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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제12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
안희연 安姬燕
1986년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수료. elliott1979@hanmail.net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
나는 핏기가 남아 있는 도마와 반대편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오늘은 발목이 부러진 새들을 주워 꽃다발을 만들었지요
벌겋고 물컹한 얼굴들
뻐끔거리는 이 어린 것들을 좀 보세요
은밀해지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나의 화분은 치사량의 그늘을 머금고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창밖엔 지겹도록 눈이 옵니다
나는 벽난로 속에 마른 장작을 넣다 말고
새하얀 몰락에 대해 생각해요
호수, 발자국, 목소리……
지붕 없는 것들은 모조리 파묻혔는데
장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담장이 필요한 걸까요
초대하지 않은 편지만이 문을 두드려요
빈 액자를 걸어두고 기다려보는 거예요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물고기의 비늘을 긁어 담아놓은 유리병 속에
새벽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별들은 밤새도록 곤두박질치는 장면을 상연 중입니다
무릎을 켜면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당신이 이 편지를 받을 즈음엔
나는 샛노란 국자를 들고 죽은 새의 무덤을 휘젓고 있겠지요
--
*고트호브: 그린란드의 수도로 ‘바람직한 희망’이라는 뜻.
필라멘트
내 눈 속에는 돌을 안고 가라앉는 사람이 있지
누군가 내 눈꺼풀을 덮어주면
흰 천에 덮인 채로 말라간다
키에 맞는 나무상자가 곁에 있다
목덜미를 끌고 가는 새벽
나는 침대 밑에서 오래된 외투를 꺼낸다
닿자마자 물크러지는 열매 같아
연필로 그린 새가 날아가고
창문을 열면 나무와 하늘과 여름이
새의 무게만큼 비어 있다
나를 엎지르면서 또 한대의 기차가 지나가고
발목을 끊고 그림자도 달아나버리고
살짝살짝 어깨를 떨고 있는 고요
나는 우산을 접으면서 작아진다
입체안경
스크린은 도로를 감추고 있다.
승객을 가득 태운 버스가 간다. 차창마다 똑같은 옆모습이 붙어 있다. 우리는 이름 대신 번호를 가졌지.
버스를 그려서 그 안에 버스를 구겨넣었어. 원을 그려서 그 안에 얼굴을 구겨넣듯이.
긴 커브를 돌았다. 두겹으로, 네겹으로, 여덟겹으로…… 흩어진다는 것. 목이 등 뒤로 돌아갈 때의 속도 같은 것.
손잡이는 말했어. 한곳에 오래 머물기 위해 유연하게 흔들리는 법.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손을 내려도 여전히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것이 있지. 오분 전의 얼굴. 삼십초 전의 가로수. 나는 나로부터 불시에 멀어지고
의자가 조금 흐트러진 것 같은데. 나는 의자의 구조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다.
하루해가 저물 때까지 한 사람을 완성하는 일.
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
키 크는 일에 관해서라면 나도 조금 할 말이 있어요 허물어지는 계단을 달려와 단숨에 뛰어내리는 일 공중에 떠오를 때마다 나는 킥킥 비행기가 된 것 같지만 폭죽처럼 온몸은 터지고 바닥엔 흩뿌려진 색종이들 나는 아름다운 착지를 꿈꿔요 옥상은 매일 밤 높아져요
누군가 나를 찢고 달아날 때마다 나는 매번 다른 사람이 되지요 나는 뺨이 붉은 소년이었다가 잇몸만 남은 노인이었다가…… 지금은 철길 위에 꼼짝없이 묶여 있네요 경쾌한 기적을 울리며 기적 없이 다가오는 것들, 바퀴가 끌고 갈 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토막 난 허리를 상상하면 거짓말처럼 배가 고파요 얼굴을 뒤적이다 가는 고양이들
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 어제 죽은 내가 전하는 안부 같아서 나는 양팔을 벌리고 검은 해일을 안아요 다음 장면에선 비가 오고 철골만 남은 건물들이 유령처럼 서 있습니다 이곳에선 내가 주인공이에요 모자를 썼다 벗었다 쓰면서 스러져가는 불빛을 흉내내죠 목소리가 나오지 않지만 괜찮아요 가위를 든 손이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져도
꽃병에 꽂혀 있는 흰 뼈들 성냥으로 만든 집은 자주 흔들립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방금 전 내다버린 상자들이 도착해 있고 창문은 추락을 보여줄 때 가장 선명해지지요 창밖의 아이들은 온종일 머리통을 공처럼 굴리며 놀아요 소매가 더러워지도록 땅을 파면 몸통들이 웃고 있고
나도 따라 환하게 웃어봅니다 누군가 또 나를 찢고 달아나요 나는 다시 빛나는 눈을 가진 맹인이 되어…… 맹렬한 불 속에서…… 진짜 죽음이 와도 완성하지 못할 긴 편지를 쓰고 있어요 벽에서 태어난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