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더 많은 아름다움이 있다
오연경 吳姸鏡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쓰는 기계의 존재론」 「김수영, 신화인가 현재인가」 등이 있음.
korin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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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시인과 나는 비슷한 시기에 등단해 활동해왔지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거의 접점이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의 첫 시집이 일으킨 여러가지 의미의 파장을 흥미롭게 지켜보았으나, 그에 대해 글을 쓰거나 생각을 정리할 기회는 우연히도 주어지지 않았다. 인맥이든 글의 접점이든 문단의 관계도라는 게 있다면 내가 서 있는 자리는 황인찬 시인의 자리로부터 상당히 먼 지점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인터뷰를 수락하고 첫 대면을 하기까지 그 거리는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작년 가을부터 나는 황인찬 시인의 목소리를 종종 듣고 있었다. 그는 모 라디오 프로그램의 고정 코너에 출연하고 있었는데, 방송 시간이 마침 내가 오전 강의에 맞춰 이동하는 시간이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그가 추천하고 낭독하는 시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고, 『사랑을 위한 되풀이』가 출간될 즈음에는 새 시집에 수록된 「소무의도 무의바다누리길」 낭독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 이번 시집의 월간지 리뷰를 청탁받았고, 막 그 원고를 쓰던 중에 이 인터뷰를 요청받았다. 사소하게 겹친 우연들이 주저하는 마음을 덮었다. 인터뷰 날짜는 빠르게 잡혔다.
겨울답지 않은 날씨의 늦은 오후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초면의 그에게 나도 모르게 오랜만에 보는 지인 대하듯 인사말이 툭 튀어나왔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아요.”
그도 오랜만에 만난다는 듯이 받아주었다.
“군대에서 빠진 살이 회복이 안 되네요.”
살이 빠졌다는 느낌은 어디에서 온 걸까? 미세한 변화를 감지할 만큼 실감을 가진 사이가 아니었으니, 곳곳에서 보고 듣게 되는 그의 근황과 소식을 실감처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만큼 황인찬은 매체에 자주 노출되는 시인이다. 잡지나 기사에 딸린 사진도 많지만 낭독회나 소모임에서 독자들이 직접 찍어 올린 사진도 종종 보였다. 시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겪는 현상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그는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창비서교빌딩의 지하에 새로 마련된 공간은 바쁘게 움직이는 사진작가와 덩치 큰 조명기구, 그리고 편집자를 포함해 아직은 서먹한 세 사람이 함께 있기에는 다소 좁았음에도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느니 지금 한번 잘하는 게 낫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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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탁자 위에 놓고 마주 앉으니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표지에 대한 후일담으로 이어졌다. 그는 ‘연말 에디션’으로 나온 별도 디자인을 마음에 들어했다. 두겹의 표지가 마치 “겨울에 생각하는 여름밤에 대한 시”를 표현한 듯 보였다.
이 시는 겨울에 생각하는 여름밤에 대한 시,
출출한 밤이 오면 생각나는 시
똠은 끓이고, 얌은 새콤하고, 입맛 없을 때 아주 좋은 시,
놀 거 다 놀고, 먹을 거 다 먹고,
그다음에 사랑하는 시
—「레몬그라스, 똠얌꿍의 재료」 부분
표지를 만들 때는 몰랐는데, 나오고 보니까 그렇게 된 것도 있다. 표지를 결정하면서 편집자, 디자이너와 같이 고민을 많이 했다. 과일 이미지로 하고 싶은 생각은 확고했다. 처음 후보 중에 하얀 접시 위에 감이 예쁘게 올려진 그림이 있었다. 그것도 정말 좋았는데 선택을 안 한 건, 가을과 겨울의 계절감이 붙을 것 같아서였다.
선명한 여름 과일 이미지와 그 위에 눈처럼 투명하게 내려앉은 흰색 표지. 뜨거웠던 지난여름과 그것을 되새기며 생각하는 이후의 겨울이라는, 이번 시집의 주요 구도가 이렇게 물성으로 구현된 것인가 싶었다. 표지를 덮고 있는 반투명 종이의 재질이 마치 지나간 시간을 가리면서 비춰내는 생각의 사후 작용 같았다. 지나친 과잉 해석일까?
그런데 그런 우연처럼 보이는 것들이 참 잘 붙는 것 같다. 『구관조 씻기기』(민음사 2012)를 냈을 때 김나영 평론가가 어느 글에서 “새로운 관조”라고 썼는데, 그때 나는 ‘구관조’라는 단어 안에 ‘관조’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그 평을 보고 정말 그렇네, 했다. 어쩌면 무의식중에는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도 같다. 책을 내고 돌이켜보면서, 내가 뭘 했던 거지? 다시 생각하면서 뒤늦게야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잘 붙는다’라는 그의 말은 여러모로 적절한 표현이었다. 우연으로 보이는 것들이 자석처럼 붙는 데에는 한 단어가 사전적 의미를 초과하여 거느리는 의미의 파장과 그 안에서 작용하는 언어 공동체의 집단적 무의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 역시 믿는다. 어쩌면 황인찬은 단어나 구문이 거느릴 수 있는 최대치의 의미의 바다에서 ‘잘 붙는 것들’을 골라내 배치하는 감각을 타고난 시인인지도 모른다. 어렵지 않은 단어와 구어체에 가까운 단순한 구문을 사용하여 풍부한 의미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그의 시작(詩作) 방식도 그러한 감각에 기대고 있을 것이다. 황인찬의 시는 쉽게 읽히면서도 의미가 단순하지 않고, 의미가 잡히지 않는데도 정서적 몰입이 가능하다. 그가 첫 시집에서부터 준비한 “미래의 과일”이 바로 그런 맛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
말린 과일에서 향기가 난다 책상 아래에 말린 과일이 있다 책상 아래에서 향기가 난다
나는 말린 과일을 주워 든다 말린 과일은 살찐 과일보다 가볍군 말린 과일은 미래의 과일이다
—「건조과」 부분(『구관조 씻기기』)
생과일의 즙은 입으로 들어와 곧바로 맛을 전달하지만, 말린 과일의 향기는 접촉 없이도 공간을 가득 채운다. 시는 깨물어 과즙을 맛보는 대신 잘 말렸다가 천천히 우려 향기로 즐길 수도 있다고, 마르는 동안 즙에서 향으로 응축된 의미는 가벼운 몸으로 더 멀리, 더 오래, 미래까지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번 시집에서도 그는 비슷하게 한번 더 말한다.
과일 상자에 남은 과일들은 이미 다 말라버렸습니다 지금쯤이면 그가 씻고 나와 뒤에서 안아주어야 하는데
앞으로 문은 십년 동안 열리지 않습니다
뒤로는 산처럼 쌓여 있는 잼통들……
잼은 대표적 보존식이라 오래도록 먹을 수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깨물면 과즙이 흐르는」 부분
이번에는 말리는 대신 설탕을 잔뜩 넣고 약한 불에 졸였다. “대표적 보존식”인 과일잼이다. 십년 동안 기다리는 당신이 오지 않더라도,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오고야 말 당신을 위해 잼통을 산처럼 쌓아놓고 기다리겠단다. “이미 몇번 실패했고, 지금이 세번째 냄비”라는데, 미래의 독자를 위해 거듭 시도하고 있는 잼 같은 시는 과연 어떤 시일까? “빵이나 비스킷에 발라 먹을 수도 있고, 파이를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고 잼의 용도를 나열하다가 “어, 또 어디에 쓸 수 있지?”라고 묻는 걸 보면, 혹시 그는 시의 쓸모에 관심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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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은 모르겠지만 다만 시가 어디 ‘쓰잘데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시가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사실 시를 가지고 무슨 효과를 불러오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굳이 시로 무언가를 한다면 어떤 쓰잘데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앞에 놓이게 되었다.
‘쓸모’도 아니고 굳이 ‘쓰잘데기’라는 표현을 골라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겸연쩍음이 묻어 있었지만, 이 생각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말할 때는 어떤 단단함이 느껴졌다.
첫번째 시집이 나한테는 이명박정권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한 나름의 생각 같은 것이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두산 기업이 학교를 인수했는데,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회장님 건강하세요!”라는 댓글들이 달린 것을 보았다. 그런 현실을 겪으면서 든 생각과 태도를 반영한 게 첫번째 시집이다. 근데 그다음에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거다. 관조니 뭐니 하는 내 생각이 다 잘못된 것이구나, 내가 진짜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모두가 멈추는 것이면 몰라도 나 혼자 멈추고 혼자 생각하고 말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떡하지? 고민하면서 두번째 시집을 묶었다. 나한테 글쓰기라는 건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 의미있는 것이길 바라면서 하는 일이다.
하지만 두번째 시집 『희지의 세계』(민음사 2015)를 묶을 때까지도 그에게는 ‘잘 써야 한다’는 생각이 일순위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잘 써야 한다는 생각보다 ‘쓰잘데기’에 대한 고민이 앞에 놓일 때 무엇이 달라지는 것일까? 그의 답을 듣지 않더라도 이미 이번 시집에서는 어떤 변화가 감지되고 있었다. 세번째 냄비를 끓이기 시작하면서 그는 잘 쓴 시, 좋은 시가 도대체 무엇인지 고민이 깊어진 것 같았다. 늘 시에 대한 생각을 시로 표현해온 그이지만, 이번에는 그 생각을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구성해내기보다 고민하고 주저하고 방황하는 상태 자체를 그냥 진술하기로 한 것처럼 보였다.
이 시에는 사랑이 없다면 좋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래 같은 것이 어디에도 없다면 좋겠다
그저 늘어지기만 하는 이 글이 시라면 좋겠다
시가 아니라면 정말 좋겠다
이 시에는 이미지가 없고 관념이 없고 사랑만 남는다면 좋겠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
—「그것은 가벼운 절망이다 지루함의 하느님이다」 부분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 시”라는 과감한 자기지시적 표현이다. 『구관조 씻기기』에는 그런 표현이 없었던 것 같고, 『희지의 세계』에서는 「다정과 다감」 「실내악이 죽는 꿈」 「영원한 친구」 등 몇편의 시에서 눈여겨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사랑을 위한 되풀이』에서는 “이 시”라는 지칭과 함께 시를 쓰는 과정이나 쓰이고 있는 시에 대한 중계나 논평을 노출한 것이 자주 목격된다. 시를 쓰는 동안 시인의 머릿속에 지나갔을 생각들이 다시 시를 통해 라이브로 들려오는 느낌이다.
예전에는 잘 쓴 시가 뭔지, 시를 쓴다는 게 무슨 짓인지를 고민했는데, 확실히 이제는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고 잘 만들어진 것인지, 방향 자체를 바꾸게 되었다. 나뿐 아니라 주변의 동료 시인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궁리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 힘을 합쳐서 시를 망치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함께 고민해온 아름다움이라는 지점이 있을 텐데, 그 지점 자체를 벗어나려 하고 깨뜨리려 하고, 그래도 방법이 없으면 일단 훼손이라도 한번 해보려고 하는 것 같다.
이전의 아름다움에서 조금 더 멀리 가보려는 것, 이전에 아름다움이라고 믿어왔던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은 뒤에 오는 모든 시인들의 욕망이자 용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방식은 시인들마다 천차만별이다. 문학과 예술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황인찬이 선택한 길은 무엇일까?
첫 시집 때는 시를 잘 만들려는 생각이 앞서다보니 그만큼 괴로움이 있었다. 나는 이미 내가 쓰고 있는 이 자리, 이 형태에서 조금 벗어나고 싶어하는데 계속 만져야 하니까 거기서 오는 어려움이 있었다. 잘 쓰려면 결정을 해야 한다. 아닌가 싶어도 어쨌든 선택을 해야 하고 유예를 남기더라도 방향을 정해야 한다. 시간이 좀 지나면서 ‘잘 써야 한다’라는 생각이 뒤로 밀려나니까 그런 괴로움이 조금 줄었다. 고민하면 고민하는 대로, 이렇게 봤다 저렇게 봤다 하는 걸 그냥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나한테도 시한테도 나은 일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세번째 시집은 그 자체로 양가적인 태도 같다. 너무 좋고 너무 싫고, 사랑하고 죽이고 싶고 하는 양가적 감정을 갈팡질팡한 상태로 그냥 둔 시들이 훨씬 많아졌다. 그러다보니까 더 웅얼거리게 되고 더 반복적이게 되고 계속 앞의 것을 취소하고 그 취소하는 힘으로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그러면서 이게 무슨 헛짓거리인가, 결국에는 어디로도 못 가고 그냥 혼자 갈팡질팡하는 겨우 그거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 때도 있다.
그의 말을 되뇌면서 시인의 마음속에 어떤 질문이 있었던 것일까 짐작해보았다. 어느 쪽으로도 결정하지 않고 선택을 유예하는 것, 갈팡질팡하는 상태를 그대로 두는 것, 잘 빠진 형태를 만들기 위해 한 방향으로 매듭짓지 않는 것, 그래서 길어지고 반복하고 웅얼거리는 것. 이것은 시가 될 수 없는 것일까? 좋은 시는 아니더라도 ‘그냥 시’도 될 수 없을까? 풀어지고 늘어져서 좋은 시가 못 된다면, 그럼 다른 시는 될 수 없는 것일까? 좋은 시의 쓸모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토록 좋은 시를 쓰려고 하는 것일까? 정확히 이런 질문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어떤 의구심과 회의, 반항심과 용기가 그를 어딘가로 조금씩 데려간 것 같다.
좋은 시인이 되면 뭐 좋은 일이라도 있다는 것처럼
좋은 시인 못 되는 게 무슨 자랑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그렇게 놀기만 하면 훌륭한 사람 못 된다 그렇게 놀기만 하면 소가 되어버린다던 엄마의 말처럼
좋은 시인 못 되면
소라도 되어야지
—「요가학원」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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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는 시의 완고한 형식 안에서, 장르의 양식사 안에서 그 형식과 역사를 갱신하려는 미학적 고군분투로 이루어진다. ‘미래파’라고 호명됐던 지난 2000년대의 시는 바로 그 미학적 투쟁에서 주목할 만한 성취를 보여주었다. 자연인 시인도 아니고 단순한 화자도 아닌, 텍스트의 진술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주체 개념이 등장했고, 그것은 새로운 아름다움의 가능성과 텍스트 안에서의 자유를 허락해주었다. 저 강력하고 아름다운 주체는 시인의 얼굴과는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간주되었고, 현실을 초과하는 주체의 자유는 현실의 감각을 재분배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정치적 가능성을 강하게 의심받았다. 산란하는 미학적 불꽃 속에서 시와 정치 논쟁이 불거지던 시기에 황인찬은 데뷔했다. 그의 시는 이전까지의 프레임과 단절하고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르게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후 십년이 흐르는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최근에 내 시를 봐도 그렇고 다른 시를 봐도 그렇고 ‘시의 화자를 시인과 분리할 수 있나’ ‘이게 시인가, 에세이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우리는 한권의 시집 안에 있는 화자들이 다 다르고 시인과도 다르다고 가정하고 시를 읽는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그것들이 뒤섞이고 있다. 2000년대 미래파 시의 화자의 자리와, 어떤 콘셉트를 잡고 특정한 목소리를 만들어낸 시의 화자의 자리와, 최근 시들에 나타나는 화자의 경향이 매우 다르다고 느낀다. 최근에 화자와 시인의 거리가 확실히 좁아지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화자와 시인을 분리해서 읽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아마도 시인들이 1인칭을 자기와 분리해서 쓰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정직하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진 것 같다.
그는 1인칭의 귀환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담론이나 명명이 아니라 현장에서 쓰고 있는 시인들의 실감으로. 실감은 경험적인 것이고 그래서 힘이 세다. 미래파의 등장과 함께 ‘1인칭 서정의 제국’이 비판적 표어로 공유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변화의 속도가 엄청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파의 모험은 1인칭 자기고백과 결별하고 불가능한 목소리를 소환하여 언어 너머의 세계를 타진하려는 시도였다. 그 모험을 추동한 것은 기존의 서정을 갱신하려는 미학적 욕망이었지만, 소통 불능의 세계라는 비판이 거셌고 대중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면 정직하게 써야 한다는 지금 시인들의 생각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것을 이전 세대의 작위와 연출의 세계에 대한 피로감, 또는 소통 불능의 시에 대한 반작용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1950년대 모더니즘 시인을 정말 좋아한다. 김종삼, 김춘수 등이 시 쓰는 데 많은 생각과 힌트를 줬다. 그런데 요새 김춘수에 대한 마음이 복잡하다. 그가 했던 극단적 순수 형태에 대한 추구를 지금 나는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할 말이 없어졌을 때 대상을 물고 뜯을 것인가, 나를 물고 뜯을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나를 물고 뜯는 쪽이 쓰는 사람의 마음이 편하다. 시라는 게 뭘까, 쓰기라는 게 뭘까를 생각하다보면 리듬이니 이미지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고 결국에는 ‘쓰기’ 행위 하나만 남게 된다. 시 쓰기가 쓰는 행위 자체일 수밖에 없다면 내가 싸워야 할 지점이 거기겠거니 싶다. 지금은 내가 부족해서 자기전시 방식으로밖에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김춘수의 길을 가는 것보다는 지금과 같은 길로 가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한다. 나와 똑같은 생각은 아니더라도 동시대 시인들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춘수의 순수 형태를 향한 집념이든 주체에 대한 미래파의 모험이든, 그것은 텍스트로부터 시인 자신을 분리해내는 접근법이었다. 작위를 벗어나기 위한 작위이거나, 작위를 표면화하는 작위이거나, 쓰기의 주체인 시인은 그 작위적 만듦새의 봉합선 바깥에 거주한다. 그러한 태도가 반드시 정직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직하게 써야 한다는 지금 시인들의 실감은 확실히 그러한 태도의 반대편에 있는 것 같다. 인칭을 다르게 쓰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황인찬의 고백에서 나는 일종의 ‘삼가는 태도’를 감지했다. 그는 무대 바깥에서 무대 전체를 지휘하는 디렉터의 자리를 사양하고 분장도 없이 부끄러움을 무릅쓴 채 무대 위에 서 있기로 한 것 같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마음 편하고 스스로에게 정직한 일이 될 것 같아서.
쓰는 행위를 텍스트와 분리하는 것의 불편함 또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삼감에는 여러가지 문학적·정치사회적 배경이 깔려 있을 것이다. 미학적인 것의 정치적 무능, 문학의 고립과 독자에 대한 의식, 문단 내 성폭력과 미투 운동, 청년실업과 N포세대의 무기력, 플랫폼 노동과 과로사회 등 지금 여기의 현실이 쓰는 행위의 의미와 가치, 태도와 방식을 재조정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근 우리는 거대한 구조적 모순이나 부패의 규모가 아니라 일상과 개인에 깊이 침윤해 있는, 우리 스스로 재생산하고 있는 미시적 부패의 파편들을 돋보기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 미시적 파편의 말단은 어디 먼 데가 아니라 나 자신, 내가 매일 쓰고 있는 언어와 문장, 나의 일상을 구성하는 생각과 대화 속에 있다. 정직함의 윤리는 아마도 저 먼 데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안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인식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시인에게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어떻게 말할 것인가가 중요하고 나 역시 ‘무엇을’과 ‘어떻게’를 고민하는데, 쓰기의 어떤 순간에 이르면 자기회의 같은 것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자기회의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쓰는 일은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일이다.
내가 비판적으로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답해버렸다. 그의 선택이 갖게 되는 함정은 예상 가능한 것이고, 그 자신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물론 안전한 선택이 곧바로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는 이번 시집을 내면서 무언가를 감수하기로 한 것 같다. ‘좋은’ 시인이 못 되고 ‘좋은’ 시는 못 쓰더라도 “놀 거 다 놀고, 먹을 거 다 먹고,/그다음에 사랑하는 시”(「레몬그라스, 똠얌꿍의 재료」) 같은 걸 써보겠다고. 그의 선택은 과연 개인의 동굴로의 회피일까, 아니면 시대적 감수성과 교감하는 새로운 시작일까?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길이 어디로 트이는지 알게 되겠지만, 우리의 앎과 상관없이 황인찬은 자기반성과 두려움과 용기와 사랑 속에서 (이번 시집에 수록된 두편의 시 제목의 변주처럼) ‘나의 최선’과 ‘나의 최악’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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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의 등장은 소위 ‘포스트 미래파’의 한 가능성을 열었다는 비평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시를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문학적·문화적 현상에서도 하나의 분기점으로 호명되었다. 전자야 그의 시가 감당할 몫이라 하겠지만 후자는 그를 비롯한 동시대의 젊은 시인들, 그리고 독자들의 변화가 함께 만들어낸 것일 텐데, ‘황인찬’이라는 이름은 일련의 2010년대적 변화(공교롭게도 그는 2010년에 등단했다)의 상징이 되었다. 사실 『구관조 씻기기』가 나왔을 때, 과연 이 시가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많은 독자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았을뿐더러 시 독자의 마니아화와 낭독회의 활성화에도 선두적 역할을 했다.
그의 시는 읽고 바로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독자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는 것일까? 현대시사에서 난해함은 곧 소통 불능을 의미했다. 이상이나 김수영이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받은 비난의 키워드가 바로 난해함이었다. 가까운 시기의 미래파 역시 난해함이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그런데 황인찬의 시는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난해함에 연루되지만, 그것에 곧바로 따라붙는 소통 불능이라는 비난에서는 자유롭다. 그의 시는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 독자를 의식하거나 독자를 위해서 쓰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낭독회나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독자가 실감을 주는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혹시 창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독자라는 말 자체를 뭉뚱그려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텍스트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콘텍스트를 충분히 다 짚어줄 수 있는 독자를 생각하고 쓰지만, 동시에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한겹을 위에 더해서 구조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둘 중에 뭘 더 중시하거나 고려한다기보다는 이것은 이것대로 저것은 저것대로 기능을 해서 어떤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쓴다. 누굴 독자로 상정하느냐?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다 생각한다.
그야말로 우문현답이었다. 어디선가 그는 “쉽게 읽히되 의미가 쉽게 간파되지 않는 시를 쓰려 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쉽게’와 ‘쉽지 않게’를 동시에 목표로 하는 그의 시는 의미의 이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미디어 세대의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는 것 같다. 변화된 감수성을 지닌 독자는 시 텍스트에서 굳이 공들여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시에서 의미를 빼면 무엇이 남을까?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읽는 행위 자체가 가져다주는 효과는 남을 것이다. 앞서 그는 자신이 쓰는 시가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말하는 효과를 감수성이나 감각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까지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번 시집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사람 아닌 자가 사람의 거리를 걷는다는 기쁨만으로
즐거움과 쾌감만으로
쾌감에 중독되어버린 사람의 비참한 황홀함으로
시청에서 다시 시청까지
밤에서 다시 밤까지
이것이 그저 형편없는 시이기 때문에
이것은 사람은 안 해도 될 말
마지막 장면으로는 천사와 밤새 씨름을 하다 허벅지를 다치고 천사의 축복을 받았다는 야곱의 이야기
축복이라도 받을까봐 씨름은 안 하고 싶다는 그런 이야기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 부분
이 시에는 황인찬의 세권 시집을 통틀어 유일한 각주가 달려 있다.
여지껏 각주를 쓴 적이 한번도 없었다. 흐름을 깨기도 하고 내 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각주를 써서 밝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2017년 4월 7일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이 주최하고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가 주관하는 성소수자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변화는 시작됐다,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라는 제목 아래 많은 이들이 모여 우리가 되었고, 그 순간 우리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내 친구 권순부는 같은 달 한겨레에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읽혔다. 우리의 시대가 도적같이 이른 줄을 너희가 모르느냐.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 각주
우리의 시대는 우리가 관계하는 모든 사소하고 거대한 것들에 들러붙은 편견과 차별을 검열하고 재조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배제와 혐오의 가혹한 반발 속에서도 그러한 재조정이 이곳을 더 아름답게 해주리라는 기대가 솟아나는 시대다. 그러니까 “우리의 시대가 도적같이 이른 줄을 너희가 모르느냐”는 것은 선언이기도 하고 예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는 이 시대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 변화가 계속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제목으로 가져왔을 때는 선언과 투쟁의 태도가 많았는데, 텍스트 자체는 투쟁이 아니다. 난 씨름은 안 할 거고 다른 방식으로 해볼 거라는 얘기다. 시대가 달라지면 싸움의 방식도 달라지지 않을까? 야곱처럼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싸움을 하느니(물론 그런 싸움도 필요하겠지만) 다른 방식의 싸움도 상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이것도 또 도망가는 것일 수 있다.
다른 방식의 싸움을 그는 “형편없는 시”로 해보려는 것 같다. 천사의 축복은 사절하고 대신 형편없는 시에 기대어 두려움과 불면과 비열한 소망과 함께, 사람 아닌 자들과 함께, 사람의 거리를 걷겠다고 한다. 이 싸움은 이미 첫 시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자꾸 도망간다고 말하지만 십년 동안 도망쳐서 여기까지 왔다면 그것은 도망이 아니라 도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천사와 싸운다면 제도와 권리와 합법이라는 축복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축복도 물론 필요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말과 시선, 삶의 양식과 일상, 모든 선택과 사용을 지배하고 있는 이 기울어진 감각은 무엇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
지난 11월, ‘무지개책갈피’가 주최한 <2019 퀴어문학 포럼>에서 ‘퀴어문학’이 아닌 ‘퀴어한 방법론’에 대한 고민을 접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내게도 중요한 고민거리가 되었다. ‘퀴어한 시’가 가능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퀴어’를 다루는 게 아니라 ‘퀴어한’ 텍스트라고 할 때 그게 뭘까? 여전히 어렵다.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가 ‘우리의 시는 다르다’와 다른 말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퀴어한 시’에 대한 황인찬의 바람은 단지 시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시대의 가능성까지 확장해보려는, 그렇게 해서 무언가 효과를 발휘해보려는 의지일 것이다. 비존재, 비시민, 비역사, 비사랑을 다른 존재, 다른 시민, 다른 역사, 다른 사랑으로 복권하는 것, 억압인 줄 몰랐던 억압과 폭력인 줄 몰랐던 폭력이 사라지는 것, 우리 안에 더 많은 존재와 더 많은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리하여 “보다 아름다운 것들이 우리에게 가능하리라 믿으며”(시인의 싸인 문구) 사람과 사람의 거리를 걷게 되는 것. 사랑을 위한 되풀이는 이렇게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
6
어떤 효과가 있다면 아주 다행은 다행이네요.
그의 시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시를 읽으면 얻게 되는 어떤 효과 때문인 것 같다는 나의 말에 그는 다행이라고 되뇌었다. 인터뷰 중에 황인찬은 다행이라는 말을 종종 한 것 같다. 그의 시에도 다행이라는 말이 가끔 등장한다. ‘뜻밖에 일이 잘되어 운이 좋다’는 의미의 그 말. 긍정적 세계관의 표현일 수도 있고 모든 것을 운으로 돌리는 겸양일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그가 그 말을 할 때에는 이 세상의 가혹함과 무서움을 잘 아는 사람의 안도처럼 들렸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으레 떠올릴 호탕한 웃음소리를 지난 몇달간 라디오를 통해 들었고 이번엔 인터뷰 내내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웃음소리가 잠시라도 세상의 가혹함으로부터 보호막이 되어줄 거라고 믿는 것처럼 웃는다. 그러니까 황인찬에게 다행이라는 말은 그 자신의 안도이기도 하고 다른 모든 이들의 안녕을 비는 기도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
겨울이 가기 전 계획을 물었다. 2월 말쯤 통영에 가서 도다리쑥국을 먹고 올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통영’이라는 지명을 좋아한다고 했다. 우리는 영혼이 통한 사람처럼 웃었다. 겨울 바다는 그에게 무슨 말인가를 건넬 것이고, 그의 시는 그 말을 붙들고 한동안 우리 곁에 머무를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삶과 시와 사랑과 아름다움이 계속된다면 그 또한 다행이리라.
이 시는 바닥에 흩어진 것이 모두 식고
다 말라 증발할 때까지 여기 한동안 머무르겠습니다
아프거나 슬픈 사람이 없어 다행이군요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말차」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