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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장석준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 서해문집 2019
진보정당운동의 고민과 희망이 녹아 있는 한걸음
전성원 全盛源
『황해문화』 편집장 windshoes@naver.com
근대 민주주의 정치에서 왕정복고 이후 영국의 역사가 중요한 것은 정당(party) 정치가 이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왕정복고 이후 찰스 2세에 대해 잉글랜드의 유력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방하면서 근대 정당이 시작되었다. ‘토리’(Tory)는 왕권에 대한 저항이 내전으로 비화되어 혼란한 1640년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우려했고, ‘휘그’(Whig)는 절대주의 통치체제가 영국에 유입되는 것을 경계했다. 이들은 어떤 상황을 더욱 두렵게 여기는지에 따라 양대 정파로 분열되었지만, 양당 모두 계급적으로는 지주귀족만을 대변했다. 정당이 시민단체, 이익집단과 다른 점은 ‘공통의 가치체계에 합의하여 정치권력의 획득·유지를 목적으로 결집한 여러 사람들의 집합체’라는 점이다. 공통의 가치체계, 당 강령이라는 이념을 갖추고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정치권력을 획득하려는 집합체를 정당이라고 할 때, 선거를 통해 정권을 획득하려 하는가 아닌가를 통해 이른바 대중정당과 혁명정당으로 구분된다.
선거제도가 존재하지 않거나 제 역할을 할 수 없거나, 선출할 수 있는 정당이 사실상 동일한 계급·계층의 이해만을 대변할 때 정당정치는 무의미해진다. 산업화와 도시화를 통해 대중사회가 도래하기 이전까지 정치란 부르주아지의 교육받은 소수 남성만의 일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적인 정치이념인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는 모두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혁명이 진행되면서 지배계급끼리 우아하게 정치권력을 번갈아 차지하던 보수양당 체제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기존의 보수정당과는 완전히 다른 계급적 이해를 지닌 이른바 진보정당의 출현이었다. 실제로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는 대부분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두드러진 폐해와 문제에 대한 응답의 형태로 출현했다.
오랫동안 진보정당운동에 참여해왔고, 진보정치 이론과 역사를 연구하고 모색해온 장석준이 펴낸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 ‘큰 개혁’과 ‘작은 혁명’들의 이야기』는 역사적 맥락을 상실한 이론, 현장과 시민 없는 운동이라는 고민의 해법을 찾아 나선 저자의 오랜 희망이 녹아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19세기를 중요한 결절점으로 삼은 까닭 중 하나는 ‘보통선거’가 이 무렵에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19세기에 보통선거제도는 머나먼 유토피아의 세상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였다. 이것이 가능해진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강조하듯 인류 전체의 운명을 규정하게 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대결과 갈등, ‘이중혁명’의 소산이었고 다른 말로 하자면 ‘계급투쟁’의 결과물이었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원리와 민주주의의 원리가 갈등하고 충돌할 때 “단호히 민주주의 혁명의 편에 서는 정당”, “민주주의 편에서 자본주의에 맞서고, 타협을 만들어내더라도 민주주의 원리가 우위에 선 타협을 위해 노력하며, 종국에는 민주주의 혁명이 자본주의 혁명을 제압하고 극복하는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정당”(16면)을 이른바 좌파정당 또는 진보정당이라고 규정한다.
사회(민주)주의자에게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는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경쟁, 개인주의, 사유재산이라는 자유자본주의의 핵심원리로부터 출현한 것이었다. 사회주의자는 산업과 경제 발전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그것을 이성과 진보로 이해했다. 그들 대부분은 사회가 산업적인 동시에 인도적인 것, 민주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점에서 20세기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어느 정도 공통의 이해를 품었지만, 자유주의 세력은 좌파 정치세력이 일정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만 타협에 나섰다. 이들과 대의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장에서 ‘타협할 것인가? 어떤 부분을 타협할 것인가? 개혁인가 혁명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고, 분열하고, 갈등한 역사가 세계 진보정당운동의 역사였다. 그 과정에서 ‘이론’, 다시 말해 ‘공통의 가치체계, 당 강령이라는 이념을 갖추고 정해진 프로그램’을 따르는 일은 역사적으로 진보정당의 존재 그 자체를 결정짓는 요소였다.
저자 역시 ‘이론’의 중요성을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가 ‘이론’보다 ‘역사’를 통해 보자고 강조하는 까닭은 그간 서구의 정치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따랐던 우리의 지난 과거를 반성하고 성찰한 결과에 있다. 이론이란 늘 변화하는 “구체적인 조건에서 구체적 정치세력이 전개”해온 고민과 결단의 흔적이기 때문에 그 역사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든 들어맞는 공식이나 매뉴얼”(510면)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함께 고민하고 묻고 싶은 몇가지 질문이 남았다.
우선, 그의 말대로 우리가 역사를 살피는 이유는 각각의 구체적인 정치세력이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 고투한 역사를 통해 우리의 해법을 찾고자 함이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는 보편 ‘세계’에는 특수한 사례인 ‘지역’이 없거나 있더라도 서구의 역사경험 속에 녹아드는 지역이 대부분이다. 일본 사회당의 몰락에 1개 장을 할애하고 있을 뿐, 아시아·아프리카와 같이 서구 근대 식민지 체험을 극복하며 진보정당운동을 실천하려 한 이들의 경험에 대한 평가가 부족하다. 이들의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다른 길이 아닐까.
또 한가지 지점은 기왕에 진보정당의 역사를 살피고 “진보적 대중연합 구축”(544면)을 운동의 새로운 비전으로 모색한다면 변화된 양상에 대해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해주길 바랐던 아쉬움이다. 과거 산업사회(포디즘 시대)의 대중은 이른바 지도부의 지도에 따라 일사불란한 행동을 전개했으나 포스트 포디즘 시대의 디지털 대중은 다양한 이해와 중심을 가지고, 예측 불가능한 형태를 띤다. 과거의 정치사회운동이 현실세계(오프라인)를 바탕으로 연결(link)되어 있고, 강력한 몸의 연대(solidarity)에 바탕을 둔 운동이었다면, 현대의 디지털 정보대중은 액체처럼 비정형적으로 움직이다가 이슈가 소멸되면 기체처럼 증발해버린다. 이처럼 취향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끼리끼리’ 문화가 확대되고, 네트워크의 연결을 거듭할수록 분절화와 동종집단화가 가속화되어 소규모의 배타적 집단이 되어간다. 정당 없이 사회변혁을 생각할 수 없다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지만, 더이상 기존 정당정치 패러다임으로 수용할 수 없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출현하고 있으며, 유동하고 휘발하는 주체를 고전적 이념의 시대에 만들어진 정당정치 체제가 수용하고 대변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마지막으로 진보정당이 자유주의 정당과의 타협을 통한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놓고 분열했다면,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역사에서 분열의 지점 중 하나는 ‘분단’과 ‘북한’, ‘내셔널리즘’의 문제, 다시 말해 분단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저자의 결론에는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이 소거되어 있다. 고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저자가 앞으로 새로운 저작을 통해 기존에 이 문제를 다뤄온 저작들보다 진일보한 성과와 비전을 제시해주길 희망한다. 세계 진보정당운동 150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역사가 있다. 그 길은 자본의 자유와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국가폭력을 자행해온 수구 기득권 세력과 투쟁하면서도 동지들에게는 타협과 수정주의라는 지탄을 받아야만 했던 가시밭길이었다. 이제는 비록 우리 곁에 없지만, 진보정당운동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과 함께 그 길을 걸어온 저자의 오랜 고민과 희망이 녹아 있는 책을 읽는 마음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책을 읽는 내내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를 읊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