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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재근 金宰槿
1967년생. 2010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zepal2@hanmail.net
잠든 양들의 귓속말
오늘 밤엔 눈이 멀어
눈먼 양들을 데리고
눈보라 속으로 여행 간다
어제는 강가에서 잠을 잤고
양들은 내게 기대고
나는 양털에 귀를 묻고
눈보라 내리는 강물 속으로
잠든 우리의 귀는 눈동자가 하얀
물고기 울음을 듣고 있었지
양들은 백년 전부터 울었고
나는 백년 후에 죽었는데
눈보라는 왜 이제 내리는 걸까
눈보라는 왜 흐리게만 돌아오는 걸까
내리는 눈보라가 백년 전의 말을 한다
나의 귀는 딱딱하고
눈동자에 얼음이 이제 끼는데
술래잡기하듯,
먼저 내리는 눈보라
오늘 밤엔 강가에서 잠을 자고
잠든 양의 무릎을 베고
백년 동안 눈보라 내리는
눈보라를 보며
밤이 우화(羽化)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지
귀는 맑아져 백년 전의 양들과
백년 후의 내가 만나고
양들과 내가 강물에 가라앉아
울먹이는 물속에서
양들과 나의 귀는
백년 동안 울던 귀를 열고
귀 안의 울음을 캐고 있었지
귀가 더 깊어지기 전
귀가 더 넓어지기 전
귓불에 닿는 눈보라
귓불에 닿는 눈보라
눈보라 닿는 귓불의 무늬를 주워
서로를 위로했지
감은 눈이 하얗고 나의 목소리는
양의 목소리 같아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때
백년 후와 백년 전이 함께 돌아오고
나는 양들의 손등을 핥고
양들은 나를 끌고
강가로 나가 물을 먹여줬지
물속을 두드리면
양들은 응애응애 울고
우는 양들을 헤아려보는
나의 귀는 백년 전에 떠났던
울음이 불쌍했지만
귀를 잠그고
백년 후에 도착하는 울음을 기다렸지
양들과 나의 귀가 겹치는 곳
몸을 구부린 채,
얼굴을 다 숨길 수 있는,
귓속말처럼,
옴(Ω), 음(陰)
밤의 꼬리가 길다
성해(星海),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모래밭에 신발을 묻어둔다
누구의 소리일까
어디까지 날아갈까
옴(Ω)……
음(陰)……
소리는
가족 같아
손 흔드는 애인의 굽 높은 구두 같아
모였다 흩어졌다 달아나며
혼자, 부르는 노래일까
노래는 왜 소리를 가질까
옴(Ω)……
음(陰)……
신발은 어디 갔을까
모래밭에 발목이 가라앉기 전
소리가 잠들기 전
입술은 무거워지는데
소리는 멈출 수 없다는데
입안에서 소리는 왜 자라는 걸까
입술의 문양은 왜 푸르게 잠겨만 있을까
입안에 고여 있기만 했는데
아, 하고 입을 열면 도굴당한 울음이 쏟아질까봐
성해가 쏟아질까봐
어디까지 가는 걸까
옴(Ω)……
음(陰)……
소리가 돌아올 때까지
잠들면 안되겠지
입안에 뒤척이는 소리를 들으며
입술이 생길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