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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생명, 노동, 돌봄의 문학

공선옥 권여선 조해진 작품을 중심으로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 등이 있음.

cyndi89@naver.com

 

 

1. 코로나19 이후, 세상을 바꾸는 목소리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지구에서 다른 생명체와 공존하는 존재임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기후변화와 산업재해를 비롯해 그동안 축적되어온 각종 불평등과 모순은 여성과 소수자를 포함한 우리 사회의 취약한 존재들에게 증폭되어 다가왔으며, 극복을 위한 불가피한 노동도 이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생명 재생산과 돌봄의 위기 상황은 기존 자본주의 성장 모델로는 이 세계의 삶을 더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강력한 문제의식을 환기한다.

생명과 노동, 돌봄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문명전환의 토대로 삼으려는 제안과 노력은 오늘날 인문학 전반에서 사유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특히 페미니즘의 영역에서 그것은 돌봄노동의 사회화, 돌봄의 민주화 등의 문제와 연결되어 적극적인 대안체제의 모색을 동반하고 있다. 백영경은 “인간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며 관계 맺고 살아가는 방식 자체의 변화”로서의 돌봄가치를 강조하면서, 페미니스트 탈성장론에 기반한 체제전환의 원리로서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이 절실함을 역설한다.1 이때 돌봄의 대상과 주체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사유가 필요한데 특정한 성별과 계급에 집중되지 않는, 시민적 덕목으로서의 돌봄가치가 공유되어야 한다. 조기현은 “돌봄이 필요한 자와 돌봄을 수행하는 자, 돌봄 노동자가 모두 누군가의 공백을 누군가의 희생으로 메”우는 현실의 악순환을 끊고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돌봄을 논의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2

팬데믹 시대에 절실한 공동체적 가치로 요청되는 돌봄윤리는 그동안 문학의 영역에서 논의되었던 여성성, 모성, 생명의 의미를 다각도로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돌봄노동, 돌봄윤리와 직접적으로 연동되는 모성만 하더라도 가부장제의 압력 속에서 구성되고 재생산되는 역할로만 제한적으로 해석되기 어렵다. 여성의 삶과 경험에서 얻어진 관계성과 보살핌, 배려의 경험을 존중하되 그 고유한 자원을 배타적인 성별 문제에 국한하거나 가부장체제를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동원하지 않아야 한다. 캐럴 길리건(Carol Gilligan)의 표현에 기대면 돌봄(보살핌)의 윤리는 가부장적 관점에서 보면 여성적 윤리이지만,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윤리이다.3 그의 말대로 돌봄과 보살핌은 여성뿐 아니라 인류 전체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인바, 이를 위해서는 ‘나’ 역시 돌봄의 대상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단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타인에 대한 희생과 헌신으로 매몰되지 않으며 나와 세계의 관계 속에서 균형을 취할 수 있는 돌봄가치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돌봄의 민주주의, 돌봄의 사회적 힘에 대한 사유는 현실에서는 물론 문학작품에 재현되는 여성들의 연대와 협력을 읽어낼 때도 세심하고 복잡한 통로를 요구한다. 작품 안에서도, 실질적 삶에서도 가부장적 제도의 음모와 기획을 폭로하는 것만으로 여성들의 개별적 차이가 간단히 극복되거나 연대가 성립할 리 없으며, 그러한 가상적 연대는 진정한 사회적 실천력을 갖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여성과 소수자의 문제를 생각할 때 차이와 경계를 급진적으로 허무는 돌봄공동체의 구상 또한 흥미롭되 면밀히 짚어볼 지점이다. 최근 자주 논의되는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술루세’(Chthulucene) 개념과 탈가족화된 돌봄의 공동체를 뜻하는 ‘친족 만들기’(making kin) 개념은 종의 차이를 초월한 급진적 해체의 방식을 통해 자본주의체제 극복을 구상한다.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사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해러웨이의 해체 전략은 대담하고 초월적인 비유를 통해 시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이 있다. 그런데 이때의 ‘여성’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몸의 구체성에 대한 초월은 현실 속에서 감당하고 관계를 맺어야 하는 종들 사이의 차이와 갈등 관계를 무화하기 십상이다.4 종차를 초월하는 관계성을 앞세우는 것은 김미정의 지적대로 “모든 존재에 상존하는 불평등과 모순을 균질화하는 측면이 있는 포스트휴먼 논의”와 더불어 “종을 초월한 관계성의 또다른 진짜 문제, 그 압도적이고 가혹한 비대칭성은 거의 고려되지 않는” 추상적인 해법에 그치기 쉽다.5

관념적인 해체론이 쉽게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학작품이 다루는 성별의 모순, 생명, 노동의 문제는 섬세한 형상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여성의 서사 역시 가부장제의 압력 속에 구성되는 굴절의 지점과 동시에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저항성을 동시적으로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공선옥, 권여선, 조해진의 최근 소설을 통해 개별적 삶의 차이를 보존하면서도 공동적인 관계를 열어갈 수 있는 문학적 상상력의 가능성을 짚어보려고 한다.6 이들의 작품은 지금 현실에서 주목되는 생명과 노동, 돌봄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주조하고 있다. 특히 이들 소설은 여성적 삶의 곤경을 감당하는 당사자의 목소리를 견지하면서도 도식적인 성별 형상화의 한계를 벗어나는 개성적 인물들을 보여줌으로써 눈길을 끈다.

 

 

2. 역사 속 생명과 모성: 공선옥 소설

 

공선옥의 「은주의 영화」는 인물들의 시점을 자유롭게 오가며 독특한 목소리의 발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역사 속 여성의 삶과 현실을 핍진하게 다루어온 공선옥 소설은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창비 2013)와 『꽃 같은 시절』(창비 2011)에서 현실과 환상, 산 자와 죽은 자,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허무는 서술 방식을 시도해왔다. 이 작품 역시 공선옥 소설 안에서 지속적으로 변주되는 5·18 이야기를 꺼낸다는 점에서 언뜻 익숙하게 보이지만, 인물의 내면에 저장된 고통스러운 기억을 불러내는 소설의 재현 방식에 대한 현재적인 고민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소설에서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을 가로지르는 장치로 쓰이는 것은 ‘카메라’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선물해준 캠코더를 계기로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게 된 ‘나’(은주)는 광주에 사는 이모(상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지만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답답한 일상을 보내던 나에게 상희의 가려진 삶이 첫번째 영화의 소재가 되어준 것이다. ‘나’는 카메라를 통해 상희가 5·18 때 놀라서 쓰러진 이후 다리를 절게 된 사연, 그리고 이후 상희가 세든 집 옆방에 살았던 아이 철규의 죽음이라는 두가지 이야기에 접근하게 된다.

상희와 철규를 중심으로 꾸려진 이야기의 구성 방식은 역사 속 5·18의 현장을 정면으로 재현하기보다는 상황에 연루되어 상처 입고 살아가는 ‘이후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5·18 당시 시내와 떨어져 있던 상희네 집에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쳐 함부로 장독을 깨고 닭과 개들에게까지 총질을 하며 난동을 피운다. 상희는 그런 군인이 자신을 돌아보며 ‘혀를 날름거리는’ 순간을 보고 기절한다. 이 장면은 상희가 다리를 절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동시에 폭력적 참사가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에게도 미치는 정신적 충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쓰러진 상희에게 오빠와 여동생은 “우리 닭만 죽은지 아냐, 바보야, 우리 장꽝만 깨진지 아냐, 멍청아”(91면) “군인들이 지랄하는 것을 똑같이 봐놓고도 누구는 멀쩡한데 누구는 뭣이 어쨌다고 막 몸이 다 굳어불고 그러냐? 나도 봤어, 나도 봤다고”(92면)라고 소리치지만 이들도 상처를 받기는 마찬가지다.

직접적으로 자신의 육체에 손상을 입지 않은 사람들도 똑같이 정신적 외상을 입은 학살 장면은 5·18을 둘러싼 기록과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핵심적이다. 무고한 시민들을 거리에서 총과 칼로 진압하는 것이나 시민의 주거지에 침입하여 함부로 살아 있는 동물들을 죽이는 장면은 폭력의 참상과 사건의 강력한 현재성을 전달한다. 다리를 절게 된 상희는 자신의 마음과 몸에 새겨진 트라우마로 인해 평생 사람들의 구설수와 희롱에 시달린다. 상희가 카메라 앞에서 음복하며 풀어놓는 고통스러운 사연은 그녀가 집 나간 여동생 상순 대신 조카인 ‘나’를 키운 이야기, 그리고 그 시절 만난 옆집 여자 박선자와 그의 아들 철규를 잠시 보살피게 되는 이야기로 연결된다.

소설에서 폭력과 학살에 대한 끔찍한 공동적 기억은 카메라 안에 울려퍼지는 철규의 목소리를 통해 현재적인 것으로 연결된다. 상희와 철규 엄마 선자에게 소년 철규의 죽음은, 당시 고문에 시달리다 의문의 죽음을 맞은 조선대 학생 이철규의 죽음과 연관된다. 엄마가 집을 비운 가운데 학교에 안 가고 산을 헤매던 철규는 우연히 이철규를 추적하는 사람들에게 쫓겨 추락사하게 된다. 두명의 철규가 죽음을 맞이한 현장에서 “우리 철규는 어떻게 죽었는지, 열한살 우리 철규의 죽음을 밝혀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130면)다는 선자의 부르짖음은 아들 철규와 대학생 철규의 죽음이 한 시대에 얽힌 공동체의 사건임을 알려준다.

이처럼 카메라를 통해 5·18에 얽힌 개인과 사회의 공동적 기억을 추적하는 재현의 방식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고, 중심 사건과 주변 사건을 구분하는 통상적 역사의 기록에 저항한다. 카메라 안에서 살아 있는 듯한 철규의 음성은 상희 이모, ‘나’, 철규 엄마를 한자리에 불러 모으며 은폐된 기억들을 생생하게 풀어헤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압도적인 장면은 카메라 앞에서 상희가 숨겨두었던 끔찍한 성폭력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이다. 상순과 선자를 대신해 ‘나’와 철규를 보살피던 상희는 아이들과 바다를 구경하러 여행길에 나섰다가 섬 남자들에게 강간을 당하게 된다. “다리를 절룩이는”(124면) 여자라며 희롱당하고 결국 끔찍한 폭력을 겪은 상희는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아이들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철규가 나를 살렸어. 내가 숲에서 나왔을 때 철규가 은주를 업고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철규는 울지 않았고 은주도 울지 않았다고. 나도 울지 않았지.”(125면) 어린 ‘나’를 업어준 철규의 모습은 아이들을 떼어놓고 남자들에게 끌려들어가는 여성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참담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 무시무시하고 묵직한 장면은 관찰자이며 기록자인 ‘나’를 통해 이 역사를 마주하는 독자들 역시 5·18 이후의 삶에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소설이 특히 주목되는 것은 여성에게 드리워진 통념적 ‘모성’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해체해놓는 지점이다. 아이를 제대로 건사할 수 없었던 상순과 선자의 상황은 특별히 옹호되거나 혹은 비난받지 않으면서도, 각자가 엄마로서 느끼는 죄책감과 괴로움으로 자연스럽게 묘사된다. “내가 그때 집 나가고 싶어서 나갔냐고오. 당신이 조선대 학생 이철규 잡으러 간다고 핑계 대고 집에 안 들어왔잖아”(100면)라는 상순의 하소연이나, “돈 번다는 핑계 대고 젊은 삭신이 애먼 사랑에 눈이 멀어서, 지 새끼가 학교를 가는지 밥을 먹는지 몰랐다고”(123면)라는 선자의 자책은 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어머니 역할에 대한 힘겨움과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자식에 대한 책임감을 진솔하게 드러낸다. 상희가 이들 대신 철규와 ‘나’를 돌보게 되는 맥락도 마찬가지다. 철규를 잃은 선자에게 “자네 안 들어오는 동안 우리한테 그런 일도 있었다고. 그러나 그것은 암것도 아니라고, 살았으면 된 거라고. 박선자야, 그냐, 안 그냐”(125면)라며 상희가 건네는 말은 자신의 고통을 축소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위로하는 이웃의 마음을 보여준다. 이는 폭력적 현실을 겪는 여성과 약자가 그 속에서도 서로를 돌보는 과정을 어떤 과장 없이 담담히 보여준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의 어린 시절까지 연루되는 기억의 서사는 과거와 현재를 순식간에 가로지르며, 아이를 지키고 약자를 돌봐온 여성의 삶이 거쳐온 지난한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인물들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뒤섞는 이러한 재현의 방식은 각 인물의 삶을 흔들리는 카메라로 담아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카메라 바깥에서는 인물들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없고 그들이 경험한 시공간으로 빨려 들어가야만 재현되는 세계, 이 순간 기록자와 증언자는 함께 쓰고 체험하며 그 시간을 살아내는 공동의 운명을 갖게 된다. 소설은 피해자의 참혹한 내상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에 갇히지 않으려는 생존의 분투를 통해 통상적인 증언과 재현의 기록에서 벗어나는 감동을 준다. 그런 점에서 결말에서 툭 끊기듯 제시되는 두 철규의 사연은 그 전말을 밝히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이야기의 시선은 ‘은주의 영화’가 상순, 상희, 선자 그리고 그 시절을 살아온 ‘모두의 영화’임을 폭넓게 입증한다. 「은주의 영화」가 고민하는 당사자성과 재현의 문제 역시 공동의 기억 속에 힘겹게 모이고 해석되는 방식을 통해 기록의 상투성을 벗어나게 된다.

 

 

3. 몸의 귀환, 감각의 회복: 권여선 소설

 

최근 청년세대의 현실을 다룬 많은 작품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세대적 불평등에 대한 감각과 이로 인한 다양한 사회적 소통의 곤경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노동자들의 대체 및 폐기 가능성을 강화하는 자본주의체제의 재생산 방식은 불평등 격차의 심화와 더불어 이에 상응하는 다양한 분노와 절망의 감정을 강화한다. 한기욱은 이러한 자본의 수탈 방식이 대다수 시민들을 정동적으로 만들게 되는 시대적인 맥락과 그것이 문학에 투영되는 양상을 면밀하게 살핀 바 있다. 이 논의에서 주목되는 것은 상투성에 매이지 않으면서 구체적인 현실을 포착하는 정동을 내장한 문학적 사유의 힘이다.7 권여선의 「손톱」 역시 경제적 불안에서 비롯된 감정적 충동과 분노를 담아냄으로써 현재의 청년현실이 생성하는 문제들을 절실하게 환기한다.

현실에 분노하는 주인공 소희의 상황은 문자를 통해 전달되는 엄마 -언니의 서사와 대비되어 극적 긴장을 이룬다. “뭐든 한 방에 되는 건 없어, 소희야. 한 푼 두 푼 차근차근, 응?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으는 거라고 돈은”(68면)이라고 소희를 가르쳤던 언니 본희는 무참하게도 소희의 돈을 가지고 도망가버렸다. 소설에서 휴대폰 문자의 형식으로 전달되는 본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빚의 악순환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엄마와 언니가 각각 빚을 떠넘기고 간 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줄어들지 않는 채무의 상황은 소희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든다. 소희가 갇혀 있는 노동의 시간은 오로지 모든 것을 ‘빚 갚기’의 시간으로 소모하게 한다.

“이 년마다 보증금을 오백만원씩만 올려도 대출금 갚는 건 두 배로 늦어지고 월세를 올려도 마찬가지다. 처음 계획대로 갚는다 해도 스물네 살 여름에나 다 갚을 수 있는데, 그 두 배가 걸리면 스물일곱, 스물여덟 살이나 되어야 한다. 그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72면)라는 소희의 초조와 분노는 급기야 손톱이 깨져나가는 사고를 통해 감정적 폭발을 맞게 된다. 엄마와 언니를 내심 기다리던 그녀는 “내가 어쨌다고? 내가 뭘, 뭘, 뭘? 뭘? 뭘? 뭘? (…) 엄마 없이도 살았고 언니 없이도 사는데 그깟 손톱 없어도 된다. 됐다 뭘, 됐다고, 안 와도 된다고,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오지 말라고”(73면)라고 부르짖는다.

소희가 채무 상환을 위한 기계적 노동을 수행하려면 몸의 통증과 감각에 무뎌질 수밖에 없다. 손톱이 깨져나가는 고통은 그러한 시간에 맞서는 신체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고단한 삶을 사실적으로 제시하는 것에서 나아가 황폐한 현실에 비쳐드는 강렬한 생존감각을 주시함으로써 다른 청년서사들과 차별점을 만들어낸다. 엄마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어본 적 없는 소희는 직장동료가 자신의 어머니와 나누었다는 평범한 이야기를 듣고 순간적으로 손톱을 부러뜨리게 된다. “손톱 절반이 뒤로 꺾이고 살이 찢”(54 ~55면)기는 체험을 하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눌러왔던 깊은 분노를 발견한다. 생살을 벌겋게 드러내며 손톱을 뜯어버리는 장면 역시 노동과 감정을 징발하는 기계적 삶에 대한 강한 분노를 드러낸다.8 축적과 강탈, 폐기의 시간에 대한 강한 분노를 보여주는 이 소설에서 주목되는 것은 ‘자신을 돌보는 감각’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손톱과 살이 뜯겨나간 고통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달려온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고르게 한다. 이때 몸을 관통하는 고통의 감정과 감각은 무자각적인 노동의 질서에 길들여지지 않는 자연의 세계를 환기한다.

부서진 손톱이 가져온 통증의 감각과 빛의 시간은 고통스러운 채무의 시간을 깨고 살아 있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찌르는 듯 따스한 빛, 강물이며 건물이며 만물이 스스로 빛나게 하는 빛, 무자비하면서 공평하고 무심하면서 전능한 빛” “엄지손톱 절반 가까이를 부러뜨리고서야 맛볼 수 있었던 한낮의 햇빛”(53면)에 대한 감각은 휴대폰 매장에서 소희가 우연히 만난 할머니가 건넨 호의의 말을 통해 새로운 감정적 파동을 만들어낸다.9

한 존재와 다른 존재의 사이에서 공유되고 모방되는 감정의 힘은 생명 존재가 본래적으로 간직한 역량의 시간을 발견하게 한다. 우연히 만난 익명의 존재가 보내는 따뜻한 눈빛에 감응할 수 있으려면 그 자신의 감각 역시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소희가 간직하고 있는, 언젠가 언니가 돌아와 함께 살게 되리라는 희망은 그 자체로도 귀중한 삶의 숨구멍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살고자 하는 존재가 마땅히 꿈꿀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하고 현실적인 소망이기도 하다. 이렇듯 소설이 비관 속에서도 놓치지 않는 강렬한 생존의 감각은 어둠 속에 가라앉은 노동의 시간을 전환하는 희미한 틈새가 되어주는 듯하다.

 

 

4. 갈등과 연대: 조해진 소설

 

조해진의 「하나의 숨」은 현장실습생이 겪는 산재사고와 부당한 노동착취의 현실을 다룬 작품이다. 작가는 최근 한 칼럼을 통해 “어느새 무감한 소식이 되어버린 노동자의 죽음을 끊임없이 글로 환기시키고 불편하게라도 되새기게 하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에게 주어진 최후의 권리이자 의무”10임을 환기하며 코로나19 이후 더욱 악화된 사회적 약자들의 노동 문제를 이야기한 바 있다. 칼럼에 인용된 은유 작가의 책에 나온 것처럼 사회에 나와 부당한 노동착취의 현실을 겪는 십대 청소년들은 “우리 사회의 가장 열악한 부분을 최전선에서 만나”고 있는 사람들이다.11

특성화고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는 ‘나’가 담임을 맡은 학생 ‘하나’는 회사 현장실습 과정에서 사고를 당하고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다. 2개월 후 교직 계약이 종료되는 ‘나’는 회사 생활을 힘들어했던 하나에게 어떻게든 현실에 적응하라고 권했던 사실 때문에 괴롭다. 인물들이 처한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노동의 세계는 여성노동의 문제로도 공통점을 지닌다. ‘나’의 기간제 교사 생활과 결혼 상대인 기현의 어머니가 과거에 겪었던 공장노동은 미성년자의 가혹한 노동현실과 교차하면서 타자를 향한 돌봄과 연대가 쉽게 구성되기 어려운 현실의 중층적 문제를 리얼하게 드러낸다.

소설은 주인공이 스스로 비정규직이라는 자신의 생존현실에 얽매여 ‘똑같은 선생님’으로서 하나에게 의지가 되어주지 못한 사실을 아프게 환기하는 과정을 찬찬히 따라간다. 그녀는 기현의 어머니가 털어놓는 과거 이야기를 들으면서 윤리적 자책감을 더하게 된다. 젊은 날 편직물 공장에서 매일 열다섯시간씩 일하며 아랫배를 차이는 심한 폭력까지 겪었다는 기현의 어머니는 학생의 사고 소식을 듣고도 지금 현실은 그럴 리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하긴, 요즘이야 공장에서 다칠 일이 어디 있겠어. 보호장비 다 있지, 누가 때리길 해, 쓰러질 때까지 일을 시키길 해. 우리 때랑은 다르지. 완전히 다를 거예요, 그죠?”(209면)라는 기현 어머니의 말은 주인공이 하나에게 “남의 돈 받는 게 원래 쉽지 않아. 그건 남들도 다 똑같아, 하나야” “하나야, 좀 참아봐”(201면)라고 권했던 말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삶은 이전 세대와는 또다른 방식으로 불평등과 억압이 가중된 노동현실을 드러낸다. 지속적인 근로빈곤 상태에 놓인 청년들은 부모 세대의 계층 격차가 고스란히 세습된다고 느끼며, 불평등을 ‘공기’처럼 느끼고 살아간다.12 특히 특성화고의 학생들이 사회현장에서 겪어야 하는 부당한 감정적 모욕과 노동착취에는 젊은 세대가 경험하는 다중의 불평등 문제가 압축되어 있다.

각기 다른 세대의 여성들이 겪는 참담하고 불안한 노동현실의 문제는 ‘돌봄’과 ‘연대’가 처한 실질적 곤경을 드러낸다. 이들이 놓여 있는 삶의 현장은 사회적 약자들을 궁지로 내모는 자본주의체제 특유의 착취 구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지적했듯이 ‘강탈에 의한 축적’이 강화된 최근의 자본주의체제는 더 높은 수익을 창출하는 통로로 노동시장을 활용하면서 사람들에게 빚을 지우고, 쓸모없어진 인력을 단숨에 폐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몸통을 부풀린다. “부채가 하도 어마어마해져서 미래의 가치생산으로 그것이 상환될 가망이 없을 때 부채노역, 부채노예 상태가 지배”13하는 삶 속에서 현재의 시간은 가볍게 휘발된다.

주인공과 기현의 어머니가 각자의 자리에서 갈망하는 ‘더 나은 세계’는 현재를 저당 잡혀야 꿈꿀 수 있는 세계이다. 그것은 레나타 살레츨(Renata Salecl)이 말한 바 있는, 자본주의사회가 그 특유의 동력으로 가동시키는 선택의 불안과 환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14 이같은 세계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면 언젠가 자신만은 안전한 자리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불투명한 희망으로 사람들을 내몬다. 사회의 구조나 타인의 삶으로 시선을 돌리기 어렵게 만드는 이러한 미래의식은 존재들을 끊임없는 강박과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자신의 직업적 위치에 한계를 느끼며 체념 상태에 빠져 있는 ‘나’ 역시 하나의 사고에 윤리적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자기보전에 급급하다. 그녀는 하나의 어머니 앞에서 계약기간이 이제 2주밖에 남지 않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간접적으로 호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하나에게 던진 말에 죄책감을 환기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 소설이 던져주는 핵심적인 고민은 주인공이 느끼는 혼란스러운 심리적 갈등에 있기보다는, 조금만 더 참고 견디라는 무책임하고도 방관적인 희망의 전언이 가리고 있는 참혹한 현실에 있다. 열심히 살면 그 구조를 탈출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속에서 묵과되는 현재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해변에 가고 싶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고, 학교로 돌아오고 싶은 하나의 현재적 꿈은 결코 유예될 수 없다. “샘, 저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201면)라는 하나의 물음은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주인공의 마음에서 풀려나 더 넓은 영역에 놓일 필요가 있다. 하나가 계속 숨을 쉴 수 있기를 바라는 주인공의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던지는 무거운 질문이 있다면, 다 함께 불안하고 위태로운 노동을 감당한다는 막연한 공동체의식이 아니라, 그 세부에서도 나뉘고 차이를 이루는 각자의 자리 문제일 것이다. 가냘픈 연대에 대한 희망으로 제시된 “하나의 숨”(218면)으로의 결말은 함께 바라볼 수 있지만 결코 같은 자리는 아닌, 무수하게 갈라지는 노동의 자리를 생각하게 한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부재하는 존재’로 드러나는 하나의 꿈과 목소리는 이 소설이 고민하는 갈등과 연대에 대한 심층적인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5. ‘차이’에 기반한 협동의 세계

 

지금까지 살펴본 공선옥과 권여선, 조해진의 소설은 문학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생명, 노동, 돌봄의 의미를 새롭게 사유하게 한다. 공선옥의 소설은 개인과 사회의 공동적 기억을 추적하는 재현의 방식을 통해 역사 속 여성의 삶과 모성의 의미를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기록자와 증언자가 함께 그 시간을 복기하는 과정은 여성에게 드리워진 통념적 모성의 의미를 허물며 삶 속에 스며 있는 돌봄과 나눔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권여선의 소설은 지금 이 시대의 청년들을 억누르는 경제적 불안과 절망의 감정을 들여다보면서 폐기와 강탈의 시간 속에서 건져내야 할 삶의 감각을 주목한다. 신체와 감정을 포박하는 황폐한 삶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감각을 발견하는 과정은 타자와의 공감대를 만들 수 있는 귀중한 발판이 된다. 조해진의 소설은 각기 다른 세대의 여성들이 처한 불안한 노동현실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서 이들을 연대하기 힘들게 만드는 조건들을 묘파한다. 삶의 최전선에 있는 가장 약한 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이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적 연대의 실질적인 바탕이 될 수 있는 돌봄가치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살아 있는 존재들이 스스로의 개성과 차이를 간직하며 서로를 돕는 미래는 어떻게 가능한가. 여성의 고유한 성차와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그것을 자원으로 삼아 연대를 모색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이 질문은 자신의 존재를 건 사유와 도약을 요구한다.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우리 사이엔 인종, 나이, 성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차이 때문에 분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런 차이를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분열한다”15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 바 있다. 일부 페미니즘에서 여성 범주를 급진화하고 단일화하면서 생겨나는 차별과 억압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한 이 전언은 개별 존재들의 ‘차이’를 삶에 창조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발판으로 활용하는 협동의 전선을 새롭게 모색하게 한다. 팬데믹의 시대가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도 각자의 현실을 넘어서 창조적 협동과 우정, 돌봄을 나눌 수 있는 공공적 장을 마련할 필요성이라고 하겠다.

 

 

  1. 백영경 「탈성장 전환의 요구와 돌봄이라는 화두」, 『창작과비평』 2020년 가을호 48면.
  2.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이매진 2019, 19면. 저자는 돌봄행위 자체가 지닌 시민적 덕목을 강조하며, 중장년과 노년 세대뿐 아니라 청년세대 역시 이러한 돌봄의 사회화 과정에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3. 캐럴 길리건 『담대한 목소리』, 김문주 옮김, 생각정원 2018.
  4. 나희덕은 「‘자본세’에 시인들의 몸은 어떻게 저항하는가」(『창작과비평』 2020년 봄호)에서 ‘술루세’와 ‘친족 만들기’의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에 저항하는 시적 상상력의 비전을 예시하는데 모든 ‘되기’의 비유가 급진적인 주체 해체의 개념으로 곧바로 작품에 구현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분석 사례로 제시되는 김혜순의 시만 하더라도 ‘돼지 되기’의 상상력이 갖는 일부 시의 리얼리티는 급진적 해체보다는 학살과 폭력에 대한 지식인적 주체의 풍자적 시선에 힘입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5. 김미정 「한낱 목숨으로부터 시작한다면: 비인간동물, 관계성, 문학을 말하기 위해 더 질문할 것들」, 『문학동네』 2020년 봄호 450면.
  6. 본문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작품은 다음과 같으며 인용 시 본문에 면수만 표기한다. 공선옥 「은주의 영화」(『은주의 영화』, 창비 2019), 권여선 「손톱」(『아직 멀었다는 말』, 문학동네 2020), 조해진 「하나의 숨」(『창작과비평』 2019년 겨울호).
  7. 한기욱 「사유·정동·리얼리즘: 촛불혁명기 한국소설의 분투」, 『창작과비평』 2019년 겨울호 19~20면.
  8. 이현석은 이 소설에 형상화된 소희의 곤경에서 “ 누군가에게는 약간의 불편감만 초래할” 손톱 치료의 비용이 “ 누군가에게는 존재를 위협하는 사건이” 되는 의료적 현실의 문제를 읽어낸다. 그에 따르면 이 소설은 ‘이전의 세계’를 기억하고 “그 세계를 비판적으로 복기함으로써” 온당한 이후를 맞이하려는 문학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현석 「이전의 세계」, 『문학동네』 2020년 여름호 16~17면.
  9. 스피노자는 신체의 존재론적 감응을 통해 그 분위기를 느끼고 공명하고 비슷한 상태로 이행해가는 것이 ‘감정의 모방’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 180~81면.
  10. 조해진 「누구든 살아 있으라」, 경향신문 2020.11.1.
  11. 은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돌베개 2019, 152면.
  12. 조귀동 『세습 중산층 사회』, 생각의힘 2020, 47~48면. 저자에 따르면 노동시장 ‘공급’의 측면에서 일반계 고등학교 출신자들이 2014~15년 정도를 기점으로 급증했는데 이는 공공기관 및 기업의 고졸 채용이 줄면서 특성화고를 졸업한 뒤 조건이 좋은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다. 전반적으로 고교 졸업 학력으로 취업 가능한 일자리가 감소하면서 노동조건은 더욱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13. 데이비드 하비 『자본주의와 경제적 이성의 광기』, 김성호 옮김, 창비 2019, 138면.
  14. 레나타 살레츨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박광호 옮김, 후마니타스 2014, 31면.
  15.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주해연·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 2018, 19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