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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엮음 『근대한국 개벽운동을 다시읽다』, 모시는사람들 2020

개벽을 다시 읽는 지적 모험의 길

 

 

백영서 白永瑞

연세대 명예교수, 세교연구소 이사장 baik2385@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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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출간된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백낙청 지음, 창비 2020)에 대한 SNS상의 반응 중 인상적인 대목이 떠오른다. 처음에 웬 개벽인가 했는데, 읽고 나서 “이 단단한 화두는 우리 세대의 과제로 넘겨졌다”는 소감이다. 우리 사회에 서서히 퍼지고 있는 개벽 담론이 튼실히 확산될 조짐으로 읽힌다.

개벽을 구한말 개화나 위정척사와 다른 길로서 꾸준히 조명해 중요한 화두로 끌어올린 데는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의 공이 적지 않다. 그 공동연구진의 세번째 성과가 ‘종교와 공공성 총서 3’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의 핵심과제는 근대 한국의 신종교에서 추구해온 다양한 운동 속에서 ‘대안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이다.(총서 3 발간사) 신종교가 하나같이 내세운 슬로건인 개벽은 “민중이 중심이 되어 자기 수양을 바탕으로 타자 구제를 실천하여 ‘새로운 문명을 열자’고 하는” 사상이요 운동이다.(총서 2 서문)

그런데 프로젝트형 공동연구의 성과로 엮다보니 하나의 문제의식이 녹아든 기획이라기보다 대체로 연구주제를 공유하는 개별 글들의 모음이라는 성격이 짙다. 그럼에도 눈에 띄는 두개의 연결고리가 있기에 이를 중심으로 필자들과 대화를 시도해보겠다.

먼저 ‘토착적 근대’ 내지 ‘한국적 근대’라는 연결고리이다. 이를 대할 때 익숙한 개념인 ‘복수의 근대성’에 속하겠지 짐작하기 쉽다. 사실 이 시각이 기본적으로 공유된다. 그러면서도 동학이 유학을 혁명한 점을 중시하고 이를 한국적 근대의 기점으로 보는 차이가 강조된다. 이들에게 개벽은 “동아시아적 우주론과 윤리관을 계승하면서 한국적 하늘 개념과 영성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한 새 시대를 준비했다는 점에서 창조적 근대를 지향”하는 것으로(안효성 「동학의 토착적 근대성과 생명평화사상」 33면), 또는 “하늘과 함께 하는 삶” 곧 (최제우 식으로 말하면) “개벽적 삶”이고 (지금 식으로 말하면) “생태적 삶, 생명평화의 삶”으로 인식된다.(조성환 「최시형의 생태철학과 지구도덕」 64면) 이것이 일부 필자에 의해 공유되는 ‘토착적 근대’의 특징이다. 적어도 중국의 경우와 비교하면 한국 근현대 사상사에서 종교가 유독 강조되는 특징이 있는 만큼 이런 해석은 역사 새로 쓰기에 기여한다.

그런데 ‘다원적이며 토착적인 근대성의 패러다임’은 이미 국내외 논자들에 의해 종종 활용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그중 별도의 근대성을 구상하는 일이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는 너무 쉬운 해결책으로 단순화되면서, 근대극복에서 핵심난관인 자본주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 ‘커다란 공백’을 남겼다는 지적(황정아 「‘개벽’이라는 대담한 호명」, 본지 2019년 봄호)은 핵심을 찌른 것이다. 근대성을 중요한 연구과제로 삼는 주된 이유가 역사적 근대인 자본주의 시대가 우리 삶에 발휘하는 압도적인 힘을 제대로 인식하고 극복하기 위해서임을 한번 더 환기하고 싶다.

이런 비판을 (동의하든 않든) 정면으로 감당하면서 문제의식을 벼릴 필요가 있다. 그럴 때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론’이 유용할 것이다. 얼핏 어려운 담론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상식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려니와 역사적 경험에 비춰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겠다. 한국 근대 신종교가 단순한 문명개화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근대에 대한 수용 또는 저항을 적절히 선택하면서 주체적으로 대응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려는 ‘개벽종교’였던 점만 봐도 그렇지 아니한가. 또한 물질개벽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을 중시한 원불교의 개교 표어야말로 이중과제를 간결하게 압축한다.

다른 하나의 연결고리는 ‘공공성’이다. 이 책에서는 공공성을 몇개 세부 개념으로 나눠 활용한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식민지공공성 개념이다. 3·1운동 주도자들이 전략적으로 법정을 공공토론의 장으로 만들었듯이, 3·1운동은 한국 종교계가 주도하여 “한국과 일본의 공공적 대화를 시도한 운동”으로 해석된다.(야규 마코토 「천도교의 3·1독립운동과 시민적 공공성」, 169, 189면) 그런데 식민지공공성은 제기된 당초부터 실재론인가 환상론인가를 둘러싼 논쟁이었고, 원 제안자도 ‘은유’로 고안한 것으로 안다.

그다음으로 시민적 공공성 개념도 몇 필자가 공유한다. 해방 후 원불교와 천도교의 건국론을 시민적 공공성으로 해석해, 인민의 기본권을 확정하고 지속적인 시민참여를 통해 진정한 주권자의 길을 제시했다고 평가한다. 오늘날에도 원불교와 천도교 등 근대 한국종교는 시민적 공공성을 추구하며, 그 핵심은 여론을 조성할 수 있는 시민의 형성과 시민들의 공공에 대한 요구와 참여라 본다.(김봉곤 「근대한국 개벽종교의 건국철학과 시민적 공공성」, 195~96, 219면) 그밖에 원불교의 사드(THAAD) 철폐운동 등 현실참여 사례를 중심으로 시민종교와 공공종교라는 개념을 적용한 글도 있다.(원영상 「원불교의 평화운동과 교단변혁」 300~302면)

그런데 이 책의 공공성 이해는, “공과 사를 잇는 공공(하기)”의 주체를 시민이나 종교로 설정하려는 (초기부터의) 취지를 존중하더라도, 연구과제에 다소 느슨하게 연결되어 개벽사상이 담고 있는 풍부한 자원을 규명하기에는 미흡한 면이 있다. 한가지만 지적하면,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통찰이다. 정교일치의 문명관은 개벽종교에 공통되나 특히 정치와 종교를 두개 바퀴로 비유한 원불교의 정교동심(政敎同心)이 눈길을 끈다. 이 시각에서 보면, 세가지 치교(治敎, 다스리고 교화함)의 병진사상—곧 덕치(德治)와 정치(政治)에 덧붙여 민중 각자가 도인의 경지에 이름으로써 원만한 세상을 이룬다는 도치(道治)까지 아울러 행해져야 원만한 세상이 된다는 인식—이나, 교단과 종교의 경계를 넘어 종교 간 협력과 인류에 대한 공헌을 강조한 강령이라 할 삼동(三同)윤리(박맹수 「정산 송규의 계몽운동과 민족운동」 247~50면)의 사상적 깊이와 현재적 의미가 한결 또렷해질 것이다.

이같은 소중한 자원을 온전히 되살리되 새롭게 해석하고 싶다면, 공공성의 문제의식을 한층 더 심화시킨 공동영역(commons) 논의와의 접속도 고려해봄직하다. 이는 국가와 시장, 공과 사를 넘어 공공성을 확장하기 위해 국가나 시장에 의해 파괴되어온 ‘공동의 것’, 곧 공동영역을 지키거나 다시 회복하는 사상과 운동을 일컫는다. 이 논의는 원래는 공유지라는 좁은 개념에서 출발했지만 점점 더 확대되어, 사람의 창조성과 능동성이 작용해서 형성되고 유지되는, 함께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영역이라는 개념으로까지 넓혀지고 있다. 공동영역을 창출하고 확장하는 과정에서 참여자 스스로가 정치의 주체가 된다.

개벽을 공동영역으로 다시 읽을 때, 원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대화도 달리 볼 수 있을 것 같다. 원불교에 이르러 (후천)개벽사상과 불교가 만나는 일이 일어나고 근대 과학문명과 기독교문명이 적극 수용되어 새로운 차원에 도달했다는 인식이 가능해진다. 이 책은 원불교보다 천도교 부분에 조금 더 비중을 두고 있는데, 사상과 운동으로서의 원불교 자원을 두텁게 분석하는 과제에 더 마음을 쓴다면 한층 더 의미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을 터이다. 동시에 개벽사상이 한반도는 물론이고 동서양의 다른 사상·운동과 만날 가능성을 안고 있다면 이를 공동영역으로 만드는 협동적 탐험에도 이제 적극 나서볼 때이다.

코로나19 사태로 기후와 생태 위기에 민감해져 또 한번의 문명대전환기를 맞은 실감이 높아진 요즈음, (동학과) 천도교·증산교·원불교 등 개벽종교를 생태·평화 사상의 실천으로 읽은 이 책의 노력은 발본적 사유를 촉발한다. 그럴수록 새로운 세상을 여는 문명론으로의 전환이라는 가치지향적 연구과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각별한 자세가 필요하다. 단순한 연구 소재가 아니기에 매력적이지만 그 함의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며 연구하되 (개벽의 뜻에 걸맞은) 개인수양과 사회개혁을 병진하는 마음가짐까지 아우르지 않으면 공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책의 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