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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판식 朴判植
1973년 경남 함양 출생. 200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밤의 피치카토』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등이 있음. lifediver@hanmail.net
사랑의 목소리로
튀긴 물고기와 가느다란 사랑, 그리고 사랑 없는 관공서의 조용한 오후
나는 마침내 내 인생에서 서울을 발견한다, 삼만 오천평의 하늘
그 모퉁이에서
어린아이는 장난감 자동차를 밀고
하얀 두루마기를 걸친 구름이 잔뜩 짜증 난 왕처럼 관악산을 넘어온다
밀과 보리가 자라네, 밀과 보리가 자라네
골프공이 골프채에 얻어맞는 소리, 이것이 인생이다
꿈에 나는 일등석 기차를 탔다, 헛수고였다
알몸의 흑인 여자를 만졌다, 헛수고였다
소나무 냄새 나는 소년이 작은 명상 속에서 생겨났다 오솔길로
사라졌다, 헛수고였다
왕이 짜증을 내면 왕비는 불안하고 우울했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고 이 세상의 법칙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면
또 어쩔 텐가
빌려 입은 옷 같은 인생, 떼쓰는 어린애를 안고 정부보조금을 타고
이상한 미로를 헤매듯 고통과 슬픔만을 골라 디디는 신기한 인생
무사하게 죽고 싶다, 인생은 재난이 아니다
밀과 보리가 자란 것은 누구든지 알지요
생활이라는 망상
바람은 높은 곳에서 불고 있다
굴뚝과 구름이 2월의 하늘을 놓고 지루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커튼 뒤에서 점심 뷔페는 저녁 손님을 맞으려고
고깃집으로 변신 중이고
8분 정도 참았다가
불안은 다시
자신의 전화기를 들었다 놓는다
아주 중요한 순간처럼 구름이 천천히 속력을 줄여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다
이 세상이 누구의 기막힌 착상일지 생각해보다가 불안은
무상한 하늘의 깊이에 놀란다
4분의 1쯤 뜯겨진 비닐봉투 속에서
슬픔과 절망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쏟아진다
스무번쯤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동안 큰 가방 같은
창문이 쓸모없는 풍경을 방 안으로 끌어들인다
혼자 하는 사랑은 고문이다
혼자 먹을 음식을 식탁보 위에 충분히 펼쳐놓으며
불안은 이 중요한 문제에 관해 골똘히 생각해보다가
통증이 있나 없나 자신의 손등을 포크로 살짝 찍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