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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소설이 로컬을 말하는 방법
다시 지역화하는 시대의 문학과 로컬리티
구모룡 具謨龍
문학평론가,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문학/사상』 편집인. 평론집 『폐허의 푸른빛』 등이 있음.
kmr@kmou.ac.kr
1. 지방이라는 추상어
지방이라는 말이 거리낌 없이 통용되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서울과 지방이라는 오랜 심상 지리를 반영하는 말이나, 말하고 듣는 이의 상황에 따라서 위계를 내포한 직시어(deixis)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최근에는 그 범주가 달라져 서울과 수도권을 벗어난 여타의 공간을 지방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만큼 수도권이 여러가지 미디어—교통, 교육, 언론, 출판 등—로 통합되고 있다는 사정을 반영하는데, 이러한 지칭은 매우 추상적인 공간지각일뿐더러 어느 한쪽의 특권이 내포된 발화로 나타나기 쉬운 현실이다. 지방민, 지방도시, 지방대학처럼 지방문화, 지방문학이라는 말도 널리 쓰이고 있다. 지방이라는 말 대신에 지역이라는 중립화 어법으로 분식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오십보백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가운데 중심주의의 해체가 문제해결의 시발이라는 주장이 빈번하다. 이는 한편으로 중심에 저항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 고장을 내세우는 방략이나, 이분법이 만드는 순환논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본디 도성이 있던 한양을 제외한 지역을 지방이라 칭하던 중세적 습속이 근대화 과정에서 재생산되어 거의 이원론에 가까운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주지하듯이 분단으로 섬이 된 한국은 서울-부산을 잇는 축으로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을 펼치면서 근대화를 이뤘다. 이는 수도에 여타 지역이 충성하는 서울 중심 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도권과 영남권에 산재한 공업단지를 국가가 독점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었다. 그 시기 유신체제를 타파한 부마항쟁과 그 이듬해의 광주민주화운동에 지방의 저항이라는 측면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서울 중심성은 무너지기는커녕 이어지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세계화 행진에 발맞추어 더욱 강화되는 형국으로 나타난다. 위로는 세계도시와 접속하려는 열망이 있고 아래로는 산업 재편이 진행되었다. 그동안 지역적 불균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해양경제(maritime economy)를 강화하거나 분권 혹은 분산 등을 이루려는 조치가 없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집중은 더욱 심화하였다. 최근에 이르러 경제, 권력, 인구, 교육, 문화 등 전부문의 지표는 수도권 일극 체제가 거의 고착되었음을 보여준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근대화에 이어 세계화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에서 끝없이 중심을 강화하는 시스템을 운용하였다. 벌써 ‘지방소멸’1을 예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동안 지역문제 혹은 지역모순을 우리 사회의 부차적 과제로 인식해온 입장에서 전환의 자리가 만들어져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 자본주의적 공간생산이 주요모순이라는 앙리 르페브르(Henri Lefèbvre)의 지적을 환기할 필요도 있겠다. 현재 한국의 상황은 마치 원근법처럼 소실점의 위치에 지방이 자리한다. 우리는 계급모순, 젠더 불평등, 분단체제의 민족 상황을 심각하게 논의한 만큼 지역 격차와 불균등을 고민했을까? 담론적으로는 1980년대의 지방주의(localism)와 변증법적 지역주의, 1990년대의 비판적 지역주의(critical localism)를 경과했다.2 중앙의 특권적 시선에 의해 지방은 자주 차별된 표상으로 그려지고 중심에 반발하는 지방의 심리는 그 이율배반적 정념으로 크게 왜곡되는바, 가령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지방주의(localism)가 있다. 이는 이분법 혹은 대위법적 배치는 선명하나 구체적이고 복잡한 과정과 양상을 소거하는 오류를 낳는다. 변증법적 지역주의는 지역모순을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다음에 두는 실천적 인식론이다. 지역에 가중된 모순을 견결하게 껴안고 가야 한다는 수행의지를 반영한다. 비판적 지역주의는 일국적 시야를 넘어서 로컬을 사유하는 방법이다. 자기를 하나의 방법으로 생각하면서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계기를 만든다. 이와 관련해 손남훈은 ‘지역감수성’이라는 개념을 제출하면서, 많은 표상에서 지방이 타자화되는 경향이 일반화되었음을 비판하였다.3 그의 지적처럼 우리 사회는 지역에 관한 주체와 타자의 인지부조화가 심각한데 공간 리터러시가 미흡한 수준이라 하겠다. 로컬은 단순한 이미지나 표상이 아니며 내재적 시점의 구체적인 경험과 사건으로 구성된다.
어떤 의미에서 지방이라는 말은 벌써 폐기되었어야 할 단어가 아닐까? 지금이라도 과감하게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구체적인 것을 추구하는 문학에서 지방이라는 추상적인 용어의 남발은 텍스트의 질을 떨어뜨린다. 실상에 있어서 중심과 주변은 중층적이며 프랙털(fractal)과 같이 부분들과 전체의 다층적인 연관성을 지닌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체제를 하나의 틀로 활용하면서 지리학이 말하는 스케일을 겹쳐 볼 수 있다.4 세계(global)/지역(region)/국가(nation)/지방(local)이라는 지리학의 스케일은 그 모든 층위에서 중심과 주변의 형국을 반복한다. 일국 안의 로컬—서울/지방과 국가/지방을 구분하기 위하여 후자의 지방은 지금부터 로컬이라 칭한다—도 이와 같아서 장소와 사람, 사회와 이동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네 층위는 상호영향 관계에 있으며 중심과 주변을 변주한다. 마이클 크로닌(Michael Cronin)은 세계가 팽창하고 있다고 한다. 지구촌이라는 말이 지시하듯이 축소되는 세계는 실상 우리 시야의 문제일 뿐이며 시점을 줄이고 스케일을 축소할 때 얻게 되는 어떤 통찰력은 다양한 장소와 목소리가 있는 생활세계의 무한한 복잡성을 만날 수 있게 한다고 지적한다.5 세계화나 지역주의(regionalism) 등 거시 모더니티보다 생활세계를 탐문하는 미시 모더니티가 문학의 생성공간이라는 말이다. 백낙청은 “어디까지나 특정한 언어에 뿌리를 둔 국민/민족/지방문학이 세계문학의 기본을 이룬다는 사실이 오늘날 지구화를 주도하는 이른바 선진국에서 곧잘 망각되고 외면되는 현실”6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문학 생성의 기본 공간이 로컬과 로컬 경험의 발현인 로컬리티라는 사실이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2. 로컬리티를 발현하는 텍스트들
여기서 두가지 문제틀을 설정할 수 있다. 하나는 한국 자본주의의 하비투스(habitus)로 작동하고 있는 중심과 주변, 서울과 지방,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인식구조이고, 다른 하나는 미시적으로 로컬리티의 경험을 서술하면서 거시적으로 국가(민족)와 세계를 포괄하는 서술 방법이다. 현금의 한국문학에서 이 두가지 지향은 혼재되어 있다. 장소의 감각(sense of place)을 말하는 수준이라면 이는 지나치게 시적인 지향으로 협소해진다. 이보다 지리학과 존재론이 만나고 장소(topos)가 지정학과 접속하는 과정이 더 요긴한데, 필요충분한 텍스트와 만나기 쉽지 않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면서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 김혜진의 『9번의 일』, 김유담의 『탬버린』을 로컬리티의 서사로 읽을 수 있겠다.
로컬의 지속과 변화: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창비 2020)는 ‘영등포’라는 로컬을 무대로 이백만-이일철-이지산-이진오로 이어진 가족사를 중심에 두고서 가족 구성원과 사회적 관계를 지닌 사람들을 통해 동심원을 그려간다. 여의도의 숲과 유년 시절에 놀던 장소가 내려다보이는 “발전소 공장 건물의 끝 쪽에 자리 잡은 굴뚝 위”(8면)에서 노동자 이진오가 고공농성을 준비하는 데서 시작하여, 400여일의 농성을 풀고 복직했으나 ‘지방’으로 밀려나 아무런 일도 배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처해 다시 농성을 결의하는 데서 끝을 맺는다. 전체 18개 장으로 구성된 이 장편은 해고노동자의 복직투쟁을 전면에 배치하고서 과거를 소환하여 현재를 잇대는 서술을 전개한다. 시간으로 20세기 100년의 역사를 담고, 공간으로 영등포를 거점으로 인천, 해주, 대전, 부산, 의주 등 한반도 전역과 상하이, 만주 등을 시야에 아우른다. 이 소설을 가능하게 한 가장 튼튼한 바탕이 영등포라는 구체적인 로컬리티라 할 수 있고, 이동성(mobility)을 담보하는 철도를 주요 미디어로 삼아 서사의 벡터로 설정한 일도 주목하게 한다. 무엇보다 로컬리티의 지속과 변화를 매우 중층적인 시각으로써 구체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부여할 수 있겠다.
경인선 객차의 종점은 한강철교가 개통된 뒤에도 수년간 노량진이었다가 용산이 되었다. 그러나 경부선과 경인선의 접점이 영등포였으며 수십군데의 공장이 들어서며 산업화물이 늘어났고 경부선의 지선으로 출발한 호남선까지 지나게 되니 영등포역은 자연스럽게 남경성역이 되었다. 화물창고가 수십채로 늘어났으며 역 구내의 철로도 여러 선으로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공장지대와 철도공작창으로 연결된 철로가 영등포 시내를 관통하게 된 지 오래되었다. 경인선은 인천이 항만인데다 산업화로 공장지대가 늘어나 경부선의 끝이었던 부산에 다음가는 주요 화물수송로였다. 낮에는 물론이고 특히 객차가 운행되지 않는 야간에는 밤새도록 화물차가 왕래했다.(185면)
영등포의 위치를 철도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성 중심부와 인천 등 여러 지역을 잇는 결절지(nodal point)로 사람들의 이동이 빈번하고 유입과 이주가 많은 공간임을 말한다. 강화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4대를 이어 사는 이진오 일가는 철도, 부두, 방직, 금속, 철강, 공예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 집안을 형성해왔다. 이들이 정주한 샛말, 버드나무집, 철도관사와 그 주변의 마을과 길, 경관은 매우 구체적인 세부를 통하여 묘사된다. 가령 농성 중인 이진오의 조감적 시선에 의해 그려진 현재의 경관이나 그의 추억이 불러온 유년 풍경도 그러하고 한국전쟁이 끝난 뒤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샛말로 귀환하는 이지산의 눈으로 역전 중심가가 서술되는 과정은 내지 여행자의 시선에 포착된 미시적인 세부 읽기와 장소 인식에 육박한다. 그만큼 장소의 감각이 풍부할뿐더러 영등포라는 생활세계의 실상과 변화를 구체적 전체로 그렸다. 인용한 내용 외에도 이 소설에서 영등포의 크로노토프(chronotope)를 서술하는 대목은 거듭 나타난다. “수십호 정도가 채소를 기르며 살던 가난한 농촌이었지만” “경부선 공사가 착수되면서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기 시작했다”(45면)라는 1대 이백만의 견습공 시절부터 해마다 반복되는 홍수를 막기 위한 “용산과 영등포 일대에 제방”(89면) 건축, 영등포역을 중심으로 번성하는 시가와 공장지대의 형성 같은 도시확장의 과정을 알 수 있고, 영등포가 이러한 지리학적 조건으로 노동운동의 거점이 되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공장이 밀집된 영등포지역은 수만명의 직공과 이들 주변에 모인 일용노동자에서 가두노동자에 이르기까지 파악되지 않는 유동인구가 또한 수만명이”(350면)다. 경성과 인천이나 김포 사이에 존재하는 영등포의 반(半)주변부성은 지역적 활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이래서 영등포의 시공간은 이 소설의 몸과 같이 피와 살과 뼈가 된다. 작가가 경험적인 장소의 토대 위에 소설을 건축하였다.
로컬을 구성하는 세가지 기본 요소는 몸, 가족, 공동체이며, 여기에 집과 일이 있다. 로컬리티는 로컬에 사는 사람들이 장소와 행위를 통하여 형성하는 경험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험은 대개 이야기의 힘과 더불어 기억되고 전달된다. 이 소설에서도 이야기는 가족의 역사를 보전하는 매개이다. 이백만과 이막음의 입담은 하나의 내력이 되어 가족 구성원의 구술능력으로 유전된다. 막음이는 작화증을 보일 정도로 이야기하는 수행력이 뛰어나다. “손자 이지산은 아버지 이일철이 할아버지 이백만을 따라서 한강으로 물 구경 나가던 일을 여러번 들은 적이 있었고 증손자 이진오도 그것을 전해 들었다”(76면)라는 문장이 전하는 방식으로 가족과 공동체의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나아가 이진오가 굴뚝 위 농성 중에 페트병에 “‘깍새’ ‘진기’ ‘영숙’ ‘주안댁’ ‘금이’”(106면)와 같이 이름을 붙여두고 그/그녀의 이야기를 나누는 데서도 기억과 이야기하기의 충동은 소설의 플롯—특정 양식의 인간 이해 구성력—을 형성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작가는 이를 두고 “영등포를 중심으로 한 민담적 세상을 그려보려고”(‘작가의 말’ 616면) 한 의도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단순한 서술전략으로 보이지 않는다. 전지의 서술자가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차용하는 형식으로 객관을 유도하며 역사적 사실을 가족사와 결부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도록 한다. 인물과 사건의 경중에 따라서 에피소드나 행위를 요약하거나 설명함으로써 서술의 속도를 조절하기도 한다. 한편 프로타고니스트 일철과 이철 등의 행위자들에 대응하는 안타고니스트 최달영을 서술하는 구성에 진입하면 장면과 극적 제시를 통하여 긴박감을 드러내면서 인물을 입체적인 모습으로 형상화한다. 특히 이철을 중심에 두고 읽을 때 이 소설의 박진감은 더없이 크게 다가온다. 아울러 여성들의 다양한 삶과 뛰어난 주체성을 주목할 수도 있다. 이 소설에 나타난 다변화하는 서술 양상은 작가가 서사의 생산자임을 역력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서술에 개입하는 역사적 사실과 실존 인물들—이재유, 박헌영 등—과 경성트로이카에서 경성콤그룹에 이르는 노동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사의 결합은 작가가 말한 민담적 세상을 상회하는 문제성을 지닌다. 단순한 실감을 위하여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편집한 의도로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은 이진오 가족사와 그 주변을 서술하면서 역사적 인물의 행위를 그 위에 포개고 있다. 이진오가 말하는 “용접공 영숙이 누나”(9면)의 모델은 지금 복직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김진숙’으로 추정된다.7 이는 노동자들의 오랜 투쟁이 계속되고 있을뿐더러 노동의 현실이 더 나아지고 있지 못함을 역설한다. 이지산의 이데올로기적이자 신체적인 조건으로 1960~70년대의 근대화 과정에 괄호를 친 서술도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다. 비교적 가까운 현대사를 훌쩍 건너뛴 셈이다. 말하자면 세계경제에 편입한 한국 자본주의의 단계로 이월하였는데 이진오를 내세워 20세기 전반에 시작한 장구한 변혁, 혹은 영구혁명의 계속성을 말하고자 함이다.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져간다”(410면)라는 그의 말처럼 마치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배와 같이 과거로 밀려나지 않고서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는 삶과 역사의 여정을 서술한다.
『철도원 삼대』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가능한 범위에서 구체적인 지명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한편 여러곳에서 ‘지방’이라는 말을 쓴다. 가령 이진오를 말하는 자리에서 “맨 처음엔 유년기를 보낸 이곳 영등포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십년 가까이 일했고 그다음 십오년 동안은 남쪽 지방도시에서 일했다”(9면)라는 진술을 접하게 된다. 이는 수미상응하게 결말에서도 반복된다. 복직에 합의한 “그들은 서울에서 모여 고속버스를 타고 지방에 있다는 공장으로 찾아갔다”(612면)라는 대목이다. 서두에서 해고된 위치가 지방이라면 결말에서 복직을 위해 대기하는 장소도 지방이다. 본사가 있는 서울이 중심이라면 지방은 주변으로 노동소외가 만연하고 장차 소멸할 가능성조차 지닌다. 이는 분명히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가 영등포라는 로컬을 통해 여타 로컬 지역을 연계하던 상황과 다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지방이라는 말을 거의 주변과 가까운 의미로 쓰는데, 엄밀하게 말해 서울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을 의도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서울과 지방의 이분법이라는 통념을 깨트리면서 로컬의 시각에서 주변성의 본질을 구체화하는 문학적 과정을 제안하고 있다. 즉 새로운 문맥에서 공간 지배의 문제에 접근할 계기를 제공하고 과제를 제시한다. 자본의 중심주의 못지않은 운동의 중심주의도 존재하는바, 지방을 식민화하는 가운데서 희망은 미미할 수밖에 없다.
파편화하고 소멸하는 장소들: 김혜진의 『9번의 일』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에서 이진오는 석방된 후에 “합의에 따라 해고자 가운데 끝까지 버틴 열한 사람이 복직을 할 차례”를 맞는다. 이들은 “지방에 있다는 공장으로 찾아”가지만 “공장에는 녹슨 기계 몇대가 남아 있었고 다른 노동자들은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숙소라고 찾아간 곳은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연립주택이었는데 벽에는 곰팡이가 가득 피어나 있었고 비닐 장판이 젖혀진 방바닥은 군데군데 꺼진 곳도 있”는 상황과 맞닥뜨린다(612면). 사측의 복직 약속을 믿을 수 없는 이들이 할 일은 포기하거나 다시 투쟁하는 선택뿐이다. 이처럼 주변부로 유폐되는 노동자의 모습은 김혜진의 『9번의 일』(한겨레출판 2019)에서 더욱 확연하게 나타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인 ‘그’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주위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등장해도 ‘그’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만큼 노동의 주체로 인식되지 못한 인물임을 의도한 명명이다.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러 ‘9번’으로 불리게 되는 ‘그’는 “수리와 설치, 보수 업무를 담당하는 통신회사 현장팀에서 26년을 일했”(9면)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상하고 준비할 만한 시간이 주어진 적이 없었”(10면)는데 퇴직을 권유받는다. 소설은 바로 이와 같은 정황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의 이름이 없다 하여 평면적이거나 결정론적인 인물 설정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소설은 절제된 서술로 인물의 성격 변화를 제대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타자를 배려하고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지니면서 외부를 내부로 수용하려는 성품의 소유자이다. 이러한 인물이 자본의 횡포와 일하는 공간의 변화에 따라서 서서히 무감각, 탈감정의 인간형으로 변화하게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그’의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대비되어 인물의 성격화가 구체적이다. 가령 일찍 퇴사하여 부동산으로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하는 데 성공한 ‘한수’, 사측에 저항하다 자살한 ‘종규’, 합리적이면서 할 말을 하는 ‘상현’ 등이 ‘그’의 인간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하게 되는 서술은 모든 일을 시간으로 치환하는 자본의 논리와 간과되는 공간의 의미이다. ‘그’와 ‘그’의 아내가 변두리의 다세대 건물을 빚을 떠안고 무리하게 매입한 것은 “고등학생인 아들 준오가 대학을 졸업하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한적한 시골로 이사한 뒤, 그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느긋하게 생활하는 꿈”(13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직 권유에서 시작된 사측의 축출 공작은 무엇보다 이러한 노동자의 장소에 대한 희망을 먼저 와해시킨다. 그는 여러가지 조건들—다소 무모하게 산 건물에 수반한 빚을 갚는 일, 형편이 좋지 않은 본가와 처가에 대한 생활비 지원, 아들 준오의 학비, 자동차 할부금과 보험료, 연금 등—을 아내와 함께 해결하면서 도시탈출과 계급이동을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가 본래 업무와 무관한 직종으로, “출퇴근에만 세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의 “다른 지역 PIP센터로 출근하라는 지시”(30면)를 하고부터 그의 삶은 간단없는 고난 속에 빠진다. 이는 본사가 있는 데서 멀지 않은 곳에 주거공간을 가진 그로서 현재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나는 경험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소설에서 공간은 시간으로 표현된다. 로컬의 상이함과 차이는 시간으로 추상화되고 만다. 가령 처가는 “시외버스를 타면 두 시간 남짓 거리”(24면)이고 “고향 집은 차로 세 시간 거리”(43면)이다. 본가와 처가 모두 주변부에 위치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출퇴근에 세시간이 걸리는 새 일터도 중심에서 먼 거리에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곳에서 그는 고객센터에 소속되어 판매와 영업 일을 맡는다. 그는 “판매나 영업 업무가 지난 26년간 통신주를 매설하고, 전화선을 끌어오고, 인터넷 케이블을 연결하던 자신의 현장 업무와 무슨 연관이 있느냐고 따져 묻지 못”(61면)하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결국 저성과 관리대상자로 분류되면서 다시 “타 지역 상품 판매 부서”(64면)인 “터미널 근처 거점 판매센터”(65면)로 발령이 난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담당 구역이 대명, 상마, 석정, 마송, 갈산 등인 것을 보면 경기도 주변부임을 알 수 있다. 본사가 있는 서울로부터 더욱 멀어진 형국이다. 그는 회사의 의도가 그가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스스로 나가기를 바라는 데 있음을 안다. 그는 “소규모 공장들이 밀집한 산업단지”(75면)인 검단에서 이주노동자를 위시한 사람들과 친밀감을 형성하며 성과를 내지만, 회사는 판매 영업 외의 일을 했다는 구실로 “세 번째 업무촉구서”(108면)를 발급한 뒤에 또다시 “지방 소도시 시설1팀으로 발령”(125면)을 낸다. 여기서 지방이라는 말은 수도권을 벗어난 장소라는 의미로 추정된다. 겨우 사택의 방 한칸을 얻어 지내게 되지만 “30여 년간 상담 업무만을 해왔다는 황 여사”(137면)와 한 조가 되면서 업무의 양이 가중될뿐더러 황여사를 돕는 그의 배려가 도리어 회사의 표적이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대기발령자로 있다가 마침내 강제해고된다. 이즈음 그는 감정을 잃어버린다. 본래의 자아(I)를 상실하고 오로지 일자리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사회적 자아(me)가 비등한다. “감정이라고 할 만한 건 느껴지지 않았다. 고요히 차오르고 일렁거리며 자신에게로 혹은 타인에게로 흐르던 마음의 움직임 같은 것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그만두었다. 뭔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나 가능성마저 폐기하고 나자 내내 마음속에 들끓던 감정들도 잦아들었다.”(175면)
그동안 동료 노동자가 자살하고, 재개발 선전만 믿고 샀던 다세대 건물을 손실을 떠안고 처분하게 되었으며, 나빠진 가족경제로 부부관계도 소원해지고 친가와 처가와도 멀어졌다. 임금 삭감을 감수하면서 업무에 매달렸으나 일방적으로 면직되었으니 비정한 현실 앞에서 아무런 감정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여기다 사측의 제안을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오직 일자리를 지켜야만 한다는 생존의 논리가 그를 지배하면서 “노조에 가입하고 반년이 지난 뒤”(176면)에 역시 “지방 소도시”(179면)에 있는 “하청업체 소속으로 일”(177면)하게 된다. 여기서 그가 얻게 되는 소속과 이름이 “ 78구역 1조 9번”(181면)이다. 통신탑 설치가 주된 업무인데 이를 반대하는 마을 주민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어떻게 보면 그가 말년에 살려고 꿈꾸던 마을과 다를 바 없는 곳에서 그 마을을 파괴하는 일에 매달리는 형편이다. 그에게 공간은 도무지 향유할 수 없는 대상에 불과하다. 여기서 이 소설은 노동의 소외를 넘어 소멸을, 마을의 보전이 아니라 해체를 이끌면서 삶을 식민화하는 자본의 무차별 폭력을 드러낸다. 장소는 파편화되고 주변부 로컬은 노동자와 더불어 사라질 위기에 봉착한다. 이 지점에 이 소설의 문제의식과 한계가 있다. 한 노동자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자본의 폭력을 두드러지게 한 효과와 다르게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적 인식구조를 재생산한 측면이 있다. 매번 밀려난 일터도 삶과 경험의 현장인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이 축약되면서 서사가 도식화로 흐른 경향이 없지 않다.
만나고 갈등하는 로컬리티(들): 김유담의 『탬버린』
앞선 두 장편과 달리 김유담의 『탬버린』(창비 2020)은 단편집이다. 여기서 김유담의 소설을 주목하는 일은 그의 소설이 다층적인 로컬리티를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황석영과 김혜진이 중심에서 주변을 보는 시선을 지녔다면 김유담은 주변에서 중심을 바라본다는 차이가 있다. 아울러 중심과 주변의 로컬리티가 만나 갈등하고 충돌하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로컬 경험의 구체를 소환한다는 점에서 김유담의 가능성을 만난다.
먼저 노동자의 삶을 통해 살펴보면 등단작인 「핀 캐리(pin carry)」에서 “공고 3학년 때 수원에 있는 반도체 공장에 취직이 되었지만” “아들을 멀리 보내기 싫어했던 엄마의 만류 탓”에 “집에서 멀지 않은 막걸리 공장에 취직”(22면)한 주인공의 오빠가 있다. “이 지역에서 소문난 아마추어 볼링 선수”(13면)인 그는 배달노동이 끝나면 내기 볼링에 열중한다. 과도한 노동과 도박에 몰입하던 오빠가 끝내 교통사고로 죽게 되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나’는 “휴학하고 고향에 내려와 엄마의 곁을 지”키면서(14면) 오빠의 삶을 추적한다. 그리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 힘껏 굴려도 결국 같은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이 볼링공처럼, 매일 새벽 수백상자의 막걸리를 싣고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낯선 도시까지 가닿았다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오빠의 삶”(42면)을 이해하게 된다. 생산력이 떨어진 주변부 지역의 순환하는 일상에서 그가 유일하게 매달렸던 일이 볼링이었으리라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이러한 오빠에 대하여 중심부인 서울의 대학생인 ‘나’는 죄의식과 부채감을 느낀다.
「공설운동장」에서는 밀양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방대 출신, 아직 제대로 된 직장도 잡지 못한 서른 줄의 남자”(71면)인 학원강사 L과 “공고 3학년이 되던 해, 안산에 있는 컴퓨터 제조 공장에 취직”한 ‘나’의 동생이 등장한다. L은 ‘나’와 연애하는 사이이고 “동생은 이국의 남자들이 지나다니는 길목 사이로 고양이 울음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오는 어두운 골목의 반지하 방에서 ‘리나’라는 이름의 필리핀 여자아이와 살고 있”다.(73면) 이들은 각각 가족 부양 등의 이유로 주변부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이주노동자들이 대거 몰려와 사는 또다른 주변부 공장으로 이동한다.
김유담의 소설에서 주변부 로컬은 「공설운동장」이나 「두고두고 후회」에 등장하는, 실패하고 무능한 아버지를 닮았다. 달리 말해서 기대와 희망이 고갈된 공간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때 인물들은 주변부 로컬로부터 탈주하려는 욕망을 표출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내재한 중심주의를 반영한다. 하지만 “떠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공설운동장」 82면)므로 일방의 욕망으로 편향되기보다 「핀 캐리」와 「공설운동장」이 보여주듯이 이동과 귀환을 반복하거나, 「가져도 되는」 「탬버린」이 이야기하듯이 서로 다른 로컬 경험(로컬리티들)의 차이가 만드는 갈등, 대립, 충돌을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가져도 되는」은 서울의 중심인 강남 로컬의 하비투스와 주변부 지역 로컬의 그것이 만나는 과정을 소비와 관계의 측면에서 다루었다. “지방의 소도시에 나고 자란 나”(205면)와, 역시 “지방에서 올라와 넉넉지 않은 형편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강남 아이들이 유난히 많은 학과 분위기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207면) ‘인희’는 “동류(同類)의 인간에게 느끼는 호감과 불편함이 뒤섞인 감정을” “사랑이라 확신”(217면)하며 결혼한다. 이들의 대척에 있는 인물이 ‘조명아’인데 생활의 모든 점에서 다르다. 특히 소비에 있어서 ‘기본’을 중시하는 인희와 달리 조명아는 ‘기분’을 중시한다. “서울에서 기본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 갖춰야 하는 조건들 앞에서” 인희 부부는 “자주 좌절했지만, 어떻게든 버텨나가”(238면)려 한다. 그러나 삶의 조건과 취향에서 확연히 다른 신분인 이들 부부와 조명아의 차이는 실제 현실에서 계급의 재생산으로 귀결된다. 중심부인 서울 내에서 또다른 형태의 중심과 주변의 구조가 반복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재생산되는 계급도시의 면모가 뚜렷하다. 즉 중심부는 주변부를 종속시키며 주변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 다시 중심부의 하부를 구성한다. 물론 이러한 진단이 일반화될 수는 없다. 「탬버린」이 보여주듯이 상호 문화접변이 가능하고 「우리가 이웃하던 시간이 지나고」가 말하듯이 서울 안의 주변부 문화도 다층적이다. 이처럼 로컬리티는 중심과 주변, 서울과 지방의 이분법으로 설명될 수 없다. 다양한 로컬리티의 만남과 경합이 있는데 소설이 ‘조명아’와 같은 강남 로컬을 대변하는 인물을 중심에 둘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중심에서 생성적이고 창조적인 가치와 문화가 발현될 가능성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멀고도 가벼운」에서 “지방 출신인 나를 앞에 두고 지방은 절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은호의 무신경함”(192면)이 드러나듯이 우리 사회에서 지방이라는 말은 매우 추상적인 인식일뿐더러 왜곡된 함의를 지닌다. 김유담이 이러한 문제의식을 포착한 일은 그동안의 한국문학의 무신경을 자극한 일면이 있다. 물론 “쇠락한 시골 마을이”(196면) 대안일 수는 없다. 중심/주변의 이분법을 가로지르는 탈주선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고향과 중심도시 사이에서 흔들리고 분열하는 자아를 창조적인 인물로 형상화하는 일이 과제이다. 이는 이분법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데서 더 나아가 중심과 주변의 얽힘으로 발생하는 의미를 구체적인 인물의 삶을 통해 구현하는 데서 찾아질 수 있겠다. 적어도 이러한 가능성의 단서를 김유담이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며, 더 진전된 규모의 서사를 통하여 이를 확장하리라 믿는다.
3. 코로나19와 지역화의 과제
코로나19가 초래한 장기 비상사태는 로컬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신체적 개인이 삶을 영위하고 활동하는 장소인 로컬이 방역과 안전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이동이 적은 전근대의 삶이 로컬에 기반했다면, 근대화와 세계화는 로컬로부터 이동하고 변화하는 삶을 추구했다. 산업화와 도시화를 동반한 근대화는 자본과 권력과 인구의 도시 집중을 수반하면서 로컬의 변화를 초래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지역문제는 부차적이었다. 90년대 이후에 증폭된 젠더와 인권, 정의 등의 논쟁에 비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가운데 공간 문제가 한국사회에서 주요모순으로 발전했다. 황석영과 김혜진과 김유담의 소설이 보여주듯이 주변부 로컬은 정체와 소멸의 일로를 가고 있다. 여기에 그동안 한국문학이 간과한 지점들이 있다. 과연 ‘모순’이라는 관점에서 다층적인 로컬리티들을 주목하였는가?
이윤 획득의 효율성에 최적인 시스템은 중심에서 장치들의 제어가 가능한 체제이다. 세계화가 이와 같은 세계체제를 지향하는 것처럼 한국도 일국 수준에서 서울 중심의 일극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이에 맞서 지역화(localize)가 하나의 대안이다.8 지난 20세기 후반부터 진행된 세계화를 멈추고 지역으로 회귀하는 일이 순서다. 이는 팬데믹이 가져온 변화와도 직결된다. 세계적인 분업 시스템에 제동이 걸리면서 생산과 소비의 지역화가 요구되고 있다. 지역화는 지금의 팬데믹이 세계화와 연동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필요한 일이고 앞으로 지속 가능한 세계를 위한 방안으로도 요긴하다. 지역화를 일찍부터 주창하고 강조해온 헬레나 노르베리호지(Helena Norberg-Hodge)는 “지역화란 경제를 분권화하여 지역 사회와 지방, 국가의 자치를 더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지역 사회가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되도록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거리를 줄이고, 기업이 독점하고 장악하는 글로벌 시장과 로컬 시장의 균형을 잘 잡자는 뜻이”라고 말한다.9 가능한 범위 내에서 로컬 생산이 가능한 생산체계를 만들어가자는 제안인데 ‘풀뿌리 운동과 정책 변화’를 함께 요구한다.
확실히 팬데믹은 그 대처에 있어서 국가의 경계를 분명하게 했다. 그렇다고 지역화가 새로운 국가주의의 도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역화는 국가주의 경향을 경계하면서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서 놓여나 새로운 시스템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일국 내의 중심주의 체계를 극복하는 수행을 병진한다. 팬데믹으로 드러난 문제는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자본주의 문명 전반에 대한 성찰과 전환을 요구한다. 당면한 현실은 경제위기가 초래한 생존의 불평등으로 얼룩지고 있다. 운송, 청소, 판매, 계산, 돌봄, 현장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을 떠올려볼 수 있다. 아울러 재난의 공포는 혐오와 차별이라는 윤리 위기를 만연하게 하는바 종족, 세대, 젠더, 지역 간에 발생하는 혐오와 차별을 금지하는 방책이 요긴해진다. 또한 공공의료를 강화하고 지역적이고 분권적인 정책을 확대해야 한다. 팬데믹에 맞서기 위해서는 세계적 규모의 방역 연대도 필요하지만, 생계와 구체적인 삶의 현장인 로컬의 지위 상승도 요청된다. 이웃을 배려하고 함께 살아가는, 민주적 과정을 활성화하는 장치들을 필요충분할 만치 고안할 필요가 있다.10 단지 방역의 지역화만 계기가 아니다. 중심에 흡수되거나 중심을 모방하는 문화가 극복되어야 한다. 이는 땅과 시간과 사람을 지역으로 돌려주는 일이다. 다시 지역화하는 일은 그동안 외재화했던 사물을 내재화하는 과정이다. 결국 우리의 몸과 가족 그리고 공동체가 있는 로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풀뿌리 민주주의 없는 민주주의가 환상이라면 로컬 없는 중심의 변혁도 온전할 수 없다. 이를 위한 문학의 길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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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스다 히로야는 일본사회를 인구론의 관점에서 ‘지방소멸’의 문제로 분석하고 그 생존전략을 모색한 바 있다. 마스다 히로야 『지방 소멸』, 김정환 옮김, 와이즈베리 2015. ↩
-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졸고 「주변부 지역문학의 위상」(『오늘의 문예비평』 2003년 가을호)과 「지역문학: 문학적 생성공간으로서의 경계영역」(『지역문학과 주변부적 시각』, 신생 2005)을 참조할 수 있다. ↩
- 손남훈 「지역이라는 타자와 지역감수성」, 『창작과비평』 2018년 겨울호. ↩
- Colin Flint and Peter Taylor, Political Geography : World-Economy, Nation-State and Locality, Pearson Education Limited 2007, 29면. ↩
- 마이클 크로닌 『팽창하는 세계』, 이효석 옮김, 현암사 2013, 31면. ↩
- 백낙청 「세계화와 문학: 세계문학, 국민/민족문학, 지역문학」,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비 2011, 107면. ↩
-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인 김진숙은 최근 다시 복직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녀의 투쟁이 지닌 의미는 안영춘 「김진숙의 두 목소리」(한겨레 2020.10.21)를 참고할 수 있다. ↩
- 이와 관련해 세르주 라뚜슈(Serge Latouche)가 말한 8R의 과제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한 운동의 전제 조건으로 재평가(reevaluate), 재개념화(reconceptualize), 재건축(restructure), 재지역화(relocalize), 축소(reduce), 재사용(reuse), 재생(recycle), 재분배(redistribute)를 들었다. 마이클 크로닌은 이 모두를 줄여서 말한다면 그것은 ‘재지역화’가 된다고 한다. 마이클 크로닌, 앞의 책 124면. ↩
-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로컬의 미래』, 최요한 옮김, 남해의봄날 2018, 65면. ↩
- 장진범 「민주주의자로서 비상사태를 상대하기」, 추지현 엮음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돌베개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