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2019년 5월 31일에 회의를 열고 박소란 안현미 양경언(이상 시 부문) 김미월 김정아 이경재(이상 소설 부문) 및 『창작과비평』 상임편집위(이상 비문예 부문)를 예심위원으로, 김해자 은희경 이장욱 한기욱을 본심위원으로 위촉해 심사진을 구성했다.
예심위원들은 7월 17일까지 각 부문에서 그 성취가 인정되는 대상작을 선정하여 심사를 진행했다. 만해문학상 규정에 따라 등단 10년 이상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2년간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한 예심에서 시집 4종, 소설 5종, 평론집 1종, 비문예물 3종(총 13종)을 본심 진출작으로 선정했다.
이어서 4인의 본심위원들은 8월 8일 1차 본심을 열고 다음 7종을 최종심 대상작으로 결정했다. 권여선 『레몬』, 김금희 『경애의 마음』, 김성동 『국수』, 황정은 『디디의 우산』(이상 소설), 김혜순 『날개 환상통』, 이경림 『급! 고독』(이상 시), 김두식 『법률가들』(이상 비문예).
9월 5일 열린 2차 본심(최종심)에서는 더 본격적인 논의가 재개되었다. 우선 심사자들은 한국 사법권력의 연원을 탐구한 김두식의 『법률가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을 특별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사법권력이 어떠한 역사를 거쳐 탄생했는지를 방대한 자료와 계보에 기반해 막힘없는 문장으로 친절하게 설명하는 이 책이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병폐를 그 근원부터 생각해보게 하는 뜻깊은 성취라는 데 모두 동의했다.
이어서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본상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하나같이 뛰어난 완성도를 갖춘 쟁쟁한 작품들의 면모에 걸맞게 이야기가 길어졌다. 심도있는 논의 끝에 심사진은 황정은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을 본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낡은 세계에 침윤되지 않는 새 삶의 가능성과 실천의 문제를 발본적으로 사유하고 서사화하는 이 작품이 기존의 문학적 형식과 관행에 의거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하듯 빼어난 윤리적 감수성과 예술적 혁신을 이뤄냈다는 데 심사위원 전원이 뜻을 모았다.
심사평
김해자(金海慈) 시인
먼저 시에서는 『날개 환상통』이 보여주는 강렬한 언어 밀도와 탄력있는 리듬이 주목할 만하며, 여성 박해사를 떠올리게 하는 페미니즘적 급진성에 개성 넘치는 상상력을 입힌 힘있는 작품이라 평가되었다. 『급! 고독』은 독특한 발상으로 실험적이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언어의 성찬을 보여준 작품으로, 오랫동안 시를 써왔음에도 여전히 젊은 감각을 유지하는 정신이 돋보였다. 내면화된 현실 인식과 사실적 어법으로 ‘나’라는 개인과 사회역사적 공동체를 겹쳐서 고민함으로써 시의 의미와 공덕을 증명한 작품이었다.
소설에서 『레몬』은 죄 없는 젊은 죽음을 화두 삼아 상처 입은 자의 물밑 감정과 파괴된 일상을 끔찍할 정도로 잘 그려낸 동시에, 추리 기법을 통해 계급적 인식을 미학적으로 잘 결합해 뭉툭하게 가슴을 치는 작품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었다. 『경애의 마음』은 연애서사 속에 노동과 관계의 윤리를 적절하게 삼투시켰을 뿐 아니라 해학성과 건강한 페미니즘적 요소를 가미하여 소외된 노동 속에서 피어나는 따듯한 위로와 배려와 연대의 힘을 보여주었다. 생을 긍정하고 좌절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공경하고 사랑하는 경애(敬愛)의 마음’을 환기시킨 작품이었다. 『국수』는 언어적 계급성을 통해 소리체 방언문학의 의미와 민족의 얼을 구체화한 작품으로, 19세기 후반 풍전등화의 조선 운명을 타개해가는 각 계급의 실정과 풍속 등을 세밀하게 그려냈을 뿐 아니라, 유불선 사상과 구전과 민중설화, 야담 등을 통해 민초들의 삶을 복원해낸 대작이었다.
다방면의 요소들을 검토하면서 고심한 결과, 제34회 만해문학상 본상 수상작으로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을 선정했다. 『디디의 우산』은 젠더나 계급 문제를 정공법으로 다룬 기개 넘치고 용기있는 작품으로, 밀실과 광장의 이분법을 넘어선 정치적 참여와 에로스를 교차시켜 보여줌으로써 국가의 폭력과 차벽으로 상징되는 접근 금지나 가부장제 신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하고 있다. 또한 퇴물이 된 세운상가나 빈민주택의 재생 문제, 노동자의 현실, 광화문 차벽 등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리얼리티를 높이고 작품의 건강성을 담보해준다. 사랑과 희망을 상실한 젊은이들의 내밀한 서사와 촛불혁명의 거대 서사를 결합시켜 과연 혁명이 완수되었는가, 혁명이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가 생각하게 하고, 사회의 안전망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약자들의 일상과 꿈에 대해 숙고하게 하는 역작이다.
한편 특별상 수상작으로 김두식의 『법률가들』을 선정했다. 검찰과 언론 개혁이 시대적 과제로 떠오른 시점에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들이 우리 현대사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고 지금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적나라하게 검증해준 공들인 노작이라는 데 모두가 동의할 수 있었다.
두분의 수상을 기뻐하며 축하드린다.
은희경(殷熙耕) 소설가
읽는 일이 일상적이지만 심사를 위한 독서는 접근이 약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취향과 입장을 배제하려고 노력하면서 정독을 하게 된다. 재독인 경우도 많은데, 단순히 독자로서 읽었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을 받는다. 나는 사실 제 취향대로 읽는 독자의 권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을 수여하는 데는 여러겹의 공인된 필터가 작동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최종심 대상작 일곱편이 모두 각기 다른 자리에서 일정한 경지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이번 만해문학상은 무척 조심스러운 심사였다.
김두식의 『법률가들』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이 어떤 치명적인 독을 파종해 지금 우리 사회를 괴사시키고 있는지 그 뿌리를 파헤친 매우 의미있고 시의성을 품은 저작이라 할 것이다. 특별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문학 언어의 정치적 급진성’을 갖고 사유의 세계를 경계 없이 넘나드는 김혜순의 『날개 환상통』은 압도적이었다.
이경림의 『급! 고독』에서는 깊이를 정복한 시인의 자유로움에 마음껏 이입했다.
네편의 소설을 두고 심사위원들은 각기 의견이 나뉘었다. 일차적으로 두편씩을 추천했는데 그 조합 또한 모두 달랐다. 네편 모두 수상작으로 손색없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했으므로 오히려 논의가 길어졌다. 신중하고 긴 심사가 되리라는 예감 그대로 중간에 휴식시간을 가지며 의견을 조율하기도 했다.
권여선의 『레몬』은 시작 부분에서 이미 이 작가가 가진 내용과 형식의 완결성을 확신하게 만든다. 삶의 이해되지 않는 부분과 그늘진 곳을 바라보는 시선. 그에 대한 적당한 흥분, 즉 문제 제기와 그 문제를 순차적으로 그려가는 더욱 적당한 냉정의 교차. 그리고 정밀하고 유려한 문장들. 낯설고 새로운데도 동의가 되는 울림이 있다. 불편함과 공감을 함께 주는 소설이랄까.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은 멋진 장편소설이다. 이야기는 흥미롭게 뻗어나가며 문장은 활달하고 인물 또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디테일이 세심하게 조립돼 있어 장면 장면이 안정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를 끌어가는 동력이 지금 이곳의 상처들과 위로와 경애의 마음이라는 것. 그 점이 가장 돋보인다고 생각했다.
김성동의 『국수』는 여섯권 속의 이야기가 물 흐르듯 흘러간다. 누가 보기에도 역작일 것이며 하나의 신념체계를 집요하고 생생하게 구현해낸 한국문학의 한 결실이다. 읽는 내내 이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을 곱씹게 만들었다.
수상작은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으로 결정되었다. 이 소설은 그동안 황정은의 작품이 그래왔듯 ‘특유의 날카로운 윤리감각’을 검박한 듯 세련된 문장과, 이음매가 눈에 띄지 않는 자연스러운 서사로 펼쳐놓는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최소한의 존엄성을 위한 작은 연대에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강력한 소설이다.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상냥한 소설도 좋겠지만 이처럼 현실의 부조리와 부당함을 정면 돌파하는 결기 있는 작품을 만나게 돼서 더 좋았다는 것이 마지막 심사 소회였다. 진심으로 수상을 축하한다.
이장욱(李章旭) 시인, 소설가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긴 독서였다. 본심 대상작들이 하나같이 치열하고 매력적이었다. 어느 작품이 받아도 좋다는 마음과 이 작품이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 사이에서 서성였다. 다른 때와는 달리 나는 쉽게 마음을 정할 수 없었고, 우왕좌왕했으며, 종국에는 내 미적 판단력을 의심해야 했다. 나는 약간 의기소침해지기까지 했는데, 결국 회의 자리에 가서 다른 위원들의 의견을 들어보고서야 한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우선은 본상과 별도로 김두식의 『법률가들』을 특별상으로 선정하는 데 흔쾌히 동의했다. 이런 방대한 연구서가 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 만큼, 이 노작은 당대의 자료와 사실들에 대한 성실한 탐구열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읽기는 쉽지 않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가치가 잊혀서는 안 될 것 같다. 만해문학상 특별상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김혜순의 시집 『날개 환상통』에 대해 무슨 평을 덧붙일 수 있을까. 『어느 별의 지옥』에서 『불쌍한 사랑 기계』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은 이미 하나의 상징이 된 듯하다. 시집을 읽은 뒤 나는 근작 『죽음의 자서전』과 더불어 『날개 환상통』이 시인의 문학적 여정에서 하나의 정점을 이루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섬세하되 뜨거운 시적 간극을 창안하고 그 간극에서 문득 날아오르는 “새”를 발명하는 일. 그 “새”는 영혼의 고도를 허망하게 떠도는 대신 여성주의적 대지를 착지점으로 삼음으로써 지상의 중력과 팽팽하게 길항하고 있었다.
이경림의 『급! 고독』을 그의 이전 시집들인 『토씨찾기』와 『상자들』을 배경으로 읽었다. 실험적 시도를 마다하지 않는 젊은 감각부터 불교적 사유를 일상의 자리에서 꽃피우는 원숙함까지, 시집에는 생동감이 넘치고 있었다. 다다이즘에서 보르헤스를 거쳐 임제에 이르는 지적 종횡도 인상적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의 시학과 실험적 감각과 불교적 사유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 그것들이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로 맞물려 우리 삶의 ‘고독’을 호출해내고 있다는 것.
권여선의 『레몬』은 그의 작가적 진폭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술 마시고 사랑하고 성찰하며 비극적인 삶의 균열을 감지하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인물들의 발화 이면에서 사건을 관할하는 정교하고 논리적이며 하드보일드한 작가를 느끼게 만든다. 소설은 8개의 장에서 17년 세월의 간극을 다루고 있다. 작가가 인물들의 시점을 바꿔가며 첨예한 결말로 이끌어갈 때 독자는 무언가에 사로잡힌 느낌을 받는다. 추리소설로서도 흥미롭고, 계급적 감각을 바탕에 깐 사회파 범죄소설로서도 인상적이며, 이질적 관점의 병치를 통한 모자이크 구성 역시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다언이 납치한 바로 그 아이에게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을 경애하며 읽었다. 즐겁고 흥미로운 독서였다. 그의 강점이 섬세하게 조율된 디테일에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장편소설에서도 그 ‘다정한 긴장’이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했다. 그뿐인가. “그래도 좋은 사람이에요. 아주 전두환 같은 사람이에요”(192면) 같은 대사에 스며 있는 날카로운 유머와 아이러니는 감탄을 자아냈다. 유려한 호흡과 서사의 긴장을 한순간도 잃지 않고 유지한 것 역시 놀라운 점이었다. 정확하면서도 리드미컬한 문장들이 소설 전반을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성동의 『국수』를 읽으며 자괴감을 가졌다. 나는 평생 이렇게 방대한 책을 쓸 수 없을 것이고, 이토록 낯선 한국어 문장을 쓸 수 없을 것이고, 이렇게 명료한 역사적 의지와 관점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존경과 경외의 마음을 갖는 것뿐이었다. 박경리의 『토지』가 1897년 이후 구한말과 식민지시기를 다루는 데 비해, 이 장대한 소설은 그 직전인 1894년 동학까지를 다루고 있다. 20세기 초중반 한반도의 비극을 19세기의 관점에서 극복하려는 21세기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의도적 시대착오(anachronism)는 아름다운 시대착오이며 시대를 넘어서는 시대착오라고 해야 한다.
황정은의 진화는 어디까지일까.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은 중편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두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몇해 전의 단편소설 「디디의 우산」에서 중편 「웃는 남자」를 거쳐 도달한 「d」는, 이미 수많은 팬덤을 거느린 작가 특유의 문체와 파토스를 보존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일종의 정점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주었다. 반면에 연작의 후반부를 이루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황정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낯선 시도였다. 에세이스트의 영혼을 소환한 후반부는 작가가 자신의 소설 언어와 작가적 의지를 일치시키려 분투하는 듯 보였다. 90년대의 연세대 사태에서 세월호와 용산을 거쳐 촛불과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소설은 우리 시대의 절망과 희망에 대한 작가적 영혼의 기록이라고 할 만했다. 우리 사회의 불길한 징후에 맞서 싸우며 끊임없이 자신을 변형시키고 문장을 실험해온 작가답다고 할까. 그의 수상은 우리 소설의 현재와 미래에 주어지는 상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변신하며 진화하는 작가를 응원하며 진심 어린 축하를 보낸다.
한기욱(韓基煜) 문학평론가
올해 최종심에는 시·소설 여섯권과 더불어 비문예물 저서도 한권 올라왔다. 김두식의 『법률가들』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일러주듯 한국 사법권력을 정초한 인맥과 그 이념적 기제를 면밀히 분석한다. 촘촘히 서술된 각 장의 글을 통해 또렷이 드러나는 것은 반공반북의 이데올로기가 민주주의의 헌법을 유린하도록 방치·조장하는 법조계의 기형적 관행이다. 분단체제의 뒤틀린 이념 지형에 적응함으로써 스스로 막강한 권력이 된 사법부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친 이 저서는 검찰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앞두고 더욱 빛을 발한다. 심사위원들은 시·소설 대상작들 가운데서 본상을 뽑되 김두식의 역저를 특별상으로 선정하기로 흔쾌히 만장일치를 보았다.
본상 결정에 이르는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성향과 스타일 면에서 서로 대조적임에도 원숙한 기량과 언어적 밀도, 패기있는 실험을 보여준 두 시집의 성과도 충분히 주목할 만하지만, 김성동의 『국수』, 권여선의 『레몬』,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 등 최근 한국문학이 도달한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소설들 쪽으로 관심이 기울었다. 『국수』는 구한말 탐관오리, 개화파, 동학당, 소리꾼, 기사(棋士), 장사, 양가집 규수, 기생 등 민초에서 사대부에 이르는 다양한 인물군상을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그 시대의 총체적 모습을 보여주며, 순수한 우리말을 지켜내려는 작가의 비상한 노력도 눈길을 끈다. 다만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언어변화에 조금은 열린 자세를 보여주었더라면, 그리고 중심 사건들을 통해 위기의 시대를 감당하고 극복하는 핵심적인 물음에 좀더 집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 『경애의 마음』은 고전적인 장편의 품격과 더불어 참신한 감수성과 어법으로 우리 시대의 삶을 현재적인 실감으로 그려낸 수작이지만, 작가의 첫 장편이니만큼 앞으로 더 나은 작품을 기다리기로 했다.
『레몬』과 『디디의 우산』은 각각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 시대 삶의 핵심적인 면모를 제시할뿐더러 한 개인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윤리적 문제에 집중한다. 두 작품의 현재성은 핍진한 현실묘사보다 바로 이런 팽팽한 문제의식과 그것을 밀도 높은 언어로 제시한 데서 비롯된다. 『레몬』만의 특장은 예민하게 벼린 언어 외에 추리적 기법을 끌어들임으로써 서사적 긴장감과 극적 효과를 한껏 드높인 데 있다. 게다가 판이한 입장의 여러 화자와 인물을 등장시켜 문제의 살인/보복 사건을 각기 다르게 조명하게 함으로써 삶의 복합적인 층위를 실감케 한다든지, 불행한 인물의 무상한 나날의 삶 가운데서도 순간순간 찰나의 소중함을 통렬하게 선사하는 대목들에서 소설서사를 다루는 작가의 솜씨가 경지에 올랐음을 느낀다. 사회의 하위계층, 그중에서도 특히 한만수처럼 버려지는 존재를 생생하게 감지하게 하는 묘사력과 그런 존재를 바라보는 처연한 시선도 특별하다.
연작소설집 『디디의 우산』에는 판이한 형식의 중편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가 함께 묶여 있는데, 두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주체의 발본적인 자기변화와 혁명이다. 전자는 연인을 사고로 잃어버린 주인공 화자가 자기변혁을 통해 삶의 광장에 나오는 과정을 건조한 서술과 성찰적인 내면 독백으로 그려내는데, 보통의 소설 형식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후자는 독서일기와 에세이, 소설서사를 결합한 듯한 과감한 서사실험을 선보이지만 작품에 면면히 흐르는 문제의식은 전자와 같이 자기변화와 혁명으로 수렴된다. 이런 스타일상의 차이와 상관없이 두 작품 모두에서 감지되는, 온갖 종류의 상투형을 거부하고자 하는 언어와 사유의 투철함은 놀라운 데가 있다. 『디디의 우산』은 세월호참사에서 촛불항쟁에 이르는 격동의 시간, 낡은 세계의 제도·정동·사유에 침윤되지 않는 새 삶의 가능성과 실천의 문제를 발본적으로 사유하고 서사화한다. 이 소설집의 두 중편은 기존의 문학적 형식과 관행에 의거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사유와 언어와 형식을 벼려냄으로써 여성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에 밀착하는 빼어난 윤리적 감수성과 예술적 혁신을 이뤄냈다고 본다.
『레몬』과 『디디의 우산』 사이에서 한동안 고민하다가, 후자를 수상작으로 뽑는 데 동참했다. 수상자들께 심심한 축하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수상소감
미래의 일
황정은 黃貞殷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아무도 아닌』,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 『계속해보겠습니다』,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 등이 있음. 대산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신동엽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젊은작가상 대상, 5·18문학상 등 수상.
1
사람은 얼굴을 맞으면 아프다. 그렇게 시작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2009년 11월에 마감했으니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이다. 그걸 쓰면서 용산참사 유가족을 인터뷰했고 재판이 열릴 때마다 법원을 방문해 재판 과정을 방청했다. 당시 내 일상은 아홉권의 노트로 남아 있다. 그 노트에 재판정에서 오가는 심문과 진술을 빠른 필기로 받아 적으며 느꼈던 혼란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중 어떤 대화는 이후 내 글쓰기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철거민들의 변호인과 전투경찰 간의 질의응답이었다.
거기에 누가 있다고 들었습니까.
전철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습니까.
전철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그 질의응답을 통해 다치거나 죽을 수 있는 존재를 시스템의 편리를 위해 지우는 언어기술을 충격적으로 깨달았다. 요즘도 아무런 맥락 없이 그 대화를 반복해 생각할 때가 있다.
2
나는 쓰기를 오래 하면 내가 더 잘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더 능숙하게, 더 빠르게, 더 확신하며, 자신있게, 맑게. 그렇지 않다고 내게 말해준 사람이 없었다. 해보니 그렇지 않다. 쓸수록 어렵다. 말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건 차마 쓰지 못할 말이거나 너무 부족한 말. 내게는 문장을 생각하는 과정이 사람을 생각하는 과정이라서 문장을 생각할수록 사람 좋아하기가 어렵고 싫어하기도 어렵다. 문장을 쓸 때 나는 늘 다른 방향으로 동시에 잡아당겨진다. 덕분에 한개의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루의 시간은 정해져 있고 그 시간 동안 쓸 수 있는 문장의 총량도 정해져 있으므로 추천사며 소감이며 심지어 메일 답신을 쓰는 데 사용하는 문장도 나는 아껴야 한다. 예컨대 메일 답신으로 원고지 2.5매에 해당하는 분량의 문장을 써버리면 딱 그 정도 분량으로 그날의 소설 문장이 부족해지기 때문에 소설 아닌 글의 문장을 쓰고 나면 그 글을 쓰게 만든 사람을 향한 분노가 솟구친다…… 이렇게 쓰기가 어려우니 내가 언제고 마지막 소설을 쓴다면 그건 분명 미완일 것이다…… 그런 감정과 그런 걱정에 잠겨 여덟시간쯤 책상 앞에 있다보면 여덟개나 열개 정도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고 그런 날은 내게 썩 괜찮은 날이 된다. 그런 날은 내가 썩 괜찮은 날이기도 하다. 여태 말했듯, 건강하지 못하기가 십상인 직업이라서 건강하려고 늘 노력해야 한다. 소설을 쓰고 살려면 평일 기준 산책 30분, 스쿼트 20개씩 3세트, 데드리프트 6세트 정도는 최소로 꼭 해야 합니다.
나는 내가 이렇게 사는 게 괜찮고 이렇게 쓰는 게 좋다.
3
내게 소설을 쓰는 일은 늘 어떤 얼굴을 상상하는 일이다. 니체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내가 그 얼굴을 바라보면 그 얼굴도 나를 본다. 소설을 써온 시간 내내 많은 얼굴을 생각하고 만나왔다. 지금 내 얼굴을 만든 것이 바로 그 얼굴들이라는 걸 나는 안다. 사랑하고 증오해 너무 열심히 보는 바람에 그들의 얼굴이 내 얼굴로 와버렸다. 나는 이 얼굴에 책임을 느낀다.
당신이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최근에 받은 적이 있다. 그런 질문을 받다니 나는 조금 얼이 빠졌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가 지금 약간 가끔 그렇고, 장래 더 자주 더 그러하고 싶다고도 대답했다. 나는 그게 내 미래의 일이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지금 얼굴에 책임을 지는 방법이기도 한 것 같다.
4
여전히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내게는 있다.
사랑은 아무래도 나의 천성이니 그것이 고갈될까 걱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역사 앞에 두려움을
김두식 金斗植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군법무관, 서울지검 서부지청 검사, 변호사로 일함. 코넬대 로스쿨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동대 법학부 교수를 거쳐 2006년부터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 저서 『헌법의 풍경』 『평화의 얼굴』 『불멸의 신성가족』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불편해도 괜찮아』 『욕망해도 괜찮아』 『법률가들』 등이 있음.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법률가들』을 출간하면서 세가지를 기대했습니다. 첫째, 오류를 피하기 힘든 현대사 책이므로 수정을 위한 중쇄를 찍고 싶었습니다. 둘째, 책을 읽고 역사 앞에 두려움을 느낀 오늘의 법률가를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셋째, 월북하거나 피살, 납북된 법률가 유가족의 연락을 받아 미완성인 퍼즐을 한두조각이라도 더 맞추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중쇄를 찍었습니다. “두렵다”라는 한마디로 독후감을 마무리한 판사님이 얼마 후 헌법재판관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월북했으리라는 추정 이외에는 경력과 행적을 전혀 알 수 없던 ‘적색 사법관 사건’ 관련자가 실제로는 한국전쟁 이후 뒤늦게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재일조선인과 함께 북송되었다는 구체적 경로를 가족에게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종이책의 종말이 논의되는 시대에도 책은 여전히 꼭 도달해야 할 누군가에게 가닿고 있었습니다.
만해문학상 수상은 상상해보지 못했습니다만, 존경하는 황정은 작가님의 뒷자리에 앉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리 현대사를 극우 중심의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만든 오랜 고문, 조작, 과장, 침묵의 행태를 더 깊이 연구하라는 격려와 채찍질로 알겠습니다. 집필의 계기를 마련해주신 김홍섭 판사님 유가족 분들, “출판계 흐름을 바꾸겠다”는 저의 허언을 믿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강일우 사장님과 창비 식구들, 인용된 신문기사와 논문을 일일이 확인해 오류를 최소화한 배영하 편집자님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소수의 밥 친구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출판계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어도 쓰기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