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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재난과 고립을 넘어, 전환의 상상으로
일인칭 글쓰기 시대의 소설
정주아 鄭珠娥
문학평론가, 강원대 국문과 교수. 저서 『서북문학과 로컬리티』, 주요 평론으로 「육체성의 형식과 리얼리티」 「계모찾기, 버림받은 세대와 냉혹한 모성의 세계」 등이 있음.
gamunbie@hanmail.net
1. 에세이를 읽는 사람들
소설이나 시의 동향만 살피다보면 놓치기 쉽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대형서점 문학 코너의 주인은 에세이였다. 이른바 ‘에세이 열풍’ ‘힐링 에세이 전성시대’ 등으로 요약되는 에세이 약진 현상은 2010년대부터 출판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이 현상은 최근 장기화되는 팬데믹 국면과 그에 따른 ‘코로나 블루’로 인해 더욱 명료해지는 중이다. 이십대를 겨냥하여 집필되고 스테디셀러 반열에 오른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 지음, 쌤앤파커스 2010)는 이러한 현상의 기원에 대표주자 격으로 놓여 있다. 이후 ‘~해도 괜찮아’부터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에 이르기까지, 일명 ‘괜찮아’ 류(類)로 약칭해도 좋을 만한 에세이들이 무수히 명멸했고 지금도 여전히 발간되는 중이다. 표제에서부터 명백하게 유추가 가능한 것이지만, 이 에세이들은 특히 젊은 세대의 고충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십여년에 걸친 시간을 통과하면서 그 표제가 의미하는 ‘괜찮다’의 함의는 명백하게 달라졌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당부를 향한 청년세대의 냉소, 즉 ‘아프면 환자이지 왜 청춘인가’라는 되물음은 이런 변화의 성격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염려와 위로라는 호의에서 시작된 당부임을 모르지 않지만 그 되물음은 표제의 인과관계를 문제 삼고 있다. 그것은 젊음이 언제까지 ‘노오력’의 동의어가 되어야 하느냐를 되묻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장기적인 경제 침체를 피해서 운 좋게 사회에 안착한 세대의 출발점과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게임을 시작해야 하는 세대의 출발점이 같은 모습일 수는 없다는 인식이 배경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에 ‘~해도 괜찮아’라는 에세이 특유의 문법은 점차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일정한 질서에 대한 이탈과 거부의 방향을 가리키는 언명이 된다. 요컨대 이러한 에세이가 세대적 취향의 일부이자 또래문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말도 된다. 이는 오히려 기성세대가 ‘괜찮다’며 권해온 ‘모범적인’ 삶의 방식을 하나둘 포기하고 버리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에세이의 대중적인 영향력이 강해지는 배후에 ‘번아웃 증후군’이 있다는 출판 관계자들의 분석이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지만,1 최근 몇년간의 에세이 열풍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떤 직무를 수행하느라 신체적·정신적 기력이 소진되는 것이 ‘번아웃’의 정의임을 감안하면, 직무를 수행할 준비와 의욕은 충분하되 기회조차 얻지 못했거나 직무의 임시적 성격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정의 자체가 사치스러울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번아웃이 될 만큼 몰두할 일을 찾는 것부터가 요원해 보인다는, 그처럼 열정과 기력을 바칠 만한 대상을 얻지 못하리라는 예감 때문에 생겨나는 우울과 무력감이 요체에 더 가깝다. 말하자면 일을 해보기도 전에 미리 찾아온 번아웃이 에세이 열풍의 배경인 것이다.
에세이의 유행 현상이 한국 청소년(9~24세)의 자살률 증가 현상 2과 나란히 나아간다는 사태는 가슴 아프지만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의 노력이 장차 다른 결의 시간을 만들어낼 것 같지 않다는 비관, 그리하여 ‘이번 생애’ 안에 무언가 더 나아질 기미가 없어 보인다는 시간의 광장공포가 만연한 결과다. 그렇다면 현재의 노동이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지 못할진대, 오랫동안 제도화되고 어떤 면에서는 반복적으로 강요되어온 삶의 패턴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거부는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로 인해 삶의 목표가 없어도 괜찮다, 자기 위주로 살아도 괜찮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다 등등 무엇인가 되지 않아도 좋고 더이상 참을 필요도 없다는 다짐과 표명이 넘쳐난다.
팬데믹 시대의 우울은 그간 누적되어온 세대적 불안과 그에 따른 출구 찾기의 간절함을 보다 명료하게 표착되는 정동의 형태로 밀어올린다. 서적 판매대를 빼곡하게 채운 에세이들을 향해 혼란스러운 마음을 파고드는 출판 상술의 일종이라 비판하는 이도 분명 있겠으나, 그 지적이 그리 유효한 것 같지는 않다. 시장주의 속에서 자연스럽게 숨 쉬고 유영하며 살아온 세대인 만큼 선택지야 많으면 좋은 것이다. ‘내가 곧 내 삶의 소비자’이고 결국은 ‘나’의 선택이다. 이때 ‘~해도 괜찮아’라는 에세이의 문법은 일종의 세대적 공용어이다. 기성세대와는 등을 돌린 자리에서 나름의 삶의 방식을 마련한 새로운 세대가 ‘~해도 괜찮아’라며 자기 자신을 혹은 서로를 다독이는 모양새를 띤다. 누가 발언하는가의 문제, 즉 발언하는 자의 자격 또한 친교의 장 속에서 달라졌다. 이제 에세이는 더이상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작가나 인간사에 대한 통찰을 요구받는 종교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마음의 병을 앓는 이가 직접 우울의 다스림을 이야기하고, 육아로 직장을 그만둔 이가 경력 단절의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학교나 직장에서 따돌림을 당한 이가 아웃사이더의 삶에 대해 말한다.
그야말로 ‘나’를 주인공으로 한 일인칭 글쓰기의 전성시대가 열린 격이다. 저마다 자신이 선택한 어떤 삶의 방식과 그 삶을 떠받치는 소신을 털어놓는다. 더이상 세계에 ‘나’를 무조건 맞추지 않겠다며 거절하고, 익숙하게 보아온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설렘과 두려움을 ‘괜찮다’는 말로 포괄한다.
2. ‘나’의 세계, ‘나’의 시계(視界)
에세이 열풍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젊은 세대에게 절박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답 없는 세상에 지쳤다고 푸념할지언정 윗세대의 조언은 사양하겠다는 단호한 ‘나’의 목소리가 그 열풍을 떠받치는 힘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에세이와 같은 진열대에 놓인 소설에 이러한 세태가 담기지 않았을 리 없다. 아니, 담기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기존 ‘당신들’의 사회질서가 얼마나 부조리하며 고루한 것인지를 일인칭의 글쓰기를 통해 그려내려는 열망이 젊은 세대 소설의 몸통 전체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인칭대명사 ‘나’의 사용에 관한 시점 이론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일인칭이라는 시점의 선택이 곧 세계를 향한 입장(stance)의 선택으로 보편화되는 사태, ‘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해석되고 시야가 제한되는 특징을 삶의 태도로 기꺼이 수용하려는 추세가 근 십년간 에세이나 소설의 글쓰기에 차곡차곡 누적되어왔다는 이야기다. 자기중심적으로 제한되고 좁아지는 시야는 도리어 자아정체성의 선명한 발현으로, 나아가 정치사회적으로 분명한 태도를 표명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객관적인 시야’란 어차피 존재할 수 없다는 해체주의적 회의가 보편화된 결과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박솔뫼의 창작 스타일은 일인칭 글쓰기의 특징이나 방향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안 해」3는 친구들과 노래방에 갔다가 정체 모를 괴한에게 납치 감금된 채 무조건 ‘열심히 노래하라’고 강요당하는 ‘나’의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이것이 스토리의 전부이다. 언제 왜 어떤 친구와 노래방에 갔으며 어떻게 감금이 되었느냐 같은 전체적인 서사의 맥락은 잘 드러나지 않을뿐더러 중요하지도 않아 보인다. 갑작스럽게 납치 감금을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를 중심으로 한 의식의 흐름인 만큼 언제 왜 누구와 노래방을 갔는지 설명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덕분에 이 단편의 스토리는 그가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강요하는가라는 현재적 상황과 그 폭력성에 맞추어진다. 결말부에서 ‘나’는 자신이 강요당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을 연출하여 그에게 복수한다. 열심히 노래하라 강요하는 것이다.
“마이크를 대도 아무 노래도 못 부르지? 열심히 해도 지금 노래 하나 못 부르지? 나는 열심히 안 했는데도 니가 칠갑산 부르라면 불렀지? 아무거나 불렀지? 준비한 것처럼 바로 불렀잖아. 너는 좋은 노래가 뭔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하라고만 하지? 애초에 그런 것은 없는데. 열심히도 열정도 아름다운 것도 없는데 그건 그냥 없는데. 본 적도 없는데.”(59면)
열정을 다해 열심히 노래하라고 강요했던 남자에게 할 말을 마친 ‘나’는 드디어 노래방을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간다. 비록 복수하고 탈출했지만 남자도 노래방도 세상에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굳게 결심한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으음 앞으로 뭐든 열심히 안 해야지. 아 잠만 열심히 자야지 열심히 안 해 아무것도. 지금까지 열심히 한 적도 없지만 앞으로도 안 한다. 안 해 절대 안 해”(63면)라고. 무엇이든 ‘열심히’는 거부하겠다는 선언의 배경에는 ‘당신’을 비롯하여 누구도 모르는 정답을 마치 있는/아는 양 가장하지 말라는 세대적 항변이 자리한다. 무작위로 청소년을 납치해 방에 가두고 열심히 노래하라 강요한다는 작중의 설정이 현실세계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점을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거부의 태도가 ‘열심히 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에세이의 문법과 동일한 방식의 대응이라는 것 또한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다음 단계, 즉 답습되는 반복과 훈육을 거절한 다음의 단계가 아닐까. 박솔뫼의 문장을 응용하자면, 그럼 이제 무얼 불러야 할 것인가. 무조건 열심히 부르기, 끊김 없이 이어 부르기를 거절한다면 이제 어떤 주제와 어떤 음색의 노래가 가능할까. 달리 말해 기성세대의 관습과 어법을 거절할 때 어떤 경험을 토대로 어떤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표제작 「그럼 무얼 부르지」에서 박솔뫼가 ‘5월 광주’에 접근했던 방식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나름의 모색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우리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니까. 그때 살아 있던 사람이니까. 광주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은 거 알지, 제주도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그것도 알지.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니까 다 알지. 나는 웃었고 나이 많은 아저씨 둘도 웃었다. 그 두 사람은 내게 너는 광주 사람이니까 너도 다 아는 사람이지 했는데 나는 그런가? 하고 혼잣말을 내뱉으며 실실 웃었다.(146면)
광주 출신인 ‘나’는 여행지에서 만난 해외교포를 통해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해 듣는다. ‘나’의 머릿속에 펼쳐진 ‘5월 광주’는 친구의 이야기, 다큐멘터리, 사진, 시 등을 통해 마치 조각 그림처럼 파편적으로 맞추어진 형상이다. 알고 있지만 ‘안다’고는 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나이가 많으니 너보다는 잘 안다는, 그러나 너는 광주 사람이니 아는 사람이라 해도 된다는 사내들을 등장시킨 인용 대목은, 역사적 인식에 대한 근거 없는 기대와 신뢰를 일방적으로 떠안은 광주 출신 젊은 작가의 불편한 마음을 대변하는 내용으로 읽히기도 한다. 서술의 요지에서만 본다면 앞서 나온 노래방의 상황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에 작중 ‘나’는 호소한다.
나는 3년 정도의 시간은 하나로 볼 수 있으며 3년 전은 3년 후의 시선으로 볼 수 있으며 그러므로 나는 모든 시제를 지울 수 있으며 그렇게 볼 수 있는 시간들은 점점 늘어나지만 나의 시선은 김남주가 이야기한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에는 가닿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건 좀 신기할 수도 있지만 실은 당연한 이야기다. 확실한 이야기이다.(152면)
개인적으로 경험한 시간을 통찰하고 포괄해나가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세상 사람 모두가 다 안다는 ‘그날’을 볼 수 있는 시선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솔직한 고백이다. 이는 작가의 말마따나 당연한 일이다. 최근작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4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이제 박솔뫼가 광주를 다루는 방식은 ‘안다’라는 확신에 덧붙은 타인의 견해와 시선을 분리해내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정작 자신이 아는 것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작업이라는 뜻도 된다. 논문 작업을 위해 지역을 직접 방문하고, 주요 인물을 인터뷰하며 자료를 수집하는 인물들을 등장시킨 이 단편은 얼핏 광주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경험을 토대로 어떤 세계를 향해 나아가느냐는 질문과 연결해본다면 세대적 단절과 연속성에 대한 고민에 일관성 있게 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소설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광주라는 장소성이 형성되는 첫 과정부터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에게는 논문 작업을 위해 인터뷰해야 할 문화인이 살고 있는 도시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5·18 기념관의 지식을 확인할 수 있는 도시이다. 정작 도시는 그 자체로 다만 존재한다. 이러한 글쓰기는 자료 수집을 통해 파편을 수집할지언정 적어도 역사를 무시간적 관념의 덩어리로서 받아들이지는 않겠다는 거부의 의사를, 무엇보다도 ‘나’의 시계(視界)에서 시간을 재조립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 2016)에 의해 본격화된 여성주의 소설, 작가 김봉곤의 커밍아웃과 더불어 촉발된 성소수자 소설 등도 그것이 정치적 담론으로 달아오르기 이전의 첫 출발점은 일인칭의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다는 욕망,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다시 보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었을까. 그 결과는 이미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문학의 탈정치화가 이야기되었던 1990년대 이후 문단이 이처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치사회적 담론을 중심으로 집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 집결의 양상은 독특하다. ‘나’의 글쓰기는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는 자기중심적 수행성이 두드러진다. 행위의 주체도 ‘나’지만 그 세계를 바꾸려는 이유도 ‘나’로부터 비롯된다. 소설도 이미 일인칭 글쓰기의 전성시대를 통과하는 중이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일인칭 글쓰기라는 형식을 공유한다고 하더라도 소설은 소설이고 에세이는 에세이다. 소설은 사실의 진술이 아니라 대상의 재현에 의존하는 글쓰기 양식인 것이다. 이러한 단정은 그 자체로는 단순명료해 보이지만, 대상의 재현 과정에서 결합되기 마련인 시선의 문제로 인해 복잡해진다. 이미 박솔뫼는 ‘나’의 앎에 덧씌워진 타인의 앎을 분리하면서 어떤 역사의 심연에는 나의 시선이 가닿지 않는다고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를 비롯한 세간의 앎을 지탱해온 것은 과연 누구의 시선에서 마련된 일인가. 만일 자신의 앎과 삶이 더이상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전유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자각이 일인칭 글쓰기를 폭발시킨 동력이라 한다면, 이제 대상의 재현에 덧붙은 시선의 문제를 좀더 논의해볼 차례다.
3. 어떤 균형의 감각
‘~해도 괜찮아’를 에세이 양식의 언명이라 본다면 소설의 언명은 ‘실은 괜찮지 않아’ 정도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에세이는 본디 작가 개인의 것이다. 작가 개인의 견해라는 제한이 주는 안도감과 안정감 속에서 어떤 입장을 털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진짜 ‘나’가 아닌 허구의 ‘나’를 현실세계의 관계 맺음 속에 놓아야 하는, 즉 보편적 객관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소설의 세계에서는 일방적인 ‘괜찮음’이란 있을 수 없다. 말하자면, 굳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때, 굳이 ‘꼰대’를 따를 것 없이 나름의 방식대로 살겠다고 결심했을 때 벌어질 상황을 마냥 낙관적으로만 그려낼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보편적 객관화를 재현의 원리로 삼는 허구 양식으로서의 소설과, 타인의 시선이 덧씌워지는 것을 거부하고 오로지 ‘나’의 신념으로부터 세계를 재편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서로 충돌할 때의 서사는 어떤 모습이 되는가. 달리 말해 ‘실은 괜찮지 않다’고 말하라는 소설 양식의 요청과 ‘~해도 괜찮다’고 말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부딪칠 때의 서사는 어떻게 되는가. 이런 질문의 맥락에서 살핀다면, 김금희의 『복자에게』(문학동네 2020)가 보여주는 인물 및 서사의 갈등은 흥미로운 측면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은 괜찮지 않다’와 ‘~해도 괜찮다’ 중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고 둘을 양립시켜놓은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직조의 형태는 작품의 표제에서 이미 드러나듯이 편지의 형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소설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핀 뒤 논의를 이어나가기로 하자.
『복자에게』는 서로를 의지하며 유년기를 보냈던 영초롱과 복자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유년 시절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족과 떨어져 제주도에 딸린 작은 섬에서 살게 된 영초롱은 그곳에서 복자를 만나 우정을 쌓는다. 그러나 각자 중요하게 생각했던 비밀을 지켜주지 못한 탓에 두 사람의 관계는 서먹해지고, 영초롱은 복자에게 건넬 말들을 일기장에 적으며 외로움을 견딘다. 뭍으로 나온 영초롱은 성장하여 판사가 된다. 수많은 범법자들을 만나며 인간에 대한 회의에 빠질 때쯤 영초롱은 제주 지역 법원으로 발령을 받고, 그곳에서 옛 친구 복자와 재회한다. 영초롱은 복자가 간호사로 일하다 유산한 뒤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함께 산업재해 인정을 받기 위한 소송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초롱은 재판부의 일원으로서 복자를 도우려 하지만 복자는 영초롱에게 재판에서 빠져달라며 호의를 거절한다. 이렇듯 또 한번의 어긋남을 겪으며 영초롱과 복자의 관계는 다시 멀어진다.
영초롱의 유년기와 성년기의 서사를 관통하는 주요 정서는 아마도 ‘미안함’일 것이다. 이 소설의 서사에는 우연이든 아니든 타인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 오랜 세월 그 마음의 빚으로 괴로워하는 사례가 등장한다. 영초롱의 고모는 90년대 초 분신정국에서 학우의 분신을 방조했다는 죄로 복역 중인 친구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쓴다. 당시 증인으로 출두했던 그녀는 절친한 친구의 죄가 확증되는 데 결과적으로 관여한 셈이 되었다. 편지 쓰기는 미안함과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다. 쓰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기에 쓰는 것이다. 비록 답신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편지라는 고백의 형식과 장소가 그녀에게는 절실했던 것이다. 복자를 향한 영초롱의 일기 쓰기는 고모가 죄책감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지탱해온 방식을 모방한 일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그로 인한 경제적 곤궁함을 버터야 하는 유년기를 거치면서, 법조인으로서 서로 물고 뜯는 이들의 악착스러운 생존본능을 지켜보면서 영초롱은 냉소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물론 이때의 냉소란 삶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온갖 감정의 요동을 너무도 민감하게 감지하는 자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 둘러놓은 보호벽 같은 것이다.
해안의 거친 바위들, 섬의 유일한 공장인 보리 도정공장과 밭둑의 고인 돌들까지, 그렇게 위에서 보니 모든 것이 한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드론이 점점 내려앉아 지붕의 시점이 되고 잠자리들의 시점이 되고 우리의 눈높이가 되고 갯강구들의 자리까지 내려와 착륙하면 슬픔이 먼지처럼 피어올랐다.(181면)
지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인 이른바 ‘갯강구들의 시점’이란 곧 악착같은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다툼과 대립을 바라보는 자리이며, 그러므로 더이상 평화롭지 않은 세상과 그 자체로 존엄하지 않은 인간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리이다.
실상 이 “갯강구들의 자리”는, 영초롱과 복자의 우정 이야기를 뛰어넘어 『복자에게』의 진짜 서사가 놓여 있는 지점이다. 우정이라는 아름다운 용어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진짜 삶의 영역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사의 중심에 놓이지 않았으나 이 소설의 주요 관심사는 작중에서 복자가 수행하고 있는 산업재해 소송이다. 이 소송의 삽화는, 6년여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태아의 건강 손상을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낸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행정소송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작중에서 판사인 영초롱은 재판부의 일원으로 이 소송에 참여하게 되고, 내심 복자를 돕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정작 복자가 영초롱에게 ‘재판에서 이겨야 한다, 그러니까 빠져달라’라고 부탁하면서 무난히 회복될 듯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재차 어긋나게 된다.
나는 나중에야 복자가 그렇게 말한 것은 어쩌면 재판에서 지게 될 것이 두려워서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나를 영원히 원망하게 될 테니까. 나라는 애를 영영 그런 악연으로 묶어 기억 속에 가둬야 할 테니까. 하지만 초저녁에 외로이 뜬 별처럼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그 오름에서 나는 말할 수 없는 배반감과 분노, 내가 맡고 있는 이 직분을 함부로 하는 침해 같은 것을 느꼈다. 그건 내가 베풀고 싶었던 선의와 우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세게 나를 찌르는 것이었다.(217면)
재판에서 꼭 이겨야 한다던 복자는 왜 영초롱에게 재판에서 빠져달라 부탁했을까. 인용한 대목에서 영초롱은 나름대로 그 이유를 짐작한다. 만일 재판에서 지게 되면 평생 자신과의 인연을 악연으로 짊어질까봐 복자가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이 대목은 좀 애매모호하다. 복자는 영초롱이 재판부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왜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영초롱이 재판부에서 빠진다고 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판사로 채워진다는 보장이 없을 바엔 영초롱이 남아 있는 편이 유리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의구심을 품는다고 하더라도 소설 어디에서도 그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오로지 영초롱의 시선으로 쓰인 이 장면에서 분명한 것은 복자에게 거절당한 영초롱 자신의 마음과 해석뿐이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로서는 복자의 마음을 알 길이 없다. 그 표제가 말해주듯 『복자에게』는 소설 전체가 복자에게 보내는 영초롱의 일방적인 고백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영초롱이 반드시 재판에서 빠져야만 하는 이유는 전혀 다른 데에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이유는 서사의 개연성을 앞서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복자의 승리가 영초롱의 도움을 통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복자가 영초롱의 도움을 거절하는 장면에는, 산업재해로 인해 삶과 가정이 파탄 나고 오랜 세월 일상을 포기하다시피 하며 국가 행정기관과 소송을 벌여온 실제 피해자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 대목에서 소설은 우정의 연대가 아니라 피해자 사이의 연대 쪽으로 기운다. 영초롱에게는, 더구나 판사로 설정된 영초롱에게는 이 압도적 현실에 개입할 자격이 없다. 아무리 영초롱과 복자의 우정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한낱 허구의 스토리가 지난하고 힘겨운 실제 사태를 미화하는 방향으로 기능하도록 만들 수는 없기에 우정의 서사는 ‘강제 종료’되고 마는 것이다.
허구의 서사가 현실의 엄혹함 앞에서 무력해지곤 하는 현상은 낯선 것이 아니지만, 이 경우는 보다 흥미로운 사태를 만들어낸다. 영초롱은 건너지 못하는 서사 너머 현실세계에 복자는 그 역시 허구적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서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의 생존투쟁의 장을 앞에 두고 영초롱의 일방적인 진입을 차단하는 저 감각이 바로 소설 양식이 요구하는 보편적 객관화의 감각이다. 재판에 이기는 일이 복자의 삶에 있어서는 옛 친구와의 화해보다 훨씬 중요한 일인 것이다.
이에 두 사람의 우정이 강제 종료되는 대목은 일인칭 세계의 자족적 환상이 압도적 현실과 부딪쳐 중지되는 지점을 가리킨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초롱의 세계가 미숙하다거나 협소하다는 말은 아니다. 삶에 대한 영초롱의 태도 또한 오랜 시간 세상과 부딪치며 쌓아온 상처를 통해 단련된 것이다. 재판에서 빠져달라는 복자의 부탁에 영초롱은 왜 화가 났을까. 그 분노는 ‘나’의 세계를 지탱하는 윤리적 규준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판단의 영역을 함부로 침해당했다는 사실에서 온다. 다시 말해, ‘~해도 괜찮아’를 외치는 일인칭의 세계는 결코 손쉽게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마냥 무책임한 것도 아니다. 경험과 관찰을 토대로 나름대로의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구축된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인칭의 세계에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동시에 그 정당성을 보증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이다. 복자에게 거부당하는 순간 영초롱의 일인칭 세계를 떠받치던 윤리적 확신은 다만 자기만족이나 자기변명이 되어 무너진다. ‘~해도 괜찮아’를 단호하게 외치는 ‘나’의 이상은 타인의 삶과 만나며 현실에 섞여드는 지점에서 좌절되고, 타인의 삶을 ‘나’의 시선에 포괄하여 상대화하는 지점에서 주춤거리고 만다. 지극한 사랑과 미안함의 감정을 품고도 감옥에 있는 친구와의 우정을 쉽사리 복원하지 못했던 영초롱의 고모가 그러했듯이, 영초롱의 배려와 신념 또한 복자의 삶과 결단 앞에서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나’의 이상적 세계를 현실과 견주어 상대화하는 작업을 일컬어 소설적 객관화의 요청이라 할 때 그 답은 ‘사실은 괜찮지 않아’로 귀결된다.
현시점에서 소설이 포기해서는 안 될 두 세계를 절박하게 함께 붙들고 있는 형국이라는 점에서 『복자에게』는 의미있는 작품이다. 자기신념의 세계와 현실을 토대로 한 보편적 객관화의 세계, 이 두 세계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이에 『복자에게』는 그리움과 사랑을 담고도 현실의 ‘복자들’ 앞에서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나’의 안타까운 심정을 담은 편지의 형식이 된다.
4. 자기서사의 윤리
소설은 항상 현실을 상대화하고 재현하면서 존속해왔다. 하지만 흡사 에세이와 같은 일인칭 글쓰기의 문법으로 세상을 재현하는 작업이란, 작가에게 있어서는 글쓰기와 현실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압력으로 수용될 가능성이 크다. 최은영의 최근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5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오늘날 젊은 작가들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고민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수치스러웠다. 내가 그 글을 쓰면서 남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의식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표현하고 싶은 생각이나 느낌을 그대로 담았을 때 감상적이라고, 편향된 관점을 지녔다고 비판받을까봐 두려워서 나는 안전한 글쓰기를 택했다. 더 용감해질 수 없었다.(75면)
작중에서 대학생인 ‘나’는 토론 수업 시간에 도시개발로 황폐해진 용산에 대한 에세이를 써낸다. 이 글에 대한 토론은 용산참사의 역사적 평가를 둘러싼 찬반 논쟁으로 번지고, 그 속에서 정작 ‘나’는 어느 쪽에도 편향되지 않은 ‘안전한 글쓰기’를 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낀다. 작중에 등장하는 ‘나’의 정신적 멘토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같은 곳)라고 말해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든다.
이 구절은 글쓰기를 곧 작가적 입장의 표명이라 간주하는 일인칭 글쓰기의 화법이 작가에게 어떤 심리적 구속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준다. 글과 작가의 동일시 현상이란 어찌 보면 소설 본래의 허구적 성격과 멀어지는 대신에 생겨나는 일인칭 글쓰기 특유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힘이 수많은 ‘나’들을 정치적 주체로서 발언하게 만들고, 오늘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연대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목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보다 좀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변화는 따로 있는 듯하다. 바로 소설의 창작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대상의 재현과 상대화 단계에 대한 반성이다. 비단 성별이나 성적 지향의 문제만이 아니라 외모 비하, 장애 폄하, 직업 차별, 혼인과 출산의 강요 등 일상에 잠재하는 관습적인 폭력과 차별의 기제는 너무도 많고, 이 구조 속의 ‘나’는 결코 단독자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작중 현실의 재현이란 수많은 ‘나’들을 향한 연대적 입장의 표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제 ‘당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나’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겨난다. 재현 행위가 폭력적 시선과 대단히 쉽게 결합하곤 한다는 사실은 부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인칭 글쓰기의 압력은 곧 대상화 과정에 수반되어야 하는 반성에의 압력이기도 하다. 소설 작가에게 있어서 어떤 정치적 입장의 표명이란, 인물이나 사건의 설정이나 묘사를 해나가는 재현 행위 전반에 닿아 있기에 곤혹스러운 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작가는 글을 써나가는 매순간 자기와 대면해야 하는 힘겨운 과제를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된다. 가령 가정폭력에 노출된 여성은 어떻게 재현해야 하는가. 폭력에 노출된 여성을 상세히 묘사하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될 수 있다. 힘겨운 장애를 짊어진 이웃의 모습은 어떻게 재현해야 하는가. 장애를 상세히 그려내는 것은 폭력적이지만, 그것이 마치 장애가 아닌 것처럼 그려내는 것 또한 폭력이 될 것이다.6 그렇다면 자신의 입장을 포괄하면서도 대상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 재현이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나’의 시야에서 세상을 재구축하고 같은 고민을 공유한 ‘나’를 만난다는 사태는 이렇듯 중요하다. 이 질문을 공식화한 것만으로도 일인칭 글쓰기는 문학적 사유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일인칭 글쓰기가 괴물로 화하는 단계가 있다. 일인칭 글쓰기는 언제나 ‘정치적 올바름’ 자체를 위한 글쓰기로 경사될 위험에 노출된다. 나 자신을 직접 보이는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이야기를 한다는 것만으로 윤리적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느끼는 순간에 윤리적 입장은 나르시시즘의 재료로 소모되고 만다. 아울러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에서 나오는 윤리적 엄격함이 언어와 표현의 제약을 가져온다면 그야말로 일인칭 글쓰기가 지녔던 ‘~해도 괜찮아’의 전위적 미덕을 스스로 배반하는 것이다. 어떤 일에도 정답은 없다는 믿음하에 자신만의 답을 구하겠다고 선언했던 당초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지극히 개인적인 대화의 형식을 표방하는 에세이가 표지와 제목만 다를 뿐 엇비슷한 알맹이를 담은 채로 팬데믹 시대 우울의 특효 처방인 양 팔려나가는 모순적 상황과도 비슷하다고 하겠다. ‘~해도 괜찮아’의 문법은 너무 쉽게 공감하거나 너무 쉽게 위로받지 않는 ‘나’, 그리하여 결국은 새로운 삶의 태도를 찾아내고야 마는 ‘나’들의 연대가 될 때 의미가 있다. 타인이 부여한 권위와 자신이 만든 환영 사이를 가로질러 ‘나’로 향하는 사유, 이것이 일인칭 글쓰기 시대의 문학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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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황에 지친 심신 힐링 에세이 열풍… 6가지 키워드로 본 2012 출판계」, 국민일보 2012.12.27.↩
- 「[2020 자살 리포트]위기의 10대 “어른한테 털어놓으면 나아져요?”」, 『시사저널』 1597호(2020.6.2). 이 기사에서 박성의 기자가 인용한 미미시스터즈의 노래 「우리, 자연사하자」의 가사 일부를 재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너무 열심히 일하지는 마. 일단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너무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지 마. 일단 내가 살고 볼 일이야. 힘들 땐 ‘힘들다’ 무서울 땐 ‘무서워’ 말해도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
- 박솔뫼 『그럼 무얼 부르지』(2판), 민음사 2020.↩
- 박솔뫼 『우리의 사람들』, 창비 2021.↩
-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0.↩
- 테러의 참혹함을 관객에게 보다 생생하게 전달할 목적으로 이미 숨을 거둔 인물의 얼굴을 카메라 쪽으로 돌려놓는 사진작가의 사례에 대한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논평을 참조해보자. 테러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다는 공공성에 봉사한다 치더라도, 자신의 얼굴을 관객의 교육을 위한 자료이자 도구로 전시해야 했던 망자는 재현의 순간에 사물이나 다름없는 타자로 취급받은 것이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