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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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주란 李珠蘭

1984년 출생.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소설집 『모두 다른 아버지』 『한 사람을 위한 마음』 등이 있음.

dddddd28@naver.com

 

 

 

파주에 있는

 

 

네가 이 메일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 혜화에 사는지 궁금해.

 

이틀 전 거의 이년 만에 들어간 메일함에서 현경은 재한의 이름을 보았다. 현경은 메일이 온 날짜를 확인했다. 두시간 전이었다. 재한의 메일은 들어간 메일함 맨 위에 있었다. 만약 현경이 그날 메일함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재한의 메일은 또다시 일이년 만에 읽혔을 것이고 재한이 다음 날 메일을 보냈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 어긋났을 것이다. 현경에게는 그 정도 간격을 두고 예전에 쓰던 메일함을 확인해보는 습관이 있었다. 다른 마음 없이 모니터를 바라보던 얼마간의 시간 동안에는 재한의 메일을 클릭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받은 메일함을 새로 고침했을 때 재한에게서 온 메일은 사라지고 없었다. 현경은 십이년 전의 기록에서 재한의 메일 주소를 찾아냈다.

 

재한에게

 

파주에서 지내고 있어.

 

현경은 그렇게 메일을 보냈다. 재한의 메일 외에는 한국산업단지공단 산업단지 안전 제안 공모제 안내, 의료 인공지능 학습용 데이터톤 대회 소식, 개인정보 이용내역 안내, 취업과 연계되는 국가공인 자격증 안내 메일 등이 와 있었다.

 

다른 건 아니고 근처에 갈 일도 있고 해서.

 

재한이 곧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조금 전 메일의 발송 취소에 대한 얘기는 없이 그렇게만 쓰여 있었다. 어디 근처를 말하는 걸까. 현경은 짧게 그런 생각을 했고 두시간쯤에 걸쳐 쌓여 있는 메일들을 삭제했다.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자 문득 열이 나는 것 같았지만 더운 건지 감기 기운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베란다로 나가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엄마! 뭐 사 오랬지? 아파트 주차장에 선 아이가 고개를 들어 크게 외쳤다. 어느 층인지 베란다에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을 엄마가 너구리!라고 대답했다. 현경은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고, 돌아서서 아파트 상가에 있는 편의점 쪽으로 가는 모습을 보았고 다시 나타난 아이가 묶음으로 된 너구리 라면을 들고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아이는 다시 엄마에게 손을 흔들었고 그러다 손에 쥔 잔돈을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뜨렸다. 으악! 아이가 소리치며 이리저리 다른 방향으로 굴러간 동전들을 주우러 다녔다. 손잡이가 없는 네모난 라면 묶음을 계속 잡고 있기 힘들 텐데 아이는 내려놓을 생각 없이 고개를 숙여가며 어두운 주차장을 돌았다. 다행히 그동안 주차장 안으로 들어서는 차들은 없었고 엄마! 나 다 찾았어! 아이의 외침을 들은 현경은 거실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언니, 저녁은요?〕

〔응, 먹었어〕

〔뭐 먹었어요?〕

〔너구리 한마리 몰고 갔어〕

〔오, 잘 몰고 갔나요?〕

〔그럼! 넌?〕

〔전 무진장 긴 갈치〕

〔잘했네. 좋은 거 많이 먹어〕

〔언니도 라면만 먹지 말고 끼니 잘 챙겨 먹어요〕

〔나 잘 먹어〕

〔거짓말. 참, 낮에 당근즙 보냈어요. 하나씩 꼭 챙겨 먹기!〕

〔아휴, 뭐 하러〕

〔구좌 당근이 너무 맛있더라구요. 싸게 샀어〕

〔고마워, 정원〕

정원과 메시지를 주고받은 현경은 너구리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원은 거의 매일 전화나 문자메시지로 현경이 밥을 먹었는지 묻고 챙긴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잘 챙겨 먹는다고 하면 알겠다고 하고는 다음 날 또 묻곤 한다. 정원 말고 이제 현경에게 연락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현경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가 저녁을 만든다. 냄비에 물을 붓고 불을 올린 다음 너구리 라면 봉지를 뜯어 면을 반으로 부쉈다. 물이 데워지는 것을 현경은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았다. 물은 금세 끓었고 부순 면은 반만 넣었다.

열흘 전 정원의 아파트에 들어온 뒤로는 낯선 장소가 주는 기분에 다른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정원은 현경의 대학 후배로 고향집에 이런저런 일이 있어 해결이 될 때까지 당분간 제주에 가 있게 되었다면서 괜찮으면 여기 와서 좀 지내보는 건 어떠냐고 현경에게 물어왔다. 언니, 파주 좋아요. 정원이 덧붙여 말했었다. 현경이 그러겠다고 결정한 뒤 얼마간의 금액을 지불하겠다고 하자 정원은 그러지 말고 베란다에 있는 식물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아프리카가 고향인 식물들이어서 걱정이 많았어요. 또 우편물들 때문에 종종 부탁할 게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 예전에 저도 언니네 집에서 정말 많이 잤잖아요. 그런가…… 이십년을 알고 지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래도 지금 이 호의는 너무 큰 것이 아닌가 현경은 미안했다. 아직 정원이 무언가를 부탁하진 않았지만 그 열흘 사이 짧은 가을이 다 갔고, 다음 달이면 12월이었으므로 겨울옷을 미리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며칠 전 정원으로부터 막상 제주에 와보니 생각보다 일이 길어질 것 같고 아파트에 머무는 기간은 자유롭게 하시되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얘기를 들은 참이었다. 언니, 여기 바쁜 것들 좀 정리되면 초대할게요. 제주에도 와요.

현경은 그래,라고 정원에게 대답했었고 부엌의 어두운 조명 아래서 라면을 먹은 뒤에는 설거지를 하며 혜화에 남겨두고 온 일들을 생각했다.

 

밤부터 내린 비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쳤다. 빗방울은 소리 없이 아주 약했다가 투두둑, 거세졌고 거세진 채로 오래 내리다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주차된 차들은 먼지를 벗었다. 오늘은 종일 이렇게 비가 내렸다가 그치기를 반복할 예정이니 출근길에 작은 우산을 하나 꼭 챙기시라는 뉴스를 듣다가 현경은 잠들었고 그 뉴스 프로그램이 끝나기 전에 깨어났다.

현경은 정원이 현경을 위해 소분해서 얼려둔 떡을 꺼냈다. 근방에서 유명해 사람들이 줄을 서는 가게의 떡이었다. ‘밥이 당기지 않을 때 쌉쌀한 음료와 먹기 좋음. 달콤하고 든든해요.’ 정원이 남긴 메모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떡이 녹는 동안엔 물을 끓여 작은 티백으로 된 보리차를 우려 마셨다. 베란다 너머로는 추수가 끝난 논이 있었고 지평선 끝엔 빨간 지붕을 얹은 집이 있었다. 많은 시간을 그 지붕 끝을 바라보며 보냈다. 빨간 지붕 집은 오래된 문구점이었고 현경은 그걸 몰랐다. 열흘간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여름처럼 햇빛이 강했던 어느 한낮에는, 저 집 옥상에 빨래를 널기 좋은 날이다, 종일 그런 생각만 했다.

 

현경에게

 

내일 오전에 서울에 가는데

너 시간 되면 낮에 잠깐 산책이나 할까 해서.

내가 그쪽으로 갈게.

 

추신: 휴대폰 번호는 그대로인지 모르겠다.

 

이 메일을 볼 수 있을지, 아직 거기 사는지, 휴대폰 번호는 그대로인지 재한이 전부 모를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고 현경은 생각했다. 현경 역시 십년 전쯤 재한이 몇년 전에 결혼을 했고 아이는 둘이며 대전에 산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때 내가 어떤 번호를 썼더라. 요즘 현경은 자신의 옛 번호는커녕 지난 계절의 일조차도 까맣게 잊기 일쑤였다.

 

2시쯤 어떠니.

근처에 작은 수목원이 있대.

 

현경은 답장을 보냈고 메일 말미에 전화번호를 쓰려다가 말았다. 재한은 곧바로 그럼 그날 보자는 짧은 답장을 보냈고 다시 현경의 번호를 묻지는 않았으며 대신 자신의 번호를 남겨두었다.

〔언니, 아침은요?〕

〔달콤하고 든든한 떡 먹었어〕

〔괜히 사다뒀나. 맨날 떡 아니면 라면이야〕

〔아냐, 다른 것도 먹어. 여기 비 온다〕

〔오. 여긴 지금 날씨 최고〕

〔좋다〕

〔근처에 내가 다니던 뜨개방이랑 미술학원 있어요. 생각 있으면 얘기해요〕

〔그럴게. 좋은 하루 보내〕

〔언니도요〕

좋은 하루가 뭐지. 자기가 그렇게 말해놓고도 현경은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좋은 하루라니.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말을 정말 많이 하고 살았는데, 혹시 누군가에겐 너무 무책임한 말이 아니었을까. 습관적으로 나온 흔한 인사말에도 현경은 괴로워했다. 음, 그렇지만 현경씨는 상대가 정말 좋은 하루를 보내기 바라면서 한 말이잖아요? 네. 아마 상대도 그 마음을 알 거예요. 무책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누군가의 하루까지 현경씨가 책임질 수는 없어요. 그 사람의 하루는 그 사람의 것이니까요. 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현경은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냈고 사람들은 현경을 걱정했다.

물방울무늬가 그려진 작은 우산을 챙겨 들고 현경은 정원의 아파트를 나섰다. 비 때문인지 오전인데도 사위가 어둑한 느낌이었다. 단지를 빠져나가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가방 앞주머니가 활짝 열린 채로 현경보다 앞서 걷고 있었다. 현경은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은 가방 앞주머니를 보면서 걸었다. 전날 내린 비로 젖어 있던 땅은 군데군데가 움푹 파여 작은 물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비포장 길을 지나자 폭이 넓어지며 정돈된 아스팔트 길이 시작되었다. 그 길을 가방 앞주머니가 열린 사람과 현경과 전동 휠체어를 탄 사람 셋이 나란히 지났다. 현경은 삼십분쯤 후에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현경이 탈 때까지만 해도 버스 안에는 승객이 몇 없었으나 다음 정거장에서 많은 사람이 탔다. 현경의 앞좌석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뒷좌석에는 아이와 엄마가 앉았다. 현경은 버스로 사십분쯤 갈 예정이었는데 그새 창문에 빗방울이 부딪쳤다. 헉! 엄마, 비 와요! 오, 그러네? 우리 우산 없잖아요! 내려서 집까지 뛰어가자, 추억도 되고 좋겠다. 전 비 맞기 싫은데 추억은 무슨 추억이에요. 아냐, 이런 게 나중에 추억으로 남는 거야. 나중은 무슨 나중이에요. 아,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아이가 말했고 현경은 두 눈을 꾹 감고 울음을 참았다. 빗방울은 밤보다 더 굵어져 순식간에 폭우에 가까운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두세 정거장을 지나 현경은 눈을 떴고 아이와 엄마가 버스에서 내리는 걸 보았다. 몇 사람이 손으로 비를 막으며 각자 다른 방향으로 뛰어갔다. 현경도 전에는 날씨를 확인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아이와 엄마는 버스정류장 지붕 아래 서서 비를 피했다. 정류장 벤치에는 위에서 내리는 비를 피하면서도 사방에서 튀는 굵은 빗방울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한 아이가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었고 몇발자국 뒤에는 왜인지 비를 쫄딱 맞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비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끔뻑끔뻑하면서도 한 손으로 최대한 담배가 비에 젖지 않게 가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정차했던 버스가 몇 사람을 내려주고 몇 사람을 태운 뒤 출발했고 버스에 올라탄 이들 중 한 사람이 아이와 엄마가 내린 자리에 와서 앉았다. 그 사람이 긴 우산을 꼼꼼하게 접고 좌석 손잡이에 거는 소리를 현경은 들었다.

시장 입구로 향하는 이차선 도로의 절반은 이미 주차된 차들로 가득했고 인도 역시 한두 사람이 지나기에 알맞은 길이었다. 꺼내놓은 떡을 먹지 않고 집에서 나온 현경은 시장 입구에 있는 작은 국숫집으로 들어갔다. 비는 버스에서 내리기 직전에 그친 상태로, 길이가 제각각인 젖은 우산들이 가게 입구에 모여 있었다. 안에는 단독으로 된 테이블은 없었고 양 벽에 붙은 바 형식의 테이블이 다였다. 사람들은 거기에 나란히 앉아 모두 멸치국수를 먹고 있었다. 빈자리가 하나뿐이어서 망설이고 있을 때 아주머니 한분이 이쪽에 앉으라면서 처음 왔느냐고 물었다. 현경은 아주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내게 어떤 티가 나는 걸까 조금 놀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와요. 현경은 그쪽으로 가서 아주머니의 옆자리에 앉았고 아주머니는 자리에 올려져 있던 작은 가방을 의자 왼쪽 팔에 걸었다. 오일장은 어제 섰어요. 어제 왔으면 먹을 게 더 많았을 텐데. 아주머니가 말했고 현경은 고개를 조금 끄덕이며 메뉴판을 보았다. 멸치국수를 먹어요. 내가 쟤 엄마거든. 아주머니는 오픈된 주방에서 면을 삶고 있는 주인을 가리켰다. 쟤는 저렇게 주문이 밀려 있어도 지 속도대로만 해. 어릴 때부터 고집이 있어요. 아주머니는 그러면서 현경 대신 주문을 해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춰 나한테도 국숫값을 받아. 지독하다고나 할까? 나도 돈을 내고 먹으러 온 거예요. 가게는 작지만 맛은 파주에서 최고니까,라고 덧붙였다. 현경은 아주머니 옆에서 멸치국수를 먹기 시작했고 중간쯤 먹었을 때 아주머니는 갔다. 아주머니는 일어나면서 현경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비 올 때는 이런 뜨끈한 국수가 또 생각나잖아. 그쵸? 잘게 조각난 김치를 집던 현경은 네,라고 대답했다. 다음엔 오일장이 설 때 와요. 1일하고 6일. 어떤 음식이든 한그릇을 다 비운 것은 팔개월 만에 처음이었고 현경은 당장 오늘이 며칠인지도 잘 몰랐다. 어제 며칠인지 알았더라도 오늘은 또 까먹는 식이었다. 오늘이 2일이구나. 국숫집 벽에 붙은 새마을금고 달력을 보고 현경은 날짜와 요일을 알았다.

국숫집을 나온 현경은 양편에 일렬로 늘어선 상점들 사이를 걸었다. 좁은 길이었으나 자전거에 짐을 실은 사람들이 꾸준하게 현경의 곁을 지났다. 과일가게와 야채가게, 정육점, 생선가게, 건어물가게, 곡식들과 기름을 파는 가게, 두부가게, 시장 안에선 꽤 규모가 있는 슈퍼마켓, 생활용품 잡화점과 양말가게, 분식집과 꽈배기며 토스트를 파는 가게, 족발을 삶아 팔거나 닭이나 새우를 튀겨 파는 가게 등을 지나면 다시 반복되었다. 귤이네. 현경은 투명한 봉투에 담긴 귤들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반쯤은 초록인 귤이었다. 벌써 귤이 시장에 나왔구나.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어. 현경은 문득 전통시장을 찍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겉으로 보기에 현경은 귤 앞에서 귤을 살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귤 앞에 그렇게 서 있으니까 그렇게 보였다. 아, 참. 내가 시장에 온 거지. 현경은 천천히 시장을 걸어 이것저것을 둘러보았고 단팥빵과 누룽지와 작은 플라스틱 통에 담긴 젓갈을 샀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파트 상가 편의점에 들러 우유와 인스턴트커피도 샀다. 저녁까지 비는 다시 내리지 않았으나 종일 비에 젖어 어둑한 날이었다. 국숫집에 정원의 우산을 두고 왔다는 것을 자기 전에 알았다.

 

비 온 뒤 완전히 갠 하늘 아래 옅은 회색 폴로셔츠 차림의 재한이 현경을 향해 걸어왔다. 끝부터 말라가던 나무 의자에 앉아 있던 현경이 그를 발견하고 일어섰다. 햇빛 때문인지 살짝 인상을 쓴 채로 재한은 현경을 바라보았다. 둘은 주차장을 지나 매표소로 향했다. 주차된 승용차 안에서 한 사람이 자고 있었다. 재한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진짜 그냥 자는 것 같아.

재한의 말에 현경도 차 안을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가던 길을 마저 갔다. 규모가 크지 않고 경사가 완만한 수목원이어서 그런지 어르신들이 많았다. 그들도 주차장을 가로질러 매표소 쪽으로 걷고 있었고, 들어가는 사람들보다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여기 주차도 입장도 다 무료네.

그렇구나. 몰랐어.

진짜 오랜만이다.

응.

한 십몇년 됐나.

그런 것 같아.

잎이 꽉 찬 나무들로부터 새 몇마리가 날아올랐고 여기저기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도란도란한 어르신들의 목소리. 오래 산 사람들의 발소리, 그 발걸음을 돕는 지팡이가 땅을 짚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주로 이사 왔어?

아니, 그냥 잠깐 와 있어.

그렇구나.

넌 대전에 아직 살아?

응.

애들은?

벌써 열두살, 열살, 네살 그래.

막내가 있구나.

응.

대단해.

와이프가 대단하지. 난 해주는 것도 없는데 잘 커. 저기 나무들처럼.

두 사람은 매표소 옆 안내판에 찍힌, 현 위치를 알리는 빨간 점을 지나쳤다. 모자를 쓴 사람들이 지팡이를 짚거나 뒷짐을 지고 수목원 입구 계단을 향해 걷고 있었다. 계단 끝엔 작은 정자가 있었고 정자에 앉은 사람들은 바나나인지 노란 것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아침에 온 거야?

응. 거래처에 들렀다 오는 길이야. 꽤 거래한 업첸데 얼마 전에 담당자가 바뀌었거든. 근데 너무 꼼꼼한 건지 뭔지, 늘 하던 일인데 메일로도 전화로도 소통이 안 돼서 직접 왔어. 아무리 일정 맞추는 건 불가능하다 설명해도 왜 안 되냐고 했던 말만 반복하는 거야. 전화랑 메일 주고받은 것만 해도 이주간 수십번은 되는데 결론이 안 나더라고.

직접 만나니까 해결이 좀 됐어?

내가 일정을 맞추게 됐어. 오랜만에 봤는데 이런 얘기나 하고, 미안.

아니야. 고생했겠다.

휴.

재한이 길게 숨을 내뱉고는 마른 손을 비비고 털어냈다. 한쪽 길은 산으로 난 흙길이었고 한쪽 길은 야자 매트가 깔린 둘레길이었다. 산길이라고 해도 야트막한 언덕이나 다름없었지만 재한은 둘레길 쪽으로 들어섰다. 이거 밟는 느낌이 좋아서. 오, 이거 완전 프리미엄인데? 재한이 발을 구르며 말했다. 현경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므로 그쪽으로 따라 걸었다. 팔개월 만에 처음 하는 산책이었다. 할아버지, 지금 겨울이야? 응. 거의. 그럼 할아버지, 새해 복 많이 받아! 앞서 걷던 아이가 자기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말 잘한다, 그치.

응. 게다가 겨울에 새해가 온다는 것도 아는 거잖아.

그러게.

현경과 재한은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아래로 보이는 휘어진 길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그 옆으로는 분수대가 있었다.

갈래길이 되게 많네.

분수도 있고.

다 돌고 내려와도 한두시간밖에 안 걸린다는데 괜찮으면 이따 저녁 먹고 가자.

그래.

지금은 네자리 숫자 이상의 다른 의미는 없지만 현경이 아직까지 사용하는 비밀번호는 모두 재한의 생일이었다. 그 숫자가 재한의 생일이란 것도 잊고 지낸 지 오래, 현경은 재한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재한의 비밀번호는 모두 1111이었으나 그에게도 역시 무엇보다 현경의 생일이 중요했던 때가 있었다. 두 사람은 아래 내려다보이는 물가에 자라난 것이 갈대인지 억새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갈대와 억새의 차이점이라면 예전, 어느 가을에도 치열하게 토론했던 적이 있었다. 토론이라기보다는 스마트폰이 없던 때였으므로 그저 술자리에서 재미로, 확실하지 않은 정보와 기억력으로 자기 생각만 밀어붙이던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갈대든 억새든 보러 가자는 약속을 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작은 온실이 있다는 표지판을 보고 현경은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금만 가도 여러 길이 나오고 거기까지 가면 또 여러 길이 나오는, 정말 많은 길이 있는 식물원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떤 길을 택하면 사람 하나 없이 고요했다. 온실로 가는 좁은 길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었고 양옆으론 자갈이 깔려 있었다. 현경은 꽃이 진 수국을 알아보았고 그 근처에 퍼진 풀들과 들꽃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현경! 몸은 앞을 향하고 있는데 고개는 옆을 보잖아. 그러다 넘어져, 조심해. 재한이 말했고 그 말에 현경이 돌아보기 무섭게 재한이 다리를 찢으며 미끄러졌다. 거래처에 들르느라 구두를 신은 탓이었다. 다행히 그는 곧 중심을 잡았고 현경은 재한 쪽으로 가서 그가 다시 다리를 모으고 설 수 있도록 도왔다. 구두에 묻은 흙을 재한은 뒷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털어내려다 말았다. 현경은 재한에게서 받았던 핑크색 아이리버 MP3가 아직도 멀쩡하다는 걸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 책방, 없어졌더라.

응?

같이 가곤 했던 혜화에 있던 그 책방. 너 만나기 전에 검색해봤어.

아.

널 생각하면 거기부터 생각이 나. 아주 없어지는 건 아니고 다시, 음, 다시 다른 식으로 이어갈 거래.

다행이다.

응. 그리고 그, 다락방 같은 까페 기억나?

다락방?

1층인데 다락방 같았던 까페.

모르겠어.

나도 이름은 기억이 안 나긴 해.

두 사람이 이따금 가던 그 까페 입구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두꺼운 수첩이 있었다. 방명록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 뭐라고 썼었는지는 잊었지만 재한 덕에 그 까페와 거기 그런 게 있었다는 게 차츰 기억났다. 어느날 그 방명록에 재한이 혼자 글을 쓰는 것을 현경은 본 적이 있었다. 재한이 자리를 비우면 펼쳐서 읽어봐야지 했으나 그는 자리를 비우지 않았고 그뒤로 일년쯤 후에 현경은 혼자 그곳에 들렀었다. 방명록의 가장 앞 페이지에 재한의 글씨체로 사랑하는,이라고 쓰여 있었다. 재한은 자음을 아주 크게 쓰는 버릇이 있었다. 방명록의 마지막 장은 그날 현경이 채웠다. 하루나 이틀 늦게 그 까페에 갔더라면 재한이 썼던 글을 못 볼 수도 있었을 거라고 현경은 생각했었다. 책방과 까페 이야기를 하고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은 온실에 도착했다. 나 잠깐 밖에 있을게. 들어갔다 와. 재한이 말했고 현경은 혼자서 온실에 들어가 따뜻한 기후에서 사는 식물들을 보았다. 아, 정원이 키우는 식물이다. 현경은 사진을 찍어 정원에게 전하고 온실에서 나왔다.

이제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재한이 말했고, 현경은 이곳에 오기까지 짐작만 하고 있던, 재한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알 것 같았지만 모른 체했다.

그냥 걸으면 되지.

현경이 말했다. 그런가, 재한이 말했고 두 사람은 이제 암석원을 지나 전망대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재한은 세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성격이 다 달라, 너무 신기해. 재한은 아이들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했다. 너 많이 닮았어? 사진 보자. 아냐, 아냐. 두 사람 옆에서 걷던 세 사람이 연달아 으어어억! 젖은 낙엽을 밟으면서 미끄러졌다. 현경과 재한은 그들이 일어설 수 있게 도왔다.

그…… 소식을 늦게 들었어. 가봤어야 했는데 미안해.

아니야.

준호의 장례식장엔 준호가 전에 만났던 사람들도 왔었다. 안녕하세요. 전에 오빠랑 사귀었던 사람이에요. 그중 한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현경을 끌어안았고 현경보다도 더 많이 울었고 지워진 화장을 고치며 구석에서 술을 마셨고 하룻밤을 보내고 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왔고 현경은 이리저리 눈앞에 놓인 일들을 처리하고 불려 다니느라 정작 중요한 것은 실감하지 못한 채로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간의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뭘 했는지 그후로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장모님, 이따가 뭐 드시겠어요? 난 아무거나 좋아. 백숙이나 두부 어떠세요. 두부. 장인어른은요? 두부. 현경과 재한이 일으켜준 세 사람이 두 사람의 뒤에서 그런 대화를 하며 걸었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을 지나쳐 앞서 걷기 시작했다.

우린 이따가 백숙 먹을까?

그래.

재한은 걸으면서 휴대폰으로 식당을 검색했다.

현경! 동충하초 먹어봤어?

아니. 넌?

나도 안 먹어봤어. 동충하초 들어간 백숙 먹자.

그래.

여기서 멀지 않은 것 같아.

응.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평일인데 학교 안 가고 여기 왔나봐. 그러게. 옆에선 가는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고 두 사람은 상류 쪽으로 올라가려다 길지 않은 다리를 마주했다. 저기 건널까. 응. 아래로는 꽤 큰 연못이 있었다. 주황색 무늬가 있는 물고기들이 연못 안을 헤엄치고 있었다. 저 물고기들! 늘 보던 건데 이름이 생각이 안 나네. 나도.

아주 많은 것을 잊었고 잊을 리가 없으리라 단언했던 것들도 기억나질 않는다는 것에 두 사람은 동의했다. 중요하지 않으니까 잊은 거 아닐까. 모르겠어. 다리를 건너자 눈이 아플 만큼 잎이 빨간 단풍나무들이 서 있었고 한쪽은 낭떠러지처럼 가팔랐다. 반쯤 눈을 감고 그 구간을 지나자 멀리 물레방아가 보이는 곳에 벤치 여섯개가 놓여 있었다. 현경이 벤치에 앉자 재한은 벤치 뒤 납작하고 넓은 돌 위에 앉았다. 와, 지금 날씨 너무 좋다. 재한이 말했고 현경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현경이 우는 동안 재한은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손수건을 꺼내 현경의 손에 쥐어주었다.

현경. 저기 봐.

재한이 가리킨 곳에 햇무리가 있었다. 현경은 처음 보는 햇무리를 오래 바라보았고 좀 전에 벤치 구역으로 들어선 몇 사람도 두 사람을 따라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탄성을 질렀다. 현경과 재한은 그쯤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는 걷기 편한 데크가 이어져 있었다.

파주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야?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말한 뒤엔 얼마간 두 사람의 발소리만 들려왔다. 온 김에 좋은 데 좀 다니고 그래. 좋은 데 좀 다니고 좋은 것 좀 먹고. 파주에 좋은 데 많잖아. 재한이 말했고 현경은 국숫집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국숫집엔 왜?

거기 우산을 두고 왔어.

지금 들를까?

아니야, 괜찮아.

재한이 차 안에 틀어둔 라디오에서 현경이 준호와 즐겨 들었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현경이 울 것 같은 마음을 누를 때 다음 곡이 흘러나왔다. 그 역시 준호와 수없이 많이 들었던 곡이었으나 또다시 제목이 기억나질 않았다. 현경은 계속해서 제목을 생각했으나 끝내 떠오르지 않았고 노래 검색에도 실패했다. 음악 찾기 앱 설정을 바꿔둔다는 것을 늘 미루고 미룬 탓에 급하게 설정에 들어갔으나 왜인지 버벅거리다가 노래가 거의 끝나버린 것이다. 재한은 그 노래를 작게 따라 부르고 있었다. 현경은 다급하게 혹시 이 노래 알아? 재한에게 물었다. 그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잘 따라 불렀잖아. 노래는 아는데 제목은 모르겠어. 재한이 말했다. 왜 난 이런 설정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지. 기억할 수 있는 게 하나 더 멀어진 것 같아 현경이 절망한 사이 노래는 완전히 끝났다. 다시 듣게 되겠지. 그만 울자. 준호는 날 괴롭히려고 그런 게 아니야. 재한이 이런저런 말을 현경에게 하는 동안 현경은 생각했고 그사이 재한의 트럭은 동충하초가 들어간 백숙집에 당도했다. 식당 안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반도 먹지 못하고 두 사람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언니, 여기는 아침저녁으로 뛰는 사람들이 많아요〕

정원으로부터 시간이 날 때 운동복과 겨울옷을 보내주길 부탁하는 메시지가 왔다. 현경은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고 그사이 재한이 일어날까?라고 물어왔다. 커피 마실래? 아니, 괜찮아. 너 마실래? 나도 괜찮아. 현경과 재한은 카운터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었고 박하사탕을 하나씩 나누어 먹은 뒤에 식당을 나왔다.

어우. 해가 벌써 지네.

춥다. 그치.

응. 집에 데려다줄게. 여기 버스도 없고.

괜찮아. 대전까지 내려가려면 고생인데.

대전 금방이야.

고마운데, 괜찮은 것 같아.

현경아.

얼른 가.

현경은 택시를 호출했다. 근처가 관광지여서인지 택시가 바로 잡혔다. 식당 앞에 도착한 택시에서 경량 패딩을 입은 기사가 내려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저 택시 같아. 현경이 말했고 재한은 고개를 돌려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사이로 ‘예약’등이 깜빡이는 택시를 바라보았다. 빨리도 왔네. 재한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며 현경을 바라보았다. 현경아, 잘 살아. 재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현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응. 현경은 재한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잘 살아. 재한이 다시 한번 말했고 현경은 고개를 몇번 끄덕인 뒤에 택시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