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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백민석 白閔石

소설가. 소설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혀끝의 남자』 『수림』 『버스킹!』,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내가 사랑한 캔디/불쌍한 꼬마 한스』 『목화밭 엽기전』 『죽은 올빼미 농장』 『공포의 세기』 『교양과 광기의 일기』 『해피 아포칼립스!』 등이 있음. hungryyears@naver.com

 

양경언 梁景彦

문학평론가. 평론집 『안녕을 묻는 방식』 등이 있음. purplesea32@hanmail.net

 

양윤의 梁允禕

문학평론가. 평론집 『포즈와 프러포즈』 등이 있음. aleph2006@daum.net

 

 

왼쪽부터 양윤의 백민석 양경언 Ⓒ 신나라

왼쪽부터 양윤의 백민석 양경언 Ⓒ 신나라

 

 

양경언 안녕하세요. 이번 문학초점 진행을 맡은 양경언입니다. 지난 계절에 이어 양윤의 평론가와 함께 뵙게 됐습니다. 한 계절 만에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요. 게스트로는 백민석 소설가를 모셨습니다. 반갑습니다.

 

백민석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

 

양윤의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아이디어를 떠올려보고 있습니다. 지난 대담 때 문학을 함께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느꼈는데 요즘 들어 그런 대화가 더욱 절실해졌어요. 오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기대하고 왔습니다.

 

 

김유담 『탬버린』(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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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기이다보니 한편으론 여섯권을 더욱 꽉 차게, 깊이있게 살펴보실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먼저 김유담 소설집 『탬버린』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2016년 등단해 4년 만에 첫 소설집을 상재했어요.

 

백민석 등단작이 소설집 맨 앞에 실린 「핀 캐리」이지요. 당시에 신춘문예 작품집으로 소설창작 수업을 했던 게 기억납니다. 학생들 반응이 좋았어요. 저도 좋았고요. 그래서 이번 문학초점에 이 책이 올라와서 반갑고 기분이 좋습니다. 중간에 볼링 핀 그림도 들어가는 등 형식적으로도 독특했습니다. 수업에서 제가 신춘문예 수상작에서 흔히 발견되는 비슷한 점들을 설명하면서 가족 로맨스라는 말을 했어요. 가족 로맨스는 부모, 자식, 형제 간의 관계를 소설적으로 극화하면서, 그 가족 서사 안에서 인물들의 성장과 삶, 그리고 사회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형식이죠. 가족이 곧 축소된 사회인 겁니다. 가족 안에서 「멀고도 가벼운」 같은 정치적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고, 「핀 캐리」에서 드러나듯 경제적 교환이 이뤄지기도 합니다. 오빠가 동생의 등록금을 대주려고 과로를 하고, 가장 노릇을 하려다 도박까지 하게 되죠. 김유담은 그 가족 로맨스를 전형적으로, 잘 그렸어요. 어느 한 형식을 이 정도로 잘 다룬다는 건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아쉬운 점은 신춘문예 작품집의 단편들 대개가 이런 가족 로맨스에 해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번에 『탬버린』에 실린 다른 단편들도 거의 가족 로맨스에 속한다는 생각입니다.

 

양윤의 첫 소설집을 낼 때 갖게 마련인 ‘여기가 스타트라인이야’라는 자의식이 드러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설운동장」의 마지막 장면이 특히 그러한데요, 작가가 독자에게 건네는 각오처럼 읽힙니다. “운동화 끈”을 조이고 “심호흡”을 하고요. 가족이란 본래 ‘확장된 나’이거나 ‘내 안에 들어온 세상’이잖아요? 그 점에서 첫 소설집이 가족 로맨스의 형식을 취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저는 단편들이 가진 특별한 소재들에 관심이 갔어요. 「탬버린」에서의 탬버린이나 「핀 캐리」의 볼링핀이 그런 예일 텐데, 소설을 읽다보면 서사를 종결지어야 할 지점에서 그런 소재가 이정표처럼, 강렬한 인상을 뿜으며 서 있습니다. 삶의 생생함을 보여주는 페티시가 아닐까 싶어요. 단편의 기율에 충실하다고 할까요.

 

양경언 가족 이야기로 자신의 처음을 알리는 작가들이 많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가족의 영향력이 어떠한지를 확인해주는 지점 같습니다. 특히나 김유담의 소설은 변두리 지역의 서민층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어떻게든 그곳을 벗어나 ‘인서울’ 하고자 하는 여성인물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가져도 되는」에 등장하는 ‘인희’는 아예 “고향의 가족들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와 부모 형제와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지만, “자신이 버리고 온 것들로부터 한시도 자유롭지 못”한(226면) 인물로 그려지죠. 가족 공동체에 복무하고 있는 자신이 싫으면서도 계속 묶여 있어야만 하는 상태, 책임감이 동반된 죄의식을 품는 상황이 이 여성인물들의 정서와 행위를 좌우해요. 서울에서의 삶도 만만치 않고 “사람들이 말하는 기본의 기준이 갈수록 버거워진다고”(238면) 여기는 이들은 그래도 어떻게든 견디고자 애를 씁니다. 삶의 부침을 겪는 와중에도 주저앉지 않고 힘을 만들어가는 여성인물들이 감당하는 중인 긴장감이랄지, 그러한 인물들을 통해 한국사회의 지역 차가 젠더별로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어림잡아보기 위해서는 이러한 가족관계가 끊임없이 소환될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백민석 그런데 이 가족 로맨스가 신선감은 떨어집니다. 제가 처음 문학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도 박완서, 양귀자 선생 작품 같은 가족 로맨스가 주를 이루고 있었죠. 그리고 지금 저와 같이 활동하는 젊은 소설가들도 비슷한 형식의 가족 로맨스를 쓰고 있어요. 사실 이게 한국소설의 주류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피자에 도우가 있잖아요? 그 도우가 가족 로맨스라면, 소설가들이 거기에 저마다 토핑만 다르게 얹는 거예요. 어떤 소설가는 소시지, 어떤 소설가는 토마토, 또 어떤 소설가는 바질과 마늘을 얹지요. 김유담의 「핀 캐리」는 가족 로맨스라는 도우 위에 볼링 이야기를 얹은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오해할까봐 덧붙이지만, 이건 작품이 좋다 나쁘다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맛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너무 오래, 너무 자주 피자를 먹어온 것은 아닐까요? 그럼 질리고 물리잖아요. 지금 발표되는 작품들의 주류가 이 가족 로맨스니까, 소설가 지망생들도 별 문제의식 없이, 마치 운명인 것처럼 이 형식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양윤의 무능하고 무력하며 실패한 가장인 아버지,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아들 혹은 가계를 책임지느라 세속화된 어머니라는 인물 구도가 기시감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게다가 이 구도는 소설이 바뀌어도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고, 이 반복이 인물을 납작하게 만듭니다. 「멀고도 가벼운」의 보배이모가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 있는데, 뉴질랜드로 떠나는 것으로 아예 서사의 지평에서 사라지고 말아요. 아마도 절반은 작가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고, 절반은 이야기의 구성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닐까 싶은데, 이런 ‘경험적인 자기구성의 원리’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양경언 보배이모를 서사의 지평에서 사라지게 한 원인도 상경한 여성 화자의 관점과 연관되는 듯합니다. 그런 화자는 자신의 기원이 된 지역 혹은 가족으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어하지만 그게 도리어 경계와 배타성을 강화하기도 해요. 활력이나 새로운 감각을 가져다주는 사람은 늘 외부에 있고 자기는 여기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의 표현이랄까요. 그런데 멀어지기 위해 계속 싸우고 있는 상태는 외려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현실의 방증이기도 하죠.

한편 끝없이 외부를 좇지 않아도 내부의 힘과 어떻게 교섭하고 대화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다른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다는 점은 「탬버린」에서 잘 드러나 있어요. 입사 사개월차 신입사원 ‘은수’가 겪는 회사생활이란 회식 때문에 간 노래방에서 100점이 나오면 대표가 오만원을 주는 일이 벌어지는 것과 같이 수치스러운 상황을 유희로 받아들여야 넘길 수 있는 날들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삶의 ‘징글징글한’ 면모를 알아가는 은수에게 문득 끼어드는 건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송’과 함께 찰랑거렸던 탬버린의 리듬이에요. 직원들에게 ‘99점과 100점은 엄연히 다르다’는 논리로 훈계하는 대표나 성과연봉제의 도입을 당연시 여기는 회사의 상황은 은수를 비롯해서 함께 일하는 이들을 기능적으로만 만드는데, 은수는 송과 함께 보냈던 시절의 자신을 성찰하면서 “울컥 서러운 감정”(159면)을 느끼기도 하고, 주변이 어떠하든지 간에 요란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탬버린의 개성에 자신을 빗대어보기도 하죠. 회식 자리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서술자의 시선은 그 자리의 분위기에 압도되지 않고 떳떳하게 맞서고 있다는 인상을 전합니다. 주인공이 자기 안의 에너지를 마주하게 된다는 점, 그 힘과 교섭할 여지가 생긴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어요.

 

양윤의 서울/지역, 부/가난, 실패한 가장/조숙한 딸, 남자/여자라는 구도가 여러번 겹치면서 2020년대 한국의 젊은 여성의 삶을 스케치하고 있는데요, 「탬버린」의 송이나 「가져도 되는」의 인희와 조명아처럼 수평적인 친구관계를 그릴 때 인물이 더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한편 마지막에 실린 「영국식 찻잔이 있는 집」은 결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일본식 공포물 같다고나 할까, 위악적인 가족관계를 그리다보니 현실성이 떨어진 경우로 볼 수도 있을 테고, 작가의 새로운 모색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전반적으로는 우리가 경험했을 것만 같은 장면이 곳곳에 있고, 그런 디테일들이 독자의 공감을 얻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 면을 봐도 이후 작품들이 기대가 돼요.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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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 김혜진은 장편을 부지런히 쓰는 편입니다. 『9번의 일』(한겨레출판 2019)이 나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또 새로운 경장편을 써냈어요. 가난한 남일동에서 주인공이 주해 모녀를 만나고 헤어졌던 일을 회고하는 소설입니다.

 

백민석 김혜진의 작품은 여기저기서 리뷰를 보아왔고, 기대하고 있었어요. 확실히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있는 작가더군요. 작품의 주된 공간으로 남일동을 두고 그 안의 사람들, 관계들을 이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방식이 좋았어요. 괜찮은 이야기꾼을 한명 만난 것 같습니다.

 

양윤의 ‘불과 나의 자서전’이라는 제목이 소설의 내용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는 생각입니다. ‘나의 자서전’임을 강조하듯 화자가 경어체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나, 중심이 되는 인물을 둘로 두고 하나는 남일동 밖으로 탈출하려는 사람으로, 다른 하나는 남일동에 터를 잡고 살려는 사람으로 구성함으로써 이들의 교차된 관점을 통해 서사를 구성한 것은 성공적인 전략으로 보입니다. 제목의 ‘불’도 마찬가지인데요, 보통 불은 내면의 열정이나 혁명의 열기를 상징하잖아요. 그런데 정작 ‘나’가 불을 지르는 장면이나 “번지는 불꽃”(166면)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다지 열정적이지도, 혁명적이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나’가 벌금까지 물면서 방화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죠. 저는 이러한 점이야말로 ‘증상’으로밖에 드러날 수 없는 ‘나’의 위치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주해와의 만남이 ‘나’의 내면에 뜨거운 무언가를 불러일으켰지만, 그 불씨가 창궐해서 다른 세계를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는 거예요. 저는 ‘나’의 몸에 난 두드러기가 화상 자국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로써 증상으로밖에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었던 삶이 드러나지요. 이 소설이 파국으로, 곧 이들이 살았던 집들이 파괴되는 현장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겠고요.

 

양경언 화자가 서술자의 자리를 확보해가는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화자는 어떻게 해서든 남일동이라는 공간에 파묻히지 않으려 해요. 까딱하면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쪽으로 함몰되어버릴 것 같아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는 와중에 관찰자적인 시선을 갖게 되죠. 동시에 주해 모녀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제목이 ‘이것은 나의 자서전에 불과하다’라는 차원으로 읽히기도 했어요. 지금의 나는 불과 이러한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상태라는, 반성적이고 위축된 심리가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백민석 우리 사회의 계층갈등을 압축해놓은 알레고리로서 남일동이 쓰이잖아요. 서사가 진행되면서 이 알레고리의 의미가 계속 확장되는데, 그 과정이 저는 좋았어요. 처음엔 그저 실제로 있는 동네였다가 섬처럼 고립된 곳이라는 의미에서 ‘남일도’로 부르죠. 그러다가 뭔가 혐오스러운 의미가 덧붙여져 사람들이 어떻게든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는 동네가 돼요. 부동산을 통해 신분상승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욕망을 좌절시키려는 두려운 존재, 저주받은 존재로까지 의미가 커집니다. 전염병처럼 옮기도 하고 대물림되는 숙명의 의미까지 보태어집니다. 그러다 결국 혐오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남민’(남일동에 사는 주민)이라는 표현을 얻기도 해요. 맨 나중엔 무슨 타도해야 할 대상이라도 되듯이 불까지 지르고요. 이 ‘남일동’ 안에 우리 사회의 온갖 불편한 갈등들이 집약되어 있어요. 정말 제대로 쓰인 알레고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교적으로는 뛰어날지 몰라도 우리 사회의 악을 너무 한 공간에 압축해놓으려 한 것 아닌가요. 현실에서는 남일동 같은 공간들이 널리 편재되어 있죠. 서울 강남에도 남일동이라고 할 만한 곳이 있을 거예요. 이 점에서 좀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고 봤어요. 그러니까 남일동이 싫다고 이사를 간다 해도, 그 이웃에 또다른 남일동이 있을 거란 얘기입니다. 또, 주해가 이사를 와서 남일동을 조금씩 좋게 바꿔나가는 모습도 어찌 보면 영웅서사 아니에요? 저는 큰 줄거리 안에 작은 줄기로서 영웅서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봤는데, 이 주해의 영웅서사 역시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것 같아요. 현실의 부조리는 영웅 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바뀌지 않죠. 『불과 나의 자서전』이 만약 우화 소설이라면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리얼리즘 소설인데, 리얼리즘 소설에서 한 사람의 힘으로 세상이 바뀌는 영웅서사는 좀 부자연스럽고 현실법칙과 좀 불일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양윤의 인상적인 말씀입니다만, 주해를 영웅으로 볼 수 있을까요? 주해가 남일동에서 살아보려고 끝까지 노력하는 인물이긴 해도,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거기서조차 밀려나게 되잖아요. 주해의 노력에 해당하는 어떤 성취나 업적이 있지도 않고, 심지어 주해의 내면에 숭고한 동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사회적으로 소외된 지역인 남일동에 사는 사람들을 ‘남민’으로 부를 가능성은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있다는 점에서 소설의 설정이 영 동떨어진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백민석

백민석

백민석 제가 가장 마음에 걸린 점은 화자가 이들 사건을 지켜보며 도덕의 담지자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소설의 주인공이 사회악 바깥으로 벗어나 도덕의 주인 행세를 하는 게 요즘 세상에 과연 정당한 일인가요. 도덕의 담지자, 주인 같은 포지션을 점하는 것은 남성 소설가들이 더 심하고 그게 다 제 선배들인데,(웃음) 이 자리에 남성 소설가의 작품이 없어서 비판을 못하네요. 어쩔 수 없이 이 작품을 두고 살펴보면, 화자는 계속 남일동의 모순을 비판하고 있어요. 자기한테 잘못된 가치관을 물려준 부모를 비난하기도 하고 나중에 불까지 지르잖아요. 권여선의 몇몇 작품들과 김혜진의 소설을 보면 주인공들이 도덕의 주인 행세를 하면서, 자신과는 다른 포지션에 있는 인물들에 대한 혐오의 서사를 생산해내고 있어요. 그러면서 자신은 악한 현실에 대한 관찰자, 나아가 고발자의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눈이 밝은 독자라면 “그렇다면 당신은 얼마나 달라서?”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소설가 당신은 소설 속 혐오스러운 속물들과 얼마나 다른데?” 하고요. 도덕의 주인이라는 포지션은 지난 칠팔십년대, 어쩌면 구십년대까지는 설득력이 있었을 수도 있어요. 그 시절에는 군부독재라는 뚜렷하고 거대한 악이 한쪽에 버티고 있으니, 다른 쪽은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선이 됐어요. 그래서 지금의 정치적 올바름이나 여성주의의 시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표현들이 비판받지 않고 반성 없이 쓰이곤 하지 않았나요? 하지만 지금은 소설가를 도덕의 주인 자리에 세워줄 근거가 되는 거대한 악이 분명하지가 않아요. 거대한 악이 없다면, 거대한 선의 자리도 없죠. ‘우리 안의 파시즘’ 같은 시민사회 내부의 악을 성찰하는 담론들이 나오기 시작했던 게 1990년대 후반이었다고 기억해요. 벌써 이십년도 더 지났는데, 어떻게 도덕의 주인 행세가 가능한 것인지요. 또, 선한 이상을 설파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인 것은 아니죠. 그 이상이 선한 것이지. 그런 점에서 주민현의 시구가 생각나요. 우리는 “살인자, 라고 소리치는 동시에 살인자가 되”(「가장 검은 색을 찾아서」)는 거예요. 오늘 여섯 작가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데 자기성찰이라는 점에서는 가장 어른스러워요. 우리는 다 같이 한국사회에서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상호영향 관계를 무시해서는 안 되죠. 우리 중 누구도 도덕의 온전한 주인이라는 포지션에 설 수는 없다고 봐요.

 

양윤의 서술자가 외부의 관찰자로 빠져나와 내부의 다양한 사람들을 비판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혐의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나’(최홍)와 ‘주해’가 그다지 다른 사람으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하나는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쓰고 하나는 거기에서라도 자리를 잡으려고 애쓰지만, 사실은 둘 다 거기에 속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둘의 이력이 또한 남일동의 지정학과 일치하지요. 한쪽은 회사에서 왕따를 돕다가 왕따가 되었고, 또 한쪽은 병원에서 일어난 의료사고의 비난을 과도하게 뒤집어썼어요. 둘 다 처하고 싶지 않은 처지에 몰려서 쫓겨났죠. 그 ‘처(處)’가 바로 남일동이라는 장소입니다. 작가가 이전 작품들에서부터 보여온 노력도 있습니다. 『딸에 대하여』(민음사 2017)에서는 레즈비언을 그렸는데, 소설가가 소수자를 비출 때는 그 자체로 주체의 탄생을 조명합니다. 제가 이번 소설에서 아쉬운 점은 작가의 도덕적 자의식이 드러나서라기보다 오히려 너무 조심스러워서 생기가 떨어진다는 점이에요. ‘나’와 주해의 서사가 적층(積層)되면서 상호작용한다기보다, 이 둘이 동병상련을 느끼는 과정에서 서로의 고통이 중화된다고나 할까요.

 

양경언 작가가 너무 조심스럽다는 의견에 동의하는 게, 인물의 행동도 그렇거든요. 화자가 주해 모녀와 굉장히 친밀한 관계를 쌓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마지막까지도 서로에게 깍듯하잖아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웃음을 주고받았을 텐데, 그런 시간의 힘이 간과되어 관계에 생동감이 없고 외려 서먹서먹해요. 과거를 낭만화하지 않기 위해 이런 전략을 택했으리라 짐작은 되지만 아쉬운 부분이죠. 또 주해의 간호조무사 시절 이야기가 작품 전체의 결과 좀 안 맞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병원의 주된 책임자들은 어디로 가고 피해자들이 또다시 주해를 찾아와 추궁하잖아요. 결국 그 일로 주해가 겨우 찾아든 남일동에서마저 떠나게 된다는 흐름입니다. 그렇다고 하층민들끼리 서로 책임을 탓하고 따돌리면서 모두 상처를 입는다는 차원을 세밀하게 다루는 것도 아니라서, 남일동이라는 이 구획되어진 공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사태가 그렇게 되어버렸다 정도로 읽혀요. 큰 층위에서는 배제와 소외, 혐오를 이야기해볼 수 있겠지만, 서사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들었던 삽화였습니다.

 

양윤의 반면 ‘나’가 어머니를 지켜보는 대목은 아주 생생합니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 우리 집을 올려다보기만 했습니다. 아니, 어둠 속에서 어마어마하게 커진 집이 우두커니 어머니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121~22면) 이런 묘사가 상당히 인상적이잖아요. 아버지는 내 집을 장만했다는 마음에 자랑하고 싶은 심정을 여기저기서 드러내는데, 어머니는 집을 힘겹게 올려다봅니다. 마치 집이 와르르 무너져서 어머니를 덮칠 것처럼요. 삶의 힘겨움이 어머니의 시선을 통해서 절묘하게 드러납니다. 어쩌면 어머니와 딸로 이어지는 이 모녀관계를 중심으로 이 소설을 봐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주해에게도 아버지 없는 딸(수아)이 있잖아요? 둘의 교감은 어머니와 딸 사이의 교감이기도 합니다. 어머니 둘에 딸 둘, 이런 방식이죠.

 

백민석 네, 저도 그 장면이 좋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저는 그냥, 완벽한 걸 바란 거겠죠. 저도 못하는 것을.(웃음) 괜찮은 이야기꾼을 만났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요.

 

 

권여선 『아직 멀었다는 말』(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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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 다음은 권여선의 여섯번째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입니다.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 이후 사년 만에 선보이는 소설집인데요, 작정하고 술 마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던 이전 소설집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술을 안 마시는 인물들이 다양하게 등장해요.(웃음)

 

양윤의 권여선의 소설을 읽으면 뭔가 불편한 지점과 마주하게 됩니다.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나 행동이 독자가 예상하는 경로를 자주 벗어나거든요. 「모르는 영역」에서 명덕과 다영 즉 아버지와 딸의 대화나 「송추의 가을」에서 막내 혁의 절규가 그렇고, 「희박한 마음」에서 디엔의 꿈 이야기나 「너머」에서 요양원 노인들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쳐다보는 시선이 그렇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손톱」의 주인공 소희를 한참 동안 잊을 수 없었어요.

 

백민석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정서를 하나만 꼽자면 불신일 겁니다. 가족에 대한 불신, 친구에 대한 불신. 첫번째 작품 제목부터가 ‘모르는 영역’이잖아요. 모른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얘기로 읽힐 수 있죠. 저도 「손톱」이 가장 좋았는데 가족이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인, 타인이나 마찬가지인 불신의 상황을 그린 소설로 봤어요. 주인공이 처한 경제적인 조건은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아요. 끝없이 돈을 계산하는데, 그 숫자를 시각적인 이미지로 바꾸면 주인공을 가둬놓는 창살이 될 것 같습니다. 몸을 가둬두는 창살이 아니라 사고를 가둬두는, 사고를 제한하고 시야를 잘라먹는 창살 역할이죠. 돈 많은 사람들한테는 주인공이 헤아리는 액수가 의미없는 수준일 텐데 이 사람한테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 되어버리고, 그래서 그 밖으로는 감히 나올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양경언 슬픈 장면만 보아도 독자들이 인물의 희로애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 있지요. 「손톱」이 그러했는데요, 소희가 처한 상황이 굉장히 안타까운데 그렇다 해도 작가는 그를 동정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짬뽕을 먹지 못하고 나오는 소희를 향해 주인여자가 “젊은 사람이 어째 매가리가 없이”(64면) 하는 대목이 있어요. 그러나 작가는 독자들에게 소희가 결코 ‘매가리’ 없는 인물이 아니다,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면서 버텨내는 힘이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줘요. 그렇게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영역을 함부로 침탈할 수는 없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양윤의

양윤의

양윤의 소희가 병원비가 비싸 고민하다가 “약과 피와 진물을 유리에 꾹 눌러 비비고 쏜살같이 달아”나는 장면(73면)이 기억에 남아요. 그 얼룩이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처럼 느껴졌거든요. 나는 너희 자본의 질서에 들어가지 않을 거야, 너희 ‘삐까뻔쩍’한 건물은 이 얼룩 하나도 고치지 못하잖아. 이런 무언의 항의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그 바로 앞부분에는 소희의 속엣말이 나와요. “내가 어쨌다고? 내가 뭘, 뭘, 뭘? 뭘? 뭘? 뭘?/소희는 다친 개처럼 유리에 대고 짖었다.”(73면) 저 “뭘, 뭘, 뭘?” 하는 소리는 정말 개 짖는 소리 같지 않나요? 저 저항 내지 결기야말로, 권여선의 인물이 보여주는 최상의 장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송추의 가을」에서도 마지막 혁의 욕설 때문에 가족들의 허위의식이 멋지게 폭로되는 한편, 혁이라는 인물이 발견되고요.

 

백민석 「손톱」과 더불어 인상적이었던 작품이 「너머」입니다. 「너머」는 어느 학교에 잠시간 임시직으로 고용된 사람의 이야기예요. 학교에서 그는 피고용인이자 불안한 비정규직인데 병원에 가면 간병인을 고용한, 그리고 언제든 해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죠. 이런 소설의 구조가 우리 사회의 축소판 같습니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만인이 만인에 대해 적인 상태’라는 홉스(T. Hobbes)의 문장이 떠올랐고, 『리바이어던』을 다시 찾아보기도 했어요. 홉스는 인간사회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의 상태로 들어가는 이유로 국가의 불편부당한, 공정한 제도의 부재를 들고 있어요. 공평한 제도 혹은 공정함에 대한 사회의 합의가 부재할 때, 사람들은 노동의 댓가를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불안해합니다. 불신하게 되고 싸우게 되죠. 그래서 삶을 “외롭고, 가난하고, 비참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짧다”라고 느끼게 되고, 삶은 곧 전쟁이 됩니다. 이런 현실을 모나지 않은 형식으로 권여선의 소설들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양윤의 저는 백민석 선생님과는 반대로 루쏘(J. Rousseau)의 성선설이 떠올랐습니다. 소설집의 제목 역시 「손톱」의 한 장면에서 따온 것인데요, 옆자리 할머니의 하품 소리를 듣고 소희는 그게 “아직 멀었다 소희야”(81면)라고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소희와 할머니는 지금 휴대전화 AS센터에서 서비스를 즐기는 중이지요. 이곳은 따뜻하고 차와 커피와 사탕이 무료인 곳이고요. 할머니는 소희보다 이곳을 더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 말은 할머니가 소희에게 한수 가르쳐주는 것이죠. 저는 이 유머가 소희가 자신에게 부여된 참담한 운명을 이겨내는 긍정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백민석 네, 제가 말씀드린 불신이 꼭 소설이 부정적인 세계관에 머물러 있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권여선이 하나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는 작가도 아니고요. 그럼에도 한가지 더 비판적으로 보자면 소설이 좀 싱겁지 않나요? 재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극이 덜하다는 뜻에서, 간이 좀 ‘슴슴한’ 거예요. 더 강렬하게 그렸다면 어땠을까 싶어서 약간 불만스러웠습니다.

 

양경언 소설 속에 강력한 엑셀이 없는 것은 맞습니다. 이를테면 자신을 가둔 창살을 부수고 밟고 가버리는 식의 도발은 없는 셈이죠. 그런데 저는 이걸 인물들이 자신이 처해 있는 운명,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집중해 있어서인 것으로 읽었어요. 우리의 삶도 수용의 차원에 머물러야 하는 때가 있잖아요. 인간이란 다 한계가 있고, 무릎 꿇리는 현실에 맞닥뜨리고 마는 때도 있죠. 그처럼 불가피한 삶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순간에, 권여선은 그 굴레를 저 자신의 근력으로 움켜잡고 흔드는 인간의 가련하면서 동시에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소설집 마지막에 배치된 「전갱이의 맛」은 인물들의 대화 위주로 이루어졌다는 차원에서 또다른 결을 보여주는데, “나라는 시스템이 망가지고 나니까 내 속에 자연이 있음을 알게 된 거”(247면)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나오기도 하잖아요. 물론 그 굴레를 곧장 부수고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삶에서 건들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건드려지는 고약함이 있어요. 그런데 그 고약함이야말로 독자들이 이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생생히 살아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들어요.

 

양윤의 저는 이 작가가 더이상의 가속페달을 밟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다음은 벼랑 아닐까 싶어요.(웃음) 경향소설들이 가닿는 파국은 권여선 소설의 인물들에게는 적당하지 않은 운명입니다. 소희도 혁도 자신이 터뜨릴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과 분노를 터뜨립니다. 그러고 나서도 삶은 계속되지요. 소희의 입장에서는 집을 나간 엄마도 언니도 돌아오지 않고, 혁의 형제들은 여전히 엄마의 생각은 무시한 채 이장을 궁리하겠죠. 이전 단편 「이모」(『안녕 주정뱅이』)에서는 손바닥에 담배를 눌러 끄는 장면이 나옵니다. 절제된 분노랄까, 내면을 향한 폭력이랄까, 바로 이런 행동이 권여선 소설의 인물다운 행동입니다. 한편으로 저는 서사만으로는 간추릴 수 없는 국면들에 감탄하곤 했어요. 「희박한 마음」에서 “겁이 나서 거북인 것인가”라거나 “거북이가 겁우기에서 왔다고 말하는 거냐”(93면) 하는 식의 대화는 의미없는 언어유희 같지만, 디엔의 꿈 이야기와 관련지어 읽으면 결코 의미가 없는 게 아니죠. 디엔의 꿈에서 누군가 “디엔의 이력 중에 부도덕한 점을 발견했다면서” 건넨 “스티치된 천조각”(88면)은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에게 달았던 표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이런 암시들이 데런과 디엔의 관계가 이성 간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넌지시 알립니다. 잠재적인 이미지들, 무의미해 보이는 대화들, 사소한 행적들이 모여서 서사의 큰 흐름으로 이어지는 건데요, 이런 힘이 외적인 폭발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고 생각합니다.

 

양경언 「희박한 마음」의 인물들은 레즈비언 커플로 짐작되지만 언어로 명명되지는 않아요. 「모르는 영역」에서도 처음엔 다영하고 명덕이 부녀관계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데, 저는 혹시 명덕이 젊은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길인가 싶었거든요.(웃음) 자기편견 속에서 인물을 유추하게끔 유도하고, 그럼으로써 독자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장치일 수도 있겠네요. 작가가 『레몬』(창비 2019) ‘작가의 말’에서 “평(平)하지 못한 삶의 두려움을 쓰고 있”(202면)다고 했는데, 그 노력 덕분에 독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인물을 평하게 볼 수 있는 경로가 마련되는 것 같습니다.

 

 

주민현 『킬트, 그리고 퀼트』(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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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 시집 이야기도 나누어보겠습니다. 2017년 활동을 시작한 주민현의 첫 시집이 나왔습니다. 시인이 말을 다룰 때 붙들려 있는 선험적인 지대 같은 게 없다는 인상이라 신선한 만남이 가능한 시집 같습니다. 천진한 시선에서 발원하는 언어와 사유의 역동성이 돋보였는데요, 어떻게 읽으셨나요?

 

백민석 이 시집을 읽는 동안 아, 나도 시 쓰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시인의 존재감이랄지 작가 자신이 느껴지는 어조가 생생히 살아 있었어요. 제가 실은 책을 상당히 느리게 읽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여섯권을 읽는 데도 열흘이 걸렸는데, 읽으면서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던 책이 바로 이 시집입니다. 오죽하면 내가 다시 시를 쓰면 어떨까, 그러기엔 너무 늙지 않았나 싶어서 부러워질 정도였으니까요.

 

양윤의 저도 읽으면서 살아 있는 개별자로서의 여성을 만났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리 몸이 세계를 관통하면서 느끼는 불편함이 미학의 동력이라면, 그런 점에서 여성에게는 여성이 느끼는 개별자로서의 불편함이 미적인 것이겠지요. 이 시집은 일상에서 느끼는 그런 불편함에서 시적 감정을 끌어오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처음에 실린 「네가 신이라면」부터 그런데요, 남성이 보는 세상과 여성이 보는 ‘나’의 이미지들이 극명하게 엇갈리면서 제시되죠. 남성-신이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논다면, 여성-나는 “구멍난 공깃돌에서 흐르는/작은 슬픔을 엿”봅니다. 이런 대립적인 이미지들의 계보가 이 시집을 관통하고 있어요.

 

양경언 언어에 대한 감각이 빼어나다는 점도 말하고 싶습니다. 킬트, 퀼트 하는 어휘의 활용에서 보이듯이 시인이 개별적인 단어들 간의 돌고 도는 움직임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원을 형성함에 있어 굳이 구심점을 만들려 하지는 않거든요. 원은 구심점으로 모이는 게 아니라 퍼져나가는 식으로 움직여요. 「이미 시작된 영화」에서도 리셋을 이야기하거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뒤로 감아도 앞으로 감아도” 하는 식으로 돌고 도는 움직임을 보여주잖아요. 그리고 이 움직임은 어찌 보면 춤추는 구도를 형성하는 것도 같습니다. 「킬트의 시대」에 치마 입은 남자들이 나오는데 이때 “춤을 추는 우리가 남자이거나 여자”일 수도 있어요. 이는 젠더가 수행이고 연기라는 발화로 받아들여지지만, 「복선과 은유」를 보면 반대로 “그러나 인생은 연극 놀이가 아니죠” 하는 구절도 나옵니다. 즉 때로는 요구받는 역할을 해야만 하는 것이 삶이지만, 그러한 연기가 자기를 잡아먹을 만큼은 아니라는 점을 화자 스스로 알고 있는 듯해요. 안무를 짜고 춤을 추듯 그때그때 자기가 필요한 것만을 취하면서 움직여가는 모습입니다.

 

백민석 무엇보다 이 시집의 미덕은 삶의 망설임을 잘 형상화한 데 있어요. 이쪽이냐 저쪽이냐 아니면 또다른 어떤 길이냐 하는 망설임이 잘 드러납니다. 이때 망설임은 갈등과는 좀 달라요. 그러니까 시의 화자는 삶의 선택지가 아직 풍부하게 남은, 어느 쪽으로 갈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삶의 단계에 있는 것 같아요. 삶에서 아직 뭔가 고를 게 많다는 것은 젊은이의 특권이죠. 심지어 「킬트의 시대」 같은 시를 보면 여성과 남성 사이, 성정체성 사이에서도 머뭇거리는데, 많은 시 속에서 시적 화자가 망설여요. 다시 말해 화자는 살면서 마주치는 순간순간마다 망설임을 겪고 있다고도 볼 수 있어요. 나의 길이 무엇인지 확신을 가지고 하나의 길로 죽 걸어가는 사람에 비해, 화자는 두배 세배 세상을 더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이쪽저쪽 둘러보고 경험하고 예민하게 느낀다는 것은 세상을 훨씬 풍부하게 산다는 의미이니까. 물론 젊어도 삶이 고단하고 괴롭기는 마찬가지겠죠. 때문에 「빈집의 미래」처럼 부질없고 낭비 같고 아무것 아닌, 무위의 깨달음에 가닿기도 하지만 저로서는 그 무위 자체도 부러워요. 왜냐하면 제게는 제 삶이 무위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명해서 더이상 이야깃거리도 아니기 때문이죠.

 

양윤의 제 생각에는 둘로 나뉜 것 가운데 하나로 규정되거나 선택받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닐까 싶어요. 「가장 완벽한 핑크색을 찾아서」에는 어떤 것이 ‘옳다’거나 ‘좋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라고 물은 후에 “그냥 아는 거지, 모른다 해도/좋아 실존의 뜻을 몰라도 살아 있는 것처럼”이라고 대답해요. 의미는 나중에 오는 것이고, ‘그냥’이라고 말할 때의 그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자유의 이념이 아닐까 싶어요. 이 시집에는 「우리는, 하지」처럼 성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시들도 꽤 있는데, 이런 시들의 경우에도 대상화되거나 소비되는 여성은 등장하지 않아요. “볼품없는 남자에게 어느 여자가 가슴을 줄까,/하지만 나는 그런 남자만을 사랑했네”(「세계과자 할인점」)라는 구절이 대표적이죠. 에로틱한데, 그리고 남자에게 자신의 몸을 제공한다고 하는데, 그건 그 남자 때문이거나 그의 매력 때문이 아니라는 거죠. 나의 자유의지로,라는 것이죠.

 

양경언 「빵과 장미 1」 「빵과 장미 2」 등의 시에서는 페미니즘적 시각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강한 주장으로 느껴지지는 않고, 자기 이야기를 용감하게 꺼내놓는다는 인상이에요. “우리는 언제라도 거울 속에서/자신을 꼭 닮은 신을 하나씩 만들 수 있다”라는 말로 끝나는 「광장과 생각」도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생각을 정돈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화자가 광장의 특징을, 바로 그 정리되지 않는 혼돈으로 삼으면서 탁 트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디테일하게 눈 맞춤 하는 장면들이 연마다 펼쳐지거든요. “어디로나/연결된다는” 광장의 강점은 실은 그 혼돈 속에서 구체적인 마주침의 순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광장 이후의 시간에 방으로 돌아갔을 때 “언제라도 거울 속에서/자신을 꼭 닮은 신을 하나씩 만들 수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가꾸는 일이 필요하다고 역설해요. 자신을 계속 보살피고 살펴나갈 때 광장의 움직임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백민석 한편 형식적으로는 각 연이 두세행 정도로 짧게 이어지는 모양인데, 망설임의 정서와 사유를 이처럼 간결한 형식으로 표현한 점이 좋았습니다. 그 덕에 시인이 지닌 힘이 풀어지지 않고 응축되어 드러나고요.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이나 정서를 응축해 표현하는 미학적인 재능이 도드라져 보여요. 물론 때론 서양시를 읽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상을 타는 마당에 서양 동양을 따져서 무엇 하겠어요.(웃음)

 

양윤의 「터미널에 대한 생각」에 나오는 터미널은 무수한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장소라는 점에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같은 통속성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한 여자는 목걸이와 귀걸이를 팔”고 “말이 없는 노인은 몇 시간째/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배경을 그리면서 예측할 수 있는 통속성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갑니다. 한편 「사소한 이유」에는 “애 버리고 승진해서 좋기도 하겠다”라는 비아냥과 “다리 좀 붙이고 앉지, 개저씨가”라는 항의가 나와요. 이런 식의 편향성과 비대칭이 우리 삶에 촘촘하죠. 이 시집은 이런 일상적인 기울어짐에서 시적 감정을 끌어내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양경언 확실히 시인이 언어를 활용하는 데 두려움이 없어 보여요. 「사건과 갈등」에서는 “이렇게 오래 사람인 척해도 될까”라고 해요. 사람이 아니라면 무엇이냐 혹은 사람이라면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으로 갈 법도 한데 시인은 그저 “우리는 계속 사람인 척한다./너는 소설을 쓴다.”라고 끝맺거든요. 「빈집의 미래」도 독특한 시인데 귀신이 나오는 상태를 불안정하게만 감각하지 않고 “어느 날 나는 여기 온 이유를 잊었습니다. 내가 훔치려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사람이었을까 경찰관, 아니면 단지 시간이 흐르기를……” 하면서 비어 있는 미래에 대한 시간성을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 삼고 있어요. 불안이 추동되지 않는 상태로 자기성찰을 택한다고 할까요.

 

백민석 저는 책이 지니는 가치를 시간의 가치라고 생각해요. 책을 살 때 우리는 돈이라는 재화를 지불하지만 그 책을 실제로 소비할 때, 그러니까 읽을 때는 시간이라는 재화를 지불하게 되죠. 책의 소비에는 이처럼 독특하게, 두가지 재화가 얽혀 있어요. 이것이 책이라는 상품이 지닌 특수성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종종 책의 가치를 평가할 때 책의 정가를 보고 비싸다 싸다 하지만, 그건 책을 소유할 때의 일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는, 시간이라는 더 중요하고 큰 재화를 지불하게 되요. 이를테면 전 이 여섯권을 꼬박 열흘 읽었는데, 그러면 이 여섯권에 대해 제가 ‘열흘’이라는 시간을 지불한 셈입니다. 책 뒤표지에 적힌 만원, 이만원 하는 정가는 책의 제작비와 이윤을 말하는 것이고요. 책을 읽고 만족하지 못하면, 우리는 돈이 아깝다고 하지 않고 시간이 아깝다고 하잖아요? 저는 가끔 책 한권을 한달씩 읽기도 하는데, 그처럼 한달을 읽더라도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면 그건 현명한 소비를 한 겁니다. 반면, 어떤 책을 읽고 시간 낭비였다는 생각이 들면 현명하지 않은 소비를 한 거고요. 주민현의 시집은 그런 점에서 상당히 괜찮은 상품이었다고 생각해요.

 

 

이정훈 『쏘가리, 호랑이』(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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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 다음으로 이야기 나눠볼 책은 2013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정훈의 첫 시집입니다.

 

백민석 이정훈의 시는 태곳적 과거에까지 이르는 설화적 세계를 다룬 시들과, 자신의 직업세계를 소재로 삼은 시들이 너무 극명하게 나뉘어 있어 읽으면서 약간 어리둥절했어요. 어떤 것이 시인의 실제 삶에 더 가까운 것인지 궁금했고요. 1부에서 3부까지 읽을 때 저는 시의 화자가 인적이 드문 산골에 살며 낚시로 소일을 하는 남성이라고 생각했는데, 4부부터 화물트럭을 운전하는 듯한 화자가 등장해 드라이한 산업사회의 세계를 보여주잖아요? 그래서 시집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누어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양윤의 이 시집을 둘로 나누어 읽을 수 있겠다는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설화적 세계를 상징하는 표상이 ‘호랑이’, 노동으로 대표되는 현실을 상징하는 표상이 ‘쏘가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전반부를 기원 신화 혹은 가계(家系)의 내력으로, 후반부를 육체 혹은 기계로 대표되는 노동의 현재로 요약해도 좋을 듯합니다. 저는 기계와 인간이 유물론적으로 결합한 지점이 인상적이었고요, 그런 점에서 호랑이보다는 쏘가리에 더 눈길이 갔어요.

 

양경언 방금 말씀하신 ‘호랑이’의 세계와 ‘쏘가리’의 세계라는 분류를 따르자면, 저는 이 두 세계가 분리되어 읽히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랄까요, 서로를 지탱하는 방식으로 읽혔어요. 시인은 오래된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묵직한 목소리를 그 뿌리로부터 울려 퍼지게 만들어서 현실의 말뚝이 ‘나’를 움켜잡으려는 순간에도 쉽게 잡히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길러내는 상황을 형성합니다.

 

백민석 전반부를 좀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면 우선 대륙에 대한 낭만적인 향수가 드러납니다. 「청어」에 “죽어서도 그리운 먼 북쪽”이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싶어하는 마음과 비슷하달까요. 분화가 덜 된 세계, 인간과 동물이 나뉘지 않는 설화적 세계를 표현하는 대목이 많습니다. 전반부의 또다른 특징은 부계로 이어지는 부족사회의 연대기를 그린다는 점입니다. 「밤나무집 가계」가 대표적인데 여기에 할애비, 또 할애비, 큰아버지, 아버지, 형이 나와요. 대를 잇는 일은 남성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닌데 여성은 한명도 등장하질 않죠. 시인의 시세계가 부계로 이어진다는 걸 뚜렷이 보여줍니다. 또, 특히 「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런 세계에서 남성들은 비극적이고 숭고한 존재로 그려져요. 반면에 여성들은 희극적이고 세속적인 존재들로 그려지고요.

 

양윤의 백민석 선생님 말씀처럼 부계 역사가 중심이다보니 여성들은 비극성과 대비되는 모습으로, 일종의 희극성을 띤 채 드러납니다. 그마저도 대체로 할머니나 고모처럼 부계에 속한 여성들이죠. 인류학에서 여성은 재화의 일종으로, 씨족 간 교환의 단위로 등장하지요. 인간에게 부여된 성(姓)은 씨족의 소유물임을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부계 여성들은, 나와 같은 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일부입니다. 여성이 타인일 수 있는 것은, 다른 성을 갖고 있을 때인 것이죠. 이 점에서 이 시집의 부계중심적 시선을 아쉽게 여길 독자들도 없지는 않아 보여요.

 

양경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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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 저는 「우화」가, 물론 이 시집에서 대표로 삼을 만큼은 아닙니다만 다소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2010년 겨울, 토끼풀을 뜯어 먹던 북한의 ‘꽃제비’ 여성이 아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라는 각주가 달린 시입니다. 북한 여성의 죽음에서 받은 영향이 “토끼풀을 먹고 푸른 생리를 했어” “나는 날마다 토끼가 되었다” 등의 구절로 표현된 셈인데, 섣부른 공감이나 동일화의 시도로 우려스럽게 읽힙니다. 더구나 이를 통해 결국 도달한 마지막 행이 “마부의 가련한 얼굴도 나는 용서한다”라면 폭넓은 동의를 얻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백민석 전반부의 시들은 어쩌면 시인이 젊어서부터 읽어온 선배 시인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아 쓰였을지 모르겠습니다. 백석, 서정주, 신경림 등의 시에서 얻은 간접경험의 영향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어렸을 때 산천을 뛰어놀았던 체험도 깃들어 있겠지만, 그런 직접경험이 간접적인 독서경험과 뒤섞여서 결국엔 설화적인 시세계를 만들어낸 듯합니다. 그런데 후반부로 넘어가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가 그려지면서 설화가 끼어들 틈이 없어져요. 현대를 살아가는 고단한 삶, 트럭 운전이라는 위험한 일,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양윤의 저 또한 후반부 시의 언어가 구체성을 띠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버런」이 한 노동자의 죽음을 그가 다루던 기계의 용어로 다시 다룰 때, 「3축 내린다」가 기계를 조작하는 노동자의 고투에서 “나는 트레일러”라는 일종의 확장된 육체를 읽어낼 때, 「일죽 휴게소」가 노동의 힘겨움을 동화적인 꿈으로 바꿀 때, 이 시집이 가장 빛난다고 생각합니다.

 

백민석 저는 「어떤 법」이 가장 좋게 다가왔습니다. 짧고 강렬한 시입니다. 이 시에는 일부러 멋을 부려 쓴 단어가 하나도 없어요. 단호한 목소리로,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면 컨테이너 짐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위험 상황을 날마다 겪는 사람한테서나 나올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닌가 생각해요. 삶에 아주 밀착된, 육성이 곧 시가 되는 순간을 봤다고 할까요?

 

양경언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을 다룬 「아이슬란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 대목이 “탕, 탕/하늘을 날개로 치며”인데, 고공농성을 바라보는 시선에 큰 전환이 일어나며 끝난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었어요. 이런 전환의 힘이 어디서 나올까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거슬러 올라가보니 전반부의 시들도 마냥 설화적 세계로만 이해되어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컨대 전반부의 물의 이미지를 보면, 그냥 흘러가버리는 액체성의 무엇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에요. 「푸른 달 아래」나 「콧등바위, 쏘가리와 나와」에는 강에서 작살로 쏘가리를 찌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쏘가리를 잡았다가 놓쳤다가 다시 잡으려 시도하는 자체가 꿈틀거리는 삶에 대한 은유로 느껴져요. 그리고 이때 물은 살쪄 있는 풍경으로 다가오면서, 마치 양수 속에서 호흡법을 배우게끔 이끌어주고 생명을 관장하는 힘처럼도 여겨지죠.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화자의 뿌리에는 사람이 물과 연결되었던 시간과 거기서 살아낸 경험이 있다, 그래서 하늘을 탕, 탕 치는 힘찬 전환을 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짐작됩니다. 그런 면에서 마지막 시 「햇까이」도 주목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이 “나는 트레일러 운전석으로 돌아온다 출렁거리는 해 아래 말 탄 것처럼 소 탄 것처럼 끄덕거리며 언제나 날아가는 우리 집 햇까이”인데, 시인이 서 있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는 날 햇까이라고 불렀다”라는 이야기가 있는 사람으로 서기 위해, 그저 트럭 운전수라는 존재로만 읽히지 않고 오롯이 거기 서 있기 위해 전반부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어쩌면 이 마지막 구절을 위해 한권이 쓰인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주목을 요한다는 생각입니다.

 

양윤의 말씀처럼 저도 노동자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그려낸 시편들에 눈길이 가긴 했지만, 이 시집이 거기에만 편중되어 있지는 않지요. 이 시집이 노동시집인가, 하고 묻는다면 저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오랫동안 노동자 하면 남성, 노동문학 하면 남성의 문학으로 인식되어왔잖아요. 우리가 목격해온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반쪽짜리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런 역사 속에서 수행되지 않은(undone) 영역이 있다는 점을 떠올리게 됩니다. 알려고 애써도 알 수 없는 실천적인 모름이 있는가 하면, 감춰진 채로 남겨둔 영역도 있었던 게 사실이니까요. 우리가 이정훈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남성 노동자로서의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시인들이 생산한 남성 혹은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도 있을 테고, 한번도 표명되지 않았으나 담론의 무의식으로 작용하는 노동의 목소리도 있겠죠. 그러니까 이 문제는 한 시인에게 돌아갈 몫이라기보다는 문학의 장 전체에서 반추해볼 문제겠지요. 노동과 남성을 등치시키는 시선이 가진 정형성만 주의한다면 충분히 의미있는 시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양경언 네, 문학계 전반에 구석구석 요구되는 바를 이 시인에게만 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오히려 시인을 통해서 또다른 세계에 대한 기대를 품게 되는 측면도 있겠습니다. 시인이 지금 자신의 자리에서 바라본 풍경을 보여준 덕분에 그걸 축으로 삼아 다른 풍경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손택수 『붉은빛이 여전합니까』(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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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 마지막으로 이야기해볼 책은 『붉은빛이 여전합니까』입니다. 손택수의 다섯번째 시집이에요.

 

양윤의 손택수의 시는 우리 시의 몇가지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흐(V. Gogh)의 그림을 다시 시로 옮긴 「한 켤레의 구두」가 대표적인데요, 고흐가 구두와 발의 기능적 유사성을 화폭에 옮겼다면, 손택수의 시는 그 유사성의 내력까지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퍽 풍요롭습니다. 여기에는 「살가죽구두」(『목련 전차』, 창비 2006)에서 다루었던 노숙인의 새까만 발과 구두라는 상상이 재도입되어 있기도 하고, 어린 나와 아버지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가족사 시의 하나가 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전에 이미 우리 시의 한 정점에 이르렀기에 예전의 특징들이 여럿 보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들이 이전 시들의 변주로 읽히는 점은 아쉬운 대목입니다.

 

백민석 여섯권 중에 이 시집을 제일 짧은 시간에 읽었어요. 잘 읽힌다는 점이 이 시집의 장점이자 아쉬운 점입니다. 우리가 문학에 기대하는 바가 꼭 빠르게 잘 읽히는 것만은 아니니까요. 손택수의 시는 대체로 생활에서 나온 깨달음을 담고 있어요. 읽는 사람이 그걸 읽으며 함께 사유하고 또 거기에 자신의 깨달음을 보태기도 하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면 좋겠는데, 거기까지 나아가진 못했다는 생각이에요.

 

양경언 그런데 「석류나무와 함께」를 보면 “석류나무를 제가 들여다보았다고 말했지만, 당치 않은 것이, 실은 석류나무가 석류나무를 보고 있는 한 쓸쓸한 사내를 보여준 것이었습니다”라는 대목이 나와요. 또 “가장 먼 곳까지 다녀온 저의 여행기”라고도 하죠. 초반에 배치된 시인 만큼 시집의 전체적인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저는 시인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전에는 무언가를 지켜보려 했다면 이번에는 본인이 대상 쪽으로 다가서고, 동시에 그렇게 움직이는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는 방식이랄까요. 물론 두분의 말씀처럼 이전의 시세계와 유사하거나 연동되는 부분도 많지만, 보려고 하는 눈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저한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양윤의 양경언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매력은 반성적인 시선에서 온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반성(reflection)은 밖으로 향한 시선을 굴절시켜 나를 향하게 하는 것이죠. 이를테면 ‘내가 나무를 본다’가 ‘나무가 나를 본다’로, 다시 ‘나무가 나무를 보는 나를 보여준다’로 두번 굴절되는 형식입니다. 그런데 저는 반성마저도 정형화의 위험을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 시집이 크게 네가지 갈래로 나뉜다고 보는데요, 첫째는 사물이나 풍경을 정관하는 시, 둘째는 비유를 통해서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의 특징들을 읽어내는 시, 셋째는 잠언이나 교훈을 내장한 시,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등장하는 가족사 시가 그것입니다. 마지막 갈래는 시인이 남편이, 아버지가 되면서 조금 달라지기도 했죠. 그런데 이 네가지가 이전 시집에서도 폭넓게 관찰됩니다. 어쩌면 제 시선이 정형화된 것일까봐 걱정도 되지만요.

 

백민석 말씀하셨듯이 전통적인 서정시에 가깝습니다. 그런 전통적인 서정 가운데 「백경」 같은 시는, 저로서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만큼 사색적인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말이란 그저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다에 떨어뜨리는 바위와 같은 것”과 같은 언어에 대한 통찰이나 깊이있는 사유가 드러나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양경언 시집 제목의 바탕이 된 구절은 「붉은빛」에 나오는데, “대구알처럼 붉은빛이,/당신 볼에도 여전합니까”라는 문장입니다. 이 시는 뽈찜을 먹다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가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으로서 붉은빛을 불러들이는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 배치된 시는 「검은 혀」거든요. “재와 연기 사이에서 먼지가 되어버린 어떤 삶을” 이야기해요. 저는 시인이 생생하게 살아 있음에 집중하는 한편 나무나 불 같은 이미지를 활용해 재가 되는 삶을 말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재가 되는 속성으로서의 나무나 사랑, 그리고 거기로 가는 도중에서의 붉은빛을 이미지화하고 있달까요.

 

양윤의 이 시인의 놀라운 언어감각은 여러차례 언급된 바 있지요. “섬은 묵음이다/침묵이 있어야 섬이 된다”로 시작하는 「아픈 섬」도 좋은 예인데요, 섬은 영어로 아일랜드(island)고 이때 s는 묵음이잖아요. 섬이 혼자 있어서 외롭고 고요하다,라고 적었다면 상투적인 진술이 되었을 텐데, 이렇게 영어를 넣어서 읽으면 또다른 상상이 펼쳐져요. 제가 독자로서 수긍하기 어려운 지점은 이런 발견보다는 잠언으로 말을 건넬 때인데요, 잠언이란 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게 있을 때 나오는 말이기 쉽잖아요. 예컨대 「터치」에서는 “건반은 누르는 것이 아니다”로 시작해 “건반 위의 공기를 들어올리듯이/얼른,/뗄 줄 아는 것이다”라고 친절하게 일러주지요. 「등」에서도 등〔背〕과 등대를 연관 짓는 말놀이를 소개한 후에 잠언으로 가거든요.

 

양경언 그러나 「등」에는 “갈 수 없는 풍경이 내 몸이라니”라는 구절도 나오죠. 저는 이런 대목에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시인이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거예요. 이제 내가 그저 관조만 할 수 없다, 바라만 보아서는 다 알 수 없다는 어떤 한계를 인정하며 겸허를 전하는 상태라고도 보여요.

 

양윤의 말씀을 듣고 보니 「먼 곳이 있는 사람」이라는 시가 떠오르는데요, “나는 가야겠네 걷는 사람으로/먼 곳을 먼 곳으로 있게 하는 사람에게로” 같은 구절이 시인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명확한 목적이 있어서 그곳에 가까워지는 삶이 아니라, 먼 곳을 계속 멀리에 남겨두는 삶이고 걸어가야 하는 삶이죠. 잠언이라는 목적지는 그 걸어감을 위한 지표 같은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양경언 그렇게 생각하면 붉은빛이 여전하냐는 물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걷는 여정에 있는 사람에게 그 걸음이 여전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묻는 것인지, 아니면 여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심정으로 묻는 것인지 다양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질문 같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는데, 어느덧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접촉을 주의해야 하는 때이니만큼 사회적인 연결의 형태와 필요에 대해 절박하게 성찰하는 시기잖아요. 오늘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학작품을 읽고 다양한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 간접적으로나마 요즘 필요한 ‘연결’의 태도란 무엇일지를 고민하게 한다는 생각을 새삼 했어요. 기꺼이 생각을 나누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백민석 책을 읽고 이렇게 여러 사람과 독해를 하는 자리는 오랜만이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역시 평론가와 소설가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자리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양윤의 두 계절 동안 좋아하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특별히 이번 계절에는 백민석 작가님을 뵈어서, 오랜 팬심을 충족시킬 수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2020.4.27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