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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형준 朴瑩浚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가 있음. agbai@naver.com
도마뱀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공터로 남은 재개발지역을 돌아다녔다
빈집 계단을 밟고 올라 다니기를 좋아했다
깨진 유리가 발바닥 밑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방 안을 훔쳐보는 게 좋았다
고독한 방들 낱장이 찢어진 책들
햇빛이 늙은 도마뱀같이 벽에 붙어 있다
어떤 날은 사라진 버스정류장 평상에 앉아 있는
노파를 어머니처럼 바라보기도 하였고
그런 날은 근처 모래내시장에 들러 조개를 까는 터진 손들을 보고 들어왔다
시장바닥에 쭈그려앉아 칼끝으로 조개나 까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시외버스를 타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한시간 기다려 삼십분 면회하고 돌아와 대학에서 시를 가르쳤다
시를 쓰는 학생들을 위해 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 하나만 남은, 상상력만이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듯 바슐라르를 읽었다
계단의 깨진 유리가 발바닥에서 다시 깨어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빈집은 어디나 창문이 깨져 있고
방은 햇빛이 드는데도 어두웠다
때로는 학생의 방인 듯한 방에 앉아 자재더미 아래서 공책을 끄집어내어
잊어버린 영어를 읽고 공식을 풀고 생각나지 않는 이름과
풀꽃들이 어둠 속에서 꽃을 맺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평생을 두 단어로 요약하면 걱정과 기도인 그녀
아버지만 죽으면 훌훌 날아서 살겠다던 그녀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육년을 요양원에서 보내다가
이제 자신이 어디로 날아왔는지도 모르게 침대에서 어리둥절 눈만 끔뻑거리고 있다
바슐라르를 가르치며 나는 맑은 물, 봄의 물이
표면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 뭘까 질문을 하고
시를 쓰는 학생들이 창문 밖 어디쯤을 바라보면
바로 백조야 하고 혼자 답변을 하였다, 그런데 그 물이 저녁이 되어 깊어지면
물이 무거워져 바닥으로 가라앉는데, 그럼 그게 뭐가 될까
바로 죽어가는 어머니야 죽어가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우리들은 보호받는 잠을 자는 거야, 아침이 되면 그렇게 나는 다시 물 위로 떠올라
표면에서 가장 아름다운 백조가 되어 시를 가르쳤다
나는 저녁 여섯시가 되면 빈 공터를 걸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빈집에 들러 앉아 있다 철거 예정인 성당으로 올라가
성모마리아상 어깨에 앉은 늙은 도마뱀을 보았다
피딱지처럼 죽어가는 태양이, 물 같은 침대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심장이 너무 안 좋으셨어요, 심장판막이 제대로 열리고 닫히지를 않아
피딱지가 몇십년을 핏속에서 돌아다니다가 뇌혈관을 꽉 막아버린 거예요
의사 앞에서 가족들은 말이 없이 나와 장례식장을 구하러 가고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밤 버스 창밖으로 보름달이 떠 있다
눈을 떠보니 다시 빈집 계단이었다
깨진 유리창이 모래알처럼 달빛에 반짝거렸다
늙은 도마뱀이 한마리 벽에 달라붙어 끈적끈적한 알을 낳고 있었다
모래내시장에서 비릿한 냄새가 풍겨왔다 여전히 봄이었고
순간, 조개를 까는 노인들이 그리웠다
가을비
창문을 여니
비에 떨어져나가는
잎새 사이로 반짝인다
빈 길을 걸어
돌아오는 이의
작은 기침
오래 집을 나간 사람
돌아보게 만드는 가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