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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금희 金錦姬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중편소설 『나의 사랑, 매기』 등이 있음.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엄마의 사십구재가 끝나고, 기오성에 대해 인터뷰해달라는 이메일을 받았다. 나는 더이상 엄마가 없는 영종도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옮길 곳을 인터넷으로 찾는 중이었다. 이메일을 보낸 사람은 자신을 다큐멘터리 피디로 소개했다. 이메일 화면을 띄워놓고 한동안 앉아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문경의 사촌에게 사과값을 주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과를 주문해 병실 사람들과 나눈 지가 오래인데 이제야 그 생각을 하다니. 나는 갑자기 초조해져 이체기록이 남았는지 엄마 통장을 들춰보다가 사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와, 무슨 일인데?”

졸음이 묻은 사촌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지금이 열한시, 그쪽 시간표대로라면 모두 깊은 잠에 들었을 시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과값을 주지 않은 것 같다고, 지금이라도 보낼 테니 얼만지 알려달라고 하자 사촌은 사과? 하고 아직도 어슴한 잠결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니는 안 자나, 잠을 몬 자나.”

사촌은 아마 이모가 지불했을 게 분명하고 안 줬더라도 그 돈이 뭐가 중요하냐고, 괜찮다고 했다. 나는 늦은 시각에 전화를 걸었다는 미안함에다, 사촌이 괜찮다고, 정확히는 개안타고 하는 바람에 감정이 복잡해졌다. 잘 있어, 인사를 겨우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래, 문경 한번 온나. 사과꽃 다 지기 전에 한번, 꼭.”

사촌은 어렸을 때 내가 시골에 간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사과밭의 흰 무더기 꽃에 흥분하며 ‘서울내기 다마네기 사촌’이 종일 뛰어다녔다는 얘기였다. 나중에 보니 얼마나 꽃을 올려다봤는지 뒷목에 붉은 줄이 여러개 잡혀 있었다는. 서울내기 다마네기는 서울 애들의 새침함을 놀리는 말이었다. 그 뒤 무엇을 하든, 성인이 되든, 마흔이 가깝든, 사촌에게 나는 여전히 사과꽃을 올려다보는 애였다. 내게 사촌은 깁스한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병실에서 웃어 보이는 애였고.

전화를 끊고 나는 이럴 때가 많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엄마가 투병을 시작하면서부터 몸에 밴 불안 같은 것이라고. 경계하고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무언가가 엄마를 그냥 삼켜버릴 듯해 긴장했지만 실제로 정신은 그렇지 못해서 나는 일상의 일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어느날은 지갑도 휴대전화도 없이 엄마와 함께 식당에 갔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다. 백혈구 수치가 떨어지면 항암을 할 수가 없다고,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병원에서 말해 부랴부랴 고깃집에 간 날이었다.

누구에게 계좌이체를 해달라고 부탁하려 해도 외우는 번호가 없었다. 엄마도 항암제가 잘 듣지 않으면서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있었다. 사촌을 떠올렸지만 엄마가 거기는 지금 한밤중일 텐데, 하며 망설였다. 하는 수 없이 엄마를 두고 차로 이십여분 떨어진 아파트에 나 혼자 다녀왔다. 엄마는 고깃집 창가에서 무료하게 텔레비전을 보며 앉아 있었다. 간간이 모자가 뒤로 벗겨지지 않게 신경을 쓰면서. 나는 엄마가 그런 풍경 속에 혼자 남겨져 있었던 데 누구에게인지 모르게 화가 났고, 주차를 하고 식당으로 뛰어들어갔다. 엄마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아슴아슴한 눈으로 은경아,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병원에서도 나는 매일 실수하는 보호자였다. 언젠가 의사가 날 보며 엄마, 정신 차리자,라고 할 정도였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는 나를 왜 엄마라고 부르지? 의아해하다가 내 나이대의 여자에게는 의사가 대개 그렇게 부른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 호칭을 나보다 더 거슬려 한 사람은 엄마였고, 선생님 우리 애도 선생님이에요,라고 어느날은 직접 정정했다. 엄마 그렇게 말고, 선생님이라고 부르세요.

 

정이라는 이름의 그 피디는 기오성의 이십대 시절을 알고 싶다고 했다. 기오성과 같이 팟캐스트 일을 했던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기오성에 대해서라면 내가 좀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리라 추천했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가제는 ‘정치논객 기오성’이었고 취지에는 참여정부에서 촛불정국까지 청년정치의 현주소를 되짚는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기오성씨는 현재 행방불명 상태입니다,라고. 그런 만큼 그의 재조명이 중요하다 할 수 있는데요, 방송을 계기로 소재가 파악될 수도 있으니까요. 사용하는 이메일이리라 기대하며 보냅니다. 꼭 한번 연락을 주세요, 언제라도 상관없고 24시간 대기로 선생님 연락을…… 기오성이 대학을 졸업하고 정치권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2007년부터 ‘잡어탕평’이라는 팟캐스트를 운영했고, 대통령선거 기간 내내 꽤 주목받았다는 사실도.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장소가 바로 그 녹음 스튜디오였다.

하지만 나는 이메일을 삭제한 다음 휴지통을 비웠고 포털의 지도를 움직여가며 이사 갈 집을 다시 찾았다. 옮겨 갈 도시는 많았다. 일산이나 김포, 부천, 아니면 의정부 쪽으로도 갈 수 있었다. 새로 구한 기간제 교사 자리는 서울이었지만 어차피 서울 시내까지 한시간 가까이 걸리는 곳에서 지냈던 터라 어디든 상관없었다.

 

*

 

그해 여름 기오성과 나는 한 노교수의 종택(宗宅)에서 처음 만났다. 정년퇴임을 하고 명예교수로 있던 그가 그간 자기 문중의 숙원사업이었던 족보를 정리하기 위해 우리를 방학 동안 고용한 것이었다. 나는 한자 2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서 과에서 추천했고 기오성은 교수와 친분이 있었다. 경기도 광주에 있었던 그 집은 향토유적으로 지정될 만큼 유서 깊은 고택이었다. 대문으로 들어가면 세칸짜리 사랑채가 있고 그 뒤에 대청을 중심으로 ㄱ자 모양을 한 안채가 있었다. 고택에서 건축학적으로 가장 가치가 있는 건물은 사랑채라고 했다. 수제 기와를 층층이 올려 위엄을 뽐냈고 마당 쪽으로 뻗어나온 방에는 한옥에서는 보기 드문 격자무늬 유리창들이 달려 있었다. 일제시대의 흔적이었다.

처음 고택에 도착했을 때 가장 눈에 들어온 것도 그 화려한 사랑채였다. 그곳 툇마루에서 한 여자애가 마루 아래를 골똘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교수의 큰손녀인 강선이었다. 이어서 기오성이 도착하고 우리는 안채에 짐을 푼 뒤 저녁을 먹었다. 나는 강선과 방을 같이 써야 했는데, 강선이는 유학을 준비 중이라 주로 서재가 있는 사랑채에 머문다고, 그냥 혼자 쓴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교수는 말했다.

둘이 써도 상관없어요.

나는 교수에게 그렇게 까다롭거나 소극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고 싶어서 일부러 말했다. 지금 집에도 사촌이 올라와 같이 지내고 있다고. 교수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는지 사촌이 왜 올라오게 되었냐고 물었고 나는 한 전자회사에 취직해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에 함께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사촌이 대학에는 진학하지 못했고 첫 월급을 받으면 학점은행제를 운영하는 사설 교육기관에 다닐 계획이라고 말을 이었는데, 교수가 그래도 정식 대학이 낫지 않나? 하는 바람에 대화는 끊겼다. 할아버지, 누가 그걸 몰라? 그때 오리불고기를 뒤적이고 있던 강선이 좀 짜증 난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상황이 안 되니까 그러는 거잖아요, 좀.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뭐야.

그날 자는데 도시와 달리 주변의 기척들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어딘가에는 분명 대나무가 있는 듯했다. 산바람에 흔들리면서 딱. 딱. 하고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연속된다기보다는 하나하나 마침표를 찍듯이 들려왔다. 아마도 기대가 없어서이지 않았을까. 대나무의 단단한 몸체가 서로 부딪혀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리라는 것에 당연히 나는 아무 기대가 없었다. 들려도 그만, 들리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그건 내일부터 내가 하게 될 경기도 광주를 본으로 한다는, 신라 6부촌장의 후손이라는 이 집안의 족보 작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노동이지 노동,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식당을 하는 엄마가 미리 해놓는 밀가루 반죽 같은, 희고 물렁물렁하고 둔중한 덩어리에 불과한. 그렇게 생각하자 아까 밥상에서 내가 사촌 이야기를 너무 길게, 자세히 한 것이 끔찍하게 후회되었다. 가장 신경 쓰였던 건 교수나 기오성이 아니라 강선이었다. 그애는 붉은색 머리띠로 앞머리를 완전히 넘기고, 습관인지 새끼손가락을 약간 들어올려 젓가락을 허술하게 잡은 채 반찬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런 강선이 무람없이 조부를 탓하고 리모컨을 눌러 텔레비전 채널을 바꾸던 모습이 도드라지며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음 날부터 기오성과 내 앞에는 그 집안의 오래된 세보(世譜)들이 놓였다. 문중의 공식 세보는 18세기부터 여러차례 정리되었는데 가장 최근은 1973년이었다. 우리가 할 일은 한문으로 쓰인 그 책을 그대로 컴퓨터로 옮기고 이후 30여년 동안 대대손손 늘어난 후손들의 이름을 추가하는 것이었다. 사랑채 끝방에 작업을 위한 긴 책상이 놓여 있었다. 기오성과 나는 처음 며칠 동안은 별말 없이 각자 할 일을 했다. 일단 세보의 내용을 노트에 정리했다가 오류가 없으면 그날그날 타이핑했다. 기오성은 뭔가 대화의 물꼬를 틔워보려고 몇몇 과 선배들에 대한 얘기를 꺼냈지만 내가 내 학번부터 학부제로 바뀌어서 잘 모르겠다고 하자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정말 모르겠네요.

식사시간이 되면 교수의 사모가 안채로 우리를 불렀다. 사모는 개성 출신이라서 그쪽 요리도 해주었는데 항상 꿩을 아쉬워했다. 만두의 일종인 편수를 빚거나 칼국수를 끓이거나 언제나 우리가 맛있게 먹는 양을 보고 있다가 꿩이 있어야 하는데, 혼잣말을 했다. 없는 꿩을 왜 자꾸 얘기하느냐고 교수가 타박하면, 없으니까 말하죠, 있으면 말을 않지,라고 대꾸했다. 그런 식사 자리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개인적인 얘기들이 오갔다. 교수에게 최근 허리 통증이 생겼다거나 강선의 아버지가 목사라든가 하는 언급들이었다. 나는 이 세세연년의 족보 정리와 목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강선이 무슨 말 끝에 그러니까 둘이 만날 사이가 안 좋지, 하고 이죽거리는 바람에 모든 상황이 그대로 이해가 갔다.

교수는 우리를 은경양, 오성군이라고 불렀고 식사의 마지막을 늘 기오성에 대한 당부로 맺었다. 언제는 꽤 거구인 자신에 비해 약해 보이는 기오성의 체력이기도 했고 밤늦게까지 자지 않는 생활습관이기도 했지만 대개는 기오성이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 초점이 되었다. 당동벌이(黨同伐異)하는 사람들에게 휩쓸리면 안 된다고 교수는 여러번 당부했다. 그러면 기오성은 적 없이 운동이 되나요, 하고 슬쩍 웃으며 넘겼고 교수는 순진한 소리는 말게, 하고 경고하듯 손가락을 세웠다. 나중에 기오성은 누가 순진한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짧게 불평했다.

족보는 옛날 체제 그대로 인쇄되어야 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매킨토시로 편집 작업을 해야 했다. 우리는 번갈아가며 읍내 인쇄소에 나가 타이핑한 내용을 매킨토시 파일로 만들었다. 명함이나 광고물을 찍는 영세한 인쇄소라 편집을 대신 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곳 사장도 같은 문중이라 어쩔 수 없이 노력봉사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사랑채에 내내 같이 있다가 그렇게 기오성이 빠져나가면 나는 그때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다리를 죽 뻗어서 맞은편 의자에 올려놓기도 하고 뭔가 생각다운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교수에게서 세달치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면 사게 될 중고차 같은 것.

어느날은 처음 이 집에 들어섰을 때 강선이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던 것이 생각나서 툇마루로 나갔다. 거기에는 강선이 벗어놓은 스타킹이 돌돌 말려 있고 누군가에게 보내려는지, 아니면 그냥 낙서 삼아 끄적거렸는지 이런 메모가 남아 있었다. 나는 너를 미워할 거야, 거룩한 사명처럼 미워할 거야, 미워할 수 있을 때까지 미워하다가 나도 죽을 거야, 아주 뜨겁게 뜨겁게 죽을 거야. 나는 종이를 무심코 읽고 있다가 강선이 툇마루로 들어서는 바람에 놀랐다.

언니, 봤어요?

며칠 동안 직접 대화해본 적이 없는데도 강선은 스스럼없이 언니,라고 불렀다.

미안해요, 자세히는 안 봤어.

내가 당황해하는 사이 강선이 어떡해, 하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를 입었는데도 그냥 다리를 아무렇게나 퍼지르고 앉아 이거 내 비밀이야, 어떡해, 하고 나를 놀리는 건지 정말 탓하는 건지 모르게 우는소리를 했다. 사과를 더 해야 하나, 한다면 무슨 말로 하나 고민하는데 강선은 금세 또 얼굴이 말개져 괜찮겠죠, 언니는 좋은 사람이니까,라고 정리했다.

나 좋은 사람 아닌데요.

나는 내가 이 말을 왜 하나 싶으면서도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며칠 동안 강선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거북함의 정체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건 마치 어린애처럼 함부로 말하고 조심성 없이 행동한다는 점이었다. 대청 어딘가에 대자로 누워 우리가 지나가는데도 비킬 생각이 없다든가, 화가 나면 조부모에게 소리를 지르며 대든다든가, 식탁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우리가 먹는 양을 구경하고 있다가 기오성이 강선씨는 왜 식사 안 해요, 하면 할머니 요리가 지겨워서요, 하는 모든 행동이 내게는 일종의 과시처럼 느껴졌다. 누구를 만나든 본관부터 따지고 지연과 학연을 전방위로 확인하는 노교수보다, 문중 일을 의논하러 올 때마다 세보를 여학생이 정리한다는 사실을 못내 마땅찮아하는 집성촌 노인들보다 더 강한 위력자처럼 느껴졌다.

좋은 사람, 맞아요.

강선은 내 마음에 일렁이는 거북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하게 말했다. 어떻게 아느냐고 내가 묻자 강선은 뭔가 토라진 사람처럼 어깨를 한편으로 돌리더니 얼굴에 쓰여 있어,라고 답했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나는 기오성을 어디서 봤는지 생각해냈다. 지난 학기의 고전문학 시간이었다. 새로 부임한 젊은 여자 교수가 하는 강의였다. 그날 우리는 박지원의 짧은 산문을 읽었다. 서화담이 출타했다가 집을 잃어버리고 길가에서 우는 사람을 만났다. 저는 다섯살 때 시력을 잃고 지금 이십여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밖으로 나오니 홀연히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여 기뻤지만 길이 여러 갈래요, 대문들이 어슷비슷 같아 보여 집으로 갈 수가 없어 웁니다. 그러자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도로 눈을 감고 가거라. 너의 집에 갈 수가 있을 것이다.

학생 중 하나는 이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개명이란 새로운 것에 눈을 뜨고 전기를 맞았다는 이야기인데 도로 눈을 감으라는 것은 본래의 비참으로 돌아가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선생은 이 글이 비유하고 있는 상황을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믿지 않는다. 뒤이어 지목된 사람은 기오성이었고 그는 본래 지녔던 마음의 눈으로 돌아가 진리를 찾으라는 뜻 같다고 말한다. 미혹에 휘둘려 판단하지 않고 스스로의 마음으로 보는 세상. 선생은 그렇지,라고 동의한다. 그 반응에 자신을 얻은 그는 그렇게 해서 ‘나임’과 ‘너임’, 궁극으로는 ‘우리임’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전개와 확장이 나쁘지 않은데 교수는 “응, 우리임은 빼고”라고 자른다.

“그런 건 없으니까.”

기오성은 무슨 말인가 더 할 듯하다가 말고 대화는 거기서 종료되었다.

 

한주를 보내고 금요일이 되면 기오성과 나는 집에 가기 위해 고택을 빠져나왔다. 조용한 시골마을에 있다가 그렇게 도시로 오면 긴장이 풀리면서 명랑해졌다. 그리고 비로소 교수 가문의 항렬이니 자손의 수니 하는 것과는 다른 우리 이야기를 했다. 경차가 아니라 못돼도 소형차를 사야 한다고 충고한 사람도 그였다.

그렇게 해서 각자 시외버스를 타기 전 모란시장을 걸었던 풍경이 그 여름 우리를 온전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따지고 보면 이미 다 죽어버린 사람들의 이름을 옮겨 쓰고 확인해야 하는 반복된 노동도 없고, 교수의 가족들과 우리 사이에 음식 냄새처럼 은은하게 번지던 위화감도 없었다. 거기에는 살아 있는 개를 팔거나 슬프게는 죽은 개들을 파는 매매의 현장성, 작열하는 여름 볕에 붉게 익은 상인들과,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대형 선풍기 바람에 흔들리는 파리끈끈이나 비닐봉지 같은 것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기오성과 내가. 우리는 헤어지기 전에 같이 뭔가를 사러 가기도 하고 노포에서 칼만두 같은 분식을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리는 더 맛이 나려면 꿩이 있어야 하는데, 하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꿩으로도 안 돼요.

나는 숟가락으로 만두를 터뜨리면서 답했다.

안 되나?

안 되지, 꿩이 아니라 꿩 할애비가 와도 이런 맛은 구제가 안 돼.

꿩 할애비는 또 뭐예요?

기오성이 크게 웃었고, 그때서야 나는 기오성이 웃을 때면 양 뺨에 굵은 주름이 진다는 걸 알았다.

꿩 할애비가 뭐긴요, 기껏해야 꿩이지.

그러고 다시 거리로 나와 우리는 와글와글한 인파와 소음 속에 합류했다. 삶의 뭉근한 긴장 속으로. 그것은 확실히 발생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날들이었다.

그런 낮의 풍경이 스며들다 밤이 되면 기오성과 나는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문자를 주고받기도 했다. 제법 큰 물푸레나무 머릿장이 있고, 이 집안 누군가가 쓴 사혜련의 「설부(雪賦)」 족자가 걸려 있는 그곳이 우리의 간격이었다. 안채에서 같이 생활한다면 교수 부부의 인기척이 당연히 들렸을 텐데도 기억에서 그 밤들은 아주 적막하고 고요하다. 대화는 지금 떠 있는 달의 모양이나, 2학기 수강신청에 관한 정보 혹은 영화나 음악에 관한 언급이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인상이나 기미 같은 것. 너는 얼굴에 그늘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것도 그에게서 처음으로 들어본 말이었다. 나처럼 가난한 애가 그럴 리가,라고 답하면 그 가난 안 되겠네, 죽여야겠네, 하고 그가 말하는. 가난이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죽여요? 웃긴다, 하면 가난이 사람을 죽이니까 그 반대도 당연히 가능하지, 했던.

대화해보니 기오성은 교수가 걱정하듯 그렇게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최종적으로 정치인이 되고 싶어했고 거기에는 한 정당의 의원 보좌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형이 영향을 준 듯했다. 금요일이 세번 지났을 즈음 그는 이라크에 갈 계획을 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이미 단체 사람들이 전쟁 전후로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내가 사게 될 중고차와, 그가 간다는 바그다드를 번갈아 떠올렸다. 노교수에게서 받을 돈으로 우리가 이루게 될 미래의 어느 날들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둘은 공통점이 없게 느껴졌고 결국 시간이 지나도 함께 묶일 수 없을 듯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우리가 모란시장을 걷는 시간은 조금씩 길어졌고 나는 푸성귀며 고기며 생선과 화초가 뒤섞여 있는 시장 어딘가에서 자주 웃었고 사랑이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

 

다음 날 김포로 집을 알아보기로 하고 공항고속도로를 탔다. 그리고 썰물이 다 빠진 바다 위를 달리다 충동적으로 북인천나들목을 지나 광주로 향했다. 나쁜 기분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광주의 고택을 한번 보고 싶었고, 더 정확히는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갓길에 잠시 서서, ‘광주’ ‘종택’ ‘대나무숲’ ‘경안천’을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그곳으로 짐작되는 사진 몇장과 주소를 얻었다.

두시간 가까이 달리자 익숙한 도로표지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아는 풍경을 발견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짧게 감탄했는데 무엇에 대한 반응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 어떤 마음들은 닳아버렸는지도 몰랐다. 그때 강선이 메모에 휘갈기듯 적었던 말들같이 사명처럼 들끓다가 사라지고 말았는지도. 그래도 여름의 기억을 가장 정확히 되살린 것은 북한강 지류의 하천이었다. 나는 차를 세우고 하천을 건너보다가 내렸다. 오래 운전해서인지 발목이 시큰거렸고, 예상치 못한 그 통증이 내가 그곳을 다시 걷는다는 실감을 주었다.

8월이 되자 우리 세 사람은 여기로 자주 나와 더위를 식혔다. 고택에는 에어컨이 아예 없었다. 팔당호로 이어지는 천은 너무 느리게 흘러서 어떨 때는 멈춘 듯 보였는데, 댐 때문이었다. 노인들이 대부분인 그 마을에서 천변을 향해 걷는 우리는 꽤 돌출적인 존재들이었다. 걸음이 빨랐고 소리가 높았고 표정이 다채로웠고 완전히 제어되지 않는 에너지가 있었다. 무슨 말이 오가든 반응이 컸고 나보다 좀더 거침없었던 강선은 자주 논두렁이나 둑길에 멈춰선 채 미쳤어! 하고 자지러지곤 했다. 와 우리 정말 미쳤다!

어느 저녁, 우리는 맥주를 가지고 천변으로 나갔다. 읍내에 나간 기오성이 포장해 온 피자를 들고. 교수는 마을 노인들이 안 좋게 본다며 담배는 물론이고 술도 못하게 했다. 순식간에 맥주와 피자를 먹어치운 우리는 좀 느긋하게 앉아서 큰고니들이 내려앉은 하천을 바라보았다.

“여름에 왜 고니가 있지?”

“그러게요, 겨울 철새 아닌가.”

기오성의 말에 내가 동의하는 동안 강선은 말이 없었다.

“그래, 넌 어디서 왔니?”

기오성이 그렇게 말하며 물수제비를 떴고 조약돌은 얼마 가지 않아 잠겨버렸다.

“페퍼로니에서 왔어.”

강선이 피자 박스를 구겨 접으며 말했다. 그러자 우리는 웃었는데, 강선이 웃을 일이 아니라 자기는 한국에 돌아와 애들이 자꾸 그렇게 물어서 그런 대답을 했다고 했다. 페퍼로니피자는 강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해가 지면서 새들은 점점 더 흐릿해졌다. 그들의 두발 아래로 물이 조금씩이라도 흐르지 않았다면, 그렇게 해서 시간의 전진을 알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꿈을 꾸고 있다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다시 별로 중요하지 않은 화제로 몇마디 나누고 각자 생각에 잠겼는데, 강선이 나란히 앉아 있는 나와 기오성 편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마치 혼잣말처럼 눈빛 좀 봐,라고 중얼거렸다. 언니를 보는 기오빠 눈빛에 사랑이 가득해.

이상한 것은 그 말을 한 뒤의 강선의 표정이었다. 강선은 약간 이마를 찡그린 것 이외에는 아무런 감정의 표현 없이 메마른 얼굴이었다. 마치 저기 밭에서 누가 쓰레기를 태우나봐,라든가 이 우산은 버려진 건가? 할 때처럼. 그러니까 누군가의 연애감정을 눈치챈 사람들이라면 으레 내비치게 되는 멋쩍음이나 장난기 없이, 아주 잠깐의 자기인식이 표현된 이후에는 문이 닫히듯 냉랭하게 무심해지는. 그날 고택으로 돌아가 자는데 문 앞의 발을 밀며 밤바람이 불었고 대나무 소리가 들렸다. 사.랑.이.가.득.해.가.득.해. 사.랑.이.가.득.해. 그렇게 강선이 텅 빈 얼굴로 말한 건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 가엾은 아이가 천변에서 소외감을 느꼈을지 모른다고. 강선은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내고 중학생 때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끝내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했다. 어느날 사모가 흘린 말이었다. 지금 이년째 유학을 준비하는 것도 대학이 아니라 고등학교라고.

 

그날 이후 강선에게 더 잘해주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강선이 SSAT 모의시험을 본다며 서울로 갔고 그애가 돌아왔을 때는 사촌에게 일이 생겨 내가 집에 가 있어야 했다. 엄지손가락이 위험하게 갈리는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네시간 넘는 접합수술을 받는 동안 이모가 자꾸 울면서 남들 다 가는 대학을 보내지 못해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한탄했다. 그러면 엄마가 따라서 울고 대기실은 어둑하게 불행해졌는데 정작 수술실에서 나온 사촌은 씩씩했다. 영화 고마 찍어라, 하는 말로 슬픔에 잠긴 이모를 위로했다. 그리고 어른들이 다 가고 나면 그제야 두렵고 걱정되는 얼굴로 산재처리 똑바로 해주겠지, 수습이라고 안 해주는 거 아니겠지? 하고 내게 물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럴 리가 있겠냐고, 정말 그러면 조져야지, 하고 내가 말하자 사촌은 “맞아, 월드컵 4강도 하는 나라가 그럴 리가 없지” 하고 농담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회사에서 과장이 나와 산재처리는 물론 입원기간이 수습기간으로 인정된다고 안심시키자 병실 분위기는 나아졌다. 사촌은 깁스를 해서 뚱뚱해진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내가 큰 따봉 날릴게, 알바 잘하고 온나, 하고 고택으로 가는 나를 배웅했다. 예상치 못한 눈물이 터진 건 시외버스 안에서였다. 병원을 나올 때만 해도 다행이고 잘되었다 여기며 버스에 올랐는데 어깨가 후드득 떨리도록 외롭고 슬퍼졌다. 나는 어쩌면 6인실에 혼자 남은 사촌도 나처럼 울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며칠 만에 만난 강선은 나를 보자마자 공판장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자고 했다. 내가 선배도 같이 갈까, 했더니 강선은 오빠는 없어도 돼,라고 답했다. 더구나 지금은 교수와 함께 지역 유지를 만나러 가서 없다고. 내가 거기는 왜 갔느냐고 묻자 “족보 팔러 갔겠지” 하고 냉소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강선은 내가 없는 동안 기오성과 천변에서 캠핑을 했다고 했다. 저녁까지 텐트를 쳤나보구나 했더니 집에 들어왔다가 여전히 더워 자기가 다시 천변으로 갔고 어쩌다보니 밤을 새워 새벽이 되어 있었다고.

“뭐 할 게 있었어?”

“응, 아주아주 딥한 얘기들을 했어요.”

그러자 내 안의 무언가가 기우뚱하는 것을 느꼈다.

“마을 사람 누가 보면 교수님한테 걱정 들으려고.”

“언니, 그 밤에 누가 있어요? 우리는 밤새 우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어.”

평소에 좋아하는 바닐라콘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녹아서 손등으로 물이 뚝뚝 떨어져내릴 때까지 몇입 먹지 못했다. 강선은 그새 화제를 바꾸어 이번 서울행에서 유학 컨설턴트에게 들었다는 말을 전했다. 폴라포의 얼음알갱이를 오독오독 씹어 먹으면서 그런 인간들이란 사실상 현지의 지라시 수준의 정보를 가공해서 전달하는 장사치들에 지나지 않는데 그의 말에 휘둘리는 부모들이 한심해서 자기는 입을 딱 닫아버렸다고.

“입을 닫았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그렇게 말을 따라 했다.

“그랬죠.”

“그랬구나.”

“언니, 우리 엄마 점도 봐요. 내 사주 가져가면 점쟁이가 얘는 어떤어떤 애라면서 공부를 이쪽으로 시키라고, 방 배치는 이렇게 하라고 안내를 한대.”

“그런 게 있어?”

“있어, 나는 아주 그런 게 지겨워.”

연신 지겹다고 하면서 강선은 다 먹은 폴라포 포장을 자근자근 씹었다. 먹을 것도 아니고 당연히 뱉어낼 거면서 종이에 침을 발라 불린 다음 조금씩 뜯어내는 일에 열중했다.

“언니, 나는 우리 부모랑 할아버지랑 달라요. 내 미국 친구들 보면 다 브루클린 이민자들이고 다들 굿 퍼슨이라고. 선택은 그런 자들이 받는 거야, 성경에 나오는 복자들이란 바로 그런 사람들이지.”

그날 이후로는 피크닉에 갈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작업 분량이 밀렸다는 핑계를 댔지만 일부러 피한 것이었다. 내가 없다고 피크닉이 중단되는 일은 없었다. 강선은 여전히 여름날의 더위를 견딜 수 없어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수건을 목덜미에 두른 채 강선이 천변으로 나가면 대개는 기오성이 동행했다. 안 되면 자기가 해줄 테니 나가자고, 좀 걷기라도 하라고 기오성이 마당에 서서 불렀지만 나는 괜찮다고 했다. 하나도 덥지가 않아요.

세보 작업은 생각이나 감정이랄 게 필요 없는 기계적인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 미세한 혈관처럼 퍼져나가는 목록을 옮기고 있자면 나 자신도 어딘가 변해가는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까지 가장 신경 썼던 작업은 집안의 기릴 만한 몇몇 인사들에게 붙인 『행장(行狀)』이었다. 국문해석본을 붙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학부생인 내게 해석을 맡긴 것은 아니고 노교수를 비롯한 문중 사람들이 번역한 원고를 원본과 대조하면서 교정해야 했다. 시력이 좋지 않아 잘 읽지 못하는지 아니면 부주의해서인지 인명이 틀리거나 표현이 맞지 않는 실수를 해놓곤 했다. 어쩌면 의도였을지도 모르는데 은근히 과장해놓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위에 노곤하게 지쳐가다가 그 문장들을 손볼 때만은 비스듬히 기운 몸을 일으켜 집중을 해보곤 했다. 물론 그것은 단 며칠 만에 유수한 경전들을 깨우치고 백가(百家)를 넘나들며 지조가 결연하고 미목이 깨끗하고 풍의가 훤칠한, 거기서 거기인 상찬들이었지만 그래도 그 천편일률의 문장들 속에서 아 슬프다, 오호애재(嗚呼哀哉) 같은 한문을 옮길 때면 이 슬픔에 대해 고백하기 위해 그 오랜 복기가 필요했구나 싶었다.

강선은 태도의 변화가 없었다. 자기 말이 내게 주었을 영향은 의식하지 못하는 천진한 아이처럼, 오히려 나와의 관계에 더 애착을 보이며 어느 밤에는 내 방으로 와서 자고 갔다. “이제 언니랑은 헤어질 때가 멀지 않았으니까, 일주일도 남지 않았으니까.” 새벽에 문득 깨서, 강선을 바라보면 걔는 아주 무방비로 잠이 들어서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나는 저 몸에 무엇이 찾아들면 강선이 되나, 하고 생각했다. 창호를 바른 문으로 어느 순간 들어선 빛에 아침이 시작되듯, 찬 공기에 콧속이 열리고 창공이 높아지면 불현듯 여름이 종료되듯 사람에게도 그가 사람이게 하는 시작점이 있을까.

며칠이 지난 밤, 기오성이 문자메시지로, 잠깐 산책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물었다. 내가 얇은 점퍼를 꿰입고 나가자 기오성이 “잠 안 오는데 우리 큰길까지만 걷자” 하고 쾌활하게 말했다. 그는 크고 투박한 손전등을 챙겼고 툇돌에서 내려오면서는 발을 잠깐 헛디뎠다. 그때 그 얘기를 기오성에게 할 수 있었던 건 내가 가진 마지막 용기였을 것이다. 그것이 여기 와서 선배, 족보 작업만 한 건 아닌가봐요? 하는 비아냥이었을지라도. 아니, 어쩌면 순진함이었을까. 그렇게 입을 여는 순간 우리가 쌓아올린 모란시장에서의 시간이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하는. 기오성은 걷는 내내 말이 없다가 대문까지 다 와서야 그러니까 너는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지?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래서 며칠 동안…… 하고는 상황이 이해 간다는 듯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오성이 내 말을 부인하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아서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이런 이해의 밖으로는 나올 수가 없으니까.

“은경아, 너는 바라는 게 있어서 그러겠지만 내가 지금 아무 말도 안 나온다. 나는 지금 내일부터 당장 강선이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는 고개를 숙이고 몇번이나 자기 신발로 나무둥치를 치더니 나 산책 좀 하고 들어갈게, 하고 왔던 길을 되짚어 어둠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날, 사모는 점심으로 냉면을 해주었다. 이번에는 정말 꿩으로 육수를 냈다고 강조했는데, 내가 어떻게 구하셨어요? 묻자 시장에서 샀지요, 하고 답했다. 교수는 우리의 노고를 여러번 치하했고 역사에 남을 만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장래가 창창하게 복을 받을 거라고. 기오성이 짐 정리를 다 못했다며 다음 버스를 같이 타자고 했지만 혼자 광주를 빠져나왔다. 그는 내 얼굴을 보지 않고 잘 가,라고 했고 나도 비스듬히 시선을 비켜 이라크 잘 다녀와요,라고 했다. 그리고 언니와 헤어져서 어쩌느냐고, 울 듯이 하는 강선을 아주 거짓이지는 않게 완력에 가깝게 꽉 끌어안았다.

 

*

 

그가 운영했던 ‘잡어탕평’이라는 팟캐스트를 들어보면 이런 일화가 나온다. 그가 이라크로 갔을 때는 추가 파병이 논의되는 가운데 한국인 피살사건이 일어난 직후였다. 한국군은 오지 말라, 나는 살고 싶다. 희생자가 남긴 말이 한국에서 도하로, 도하에서 요르단으로, 거기서 고속도로로 바그다드로 들어가는 내내 기오성을 누르고 있었다. 그는 스물일곱의 청년이었고 배낭에는 아이들과 그릴 물감과 스케치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걸 풀어볼 기회도 없었다. 어렵게 도착해보니 이미 캠프는 다시 요르단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국군 파병이 결정되자 다국적으로 구성되던 구호단체에서 빠져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것은 미리 조심하자는 취지였지만 달라진 이라크인들의 분위기와도 관련 있었다.

점령군. 단체 사람들이 자주 가던 식당의 이라키는 파병 결정을 듣고 그렇게 말했다. 너희가 점령군으로 온다면 우리는 너희를 쏠지도 몰라. 그렇게 겨우 이틀 머문 바그다드의 2004년 7월을 기오성은 길게 복기하지 않고 한 꼬마 도둑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테이블 위에 놓았던 담배를 한 꼬마가 훔쳐 쥐고 달아난 것이었다. 기오성은 꼬마를 따라갔는데, 그건 담배가 아깝거나 화가 나서가 아니라 그렇게 도둑질로라도 이라크에서의 자신을 일별해준 누군가를 애타게 쫓아가본 것에 불과했다. 그런 열의 없는 기오성의 추적을 눈치챘는지 꼬마가 담장 너머로 홀짝 넘어간 뒤 더는 달아나지 않고 대치하면서, 기오성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여러 압력들이 생각난 그는 당황했고, 꼬마가 재차 묻고 나서야 페퍼로니에서 왔어,라고 답을 했다고 했다. 페퍼로니가 뭐였는데요? 함께 출연한 게스트가 묻자 그는 글쎄요, 하더니 잠시 말을 끌었다. 그러고는 결국 아무 데서도 오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었을까요,라고 했다.

그때 나는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노량진에서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두번 고배를 마셨고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이제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학원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재수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고 하는 수 없이 엄마에게 올해만 공부에 전념하겠다고 양해를 구한 상태였다.

엄마는 내가 임용고시에 매달리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안 되면 임시로라도 일하다가 결혼하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그때마다 나는 결혼할 계획이 없다고 선을 그었는데, 그러면 엄마는 혹시 자기가 알지 못하는 깊은 상처가 있나 걱정하는 듯했다. 엄마가 그렇게 걱정하면 나 역시 내게 상처가 있나 돌아봤고 기오성이 떠올랐다. 그게 뭐라고, 연애랄 것도 없는 일인데 싶으면서도 뭔가 그렇게 넘길 수만은 없는 대목이 있었다. 팟캐스트를 통해 페퍼로니에서 왔어,라는 말을 들은 밤, 나는 여름 이후 몇번인가 걸려 왔던 기오성의 전화를 받지 않은 일에 대해 생각하다가 충동적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틀 후 그가 전화를 걸어 왔다. 대체로 내 근황을 물었고 아직 임고생으로 지내고 있다고 하자 “은경아, 그런 얘기 우리 스튜디오에 나와서 해줄 수 있겠어?” 하고 물었다. 내 얘기를? 나의 어떤 얘기를? 의아해하는 내게 그는 자기는 지금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누구를 밀려는 것이 아니라 정책 수립에 청년들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지금 우리가 힘들잖아, 백만 백수 생활이잖아.”

“그렇죠. 형편없어요.”

“형편없지. 사실 나도 백수나 다름없다. 공무원시험 준비생들도 엄밀히 말하면 거기 들어가고. 우리가 그때 족보 작업한 알바도 계약서 한장 안 쓰고 한 거고.”

“맞아, 알바비도 세달이나 지나서 입금됐잖아. 기억나요?”

“나지. 차는 뭐로 샀어?”

“못 샀어요. 병원비로 쓸 일이 있어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말이 안 됐어요.”

“안 되지, 안 돼. 그때는 그렇게 총체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들이었어.”

그는 학생 때나 그때나 언변이 좋았는데, 가장 큰 장점은 허심탄회하게 말한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사람 마음을 열고 방어하지 않게 해서 자기와 비슷한 동의를 끌어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만날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고 나자 나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는 그 여름에 대한 그의 평가가 마음에 걸렸다.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에 대한 부정일까. 그것은 발생한 감정에 관한 것일까, 그 임시적인 노동에 관한 것일까.

스튜디오는 홍대 근처에 있었다. 철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나는 여기가 약속 장소가 맞나 싶어 여러번 근처를 돌았다. 전화를 받고 나온 기오성은 전보다 뭐랄까, 더 단단해진 얼굴이었다. 갈색 리넨 셔츠를 입고 비슷한 톤의 안경을 맞춰 쓰고 있었다.

안내를 받아 내려간 지하는 생각보다 컸고 여러개의 스튜디오가 나뉘어 있었다. 그는 그 방들을 지나면서 몇몇 유명한 팟캐스트들을 여기서 녹음한다고 알려주었지만 내 귀에 익은 건 하나뿐이었다. 내가 그 명칭을 아는 것도 임용고시 학원의 젊은 문학 강사가 가끔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스튜디오로 들어가자 한 여자가 앉아 있다가 활달하게 나를 맞았다. 기오성은 그를 본명인지 별명인지 모르겠지만 달이,라고 불렀다.

“제가 보내드린 질문지 받으셨죠?”

진작 보내겠다던 질문지는 그 전날 밤에야 도착했지만 나는 잘 받았다고, 답변을 이렇게 적어보았다고 가방에서 꺼냈는데, 여자는 그냥 편하게 하시면 됩니다,라고 하고 상냥하게 종이를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기오성과 내가 몇년간의 공백을 불식할 몇마디 말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스튜디오로 들어갔을 때 나는 과연 이런 재회가 괜찮은가 생각했다. 세팅을 하는지 밖은 부산했지만 그 소리는 우리에게는 들리지 않고 미리 쓰고 있던 헤드셋에서 쎄- 하는 대기음만 들려왔다. 기오성은 메모한 종이들을 들춰보며 침묵을 지켰고, 나는 이 고립과 소음만은 그래도 어느 시절을 환기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고택 주위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만들어내던 상시적인 소음들이었다. 준비되어 있지 않고 기대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탄생하던 그 많은 발생들.

말주변이 없는 나는 소극적으로 방송에 임했다. 기오성이 물으면 단답형으로 동의하는 식이었다. 삼십분도 채 걸리지 않은 녹음이 어떻게든 끝나자 살 것 같았다. 이제 기오성과 대화란 걸 할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기오성이 내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2주차 방송 분량을 녹음하느라 게스트 한명이 더 있다는 것이었다.

“제가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요.”

나는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며 상한 기분을 드러냈다.

“미안해, 나도 빼보려고 했는데 가능하지가 않았어. 얼른 할게.”

그가 가버리려는 나를 잡듯이 한손을 내밀며 말해서, 하는 수 없이 녹음 부스 밖 의자에 앉았다. 아까부터 스튜디오를 들락거려 스텝인 줄 알았던 젊은 남자가 그날의 또다른 게스트였다. 영상 촬영이 없는데도 남자는 마치 면접생처럼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자 남자는 “청년실업에 우는 88만원세대”라고 답했다. 그는 처음에는 담담하게 백번 넘게 이력서를 썼지만 실패를 거듭한 구직 경험을 얘기하다가 오년 전, 보수적인 아버지를 설득해가며 새롭고 젊은 대통령을 뽑으며 했던 기대와 이후의 낙담에 대해 말하며 감정이 격해졌다. 울먹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눈물을 터뜨렸다. 인터뷰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말이 아니라 그 눈물인 것 같았다.

나중에 팟캐스트를 확인했을 때 나는 우는 상황이 편집되지 않고 그대로 올라와 있는 데 놀랐다. 내 말들은 쓸 만한 것이 없었는지 임용고시 학원들이 현금결제를 유도한다는 얘기만 길게 남아 있었다. 나는 팟캐스트에서 남자의 울음, 억울함과 분노, 절망으로 깎여나가는 말들을 길게 들었다. 엄마가 “누군데 이렇게 우니?” 하며 방을 잠깐 열어보았다가 “진짜인 줄 알았네” 하고 다시 닫을 때까지.

청년의 눈물을 당시 야당에서 홍보하고 나서면서 기오성의 팟캐스트는 화제의 중심에 섰다. 야당은 현 정부 경제실책의 피해자들 목소리라고 했고 여당 지지자들은 청년의 말에 과장과 거짓이 들어가 있다고 했다. 이윽고 검증의 바람이 불었다. 그의 가난과 그의 곤란, 불행과 좌절이 과연 그럴 만한가 검열하는 식이었다. 기오성은 출연할 경우 익명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몇번의 검색만으로도 그가 누구이며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지, 성적은 어땠는지, 구직활동 경험이 과연 사실인지 하는 얘기들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기오성이 이제 사과를 하고 청년을 위해 변명에 나서고 최후에는 더이상 팟캐스트를 진행하지 않겠구나 싶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오성은 팟캐스트를 계속 운영하다가 대선과 총선을 거친 뒤에는 청년의 눈물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보수정당에 들어가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봤을 때 거기에는 달이,라고 하는 그 여자애가 함께 있었다. 나중에 식당에 와서야 나는 그애의 별칭이 달이, 다리도 아닌 달리,라는 것을 알았다. 미술가 달리에서 온 닉네임인 줄 알았는데 “달리 해볼 도리가 없다”라는 말에서 왔다고 했다. 고깃집에 앉아 있는 동안 달리는, 기오성이 말할 때마다 주로 유행어로 답하곤 했다. “삼!겹!살 아니죠! 항!정!살! 맞습니다!” 하는 식이었다. 술이 들어가자 우리 사이에는 이제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식의 느슨한 방기와 방심이 찾아왔는데,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은경이 너 이렇게 술을 잘했니? 하는 기오성의 물음을 선배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하는 은근한 시비로 받았다.

“그래도 우리가 석달 숙식을 같이 했잖아.”

기오성이 약간 방어하듯 말했고 달리가 “숙식을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리고 동거? 하면서 입모양으로 물었는데 우리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고기를 다 먹고 일어나자 차분해지면서 마치 마음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기오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듯했고, 그 시절을 망가뜨린 것이 내가 아닐까 하는 죄책감과 혹시 경솔했을지 모른다는 자책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궁금한 점은 남았고 그건 강선에 관한 것이었다. 기오성은 자기도 세보 출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뿐이라고 했다. 우리가 그 일을 마치고 일년이나 지나서였는데, 강선은 고택에 여전히 머물고 있었다고.

“미국으로 가지 않았어요?”

“가지 않은 것 같았어.”

“그랬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오성은 “어딘가 좀 불안한 애였어”라고 말했다. 나는 불안, 하고는 잡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으로 쳐서 재를 떨궜는데 그런 기오성의 평가에 동의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페퍼로니에서 왔다는 강선의 말로 시작된 그 여름에서 오늘까지의 동선을 희미하게 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냥 강선이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 같던데.”

“누구를?” 기오성이 물었다.

“뭘 기다리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그렇게 혼자 자꾸자꾸 뭔가를 기다리고 싶어하는 사람.”

방향이 같아서 달리와 나는 함께 택시를 타고 갔다. 가는 동안 자꾸 달리가 “선생님, 기선배랑 친한 분이라서 방송에 오시게 된 건가요? 출연료도 없는데 감사해요”라고 했다. 좋은 경험이었다고, 재미있었다고 하면 다시 “기선배가 누구 아는 사람을 데리고 온 건 처음이라서 그런데 많이 가까우신가보죠, 사실 공사 구분이 확실한 편이라서 지인을 본 적은 없는데요, 출연 감사드려요” 하는 식이었다.

“저희 그렇게 안 친해요.”

내가 말하자 달리는 아, 친구가 아니신가요, 하면서 왜 그런지 나를 멀찍이 바라봤고 그러면 애인이신가요, 라고 말끝을 흐렸고 내가 “애인이었으면 이렇게 어떻게 만나요? 왜 만나요?” 하고 차갑게 받자 “아……” 하고 약간 말을 끌더니 “이건 친구도 애인도 아니여” 하는 유행어로 말을 마쳤다. 나는 그 순간 들은 말이 그 상황에서도 웃겨서 택시에서 내릴 때까지 웃다가, 차에서 내려서도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가을잎이 떨어져 내린 나무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오래전 그 여름날에 나는 사촌이 쓰는 고향말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예를 들어 ‘엉기’라는 단어가 그랬다. 그것은 진저리라는 뜻의 경북 지역 말이었는데 나는 한동안 의지나 악착같음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촌이 엉기가 난다며 대도시 사람들이 지니는 어떤 면을 거북해하는 말이, 에너제틱하다거나 열정이 있다는 뜻으로 와전되곤 했다.

그 시절 연애감정이란 흔하게 시작되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사라졌지만 그래도 내가 강선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왜 모든 사정을 자세히 확인하지 않았는지는 오랜 시간 숙제처럼 남았다. 오해를 풀겠다는 의욕을 보이지도 않았고, 강선의 태도에 질려 하지도 않은 채 어떤 맥락에서든 ‘엉기’란 별로 없었던 것에 대해. 혹시 그건 그렇게 해봤자 손에 쥘 게 없다는 가난한 체념이었을까. 그래서 그 한시적인 여름의 노동과 감정과 상태란 그냥 지나가면 그만이라고 여기려 했던 걸까.

광주에서 돌아온 뒤 나는 피디에게 다시 이메일을 받았다. 그는 수신확인 기능으로 내가 이메일을 읽었다는 것을 알고 희망을 가진 듯했다. 인터뷰의 일부라며 파일을 보내주었고 재생하자 한 남자가 오성이형,이라는 호칭을 쓰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형을 ‘수구 변태’라고 하잖아요? 변절했다고도 하고. 요즘은 형이 춘천 어디에서 양어장 주인 됐다는 썰도 돌더라고요. 형이 한 팟캐스트 이름에 잡어가 들어가잖아요. 그 잡어가 그 잡어도 아닌데 그게 웃긴가? 사람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닳는 것 같아요. 그렇게 믿고 따르던 형인데 지금은 어디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인터넷 짤로만 남아서 정치 게시판을 떠도는데 그렇게 형이 닳는 거예요. 이제 그런 형만 남는 거예요.

여기 나와서 무슨 얘기 할까. 기억을 되짚어보니까 이런 게 있어요. 형이 연락 안 되기 시작한 게 세월호 있고 2015년 즈음해서잖아요? 그 근처에 우리 평화모임 사람들이랑 서초에 한번 모였어요. 맥주 한잔하고, 집에 들어가려고 택시를 잡는데 형이 물어보는 거예요. 다들 어디 사냐고. 수색요, 미아동요, 부천요, 그러는데 형이 갑자기 야이 씨, 어떻게 강남 사는 놈들이 하나도 없냐! 그러는 거예요. 야, 어떻게 그러냐. 그러면서 우리가 웃었는데, 그때 형의 얼굴이 생생하죠. 그렇게 울 듯 웃을 듯 서 있는 게.”

 

*

 

이사를 마치고 문경에 갔을 때는 11월이었다. 문경에 왔으면 안 들를 수가 없다며 사촌은 나를 끌고 등산을 갔지만 거기에는 이미 고속버스에 실려온 어마어마한 등산객들이 있었다. 한 사극 드라마의 촬영지였다는 세트장을 돌며 어색하게 사진을 찍다가 아무리 운동을 싫어해도 옛날 과거길이었다는 문경새재를 그냥 지나칠 수 있냐며 우리는 도립공원으로 들어갔다.

“니도 옛날로 치면 과거 보러 안 갔겠나.”

“무슨 과거를 보니, 임고도 떨어지는 내가.”

“어마, 자기를 너무 낮추어서는 안 돼, 우리 형님이 아직 얘기한다. 우리 결혼식날 부주계에서 한자 척척 읽던 사돈아가씨 잘 있냐고.”

사촌의 결혼식날 부주계에 앉을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는 건 우리 가계의 내력 같은 것을 보여주는지도 몰랐다. 거기에는 양복정장을 입고 앉아 있을 남자들도 별로 없었고, 한자로 이름을 적어내는 하객의 축의금 봉투를 읽을 사람도 없었다.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만 없지 않았다. 사촌의 업무가 애초에 지시된 것과 달랐다는 이유로 재해보상금이 오랫동안 미지급 상태인 것을 두고 나서서 싸워줄 부모가 우리에게는 없었고, 그 긴 공방 동안 융통할 만한 돈도 충분하지 않았다. 내가 고택에서 받은 돈은 그렇게 해서 중고차가 아니라 사촌에게로 흘러들어가야 했다. 그러는 동안 여러번 괘안타,라고 말했지만 정말 괜찮은 적은 사실상 없었다는 것.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 수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울고 싶은 기분으로 그 시절을 통과했다는 것. 그렇게 좌절을 좌절로 얘기할 수 있고 더이상 부인하지 않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성장이었다.

사촌의 바람과 달리 나는 그 선비의 길을 충분히 걷지 못했다. 고속버스 기사가 전화를 걸어 우리 차를 빼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차는 분명히 정해진 주차 라인 안에 두었고 불법을 한 것도 아닌데 고속버스 기사는 자기 차가 길어서 뺄 수가 없다고 다른 차는 연락을 받지 않아 정말 곤란하다고 사정을 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얼마 걷지 못한 산길을 되돌아 주차장으로 갔는데, 어떻게 뺐는지 고속버스는 이미 가버린 뒤였다. 화가 난 사촌이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쪽에서는 이미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니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요즘 세상이 이런 세상이라고, 아주 엉기가 난다고 사촌은 화를 내다 가다가 사고나 나라, 하고 불쑥 말했고 곧이어 우리는 그 말이 연상시키는 비극에 대해 생각하면서 아이다, 취소다, 취소, 하고 손을 저었다.

사촌은 기억하고 나는 알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그날 이후로 나는 사과밭을 봐도 사실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꽃의 시절이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온전히 열매를 위해서 존재하는 풍경일 뿐이었다. 사촌의 농장에서는 적당히 꽃을 따서 사과가 잘 열리게 해야 했다. 그러니 자기가 제거하기 전에 내려와서 보라고 재촉한 것이었다. 너는 지금 슬픔에 잠겨 있으니까. 무뚝뚝해서 살가운 말을 좀처럼 하지 않는 사촌이 그렇게까지 말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사과밭에 섰다.

꽃은 없었고 머무는 날 중 아주 추운 날에는 가지 끝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어느 밤, 그렇게 흰 가지를 보고 있는데 바람이 불었고 어딘가에서 누가 종이 같은 것을 태웠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소리들이 연상되었다. 기대와 상관없이 발생하고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면 저절로 소멸했다가 다시금 떠오르던 어떤 것들이. 그렇게 해서 복기한 밤의 소리는 엄마의 투병으로 한동안 나를 쥐고 있던 죽음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슬프게도 그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연속적으로 환기되는 오래전 여름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휴대전화를 열어 채은경입니다,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말과 하고 싶은 말 가운데 문장을 고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라고 적어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