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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코로나19가 던진 과제들
코로나19 이후의 학교생태계는 어디로 가야 하나
이하나
집필노동자,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 대표. 저서 『포기하지 않아, 지구』 『죽음이 삶에게 안부를 묻다』(공저) 『해서열전』(공저) 등이 있음.
allmytown@gmail.com
학교를 둘러싼 생태계
우리 집 바로 옆에는 중학교가 있다. 여기는 1기 신도시다.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른다. 두개의 중학교가 붙어 있는 곳에는 아침마다 줄이 길다. 문구점도 분식집도 학교 안 매점도 모두 사라진 도시에서, 편의점에는 아이들이 필요한 게 다 있다. 초등학교는 대부분 걸어서 다니지만 중학교부터는 버스를 타거나 노선이 적을 경우 부모들이 학원 셔틀버스를 임차해 아이들을 태워 보낸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서면 자원봉사이거나 임시 계약직인 사람들이 통학로를 지켜준다. 녹색어머니, 학교에 고용된 지킴이, 학교 앞 태권도장의 사범들이다.
아이들이 수업을 시작하면 급식을 위한 노동이 시작된다. 식자재가 도착하고 급식노동자들이 밥을 준비한다. 학교에 필요한 물품이 들어오고 고장 난 기물을 고치는 기사들이 드나든다. 필수적인 응급처치, 소방훈련, 성평등교육, 인성교육, 민주시민교육, 예술교육을 위해 외부강사들이 학교에 온다. 방과후교사와 돌봄교실교사도 있다. 이들은 대다수가 비정규직이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떠나면 교실을 정리하고 공문도 처리하고 내일의 수업도 준비하고 교육청 연수도 간다. 초등학교의 일과는 4시 반에 끝나고 중고등학교는 그보다 조금 더 늦게 끝난다. 아이들은 학교를 떠나 학원으로 간다. 학원에 안 가는 아이들은 극소수인데, 개인의 경제적 형편과 돌봄 상태에 따라 하교 후 시간의 질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공교육으로 일컬어지는 학교에는 지난 20년간 공무원 외 비정규노동자의 품이 점점 더 많이 들어갔다. 지역사회는 학교를 떠받치고 있다. 어떤 집단은 학교를 이용하고자 하고, 어떤 집단은 소리 없이 노동만을 제공한다. 각 집단이 학교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학교가 이용만 당할 수도 있지만, 학교의 관점에 따라 이 관계가 쉽게 끊어질 수도 있다. 결정권은 학교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하루와 학교를 둘러싼 노동은 누군가의 생계가 된다. 이 노동이 2020년 봄에 끊겼다.
정말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감염병의 유행으로 수개월간 공공기관이 폐쇄되고 상거래의 형태가 바뀌고 모임이 줄어들었다. 그간 사람은 마치 생물 우위에 있는 존재인 것처럼 굴어왔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을 최소화하자는 방역지침은 한 사람이 존엄한 인격체일 뿐 아니라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는 숙주이며, 그 존재 자체가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생물이라는 것을 각인시켰다. 한 사람이 말을 할 때 뿜어대는 침방울이 얼마나 많은지가 친절한 그래픽과 함께 알려졌다. 우리가 신체의 다양한 증상을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운 생물이라는 점이 더욱 선명해졌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낯설고 어색한 표현을 쓰면서, 어쨌거나 다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두고 신체접촉을 최소화하자는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다. 공간의 문제를 먼저 살펴본다면 그동안 우리는 최소 면적에 최대 용적률을 지향하며 ‘더 많이, 더 크게’를 목표로 삼아왔다. 만원버스,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은 도시민이 겪어야 하는 일상이었다. 대중교통이나 붐비는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는 ‘밀지 마세요’라는 말을 해야 할 정도로 개인의 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여유로운 문화생활을 위한 곳이어야 할 박물관과 전시장은 제한 없이 입장객을 받아서 방학이 되면 어떤 곳은 관람이 불가능할 정도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정부기관도 행사를 벌일 때마다 대규모 집체교육을 목표로 했다. 공기관은 양적 평가, 즉 전체 예산을 참가자 수로 나눠 1인당 얼마짜리 교육과 행사를 했느냐를 지표로 삼아 담당자의 업무능력을 평가해왔다. 수도권에 집중된 인구밀도를 탓하면서도 수도권의 방식을 그대로 전국에 적용했다. 주어진 공간이 널찍해도 다닥다닥 붙어 앉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기준은 정부의 지침을 따르는 학교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학교는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교실의 대형 그대로 백여년을 버텼다. 지난 십여년, 혁신교육으로 모둠활동 중심의 자리 배치로 바뀌었지만, 시험을 볼 때는 앞뒤와 상하관계가 분명히 구분되는 대형으로 돌변한다. 70명씩 빽빽하게 앉은 교실이 익숙한 기성세대가 보기엔 한 반에 30명이라는 숫자는 아주 여유로워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의 교실은 예전보다 더 복잡하다.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에 사용하는 비품이 교실 안에 가득하다. 교과서는 예전에 비해 크고 무거워서 아이들이 매일같이 가방에 넣고 다니기 어렵다. 활동 위주의 수업이 많아져 교사들은 수시로 책상 배열을 바꾸기도 한다. 게다가 학교도 양극화를 달리고 있다. 어떤 학교는 한 교실에 30명 넘게 빼곡하고 어떤 학교는 절반이 빈 교실이다. 지역사회와 정치인들은 이 빈 교실을 어떻게 차지할 수 있을지 고심한다.
학생 수가 줄어들었다는 이유로 교육당국은 교사의 숫자도 줄여나갔다. 임용을 기다리는 청년 예비교사들은 매년 적체되어 기간제와 계약직으로 내몰렸다. 몇년 전부터 수업시수가 적은 중고등학교의 일부 과목 전담교사는 1개 학교에 적을 두고 시수를 맞추기 위해 두세개 학교에 파견 형태로 수업을 간다. 경기도의 경우 학교 복지사와 상담사도 학교 두곳을 번갈아가며 출근한다. 이처럼 교육당국은 대상인원이 줄어들면 할당된 일을 늘렸다.
학교는 혁신교육을 하겠다면서도 아이들을 평가할 기준을 마련하느라 바빴다.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를 만들고자 해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대학입시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학교는 교육기관이기보다 평가기관의 정체성을 더 드러낸다. 학교를 둘러싼 모든 공익활동은 입시 앞에서 한방에 무너진다. 이것이 코로나 이전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코로나 이후, ‘블렌디드 러닝’이라는 낯선 이름
코로나19의 수도권 감염 확산으로 경기도는 각 학교의 3분의 1만 등교하도록 했다. 온라인 수업과 등교수업을 병행한다. 교육부와 경기도교육청에서는 ‘블렌디드 러닝’(blended learning, 온라인 교육과 오프라인 교육을 다양한 방식으로 접목하는 방법론)이라는, 외국 교육이론에서 사용하는 명사를 그대로 가져와 가정통신문에 붙였다.
등교수업의 경우 개인에게 보장된 공간은 넓어졌으나 여유시간은 줄어들었다. 체육복 갈아입을 시간이 주어지지 않거나 화장실 갈 시간도 빠듯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접촉이 일어난다는 것을 잘 아는 교사들은 아이들이 책상을 벗어나 돌아다니는 시간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초등 저학년은 급식을 먹고 갈지 집에 바로 갈지 고를 수 있고, 고학년부터는 학년별로 따로 밥을 먹게 되어 공간은 늘어났지만 자유시간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을 때만 허용된다. 등교개학을 하되 아이들을 분리해 거리두기를 유지한다는 방침은 이전의 학교가 감염병에 속수무책이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며칠 전 한 학급의 아이들이 15명씩 나뉘어 격일제로 등교하는 초등학교에 수업을 다녀왔다. 한 반에 15명만 앉아 있으니 썰렁하고 모둠활동을 못하게 되었지만, 아이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대답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한 교실에서 질문이나 자기 의견을 많이 말하는 아이들은 대체로 20~30퍼센트 정도다. 한 반이 30명이면 예닐곱명의 아이들이 손을 들고 발표하려고 하는데, 시간상 절반은 묵살되거나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교사나 외부강사도 “시간이 없으니 일단 이걸 하고 이따가 얘기하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5명이 앉아 있으니 서너명의 아이가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을 다 듣고 대답해줘도 괜찮았다.
15명 아이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내가 정말 학교에서도 마스크를 안 벗느냐고 물었더니 “그러면 선생님은 마스크를 벗을 때도 있어요?”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교사도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있다. 아이들은 낯선 사람인 나를 보자 온라인 수업이 재미없고 힘들고 과제가 많고 학교가 답답하고 친구들도 없어서 신나지 않고 등등 그동안 한번도 말해보지 못한 것처럼 불만을 쏟아냈다.
나와 한집에 사는 중학생은 순차적 등교가 시작된 지 몇주가 지나자 “학교에 다녀야 하는 합당한 이유를 말해보라”고 나를 다그쳤다. 이 학생은 밤 12시가 넘으면 교사들이 당일 과제를 업로드한다는 걸 파악한 다음부터 새벽 2시까지 과제를 마치고 그날 온라인 수업 중에는 게임을 했다. 등교수업에서는 내내 수행평가만 하고 돌아와 오후가 되면 학원에 갔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학원에서 학교 시험을 준비했다.
아이들의 사정은 교사들도 잘 알고 있다. 연초에 약속되었던 중고등학교 특강 수업이 있었다. 교사들은 나 같은 외부강사들을 초빙해놓고 수업 시간을 잡지 못해 답답해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앉아 있는 것만 해도 힘들어하는데, 나오는 날은 수행평가만 하다 가니 교과 외 수업을 하자고 말하기도 어렵다”라고 했다.
3월 개학이 연기에 연기를 거듭한 끝에 온라인 개학이 결정되자, 교사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2020년 봄의 학교는 온라인 수업을 할 수 있는 그 어떤 여건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경기도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초등학교 교실엔 모두 티브이 화면과 연결된 컴퓨터가 있지만, 구입한 지 십년 넘은 것들이 수두룩하다. 필자의 경험으로도 어떤 컴퓨터는 USB 인식이 되지 않아 준비해 간 강의교안을 열지 못해 시간을 허비한 일도 있다. 공기관이기 때문에 최저가나 중소기업 제품만을 사야 하는 경우도 있다. 경기도는 모든 프로그램이 한글과컴퓨터 기반으로 움직여서 외부강사가 마이크로소프트의 파워포인트를 사용해서 만들어 간 강의자료는 잘 작동하지 않을 때도 있다. 구글은 접속이 안 되고 네이버 밴드, 카카오톡, 다음이나 네이버도 막아놓은 곳이 많다. 와이파이는 교무실에만 한정되어 있거나 비싼 기자재를 들여놓은 스마트 교실에서만 쓸 수 있다. 공공기관의 이메일은 모바일 접속이 불가능하다. 교사들은 메일을 잘 사용하지 않고 통합전산망의 메신저로 업무를 처리한다. 불과 2019년까지만 해도 일부 교육청에서는 수업 시간에 유튜브를 사용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도 했다.
형편이 이렇다보니 온라인 개학 추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학교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교육당국은 온라인 개학을 위해 포털사이트와 카카오톡, 밴드를 풀었고, 더러는 구글도 접속이 가능해졌다. 한 학기 동안 불안정한 서버에서 과제를 내고 제출하던 온라인 수업은 이제 2학기부터 쌍방향 수업으로 전환될 준비를 갖췄다.
사실 학교보다 더 빨리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한 곳은 도시에 있는 대형 학원이었다. 아이들이 수업에 나오지 않으면 매월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고, 강사들의 생계도 위험해지는 급박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대형 프랜차이즈 학원의 강사들은 구글미트와 줌, 카카오톡 라이브 채팅까지 총동원해 학교보다 훨씬 앞서 온라인 수업을 진행했다. 이런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은 온라인 도구에 대해 환경도 월등히 좋고 적응도 빨랐다. 마을 골목에 있는 작은 학원들은 단순히 공부만 시키는 기관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마을돌봄의 역할을 대체해온지라, 학부모들은 학교도 가지 않는 마당에 아이들을 계속 돌봐주길 바랐다. 학원들은 난색을 보이면서도 나름의 방법대로 꾸려나갔다. 학원이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일부는 비난이지만 일부는 고마움이다. ‘학원에서 도와주기만 한다면’ 아이를 맡기고 일터로 나가야 하는 양육자가 수두룩하다.
온라인 개학을 위해서는 모든 아이가 각자의 기기를 가져야 한다. 도구 수급 문제는 학교와 교육당국이 기기를 빌려주고 데이터까지 제공해주면서 어느정도 무마가 되었다. 그러나 혼자 접속하고 읽고 링크를 타고 들어가 댓글을 남기고 인증샷을 보내는 것이 어려운 학생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교사들이 일선에서 겪는 고충도 크다. 등교개학이 시작된 다음 교사들은 온라인 수업안과 등교 수업안을 동시에 만들었다. 연초에 만들어놓은 교육안은 모두 뒤집어엎었다. 학교의 교육안은 도입, 전개, 결론으로 나누어 오분 십분 단위로 계획하는데 이것을 모두 초기화했다. 온라인 수업 첫날에는 곳곳에서 서버가 다운되었다. 순조롭게 첫날 온라인 수업을 진행했다는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교사들은 아침 등교 전에 아이들의 자가진단 기록을 체크하고 등교정지 여부를 결정한다. 온라인 수업일 아침에 출석체크를 안 하고 늦잠을 자는 아이들에겐 일일이 전화를 걸어 깨운다. 교사들은 교안을 짜는 것 외에 수많은 서류를 처리해야 했다. 교육부는 코로나 이후 한달을 ‘공문 없는 달’로 만들어 교사들의 행정업무를 줄여주겠다고 했다. 교육당국이 “우리 교사들은 전세계에서 최고로 유능한 사람이니 온라인 병행수업도 잘해낼 것”이라고 하거나 “학교가 방역의 최전선”이라고 하거나 반대로 “일 안 해도 월급 받는 사람들”이라고 할 때마다 교사들은 분노했다. 일각에서는 교사들이 엄살이 심하다는 비난도 했다. 교사들은 학창 시절 손꼽히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전문적인 고등교육을 거쳐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학교의 교사들은 자기가 배운 것과 무관한 다양한 잡무를 처리해야 한다. 학교는 교육부와 광역자치단체의 교육청, 그 하부조직인 기초단체의 교육지원청과 등으로 이루어진 상하구조의 맨 아래에 위치한다. 진보교육감들이 광역교육청의 수장을 맡으면서 기초단체의 교육청은 ‘지원’조직이 되어야 한다며 이름을 바꿨지만 그럼에도 교육지원청과 학교가 수평적 관계를 유지한다고 자신할 수 없다. 학교에서 문제가 일어나면 학부모들은 교사를 대면하지 않고 교장이나 관할 교육지원청에 민원을 넣는다. 더 빠른 해결을 원하는 학부모는 광역교육청에 연락한다. 광역자치단체의 의회로 쫓아가는 경우도 봤다. 일반 시민도 학교는 상하관계가 명확한 조직이라 기관장이나 상위기관이 일개 학교나 그에 소속된 교사를 처벌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방역과 안전 우선의 결과
학교가 중단되자 우리 사회가 얼마나 학교에 의존하고 있는지 드러났다. 가정에서는 아이들을 돌봄교실에 보내지 못하고 그렇다고 마냥 데리고 있을 수도 없어 육아전쟁이 벌어졌다. 온라인 학습을 혼자 할 수 없는 어린 아이들을 두고 출근해야 하는 집은 낯선 사람을 들이기 어려워 온 가족을 총동원했다. 늦잠 자는 중고등학생을 둔 학부모들은 출근길에 계속 전화를 걸어 아이를 깨운다.
학교도 그렇지만 도서관과 복지관은 시민의 생활에서 허파와 같은 역할을 한다. 특히 장애인과 노약자처럼 사회접촉면이 좁은 사람들에게 공공복지시설은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국내 감염자 숫자가 치솟으며 학교를 포함한 공공기관이 먼저 문을 닫아버렸다. 코로나로 인해 취약계층은 사회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고립되었다. 개인의 고립은 공동체의 안녕을 해치게 된다. 개발과 성장을 중시하는 자들에게는 공동체의 안정이 깨져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제시하면 된다. 가진 자들에게 공공기관은 서류를 떼러 가거나 자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일 뿐이다. 공공기관 내에서 각종 위원회에 들어가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은 개인공간을 보장받으며 주차증도 무료로 받는다. 하지만 발언권이 없는 시민들은 공공기관의 이용자에 불과하다. 공공기관의 존폐 여부에 대한 의견을 낼 수 없는 시민들이 정작 기관이 문을 닫으면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받는다. 방역이 최우선이라는 국가방침에 따라 공공기관에 돌봄을 의탁했던 개인과, 공공기관 일자리로 생계를 이어온 이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야 했다.
공공기관의 돌봄에 의탁했던 이들은 주로 취약계층이다. 특히 학교를 비롯한 공공기관에서 돌봄과 성장의 기회를 받았던 장애 학생들은 완전히 방치되다시피 했다. 장애 학생을 둔 가족은 생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학교도 복지관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 사는 장애 학생이 활동보조를 받는 일은 불가능하다. 장애 학생들은 기관에서 치료와 재활, 교육을 받는다. 이들의 일상은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하기에 장기간 생활 훈련이 중단되면 그동안 배운 게 쉽게 무너진다. 게다가 반복되는 일상에서 안정을 찾는 자폐 학생의 경우 어느날 갑자기 일상이 뒤집히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감염병의 확산은 예측하기 어렵긴 하지만 풍부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국가가 수개월의 장기전 속에서도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동안 장애 학생들의 가족은 기관이 이번 달에 열려나 다음 달에 열려나, 한숨으로 시간을 보냈다. 활동보조 서비스의 주체인 국가는 비상시 장애 학생의 온라인 수업을 도울 수 있는 긴급 서비스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행정은 장애 정도의 점수에 따라 서비스를 제공하므로 복잡한 절차를 처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장애 학생뿐 아니라 성인 장애인, 노인들도 갈 곳이 없어졌다.
대표적 공공기관인 학교는 언제나 ‘안전 최우선’에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러면서 지역에 주차장이 필요하면 학교 지하를 뚫어버린다. 학교로 향하는 통학로는 한쪽 편에만 인도가 있는 경우도 있다. ‘안전 최우선’이라면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고 방해 요소를 제거해야 함에도, 학교를 비롯한 공공기관은 문을 닫는 것으로 안전을 확보하려 한다. 코로나 확산으로 공공기관이 우선적으로 문을 닫아버린 것은 공공기관이 생각하는 안전의 방법이 그뿐이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은 의지만 있다면 다른 조직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마스크 생산회사에 협조를 구해 시중가보다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고, 자원봉사 조직과 사회단체 회원들을 동원해 필요한 곳에 사람을 배치할 수 있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예산도 우선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이렇듯 많은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공공기관이 감염병 확산 국면에서 방역 방법으로 택한 것은 오직 폐쇄였다. 문을 닫아버리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을 수 있다. 공공기관이 사회 최전선에서 돌봄이 필요한 모두의 방역 책임을 지고 모범이 되어야 하지만, 결정권자들은 문을 닫는 것으로 안전하다고 말했다. 무책임하다.
또한 공공기관의 운영으로 먹고살았던 이들은 생계가 끊겼다. 학교의 경우 대표적인 관련 직군이 방과후교사와 급식노동자다. 급식은 순차적 개학을 하며 어느정도 해소되었지만, 학교가 열려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과후교사와 외부 특별강사들은 등교가 무한정 연기되며 아직도 대책이 없다. 방과후교사 노조가 수차례 기자회견과 인터뷰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자 방과후교사나 학교 전담 강사들을 방역지원 인력으로 단기 채용했으나 이것은 원래 그들의 일은 아니다. 사실 방과후교사들의 정규직 채용 요구는 몇년 전부터 제기되었다. 2019년 노조도 만들었다. 방과후교사 노조는 지금도 각 교육청을 돌며 피켓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외부강사의 교과시간 진입과 돌봄교실은 7월부터 각 학교의 재량에 따라 재개되었지만 방과후수업은 아직까지도 예정된 일정이 없다. 방과후교실은 한 교실당 15명 이내로 수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서로 거리를 둘 수 있지만, 수업을 재개한다는 소식이 없는 것이다. 학원도 모두 정상수업을 하는 마당에 이것만 재개하지 않는 것은 교육청의 무책임이라는 게 노조의 입장이다. 이쯤 되면 교육당국이 말하는 안전과 방역에 기준이 없다는 게 분명하다.
마을교육공동체는 무엇을 할 수 있나
혁신교육이 시작된 이후 교육당국은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지역과 함께 아이들을 길러나가겠다고 선포했다. 당국은 아이를 ‘키운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학교 교육은 돌봄의 영역이 아니라고 선을 그으며 지역사회와 연계하는 마을교육공동체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마을의 자원을 학교로 흡수하겠다는 것인지, 학교가 마을로 나아가겠다는 것인지도 모호하다. 학교와 지역이 말하는 교육공동체란 각자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테니 협조해달라는 말로 들릴 때가 많다. 학교는 자신들이 필요할 때 지역사회에 무상노동을 요청하고, 마을은 정책을 쉽게 펼치고 싶을 때 학교를 발판 삼으려 한다. 혹자는 학교는 평가받기 위해 가는 곳이고, 학원은 그 평가를 준비하기 위해 가는 곳이라 한다. 그렇다면 학교는 대체 뭘 하는 곳인가. 마을과 함께하는 교육은 평가의 비중이 낮은 초등학교에서만 실천하고, 중학교부터는 평가에 집중한다는 말인가?
사회 구성원 중 대부분이 학교를 다녀봤고, 가족을 학교에 보냈거나 보내고 있으며, 학교가 문을 닫았을 때 생활의 지장이 발생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학교를 향해 의견을 낼 수 없다. 학교는 교육 전문가 집단이라는 관념이 성채를 이루어 일종의 경계를 치고 있다. 병원이 그렇듯 비전문가가 의견을 제시하면 안 되는 성역처럼 폐쇄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병원도 최근엔 건강할 권리가 강조되며 상식적 시민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학교 또한 상식을 가진 시민 누구라도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위기를 좀더 쉽게 타개할 수 있다.
학교에서는 수십명의 교사와 그에 연관된 사람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협력은 하되 소통 없이 일한다. 아이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우리 학교의 주인은 누구인가요?’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바로 우리!’라고 대답하지만, 실제 학교의 주인은 교사들이다. 학교의 모든 일은 교사들이 논의하고 결정하고 수행하며, 학생들과 학부모에게 통보한다. 혁신교육 이후 학교는 학생, 교사, 학부모 삼위가 동등한 교육공동체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세 계층은 모두 자신들이 약자라고 말하는 동시에 상대방이 더 강자라고 주장한다. 물론 결정권은 대체로 교사들이 갖는다. 관리자라 부르는 교장과 부장급 교사들의 의지에 따라 학교 문화는 놀랍게 변화한다. 학교는 가장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모순덩어리다. 학교를 둘러싼 구성원들은 각계각층에 연결되어 있고, 개인의 이권과 욕망이 학교에서 충돌한다. 결정권을 쥔 학교는 혼자 고민한다. 상급기관은 언제나 학교를 다그친다. 학교는 언제나 바쁜 사람들이 빠르게 결정하고, 학생을 포함한 모두가 숙의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
2013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학부모회가 정식 기구로 인정받았다. 이후 여러 지자체별로 학교운영위원회 외의 학부모회를 제도화했지만 사실상 학부모회가 독립기구로 인정받으려면 자치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학부모회를 조직하는 주체가 학교다보니 학부모회는 학교운영위원회의 하부조직처럼 여겨지거나 학부모 동아리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2006년 민주노동당 최순영 국회의원은 교내 자치기구를 만들고 이들 기구가 법적 권한을 갖는 학교자치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학부모회와 학생자치회 외에 교사 기구나 교사 외 교직원, 교사 외 비정규직들이 의사를 표현할 기구는 전혀 없다.
학교를 둘러싼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가장 잘 보여준 사례가 코로나 이후 이루어진 ‘급식꾸러미’ 배송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자, 급식용 식자재를 공급하던 농부들은 판로가 막혔다. 지자체와 교육청이 뜻을 모아 급식비 예산을 활용해 각 학생들의 가정에 급식꾸러미를 보내기로 했다. 수개월간 급식이 제공되지 않았으니 식재료로 보내자는 결정은 지자체와 관할 교육지원청과 광역교육청이 내렸다. 학교는 학부모들에게 설문조사지를 보내 의견을 물었다. 이것이 지금 학교현장에서 말하는 ‘민주적 절차’다. 급식에 얽힌 이해관계자는 예산의 주 출처인 지자체와 학부모만이 아니다. 식재료의 생산자와 공급자, 급식노동자, 각 학교, 교육지원청과 교육청이 있고, 무엇보다 급식을 먹는 아이들이 있다. 급식꾸러미에 관해서 아무도 아이들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아이들을 스스로 밥을 해 먹을 수 없는 존재로 확정하고 학부모가 밥을 해줄 사람이라 예단했다. 각 지방정부는 급식꾸러미 사업을 큰 성과로 포장하고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그러나 경기도 일부 지역에서는 보관과 배송이 용이한 발효식품이나 쌀 같은 물품들로 꾸러미가 채워져 실제로 식자재 공급자들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됐다. 서울의 학부모들도 생우엉과 말린 시래기를 받고 당황했지만, 국가로부터 처음 먹거리를 받아본 만큼 이게 어디냐며 비합리적 절차를 이해하려 했다. 수십만 학부모가 식재료 꾸러미 외에 남은 금액을 사용하기 위해 생전 처음 농협몰에 가입했다. 모두의 취향을 맞출 수는 없으나 적어도 당사자들이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는 마련되었어야 한다. 이번 꾸러미 배송은 준다니 받는 것이고, 시혜성 복지를 겨우 실천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모두가 겪어보지 못한 위기상황에서 의견을 모으고 숙의를 거쳐 각자의 형편에 맞춘 더 나은 방법은 찾아볼 시도도 하지 못했다. 학교는 개인 간의 거리가 가까워 방역에 취약했고, 어떤 사안에서도 그간 교육당국이 주장해온 ‘마을교육공동체’가 논의에 참여하지 못했다. 십여년간 교육당국이 외쳐온 ‘마을교육공동체’는 비전문가라는 이유로 학교 뒤로 밀려났다. 등교개학 여부가 발표되기를 기다리며 모두 교육부장관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7월 7일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장인 세종시 최교진 교육감은 EBS 뉴스 인터뷰를 통해 ‘가장 민주적인 학교가 위기에도 강하다’라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그는 ‘각 학교의 다양한 상황을 중앙집중적으로 총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학교 공동체의 민주적 소통과 자율적 결정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학교 공동체는 과연 누구를 말하는 걸까?
학교에 왜 가니?
민주적 분위기와 개인취향을 중시하는 세대가 낳아 기른 지금의 아이들은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입학하며 ‘학교를 왜 매일 가야 하는지’ 물었다. 가정도 학교도 이에 대해 명확히 대답해준 적 없다. 이제 코로나가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학교는 왜 가야 하는가.
2018년 서울의 모 초등학교에서 만난 학생자치회 간부 아이들에게 학교가 어떻게 변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없어졌으면 좋겠다’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래도 꼭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아 다시 물었을 때 아이들이 원한 것은 여유 있는 점심시간, 매일 한시간 이상의 체육시간, 20분 넘는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가 만나본 모든 아이들은 학교에서 가장 즐거운 것으로 급식과 친구를 꼽았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소속감을 통해 안정을 느끼고, 집단지성을 발휘해 연대했을 때 자기가 똑똑해진다고 믿는다. 학교의 학습방법은 예전과 달라졌다. 교사들은 활동과 토의를 통해 지식을 전달하는 교수법에 노련해졌고 아이들은 활동과 발표를 통해 많은 것을 익혔다. 단지 배우는 방식과 평가하는 방식이 일치하지 않을 뿐이다. 아이들은 이 모순의 간극을 사교육에서 메운다.
학교에서 아무리 지식 습득과 평가가 우선되어봤자 사교육기관의 효율성을 따라갈 수 없다. 학교의 목적이 사실상 학업평가로 보일지라도 학교가 대놓고 그에 몰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학입시와 온갖 국가 자격증 시험이 사교육에 의존되어왔음에도 공교육은 그간 자본 중심적이라는 이유로 사교육을 은근히 천대했다. 대한민국에서 공립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양육자가 완전히 사교육 없이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초등학교 앞의 태권도장이 없으면 학교 앞 질서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아이가 집에 있기 때문에 출근할 수 없다는 핑계가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교육은 돌봄의 영역까지 책임져왔다.
그렇다면 공교육은 돌봄을 외면해왔는가? 그렇지는 않다.
몇년 전 만난 경기도의 한 교사는 아침부터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아이들이 그 고통을 짊어지고 학교에 모인다고 했다. 학교가 아이들의 스트레스를 받아내다 집으로 돌려보내면 집에서 다시 스트레스를 받아 다음 날 또 부서진 마음을 안고 학교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교육환경이 좋다고 위장전입이 넘쳐나는 학교에서는 모둠활동을 할 때마다 경쟁이 과열되어 몇명은 한시간 내내 제 주장을 꺾지 못해 울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초·중·고등학교에는 10퍼센트 넘는 인원이 정서적 불안으로 학교생활을 잘하지 못한다. 이 몫은 열정적인 교사의 책임이 된다. 아이들에겐 학교 안에서 의지할 어른이 더 많이 필요하다.
정리하면, 이 사회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온 사회가 총동원되어왔다. 아침에는 공교육에서, 오후에는 사교육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가정에서, 주말에는 지역에서. 그러나 시간에 내쫓겨 어디론가 맡겨지고 떠넘겨지면서 배우고 익히고 갈고닦이다보니, 한국 아이들은 OECD 회원국 중 행복지수가 가장 낮다.
코로나 이후 학교 공간이 비좁아 감염의 우려가 있기에 학교별 배정인원을 조정하고 모두가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학급 내 인원을 북유럽 수준으로 줄여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았다. 나도 이 생각에 동의해 같이 사는 중학생에게 물었다. 이 학생은 “그렇게 되면 힘이 약하고 관계 맺기에 어려워하는 아이들은 학교생활이 더 곤란해진다”라고 대답했다. 나 역시 당사자의 의견을 묻지 않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교사의 돌봄보다 함께 자랄 수 있는 친구가 더 중요하다. 소수의 인원은 관계를 협소하게 만들 수 있다. 학교에서 어울릴 아이들이 더 많길 바라는 건 그만큼 학교 안에 ‘숨을 곳’이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알러지와 비염을 앓는 도시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상당히 많다. 2018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발표에 따르면 알러지성 비염의 기준연령별 질환율은 10대 미만 청소년이 265만 8641명으로 전체 청구인원 중 37. 8퍼센트에 이른다고 한다. 12월이 되면 한 반에도 여러명이 감기와 독감으로 결석한다. 환경오염과 기후변화로 청소년과 어린이들의 건강상태는 나빠진다. 코로나가 없어도 겨울부터 봄까지 보건실은 붐빈다. 초등학교는 겨우내 바이러스에 시달린다. 수백명의 신체적 건강을 챙기는 보건교사와 정서적 건강을 챙기는 상담사,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지역사회와 연결할 사회복지사가 학교에 상주해야 한다. 아프고 뒤처지는 아이를 돌볼 수 있는 교사와 교육과정에 전념할 수 있는 교사도 필요하다. 방과후교사들처럼 아이들의 교과 외 빈 곳을 메우고 돌보고 지키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필요하다.
올 7월 17일, 교육부는 그린스마트미래학교 사업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학교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방법 중 하나로 지역사회와 학교 공간을 공유하고, 민주적 의사결정이 가능하도록 공간을 재설계하겠다는 계획이 포함되었다. 지역의 한 시민단체가 운영하는 대안학교에는 교실 하나를 활용해 벽에다 보호쿠션을 대어 뛰어놀 수 있게 만든 공간이 있었다. 별다른 기구는 없었다. 그 교실을 본 교사 한명이 빈 교실에 이런 공간을 만들면 저학년 아이들이 신나게 놀 수 있다고 말한 적 있다. 그는 대단한 시설이 필요한 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학교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던 아이들의 말을 다시 생각한다. 그래도 아이들이 아침마다 일어나 꾸역꾸역 학교를 가고, 코로나로 학교가 문을 닫은 사이에 학교 가고 싶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 걸 보면, 학교에서 뭔가 얻는 바가 있긴 한 것일 게다. ‘아이들을 키운다’면서, 지식 전달이 다가 아니고 평가도 전부가 아니라면서도 돌봄은 우리 영역이 아니라고, 학교는 여기저기 선을 긋기만 한다. 그럼 학교는 대체 뭐란 말인가?
교육의 주인공이 분명 아이들이라면, 학교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는 아이들에게 물어야 한다. 아이들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급식과 친구 때문에 학교에 온다는 말. 그건 어쩌면 아이들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걸 가장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어른들이 보기에 학교는 개인의 공간을 확보해 감염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곳이지만 아이들은 서로 의지하고 어우러져 쉴 수 있는 안식처를 바란다. 코로나 이후, 우리가 이전으로 완벽하게 돌아갈 수 없다면, 어떤 모습의 학교를 바라는지 아이들에게 물어야 한다. 아이들이 바라는 대로 안전한 공간을 확보하고 숨을 곳도 쉴 곳도 있는 학교에서, 혼자보다 여럿이 함께 문제도 해결하고 놀면서 배울 수 있다면, 코로나도 기후위기도 학교에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아이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것을 결정권자들이 귀 기울여 듣고 행동할 수 있다면. 아이들이 미래라고 다들 말만 쉽게 한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미래가 과거에 전하는 메시지를 귀 기울여 들은 적이 없다. 우리는 지금 그 댓가를 치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