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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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승 黃炳承

1970년 서울 출생. 2003년 『파라21』로 등단.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이 있음. stepson@hanmail.net

 

 

 

네바다허슬

 

 

네바다허슬을 보면

사람들은 소리친다

네바다허슬이다

네바다허슬이야

지은이와 옮긴이가

아기의 뇌처럼 멍청해 보이는 백지 위에

빛과 그늘처럼 스며들어

아름다운 번역서 한권이 태어나듯이

베일리 바버라

에드워드 박스터 할 것 없이

네바다허슬은 이어져왔고

네바다허슬을 만든 재미교포 김 라

씨가 죽은 뒤 사십년이 흘렀지만

허슬이 뭔지도 모르는 코흘리개들조차

네바다허슬이네

네바다허슬이잖아,

다 알아버린다

 

디스코의 열기가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던 그해

미국과 유럽을 휩쓸어버린 네바다허슬

국제 댄스대회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네바다허슬

네바다의 범죄율을 최저치로 떨어뜨린 네바다허슬

베트남전의 악몽을 잊게 해준 네바다허슬

죽어서도 좀비가 되어 추고 싶다던 김 라 씨의 네바다허슬

 

네바다의 허슬이 이렇게 대단하다

 

혹멧돼지의 억센 코털이 살을 뚫고 자라

날카로운 송곳니가 되기까지 백년

바오밥나무의 뿌리가 땅속으로 파고들어가

제로의 신을 만나기까지 천년

제로의 신을 뚫고

바오밥나무의 쥐 모양 열매가 열리기까지 만년

바오밥나무 아래 모여 열매를 따먹던 최초의 인류로부터

디스코 리듬이 만들어지기까지 백만년

네바다주 트루스픽스 마운틴의

반 맥 케이브(cave), 검은 돌그림에서 전해진다

 

네바다허슬

네바다의 허슬

 

 

 

당나귀와 아내

 

 

저녁에는 젊은 시절부터 줄곧 함께 지내온 늙은 당나귀 한마리를 때려죽였다네 이유인즉슨, 그 망할 녀석이 사사건건 내게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지 내 몸은 아직 청년처럼 힘이 넘쳐 십리를 더 갈라치면, 녀석은 나를 노인네 취급하며 바닥에 주저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고 내가 새로운 돈벌이를 생각해내면, 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취급하며 콧방귀를 뀌지 않았겠나

나는 말일세 죽은 녀석의 몸을 보기 좋게 토막을 내어 부대자루에 옮겨담았다네 미운 정이 깊어 가슴이 짠하기도 했지만 속은 더할 나위 없이 후련했다네 그날 밤 나는 술을 진탕 마신 뒤 모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고, 꿈에서 친구들과 함께 소풍을 가서 먹고 마시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네 그리고 이튿날 잠에서 깨어 죽은 당나귀의 토막이 들어 있는 부대자루를 보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더군, 죄책감 같은 건 없었고

나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밭일을 하고 창고를 정리하고 젊은 시절 곁눈질로 배웠던 붓글씨도 쓰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왠지 모르게 따듯한 피 냄새가 그리워 부대자루를 이부자리 곁에 두고 잠을 청하지 않았겠나 그런데 피 냄새는 나지 않고 어디선가 잠을 청하기 좋은 방울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네

그날 밤 꿈속에서 나는 거나하게 취해 친구들과 소풍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지 마을이 가까웠을 즈음, 언덕 위에 웬 당나귀 한마리가 주인도 없이 홀로 서 있질 않겠나 그때 곁에 있던 친구가 웃으며 말했네

“이보게 친구, 자네의 당나귀가 마중을 나왔군그래”

친구의 말을 듣고 자세히 올려다보니 내가 기르던 당나귀가 틀림없었고, 나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네 죽은 녀석이 그곳에 멀쩡히 서 있으니 말일세

곁에 있던 또다른 친구가 거들었다네

“그래도 자네는 복이 많은 사람일세, 안아주고 싶거든 어서 가서 안아주게나”

나는 꿈속에서 이 모든 게 꿈이라는 사실을 이내 알아차렸지만, 언덕 위로 성큼 달려가 당나귀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네 오랜 세월,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함께였던 그 녀석에게 처음으로 심한 죄책감을 느꼈던 걸세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꿈에서 깨어났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동안 잠자리에 누워 있어야 했네 그런데 잠들기 전에 들려왔던 방울 소리가 여전히 들려와 고개를 들어보니, 죽은 당나귀가 글쎄 머리맡에 앉아 서러운 듯 눈물을 떨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반가운 마음에 녀석을 불러보려 했으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네 녀석의 등을 쓸어주고 싶었지만 두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지

나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이승에서의 마지막 꿈에서 깨어나야 했네 흰 수염의 장의사가 방으로 들어와 내 목에 감긴 밧줄을 풀었네 방 한편에는 검은 부대자루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속엔 당나귀 대신 늙은 아내의 토막난 시체가 담겨 있었다네 마당에선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여전히 나지막한 방울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는 참으로 다정해서 깊은 잠을 청하기에 더없이 좋은 소리였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