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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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호텔 타셸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가 있음. wimwenders@naver.com

 

 

 

구멍

 

 

구멍에게 요구한다. 빛을

뚫기 전에는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한밤중처럼

우리는 묵묵하고 끈끈했다

한낮에는

 

구멍으로 빛이 들어왔다

환호가 구멍으로 새어나갔다

원래부터 빛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원래부터 빛을 사랑해왔던 것처럼

우리는 환히 궁금해졌다

 

빛은 얼마큼 커질 수 있을까

빛은 어디까지 들어올 수 있을까

 

잘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서

우리의 두 눈에는 빛이 들었다

 

타령은 느긋하게 시작되었다가

목마름이, 입맛이, 헛기침이 되었다

우리는 어린아이

빛의 규모를 상상하며

젓가락처럼 목을 빼고

우리는 늙은이

빛의 세기를 어림하며

빈 컵들처럼 길어진다. 나란해진다

 

돈 나올 구멍이 필요해. 쌀 나올 구멍이 필요해

숨쉴 구멍이,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이 필요해

구멍 뚫린 쌀자루처럼

우리는 줄줄이 늘어놓았다

빛을 틀어막듯

 

구멍은 자꾸 커지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안간힘처럼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빛이 흐르던 눈에는

윤기가 흐른다

 

우리는 애늙은이

꿈을 꾸며 걱정을 한다

무럭무럭 걱정하는 꿈을 꾼다

 

그곳이 여백인지는 꿈에도 모르고. 그곳이 꿈속인지는 꿈에서도 모르고

한숨이 구멍으로 새어나갔다

나올 줄만 알았던

들어올 줄만 알았던

빛이 사라졌다

넘치면서 부족한,

 

우리가 구멍을 뚫었다

 

후렴처럼

한밤중처럼

우리가 줄지어 구멍을 뚫고 있다

 

 

 

다움

 

 

파란색과 친숙해져야 해

바퀴 달린 것을 좋아해야 해

씩씩하되 씩씩거리면 안돼

친구를 먼저 때리면 안돼

대신, 맞으면 두배로 갚아줘야 해

 

인사를 잘해야 해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해

받아쓰기는 백점 맞아야 해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돼

밤에 혼자 있어도 울지 말아야 해

일기는 솔직하게 써야 해

대신, 집안 부끄러운 일은 쓰면 안돼

거짓말은 하면 안돼

 

꿈을 가져야 해

높고 멀되 아득하면 안돼

죽을 때까지 내 비밀을 지켜줘야 해

대신, 네 비밀도 하나 말해줘야 해

 

한국 팀을 응원해야 해

영어는 잘해야 해

사사건건 따지려고 들면 안돼

필요할 때는 거짓말을 해도 돼

대신, 정말 필요할 때는 거짓말을 해야만 해

가족을 지켜야 해

 

학점을 잘 받아야 해

꿈을 잊으면 안돼

대신, 현실과 타협하는 법도 배워야 해

돈 되는 것을 예의 주시해야 해

돈 떨어지는 것과 동떨어져야 해

 

내 주변 사람들에겐 항상 친절해야 해

대신, 나만 사랑해야 해

나한테만 베풀어야 해

 

뭐든 잘해야 해

뭐든 잘하는 척을 해야 해

나를 과장해야 해

대신, 은은하게 드러내야 해

적당히 웃어넘기고 적당히 꾀어넘길 줄 알아야 해

눈치를 잘 살펴야 해

눈알을 잘 굴려야 해

 

다움은 닳는 법이 없었다

다음 날엔 다른 다움이 나타났다

꿈에서 멀어진 대신,

대신할 게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비밀처럼

 

다움 안에는

내가 없었기 때문에

다음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