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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방인 『다산 정약용의 『역학서언』, 『주역』의 해석사를 다시 쓰다』, 예문서원 2020

다산 역학, 가장 현대적인 역학 이론이 되다

 

 

김영우 金永友

인제대 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 flux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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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다산(茶山) 역학의 권위자인 경북대 방인 교수가 다산 역학 연구에 기울인 지난 39년간의 성과를 결산하는 성격의 저술이다. 이미 다산의 『주역사전(周易四箋)』을 공동 번역한 바 있는 저자는 『다산 정약용의 『주역사전』, 기호학으로 읽다』에 이어 이번에는 다산의 또다른 역학 저술인 『역학서언(易學緖言)』을 다룬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주역사전』이 ‘역리사법(易理四法)’이라는 역 해석 이론에 따라 『주역』을 새롭게 주석한 것이라면, 『역학서언』은 다산이 『주역사전』을 저술한 이후 과거 중국 역학 대가들의 이론에 대해 평가한 것을 유배 이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방인 교수는 다산의 역학 분야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술을 모두 섭렵했다 할 수 있다.

주역철학사는 『주역』 경문의 해석 방법을 둘러싼 논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역학에서 해석 방법이 중요한 이유는 『주역』이 『시경』 『서경』 등의 경전과 달리 괘(卦)라는 기호와 이 기호가 상징하는 물상(物象)으로 구성된 특수한 문장의 책이기 때문이다. 특수한 문장은 해석 방법이 필요하다. 『주역』「설괘전」에 괘와 물상의 관계를 규정한 내용이 실려 있어서 이를 참고하면 될 것 같지만, 「설괘전」의 물상과 『주역』 경문의 물상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이에 한대(漢代)의 역학자들은 괘변(卦變), 호체(互體), 납갑(納甲) 등 다양한 역 해석 이론들을 제안했는데 이들을 상수(象數)역학자라 부른다. 이에 반해 의리(義理)역학자들은 경문을 해석할 때 「설괘전」의 물상 규정에 얽매이기보다는 경문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상수역학자들이 경문의 의미를 해석하기보다는 물상의 해명에 치우쳐 번쇄한 역학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몰두하는 경향을 비판하며 의리에 주목할 것을 강조한다.

다산은 상수역학의 전통을 따른다. 이는 다산의 『주역』 해석이 「설괘전」의 물상에 근거한 해석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로부터 다산 역학에서도 괘로부터 물상을 이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역 해석 이론이 중시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다산의 진술에 따르면 『주역사전』은 기존의 어떠한 역학 이론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오로지 다산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다산은 강진 유배 초기이던 1803년에 『춘추좌씨전』을 읽다가 『주역』 해석의 단초를 발견했고,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하늘의 도움으로 『주역사전』을 저술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다산의 이 진술은 후대의 연구자들이 다산 역학에 대해 여타 역학 이론의 영향 없이 순전히 다산이 독창적으로 만든 이론이라고 생각하는 배경이 되었다. 실제 다수의 다산 역학 연구자들은 다산 역학의 독창성을 밝히는 데 주력해왔고, 물상, 추이(推移), 효변(爻變), 호체의 네가지 이론으로 구성된 해석의 체계성과 일관성을 강조했다.

다산 역학의 독창성에 대한 평가는 기존의 역학 대가에 대한 다산의 신랄한 비판에 근거하여 강화되기도 했다. 다산은 『역학서언』에서 역리사법을 기준으로 역대 의리역과 상수역의 대가들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물상을 무시했다고 하여 왕필(王弼) 역학을 가장 격렬하게 비판했으며, 상수역학의 전통을 따르더라도 효변과 추이를 적용하지 않는 내지덕(來知德)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평가했다.

이번에 방인 교수가 새롭게 펴낸 책은 기본적으로는 『역학서언』에 관한 연구서라 할 수 있다. 『역학서언』은 모두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역』에 적용했던 역리사법을 기준으로 중국 한대의 역학자 경방(京房)부터 청대 이광지(李光地)까지 모두 18명에 이르는 역학 대가들의 이론을 다룬다.

저자는 『역학서언』에 대한 이 연구에서 다산 역학 이론의 독창성에 주목하면서도, 다산의 진술을 그대로 수용하던 연구 경향에서 벗어나 다산 역학을 역학사의 흐름 안에서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고자 했다. 『역학서언』에서 중국 역학자에 대한 다산의 비평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상세하게 밝히고 있지만, 거기서 다루고 있는 내용에만 한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역학서언』의 내용을 포함하면서도 그 범위를 넘어 다산 역학 이론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출토 역학의 연구성과를 수용하여 다산 효변론을 평가했으며, 모기령 역학 이론이 다산의 추이론에 미친 영향에도 주목했다. 대부분의 다산 역학 연구가 효변과 추이의 독창성을 강조하는 것에 그쳤다면 방인 교수는 출토 역학 자료와 모기령 역학을 근거로 다산 역학에 대한 보다 진전된 논의를 제시했다. 다산 효변론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연산역』이나 『귀장역』과 달리 『주역』만이 효변을 근거로 만들어졌다는 다산의 주장에 대해서는 출토 자료를 근거로 의문을 제기했다. 다산은 볼 수 없었던 현대의 역학 관련 출토 자료에 대한 연구성과에 의거하여 다산의 비평이 올바른 것인지 질문하는 것이다. 아울러 다산이 모기령 역학을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있지만 실제 다산의 추이론은 모기령 역학에 힘입은 바 크다는 사실도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다산이 발견한 완벽한 이론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거나 평가하는 대신 그 완벽함에 의문을 제기하고 문제에 도전한 것이다.

책에서 저자는 최근 자신의 관심 분야인 조아킴 부베(Joachim Bouvet)의 기하학과 이광지의 역학도 다루고 있다. 다산은 역리사법이 아닌 기하학설을 활용하여 『주역』을 해석한 이광지 역학의 문제를 지적한 바 있는데, 이 책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서양 선교사의 기하학과 다산 역학의 접점을 찾고자 하는 저자의 향후 연구 계획도 살필 수 있다. 이처럼 이 책은 마떼오 리치(Matteo Ricci)의 『천주실의』, 조아킴 부베의 기하학과 다산 역학의 접점까지도 연구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책의 부제처럼 고금의 역학사를 종단하고 동서 철학의 경계를 횡단하는 다산의 역학사 여행을 펼쳐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다산역의 세계를 처음 접한 뒤로 39년의 세월을 다산의 역학사 종주를 숨이 차오를 정도로 뒤쫓아 달렸다. 나는 여전히 그의 뒤를 밟고 있으나, 다산은 아직도 나로부터 먼발치에 떨어져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저자의 이 연구로 인하여 다산역은 현대 역학의 성과들과 견주며 그 역학 이론의 의의가 새롭게 조명되었다 할 수 있다. 다산 역학이 과거의 지난 학설이 아니라 『주역』을 이해하는 가장 현대적인 역학 이론으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다산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저술을 깊이 연구하여 오묘한 이치를 통달한 사람이 있으면 그는 바로 자손이자 붕우이니 그를 몇배로 아끼고 귀중히 여겨야 할 것’이라 했다. 39년 동안 좌고우면하지 않고 다산 역학 연구에 몰입하여 훌륭한 성과를 이루어낸 방인 교수야말로 다산이 말한 아끼고 귀중히 여겨야 할 그 사람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