율’의 구속력을 넘어 도와 덕에 이르도록 “독자에게 절실한 현실을 재현하느냐 여부가 성패의 한 관건임을 말해준다.”(같은 글 116면) 이 고민은 개에 관한 르뽀 글쓰기만이 처한 난국은 아닌 듯하다. “사실주의 문제가 계속 무시 못할 관심사로 남는 것은 그것이 근대인이라면 누구나 마주치는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에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같은 글 122면)
그렇다면 우리에게 대안이 있는가? 하재영은 공장식 축산농법을 당장 바꾸기 어렵지만 동물복지를 최대한 고려한 생산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제시한다. 그리고 “개식용 논쟁과 동물권 운동에 덧씌워진, 한국과 서구의 문화 대립이라는 프레임을 우리 스스로 깨뜨려야 한다”(233면)고 주장한다. “인간, 동물, 환경의 공존을 모색하는 윤리적 보편주의”(234면)를 취한다면 비록 육식을 당장 끊지 않더라도 동물권의 편에서 누구나 의견을 보탤 수 있다.
한편 피터 씽어가 제시하는 대안은 채식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만이 지니는 독자성이 있다면, 채식주의의 불매운동적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채식주의는 다른 대부분의 불매운동이나 항의보다 사실상 훨씬 강력한 토대 위에 서 있”20으며, 즉각적으로 동물들의 고통과 도축 감소에 이바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해방운동(Animal Liberation Movement)은 도덕성과 자신의 이익이 부딪힐 때 이타성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지 입증하는 일이라는 것이다.21
이 세권의 르뽀가 동물권의 현실을 알리는 데 저마다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한 만큼, 동물실험에 대한 수의학도와 관련자들의 르뽀가 담론의 틈을 채워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세권의 책이 다소간 암울하고 묵시록적인 여지를 남기고 있기 때문인지, 이 부조리한 현실을 뚫고 우리가 타락한 세계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게 된다. 동물운동가 헨리 스피라(Henry Spira)가 1970년대 영국에서 해냈던 것과 같은 ‘승리의 서사’가 앞으로 쏟아져 나오기를 기대한다. 하재영이 어디까지나 개들의 전달자로 남기를 바랐던 것처럼 나도 그 배턴을 이어받은 사람의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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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다룰 세편의 르뽀에는 모두 눈물이 등장하며, 독자 역시 울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곰치는 새만금갯벌, 북한산, 강원도 탄광촌 사북을 취재한 르뽀집 서문에서 “총 네 번의 취재 현장에서 나는 언제나 울어야 했다. 태백석탄박물관의 어두운 실내에서 내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었던 것을 특히 잊지 못하겠다. 내가 작가라는 자의식을, 소설을 쓸 때보다 네 번의 취재에서 더 격렬하게 만날 수 있었다. 글의 성취도를 떠나 순수한 열성과 집념의 면에서 오직 작가만이, 아니 나만이 쓸 수 있었던 글이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눈물, 아니 울음이 나를 그렇게 믿게 한다”고 썼다. 김곰치 『발바닥 내 발바닥』, 녹색평론사 2005, 4면. ↩
- 쌩떽쥐뻬리가 『랭트랑지장』(L’Intransigeant)지의 취재기자로 스페인내전에 급파되어 쓴 르뽀 제목에서 따옴. ↩
- 고인들의 부산 경마장 동료 4명에서 시작된 투쟁이 커진 데는 시민들과의 감동적인 연대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더 감동받았던 게 뭐냐면, 연대투쟁이라는 거. 제일 힘이 되었던 부분이 그거예요.” “우리 일 때문에 사람들이 왔어요.” “저희는 처음 해보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뒤에서 그냥 멍하니 서 있는데.” “연대 오신 분들이 아주머니, 나이 드신 분도 그러고.” “유모차 끌고.” 고 박경근·이현준 열사 투쟁 백서발간위원회 『나는 말이 좋아서 일합니다』, 빨간집 2018. 직접인용은 38면. ↩
- 황정아 「동물과 인간의 ‘(부)적절한’ 경계: 아감벤과 데리다의 동물담론을 중심으로」, 『안과밖』 2017년 하반기 80면 참조. ↩
- 피터 싱어 『동물 해방』, 김성한 옮김, 연암서가 2012, 410면. 한편 동물학대의 경로를 인간에 대한 폭력심리와 연관지어 설명하는 ‘링크’ 이론은 여성, 아동을 주대상으로 하는 가정폭력이 동물학대와 밀접하다는 연구결과를 제시한다. 이는 인간 중심주의적으로 동물을 사유하는 것과는 별개로, 동물에 대한 태도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도덕성을 제고하는 방편으로서 일정한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클리프턴 P. 플린 『동물학대의 사회학: 동물학대 연구는 왜 중요한가?』, 조중헌 옮김, 책공장더불어 2018 참조. ↩
- 피터 싱어, 앞의 책 358면. ↩
- 제러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 신현승 옮김, 시공사 2002, 342면. ↩
- 「“강제 교배로 낳은 강아지는 학생들 몫이었다”」, 한겨레 2019.8.21; 「동물단체 “서울대 수의대, 동물실험에 식용견 사용 의혹”」, 한겨레 2017.11.9. ↩
- ‘동물 홀로코스트’는 존 쿳시 『동물로 산다는 것』(전세재 옮김, 평사리 2006)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입을 빌려 제시된 개념으로, 집단농장의 사육과 도살 방식을 나치의 유대인학살과 동일시하는 태도를 말한다. 미국의 생물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언어학자이자 유명 반려동물 훈련사인 비키 헌(Vicki Hearne)의 견해를 빌려 이를 비판하는데, 나치의 유대인학살을 동물-산업 복합체의 도살과 동일시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으며, ‘차이의 감각’ 없이 잔혹함의 문제를 언어화한다는 면에서도 구체성이 부족한 척도라는 것이다. 동물문제를 사유할 때 언어적 차원에 이르는 다양한 관점들을 구분해서 접근해야만 담론의 세심함이 확보된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황희선 옮김, 책세상 2019, 179면 참고. ↩
- 도나 해러웨이, 앞의 책 279면. ↩
- 김종철 『대지(大地)의 상상력』, 녹색평론사 2019, 182면. ↩
- 백낙청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 이남주 엮음, 『이중과제론』, 창비 2009. ↩
- 이필렬 「다시 현장에서 시작하자: 이계삼 인터뷰」, 『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 24면. ↩
- 이 책에서 이동철로 등장하는 실제 인물 이철용은 자기 이름으로 동명의 책(새움 2015)을 펴내기도 했다. ↩
- 애초에 “‘하수처리장’이라는 단어는 반려견 훈련사 강형욱이 2017년 7월에 진행한 식용견 구조를 위한 스토리펀딩에서 사용한 표현이다.”(하재영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창비 2018, 312면, 각주 47번). 하재영은 버려진 개들이 모두 도살장(개농장)에서 보신탕집으로 소비되는 흐름을 설명하면서 이 단어를 ‘재사용’했다. 나는 여기서 다시 음식물쓰레기를 친환경적이라는 명목으로 개에게 먹이는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다. ↩
- 황주영·안백련 『고기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들녘 2019, 162면. ↩
- 도나 해러웨이, 앞의 책 178면. ↩
- “동물에 대한 연민, 생명에 대한 외경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동물이 인간과 유사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의 고기를 적게 먹거나 아예 먹지 말자는 주장에 특별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몸소 실천하는 일에 동참하기까지 한다.” 이필렬 「동물의 권리에 대하여」, 『환경과생명』 2002.9, 89면. ↩
- 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 그리고 문학의 도와 덕」, 『창작과비평』 2015년 겨울호 121면. ↩
- 피터 싱어, 앞의 책 285면. ↩
- 같은 책 417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