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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야스다 고이치 『일본 ‘우익’의 현대사』, 오월의봄 2019

‘우익의 망망대해’ 속에 새롭게 도래해야 할 ‘우익’

 

 

남상욱 南相旭

인천대 일문과 교수 indimin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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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에 대한 혐오발언을 서슴지 않는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이하 재특회)을 취재한 『거리로 나온 넷우익: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보수가 되었는가』(한국어판 김현욱 옮김, 후마니타스 2013)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야스다 코오이찌(安田浩一)가 『일본 ‘우익’의 현대사: ‘극우의 공기’가 가득한 일본을 파헤치다』(이재우 옮김)로 다시 한국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거리로 나온 넷우익』에서 2010년대 한국과 중국에 대한 혐오발언을 일삼는 재특회의 행동을 기존의 우익단체들과 비교해가며 설명했다면, 이번 책에서 저자는 태평양전쟁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배경은 물론이거니와 전매특허인 인물들의 인터뷰를 곁들여 일본 우익의 존재 양태를 생생하게 설명해냈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일본 우익의 특징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지적해야 할 건 일본에서 정치집단으로서의 우익이 좌파진영과 마찬가지로 정치적·문화적 신념과 행동양태에 따라 실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왔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한편에 검게 칠한 선전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일본 제국군의 군가를 크게 틀어대면서 시민을 향해 위협과 공갈을 일삼는 제복 차림의 “행동하는 우익”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그러한 행위를 거부하고 “구도자처럼 황도의 길을 가는 대동숙 같은 ‘전통(순정) 우익’”도 존재한다.(192면) 야스꾸니신사 참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우익이 있는 반면, “너무 화려하게 아름답기에, 자기주장이 너무 심하다는 느낌”이 드는 야스꾸니의 벚꽃을 거부하고, “안개가 가볍게 일어나는 듯한 산벚꽃이야말로 보수의 모습”이라고 믿는 우익도 존재한다.(145면) 한국인과 중국인을 향해 “죽어라”라고 외치는 우익이 있는 한편, 그러한 행태를 거부하며 “동아시아 민족들의 단결과 협력으로 세계평화를 지향”하고자 하는 우익도 있다.(139면) 지자체에 끊임없이 민원을 제기하는 양복 차림의 ‘우익’도 있고, 넷에서만 활동하는 ‘가벼운 우익’(light right)도 존재한다.

현대 일본에서 우익의 형태가 다양해진 것은 일차적으로는 전전(戰前)과 전후(戰後)의 단절에 기인한다. 태평양전쟁 이전의 우익이 천황제를 긍정하면서도 천황의 이름하에 만민평등을 외치는 국가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녔다면, 태평양전쟁 이후 재편된 우익은 천황제를 옹호하기 위해 반공을 외치는 친미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이를 방조하고 활용한 미국에도 책임이 있음을 저자는 환기한다. 이렇게 재편된 전후의 우익은 “공산주의 방어에 참가하지 않는 자는 일본인이지만 일본인이 아니며, 인류이지만 인류가 아니”라거나(후꾸다 소오껜, 120면), 반공을 위해서라면 미국과도 한국과도 손을 잡아도 상관없다(아까오 빈, 128면)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요컨대 ‘반공’이야말로 전전과는 달리 전후 일본 우익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이며, 이러한 이념하에 폭력적 행위도 불사했던 것이다.

한편 저자에 따르면 ‘일본회의’로 대표되는 현재의 우익은, ‘반미’를 중요한 사상적 지표로 삼아 발전해온 좌파진영에 대한 반동(backlash)이자 학습효과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예컨대 1960년대 말에 출현해 훗날 일본회의로 발전하게 되는 ‘일본청년회의’에 속한 우시지마 도꾸따로오(牛嶋徳太朗)는 “신좌익 무리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202면)라고 고백하는데, 실제로 일본회의는 기존 우익의 폭력을 통한 협박이라는 방식을 버리고 “좌익운동의 특기였던 풀뿌리 운동의 노하우를 자신들의 운동에 도입”(260면)해, “진정과 청원을 반복”(287면)함으로써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킨다. 원호법제화와 국기국가법 제정운동, 외국인 지방 참정권 반대운동, 교육기본법 개정운동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자신들을 지원하는 국회의원 조직마저 있을 정도로 막강한 일본회의가 실질적으로 현대 일본 정계를 지배하고 있음은 공공연한 사실로 여겨질 정도인데,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회의가 보여준 것은 ‘대중의 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회의가 일본 사회를 지배한다”는 견해는 틀렸다. 그들은 ‘지배’가 목적이 아니라, 공기를 바꾸는 데 힘을 쏟아왔다. 조그마한 부채로라도 몇 천, 몇 만 번 흔들어 바람을 일으킨다면, 큰 나무도 흔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그들은 계속 선동한다. 큰 나무는 흔들리고 있다. (287~88면)

 

위의 말은 일본회의의 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힘이 얼마나 큰지를 강조하고 있다고 해석해야 한다. 실질적인 지배권력을 쟁취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막상 쟁취하더라도 지속기간이 짧을 수 있음을 고려한다면, 지배권력의 안팎에서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사회를 향해 동조 압력을 꾸준히 넣는 것이 오히려 훨씬 효과적이며 무서운 정치적 행위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우파 계열의 교과서 채택 등 특히 교육 분야에서 지속적인 동조 압력을 넣는 일본회의야말로 NGO 등을 통해 국민국가의 폭력성을 끊임없이 고발해온 전후 일본의 리버럴 좌파들의 행동양식을 고스란히 답습한다는 점에서, 더욱 단단하고 집요한 현대 일본 우익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저자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혐오발언으로 사회적 관심을 받은 재특회의 힘이 최근 들어 약해진 이유로서, “재특회가 없어도 될 만큼 사회에 이미 ‘극우 공기’가 가득 찼”(313면)음을 지적하는데, 여기서 ‘극우 공기’란 블로그에 외국인에 대해 혐오발언을 한 신사(神社)의 궁사(宮司)가 쓴 책에 수상이 추천사를 써줘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사회 분위기를 뜻한다.

이러한 현대 일본 우익의 존재 양식은 언뜻 한국의 그것과 달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한 부분에서 유사하다. 무엇보다도 토착적인 이념에 충실하기보다는 국기 옆에 성조기를 나란히 걸어놓을 정도로 친미·반공을 고수한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냉전이 붕괴된 지 수십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냉전의 시간을 사는 감각은 양측이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무서운 점은, 스스로의 표현 양식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인터넷 안에 스스로의 게시판을 만들어 온갖 혐오발언을 쏟아내고, 어떤 심의도 거치지 않는 유튜브 방송을 통해 가짜뉴스를 발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에게 인터넷이라는 뉴미디어를 선점당했지만, 이에 대한 정치적 효과를 뒤늦게 깨달은 보수들의 열띤 참여로 한국의 인터넷 언어 환경 역시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익의 망망대해’라고 형용되는 이러한 사회의 극우화에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샹딸 무페(Chantal Mouffe)처럼 우파 포퓰리즘에 대항하는 좌파 포퓰리즘을 통한 민주주의의 회복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배외주의를 표방하는 극우로 치닫지 않는, 건전한 ‘극우’활동 회복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오끼나와 기지 주위에서 “민족파를 자칭한다면, 타국 군대가 일본에 자리 잡고 있는 상황에 당연히 이의를 제기해야죠”(328면)라고 주장하는 한 우익단체 소속의 젊은 활동가의 모습을 책의 마지막에 끄집어낸 것은, 민주주의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는 건전한 보수주의 활동 역시 불가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불공평, 불평등을 위해 흘린 눈물에서 태어났어야 했을 우익이 일본 사회를, 지역을, 사람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 듯한 현실”(330면)을 보면서, 지난 100년의 역사 속 다양한 우익의 가능성을 발굴해 보여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