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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은우 鄭殷宇
2019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
herevoice@naver.com
하비의 책
아주는 하비의 스마트폰 보안 패턴을 단번에 풀었다. 패턴은 단순했다. 날렵하고 가볍게 브이 자를 그리던 하비의 검지. 똑똑히 기억했다. 정작 하비의 부모님 연락처를 찾느라 한참 걸렸다. 하비의 아버지는 전화번호부에 본명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아주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처럼. 수술 동의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직계가족뿐이었다. 전화 한통 덕분에 하비는 무사히 수술실로 올라갔다. 병원 역시 직계가족에게만 출입을 허락했다. 아주는 병원 앞 주차장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병원 인근 상가들의 불빛이 하나둘씩 꺼지고 가로등만 남아 번득일 즈음 차 한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둘이었다. 그들이 쓴 마스크만 또렷하게 보였다. 아주는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저, 전화 드렸던.” 그녀는 우선 명함부터 내밀었다. “은영이 친구예요.”
하비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명함을 받았다. 그는 아주의 이름을 소리 내서 읽었다. 최현주씨? 아주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하비의 어머니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예요? 아주는 그들을 응급실 입구로 데려갔다.
직계가족이라도 한명만 드나들 수 있었다. 아주는 바깥에서 하비의 아버지와 함께 기다리기로 했다. 유리문 너머로 열을 재고 명부를 작성하는 하비의 어머니가 보였다. 아주는 하비가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닮았다고 생각했다. 가는 눈매와 끝이 올라간 눈썹이. 자칫 사납고 예민해 보이기 쉬운 인상이었다. 하비는 누구 앞에서든 볼을 한껏 끌어올리며 열심히 웃곤 했다. 하비의 아버지가 넌지시 물었다.
“범인은 잡혔나?”
“네, 경찰서에서 조사 중이래요.” 범인은 바로 앞 빌라에 사는 남자였다. 그는 하비나 아주와는 아무 일면식도 없었다. “실수였다고.”
하비의 아버지가 혀를 찼다. 사람이 어떻게 실수로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놔? 경찰은 범인을 바로 경찰서로 연행하는 대신 병원부터 데려왔다. 아주는 경찰에게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전해 들었다. 범인은 술에 취했다. 그는 홧김에 주차 금지용 조형물에 올려둔 벽돌을 던지다가 손목을 삐었다. 하비는 언덕을 내려가던 도중 그 벽돌에 뒤통수를 맞았다. 범인은 도망치다가 언덕에서 굴러 도로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용케 교통사고는 면했다. 가벼운 찰과상과 염좌뿐이었다. 범인은 운이 좋았다.
하비의 아버지가 탄식했다. 우리 애는 왜 이렇게 복이 없나. 아주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하비의 아버지가 멋쩍게 웃었다.
“세무사가 그렇게 돈을 잘 번다던데. 남자친구가 좋아하겠네.”
“아.” 아주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세무사가 아니라 세무사무소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 그러나 정정한들 괜히 분위기만 어색해질 터였다. “작년에 헤어졌어요.” 결별은 재작년이었지만 일부러 늦춰서 말했다.
“능력 있으니까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지.” 하비의 아버지는 숱이 얼마 안 남은 머리를 문질렀다. “우리 은영이는 만나는 사람 없나?”
“헤어졌다고 들었어요.” 아주는 대충 둘러댔다. 사실 하비에게 애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아마 올해 초였나.”
“정말이지 요즘 애들은 너무 약아. 무직인 건 둘째 치더라도. 이게……”
하비의 아버지가 말끝을 흐렸다. 아주는 화단에 걸터앉았다. 수술이 시작된 지 두시간은 족히 지났으나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녀는 허리를 수그렸다. 하비의 코트가 어깨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것만 같았다. 얇고 가벼운 홑겹 코트였다. 둘은 같은 코트를 샀다. 하비는 짙은 남색을, 아주는 검은색을 골랐으나 유심히 보지 않는 이상 구별하기 어려웠다. 누군가가 아주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그만 들어가봐요. 아주는 고개를 들었다.
“기다릴 수 있어요.” 그녀는 하비의 아버지가 택시비라며 내미는 지폐를 한사코 사양했다. “기다려야 해요.” 적어도 하비의 수술이 무사히 끝날 때까지는 기다리고 싶었다. “저, 은영이 코트에 제 사무실 열쇠가 있어서.” 허술한 핑계였다.
하비의 아버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몇분 후 하비의 어머니가 거무스름한 옷 뭉치를 들고 나왔다. 둘둘 말린 검은 코트를 털자 열쇠와 동전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으나 유난히 축축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아주는 코트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하비의 어머니는 두 팔로 코트를 단단히 그러안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고마워요.
그나마 택시비를 받지 않는 것이 아주의 최선이었다. 아주는 하비의 코트를 걸친 채 하비가 없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탔다. 잠깐 눈이라도 붙일 요량으로 숨을 가다듬었으나 도리어 정신만 더 또렷해졌다. 버스가 병원을 우회해 시내로 향했다. 아주는 눈을 감았다. 돌아가서 마주할 풍경이 눈에 선했다. 프라이팬 위에서 차갑게 식어버린 소시지와 김이 빠진 샴페인, 그리고 환하게 불이 켜져 있을 하비의 방. 하비의 책상과 방바닥에 쌓여 있을 책들이 떠올랐다. 하비 없이 하비의 책만 있는 하비의 방. 아주의 손이 코트 주머니 속에 든 하비의 스마트폰을 쥐었다. 차가웠다.
올해 초 아주가 근무하는 세무사무소는 예상치 못한 호황에 시달렸다. 원체 1월은 부가가치세 신고로 바쁜 달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난히 바빴다. 부가가치세 신고를 마친 중소기업들 태반이 청산을 신고했다. 아주는 지난 몇년간 담당했던 중소기업들의 매출 데이터를 삭제하고 파쇄기 옆에 폐기해야 할 서류들을 쌓아두었다. 파쇄기가 망가지지 않아서 다행일 정도였다. 작년까지는 파쇄된 종이 부스러기가 아깝다며 비닐봉지에 담아가는 직원도 있었다. 집에서 기르는 햄스터가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나 올해는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
하비가 일하는 여행사도 그중 하나였다. 나름 강남에 주소를 두고 있었으나 몇년째 소규모 스타트업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직원은 사장을 포함해 다섯뿐이었다. 하비는 팸플릿이나 SNS에 배포할 광고 제작뿐 아니라 홈페이지 관리까지 도맡았다. 열평 남짓한 사무실은 사면이 불투명한 유리벽이었다. 하비의 말에 따르면 한층에 그런 사무실이 족히 열개는 넘는다고 했다. 그 사무실에 입주한 회사들의 업종이나 취지는 서로 달랐으나 비슷한 처지였다. 대부분 청년 벤처 사업가들이었다. 그들은 버틸 뿌리도 없이 줄지어 선 도미노 패 같았다. 작년 말부터 방역 문제로 공용 라운지가 폐쇄되었고 사무실도 하나둘씩 비워졌다. 하비가 다니는 여행사도 1월을 무사히 넘기지 못했다. 하비는 결국 휴가 마지막 날 실직자가 되었다.
“올해 연차까지 끌어다가 쉬길 잘했지.” 그녀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우리 사장님이 망할 줄 알았어.”
아주는 간신히 부츠를 벗은 후 바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방바닥이 찼다. 입춘이라는 말이 무색했다. 그녀는 법랑 냄비를 꺼내서 우유를 부었다. 푸른 가스 불이 냄비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희멀건 우유에 조그만 거품이 일 때까지 부엌은 조용했다. 아주가 가스 불을 한단 줄였다.
“몇년 일했지?”
“오년 조금 안 됐네.” 하비가 선반을 뒤지면서 대답했다. “우리 같은 여행사치고는 오래 버틴 거지. 사장님이 퇴직금은 챙겨준대.”
아주는 말없이 초콜릿 파우더를 평소 넣는 양보다 두 숟가락 더 넣었다. 단내가 부엌 구석까지 고르게 퍼졌다. 그녀는 시린 발바닥을 종아리에 대고 비비면서 냄비를 응시했다. 초콜릿 파우더가 엉기지 않고 다 녹을 즈음 가스 불을 껐다. 잔에 나누어 담자 하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핫초코에 칠리 파우더를 뿌렸다. 아주는 하비가 멕시코에서는 이렇게 핫초코를 마신다고 말했을 때 쉽게 믿지 못했다. 핫초코는 혀가 녹을 만큼 달고 코끝이 찡할 정도로 매웠다. 그러나 날씨가 서늘해지고 기침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을 때면 아주도 자연스레 이 맛을 떠올리곤 했다.
하비가 잔을 내려놓았다.
“잘됐어. 계획한 것도 있고.”
“뭔데?”
계획을 세우는 건 하비의 취미이자 특기였다. 아주는 의자를 바투 당겨 앉았다. 하비는 요가나 외국어를 배우겠다는 흔한 목표부터 한옥을 짓는다거나 잠수사 자격증을 따겠다는 특이한 목표까지 가리지 않고 정한 후 계획을 세웠다. 얼마나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는지 아무리 멀고 허황한 목표라도 가능해 보일 정도였다. 왜 그런 목표를 정했느냐고 물어보면 하비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런 사람이 되면 어떨까 해서. 그러나 하비의 계획 중 다수는 실행을 앞둔 채 중단되기 일쑤였다. 하비는 단념한 즉시 즐겨찾기 목록과 엑셀로 정리한 계획표를 삭제했다. 열심히 만든 모래성을 발로 차서 무너뜨리듯. 슬퍼하기는커녕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내 다른 계획을 세웠다.
“아주야, 내 소원 기억해?”
“잊어버렸는데.” 아주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나도 한물갔나봐.”
“무슨 한물 타령이야. 벌써 갔지.” 하비가 핀잔을 주었다. “약속했잖아.”
불과 몇주 전, 작년 마지막 날이었다. 매년 그랬듯이 아주와 하비는 함께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면서 새해를 맞았다. 둘은 두서없이 새해 소원을 빌었다. 아주는 사무소 근처에 커피 맛이 괜찮고 값도 싼 까페가 생기거나 야근을 덜 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 소원을 들은 하비가 입을 삐죽거렸다. 너무 소박한데. 고민 끝에 아주는 예전에 신던 양말을 다 버리고 새 양말로 갈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었다. 한편 하비는 소원을 비는 대신 아주에게 다짜고짜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졸랐다. 아주는 맥주 두 캔에 취해 그 소원을 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해버렸다. 하비가 빈 소원은 하나뿐이었다.
“네 책이니까 네 이야기를 써야지. 왜 내 이야기를 쓰겠다는 건데? 어차피 아무도 안 읽어.”
물론 아주는 하비가 세웠다가 무너뜨렸던 계획들처럼 이 역시 수포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영 내키지 않았다.
“그건 모르지. 그리고 아무도 안 읽으면 어때. 안 읽는 책도 있는 거야. 세상에 책이 얼마나 많은데.”
하비의 말이 맞기는 했다. 세상에는 온갖 책이 있었다. 그래서 무얼 내도 희소성이 부족했다. 일종의 도박에 가까웠다. 아주가 재작년에 기장을 맡았던 출판사 장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책 한권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원고료나 인쇄비뿐 아니라 홍보비, 창고 임대료 등 무수한 부수비용이 줄줄이 따랐다. 팔리지 않으면 출판하는 족족 적자였다.
“그럴 돈으로 차라리 여행을 가.”
“어차피 한동안 해외도 못 나가잖아.”
“다 끝난 일이야.” 이미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주는 화를 낼 필요도 없고 화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은 영영 문을 잠가둔 방과 같았다.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으나 완벽하게 떠올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방 안의 가구와 물건들 위로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을 것이고 오래된 종이와 천들은 죽은 벌레와 함께 서서히 썩어갈 터였다. “이제는 상관없어.”
“아니잖아.” 하비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아주는 부인할 수 없었다. 그녀는 종종 한밤중에 진저리를 치며 일어나곤 했다. 그런 날이면 아무리 늦은 시각이더라도 하비는 용케 아주의 방문을 두드렸다. 둘은 다시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전까지 자질구레한 잡담을 나누었다. 하비가 아주의 팔꿈치를 잡았다. “끝내야지. 억울하잖아.”
“차라리 퇴사 일기를 써. 그게 더 재밌겠다.”
아주도 알고 있었다. 계속 무시해도 그 방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까지 모조리 태워버리지 않는 이상. 그러나 방문을 열고 그 기억과 마주한다 한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주는 여전히 무력했다.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네 이야기라는 건 비밀로 할게. 계약서 쓸까?”
“계약서 함부로 쓰는 거 아니라니까.”
아주는 하비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하비의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기도 했지만 어떤 계획을 세울지 궁금하기도 했다. 계약서는 남은 핫초코가 잔 바닥에 끈적하게 말라붙을 무렵 가까스로 완성되었다. 아주는 계약서대로 매주 한번씩 자신의 이야기를 녹음했다. 처음에는 있었던 이야기만 말하겠다고 다짐했으나 녹음을 마치고 나면 깜박했던 사실들이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나둘씩 늘어놓다보면 어디서 끝맺어야 할지 몰라서 말을 잃었다. 하려던 말을 갑자기 잊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녹음한 파일을 다시 듣지는 않았다. 들을 시간도 들을 마음도 없었다. 다만 자신의 이야기를 도중에 끊고 질문하거나 정리하려 드는 사람이 없으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하비는 아주가 녹음 파일을 보내면 한시간 안에 확인했으나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아주도 원고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가끔 테이블에 올려둔 원고 더미나 스케치가 들어왔지만 한번도 들춰보지 않았다. 더위가 절정에 달할 무렵 하비는 책 초고를 다 썼다고 통보했다. 그녀는 프리랜서 편집자에게 교열을 맡겼다. 그리고 볼에 선선한 바람이 와닿을 즈음 인쇄소에서 완성된 책들이 왔다. 초록색 표지에 노란색 가름끈이 달린 책 이백권이 하비의 방바닥과 책상 위를 점령했다. 아주가 창고에 맡기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묻자 하비는 어차피 소량 인쇄라 물류창고에 보관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서점에 입고 제안서를 잔뜩 썼으니 조만간 답이 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아주가 아는 한 이백권 중 한권도 줄지 않았다.
아주는 하비의 아버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은 다른 번호로 왔다. 하비의 어머니였다. 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나 의식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메시지였다. 아주는 오늘 면회하러 가도 되느냐는 메시지를 썼다가 지웠다. 병원은 보호자카드를 소지한 사람에게만 면회를 허락했다. 후배가 아주의 책상을 두드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파쇄할 서류가 있느냐고 물었다. 아주는 책상 아래에서 서류로 가득 찬 상자를 끌어냈다.
몇분도 채 안 되어 다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는 후배가 제게 내민 것을 받아들었다. 희고 도톰한 종이로 만든 카드였다.
“실수로 버리신 것 같길래.”
“고마워요.” 아주는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꼼꼼하네.”
“이런 시기에 결혼하는 사람도 있나보네요.”
“뭐, 식장은 몇달 전에 잡았는데 계속 미뤘다니까. 그 언니도 최선을 다한 거겠죠.”
후배는 몇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파쇄기 쪽으로 돌아갔다. 아주는 청첩장을 가방에 넣었다. 이 시기에 결혼식을 감행하는 사람과 그날 받은 청첩장을 버리는 사람 중 누가 더 비난받을 만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신부의 이름을 입속에서 몇번 되뇌었다. 이 언니가 유씨였구나. 청첩장이 아니었더라면 본명도 몰랐을 사람이었다. 닉네임이 더 익숙했다. 하비처럼.
아주는 아주가 된 후 사람들과 쉽게 가까워졌다. 좋아하는 배우가 같다는 이유만으로도 친해질 이유가 충분했다. 인터넷 팬카페에서 맺은 친분은 개인 SNS 계정을 주고받는 과정을 거쳐 직접 얼굴을 마주할 만큼 두터워졌다. 하비는 그 카페에서 만난 사람 중 한명이었고 몇 안 되는 동갑내기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배우가 영화에 출연할 때마다 다 함께 기뻐했고 안 좋은 평을 받으면 다 함께 슬퍼했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었고 그 이유를 묻는 사람도 없었다. 함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아주를 좋아했다. 그러니 아주가 가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문제는 세번째 여행에서 불거졌다. 여행 전날에 있었던 기자회견 때문이었다. 배우는 이번 영화가 마지막 출연작이며 은퇴 후 유학을 떠날 예정이라고 말했다. 몇몇은 배우를 원망했고 몇몇은 배우의 행복을 빌었다. 서로 바라는 건 다르더라도 느끼는 건 비슷했다. 그들은 자신이 좀더 불행해졌다고 느꼈다.
누가 먼저 시작한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끓고 있는 닭볶음탕 앞에서 자신이 겪었던 불행을 털어놓았다. 이야기가 끝말잇기처럼 줄줄이 이어졌다. 비슷하고 다른 불행들이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다독이고 응원했다. 아주도 그 거대한 위로의 원에 끼고 싶었다. 같은 배우를 좋아하듯 함께 불행을 나누면 더 가까워질 것 같았다.
아주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따뜻하고 다정한 시선들이 일제히 자신을 향해 내리꽂히자 입은 단단히 닫혔다. 숨이 가빴다. 그녀의 혀는 달싹이기만 할 뿐 어떤 단어도 발음하지 못했다. 가벼운 맞장구나 다정한 손길도 엄살 부리지 말라는 경고 같았다. 시선을 피하거나 눈을 감으면 거짓말이라는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여 질문이 날아든다면 대답할 자신도 없었다. 왜 그러지 않았지? 왜 그랬지? 아주의 두 손은 테이블 아래에서 서로를 맹렬하게 쥐어뜯느라 바빴다. 고백한들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저 구석에 밀쳐두었던 불행이 되돌아올 뿐.
그때 하비가 말했다.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주는 눈을 깜박거렸다. 하비는 혼자서 닭볶음탕을 먹고 있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그녀는 닭 뼈를 휴지통에 버렸다. 지금은 견딜 만해? 아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비가 결론지었다. 그럼 됐어. 순간 아주를 질식시킬 듯 몰려들었던 시선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하비에게 함부로 다른 사람의 말을 끊지 말라고 지적했고, 하비가 먹는 소리에 묻혀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하비는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들으려고 먹은 거야. 그 말대로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계속 이와 턱 근육을 움직이면서 기계처럼 닭을 물어뜯고 씹고 삼켰다.
배우는 예정대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팬카페는 동결되었다. 사람들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하비와는 멀어졌다. 아주가 이유를 묻자 어물쩍 시치미를 뗐다. 다들 하비에게 상처를 입었다는 듯이 당연하게 멀어졌다. 그나마 제대로 대답한 사람은 오늘 청첩장을 준 언니 한명뿐이었다. 걔는 결핍도 없고 상처도 없잖아. 그래서 공감 능력이 부족해. 그날 하비만 아무것도 고백하지 않았다. 아주는 언니의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비가 고백할 것이 없어 모자란 사람이 되었다는 말처럼 들렸다. 아주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감출 것 없는 삶이 부러웠다. 애초에 없어야 마땅했다.
아주는 축의금 봉투에 하비 몫까지 넣어서 언니에게 건넸다. 봉투에 나란히 적힌 아주와 하비의 닉네임을 본 언니는 석연찮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아주에게 여전히 하비와 친하게 지내느냐고 물었다. 아주는 아직도 같이 산다고 대답했다. 언니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몇번씩 쓸어 넘겼다. 걔한테 줄 청첩장도 가져올 걸 그랬네. 아주는 언니가 여전히 다정하고 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비의 사고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하비도 결혼식에 갈 수 없다고 전했다. 그럼 나중에 셋이서 보자. 언니의 말에 아주는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퇴근할 즈음 문자메시지가 한통 왔다. 은영이에게 갈아입힐 속옷을 가져다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아주는 마침 내일 토요일이라 가능하다고 답장했다. 그녀는 답장에 하비의 의식이 돌아왔느냐고 적었다. 답은 간결했다. 고마워요.
아주와 하비는 오년 넘게 같이 살았다. 먼저 동거인을 구한 사람은 아주였다. 그녀는 자취하던 반지하방에서 두번째 침수를 겪은 후 SNS에 하소연했다. 동정과 위로의 메시지만 이어지는 가운데 하비가 다른 내용의 댓글을 달았다. 하비도 외풍이 심한 옥탑방 생활이 질린다고 했다. 둘 다 마련할 수 있는 보증금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합치니 반지하나 옥탑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
첫번째로 구한 집은 빌라 일층이었다. 주변에는 파출소와 슈퍼가 있었고 집주인은 친절했다. 문제는 학교 근처라는 점이었다. 밤늦도록 시끄러웠다. 계약 기간을 꼬박 채운 후 둘은 다른 집으로 이사했다. 쪽방 사이에 세운 가벽을 터서 만든 원룸이었다. 제법 넓은 데다 주변도 조용했다. 그러나 창문이 하나밖에 없었다. 생선이나 고기를 구울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그들은 계약 기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세번째로 구한 집은 가파르고 좁은 아스팔트 언덕 중간에 자리한 곳이었다. 일층이 아니라 삼층이었고 옛날에 지은 빌라라 오히려 층간소음도 적다고 했다. 아주는 이 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선 언덕진 길을 따라 빽빽하게 주차된 차들이 영 눈에 거슬렸다. 주차 금지용으로 세워둔 시멘트 조형물들이나 벽돌이 서너개씩 쌓여 있는 빈 화분도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유일한 장점이라고는 출퇴근 시간이 삼십분으로 단축된다는 것뿐이었다.
하비는 이 집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베란다 때문이었다. 한발짝 발을 떼면 끝일 만큼 협소한 베란다였다. 아주는 베란다가 있는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이전에 살던 집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환기는 안 될지언정 상자 속에서 풀을 뜯고 잠드는 양처럼 조용하게 살 수 있었다. 하비는 질색했지만.
오래된 집이라 그런지 베란다 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그 사이로 바깥에서 나는 소음과 모기가 들어왔다. 청소도 따로 하고 혹여 물이 새는 곳이 없는지 수시로 살펴봐야 했다. 하지만 노을이 지거나 해가 뜰 때마다 아주는 저도 모르게 손을 멈췄다. 베란다로 들어오는 햇빛 덕분에 방안은 순식간에 밝아지고 천천히 어두워졌다. 아무 생각도 없이 빛과 어둠 속에 잠겨 있을 수 있었다.
그녀는 하비와 살면서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대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흥미로운 요리법이 나오면 받아 적었다. 가을에는 전어가 제철이고 봄에 나오는 쑥으로 국을 끓일 수도 있다는 사실도 하비 덕분에 알았다. 하비는 봄에는 딸기, 여름에는 복숭아, 가을에는 사과, 겨울에는 귤로 잼을 만들었다. 그녀는 식빵이나 우유가 떨어지지 않게 매번 사다 놓았다. 크리스마스 기념이라며 조그만 트리를 사서 꾸미는가 하면 좋아하는 빵집에서 케이크를 주문하기도 했다. 거실에는 감명 깊게 본 전시회에서 산 포스터를 붙여 놓았다. 아주는 하비와 사는 삶이 마음에 들었다. 하비는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능했다.
한번은 아주가 하비에게 왜 닉네임을 하비로 정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하비는 십자드라이버를 든 손을 능숙하게 놀리면서 대답했다. 그냥. 마치 하비가 아니라도 상관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녀는 테이블 다리 나사를 다 조인 후 일어났다. 그러고는 네 다리로 선 테이블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기린이라도 되는 양 흐뭇한 눈길로 살폈다. 아주 좋아. 아주는 하비의 그런 면이 좋았다.
하비의 어머니는 아주에게 시종일관 깍듯했다. 그녀는 병원 앞에서 바로 헤어지는 대신 커피를 사겠다며 아주를 까페로 데려갔다. 그리고 케이크까지 몇조각 포장해서 들려주었다. 아주가 괜찮다고 말해도 하비의 어머니는 꿋꿋이 고집을 부렸다. 은영이가 신세를 많이 졌을 테니까. 아주는 어색하게 웃었다.
“은영이는 어때요?”
“자기가 이겨내야죠.” 하비의 어머니는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커피를 마셨다. 아주는 하비의 어머니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무엇이든. 사고를 당한 날 하비는 아주의 검은 코트를 걸치고 나갔다. 편의점은 집에서 오분도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까웠다. 그리고 하비가 사고를 당했다. 아주는 이 일련의 사건이 다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비의 어머니가 아주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은영이는 원체 삶에 굴곡이 많은 애라.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희 동네가 교통편도 괜찮고, 밤늦게 불도 다 켜져 있는 곳인데……”
“그런 일이 장소 가려서 일어나나.” 하비의 어머니는 괜찮아, 괜찮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우리 은영이가 현주씨처럼 좋은 친구를 둬서 다행이네.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요.”
“감사합니다. 저도 은영이 덕분에 잘 살고 있어요.”
아주는 진심이었다. 하비의 어머니는 고맙네,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생각이 깊네. 친구가. 은영이도 집에 돌아가서 재활치료도 받고 하면 좋아질 거니까 너무 걱정 마요. 걔도 이제 제대로 살아야지.”
아주는 마스크 안쪽 입술을 깨물었다.
“재활병원이라면 이쪽이 더 가까워요.”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은영이도 곧 다시 취직할 거예요. 아시잖아요. 요즘 다들 어렵고.”
하비의 어머니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남은 커피를 다 마시고는 말했다. 모르는 모양이네. 그녀는 아주가 몰랐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비이기 이전의 하비는 미대 졸업 전시회에서 예정과 다른 작품을 전시했다. 그녀를 어르고 달래는 한편 협박까지 일삼으면서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고 했던 선배가 보낸 문자메시지와 전화 통화 녹취록, 그 선배로 인해 떠났던 여자 선후배들의 성씨, 그 모든 글자가 제각기 색을 띤 붓질이 되어 캔버스 위에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이루었다. 그 형상은 인간처럼 머리와 팔다리는 있었으나 얼굴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인간을 닮은 폭로가 관객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하비의 어머니는 아직도 그 작품이 기억난다고 했다. 그녀는 그후에야 자신의 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하비는 같은 학과 선배를 고발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선배는 하비가 먼저 접근했다고 주장했다. 학과 교수가 서로 오해를 풀고 화해하기를 종용했으나 하비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는 졸업 전시회까지 버텼다. 선배는 결국 떠났고 하비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게 하비의 어머니가 아는 전부였다.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하비의 어머니가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했다. “이긴 셈인데.”
하비는 끝까지 맞서 싸웠다. 그 사람은 사라졌다. 말없이 대학을 떠난 피해자들에 비하면 하비는 승리한 셈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떠났다. 아주도 가끔 하비처럼 행동했더라면 어땠을지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그녀의 경우 선배가 아니라 학부 강사였고 졸업 전시회가 없었다는 점이 달랐다. 하지만 비슷했다.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았다. 같지 않았지만 다른 것은 아니었다.
“이제 제자리로 돌아와야죠.” 하비의 어머니가 타이르듯 말했다. 마치 아주와 하비가 함께 살았던 시간이 하나의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이. “서운하겠네요.”
까페를 나서는 길에 아주는 하비가 의식을 찾는 대로 병원을 옮길 예정이라는 통보를 들었다. 하비의 어머니는 그녀를 버스정류장까지 마중했다. 아주는 순순히 버스에 탔다. 그리고 케이크가 든 상자를 버스 좌석에 두고 내렸다.
아주가 아직 아주가 아니라 현주이기만 했을 때, 그녀는 학교에 학부 강사의 처벌을 요구했다. 사람들은 현주의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그들은 당장 그 강사를 배척하고 단죄할 듯이 화를 내면서도 현주에게 물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그녀도 그 이유를 몰랐다. 이에 강사는 자신의 상냥한 메시지며 이에 감복한 듯한 현주의 답장까지 게시판에 고스란히 올리며 반박했다. 이 모든 사건이 순전히 현주의 착각이자 망상일 뿐이라고 우겼다. 그는 현주가 제시한 증거를 무효로 몰아갔다. 현주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느새 사람들은 현주와 강사를 같은 저울에 올려놓았다. 어느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한쪽은 내려가야 했다. 그들은 배심원처럼 굴었다. 현주는 결백했다. 그러나 앞서 제시한 증거들이 반박당한 이상 자신을 증거로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그 사건 이후로 얼마나 망가졌는지 호소했다.
저울은 천천히 그 사람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자 그가 돌연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실망하게 했다며 사과했다. 실수라며 용서를 빌었다. 현주를 제외한 모두에게. 사람들은 강사를 용서하지 않았고 끝내 학교에서 내쫓았다. 몇달 후 강사는 유서를 쓰고 한강대교를 걸었다. 순찰 중이던 경찰이 그를 데려갔다는 소식이 학과에 공공연히 퍼졌다. 사람들은 그를 딱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현주가 용서해야만 자신들도 그를 용서할 수 있다고 전제를 두었다.
불가능했다. 그는 현주에게만은 용서를 빌지 않았다. 현주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그런 일을 당했더라면, 그 역시 용서하지 못했을 테니까.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비느니 변명하고 부인하면서 버텨야 했다. 잘못보다 실수가 나았다. 누구든 실수를 한번쯤은 저지르기 마련이었다. 그는 똑똑했다. 그러나 그는 간과했다. 그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벌이 용서보다 쉬웠다. 벌줄 방법은 많아도 용서할 방법은 요원했다.
상담사는 현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고 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현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두번째 상담까지 침묵으로 일관하자 상담사는 모래가 담긴 상자를 가져왔다. 그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놓아보라고 했다. 현주는 모래가 싫었다. 물을 부어도 금세 말랐고 높이 쌓거나 구덩이를 파도 몇번 손날로 쓸어버리면 순식간에 메워졌다. 그녀는 말 모양 인형을 모래판에 거꾸로 처박았다가 다시 빼서 모래를 조심스럽게 털어주었다. 꽃을 심기도 했다. 인형들을 둥글게 세워두었다가 하나씩 손가락으로 튕겨서 넘어뜨렸다. 그리고 다시 세우기를 반복했다.
상담사는 모래판을 보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현주는 볼펜을 쥔 상담사의 손을 보았다. 모래가 덕지덕지 낀 자신의 손톱과 달리 상담사의 손톱은 깨끗했다. 현주는 상담사가 어떤 질문에도 명쾌한 답을 줄 수 없고 주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말을 듣고 그대로 정리하고 요약해서 말해주는 것이 다였다. 그러나 현주는 상담사의 노력에 만족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곧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몇번이고, 계속. 현주는 그 말에 진저리가 났다. 현주가 괜찮아질 수 없다고 믿는 건 현주 자신이 아니었다. 그녀를 제외한 모두였다. 현주의 이야기는 그들뿐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떠돌다가 이상한 교훈을 주는 괴담으로 남을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현주는 모래 상자를 통째로 엎어버리고 싶었다. 그 대신 그녀는 현주를 아는 사람들 앞에서 말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아주가 되었다.
세탁기를 연 아주는 벌레 허물처럼 말라붙은 티셔츠와 속옷을 보았다. 어제 오전에 세탁 버튼을 누른 후 깜박한 결과였다. 요 며칠 동안 사무소는 마지막 부가가치세 신고 기간을 맞아 바쁘게 돌아갔다. 야근하지 않는 날이 드물었다. 세금계산서와 영수증을 샅샅이 살펴 절세액을 늘려도 절세 방안이 더 없느냐는 문의가 끊이지 않았다. 다른 동료 직원들은 지긋지긋하다며 투덜거렸지만 아주는 내심 이 시기가 반가웠다. 온종일 정신없이 일하고 퇴근하면 꿈조차 꾸지 않고 잠들 수 있었다. 시간도 금방 흘러갔다. 그러다보면 무슨 문제건 닳고 닳아 견딜 수 있을 만큼 무뎌졌다.
물론 빨래할 짬도 없었다. 이주 동안 옷가지며 수건들이 빨래바구니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그 옆에 산처럼 쌓였다. 아주는 밤늦은 시각까지 세탁기를 돌리는 것으로 댓가를 치렀다. 그리고 세번째로 세탁기를 돌린 후 잊어버렸다. 그녀는 다시 세제를 넣고 버튼을 눌렀다. 세탁기의 거무스름한 패널 너머로 물에 퉁퉁 불어서 떠다니는 천 쪼가리들이 보였다.
하비는 의식을 찾았다. 하비의 어머니가 알려준 소식이었다. 하비는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아주도 연락할 생각이 없었다. 하비의 그럴싸한 핑계나 억지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며칠째 닫아두었던 하비의 방문을 열었다. 묘하게 달큰한 냄새가 났다. 아주는 방바닥과 책상에 쌓여 있는 책들이 눈에 거슬렸다. 그녀는 그중 한권을 집어 든 후 세게 문을 닫았다. 어차피 하비는 아주에게 책이 나오면 한권 주겠다고 약속했다. 정작 그 약속을 지킨 적은 없지만.
아주는 화장실 문가에 앉아 하비의 책을 읽었다. 세탁기가 흔들릴 때마다 그 진동이 그녀의 엉덩이와 발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책만 읽었다. 하비는 책에서 아주와 자신의 경험을 제멋대로 뒤섞어버렸다. 첫 장에 쓴 대로 이 이야기는 하비의 것이 아니었다. 아주의 것일 리도 만무했다. 삽화 속 사람들은 얼굴이 없었다. 하비는 책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제 더는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잊어버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잊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아주는 책 가름끈을 머리채라도 되는 양 감아쥔 채 하비의 방으로 향했다. 책이 이리저리 부딪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방문을 열자 책들이 보였다. 아주는 쥐고 있던 책 가름끈을 내팽개쳤다. 그녀는 하비가 보낸 입고 제안서에 온 답장들을 보았다. 그 답장의 대부분은 거절이었다. 드물게 수락하는 곳도 있었으나 하비는 어디에도 책을 보내지 않았다. 이 방에서 책과 함께 영영 썩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아주는 쌓여 있는 책 더미 중 하나를 발로 걷어찼다. 책이 우르르 쏟아졌다. 하비는 또 도망쳤다. 이백권의 실패들만 꼴사납게 남겨둔 채. 아주야 예전처럼 혼자 살던 삶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영영 닫아둘 방이 하나 더 늘어났다는 것 말고는.
때마침 세탁이 끝났다는 알람이 들렸다. 아주는 엉겨 붙은 티셔츠와 수건을 떼어냈다. 건조대는 어느새 섬유유연제 냄새가 풀풀 나는 빨래로 가득 찼다. 아주는 건조대 귀퉁이에 양말들을 한짝씩 널었다. 대부분 무채색인 그녀의 옷과 달리 양말은 화려했다. 단색 양말은 하나도 없고 무늬나 길이도 제각각 달랐다. 반짝이는 은색 실로 다닥다닥 수놓은 검은 양말, 발목 부근에서 접어 신으면 귀여운 다람쥐 자수가 보이는 양말, 서로 다른 색실로 짰으나 전혀 요란스러워 보이지 않는 꽃무늬 양말, 회색의 두툼한 재질에 밝은 노란색 앞코가 돋보이는 양말, 짙고 옅은 초록색 실들로 명암을 표시한 엉겅퀴 무늬 양말, 붉은색 발굽 무늬가 경쾌한 살구색 양말까지. 다 하비가 선물한 양말들이었다.
사고가 일어난 날 하비와 아주는 함께 서로의 생일을 축하했다. 하비의 생일은 구월 중순이고 아주의 생일은 시월 중순이었으나 둘 다 회사 일로 바빴다. 그래서 시월 초에 날을 잡아서 합동 생일 파티를 열기로 했다. 하비는 멋진 케이크를 예약했고 고등어를 넣은 오일파스타도 만들었다. 아주는 직장에서 선물 받은 샴페인을 들고 왔다. 둘은 초를 꽂는 일을 두고 고민했다. 반올림으로 초 네개를 꽂을지 버림으로 초 세개를 꽂을지 의견이 분분하게 갈렸다. 아주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사이 하비가 초를 꽂았다. 어차피 남겨둬봤자 쓸 데도 없으니 다 꽂아버리자고 했다. 그들은 열한개나 되는 초에 하나하나 불을 붙였다. 그 와중에 불이 꺼지거나 촛농이 케이크 위에 떨어지기도 했다. 아주와 하비는 간신히 붙인 불을 단숨에 꺼버렸다. 둘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먼저 선물을 받은 사람은 아주였다. 하비는 길쭉한 상자를 건넸다. 안에는 양말들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무늬며 색깔이 다 달랐다. 검은 슬랙스에 흰 와이셔츠나 티셔츠 차림으로 다니는 아주의 차림새에 비하면 과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비는 예전에 신었던 양말을 모조리 버리라고 명령했다. 아주도 하비에게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하비가 포장을 뜯고 상자를 열자 색색의 파스텔들이 보였다. 하비의 손가락이 그 위를 훑자 기분 좋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하비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좋아. 평소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열심히 끌어올려 웃거나 그럴싸한 찬사를 늘어놓지 않았다. 그저 한마디를 더 했다. 정말 고마워. 아주는 하비 대신 웃었다.
이내 하비가 다음에 퇴사하면 프랑스에 가자고 졸랐다. 아주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프랑스어라고는 기본 인사말 정도였지만 하비가 있다면 얼마든지 재미있는 여행이 될 테니까. 하비는 거침없이 프랑스를 누비는 계획을 읊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샴페인이 아니라 와인이 마시고 싶다고 했다. 마침 편의점에 봐둔 게 있어. 아주는 마스크만 쓰고 나가려는 하비에게 바깥이 추우니 뭐든 걸치라고 외쳤다. 하비는 의자에 걸쳐둔 코트를 들고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문이 닫힌 후 아주는 하비가 자신의 코트를 걸치고 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비가 돌아오면 신나게 놀려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주가 와인에 곁들일 소시지를 굽는 사이 옆집 사람이 찾아왔다. 그날 밤은 예상과 달리 희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주는 하비가 했던 모든 말을 믿고 싶었다. 하비의 계획들이 다 성공하길 바랐다. 실패한들 몇번이고 다시 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비라면. 계약서를 함부로 쓰지 말라는 말은 사실 하비가 아니라 아주 자신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아주는 하비의 방에 들어갔다. 쓰러진 책들을 다시 쌓아놓고 그중 표지나 모서리에 흠집이 난 책이 있는지 살폈다. 그녀는 벽면에 걸려 있는 코르크 보드에 빗금 두개를 표시했다. 그러고는 지갑에서 책 두권 값을 꺼내 하비의 책상에 두었다.
아주는 하비 대신 유통기한이 다 된 식재료를 꼬박꼬박 버렸다.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우유와 식빵을 샀고 남아 있는 마스크 개수를 확인해 빈 만큼 채워 놓았다. 쓰레기통이 차면 비웠다. 남은 잼은 숟가락으로 싹싹 긁어 식빵에 발라 먹었다. 잼을 담았던 유리병을 깨끗하게 씻어 햇볕에 말렸다. 핫초코를 끓일 때마다 칠리 파우더를 뿌리기도 했다. 가끔은 너무 많이 뿌려서 눈물이 날 정도로 기침을 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칠리 파우더가 다 떨어지자 새로 사다 놓았다. 하비의 방문을 열어 환기하고 옷가지들은 차곡차곡 개어서 침대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하루에 두번, 출근하기 전과 퇴근한 후 하비의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아주는 틈이 날 때마다 열심히 입고 제안서를 써서 보냈고 서점들은 제각기 다른 때에 문자메시지나 메일로 답장을 주었다. 수락은 여전히 드물었으나 아주는 꼬박꼬박 택배용 상자에 책을 포장해서 부쳤다. 코르크 보드에 빗금이 차차 늘어났다. 그녀는 책값이 들어올 때마다 뽑아서 하비의 책상에 올려두었다.
서울 도심에 진눈깨비가 내린 날 아주는 문자메시지 한통을 받았다. 하비의 어머니 번호였다. 그녀는 별다른 의심 없이 메시지를 확인했다. 내용은 짧았다.
미안.
하비치고는 너무 초라한 사과였다. 아주는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신호음이 가다가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자 하비가 전화를 받았다. 아주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하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비의 책을 읽은 사람 중 몇몇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주소로 짤막한 메일을 보냈다. 메일들은 제각기 내용이 달랐다. 비난하고 의심하는가 하면 동정했다. 연민을 내비치는가 하면 자신의 경험을 적었다. 단순한 감상평도 종종 보였다. 그러나 아주가 하고 싶은 말은 그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내내 하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언제 돌아올 거야?”
그리고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