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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언호 『그해 봄날』, 한길사 2020
시대의 어둠을 밝힌 불빛들
유성호 柳成浩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annieeun@hanmail.net
‘출판인 김언호가 만난 우리 시대의 현인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해 봄날』에는 현대사의 최전선에 섰던 열여섯분의 삶과 언어가 담겼다. 김언호는 세상이 다 아는 우리나라 대표 출판인이다. 그는 1975년에 동아일보에서 해직되었고 그 이듬해에 한길사를 창립한 이래 45년 동안 인문·사회·예술 분야의 중요한 책들을 최량의 품격으로 펴낸 출판인이자, 스스로 중요한 책을 저술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 결과는 『책의 공화국에서』 『한권의 책을 위하여』 『책들의 숲이여 음향이여』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계보를 잇는 『그해 봄날』은 그의 정신적 수원(水源)이 되어준 당대 현인들과의 만남을 기록한, 현대 지성사라고 불릴 만한 결실이다.
물론 책의 제호는 1980년 ‘서울의 봄’을 함축한다. 민주주의의 봄이자 김언호 개인에게는 이 책 속 주인공들과 만나게 된 봄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다루어진 거인들을 그때부터 만나기 시작했다. 시대는 점점 암담해져갔지만 이들과 새로운 미래를 구상했던 시절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감사하기만 하다. 김언호는 선명하고 아름다운 현대사의 인물지(誌)를 낱낱의 충실성과 정성스러운 헌정으로 완성함으로써 스스로 ‘한권의 책’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이들과의 만남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공재이고 흘러간 옛 기록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현재임을 힘주어 알려준 것이다. 그 목록은 함석헌 김대중 송건호 리영희 윤이상 강원용 안병무 신영복 이우성 김진균 이이화 최영준 이오덕 이광주 박태순 최명희 선생들이다. 정치인, 사상가, 예술가, 언론인, 학자가 망라되었다.
그 가운데서 저자는 함석헌을 맨 앞에 수록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우리 뇌리에 가장 선명한 사상가로서의 각인이 이루어진 분이 함석헌 선생일 것이다. 선생은 씨 사상에 바탕을 두면서 “씨은 덤비지 않는다. 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요 생명 그 자체임을 알기 때문이다. (…) 씨를 심는 농부는 하늘을 믿는 마음이요 하늘을 믿기 때문에 마음이 화평하고 일하기가 즐겁다”(57면)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사상은 동시대의 시인 신동엽 등과 상호텍스트로 얽혀 시인으로 하여금 ‘전경인(全耕人)’ 사상으로 확장해가게끔 한 씨앗이 되기도 했다. 스스로 『씨의 소리』를 1970년에 창간하여 “생각하는 씨이라야 산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긴 선생은 사상가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은 분이다. 그리고 선생의 사상편력을 정성스럽게 모은 것은 그야말로 김언호의 평생 집념이 이루어낸 결실일 것이다.
훗날 ‘대통령 김대중’의 가장 큰 표상이 된 6·15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김언호는 “분단시대가 낳은 큰 정치가이자 평화운동가이고 통일운동가인 김대중이, 험난한 시대를 헤쳐오면서 체득한, 민족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현실적인 지혜가 발휘되는 협상이었다”(97면)라고 평가한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굵은 획을 그었던 송건호, 리영희 선생에 대한 기억도 매우 실물적이고 구체적인 사례들로 점철되어 있어서 이분들에 대한 인물론을 전개할 때 귀한 사료가 되겠거니와, 무엇보다도 그 길을 동행해온 도반으로서의 페이소스가 담겨 있다는 점이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 이 점, 이 책을 단순한 소전(小傳)의 집성이 아니라 작가 김언호의 숨결이 녹아 있는 일종의 성장서사로 보아도 좋을 속성이 아닐 수 없다.
예술 쪽으로 옮겨와 윤이상 선생에 대한 기억에서 김언호는 “민족의 통일은 음악가 윤이상의 비원이었다. 남북의 음악가들이 참여하는 DMZ에서의 평화음악제 구상은 한 음악예술가로서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예술로서의 정치행위라고 했다”(193면)라고 쓴다. 예술의 정치성을 온몸으로 수행한 한 음악가에 대한 진정 어린 동행자의 모습이 깊은 울림을 동반한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말한, “나는 인간과 자연과 우주와 사물의 본질에 숨어 있는 넋의 비밀들이 늘 그리웠다. 이 비밀들이 필연적인 관계로 작용하며 어우러지는 현상을 섬세하게 복원해보고 싶었다”(510~11면)라는 전언도 최명희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를 것 같다. 특별히 이광주 교수와 책방을 순례하면서 위대한 책의 예술가 윌리엄 모리스를 만난 고백에서 김언호는 “가장 위대한 예술적 소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첫째로 건축물이라고 말하겠다. 그다음의 위대한 예술적 소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책이라고 말하겠다”(446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책 만들기에 헌신했던 스스로의 존재론을 펼치기도 한다.
김언호는 이들과 사상적 공유도 했지만 지리적 동행도 마다하지 않았고 역사적 순간을 함께 나눈 동지이기도 했다. 사실 어떤 한 시대에 대한 기억은 때로 불편하고 곤혹스럽다. 모든 기억에는 껄끄러운 반성의 계기가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억이 불편한 사람들, 다시 말해 지난날과 아득하게 결별한 채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손쉽게 그 시간을 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기억은 우리의 현재적 삶에 충전과 반성을 동시에 주면서 새로운 나날을 예비하게끔 하는 유일무이한 힘이기도 하다. 이때 기억은 과거의 시간을 현재에 재현케 하는 근원적 동력이 된다. 그 점에서 우리는 당시 파시즘이 빚어낸 고도성장의 화려한 외관을 심층에서부터 비판하고 대안적 사유를 수행했던 이분들의 언어를 그 자체로 우리의 역사적 재부로 안아 들여야 할 것이다.
김언호는 코로나19와 함께 꼬박 일년여의 시간을 바친 이 책에서 인물들에 대한 해설이나 논평을 가급적 삼간 채 육성을 그대로 받아 적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누군가의 치열한 생애는 다른 누군가의 기억과 기록을 통해 역사가 되는 것임을 실증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이 책은 후기를 쓴 김민웅의 지적처럼 “우리 시대를 만든 정신의 고전이다. 고난의 시기를 통과한 한 시대의 살아 있는 육성이다. 고전적 정신과 육성을 재현해낸 김언호가 고맙다. 현인들이 들려주는 음향은 망각과 혼돈에서 우리를 구해주는 나침반이다”(536면)라는 평가로 귀결될 것이다. 이 책에 기록된 열여섯분의 삶과 언어는 김언호의 시선을 통해 한 시대의 증언이자 사표와 지도가 되어줄 것이며, 우리는 시대의 어둠을 밝힌 은은한 불빛으로서의 인물지를 통해 그해 봄날부터 전해오는 정신사의 울림과 떨림을 여전히 깊고 융융하게 기억해갈 것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