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심보선 沈甫宣
1970년 서울 출생.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눈앞에 없는 사람』이 있음. bosobored@gmail.com
피
오늘날 피를 제외하고는 따스함이 없다
피를 제외하고는 붉음도 없다
피가 그저 의미 없는 물이라고 말하지 마라
마지막 절규가 터지기 전까지
피는 이 세계의 유일한 장미
장미를 손에서 놓지 마라
예전에 우리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
여전히 같은 가사와 같은 선율의 노래
그러나 이제 그 노래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 노래를 가장 잘 불렀던 이들은 이미 죽었으니까
그러나 노래를 멈추지 마라
지금까지 손이 나와 동행했다
어두운 골목에서 나를 이끌고
다리 난간에서 나를 버텨주었던 손
나는 손을 신뢰했다
사랑하는 이의 볼을 어루만지고
그녀의 입에 밥을 떠먹였기에
무엇보다 내 몸 중에 가장 자주 피를 흘렸기에
장미를 손에서 놓지 마라
노래를 멈추지 마라
갓 지은 밥에서 피 냄새가 나는지 맡아봐라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 하나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태양이 아닌 것
그러나 태양이라고 믿는 것
그쪽을 향해 걸어가라
마음의 번민이란 서로 반대인 것들이 뒤섞인 핏물
이를테면 일어서는 것과 쓰러지는 것이 뒤섞인
장미, 노래, 밥, 피 묻은 너의 손, 나의 태양……
삶은 피의 무게로 저울질될 것이다
계속해서 걸어가라
번민하며
번민을 버리며
어떤 생각
서울역으로 향하는 길
염천교를 건널 때 선배가 말했다
많은 시인들이 염천교에 대한 시를 썼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시인들은
다리 위에서 도시를 들고나는 기차들을 보았을 것이다
도착하는 기차에는 염려를 보내고
떠나는 기차에는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염천교를 건너며 나는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정체 모를 어떤 생각을
교차로 신호가 빨간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뀔 때까지
나는 그 생각에 매달렸다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빠져들던 그 생각
내가 모르는 목적지나 고향에 대한 생각
언젠가 나의 나이가 그곳에서 완성되리라는 생각
그런데 그 생각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어렸을 적 잔디밭에 누워 눈을 감고
구름이 얼굴 위로 지나가는 것을
알아맞히는 연습을 한 적이 있었다
먹구름이 가장 쉬웠다
먹구름이라고 확신했는데
눈을 떠보니 애인의 얼굴인 적도 있었다
그때도 나는 그 생각에 매달렸다
고요한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생각
애인 얼굴을 보고 저것은 구름이 아닐까,
의심하는 바보 같은 생각
얼마 전 후배가 심근경색으로 죽었을 때는
그 생각이 아주 멀리 있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때 나는 후배의 영정을 보며 생각했다
그가 우리보다 먼저 죽었을 뿐이다
그러나 누구도 먼저 죽어서는 안된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대학원생들에게 말하듯
나 자신에게 엄숙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장례식장을 나오자마자 그 생각이 엄습했다
누군가 너무 빨리 도약했다는 생각
누군가 너무 일찍 추락했다는 생각
도대체 그 이상하고 모호한 생각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어쩌면 그 생각은 심지어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
세상이 아주 조용할 때에
아무도 억울하게 죽지 않았던 때에
굶주림과 예속이 없었던 때에
생각할 게 아무것도 없었던 때에 시작됐을 것이다
어떤 바보는 그 생각으로 염려와 한숨을 빚었을 것이다
인적 하나 없는 들판의 바람이 멈출 때까지
마침내 신이 손가락을 들어 희생양을 가리킬 때까지
그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생각 때문에
아이들이 곤히 잠들었을 때도 홀로 깨어 있었을 것이다
시는 그렇게 탄생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