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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은희경 殷熙耕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상속』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중국식 룰렛』,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그것은 꿈이었을까』 『마이너리그』 『비밀과 거짓말』 『소년을 위로해줘』 『태연한 인생』 『빛의 과거』 등이 있음.

silverpaperbox@gmail.com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영화와 사진 속에서 그 도시는 언제나 빌딩이나 공원에 둘러싸여 있었다. 높고 현란한 전광판이 몇겹으로 겹쳐져 있기도 했고 전세계에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복잡한 지하철 계단을 바쁜 걸음으로 오르내렸으며 야외 분수대 앞에 거리공연이 펼쳐졌다. 누군가 그 도시를 여행했다고 말하면 대개는 경찰차와 노란 택시들, 멋진 공원과 수준 높은 공연장, 베이글이나 스테이크 식당, 미술관과 박물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증권거래소, 이런 것들에 대해 물을 것이다. 어쩌면 도심 한가운데의 소란스러운 작은 술집들 혹은 화려한 다리의 야경 등에 대한 끊임없는 자랑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승아에게서는 그중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승아가 그 도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끔찍한 더위, 가로막힌 창문들, 저녁 거리에 쌓여 있는 검은 쓰레기봉투의 냄새, 시간을 지키지 않는 우편물과 길고양이들, 그리고 친구네 집 벽에 걸린 통근용 자전거 같은 것이었다.

 

 

1. 토요일

 

그 도시에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열네시간이나 타야 했다. 두번의 기내식을 먹고 날짜변경선을 지나고 갖가지 형태의 구름과 검은 밤과 황금빛 여명 속을 통과하는 긴 시간 동안 승아는 계속해서 깨어 있었다. 실내등이 꺼진 뒤 와인을 청해 마셔보았지만 끝내 잠은 오지 않았다. JFK공항에 내렸을 때는 약간 몽롱하면서도 긴장된 상태였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일은 걱정했던 것보다 쉬웠다. 이민국 공무원은 예상대로 세가지 질문을 던졌다. 왜, 얼마 동안, 어디에. 승아는 친구를 방문하러 왔으며 열흘 동안 그녀의 집에서 지낼 거라고 준비된 대답을 했다. 이국의 공항에서 영어로 말하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자 그제서야 떠나왔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하지만 이 여행을 위한 승아의 준비는 거기까지였다. 영어도 서툴렀고 길눈도 어둡고 돈도 별로 없었다. 사실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막연한 기대만으로 떠나온 셈이었다. 수하물을 찾아 세관을 통과한 그녀는 백팩 속에서 명품 로고가 선명한 썬글라스를 꺼내 썼다.

게이트 앞에 서 있는 마중객들 속에서 승아는 민영을 쉽게 찾아냈다. 구겨진 민소매 셔츠에 평범한 검은색 슬랙스. 언제 잘랐는지 긴 머리가 단발로 바뀌었는데 앞머리가 눈을 가릴 만큼 흘러내려와 있었다. 인스타그램에서 보았던 자유롭고 들뜬 듯한 모습과는 달리 표정도 건조하고 피곤이 느껴졌다. 오랜만이다. 민영이 다가와 담담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응. 머리 위로 흔들던 손을 아래로 내리며 승아도 짧게 대꾸했다.

둘이 마지막으로 만난 건 재작년 여름, 민영이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유학생으로서 마지막 방학을 보내러 서울에 왔을 때였다. 승아는 민영을 서촌에서 만나 길게 줄이 늘어선 떡볶이집으로 안내했고 한그릇에 만이천원이나 하는 빙수 까페에도 데려갔다. 그때 민영은 남의 나라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어려움과 수모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이비리그를 졸업해도 외국인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하는 민영은 이미 수없이 많은 거절을 당해 기운이 빠진 것 같았다. 한국은 맛있는 것도 많고 모든 게 빠르고 편리하고 사람들도 다 세련되고 능력 있어 보인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취업에 집착하는 이유도 독립을 위해서라기보다 거기 계속 머무르려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인 듯했다. 그리고 지금 민영은 전세계의 문화와 사람과 돈이 모여든다는 이 도시의 직장인이었다.

그거 이리 줘. 민영이 캐리어 위에 올려놓은 승아의 백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안 무거워. 그래 그럼.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민영을 뒤따르기 위해 승아는 급히 목베개가 달랑거리는 백팩을 메고 캐리어를 밀기 시작했다. 게이트를 빠져나오니 건물 밖에는 여름 한낮의 햇살이 하얗게 내리쬐고 있었다. 승아가 처음 만나는 이 도시의 햇빛과 공기였다. 민영은 도심으로 가는 공항열차를 탄 다음 지하철로 갈아탈 거라고 말하면서 햇빛 때문에 눈을 찡그렸다.

지하철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민영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두어 정류장쯤 지났을까. 다시 눈을 뜨더니 승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진짜 올 줄은 몰랐어. 왜? 다들 바쁘니까. 바쁘긴 하지. 민영의 말에 애매하게 대꾸한 다음 승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뒤에 민영이 승아의 팔을 가볍게 건드렸다. 다음에 내려. 민영은 그 지역이 그리스 이민자들이 정착한 동네라 지중해식 음식점이 많다고 말한 뒤 거기서 이스트강을 건너면 맨해튼이라고 짧게 덧붙였다.

민영의 집은 지하철역에서 세 블록 떨어져 있었다. 신호등을 여섯번 건너고 모퉁이를 네번 꺾어 도는 그리 길지 않은 동선에서도 승아는 민영을 놓칠세라 캐리어 손잡이를 붙잡고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샌들끈 사이로 햇볕에 노출된 발등이 금세 따가워졌고 등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그 거리의 풍경에 민영의 인스타그램에 등장하는 하늘을 찌르는 빌딩숲이나 공원을 배경으로 한 브라운스톤 건물은 없었다. 좁은 길 양쪽으로 드문드문 잡화점과 식료품점과 작은 식당들이 들어섰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도 승아의 머릿속 뉴요커와는 거리가 있었다.

승아는 신도시 아파트에서 성장하고 푸드코트와 영화관이 갖춰진 대학교를 다니고 논현동의 고층건물에 있는 잡지사에서 일했다. 그녀의 눈에는 이 거리의 모든 것이 낡고 칙칙하고 구닥다리이고 영세했다.

민영의 집이 있는 4층 아파트 역시 지은 지 백년은 넘었을 만한 모습이었다. 시멘트 벽의 갈라진 틈으로 잡초가 비어져 나왔으며 계단 옆의 손바닥만 한 앞마당에는 녹슨 재활용 쓰레기통 몇개와 망가진 소파가 놓여 있었다. 숄더백에서 묵직해 보이는 열쇠꾸러미를 꺼내 그중 한개를 현관문의 구멍에 꽂으며 민영이 말했다. 4층이야. 아래층에 관리인 할머니 사니까 캐리어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올라가.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더러운 카펫이 깔린 그 집의 좁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승아는 세번이나 계단참에 캐리어를 내려놓고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켜야 했다. 가까스로 꼭대기 층에 닿았을 때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프랑스제 핸드크림을 꼼꼼히 발랐던 손은 갈퀴 모양을 유지한 채 한동안 펴지지가 않았다.

아파트는 생각보다 좁았지만 밝고 깨끗했다. 들어서자마자 새로 페인트칠을 한 깔끔한 주방이 나타났고 그 너머 거실에는 2인용 패브릭 소파와 크림색 책장이 놓여 있었다. 유리 갓을 씌운 스탠드 등과 관엽식물 화분 몇개가 아늑한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벽에 걸린 마띠스 액자는 모마에서 산 프린트이고 아즈텍 조각상은 멕시코 여행의 기념품임을 승아는 알아보았다. 출퇴근용으로 쓴다던 은색 자전거와 헬멧 역시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급히 청소를 마친 듯 구석에 청소기가 전기 코드가 꽂힌 채 놓여 있었는데 그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cozy’나 ‘my place’에 해시태그를 붙여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그대로였다. 민영은 아주 가끔 사진을 올렸지만 승아는 하나도 빠지지 않고 보고 있었다.

승아의 눈길은 뒷마당으로 나 있는 커다란 창을 향했다. 그곳으로 아낌없이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서 마룻바닥과 벽과 책꽂이의 책등 하나하나까지 골고루 환하고 편안한 느낌을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영이 다짜고짜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닫아버렸으므로 그 빛은 금방 차단되었다. 저 새끼들, 또 저러네. 민영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거친 말투였다. 건너편 창가에 담배를 피우면서 이쪽을 염탐하는 남자들이 있다고 말하는 민영의 이마에 세로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청소 땜에 열어놨는데, 집에 있을 땐 커튼을 닫아야 해. 특히 너 혼자 있을 때. 총이라도 쏘는 거니? 그건 아니지만, 재수가 없으면 별일이 다 생기는 데니까. 승아가 던진 어설픈 농담에 민영은 뜻밖에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민영이 인스타그램에 새로 이사 갈 집에 페인트칠을 하는 사진을 올린 건 한달쯤 전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임대기간이 한달 가까이 남아 있는데도 새집이 마음에 들어 이사를 앞당기게 되었다는 글과 함께였다. 룸메이트가 없어서 결정하기 쉬웠다고도 씌어 있었다. 이 도시의 높은 월세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새집이 좋다는 뜻이기도 하고 동시에 민영이 그만큼 경제적 여유를 갖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두가지 모두 승아를 자극했다. 집 좋다. 당장 갈 테니 내 자리 비워놔. 누군가가 달아놓은 댓글 아래 민영은 환영!이라고 답을 달았다.

회사 앞 스타벅스에 팀원들의 커피를 사러 나왔던 계약직 사원 승아는 진동벨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SNS에 접속했다가 그 글을 보았다. 그녀는 핸드폰 액정 속의 환영이라는 단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너무 흔하고 일상적인 말이었지만 그때의 승아에게는 왠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승인과 호의가 담긴 유의미한 단어로 여겨졌다. 눈앞에서 문이 닫히더라도 그게 끝이 아니고 어딘가에 환영이라고 적힌 다른 문이 있다. 그것이 마치 어떤 계시처럼 느껴졌던 승아의 눈에는 그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시차를 계산해본 승아는 민영이 잠 깰 무렵까지 열시간을 기다렸다가 문자를 보냈다. 나 진짜 갈까. 답장을 받은 것은 다시 하루가 지난 뒤였다. 잠자리가 불편할 텐데 괜찮아? 방이 하나뿐이라. 그걸 읽자마자 물론 상관없다고 곧바로 답문자를 보냈다. 전자여권은 이미 갖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탕발림이었지만 회식 자리에서 편집장이 기회가 되면 해외출장에 데려갈 수도 있다고 한마디 던진 뒤 바로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항공권이 급했지만 여행사에 다니는 친구에게 부탁하면 구할 수 있을 것 같았고 2년 부은 적금도 깰 생각이었다. 그동안은 엄마의 성화에 억지로 끌어왔지만 어차피 계속 불입할 능력도 없었다.

승아도 알고 있었다. 그런 무분별한 추진력이었다면 남동생처럼 집안 눈치 보지 않고 어학연수를 보내달라고 졸랐을 것이고 어중간하게 몸을 사리다가 남자친구를 놓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야근과 휴일 근무가 예사이면서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 회사를 진작에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그녀는 무책임한 낙관과 자기연민에 빠진 비관 둘 다를 경계해왔다.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하면서 주어진 조건에 순응해왔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언제까지나 그런 사람만은 아니란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열흘이나 휴가를 낼 수 있냐고 민영이 물어왔을 때 승아는 안 쓴 월차를 합하면 얼추 맞출 수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음 주면 계약기간 2년을 채우게 되고 정규직으로는 채용되지 않을 테니 쫓겨날 게 뻔했지만 그것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민영이 미리 얘기한 대로 방은 하나였다. 사철 옷이 걸린 행어 한개와 거울이 얹혀 있는 단출한 서랍장이 놓였고, 그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침대가 방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혼하는 친구가 줬는데, 이 방에 좀 크긴 해. 민영은 변명하듯이 말한 다음 침대에 걸터앉는가 싶더니 시트 위에 그대로 몸을 눕혔다. 승아는 침대와 서랍장 사이 바닥에 캐리어를 펼쳤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공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제서야 승아는 잠자리가 불편할 거라는 민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승아와 달리 민영은 유치원 때부터 자기 방이 따로 있었고 누구와도 한 침대에서 자지 못했다. 아무리 침대가 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열어젖힌 캐리어의 맨 위에 민영에게 줄 선물이 놓여 있었다. 승아는 그걸 사기 위해 몇시간 동안 포털에서 ‘유학생 선물’을 검색하고 눈알이 빠지도록 인터넷 쇼핑몰의 후기를 뒤졌다. 그러나 농축시킨 뒤 말려서 가루로 만든 사골 국물과 유기농 해물 다시팩 따위를 민영이 반기지 않으리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조금 전 주방이 깨끗하다는 승아의 말에 민영은 지난주부터는 요리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승아가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 민영은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었다. 서랍장 위에 개켜져 있던 담요와 여름 이불을 가져와 바닥에 깔고 승아도 자리에 누웠다. 잠든 민영을 건드릴까봐 침대 위에 놓인 여분의 베개 대신 목베개를 벴다. 한참을 뒤척이긴 했지만 워낙 오랜 시간을 깨어 있었으므로 결국 잠들 수 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한참 기운 시각이었다. 민영은 침대 위에도 거실에도 화장실에도 없었다. 그리고 한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배가 고파 왔으므로 하는 수 없이 승아는 싱크대 아래 칸에서 냄비를 찾아 사골 가루를 물과 함께 끓이기 시작했다. 냉장고 안에서 플라스틱 포장용기에 담긴 파스타를 발견했지만 언제부터 거기 들어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말라붙어 있었다. 즉석밥을 국에 말아 배를 채운 승아는 다시 거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

책장의 책은 모두 영어였고 티브이도 없었다. 방전된 핸드폰을 가져와 전원을 연결했지만 로밍을 하지 않은 탓에 할 수 있는 건 사진 파일 열어보기와 다운로드된 게임뿐이었다. 그런 일로 시간을 때울 만큼 느긋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혼자서 집밖으로 나가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금씩 어두워져가는 실내에서 승아는 자신이 왜 커튼조차 열 수 없는 이국의 낯선 방에 혼자 앉아 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떠나오기 전 그녀는 주변의 모든 것이 자신을 밀어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떠나온 지금은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인 민영에게 거부당하는 기분이었다.

민영이 돌아온 것은 밤 열한시가 넘어서였다. 소파에서 잠깐 잠이 들었던 승아는 문 여는 기척에 곧바로 눈을 떴다. 너 진짜 잘 자더라. 샌들의 고리를 풀며 민영이 말했다. 첫날 안 자고 버텨야 시차적응 빨리 하는데. 민영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몇시간은 들고 다닌 듯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멀리 나갔다 왔니? 응, 뭐 잠깐 전해줄 게 있어서. 민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봉투를 가리켰다. 베이글이랑 수프야. 그리스 식당에서 사 온 거야? 아니,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승아는 이 도시에 대해 그다지 정보가 없었지만 그곳이 레스토랑과 까페가 모여 있고 재즈바 ‘블루 노트’가 있는 맨해튼 도심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민영의 옷차림은 공항에 나왔을 때와 달랐다. 목이 파인 블라우스와 산뜻한 시폰 스커트 차림이었다. 넌 안 먹어? 민영의 등 뒤에 대고 승아는 다시 말을 붙여보았다. 먹고 왔어. 그 말을 끝으로 민영은 욕실로 들어갔다.

그날 밤 민영은 꿈이라도 꾸는지 자주 뒤척이고 이따금 낮은 신음소리까지 냈다. 그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누워 있었지만 승아에게 더이상의 잠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핸드폰 검색으로 한국 시간이 오후 세시인 것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그러고는 한밤중 식탁에 앉아서 이 도시의 첫 음식을 먹었다. 수프는 고기 냄새가 느끼하고 짰다. 뉴욕 베이글 역시 소문과 달리 딱딱하고 퍼석했는데 서울에서 새벽배송으로 받는 빵보다 훨씬 맛이 없었다.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민영이 와이파이를 연결해주었으므로 승아는 이제 할 일이 전혀 없진 않았다. 그녀는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곳의 뉴스와 친구들의 SNS를 몇시간 동안이나 들여다보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민영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일요일 정오 무렵에는 또다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번에도 민영은 승아를 깨우지 않았다.

 

 

2. 월요일

 

출근 준비를 하며 민영은 승아에게 열쇠 두개를 주었다. 하나는 1층 현관문, 다른 하나는 집 열쇠였다. 랜드로드 할머니가 손님 오는 걸 싫어해. 쓰레기통 옆에 소파 봤지? 거기 앉아서 드나드는 사람 다 감시하거든. 혹시 써블렛을 줬나 의심하는 거야. 승아의 얼굴이 불안해졌다. 갑자기 문 따고 들어와보는 거 아냐? 민영이 고개를 저었다. 세입자한테 미리 연락 안 하고 들어오면 불법이야.

승아는 민영이 냉장고에서 식빵 두장을 꺼내 그 사이에 땅콩잼을 두껍게 바른 뒤 누런 종이봉투에 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텀블러에 커피를 따라서 함께 숄더백에 넣는 걸 보니 도시락인 모양이었다. 승아의 머릿속에 점심시간마다 메뉴를 바꿀 수 있었던 회사 근처의 맛집 식당들이 스쳐갔다. 이곳의 점심시간이 짧다고 듣긴 했지만 땅콩잼만 바른 샌드위치라니.

아침은 먹었어? 승아의 물음에 민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원래 안 먹어. 저기 커피 내려놨고, 봉투에 베이글도 남았어. 승아는 민영을 현관까지 따라 나갔다. 신발장에서 굽이 닳은 단화를 꺼내 신던 민영은 승아의 배웅이 어색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 어디로 나가볼 거니? 글쎄, 너 집에 오면 몇시쯤 돼? 난 좀 늦을 것 같아. 응, 알았어. 승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애써 무심한 표정으로 벽에 걸린 자전거의 프레임을 만졌다. 오늘은 자전거로 출근 안 해? 안 해. 민영의 대답은 짧고 빨랐다.

민영이 나간 뒤 승아는 무력한 기분으로 식탁 앞에 서 있었다. 이곳에 온 지 사흘째인데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어제 하루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승아가 어제 오후 늦게 눈을 떴을 때 민영은 식탁에서 커피잔을 옆에 두고 랩톱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몽사몽 화장실에 다녀오니 민영은 손지갑과 커다란 자루를 양손에 든 채 현관에서 슬리퍼를 신는 중이었다. 당장 다음 날부터 깨끗한 팬티를 입기 위해서는 귀찮지만 빠뜨릴 수 없는 일요일의 일과라며 코인 런드리에 간다고 했다. 오는 길에는 동네 명물이라는 도넛을 포장해왔다. 승아의 입맛에 조금 달았지만 따뜻해서 그런대로 맛이 있었다.

그리고 또 뭘 했더라. 몹시 더운 날이었고, 전자레인지 크기의 에어컨은 방에만 있었고, 그 방에서 유일하게 승아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바닥의 담요 위에 엎드려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사이 민영은 몇번인가 집 밖을 들락날락했는데 그때마다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통화를 하고 오겠다고 말했다. 승아는 영어로 하는 대화는 어차피 못 알아듣는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민영이 나갔다 올 때마다 담배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일요일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시간조차 승아를 제쳐놓고 혼자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 같았다.

승아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 핸드폰에 구글 지도를 다운받아놓았고 민영에게서 지하철 타는 법도 들었다. 그러나 낯선 도시를 혼자 돌아다니는 일은 여전히 망설여졌다. 지하철을 타든 가게에 들어가든 일상적인 시스템 하나하나가 달랐고 그걸 따르려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낯선 사람들의 호의를 구해야만 했다. 승아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뭔가 내키지 않거나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의 습관대로 승아는 눈앞에 있는 사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책장에 책이 아닌, 두쪽짜리 사진액자 하나가 접힌 채로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곧바로 그것을 책꽂이에서 빼냈다.

액자 한쪽은 한국에서 찍은 듯한 네칸짜리 스티커 사진들이었다. 재작년 서촌에서 승아와 함께 찍은 것도 있었다. 엄마와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친밀한 모녀답게 마치 자매처럼 보였다. 다른 가족의 사진은 없었다. 민영이 대학원을 졸업하던 해에 부모가 이혼한 것은 승아도 알고 있었다. 승아는 액자의 다른 한쪽을 보았다. 하이킹 복장으로 자전거에 올라탄 네명의 남녀가 숲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민영을 빼고는 모두 백인이었다. 승아는 사진 속 민영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승아의 눈에 익은 명쾌하고 자신만만한 민영의 웃음. 그리고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옆의 남자와는 남자친구로 보일 만큼 얼굴 간격이 가까웠다.

 

 

3. 민영의 목요일

 

민영은 지난 목요일에 마이크를 그리니치빌리지에서 만났다. 보통은 금요일에 약속을 잡았지만 민영이 토요일 오전에 공항으로 승아를 마중 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마이크도 다음 주 출장 준비로 토요일인데도 출근을 한다고 했다.

마이크는 맨해튼의 회사에 다녔고 애스토리아의 원 베드룸 아파트에 혼자 살았다. 민영이 집을 구한다고 하자 자기가 사는 동네를 추천했을 뿐 아니라 가깝다는 이유로 집을 보러 갈 때마다 따라가주었다. 새집의 페인트칠도 함께했다. 이사를 도운 것은 물론이고 가구 배치에서부터 커튼을 달고 액자를 걸고 전구를 새로 끼우는 것까지 이 집 구석구석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또 민영의 자전거를 분해해서 안장과 스템과 프레임, 휠과 체인까지 전용 클리너를 뿌려 꼼꼼히 닦은 다음 벽의 랙에 걸었다. 랙의 방향을 바꿔가며 몇번이나 나사를 풀었다 조였다 반복하더니 자전거가 단단히 걸린 걸 확인하고 비로소 안심이라는 듯 민영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쳐들어 보이는 그의 표정은 더이상 학회 세미나에서 알게 돼 이따금 안부를 전하는 동료의 것만은 아니었다.

에어컨 설치를 도와주기 위해 주말에 다시 들렀을 때 그는 새로 들여놓은 민영의 침대를 보고 여기 누워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전세계에 한명도 없을 거라고 농담을 던졌다. 더이상 악몽도 꾸지 않을 테니 자기가 선물한 드림 캐처도 필요 없겠다고 말하면서 민영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기도 했다.

그날 마이크는 다른 하이킹 친구들과 함께 왔고 그들이 이사 기념으로 사 온 와인 두병을 비우는 동안 마치 집주인이나 되는 듯이 카프레제 샐러드를 만들고 서빙을 도맡았다. 친구들이 돌아간 뒤에는 민영과 함께 주방 정리를 마치고 냉장고에 남아 있는 맥주를 비웠다. 커피까지 내려 마시고는 공구 박스를 든 채 밤길을 여섯 블록이나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민영이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것도 마이크가 권했기 때문이었다. 민영은 운동부족이라 그런지 변비가 심하다고 무심코 말해놓고 자기들이 그 정도의 TMI까지 털어놓을 사이는 아닌 것 같아 후회했지만 오히려 마이크는 그 주말에 자신이 아는 자전거 가게로 민영을 데려갔다. 신중하게 여러 모델을 살펴보며 선택을 도와주었고 민영의 집까지 가는 첫 주행에 자신도 자전거로 함께 달려주었다. 가는 도중에 사람이 많지 않은 공원에 들러 고등학생 때 이후 자전거를 타보지 않은 민영의 운동신경을 점검하고 또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민영은 마이크의 친구들과 어울려 주말 하이킹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가까워졌다. 민영이 끼어들기 전까지 남자 둘 여자 둘이었던 그 그룹은 남자 둘에 여자 셋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직장인이었다. 주말 하이킹 외에도 이따금 주중에 맨해튼의 식당이나 바에 모여 술잔을 기울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여자 한 사람이 나오지 않아서 다시 멤버는 남자 둘 여자 둘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민영과 마이크를 뺀 남녀가 사귀기 시작했다. 그 둘이 유난히 스킨십을 즐겼으므로 넷이 함께 모여 있으면 그들은 누가 보기에도 사이좋은 두 이성 커플처럼 보였다. 그들이 종종 따로 데이트를 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민영과 마이크도 둘만 만나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경우가 생겨났다.

그렇지만 마이크는 민영의 남자친구는 아니었다. 주말을 함께 보내는 날이 많고 생일에 꽃과 와인을 선물하고 레스토랑 위크가 되면 점찍어둔 식당을 예약해뒀다 함께 가고 새로 무대에 오른 뮤지컬을 나란히 앉아 보지만 남자친구는 아니었다. 어째서일까. 민영도 알고 싶었다.

그것을 빼고는 민영은 마이크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다. 민영은 마이크가 워싱턴주립대를 졸업하고 이 도시로 왔으며 지금의 직장에 정착하기 전에 다른 두군데 회사에서 인턴을 거쳤고 아버지가 공무원이고 어머니는 항공사에서 일하며 변호사인 형과 아직 대학생인 여동생이 있다는 걸 알았다. 어릴 때 치아교정을 했고 장난이 심해 다리가 두번이나 부러졌으며 대학 신입생 때 기숙사에서 첫 대마초를 피웠다는 것도 알았다. 개를 좋아해서 동물구조대 봉사를 한 적이 있고 교환학생으로 스페인에 다녀온 덕에 세비체와 가스빠초를 잘 만들고 시애틀 출신답게 언덕 주차를 잘하지만 대도시에서의 운전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목공과 바이올린 연주를 배운 적이 있다는 것, 헤어진 여자친구와의 기억 때문에 그랜드센트럴역에 있는 오이스터바를 싫어하고, 브루클린 식물원과 루즈벨트섬에 데이트의 추억이 있다는 것까지. 식성과 알러지, 옷 치수와 신발 사이즈, 다음 주의 출장 행선지까지 알았다. 또한 마이크는 민영이 말하기 전에 언제나 현관에서 신발을 벗었고 김치와 냉면을 좋아했고 건강 간식으로 김을 즐겨 먹었다. 그만하면 민영은 마이크에 대해 잘 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목요일까지의 생각이었다.

목요일 만남은 민영과 마이크 둘만의 약속이 아니었다. 전에 하이킹 모임에서 빠졌던 여자도 온다는 건 그날 오후 마이크의 문자로 알게 되었다. 마이크는 그 여자와 함께 바에 들어왔다. 그날 마이크는 술을 한잔밖에 마시지 않았다. 자전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감기 기운이 있다고 했다. 민영은 느린 속도로 석잔을 마셨다. 민영 역시 자전거를 타고 왔고 그 집의 술값이 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언제나처럼 더치페이였으므로 민영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마신 술값을 합산해가며 술을 주문했다.

여자는 좀 과하게 마시는 듯했다. 그녀는 종잡을 수 없는 태도로 민영을 대했다. 특히나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여성에 대해 지나치게 오래 얘기했다. 자신이 잘못해서 일을 망쳐놓고는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면서 남의 도움으로 해결하려 드는가 하면 힘들거나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입으로만 미안해 미안해 할 뿐 결국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빠져버린다는 거였다. 여자는 같은 말을 두번씩 반복하는 말버릇과 어린애 같은 몸짓을 과장되게 흉내 내 보였다. 그런 다음에는 민영이 다른 한국인 여성들과는 다르게 독립적이고 책임감이 강하다고 칭찬하는 식이었다. 술이 들어갈수록 여자는 점점 속마음을 드러냈다. 제삼세계의 온갖 사람들이 몰려드는 뉴욕은 더이상 미국이 아니라거나 자신의 출신지인 아이오와 같은 중부만이 진정한 미국문화의 순혈성을 지키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민영은 반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이크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민영의 경험상 이런 경우에 분위기가 깨지지 않으려면 본인이 나서기보다 제삼자가 편견을 지적해주는 게 옳았다. 하지만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여자는 한잔을 더 마셨고 무리한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고양이가 개보다 더 산책을 좋아한다는 억지 주장도 있었다. 마이크의 출장기간 동안 민영이 그의 아파트에 들러 고양이를 돌봐주기로 했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였다. 여자는 전에 자기가 키우던 고양이가 하네스 목줄을 맨 채 매일같이 센트럴파크를 몇바퀴씩 돌곤 했다며 이번에도 성급한 일반화의 근거를 댔다. 고양이는 반드시 산책을 시켜줘야 하며 스스로 집을 찾아올 수 있도록 DNA에 프로그래밍돼 있다고 계속 우겼다. 여자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민영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술자리는 다른 날보다 일찍 파했다. 마이크가 점점 열이 오른다며 더이상 앉아 있기 힘들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왜 이러지? 목도 좀 붓는 느낌이야. 민영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알러지 아냐? 오늘 뭐 먹었는데? 또다시 여자가 나서서 민영의 말을 가로막으며 자기주장을 폈다. 자신이 위생학 수업을 들어서 잘 아는데 발진이 나타나지 않으면 절대로 알러지가 아니라는 거였다. 마이크는 민영과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알러지 약을 먹든 휴식을 취하든 일단 집에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전거는 술집 앞에서 조금 떨어진 이면도로 거치대에 매어져 있었다. 민영이 만류했다. 이 상태로 자전거를 탄다고? 어두운데 다리도 건너야 하고, 가다가 목이 더 부어서 기도라도 막히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택시를 타자. 곧바로 여자가 끼어들었다. 자전거를 이런 데 두고 간다는 거야? 여기는 이민자와 도둑들의 도시야, 몰라?

대학 시절 자전거를 도서관 앞에 묶어두었다가 도둑맞은 경험이 있는 마이크는 여자와 같은 의견이었다. 그는 다음 날 자전거를 찾으러 다시 이곳에 올 시간도 없다며 그냥 타고 가겠다고 우겼다. 그러나 벌겋게 부어오른 마이크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민영에게 그것은 너무 위험한 결정 같았다. 평소와 달리 민영이 쉽게 의견을 굽히지 않자 결국 마이크도 지하철을 타기로 마음을 바꿨다. 민영도 함께 지하철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또다시 여자와 실랑이를 벌일 걸 생각하니 한가지 양보를 얻어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므로 자신은 자전거로 집에 돌아왔다. 여기까지가 마이크가 목요일에 혼자만 자전거를 잃어버리게 된 경위였다. 금요일 퇴근 뒤에 가봤을 때 마이크가 본 것은 텅 빈 자전거 거치대,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끊어진 자물쇠 와이어뿐이었다.

마이크가 전화로 그 소식을 알려왔을 때 민영은 일찍 퇴근해 있었다. 민영에게도 그 소식은 마이크가 느끼는 것 못지않은 충격과 손실로 다가왔다. 내가 지금 거기로 나갈게,라는 민영의 어조는 당황스럽고 다급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마이크는 그럴 필요 없다고 차갑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분명 화가 난 목소리였다. 그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금방 알 수 있었다. 왜?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자신에게 화낼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지는 듯한 말투가 되었다. 아니. 마이크는 그렇게만 대꾸했다.

평소의 마이크라면 혹시라도 민영이 미안해할까봐 먼저 그 점을 강조했을 것이다. 안 좋은 일을 당했지만 네 잘못은 전혀 없다고. 이 일은 사고였다. 민영은 그 사건 어디에 자신의 잘못이 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다시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그녀의 판단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날 밤 무사히 집에 도착한 마이크가 알러지가 맞는 것 같다며 약을 먹었더니 열이 가라앉았다고 전화로 알려준 것만 봐도 그 판단에 오류는 없었다. 그런데도 마이크가 화를 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급히 집에 간 덕분에 다음 날 컨디션을 회복한 것은 맞지만 그와 별개로 자전거를 놓고 간 일 또한 민영의 판단이었으니 분실에 책임이 있다는 걸까. 그렇게 모든 일을 하나씩 다른 사안으로 분리해서 손익을 따지고 책임 소재를 묻는 것은 대체 어떤 사회적 맥락과 가치구조에서 비롯된 사고방식일까. 분명 민영이 알고 있는 사고체계는 아니었다.

Bye. 잠깐의 침묵 뒤에 마이크가 먼저 말했고 민영도 마지못해 대꾸했다. Bye. 전화가 끊어지자 민영은 갑자기 캄캄한 벽이 눈앞을 가로막는 기분이었다.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마이크가 그 벽 뒤의 자기가 속한 세계로 퇴장해버린 느낌마저 들었다. 그동안 내가 마이크에 대해 안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 또한 마이크와는 다른 나의 사고체계 안에서의 자의적인 해석이었을까. 민영은 하루 종일 자신과 마이크를 가르는 사고방식의 차이를 생각했고 한편으로 마이크가 다시 전화를 걸어 오리라는 기대를 밤늦게까지도 포기하지 않았다. 연락은 끝내 없었다.

민영은 어릴 때부터 나쁜 꿈을 많이 꾸었다. 주로 낭떠러지 같은 데에서 떨어지는 꿈이었다. 엄마는 크는 과정이라며 꿈속에서 낭떠러지에 닿으면 떨어지기 전에 먼저 날개를 펴는 상상을 하라고 말해주었다. 한번도 성공한 적은 없지만 떨어지지 않을 방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약간은 덜어졌다. 다시 악몽을 꾸기 시작한 것은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수십장의 이력서를 쓸 무렵부터였다. 길을 잃거나 쫓기거나 시험장에 끌려가는 꿈이라면 차라리 나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침대로 다가와 몸을 굽혀서 민영을 내려다본다든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모르는 남자가 몸을 밀착시켜 오는데 온몸이 묶인 듯 꼼짝도 할 수 없는 꿈들이었다. 규칙적인 직장생활을 하게 되고 특히나 자전거를 타면서부터는 거의 악몽을 꾸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은 잠이 들었다가는 분명히 악몽이 찾아올 것 같았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대신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자전거의 가격이나 조립 사양, 무엇보다 마이크가 거기에 들인 정성에 대해서는 민영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마이크는 무엇이든 원하는 걸 갖기까지 신중하고 가진 다음부터는 소중히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상실감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해야 할 때 편하다는 이유로 가까운 사람에게 그것을 전가하는 건 안이하고 옹졸한 태도였다. 민영은 또 생각했다. 나라면 어땠을까. 그러고 보니 자신은 그다지 아끼는 물건도 없었고 뭔가를 소중히 해본 기억도 나지 않았다. 가장 비슷한 경험이라면 몇달 전 핸드폰 사건 정도일 것이다.

지하철 안에서였다. 민영은 출입문 가까운 자리에 앉았고 그 남자는 민영의 앞에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민영이 5년 만에 바꾼 신형 핸드폰의 기능을 시험해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전동차가 멎고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남자가 민영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채 밖으로 내달렸다. 민영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닫히려는 문으로 뛰어들었고 그것을 가까스로 통과해서 남자를 뒤쫓아갔다. 민영의 추적은 필사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남자의 도주는 얼마쯤 장난기가 섞인 충동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지하철을 기다리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이 벌이는 추격전에 모아졌다. 마침내 남자는 가쁜 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핸드폰을 돌려주면서 남자는 민영을 향해 자신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호소했다. 평생 가져보지 못할 그 물건이 너무 탐나서 순간 그릇된 충동이 일었다며 자기 잘못이 아니라 이 나라가 너무 불공평한 탓이라는 거였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채 여전히 숨을 헐떡이며 민영은 그 남자에게 잘 가라고 말했다. 그것은 민영 쪽의 충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주변에 전하면서 민영은 그러나 그 충동이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자신이 갖고 있던 현금 모두를 남자에게 건네주는 데까지였다는 건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 얘기를 들은 마이크는 민영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 그 남자 흑인이었어? 민영이 끝내 대답을 피했던 것은 마이크로 하여금 자신이 겪은 일을 의도적인 통계에 포함시켜 편견을 강화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마이크의 편견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그가 그밖에 어떤 편견을 갖고 있을지 따져보게 될 테고 그 결과는 결코 민영이 원하는 방향이 아닐까봐 불안했다. 말 안 하는 거 보니 흑인 맞네. 그건 이 일과 상관없잖아, 누구라도 그럴 수 있는 거니까. 민영은 이쯤에서 이야기를 끝맺고 싶었으므로 포괄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마이크는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번 더 주의를 주는 건 잊지 않았다. 어쨌든 다시는 뒤쫓아가지 마. 너무 위험한 짓이었어. 다음번엔 총 가진 놈일 수도 있다구. 그러고는 싱긋 웃었다. 근데, 넌 그런 놈까지 방어해주기 위해서 나를 차별주의자 취급하는 거야? 마이크의 여유로운 웃음을 보는 순간 민영은 그 소매치기에게 돈을 모두 털어주었던 충동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4. 민영의 토요일

 

불면의 밤을 보내고 무거운 몸을 일으킨 민영은 진공청소기를 한번 돌린 다음 공항으로 향했다. 민영은 당연히 승아를 환영했다. 친밀하게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관계가 호의라는 몇개의 나무로 기둥을 세운 집이라면 성장기를 함께 보낸 친구와의 관계는 돌과 모래와 물, 거기에 몇가지 불순물까지 더해서 오래 굳힌 시멘트 집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환영은 해도 환대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기 나름의 목적을 갖고 떠나온 친구에게 자신의 문제를 들이대며 징징거리기는 싫었다. 그리고 민영이 아는 승아는 상냥함이 지나쳐 남의 일에 관심도 과한 편이었고 글을 잘 쓰는 만큼 제멋대로 맥락을 만드는 데도 소질이 있었다. 반면 민영은 자신에게조차 혼란스러운 일을 타인과 공유할 만큼 개방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민영은 먼발치에서부터 그녀를 알아보았다. 긴 비행으로 지쳐 보이긴 했지만 등 뒤에서 목베개를 달랑거리며 검은 썬글라스 너머로 쉴 새 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 민영을 발견한 다음에는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계속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승아의 눈에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떻게 비칠까. 그것은 공항으로 엄마를 마중 나올 때마다 느꼈던 기분이기도 했다. 초라하거나 위축돼 보이지 않을까 늘 긴장을 했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를 빼고 이 도시로 민영을 만나러 온 것은 승아가 처음이었다.

집까지 오는 동안 거리 풍경을 훑어보느라 한눈을 팔던 승아는 도착한 뒤에도 집 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논평을 붙였다. 주방이 시원하다든지 책장이 반대쪽에 있는 게 좋지 않을까라든지 텔레비전이 있다면 저 자리에 놓아야 할 것 같다든지. 퀸 사이즈의 침대를 유심히 바라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민영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공간을 재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무리를 해가며 이 집을 구했는지를 떠올리자 착잡하고 불편한 마음이 되었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난 민영은 승아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식당에 가기 위해서 옷도 조금 산뜻해 보이는 것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승아는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나가서 먹을 것을 사 오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현관문을 잠그고 나오며 민영은 마트의 음식 코너에서 파스타와 샐러드를 포장하기로 마음먹었다. 승아가 한국음식을 원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갔지만 오늘 같은 날씨에 창문 없는 부엌에서 조리를 한다는 건 스스로를 찜닭으로 만드는 짓이었다.

마이크에게 문자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스친 것은 마트에 거의 다 도착해서였다. 손지갑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숄더백을 뒤적이다가 바닥에서 마이크의 아파트 열쇠를 발견했고 고양이를 돌봐달라는 그의 부탁이 아직 유효한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지나친 생각이란 건 민영도 알았다. 하지만 확인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미 직장 동료나 또는 하이킹 친구 중 누구에겐가 부탁했다면 원치 않게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만약의 경우 열쇠를 돌려줘야 할지도 몰랐다. 억지스러운 핑계 같았지만 민영은 힘들게 스스로를 납득시킨 뒤 마이크에게 문자를 보냈다. 출장 준비는 다 했어? 답장은 없었다.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마트 간판을 그대로 지나쳐서 길 건너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리니치로 가는 노선의 전동차를 기다려 탔다. 딱히 무슨 작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전거가 묶여 있던 자리를 직접 보아야겠다든지 아무튼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리 없지만 끊어진 와이어 조각이라도 눈으로 봐두어야만 자신 역시 그 사건의 피해자라는 인정을 받을 것만 같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는 마이크와 같은 편에 있었고 당연히 피해자였다. 이제 그것은 일종의 승인받아야 할 권리처럼도 생각되었다. 그 권리를 찾기 위해 그녀는 목요일에 갔던 바에 다시 갔고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그 밤의 순간들을 복기하듯 똑같은 순서로 술을 석잔 마셨고 그러는 동안 마이크에게 화가 난 것인지 마이크와 멀어질까봐 두려워하는 것인지 모호해지는 동시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그리니치의 역 근처에서 산 베이글과 수프를 끝까지 챙긴 것이 그날 밤 민영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정상 행동이었다. 아마 승아는 민영에게 그런 어리석음과 흐트러짐이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5. 월요일

 

내세울 만한 스펙이 별로 없는 승아는 자기소개서를 쓸 때마다 글솜씨로 곧잘 자신을 포장하곤 했다. 그녀가 내세우는 장점은 주로 성실성과 적응력이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있다고 강조하는 건 원하는 다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이기 십상이다. 승아가 생각할 때 그것은 도전정신과 창의력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할 수 있어!라고 하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할 수 없지,라고 받아들이는 쪽이었다. 이해심이 많은 건 결코 아니지만 자기합리화의 유연함이 있었다. 사실 성실과 적응력의 조합도 풀어 말하면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뜻일 것이다.

승아는 마음을 정했다. 이 도시에 올 때 자신은 도장 깨기 같은 관광이나 세계 제1도시 체험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럼 무엇을 원했나.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지만 일단 떠나온 것만으로도 첫번째 목적은 이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이 도시 사람처럼 일상을 보내보는 일이 아닐까. 이 동네 사람처럼 그리고 이 집의 주인인 것처럼. 승아의 머릿속에는 그 결정을 승인해주는 제목도 떠올랐다. 낯선 도시에서의 열흘, 현지인처럼 살아보기. 여성 매거진 경력 2년이 헛발질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승아는 핸드폰 메모 어플을 켜고 아이템 회의를 준비할 때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항목을 입력했다. 생활공간 파악하기, 마트에서 장보기, 동네 산책, 까페와 식당 체험, 이웃에게 인사.

공간을 제대로 파악할 겸 먼저 집 안 청소부터 하기로 했다. 승아는 잠옷을 벗고 자신이 좋아하는 디즈니 캐릭터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커튼을 활짝 열어젖히는 순간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서서 그리 신선하다고 할 수 없는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책장과 화분과 마띠스 액자를 배경으로 셀카도 몇장 찍어두었다.

민영의 구식 청소기는 무겁고 소음이 요란했다. 코드 길이가 짧아서 방에서 마루, 주방으로 옮겨 갈 때마다 매번 콘센트를 찾아 다시 플러그를 꽂아야 했다. 작년 말 승아가 회사 송년회의 경품 추첨에서 중국제 로봇 청소기를 받아 오기 이전에도 승아네는 무선 청소기를 썼다. 승아의 이마 위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욕실 청소도 쉽지 않았다. 누렇게 변색한 욕조의 긁힌 자국은 세제로 여러번 닦아도 소용없었다. 높은 곳에 고정돼 있는 샤워기의 줄이 빠지지 않았으므로 대야에 따로 물을 받아서 뿌려가며 청소를 해야 했다. 깨진 타일에 하마터면 손을 베일 뻔도 했다. 승아는 욕조 가장자리에 놓인 샴푸와 린스, 바디클렌저 병도 하나하나 꺼내서 닦았다. 모두 한국 마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상표의 대용량 제품이었다. 욕실장 안에 있는 바디로션과 비누 역시 싸고 실용적인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민영이 출근한 뒤 살펴본 서랍장 위의 화장품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기본적인 것만 갖춰져 있었고 한국식으로 말하면 모두 로드숍 제품이었다. 승아에게 그것은 좀 의외였다.

어릴 때부터 민영은 외국여행이 잦은 아빠와 세련된 엄마의 취향 덕분에 고급 물건들을 갖고 있었다. 민영의 부모는 외동딸에게 가방과 필기구, 립밤과 핸드크림까지 고급 브랜드로 갖춰주었다. 승아는 엄마가 남동생의 학원비를 번다며 백화점에서 주부사원으로 일할 때 용돈을 받으러 갔다가 구경해본 물건들이었다. 지금 승아는 마트 제품을 쓰지 않았다. 샴푸나 화장품은 프랑스 약국에서 비싸지 않게 직구하는 방법을 알았고 바디 제품도 친환경 브랜드의 제품을 썼다. 상품권이 생기면 백화점에서도 물건을 구입했다. 피부과와 피부 관리숍에 들락거리는 주변 사람들에 비하면 그다지 유난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SNS에 올라온 광고를 보고 에코백이나 양말 같은 걸 자주 사는 승아에게 엄마는 돈 낭비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푼돈을 아껴봤자 절대 목돈이 되지 않는다는 게 승아의 평소 생각이었다.

욕조 위쪽으로 난 작은 유리창을 닦으려던 승아는 창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밖에서 열지 못하도록 누군가 창틀에 못을 쳐서 단단히 고정해놓았던 것이다. 다른 것들이 모두 녹슬거나 깨지고 변색한 데 비하면 못은 새로 박은 듯 은색이 선명했다. 누가 해준 것일까. 불현듯 그 사진 액자가 떠오르면서 왜 그것이 책장에 숨겨져 있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주방 청소를 시작하기 전에 승아는 먼저 싱크대와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그릇은 모조리 크기와 재질이 달랐고 냄비나 팬도 코팅이 벗겨진 것뿐이었다. 조리도구도 변변한 것 하나 없었다. 임시 거처에서의 임시방편이었을 그 물건들은 오랜 유학생활의 흔적일 것이다. 페인트칠을 해서 깔끔해 보였을 뿐 주방은 구석구석 살펴볼수록 한심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오래된 집이라지만 나무문이 달린 싱크대와 고풍스러운 놋쇠 손잡이라니. 하나뿐인 주방등은 너무 어두워서 자칫하면 칼질을 하다 손을 다칠 것 같았다.

승아가 부모와 함께 사는 집은 얼마 전 입주한 새 아파트였다. 디지털 방범 시스템을 갖췄고 모든 전자제품이 센서나 리모컨, 음성 명령으로 조정되었다. 엄마가 특히 마음에 들어하는 주방에는 하이그로시 싱크대와 대리석 상판이 기본이었고 빌트인 텔레비전과 아일랜드 식탁이 갖춰져 있었다. 가스가 아닌 전기레인지였고 물을 틀 때는 발로 페달을 밟았다. 승아는 학자금 융자를 갚을 때까지만 그 집에서 살기로 했다. 잔소리와 참견도 지겨웠고 매달 엄마에게 내는 생활비도 부담이 됐다. 독립을 하게 되면 묵은 짐은 다 버리고 북유럽 스타일로 미니멀하게 꾸미고 살고 싶었다. 변두리 지역의 작은 평수밖에 못 가겠지만 집은 되도록 신축이어야 했다. 민영이 이 집으로 이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전에 살던 집에 쥐가 들어와서였다는 것도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집 안은 점점 더 더워졌다. 햇빛이 마룻바닥을 한껏 달궈놓은 바람에 맨발로 밟기가 꺼려질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승아는 얼른 현관 벽에 몸을 붙이고 숨을 죽인 채 바깥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손님이 있는지 확인하러 온 관리인 할머니이거나 아니면 청소 소음에 항의하러 온 아래층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참을 지나도 밖에서는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승아는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았다.

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 문을 여는 것은 처음이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창봉투인 걸로 미루어 무슨 고지서 같았다. 그것을 집어든 승아는 마치 낯이라도 익히는 것처럼 복도와 계단 주변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본 다음 문을 닫았다. 봉투는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가기 전에 생각을 고쳐 내용물만 꺼내 식탁 위에 놓고 찢어진 봉투는 쓰레기 더미에 합쳤다.

승아는 망가진 소파에 관리인 할머니가 앉아 있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만약 마주치더라도 이웃답게 인사를 건네야 한다고 여러번 다짐을 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다행히 소파에는 아무도 없고 보도블록을 달구며 햇살이 하얗게 빛날 뿐이었다.

 

민영은 일찍 퇴근했다. 만나기로 한 사람에게서 연락이 안 와 일찍 집에 온 것이었다. 민영과 승아는 동네 그리스 식당에 갔다. 여러 식당 중에서 민영이 선택한 데는 정통 방식을 내세우는 곳으로 식당 어플인 엘프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했다. 승아는 낯설고 두꺼운 메뉴판을 읽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민영이 주문하는 대로 차가운 수프와 꼬치구이, 가지와 양고기를 다져넣은 무사카, 포도잎으로 싼 돌마에 우조도 한잔 곁들였다. 음식이 나올 때마다 사진을 찍긴 했지만 승아는 가로수길에서 먹어본 그리스 음식보다 낫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내장식도 그쪽이 더 지중해 분위기가 났다.

음식을 날라 오는 종업원 남자는 지나치게 말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민영은 입꼬리를 올리고 활짝 웃으며 대꾸해주었다. 그러나 그가 자리를 뜨자 다시 평소의 얼굴로 돌아가서는 저 사람도 이 동네에 산다는 걸 보니 건너편 건물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 중 하나일 수도 있다고 작게 말하는 거였다. 뒤끝 장난 아니네, 승아는 생각했다. 커튼을 안 쳤다고 자신을 비난하는 게 틀림없었다. 조금 전 집에 들어서자마자 열려 있는 커튼을 신경질적으로 쳐다보는 민영에게 청소를 했다고 변명해야 했던 것이다. 민영은 청소도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럴 필요 없는데,라는 말을 다소 차갑게 내뱉었다. 싱크대 선반을 열고 물컵을 꺼내려다 승아를 돌아보며 또다시 입을 열었다. 정리도 했구나. 위치가 다 바뀌었네. 그 역시 못마땅한 어조였다.

계산서를 가져온 종업원은 민영과 몇마디 농담을 주고받은 후에야 카운터 쪽으로 돌아갔다. 승아는 계산서와 민영이 거기에 적어 넣는 팁의 액수를 보았다. 가로수길 식당보다 세배는 비싼 식사였다.

잠시 누그러졌던 승아의 마음이 다시 얼어붙은 것은 식탁 위에 올려놓았던 고지서 때문이었다. 고지서를 발견한 민영은 의아하다는 듯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아래층 우편물이잖아. 불안한 얼굴로 경위를 설명하는 승아에게 민영이 고지서 맨 위에 인쇄된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민영의 이름은 아니었다. 봉투를 버렸다는 말에 민영은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뭐야, 그럼 어떻게 돌려줘. 이거 독촉장이라 집 앞으로 배달된 건데. 승아는 어차피 아무것도 안 적힌 흰색 창봉투인데,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자신은 그냥 현관문 앞에 놓여 있는 봉투를 주워 온 것뿐이었다.

그날 밤 민영이 잠든 뒤 승아는 식탁 앞에 앉아 핸드폰으로 항공사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리고 Q&A 카테고리에 들어가 자신의 질문을 입력했다. 출발 날짜를 앞당기려고 하는데 항공권 변경 가능한가요? 빠른 답장 부탁드립니다. 내친김에 자주 묻는 질문과 답변 항목에도 들어가보았고 내일과 모레 출발하는 항공권 시간도 검색했다. 그날은 방에 들어가 누운 지 얼마 안 돼 잠이 들었다. 사흘째가 되자 드디어 시차에 적응한 모양이었다.

 

 

6. 민영의 화요일

 

마이크의 출장은 일요일까지였다. 그는 고양이가 사흘은 혼자 지낼 수 있다며 목요일이나 금요일 중 하루만 들러달라고 부탁했었다. 사료와 물을 새로 주고 화장실을 치우는 간단한 일이었다. 고양이가 숨어서 나오지 않겠지만 정서적 안정을 주기 위해 가능하면 집에 좀 머물러달라는 당부도 있었다. 민영은 하이킹 친구들과 그 집에 갔을 때 몇번 쓰다듬어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고양이를 돌보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마이크의 공간에 혼자 들어가는 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래도 되냐는 거였다. 의심스러우면 안 하는 쪽이 자존심을 지키는 민영의 방식이었지만 그러다가 고양이를 오랫동안 방치하게 될까봐 불안했다.

마이크가 돌아오는 날짜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 달력을 연 민영은 다음 주가 엄마의 생일이라는 걸 알았다. 메모를 해놓고도 깜빡했던 것이다. 더이상 집에서 돈을 받지 않게 되면서 정기적으로 연락할 일이 없어진 탓이기도 했다. 엄마를 만난 것도 2년 전 졸업식이 마지막이었다. 취직이 안 되면 석달 안에 이 나라를 떠나야 했으므로 그토록 힘들게 맞이한 졸업이 기쁘지만은 않았다. 취직에 대한 간절함은 엄마도 민영 못지않았는데 이혼수속이 끝나면 민영의 뒷바라지는커녕 엄마 자신의 생계도 걱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공항에 도착한 엄마는 여전히 화사하게 옷을 차려 입었고 민영의 졸업선물로는 신형 태블릿PC를 사주었다. 이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아빠가 동부의 교환교수로 올 무렵에도 민영 부모는 이미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엄마가 아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코 이 나라로 따라온 것은 오직 민영 때문이었다. 민영을 사립학교에 유학시킬 형편은 안 되었고 공립학교에 보내려면 아빠의 J-1 비자가 필요했다. 엄마와 민영은 J-2 비자로 들어왔다. 아빠가 2년 기한을 채우고 돌아갈 때 엄마는 함께 귀국해야 했다. 혼자 남은 민영은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긴 유학생활을 견뎌냈고 엄마는 민영이 학업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빠의 오래된 이혼 요구를 받아들였다.

졸업식 다음 날이었던가 엄마와 함께 소호에 나가기로 했다.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던 시절이라 그날도 오전에 공립도서관 부근에서 면접 약속이 잡혀 있었다. 민영은 근처 커피숍에 엄마를 기다리게 하고 면접 장소로 갔다. 면접관은 민영의 성적이며 이력서가 나무랄 데 없고 면접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외국인 신분 보장을 해주는 일이 회사에 부담이 되니 연락을 기다려보라고 말했다. 탈락이라는 뜻이었다. 천천히 걸어서 커피숍으로 돌아온 민영은 어쩐지 선뜻 안으로 들어갈 마음이 들지 않아 잠시 유리창 너머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외국인들 사이에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서 문 쪽을 바라보고 있는 왜소하고 초조한 모습. 엄마가 초라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조금 뒤에야 민영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민영이 다가오는 걸 바라보던 엄마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옷이 좀 그렇네. 다려줄걸 그랬다. 엄마는 한눈에 면접이 실패라는 걸 알았고 그래서 옷차림을 핑계 대는 거였다.

소호에서는 브런치를 먹고 작은 갤러리들을 구경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명품 브랜드의 매장 앞을 지나던 엄마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고 진열장에 딱 한벌 전시돼 있는 여성 정장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 안은 소름 끼칠 만큼 서늘하고 조용하고 좋은 냄새를 풍겼다. 거의 마네킹처럼 보이는 여성 판매원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엄마는 가죽 소파에 앉았고 민영은 엄마가 진열장에서 본 정장을 입기 위해 거울이 달린 커다란 탈의실로 들어갔다. 옷은 지나칠 정도로 잘 맞았는데 그것은 판매원과 엄마와 민영 세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가격은 민영이 지금 입고 있는 할인매장 옷의 스무배가 넘었다. 민영과 엄마가 편히 상의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며 판매원은 물을 마시겠냐고 물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탄산수 두병과 얼음이 든 유리잔을 메탈 쟁반에 받쳐 가져왔다.

민영은 그 옷을 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 옷을 입고 면접을 봐도 어차피 취직은 되지 않는다는 걸 엄마도 민영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엄마에게는 그 옷을 사줄 능력이 없었다. 엄마 자신은 탈의실에서조차 입어본 적 없는 옷이었다. 그럼에도 사자고 우기는 이유는 단지 그 옷이 민영의 등뼈를 곧게 세우고 얼굴에 조명을 반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해온 힘든 뒷바라지의 정점에서 마지막으로 무리한 안간힘을 써볼 작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민영이 그 옷을 사지 않겠다고 강력히 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있지 않았을까. 사라고 우기는 자신의 모습을 각인시키는 데까지만 성공해도 그 옷은 어느 정도의 역할은 해내는 셈이었다. 서로가 알면서도 연기를 하고 그 연기에 진심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 그런 기만이 필요할 만큼 둘 다 약해져 있었다. 그들은 끝까지 매뉴얼 친절을 잃지 않는 마네킹 여성의 작별인사를 뒤로하고 그곳을 나왔다. 씁쓸하고 또 창피하기도 했지만 엄마와 민영 둘 다 후회할 일을 저지르지 않아 안도하는 마음이 조금 더 컸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민영은 이따금 그 옷을 생각했다. 부드럽고 편안한 감촉과 몸을 감싸는 가벼운 탄력, 윤택함이 배어 나오는 간명한 선. 탈의실 안쪽의 거울 앞에서 민영은 스스로의 눈에도 사뭇 달라 보이는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빙긋 웃음을 던져보았었다. 그런 당당하고 여유로운 모습이라면 정말로 면접에 합격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때 민영에게 부족한 점수는 바로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날 밤 엄마와 함께 와인을 마셨다. 취기를 빌려 민영은 엄마에게 아무래도 이곳에서 자신을 받아주는 곳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언제나 그랬듯 엄마는 민영이 얼마나 뛰어나고 철든 아이였는지 강조하며 민영을 격려했다. 순간 민영은 오랫동안 입안에서 맴돌던 말을 뱉고야 말았다. 엄마, 나 그냥 한국 돌아갈까. 엄마는 갑자기 침묵했고 손에 잡은 와인잔을 내려다볼 뿐 끝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민영은 의미 없이 눈을 깜박이며 한사코 입술을 깨물었다. 허공으로 발을 들어 올렸는데 눈앞에는 막막한 어둠뿐이어서 어디에 그 발을 내려놓을지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무엇이 자신을 이곳으로 밀어붙이는지 돌아보지 않은 채 안간힘을 쓰며 달려왔다는 사실만이 아프게 마음에 새겨졌다.

그때 민영과 엄마는 둘 다 자기가 일궈놓은 세계로부터 거부당했고 삶이 임시 거처였고 돌아갈 곳은 없었다. 엄마에게는 남아 있는 기회마저 그다지 없었다. 일생을 두고 모두를 준 존재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더이상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만큼 그녀를 무력하게 만드는 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민영은 엄마의 생각처럼 뛰어나지도 철이 든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하나뿐인 가족의 생일을 잊어버리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7. 화요일

 

민영이 출근한 뒤 승아가 항공사 홈페이지에 접속하니 밤새 답변이 올라와 있었다. 가능합니다, 고객님. 무료 상담전화로 문의하세요. 승아는 일단 핸드폰을 놓고 머릿속으로 날짜 계산을 해보았다. 당장 내일 떠나는 항공권은 없을지도 몰랐다. 출발은 모레 목요일쯤으로 잡는 편이 확실할 것 같았다.

그날 승아는 동네 산책을 시도했다. 이틀 뒤에 떠난다고 생각하니 계획 같은 것도 필요 없어 한결 홀가분했다. 나가기 전에 전화기 속의 지도와 번역기 앱을 시험 삼아 작동시켜보았다. 열쇠와 지갑은 에코백에 넣어 어깨에 멨고 썬글라스도 썼다.

첫날 민영과 걸었던 길을 떠올리며 지하철역까지 가는 데에 성공했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갔더니 작은 교회 옆에 명물 도넛집이 나왔다. 그리고 그 너머 교차로 코너에 스타벅스가 있었다. 마치 고향 사람이라도 만난 듯 들뜬 걸음으로 승아는 그곳으로 향했다. 영어 주문이 긴장은 되었지만 일단 익숙한 메뉴판을 보니 용기가 생겼다. 마침내 휘핑크림이 잔뜩 얹어진 프라푸치노를 무사히 받아 든 승아의 머릿속에는 그 성취감을 묘사하는 문장이 연달아 몇개 떠올랐다. 서울의 스타벅스에 비한다면 놀라울 만큼 한적하고 소박했지만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내일도 거기에서 시간을 보내면 될 것 같았다. 구체적인 목표와 갈 곳이 있다는 데에 승아는 안도감을 느꼈다.

민영은 퇴근하는 길에 도넛과 쌍벽을 이룬다는 동네 명물 피자와 콜라를 사 왔다. 민영과 함께 그것들을 먹으며 승아는 몇번이나 한국에 일찍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민영이 계속해서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아이템이 뭐냐고 물어왔으므로 적당한 기회가 없었다. 아직 항공사에 상담전화도 걸어보지 못한 상태였다. 민영은 밤늦도록 식탁에 앉아 인터넷 쇼핑몰을 뒤지는 것 같았다.

승아가 자리에 누워 항공사 홈페이지의 Q & A와 항공권 출발시간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있는데 민영이 방으로 들어와 말을 건넸다. 나 뭐 하나 부탁해도 돼? 뭔데? 승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민영은 엄마 생일이 다음 주인데 제 날짜에 도착하도록 선물을 부치기에 너무 늦어버렸다고 말문을 뗐다. 민영이 주문한 선물을 한국으로 가져가서 민영의 엄마에게 전해주는 것. 그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물건을 받을 때까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건 승아의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배달이 언제 오는데? 비즈니스 데이로 이삼일이라니까, 금요일쯤 올 거야. 뭐가 그렇게 늦어. 한국은 당일배송도 많은데. 승아가 투덜거린 진짜 이유를 민영은 알 턱이 없었다. 너 불편하면 그냥 소포로 보내도 돼. 그대로 방을 나가려는 민영을 향해 승아는 생일선물이라면서 날짜는 지켜야지,라고 대꾸하고 말았다. 승아의 성실함에는 어떤 종류의 충성도 같은 게 포함돼 있었고 사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게 더 근접한 이유였을 것이다.

 

 

8. 민영과 승아의 수요일

 

승아는 다시 현지인으로 살아보기 모드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마트에 가는 게 순서일 것 같았다.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승아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미소가 떠올랐다. 시원하고 쾌적했으며 지금까지 이 도시에서 본 것 중 가장 친근한 풍경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국의 슈퍼마켓과 비슷한 카테고리와 동선으로 진열된 물건들 앞에서 거의 해방감을 느낀 그녀는 거리낌 없이 카트를 채우기 시작했다.

민영의 도시락 샌드위치에 넣을 햄과 치즈를 샀고 생수와 자몽맛 탄산수를 샀고 사과와 바나나와 초콜릿과 과자도 샀다. 토마토와 양배추, 당근, 브로콜리, 사과를 각기 봉투에 가득 담았는데 변비에 시달리는 민영을 위해 해독주스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격이 너무 싸서 와인도 한병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와인 오프너와, 그 옆에 걸려 있던 감자깎이까지 카트에 넣고 계산대에 줄을 선 뒤에야 승아는 혼자 들고 가기에 너무 많은 양이라는 걸 깨달았다. 양손에 무거운 비닐봉투 네개를 나눠 쥐고 또다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두 블록을 걷고 4층 계단을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부터는 본격적인 주방 일이 시작되었다. 사실 승아는 해독주스를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만드는 걸 곁눈으로 보았고 주는 대로 마시기만 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녀는 일주일분을 한꺼번에 만들어둘 계획이었다. 그 많은 재료들을 몇번에 나눠서 씻고 모조리 깍두기 모양으로 자르는 데까지 한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것들을 익히는 과정은 더욱 힘들었다. 곰솥이 있을 리 없었으므로 작은 냄비로 몇번이나 끓이고 덜어내고 끓이기를 반복해야 했다.

창문도 에어컨도 없는 주방에서 승아는 디즈니 실내복 윗도리를 벗어버리고 브라 차림으로 가스 불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인터넷 레시피에 있는 대로 야채 끓인 물과 건더기를 분리해 식혔는데 실내 온도가 너무나 높아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플라스틱 통이란 통은 모조리 꺼내서 그것들을 모두 담아놓고 나니 손끝 하나 움직일 기력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칼이고 도마고 냄비고 다 늘어놓은 채 소파에 쓰러져버렸다.

설핏 잠이 들었던 승아는 문 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민영이었다. 몸을 일으킨 다음 순간 승아는 깜짝 놀랐다. 민영이 발소리를 쿵쿵 내며 다가와서 열려 있던 커튼을 거칠게 닫았던 것이다. 목소리도 약간 날카로웠다. 집이 왜 이렇게 덥니. 해독주스 좀 만들었어. 민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운데, 오늘 같은 날 누가 가스불을 써. 집 안이 완전 찜통이네. 민영은 주방에 가서 식탁에 늘어놓은 온갖 종류의 플라스틱 통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많이 했어? 먹을지 안 먹을지도 모르는데, 물어보지도 않고. 그러고는 승아가 다가와 냉장고 안의 생수를 꺼내주는데도 이 도시의 탭 워터는 믿을 만하다며 구태여 수돗물을 그냥 따라 마셨다.

도대체 쟤는 왜 저러는 걸까. 민영은 생각했다. 왜 저렇게 한결같이 경계라는 게 없을까. 첫날부터 그랬다. 왜 남의 물건을 시찰하고 뒤집어놓는 것일까. 마이크가 끝내 연락을 안 하고 출장을 떠나버려 가뜩이나 마음이 상한 민영에게 혹시 미국인 남자친구가 있냐고 묻는 품이 책꽂이에 넣어둔 사진 액자를 본 게 틀림없었다. 오늘만 해도 민영은 퇴근길 전철 안에서 몹시 우울했고 승아가 집에 있다면 함께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하며 기분을 풀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나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덮쳐오는 열기, 난장판이 된 주방, 그리고 커튼을 열어놓은 채 브라 차림으로 잠들어 있는 승아의 모습을 보자 자기의 공간이 훼손이라도 당한 기분이었고 갑자기 피로가 몰려들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승아는 천진하다 못해 눈치가 없었다. 돈까스냐 떡볶이냐 같은 사소한 일도 쉽게 결정 못해 일일이 민영에게 의지하는 한편으로 고집이 세고 인정욕구가 강했다. 민영이 유학을 떠날 때 승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밤새 쓴 손편지를 건네주었는데 미국 친구가 생기면 자신처럼 평범한 소꿉친구 따위는 곧 잊어버릴 거라며 민영이 아니라는 말을 스무번쯤 할 때까지 훌쩍임을 멈추지 않았다. 일주일분의 해독주스라니. 손편지처럼 고맙고 감동적이지만 그것을 영원히 간직하라는 말만큼이나 부담스러웠으며 또 궁금하지도 않았다. 친하다고 해서 비슷해질 필요는 없었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미소를 보내고 손을 흔들면 되었다. 민영은 그것을 납득시키면서 유지해야 하는 관계들이 피곤했고 적당한 기만으로 덮어두지 못하는 자신 역시 지겨웠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승아는 생각했다. 쟤는 어쩌면 저렇게 변함없이 자기 위주일까. 집이 더운 것만 보이고 내가 그 더위 속에서 종일 일한 것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 자기 집을 청소하고 자기를 위해 주스를 만든 것은 중요하지 않고 자기 방식과 다르다는 점만이 문제인 거지. 고생 좀 했나 싶더니 변한 건 하나도 없네. 그렇게 독립적이라면서 부모가 주는 학비로 공부하고 무슨 일이든 친구들보다 높은 점수를 따지 않으면 못 참고.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도 결국은 자신 있는 답안지 제출과 스펙 과시 같은 거였나. 그 사진이 아니었으면 승아는 이 좁고 낡은 집과 더위에 갇혀 집안일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민영의 이기심에 상처를 받고도 또 이렇게 당하고 있는 자신의 한결같은 성실과 적응력에 넌더리가 난 승아는 방으로 들어가서 행어에 걸어놓았던 자신의 옷과 마트에서 샀던 초콜릿이며 과자들을 캐리어 안에 쓸어 넣었다.

 

 

9. 목요일과 금요일

 

다음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민영은 이미 출근한 뒤였다. 해독주스를 마시기 위해 냉장고를 열어본 승아는 민영이 도시락으로 햄치즈 샌드위치를 싸 갔다는 걸 알았다.

그날은 스타벅스에서 시간을 보냈다. 환기가 잘되지 않는 집이라 더운 공기를 피하려면 자신이 빠져나오는 방법밖에 없었다. 승아는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고 노트를 펴놓고 뭔가를 끄적거려보기도 했다. 그냥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도 흥미로웠다. 외국인들 사이에 앉아 있는 일 역시 조금씩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지만 승아는 자리 값으로 스콘을 하나 더 주문해 점심을 때웠다. 돌아오는 길에는 마트에 들러 구경을 하다가 허브 캔디와 캔맥주와 그 옆에 걸려 있는 특이한 모양의 병따개를 샀다. 집에 들락거릴 때마다 신경이 쓰였지만 망가진 소파는 그날도 비어 있었다.

그러나 승아가 누렸던 느긋함은 계단을 올라 현관문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보는 순간 사라졌다. 스티커에 인쇄된 글자를 대략 살펴보니 우편물을 전달하지 못해 도로 가져가니 우체국에 와서 찾아가라는 내용 같았다. 민영이 주문한 엄마의 선물이 배달되었던 모양이었다. 내일 온다고 하지 않았나. 무엇 하나 예상대로 되지 않는 나라였다.

회사에서 밤늦게 돌아온 민영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물건을 좀 빨리 보낸 모양이라며 우체국에서 찾아오면 된다고 말했다. 물론 승아가 가야 할 것이었다. 승아가 사는 아파트에는 무인 택배 보관함이 있었다. 아니더라도 경비실에서 받아주거나 편의점에 가서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럼 직장인들은 어떻게 택배를 받니? 불편하지. 민영은 그렇게만 대꾸했다.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승아가 스타벅스에 갔다고 하자 민영은 미국 애들이 일껏 해외에 나가서 맥도날드 찾는 거랑 비슷하다고 말했다. 미국 애들은 미국 밖으로 나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고 책도 미국 저자의 책만 읽는다는 말과 함께, 근데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스타벅스를 좋아하는 거지,라고 덧붙였다.

 

금요일에 승아는 동네 우체국을 향해 출발했다. 원하던 대로 구체적인 목표와 갈 곳이 확실히 생긴 셈이지만 전혀 반갑지 않았다. 어김없이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는 날씨였다. 버스를 타는 건 아직 자신이 없었으므로 핸드폰 속의 지도를 보면서 30분 넘게 걸어야 했다.

우체국에 번호표 같은 건 없었다. 눈치껏 창구 앞에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가 미리 외워 온 대로 우편물을 찾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하며 승아는 직원에게 스티커를 내밀었다. 그러나 스티커를 확인한 직원은 계속해서 한 손으로 뭔가 밀어내는 몸짓을 해보였다. 가라는 뜻일까. 왜 우편물을 주지 않는 걸까. 말은 빨라서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승아의 울먹이는 듯한 표정에 마침내 직원이 마뜩잖은 얼굴로 한 단어씩 끊어서 발음해주었고 승아는 귀가 아닌 눈치를 통해서 우편물이 이미 배달 트럭에 실려 나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뛰다시피 해서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온 승아의 눈에 도로가에 주차돼 있는 우체국 트럭이 보였다. 유니폼을 입은 배달원이 운전석에 타려 하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려가보았지만 승아의 도착과 동시에 트럭은 떠나버렸다. 그리고 트럭이 떠난 자리에 망가진 소파가 나타났고 거기에는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뚱뚱한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승아는 못 들은 척 재빨리 1층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달음에 4층까지 올라가보니 짐작대로 또다시 문에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이번에는 V자가 검은색이 아니라 붉은색 펜으로 표시된 스티커였다.

승아는 그것을 핸드폰으로 찍어 민영에게 보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핸드폰 액정 위로 뚝뚝 떨어졌다. 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 내가 지금 우체국에 전화해볼게. 뭔지 다급하고 책임감을 느낀 나머지 승아는 내일은 우체국 여는 시각에 맞춰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조금 뒤 민영에게서 답문자가 왔다. 내일은 토요일이었다. 소포는 어차피 월요일에나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화요일은 원래 예정된 승아의 출발일이었다. 승아가 냉장고의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데 핸드폰 액정에 새로운 문자가 떴다. 오늘 일찍 퇴근해. 사실 민영은 매일 저녁 일찍 집에 들어왔었다.

 

 

10. 금요일

 

민영이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승아는 텀블러에 커피를 담고 생수도 한병 챙겼다. 동네 공원일 뿐이지만 민영과의 외출은 처음이었다. 그리스 식당은 바로 집 앞이라서 외출 기분이 나지 않았었다. 걸어가기엔 좀 먼 거리라는데도 승아는 걷는 쪽을 택했다. 저녁 공기가 그런대로 쾌적했고 가는 길에 상가도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빵집에 들러 저녁으로 먹을 바게뜨 샌드위치를 사 갈 생각이었다. 잠깐 들를 데가 있는데 갔다 와도 되지? 민영이 물었다. 어딘데? 친구네 집. 고양이 밥을 좀 줘야 돼서. 민영은 승아에게 자기가 그곳에 가 있는 동안 공원에서 30분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고 말했다. 친구가 남자이긴 한데 남자친구는 아니야. 묻지 않은 것까지 설명해주었다.

민영 친구의 아파트는 공원 바로 옆이었다. 승아는 어두워져가는 공원을 혼자 산책했다. 수풀 사이로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야외무대와 트랙이 보였다.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자 광대한 하늘 아래 이스트강이 펼쳐져 있었다. 이따금 강 건너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와 수면과 승아의 머리카락에 작은 물결을 만들었다. 강기슭의 벤치에 앉아 승아는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에 점점 붉은 구름이 퍼져가면서 청색과 흰색과 붉은빛이 뒤섞여 한순간 천지를 뒤덮었다. 붉은 강물이 켜켜이 결을 드러내며 조용히 흔들렸다. 승아는 강 건너편에 길게 늘어선 건물들에 어둠이 드리우는 걸 천천히 바라보았다. 민영의 말대로 아름다운 노을을 보기 좋은 위치였다.

민영은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돌아왔다. 벤치 옆자리에 앉는데 급히 왔는지 숨소리가 가빴다. 승아는 생수를 건네준 다음 종이봉투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반으로 갈랐다. 둘은 나란히 강 쪽을 바라보며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조금 뒤 민영이 갑자기 승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내 눈 좀 봐줘. 왜? 나 사실 고양이 알러지 있거든. 친구 집에 갈 때마다 약을 먹고 가는데 오늘은 깜빡했어. 승아가 자세히 보니 민영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알러지 있는 거, 친구도 아니? 아니. 나중에 말하려고 했지. 언제? 글쎄. 걔한테 내가 고양이만큼 중요해졌을 때? 그 말을 한 뒤 민영은 갑자기 활짝 웃었다. 여기서 오래 혼자 살다보면 그냥 친절한 건지 특별한 감정인지 잘 구별 못하게 돼. 자기들끼리 선을 그어놓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보이려는 사람들이 좀 있거든. 그건 어디 살든 마찬가지 아냐? 승아가 대꾸했다. 다음 순간 승아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말야. 왜 얼마 동안 어디에를 생각해봐. 거기에 대답만 잘하면 문을 통과할 수 있어. 민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눈치였다. 둘은 묵묵히 강 건너를 바라보며 샌드위치를 씹었다.

노을이 사라진 하늘과 강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강 건너편 건물들은 마지막 빛에 의지하여 검은색 조형물처럼 변하더니 어둠이 더 깊어지자 점점 화려한 불빛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불빛의 그림자가 강물에 반사돼 어둠을 밀어내듯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었다. 근데 저기 건너편은 어디니? 승아가 물었다. 맨해튼. 여기에서 보아야 한눈에 볼 수 있어. 가까이 가면 너무 크니까. 승아는 머릿속으로 이 도시에서 남은 시간을 헤아렸다. 이틀은 더 맨해튼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