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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상 『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 민음사 2019
‘읽는’ 이상과 ‘보는’ 이상
신형철 申亨澈
문학평론가 poetica7@hanmail.net
이상(李箱, 1910~37)은 살아 있는 동안 시집을 내지 못했다. 사후 출간된 선집·전집에서 작품 선택과 배열은 당연히 엮은이들이 했다. 나는 그가 죽기 직전에라도 직접 시집을 만들 수 있었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까 자주 상상했고 언젠가는 ‘그 시집’에 가까운 것을 대신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나대로의 원칙 중 하나는 초기 일본어 시들을 빼야 한다는 것이다. 건축잡지의 ‘만필(漫筆)’ 코너에 게재되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점, 그 작품들의 아이디어가 이후 발표된 한글 시에서 재활용됐다는 점 등이 그렇게 믿게 했다. 또 하나의 원칙은 그가 손수 최종 버전을 확정한 발표작들만을 모으고 (후대의 편찬자들이 각자의 자의적 판단으로 시전집에 넣은) 산문과 기타 유고들은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독자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이상이 직접 발표한 한글 시에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언어 경제가 있는데, 그렇게 엄격한 그가 미완의 방만한 글들을 다 수습했을 것 같지는 않아서다. 이상 시의 정수(精髓)는 결국 ‘오감도’(15편), ‘역단’(5편), ‘위독’(12편) 등의 연작시에 있다고 생각한다. 오직 정수만의 마력이 100면이 안 되는 얇은 시집으로 당당히 입증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박상순이 엮은 『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 해석판 이상 시전집』을 보면서 바로 ‘그 시집’이 나온 것 같다고 느꼈다. ‘시전집’임에도 초기 일본어 시를 과감히 뺐고 한글 발표작 중심으로 묶었기 때문이다. 기존 이상 시전집을 펼쳤다가 「이상한 가역반응」과 「삼차각 설계도」 앞에서 좌절해 책을 덮은 적이 있는 독자들은 이제 미학적으로 충분히 세공된 1933년 이후의 한글 시들과 곧장 대면하면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50편 남짓한 작품이 수록될 이상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은 『정지용 시집』(1935) 『사슴』(1936) 『화사집』(1941) 등과 나란한 한국시사의 기념비로서 독자들에게 새삼스러운 재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 책은 100면이 아니라 400면이 훌쩍 넘는 두꺼운 책이 되었다. 박상순의 해설이 300면 분량이어서인데, 이상 연구서 한권을 새로 써서 합본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뜻밖의 놀라운 업적이다. 다만 독자 입장에서는 안 읽을 수도 다 읽을 수도 없으니 부담스럽다. 그러나 박상순의 작업이니까 읽는 편이 좋을 것이다. “시인, 화가, 건축기사, 편집자, 북디자이너 등의 경험을 가진 이상에게 거의 동일한 경험으로 대응했다.”(377면) 적임자라는 자평인데 과연 그렇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해설자는 시각적 효과를 갖도록 디자인된 이상의 어떤 시들을 분석하는 데 발군의 역량을 발휘한다. 숱한 사례 중 하나만 언급하자면 역시 「오감도: 시 제4호」에 대해서가 좋겠다. 0에서 9까지의 숫자를 어떤 규칙에 따라 나열해 사각형 판 모양으로 만들고 그것의 좌우를 뒤집어놓고는 이것이 어떤 ‘환자의 용태(容態)’를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시 말이다. 박상순은 숫자판이 조형적으로는 ‘선’과 ‘형’에 불과하며 ‘그림’이기보다는 ‘도형’ 수준임을 지적하고, 또 근래 해석들에서 주목되는 (일반적인 점의 크기보다 큰) 검은 ‘점’에 대해서도 해당 발표지면의 상용 기호이기 때문에 이상 자신의 의도가 반영된 타이포그래피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이 숫자판을 뒤집어놓은 선택은 확실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한낱 ‘도형’에 불과하던 그것이 그 순간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뒤집힌 숫자판을 다시 뒤집어 이를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독해는 이 시의 취지를 배반하는 일이자 그림을 그림으로 인정하지 않는 폭력적 해석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활자 뒤집기’는 세계 아방가르드 문헌에 전례가 없으니 ‘문학사적’이라고 할 만하다는 것이 박상순의 평가다.
이상의 어떤 시들은 읽는 시가 아니라 보는 시일 수 있음을 지적한 기존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박상순의 해설은 전거가 풍부하고 어조가 자신만만하다. 끝이 화살표로 되어 있는 선분을 그려놓고 이를 내장(內臟) 아니면 축사(畜舍)라고 주장하는 작품 「오감도: 시 제5호」를 솔리드(solid, 채움)와 보이드(void, 비움)의 개념으로 해설해나가면서 박상순은 이상 시의 시각적 요소들에 대해 이렇게 총평한다. “이것의 역할은 문자의 세계에 끼어들어 의미를 교란하고, 의미를 과장하고, ‘의미로 몸부림치다가’ 끝내 아무것도 아님을 스스로 입증하고 선언하는 흔적일 뿐이다.”(153면) 이상의 시에서 ‘읽을’ 것과 ‘볼’ 것을 구분하고 이 두 요소가 서로 밀고 당기는 현장을 음미할 줄 알아야 한다는 그의 지적은 기존 이상 연구들에서 펼쳐진 부질없는 짐작의 놀이들이 단숨에 정돈되는 듯한 해방감을 준다. 시쓰기와 북디자인을 병행하면서 체득한 간(間)매체적 통찰력의 힘일 것이다. 지난 세기 초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운동에 대한 박상순의 오랜 천착이 이상이라는 대상을 만나 폭발적으로 만개한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대목들이 이 책의 여러곳에 있다.
그러나 대개 그렇듯이 통찰은 맹목이고 장점은 단점이다. 이 책이 하지 않으려 했거나 할 수 없었던 작업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미적 대상에 접근할 때 해당 대상을 예술로 만드는 본질적 속성 X가 무엇인지를 두고 미학의 길은 재현론·표현론·형식론·미적경험론 등으로 갈린다는 것이 개론서의 기본 설정이다. 박상순의 입각점은 모더니즘 미술의 혁신에 부응하면서 탄생한 형식론에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텐데, 그렇다보니 이상 시의 재현적·표현적 속성에 대해서는 다소 무심한 편이다. “전쟁”이라는 시어가 눈길을 끄는 「오감도: 시 제12호」에 대해 그는 말한다. “전쟁이라는 단어만 크게 확대해서 한나절쯤 들여다보거나 열번이나 스무번쯤 소리 내다 보면 의미의 위치는 여전히 좌우를 오갈 것이지만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어떤 자리에 이 낱말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놓인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196~97면) 소박한 재현론에 사로잡힌 이들이 음미해야 할 예리한 지적이다. 그러나 이상의 시 쓰기가 그 자신에게 언제나 일의적 기능만을 가진 것은 아니었겠고 또 오늘날의 독자가 이상의 시에서 식민지 주체의 정체성 정치학을 읽어낼 가능성 역시 부정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오감도: 시 제14호」에는 이상의 시로서는 드물게도 ‘역사(歷史)’라는 시어가 등장한다. ‘역사라는 단어만 확대해서 한나절쯤 들여다보거나 열번이나 스무번쯤 소리 내서 읽는 일’을 하지 말라는 해설자의 계고를 내가 그새 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의 슬픈 울음소리”와 “종합된 역사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성(古城) 어딘가에서 환각을 보다 기절하고 마는 인물이 나오는 시가 아닌가. 이에 대해 “인간적인 조건이 붕괴하는 시대가 보인다”(209면)라는 논평 정도만을 허락하고 그렇게 절약된 분량을 까르띠에브레송(H. Cartier-Bresson)과 T. S. 엘리엇(Eliot)의 ‘비지속의 지속’ 기법을 설명하는 데 할애하는 해설자의 선택은 적어도 나의 것은 될 수 없다고 느낀다. 이상의 정체성에 대한 고뇌가 정제된 표현을 얻고 있는 수작 ‘역단’ 연작에 대한 논평이 대체로 짧고 건조하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눈에 띄는 현상이다. 해설자는 이상의 운명론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는 흥미로운 시 「역단: 역단」을 유기적으로 해석하는 데 별 관심이 없고, 이상의 가장 쉽고도 깊은 탄식의 언어가 담긴 「역단: 가정」의 해설 말미에 나로서는 뜻을 파악할 수조차 없는 난해한 논평을 적는다. 이것조차도 이 책의 개성이겠지만, 같은 면이 누군가에게는 이 책의 결여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김기림(1949)에서부터 시작된 이상 시집 편찬 작업은 임종국 이어령 이승훈 김주현 권영민 신범순 등에 의해 지속되고 있고, 이들 작업의 색깔을 비교하는 일은 그 자체로 연구의 주제가 된다. 정본을 확립하는 데에는 십수년 전 김주현의 꼼꼼한 원문대조 작업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신범순이 엮은 최근 전집 『이상 시 전집: 꽃 속에 꽃을 피우다』(전2권, 나녹 2017)에는 발표 당시 일어·한글 원문과 사후에 발굴된 유고까지 모두 스캔되어 수록돼 있으니 자료 집성 차원에서는 더이상 갈 곳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명분있는 작품 배열과 개성있는 주해들을 갖춘 새로운 전집은 앞으로도 계속 출간돼야 할 것인데 박상순의 작업은 왜 그런 일이 필요한지를 탁월하게 입증하는 사례다. 물론 그의 유난한 개성 덕분에 오히려 후배들이 할 일이 조금은 남아 있게 되었다면 그것조차 나쁠 것 없는 일이다.
* 부기: 「가외가전(街外街傳)」 1연이 두 단락으로 끊어져 있는 것은 원문 편집 과정에서 생긴 실수(408면)로 보이는데 해설자에게도 이것이 이상 자신의 조치라 오해되고 말았다(241면). 「역단: 가정」에서 “식구야 막아놓은 창문어디라도한구석터놓았다고”(49면)는 “터놓아다고[터놓아다오]”의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