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특집│문학, 정치, 민주주의
‘문학의 정치’를 다시 생각한다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저서 『개념비평의 인문학』, 역서 『단일한 근대성』 『패니와 애니』(공역),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1. 까다로운 ‘문학의 정치’
2000년대 말에서 2010년대 초반에 걸친 ‘문학의 정치’ 논의는 당시 금기까지는 아니라도 추문으로 취급받던 문학과 정치의 결합을 당당히 선언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참신성이 의아할 만큼 그 이래 정치성이나 사회성은 당연한 듯 한국문학의 뚜렷하고 우세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영화 「기생충」(2019)이나 최근 공개된 드라마 「오징어 게임」(2021)의 글로벌한 성공을 감안하면 이 특징은 비단 문학만이 아니라 이른바 K-문화의 한 변별성이라 말할 수조차 있을 것 같다. 여기에 같은 기간 한국사회를 뒤흔든 여러 ‘사건’의 외면할 수 없는 위력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2009년의 용산과 2014년의 세월호, 그 견딜 수 없음이 촉발한 촛불혁명이라는 거대한 전환의 요구, 뒤이은 페미니즘 리부트 등 공동체의 정당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방식으로 공동체 자체의 존재감을 강력하게 실감케 하는 시간이 이어졌고, 숨 돌릴 틈 없이 닥친 코로나19 팬데믹은 이 실감을 한층 강화했다.
‘감각의 재분배’ 같은 모호한 번역에 편승해 문학의 정치를 언어의 자율성과 감각적 새로움의 문제로 환수하려는 일부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논의가 기댄 자끄 랑씨에르(Jacques Rancière)의 핵심 주장이 ‘누구나’ 또는 ‘어떤 것이든’ 문학의 시민권을 갖는다는 문학적 평등의 발상에 있고, 이것이 정치적 평등과 곧바로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긴밀히 공명한다는 인식이 이루어졌다. 그 영향으로 ‘몫 없는 자의 몫’이라는 표현이나 ‘포함과 배제’라는 구분법, 몫 없음과 배제의 ‘가시화’가 갖는 중요성이 널리 공유되었고, 정치성을 둘러싼 해석 면에서 문학의 정치는 현실정치와 상당 부분 근접하는 듯했다. 권리에서 배제되어 몫을 갖지 못한 사람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배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려져 있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몫을 돌려놓는 일이 문학에서나 정치에서나 주요하고 심지어 선차적인 민주주의적 의제로 부상했다.
그런데 ‘합당한 몫’이란 ‘포함’의 실행으로 간단히 해소되는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포함과 배제가 지나치게 단순한 구분이기 때문이다. ‘포함’이라는 단어는 안과 밖으로 이루어지는 경계를 함축하는데, 가령 시민권이라는 공식 경계가 확실한 국가를 떠올려보자. 국가의 경계 밖으로 배제된 대표적 사례는 난민이고, 이들이 겪는 극심한 곤경은 실제로 일국적 층위나 글로벌한 층위 모두에서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 되었다. 하지만 즉각 국경을 개방하고 시민권을 부여해 이들 모두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지젝(S. Žižek)이 지적했듯이 “내심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가장 위선적인” 제안일지 모른다.1 그 점을 차치하고라도 배제를 향한 비판에는, 국가에 이미 포함된 사람들이 겪고 있으며 간신히 시민권을 획득한 난민들도 조만간 겪으리라 예상되는 (배제 상태에 비할 바는 아니라도) 극심한 불평등 문제가 별도로 남는다. 불평등 구조는 ‘포함과 배제’의 프레임으로 온전히 번역되지 않아서 구조의 어디에 위치해야 온전한 ‘포함’이 되는가, 나아가 이 구조에 온전히 포함되는 것이 도대체 바람직한가 하는 의문들이 비어져 나오는 것이다. 현실이 포함과 배제라는 구분으로 조직화되어 있다고 보는 프레임은 계속해서 새로운 배제를 발굴하는 데 집중함으로써 포함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접어두는 한에서만 효용이 유지된다.
문학의 시민권이라는 면으로 접근하면 문제는 좀더 복잡해진다. 문학적 재현이라는 ‘몫’을 이제껏 누리지 못한 이들, 나아가 동식물과 사물들까지 담아내려는 노력은 구태여 정치성을 앞세우지 않고도 문학의 지난 역사가 꾸준히 해오던 일이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근대 이래의 문학 전반이 ‘포함의 확대’로서의 민주주의적 지향을 품고 있었다 해도 무방하지만, 같은 이유로 이 진술이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의미를 전달하지는 못한다. 의미있는 문학적 질문은 재현 여부만이 아니라 어떤 재현인가에까지 이른다. 문학에서 몫 없는 이들에게 합당한 몫을 부여한다는 것은 몫이 없다는 사실을 꾸준하고 여실하게 재현하는 일일까, 아니면 어떤 다른 종류의 몫을 마련하는 (그럼으로써 몫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만드는) 일일까? 이런 불가피한 질문들에 비추어 보면 ‘포함과 배제’라든지 ‘몫’이라든지 하는 표현, 그리고 그런 것들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민주주의 개념이 정치적으로 다분히 미흡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대목에서 얼핏 1980년대의 문학적 주제들, 특히 ‘민중’을 키워드로 한 여러 논쟁이 떠오르지만, 다른 모든 부문과 마찬가지로 문학의 정치에서도 그사이 다른 요소들이 많이 개입되어왔다. 그 가운데 ‘차이의 정치’ 또는 ‘타자의 정치’가 문학에 미친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포함과 배제라는 프레임이 어쨌든 평등의 정치라는 범주로 분류될 수 있다면, 차이와 타자성에 대한 강조는 ‘존중’의 태도를 거의 절대적 경지에 이르도록 앞세울지언정 평등의 실천으로서의 재현을 앞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재현 불가능성과 알 수 없음에 대한 겸허한 인정이 주된 가치가 되고, 그런 만큼 재현의 정치보다는 재현의 ‘윤리’에 방점이 찍힌다. 그에 따라 재현 대상에 더욱더 조심스럽게 접근할 것이 권장되면서 여하한 객관화나 보편화도 타자를 향한 폭력처럼 생각되고 그런 폭력을 미세한 수준까지 감지하고 추적하는 태도가 정치적·윤리적 덕목이 된다. ‘몫이 없는 자’와 ‘타자’라는 범주는 다행스럽게도 양립 가능하고 심지어 중첩되는 듯 보이지만, ‘몫 없음’을 가시화하는 문학과 ‘타자의 알 수 없음’을 존중하는 문학 사이의 거리는 (각각의 한계나 난관과 별도로)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문학의 정치성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서 광범위한 동의를 얻은 반면, 문학의 정치는 한층 수행하기 까다로운 실천이 되었다.
랑씨에르의 논의부터 그랬지만 문학의 정치는 애초에 문학의 ‘이미 그러한’ 역능에 대한 관찰이지 문학에 부과된 규범 같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본연’의 역능이라 해서 그것을 제대로 실현하려는 의식적 지향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정의를 둘러싼 분투를 포기할 때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와 태도에 집착하는 것처럼, 문학 역시 스스로의 정치성에 대한 탐구와 질문을 접어둔 채 협소하게 규정된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학에 속박당할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현실의 정치가 근본적인 변화를 향한 대담한 기획을 통해 고작 ‘틀리지 않는’ 데 연연하는 한계를 벗어나야 하듯이, 오늘날 문학의 정치는 정치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올바른 듯 보이는 문학적 경향과의 대결에서 강력하게 발동되어야 하리라 본다. 이제 그 대결을 요청하는 몇몇 구체적인 지점들을 살펴보자.
2. 센티멘털리즘이라는 ‘오차’
역사에 대한 해석이 이념적 쟁점이 되고 밝혀져야 할 역사적 사실이 터무니없이 오랜 세월 묻혀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문학의 정치성이 역사로 향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역사기술 자체가 정치적 서사라는 주장이 나오는 한편, 문학적 서사는 자주 역사기술의 성긴 서사가 누락한 것들에 집중함으로써 정치성을 발휘한다.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가 향하는 역사는 4·3과 보도연맹이다. 두 사건 모두 진실은 물론이고 고통과 애도마저 오래 억압되었던 역사로서, 광주의 역사를 탁월하게 서사화한 작가의 눈길이 이 사건들에 닿은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인과처럼 보인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실제로 일종의 후일담처럼 『소년이 온다』(창비 2014)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소설 초입에 작가 자신을 연상시키는 화자 경하가 “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낸 지 두 달 가까이 지났을 때”(11면)라고 밝힌 대목에서 그 ‘책’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화자는 눈 덮인 검은 나무들이 묘비로 서 있는 봉분들로 밀물이 몰려오고 묻힌 뼈들이 당장이라도 쓸려갈까 어찌할 바 모르는 꿈을 반복해서 꾸는데, 이 역시 전작이 남긴 영향임이 분명하다. 이런저런 악몽은 그 책 집필을 위해 자료를 읽으면서 시작되었고 책을 쓰는 과정에서 점점 삶을 비집고 들어왔으며 책을 끝낸 이후에도 종결되지 않는다. 화자가 다큐멘터리 감독인 친구 인선과 바닷가 묘지 꿈을 토대로 공동작업을 기획하려는 생각마저 어느새 포기하고, “나를 떠난 사람들이 못 견뎌했던 방식으로 살고 있다, 아직도”(28면)로 요약되는, 생명력을 잠식당한 상태로 간신히 나날을 보내는 지점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화자가 겪는 것은 『소년이 온다』가 그토록 통렬히 응시한 역사의 트라우마의 연장일 것이다. “그 시기의 당사자에 국한되지 않고 후세의 사람들에게까지 전승”2된다는 점이 역사적 트라우마의 특징이라면, 역사적 트라우마가 갖는 또다른 특징이자 역설은 그것이 극복되기 위해서도 전승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전승되어 이어지지 못할 때 도리어 깊어지는 트라우마이기 때문으로, ‘전승’에 대한 금지와 억압 속에서 광주의 트라우마가 얼마나 더 혹독해졌는지 떠올리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끝나지 않는 악몽을 두고,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스럽게—바라고 있었던 것일까?”(23면)라고 묻는 화자의 말 속에도 전승의 역설이 함축되어 있다. ‘순진하게’와 ‘뻔뻔스럽게’의 겹침이 일러주듯이 사건의 트라우마는 손쉽게 여읠 수 없을 뿐 아니라 여의어서도 안 된다. 사실과 다짐을 결합한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소설 제목이 이 점을 단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적 트라우마의 극복에 전승이 전제된다 해도 그 전승이 어떻게 동시에 극복일 수 있을까? 역사의 고통, 그것도 트라우마 같은 고통을 전승한다는 것 자체가 주어진 모든 형식을 초과하는 아득한 임무로 보이며, 트라우마의 ‘벌거벗은 반복’이라는 불가능한 위치를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화자의 기진한 삶은 그 ‘불가능함’을 나타내는 증거이며, 그 점은 화자가 바닷가 묘지의 꿈을 해석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때 알았다.
파도가 휩쓸어가버린 저 아래의 뼈들을 등지고 가야 한다. 무릎까지 퍼렇게 차오른 물을 가르며 걸어서, 더 늦기 전에 능선으로. 아무것도 기다리지 말고, 누구의 도움도 믿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등성이 끝까지. 거기, 가장 높은 곳에 박힌 나무들 위로 부스러지는 흰 결정들이 보일 때까지.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26~27면)
삶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물에 잠긴 무덤들을 버리고 가야 한다는 이 ‘앎’은 사실 삶이 계속될 수 없는 이유를 확인하는 데 가깝다. 무덤과 함께 잠기거나 그것을 등지고 가는 것 모두 실은 취할 수 없는 선택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화자가 수락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이 악몽을 지속하는 것이며, 그 고통만이 삶에 허용된 유일한 유예처럼 보인다. 트라우마의 전승에 대한 충실성을 입증하듯 이 소설은 시작부터 고통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화자의 악몽과 고립은 어떤 면에서 마지막까지 끝났다고 장담하기 어려우며, 손가락이 절단당한 데 이어 봉합된 신경이 죽지 않도록 삼분에 한번씩 바늘로 찔리는 인선의 고통은 퍼져나가는 파문과도 같이 소설 전체를 일거에 그 감각적 존재감 속에 포괄한다. 병원에 입원한 인선을 대신해 하루가 다 가기 전 화자가 인선의 제주 집에 도착해서 물을 주지 않으면 죽게 될 앵무새 ‘아마’의 고통이 진행 중이며, 극심한 두통과 위경련에 시달리는 화자가 엄청난 눈보라와 추위 속에 거의 생명의 위협을 겪으며 인선의 집에 당도하는 과정이나 눈 덮인 언 땅을 파헤쳐 이미 죽은 아마를 묻고 전기가 끊어진 가운데 한기에 시달리는 과정의 신체적 고통이 생생하다. 이 모든 한계 상황이 소설 1부에 휘몰아치고 그 마지막에 열에 들떠 거의 의식을 잃어가는 화자는 자신이 인선의 제주 집에 “죽으러 왔”다고, 그것도 “베어지고 구멍 뚫리려고, 목을 졸리고 불에 타려고 왔다”(172면)고 생각한다.
이어지는 2부는 무덤을 덮친 바닷물이 빠져나가고 악몽들이 떠나는 것으로 시작되면서 전환을 암시하지만, “그들과 싸워 이긴 건지, 그들이 나를 다 으깨고 지나간 건지 분명하지 않았다”(177면)는 화자의 말처럼 어떤 전환인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화자 앞에 느닷없이 등장한 인선이 죽어 혼으로 찾아온 것인지 아니면 화자의 다른 꿈속을 찾아온 것인지부터 불명확한데, 이 설정은 혼으로서든 꿈으로서든 그 차원에 적합한 맥락과 리얼리티로 보강되지 않은 모호함 자체로 남는다. 화자가 광주의 ‘흔적’에 붙들려 있듯이 인선도 어머니가 겪은 4·3의 흔적 속에 있고, 화자와 인선은 거울상으로 마주 세운 듯 서로를 비추는 관계이다. 따라서 둘 사이의 반복과 차이가 만드는 변주의 설득력이 중요해진다. 인선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구부정한 등과 끔찍하게 여린 목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고 비겁한 인간의 모습으로”(78면) 자신의 삶을 옥죈다고 생각했지만, 끝내는 정신을 놓은 어머니를 잃은 후에야 어머니가 제주에서 체포되어 대구에 수감되고 결국 보도연맹 학살로 희생된 외삼촌의 흔적을 누구보다 열심히 찾았고 또 실패했음을 알게 된다. 2부는 인선이 화자에게 부모, 특히 어머니의 처참한 사연을 들려주고 어머니가 모아온 자료들을 보여주는 내용이 중심이다. 인선은 학살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지 않겠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화자는 “피에 젖은 옷과 살이 함께 썩어가는 냄새, 수십 년 동안 삭은 뼈들의 인광이 지워질 거다. 악몽들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갈 거다.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이 제거될 거다. 사 년 전 내가 썼던 책에서 누락되었던, 대로에 선 비무장 시민들에게 군인들이 쏘았던 화염방사기처럼. 수포들이 끓어오른 얼굴과 몸에 흰 페인트가 끼얹어진 채 응급실로 실려온 사람들처럼”(287면)이라 짐작한다. 화자와 인선이 감당하는 고통의 전승에는 이렇게 ‘재현의 윤리’라는 문제도 한자락 얹혀 있다.
그럼에도 화자와 달리 인선이 어떻게 고립을 버텨내면서 화자가 제안했다가 철회한 공동 프로젝트를 혼자 준비할 수 있었는지는 2부에서 뚜렷이 제시되지 않는다. 마지막 짧은 3부에서 인선은 화자를 공동작업의 공간이 될 장소로 이끈다. 거기서 인선은 학살의 환각에 시달리면서 자신에게 매달리던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다는 것을(314면) 깨달았으며 어머니에 이어 자료를 수집하던 과정에서 자신 역시 경계를 넘나드는 고통에 노출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학살당한 아이들을 생각하던 어느날 휘몰아치는 돌풍을 맞으며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찾아왔음을 전한다.
한 발씩 힘껏 땅을 디디고 그 바람을 가르며 걷던 한순간 생각했어. 그들이 왔구나.
(…)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거나 실제로 미쳤을 거야.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318면)
인선처럼 심지 굳은 예술가에게 이런 느낌이 찾아올 개연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 경험은 갑작스럽기도 하거니와 성격상 그것이 가져온 변화가 당사자가 아닌 누군가로 전이되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이후 인선의 모습은 혼인지 꿈인지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눈 속에서 기척이 지워지고, “네 손이 잡히지 않는다면, 넌 지금 너의 병상에서 눈을 뜬 거야”라는 기원과 확신이 섞인 말과 함께 화자가 부러진 성냥으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324~25면) 같은 불꽃을 만드는 것으로 소설은 끝나는데, 이런 결말 역시 뚜렷한 변화나 전환을 실감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설정의 모호함에 더해 점점 응집력을 잃은 파편들로 흩어지면서 2, 3부의 서사는 대목 대목의 묘사들은 선명한데도 전체적으로는 흐릿한 인상으로 남는다.
그리하여 서사 전체가 그것으로 뒤척이고 있다고 할 만큼 고통은 이 소설의 지배적 현실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육박하는 것은 1부에 재현된 ‘실시간’의 고통이며 소설 전체에 파장을 남기는 그 고통에 견줄 때 4·3의 트라우마조차 배음으로 놓인다. 더불어 ‘가장 나약한 사람’으로 보였던 인선 어머니가 끝내 성공하지 못했을망정 누구보다 오래고 끈질기게 ‘오빠’의 행방을 찾으려 기울였던 노력도 희미하게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 전승이라는 문제는 어떤 전치(轉置)의 위험에 봉착한다. 역사적 트라우마의 전승에 대한 충실성이 역사 자체를 밀려나게 하고, 재현의 윤리를 둘러싼 고통이 재현하려는 고통보다 앞서 다가오는 것이다. 이 전치는 결코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애초에 설정된 ‘불가능한’ 위치가 실제 좌표에 찍힐 때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오차’이다. 이제 고통과 흔적은 역사적 사건에서 화자 자신 쪽으로 옮겨오며 전승의 문제는 고통의 진정성으로 초점이 바뀐다. 물론 이 소설은 진정성의 감상적 과시와 무관하고 감정적 허위를 경계하는 자기불신의 강박에 가깝다. 하지만 오로지 고통의 강렬함에 의지하는 방식은 강렬한 감정일수록 진실을 담보한다는 도식에서나 감정의 당사자인 ‘나’의 문제 곧 자기반영성이 전면에 나선다는 점에서나 센티멘털리즘의 논리 안에 있다. ‘재현의 윤리’에 오래 머물수록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모호해지는 아이러니의 원인도 여기에 있다.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재현 대상에 여전히 초점을 맞춘다면, 재현의 윤리는 ‘재현할 수 없음’이라는 대전제를 고민하는 ‘나’를 중심에 세우고 그 고민의 진정성으로 재현의 책임을 대체할 위험에 노출된다.
여기서 잠시 『소년이 온다』를 떠올려보자. 『소년이 온다』에서 역사적 트라우마는 두 방향으로 이끌린다. 한편으로 소설은 광주를 겪은 인물들에게 지속되는 “방사능 피폭”(207면) 같은 엄청난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역사를 남겨둔 채 소설만이 트라우마의 ‘승화’에 다다르는 일을 마지막까지 경계한다. 하지만 소년 동호가 총에 맞은 친구를 두고 도망친 후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45면)라고 결심하고 도청에 남았듯, 광주항쟁 자체가 ‘살아남은 자’의 트라우마를 온전히 끌어안은 채로 한걸음 내디딘 사람들이 수행한 사건임을 소설은 보여준다. 동호가 슬픔과 고통을 불러오는 인물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를 살아 있게 하고 또 “저기 밝은 데”(192면)로 이끌 수 있는 것, 그리고 광주가 또한 우리를 그 이름만큼의 ‘밝은 데’로 이끌 수 있었던 것도, 그 사건이 트라우마이면서 동시에 이미 트라우마의 극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3 이 두 방향의 긴장을 가까스로 견디며 어디로도 치우치지 않은 점이야말로 이 소설의 남다른 성취라고 하겠는데, 당연하게도 이런 종류의 성취는 매번 새롭게 수행되는 것이다.
『소년이 온다』가 보여주었듯이 트라우마를 남긴 역사적 사건이라도 사건 전체가 트라우마로 환원되지는 않으며, 역사의 전승 역시 트라우마의 전승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이 트라우마의 전승을 요구한다는 사실, 후세에까지 트라우마를 쉽게 떨칠 수 없게 한다는 사실 자체가 사건에 트라우마 이상의 공적인 힘이 있음을 가리킨다. 전승이 극복과 이어질 가능성도 이 힘에서 비롯될 것이고 고통의 진정성이라는 센티멘털리즘의 회로를 벗어날 실마리 역시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성에 충분한 댓가를 지불한 이 소설 덕분에 문학의 정치는 이제 그 불가능한 자리를 떠날 용기를 얻는지도 모른다.
3. 공동영역을 향한 인지감수성
센티멘털리즘이 정치성과 멀지 않다는 점은 감정을 특권화하고 이를 토대로 도덕적 질서를 구축하려 한 18세기의 센티멘털리즘 기획에서부터 뚜렷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센티먼트’(sentiment)라는 단어 자체가 규범과 감정을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혁명이라는 정치적 사건을 센티멘털리즘의 개화와 쇠퇴로 재구성한 윌리엄 레디(William M. Reddy)에 따르면, “프랑스혁명기가 정치사상과 실천의 전체 역사에서 지극히 이례적”인 이유는 그 시기에 “정치는 전적으로 감정적인 것”이었고 “올바른 정책이란 자유를 위하는 불타는 열정이 권고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이다.4 그런데 도덕적 내지 정치적 삶에서 감정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합당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센티멘털리즘의 기제는 이내 과열되면서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결과에 봉착한다. “미덕은 감정에서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에, 감정의 극단들(…)은 유덕한 것”이라는 의식이 일단 자리 잡으면, “감정이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그 감정은 자연적이고 선한 것으로 여겨”져 점점 더 과잉이 초래되고, 이런 강화기제가 결국은 감정의 진실성에 대한 불신으로 귀착되는 것이다.5 프랑스혁명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 전개된 영국 낭만주의가 자발적 감정을 강조하면서도 감정과잉에 내재된 자기탐닉을 경계한 것도 혁명기의 센티멘털리즘에 대한 성찰의 일환일 법하다. 이후 ‘센티멘털’이라는 말은 ‘센티먼트’가 함축한 ‘감상(感想)’의 긴장된 결합체를 가리키기보다 ‘감상(感傷)’의 치우침을 비난하는 데 주로 사용되고, 더불어 감정 자체가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되도록 무시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최근 정치 영역에서 감정은 새롭게 주목받고 있고, 정동(affect)을 둘러싼 관심과 논의도 이를 반영한다. ‘감정노동’이라는 분류가 말해주듯 감정이 관리되고 동원되고 착취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한편으로, 생각이나 이념과 반드시 함께 가지는 않는 감정의 자율성과 역량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감정이 인간의 사적인 삶만이 아니라 공적인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알아보게 된 것은 현실을 더 풍부하고 깊이있게 이해하게 해주며,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권리에 대한 적극적인 주장은 ‘합당한 몫’이라는 의제에서도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이렇게 감정의 정치적 존재감이 커질수록 그것이 센티멘털리즘의 기제나 사적인 권리 주장에 얽매이지 않도록 어떤 ‘공동영역’(commons)의 지평 속에서 파악할 필요도 커진다.
‘일인칭 글쓰기 시대’의 도래를 말한 정주아는 “‘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해석되고 시야가 제한되는 특징을 삶의 태도로 기꺼이 수용”할 뿐 아니라 그렇듯 “자기중심적으로 제한되고 좁아지는 시야는 도리어 자아정체성의 선명한 발현으로, 나아가 정치사회적으로 분명한 태도를 표명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현상에 주목한다.6 이런 글쓰기가 “수많은 ‘나’들을 정치적 주체로서 발언하게 만들”어준다는 평가는 앞서 살핀 ‘누구든 또 어떤 것이든’ 포함하는 문학의 정치와 맞닿아 있다. 그러면서도 정주아는 일인칭 글쓰기가 “언제나 ‘정치적 올바름’ 자체를 위한 글쓰기로 경사될 위험에 노출된다. 나 자신을 직접 보이는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이야기를 한다는 것만으로 윤리적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느끼는 순간에 윤리적 입장은 나르시시즘의 재료로 소모”된다는 경고도 덧붙인다.7 ‘나’가 스스로에 관해 하는 이야기는 ‘올바른’ 재현이고 따라서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논리가 작동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일인칭’에 ‘감정’이 더해지면 이 논리에 따른 올바름의 보장은 더욱 확실한 것이 된다. 감정이야말로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일인칭적 재현이 올바르다고 주장하기가 가장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위험은 부수적 결과라기보다 ‘자기중심적으로 제한되고 좁아지는 시야’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일인칭 글쓰기의 특징과 맞닿아 있고, 사실상 ‘정치적 올바름’ 내지 ‘정치적 정답주의’ 자체가 바로 이런 유형의 일인칭적 긍정을 내포한다. 그것은 “사태를 파악하기 위한 표준이 어떤 사람이 그 사태를 어떻게 느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는 입장이며, 특히 “‘자신이 상처받거나 모욕당했다고 느끼는 이는 옳다’는 (…) 기본 원칙”에 따라 “사태의 모든 객관적 해결에 있어서 상처와 모욕에 대한 감수성의 우위를 허용”함으로써 결국 “공적인 장소를 개인의 감수성(…)에 예속시키”기 때문이다.8
문학에서 ‘자신’을 말하는, 심지어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서사가 다른 무엇 못지않게 허위의식에 노출되기 쉽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고, 이를테면 자서전조차 당사자에 대한 올바른 진술로 가득한 서사로 생각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일인칭의 올바름에 면역력을 쌓아온 문학조차 그 압박을 느끼는 현상이 ‘몫 없는 자의 몫’이라는 명제와 연결된 일이라면, 문학의 정치가 그 지점에서 한걸음 나아가야 할 필요성이 더욱 분명해진다. 일인칭적인 글쓰기가 늘어나고 일인칭적 감정에 주목하는 현상 자체는 당연히 환영할 만한 문학적 민주주의의 진전이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이 정치 영역을 개인의 감수성으로 사유화하듯이, 일인칭의 차원에서 올바름이 확정된다고 보는 것은 ‘협동적 창조’를 통해 문학적 의미와 진실을 발생시키는 공동영역을 부인하는 셈이며 문학을 일인칭들의 사유지로 바꾸는 일에 다름 아니다.9 공동영역을 구성할 잠재력을 폄하하는 점에서 그런 사유화는 궁극적으로 일인칭의 권리에 대한 존중은 물론이고 그 감정에 대한 온당한 존중도 못된다. 따라서 오랜 문학적 지혜를 발휘하여 어떤 것도 문학이라는 공동영역에서 만나기 앞서 미리 올바른 것으로 통용될 수 없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문학의 정치는 더 많은 일인칭들의 ‘포함’과 더불어 이 공동영역을 인지하고 더욱 살아 있게 만들 임무를 갖는다.
그런데 공동영역에 대한 ‘인지감수성’은 문학적 서사의 내부, 가령 한편의 소설에서는 어떻게 발휘되는 것일까? “이제껏 성취된 인간 표현의 최고 형식”이라며 장편소설 장르를 높이 평가한 D. H. 로런스(D. H. Lawrence)는 소설에서는 절대적 진실이나 계명 같은 건 없고 “신의 입에서 나왔건 인간의 입에서 나왔건 모든 계명은 엄밀히 상대적이며 특정한 시간과 장소, 상황에 들러붙어 있”다고 강조한다. 소설에서는 “말씀의 흰 비둘기”가 절대적 진실인 양 날아다니다가는 고양이한테 혼쭐이 나기 쉽고, “밟고 넘어질 바나나껍질이 있으며 건물 어딘가에 변소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 관계 속에서 진실이지 그 이상은 아니”10라는 사실이 잘 드러나려면 무엇보다 ‘고양이와 바나나껍질과 변소’를 포함하는 그 ‘관계’가 충실히 제시되거나 환기되어야 한다. 관계의 전체성을 향한 노력이 서사 내부에 진실의 민주주의적 경합을 북돋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노력은 재현을 둘러싼 극도의 윤리적 조심성과 자기재현의 올바름에 대한 윤리적 확신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현 상태를 돌파하는 데도 중요하다.
로런스가 말한 소설의 장르적 역량은 ‘억압된 것의 회귀’라는 방식으로도 발현된다. 소설에서 ‘고양이와 바나나껍질과 변소’는 설령 서사에서 배제되더라도 그 바깥 어딘가에 유령처럼 떠돌며 자신들의 존재를 지운 서사를 의심하게 만든다. 최은영의 장편소설 『밝은 밤』(문학동네 2021)을 보자. 화자인 ‘나’ 지연-엄마 미선-할머니 영옥-증조모 삼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4대에 걸친 여성 계보를 아우른 이 소설은 구도상 가부장 중심의 가족연대기를 의식한 일종의 대항서사이며 그런 만큼 가부장제를 향한 비판적 시선이 뚜렷하다. 특히 중심 계보에 속한 여성들과 가족관계로 묶인 아버지, 남편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인데, 이는 개인적인 성격이나 기질이기보다 가부장적 이념을 체화한 데서 기인한 바 크다. 비교적 비중있게 그려진 증조부는 백정의 딸로 천대받던 증조모 삼천의 호기심 많고 당당하고 활달한 모습에 끌리고, 삼천이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갈 위험까지 커지자 고향과 가족을 등지고 개성으로 함께 달아나 결혼한다. 천주교 신자로서 순교의 삶에 끌렸던 그는 이 과정을 희생과 구원으로 느끼며 고양되지만 그 “허영심의 힘”(60면)이 점차 약화되고 아내가 구원받은 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그지없는 존경과 감사의 태도를 보이지 않자 “남편으로서의 일말의 권위”마저 위협당한다고 느끼며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61면)간다. 딸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여서 전쟁으로 피란길에 나설 때도 “그는 가장 좋은 자리에서 잠을 잤고 어떤 것도 딸에게 양보하지 않았”(217면)으며 딸을 속여 중혼으로 내몰고도 남편 마음을 잡지 못했다고 윽박지르기에 이른다.
이밖에도 북에서 결혼한 아내와 어머니가 뒤늦게 찾아오자 사태의 해결조차 그들에게 미루고 일말의 가책 없이 두번째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떠난 화자의 할아버지, 딸의 눈에 엄마가 “남자와 그 가족으로부터 착취당하기만”(17면) 했다고 비칠 만큼 자기중심적인 화자의 아버지, 그리고 바람을 피워 이혼하고도 화자의 부모에게마저 공감을 확보하는 전 남편에 이르기까지, 이들 모두가 미안함과 죄책감이 없었던 이유는 “그럴 수 있어서 그랬던 것뿐”(228면)이라고 요약되는바, 여기서 그들을 ‘그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의문의 여지 없이 가부장적 관습이다. “아바이, 죽어버려요. 우리 눈에 띄지 말고 죽어버리란 말입니다”(250면)라는 할머니의 말은 이 유구한 관습에 던지는 발언이라 하겠는데, 그렇듯 대항해야 할 ‘가족’제도의 반대편에 놓인 것은 가족관계를 뛰어넘거나 최소한 세대를 건너뛴 여성들 사이의 우애이다. ‘사회적 관계’로서의 역할이 공식적으로 등기된 바 없는 여성들 사이의 관계를 전면에 세운 것이다. 특히 증조모와 새비 아주머니 사이의 면면하고 따뜻한 우정은 상호돌봄을 주조로 하는 자매애의 전범으로 그려지고, 그만큼 한결같지는 않으나 그 딸들인 할머니와 희자도 평생 각인될 우정을 나눈다. 또 하나의 형태는 화자와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와 (새비 아주머니의 고모인) 명숙 할머니로 이루어진 ‘격세’의 우애인데 여기서도 보살핌의 분위기가 지배적이고, 이는 연쇄적으로 화자와 유기된 동물 사이의 돌봄관계로 확장 또는 연장된다.
이처럼 『밝은 밤』의 세계에서 가부장제의 명백한 부정성과 여성연대의 명백한 가치는 정확히 맞물려 거의 공백을 남기지 않는다. 언뜻 그 확연한 구분에서 벗어난 듯한 인물도 논리 차원에서는 다시 회수된다. “생전 본 적도 없던 백정의 집에 가서 간병을 하고, 그 누구의 위에도 서려고 하지 않고, 아내를 귀하게 여기”(81~82면)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남성으로 등장하는 새비 아저씨는 돌봄과 (원폭)피해라는 정체성에서 여성연대 쪽에 속한다. 반면 정상가족과 평범에 집착하게 된 화자의 어머니는 스스로 계보에서 빠져나가 할머니와 단절하고 화자와도 불화하는데, 딸(화자의 언니)의 죽음과 암 투병이 그런 ‘배반’의 댓가처럼 주어져 있다. 지나치게 선명한 이 구도는 『밝은 밤』에서 어떤 미결정의 영역으로서의 ‘밤’을 추방한다. 올바름 여부가 확실치 않은 주장과 질문들이 어둠 속에 맞부딪치며 예측 불가능한 새벽을 맞을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그 때문에 고통받는 인물들이 등장함에도 서사 자체는 이렇다 할 고통을 겪지 않은 채 치유를 향한 직선의 진로를 밟는다.
하지만 추방된 ‘밤’은 서사에 그림자를 남기는데 당연하게도 그 영향은 여성계보 쪽이 감당하게 된다. 요컨대 이 소설에서 우애와 돌봄의 관계는 단정하기만 해서 친밀하고 인격적인 그 관계에 연루될 법한 갈등과 이면을 날카롭게 파고들지 않는다. 따라서 증조모와 새비 아주머니처럼 초기부터 동조화된 관계나 화자와 할머니처럼 ‘격세’의 거리로 조정된 관계에서 빛을 발하는 반면, 더 직접적이고 감정적으로 교착된 화자와 어머니의 관계에서 불화가 일어나고 가라앉는 과정은 어딘지 초점이 어긋나 있고 할머니와 희자 사이의 차이도 적절히 다루어지지 못한다. 하나의 대항서사로서 『밝은 밤』이 겨냥한 것은 물론 절대적 진실이 아닐 것이다. 가려진 상대적 진실에 주목하고 그에 담긴 미덕과 치유력을 보여주려는 이 소설의 지향은 문학의 정치가 힘써 수행해온 ‘포함’의 실천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 상대적 진실을 구축하는 지나치게 들어맞는 구도, 그리고 거기서 밀려난 ‘고양이와 바나나껍질과 변소’의 부재가 어떤 절대적 진실의 분위기를 만들고 그런 만큼 진실의 설득력은 도리어 약화된다.
4. 문학의 ‘자기돌봄’
앞서 살핀 두 소설은 한국문학의 주요 경향으로 자리 잡은 정치성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학의 요구와 부딪히는 지점을 또렷하게 지시해주고, 그런 점에서 이 글의 의도는 이 작품들을 비판의 대상이기보다 고민의 대상으로 제시하려는 것이다. 두 소설을 읽으며 새삼 문학이 세계의 질환을 직접 ‘앓는다’는 말을 생각하게 된다. 그와 이어지는 이야기로 문학은 그렇듯 함께 앓기에 ‘치유’에 다가갈 수 있다고도 한다. 상처받은 감수성에 대한 공감에 머무는 정치적 올바름과 달리 함께 앓고 치유하는 차원에서 문학의 정치성이 힘있게 전개되려면, “먼저 일어나고” “먼저 웃는다”(김수영 「풀」)고 한 저 유명한 시구처럼 세상의 ‘앓는’ 주체가 결코 연약한 주체만은 아니며 돌봄이 필요한 주체는 다소간 이미 스스로 돌보는 주체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 점은 문학 스스로에게도 해당되는데 정치적 올바름과 대결해야 할 오늘의 문학은 특히 어떤 ‘자기돌봄’에 역점을 둘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자유주의 시대에 등장한 ‘자기돌봄’의 유행은 돌봄의 사회적 위기를 회피하는 전략이자 또다른 통제 전략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푸꼬(M. Foucault)의 담론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에게는 그것이 (…) 사회적·개인적 행위와 삶의 기술을 위한 규칙”이자 “시민적 자유가 하나의 윤리로서 반영되는 양식”이었고 ‘너 자신을 알라’(즉 네 주제를 알고 겸허하게 자신을 포기하라)에 방점을 찍는 기독교 금욕주의를 거치며 망각된 공적 가치를 가리키는 개념이기도 했다.11 문학의 자기돌봄을 생각할 때 그보다 앞서 떠오르는 것은 ‘돌봄’이란 “인간을 그의 본질로 되돌려 놓아” 진정으로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며 “존재(Being)의 진리를 지키는” 자로서의 인간 실존이 경험되는 방식이라 한 하이데거(M. Heidegger)의 논의이다.12 문학의 자기돌봄 역시 문학이라는 공동영역을 ‘올바른’ 관념과 감정의 사유화로부터 지키고 문학이 그 ‘본질’로 되돌아가는 실천이라 정의해보고 싶다. 여기에는 그 공동영역이 여하한 진정성 있는 앓음과 치유도 대체할 수 없는 의미와 진실의 발생을 가리키는 이름임을 기억하는 일도 중요하다. 한국문학의 정치성이 이런 의미의 ‘돌봄의 정치’를 통해 한층 야심차게 전개될 것을 믿는다.
--
- 슬라보예 지젝 『왜 하이데거를 범죄화해서는 안 되는가』, 김영선 옮김, 글항아리 2016, 59면. 물론 이것이 난민과 이주민의 문제를 방치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지젝 자신은 ‘공동의 투쟁’을 제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 김종곤 「‘역사적 트라우마’ 개념의 재구성」, 『시대와 철학』 2013년 겨울호 43면.↩
- 이 점에 관한 좀더 상세한 분석으로는 졸고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문학: 『밤의 눈』과 『소년이 온다』」, 『안과밖』 2015년 상반기호 참조.↩
- 윌리엄 M. 레디 『감정의 항해: 감정 이론, 감정사, 프랑스혁명』, 정학이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 235, 269, 293면.↩
- 같은 책 255~56면.↩
- 정주아 「일인칭 글쓰기 시대의 소설」, 『창작과비평』 2021년 여름호 56면.↩
- 같은 글 67~68면.↩
- 로베르트 팔러 『성인언어: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 비판』, 이은지 옮김, 도서출판b 2021, 62, 26면.↩
- 문학에서 공동영역이 의미하는 바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로는 졸고 「문학성과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참조.↩
- D. H. Lawrence, “The Novel,” Study of Thomas Hardy and Other Essay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179~85면.↩
- Michel Foucault, Ethics: Subjectivity and Truth, ed. Paul Rabinow and trans. Robert Hurley and Others, The New Press 1997, 226, 284면.↩
- Martin Heidegger, “Letter on Humanism,” Basic Writings, ed. David Farrell Krell, HarperSanFransisco 1977, 199, 210면. 이로부터 ‘돌봄’의 핵심 일면에 관한 논의가 전개될 수도 있으리라 보지만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