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2022 대선, 대전환의 과제 ③
불평등,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대응할까
김소라 金昭摞
젠더 연구자, 제주대 사회학과 강사. 공저서 『모두를 위한 성평등 공부』 등이 있음.
이남주 李南周
성공회대 교수, 세교연구소장. 저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 『변혁적 중도론』(공저), 편서 『이중과제론』 등이 있음.
주병기 朱丙起
서울대 교수 겸 경제연구소 분배정의연구센터장. 공저서 『분배적 정의와 한국사회의 통합』 『정책의 시간』 등이 있음.
천현우 千鉉宇
용접공, 칼럼니스트. 국무총리실 산하 청년정책조정위원회 위원.
이남주(사회) 『창작과비평』 연속기획 ‘2022 대선, 대전환의 과제’ 세번째 시간입니다. 이번호에서는 불평등을 화두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불평등은 사회적으로나 지구적 차원에서 굉장히 핵심적인 사안이기 때문에 당연히 다뤄야 할 의제입니다. 한국에서도 불평등 문제, 특히 경제 불평등의 해결이 시급하다는 데는 공감대가 꽤 넓게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유의미한 이야기를 진행하기 무척 어려운 기획이기도 한데요, 불평등 문제를 보는 방식이나 설명하는 방법, 불평등이 보이는 영역에 꽤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평등’이라고 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경제 불평등 외에도 다른 유형의 차별이나 불평등을 함께 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 불평등 문제의 토대에는 결국 경제적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 기초해서 이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되 다른 관점들, 즉 지역, 젠더, 교육 등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불평등이 경제 불평등과는 어떤 연관성을 맺으면서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데까지 이야기를 넓혀보고자 합니다. 이런 취지에서 오늘 대화에 세분을 모셨습니다. 각자 간단히 자기소개를 해주시죠.
김소라 제주대에서 강의하고 있는 김소라입니다. 디지털 성폭력 문제와 대학에서의 페미니즘 교육 등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교수로 일하는 주병기입니다. 제 전공은 미시경제학과 재정학입니다. 현재 서울대 경제연구소 분배정의연구센터장으로서 활동하며 한국사회의 분배와 공정성에 대한 연구활동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천현우 용접하고 칼럼 쓰는 천현우입니다. 낮에는 쇠를 녹여 제품을 만들고 밤에는 생각을 녹여 글을 만들고 있습니다. 창원 지역의 중소 제조공장을 돌며 10년간 일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사회 불평등의 현실
—
이남주 가장 먼저 불평등 문제에 대한 인식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과연 무엇을 불평등 문제라고 하는가, 또 어떤 방식으로 불평등이 나타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을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천현우 선생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해주는 것이 좋겠네요.
천현우 저는 대한민국에는 ‘15%의 성’과 ‘85%의 평야’가 있다고 인식합니다. 15%라는 비율은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 등 ‘좋은 직장’에 속한 사람들을 뜻해요. 평야의 삶이 너무 힘드니까 젊은 사람들은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계속 시도합니다. 그런데 ‘성’과 ‘평야’의 격차가 너무 커져버리면서 평야에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불평등 상황에 대한 인식을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불평등은 어느정도 당연히 깔고 들어가는 거고, 성 안으로 들어가는 싸움의 룰이라도 공정해야 한다는 식이 되죠. 이걸 직접적으로 느낀 게 고시 공부를 하는 친구를 보면서였어요. ‘눈 감고 헤엄치기’처럼 합격에 대한 보장 없이 그저 과정을 견뎌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약해지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승자독식 체제라든가 패자 도태를 긍정하는 인식이 많아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불평등을 한방에 뒤집으려는 욕구가 투영되는 것이 이러한 ‘고시’ 문화가 아닌가 하고,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는 거죠. 또 ‘평야’도 다 같지 않습니다. 저는 지방 사람인데, 여기는 일자리도 인프라도 없습니다. 단적인 예로 제 동생은 일러스트레이터인데요, 일러스트를 정식으로 배울 곳도, 일자리도 없으니 나고 자란 곳을 등지고 서울로 가야만 합니다. 또 저는 지하철 열차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정작 여기서 만들어진 열차를 우리 동네에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다 수도권으로 가지요. 집을 구해도 교통 인프라가 열악하니 수도권에서는 충분히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일 텐데 여기서는 자차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렇듯 불평등은 산재하고 분명히 심각해지고 있지만 이에 대한 인식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병기 우리나라가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성공적으로 이룬 드문 나라이기 때문에 대체 어떻게, 왜 성공할 수 있었는가 규명하려는 연구가 많았습니다. 개발경제학자들이 내렸던 합의점은 경제개발 초기의 한국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고 교육을 통한 인적자원의 축적이 지속되었다는 점입니다. 식민지 독립과 전쟁으로 불평등도가 낮아진 것도 있지만 해방 이후에 농지개혁을 통해 자산 재분배가 이루어졌던 것도 주요했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교육에 투자할 자산을 확보할 수 있었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교육열이 높은데다 공교육이 빠르게 확대되어서 교육을 통한 인적자원의 공급이 지속될 수 있었고요. 낮은 불평등 수준과 기회 평등, 그리고 교육을 통한 인적자원의 축적이 한국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라는 것이죠. 그런데 2000년대부터 불평등도가 빠르게 안 좋아졌습니다. 업종·산업별 임금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 격차 등이 모두 너무 벌어졌습니다. 임금 양극화를 측정하는 지표가 저임금근로자 비율인데, 여기서 ‘저임금’은 중위소득의 3분의 2 미만을 뜻합니다. 저임금근로자 비율이 2000년대 이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1, 2위를 다퉈왔고 임금 상·하위 10%의 임금격차도 OECD에서 최상위입니다. 20년 만에 이렇게 되었는데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얼마나 빠르게 나빠졌는지 알려주는 지표죠. 그런데 문제는 소득격차가 심하면 계층이동도 잘 안 돼요. 우리나라가 그런 경향이 아주 심해졌습니다. 제가 최근에 가장 놀랍다고 생각하는 지표는 통계청의 사회조사에서 나타나는데요, ‘자녀 세대의 계층 이동 가능성’을 묻는 문항에 대한 부정적 응답이 2000년대 초반 10% 정도에서 2015년에 50%가 넘었고 최근까지 이 수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식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때, 이 인식이 다섯배나 나빠졌다는 건 계층 간 기회 불평등이 아주 심화되었다는 것이고 우리 사회에 심각한 경고신호라고 봅니다.
천현우 이래서 제가 경제학자를 만나기 싫어하는데.(웃음) 이렇게 수치화된 자료를 보고 나면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현실이 늘 더 나빠요.
이남주 임금 양극화와 계층 간 이동 가능성의 저하를 현재 우리 사회의 불평등도를 보여주는 지표로 설명해주셨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소라 저는 계층 이동의 한계가 명확해지고 있다는 점을 2000년대 후반 대학원에서 학과 조교를 할 때 피부로 느꼈습니다. 당시 서울대학교에서는 학부 신입생 입학시기에 학과 조교들이 학생부종합전형에 지원한 학생들의 학교생활기록부와 관련 증빙자료를 정리했어요. 그걸 정리하면서 보니 방학을 이용해 해외 대학에서 대학교 선수과정을 이수했다는 증명서를 낸 고등학생들이 상당히 많더라고요. 또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에서 학부 신입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대학에서 주로 어울리는 사람을 묻는 문항에 대한 선택지로 ‘고등학교 동문’이 있는 거예요. 고등학교 친구들이 무리를 지어서 놀 정도로 같은 대학에 많이 진학하는 모습이 저에겐 상상하기 어려운 거였거든요. 이런 사례들을 경험하면서 교육이 가족에게는 부모 세대의 자원을 자녀에게 안정적으로 물려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적으로는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매개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남주 소득분위 등으로만 불평등을 보면 다소 추상화된 방식으로 대상을 규정하게 되는데,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불평등구조 안에서도 다양한 특성에 의해서 부담을 더 많이 지는 구체적 집단이 있어요. 젠더, 산업, 지역 등이 거기 작용하는 요소들일 텐데요, ‘특히 이런 불평등에 주목할 만하다’ 하는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김소라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불평등의 양상이 점점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노동시장의 양극화와 분절 혹은 임금격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다단함이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 9월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사망원인 통계’를 보면 20대 여성의 자살률(인구 10만명당 자살 사망자 수)이 전년도보다 16.5% 증가했습니다. 2010년 이후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던 20대 여성의 자살률이 2018년 13.2명에서 2020년 19.3명으로 빠르게 늘어난 것이죠. 노동시장에서의 취약한 위치와 고용 불안정성 등이 코로나19와 함께 심화된 것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2019년 53.5%였던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도 2020년 52.8%로, 2009년 이후 11년 만에 처음 하락합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2020년 임금노동 경험이 있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코로나19 1년: 여성의 일·돌봄 변화와 전망」)를 참고하면 저학력, 임시·일용직, 영세사업장에서 일했던 20대 여성, 그리고 초등학생 이하 자녀를 둔 기혼 여성들이 코로나19로 인한 노동시장 변화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성별을 비롯해 나이, 학력, 직종, 고용 지위 등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사회적 위기로 인한 어려움이 차등적으로 배분되는 거죠.
천현우 제가 사는 지역(창원)이 제조업이 강세다보니까 여성 일자리가 정말 없습니다. 제 동창 중에 여성이 열여덟명인데, 두명 빼고는 다 수도권으로 갔어요. 제조업 영역에서 여성의 일자리가 굉장히 희귀한데다가 거기서도 상부는 또 남초라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가 굉장히 많습니다. 일단 유리천장이 엄청나게 단단합니다. 유리가 아니라 쇠예요. 여성은 반장 이상으로 올려주지 않아요. 너무 심하지 않은가 싶어서 “사장님, 대체 왜 여성은 승진을 시켜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하고 직접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가시나들은 일하는 게 좀 티미하고 그렇잖아.” 대화가 더이상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불평등 문제에 젠더 문제가 ‘기본 옵션’처럼 붙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금수저 남성 아래에 금수저 여성, 그다음에 흙수저 명문대 남성, 그 밑에 흙수저 명문대 여성 하는 식으로 더 불리한 옵션으로 붙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김소라 젠더, 학력, 직업과 직종, 자산, 사회적 관계망 등 여러 요소가 맞물리면서 불평등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다보니 불평등의 원인을 쉽게 분석하기 어렵고, 경제 불평등이 사회 불평등의 토대나 원인인 동시에 다른 불평등의 효과로서 나타나는 경우도 많은 듯합니다. 불평등의 양상도 단순히 소득의 높고 낮음뿐만 아니라 사회적 모멸감이나 미래 없음, 생존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불평등의 복잡성, 그리고 그것이 초래하는 감정적 효과가 최근 불평등이 심화되었다고 인지하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이남주 말씀처럼 불평등의 양상이 소득과 결합된 여러 복잡한 문제와 연관돼 있고, 그러다보니 어떤 하나의 해결방안으로는 해소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 상황의 특수성이 있을까요?
주병기 한국하고 일본이 선진국 중에서 여성차별이 제일 심한 나라예요. 특히 민간부문에서 차별이 너무 심합니다. 여성의 경제활동비율은 OECD 평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고요.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정부가 아무런 역할을 못하고 있어요. 여성노동자들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젊었을 때 바짝 일하다가 결혼하고 나면 중단, 그다음에 애들 키우고 다시 경제활동을 시작하려면 과거와 같은 양질의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요. 전반적으로 여성들의 일자리가 취약 노동시장에서 확보되는 비중이 높습니다. 이번 코로나처럼 위기상황에 처하면 당장 취약 노동시장이 가장 큰 타격을 받죠. 그래서 지금 여성노동 관련 지표들도 나빠지고 자살률도 높아진 거라고 봅니다. 게다가 한국은 돌봄을 너무 시장에만 맡겨둔 상황이라 그에 대한 부담도 가중되고요. 시장이 해결하기는 어렵고, 공공부문이 개입해 차별을 규제해야 할 문제기 때문에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계층구조의 고착화와 제로섬 게임
—
이남주 앞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계층 이동의 가능성이 저하되면 사회·정치·문화적으로 다양한 문제를 발생시키는 듯합니다. 소득격차가 커질수록 계층 이동에의 동력이 떨어지고 기득권을 지키는 힘은 더욱 강화되어서 계층 이동이 더욱 어려워지는 악순환 양상이 있다고 하는데, 이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나요?
주병기 계층 이동을 확인하는 객관적인 자료로 많이 쓰이는 건 부모 소득과 자녀 소득의 상관관계입니다. 상관관계가 얼마나 높은지를 봐야 하는데 이 자료는 쉽게 확보할 수가 없어요. 부모와 자식의 소득이 다 증명되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장기 시계열로는 확인하기가 다소 어렵지만 이 상관관계가 지난 10여년간 증가했다는 결과를 보고하는 논문들이 있습니다. 제가 속한 센터의 최근 연구(「한국노동패널과 가계동향조사를 이용한 소득기회불평등의 장기추세에 대한 연구」)에서도 다른 방식을 이용하여 1990년대 이후 최근까지 사회계층 간 가구항상소득 기회 불평등의 추이를 분석했는데, 기회 불평등도가 두배 이상 상승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사실 계층 이동의 어려움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건 교육 문제죠. 통계청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2019년 소득 상·하위 20% 가구 간의 교육비 지출 격차가 23배로 나옵니다. 서울대 입학생 구성을 보아도 예전엔 소득계층도 지역도 다양했지만, 지금은 과반수가 소득 상위 20% 가구에서 나오는 것으로 나타나거든요. 결국 명문대 나오는 사람, 판·검사, 의사 되는 사람이 소득 상위계층에서 많더라는 겁니다.
이남주 누군가는 그걸 당연한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걸 왜 문제로 보아야 하는지 설명을 좀더 해주시자면요.
주병기 이런 경향이 지속되면 결국 ‘계급사회’가 되는 거죠. 남미를 예시로 들어보죠. 남미는 식민지 시대 대형 농장이 발달해 각 지방의 농장주들이 노예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거부(巨富)가 되었던 것이 독립 후에도 지속되었어요. 계층 간 높은 수준의 격차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사회계층화가 심각하게 진전되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안한 나라가 됩니다. 이걸 깨보자고 한 게 룰라(Lula da Silva) 전 브라질 대통령인데, 2000년대에 빈곤 퇴치 정책을 단행해서 상당한 성공을 거뒀어요. 룰라가 집권하면서 브라질 경제성장률도 상당히 좋아졌고요. 그런데 이런 좌파 개혁에 엄청난 저항이 있었어요. 우리나라처럼 재벌이 있고 언론, 정치세력, 검찰, 사법 등을 기득권이 장악하고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던 거죠. 결국 룰라 개혁은 중단되고 기득권의 재집권과 정치적 혼란이 거듭됐어요.
이남주 우리나라가 경제발전도 하고 어느정도 민주화도 실현한 나라인데, 그렇게 세워둔 사회가 불평등 문제로 인해서 깨지거나 위기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말씀이시죠.
주병기 네, 그렇습니다. 지금처럼 기술의 혁신·고도화 시대에 발전할 수 있는 길은 결국 인적자원의 힘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입니다. 국민 교육과 역량 강화에 총력을 기울여야 해요. 그런데 심한 불평등과 양극화 상황이 지속되면 많은 국민들이 낙오하고 역량을 키울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인적자원 확보가 불안해지고, 결국 경제와 사회도 발전할 수 없는 것이죠.
천현우 칼럼을 쓰고 이름이 알려지면서 과거에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 아까 말씀드린 15%의 직업 사회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서도 부의 차이가 확 나뉘더라고요. 부의 불평등이 인적자원과 노동력 확보에 불안요소가 된다는 걸 이분들과 최근 부동산 얘기를 하면서 느꼈습니다. 연봉 1억을 버는 분들도 부동산 얘기만 하면 표정이 어두워져요. 예컨대 ‘영끌’해서 부동산 첫차를 탔고 그래서 자산도 늘어난 분인데 표정이 안 좋더라고요. 왜인지 들어보니, 그래도 내 영역에서 경력이 얼만데, 내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형식지 암묵지 기능기술 등등 얼마나 총체적으로 쌓아왔는데, 고작 부동산 몇평의 값이 이렇게 쭉쭉 올라가면 대체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했나 하는 생각이 거꾸로 들더라는 거죠. 허탈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한소리 듣는다는 겁니다. 노동 가치의 저하와 그에 따른 노동 효능감의 저하가 심각하지 않나 생각하게 되는 계기였습니다.
김소라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그저 불확실한 것으로만 인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저는 그게 굉장히 중요한 자료이자 증표이고, 일종의 정치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피해자 정치가 범람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하잖아요. ‘나는 이런 차별을 받는 반면 상대는 이런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인식이죠. 저는 이같은 상황이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차별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도덕적 주체로 살아남기 위해 ‘피해자 되기’를 선택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제각기 말하는 차별이 정말 구조적 차원의 문제인지는 따져보아야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피해자 정치가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의 입에서 발화된 적이 있었던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니까 수치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차별과 불평등, 그리고 그에 대한 인식의 확산이 굉장히 중요한 사회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불평등한 상황, 서로가 자신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방식이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존중하고 신뢰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사회를 바라보려면 서로를 같은 공동체 안에서 같은 문제를 대면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인지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점점 불평등한 상황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높아지면서 피해자 정치 속에서 차별의 정도를 경쟁하고 다른 사람을 제로섬 게임에서 내 것을 빼앗아가는 사람으로 인지하게 되는 거죠. 불평등이 심화하는 가운데 피해가 상황이 아닌 정체성으로 인식되고, 문제 해결의 기초가 될 사회적 신뢰가 오히려 사라지면서 공공의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겁니다.
불평등과 차별의 다양한 양상
—
이남주 우리 사회도 불평등으로 인해 사회를 더 나아가게 만드는 동력이 크게 약화되는 상황으로 진입하고 있는 셈이네요. 그중에서 계층구조의 고착화라는 것이 과거와 큰 차이로 보입니다. 어떻게든 더 높은 계층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기대와 심리가 적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이를 아예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많지요. 이러한 사람들이 삶에 대한 다른 대안은 없이 일종의 ‘루저’로 규정되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초래하는 문제에는 다양한 차원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시나요?
천현우 사실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기 전까지는 제가 ‘피해자’라는 걸 잘 몰랐어요. 친구 중에 4수 끝에 서울대를 간 친구가 있어요. 술자리에서 ‘우리 이제 사회인 돼서 보자’라고 얘기했는데 이 친구가 무심코 “전문대 나와 갖고 취업할 수 있나?” 하는 거예요. 또 20대 중반에는 아무래도 비정규직 노동을 하고 너무 말도 안 되는 직장을 많이 다니다보니까 중간에 일을 안 하는 시간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정규직으로 취업한 친구가 저한테 “백수는 좀 빠져라” 하고 말하더라고요. 20대 후반에는 모 수학강사가 유튜브 방송에서 ‘이 문제도 못 풀 거면 호주 가서 용접이나 하라’는 식으로 얘기해서 논란이 된 경우도 목격했습니다. 그런 취급이 20대 초반부터 쭉 누적되어 오면 그냥 포기해요. ‘그래, 너희가 맞아. 우리가 공부 못해서 이렇게 짓눌리고 산다.’ 그런데 최근 여기저기 다니면서 얘기를 하고 또 듣다보니까 아니에요. 이거 잘못된 게 맞대요. 그러면 누가 이 불평등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고 고착화하느냐 하면 저는 언론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특히 심각한 것이 일단 기사의 주목도를 올리려면 제목에 명문대를 붙여요. 사망사고 같은 심각한 문제든, 대안적 삶을 일구는 사람에 대한 좋은 취지의 소개든 명문대 출신이다 하면 꼭 빼놓지 않죠. 이런 게 심해지다보면 지난봄에 논란이었던 한강 의대생 실종사건 같은 보도 행태가 나타나는 겁니다. 같은 시기에 평택항에서 죽은 노동자, 그전에 태안발전소 김용균 노동자, 구의역 김군, 이런 분들의 죽음이 이만큼 언론을 통해 주목받았나 싶은 거죠. 대다수 주요 언론사는 서울에 있어요. 그러다보니 서울·수도권 편향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다 기자분들 만나서 보면 거의 다 ‘스카이’ 출신이라 명문대 편향도 있지요. 반면 지방대는 어떻게 묘사되나요. 웹툰 「복학왕」에서는 맨날 엠티 가서 술 먹이고 군기 잡는 게 지방대 생활인 것처럼 나오고, 학점 관리 안 하다가 나이 차고 졸업할 때 되면 웹드라마 「좋좋소」에 나오는 이상한 회사나 간다는 식으로밖에 소개가 안 된단 말이에요. 그 안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죽어라고 열심히 하거든요. 그럼에도 대중매체나 언론의 소개는 이 수준이고, 본인들 스스로도 도태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여 살게 돼요.
김소라 최근 경제·인문사회연구회에서 발표한 연구(「청년 관점의 ‘젠더 갈등’ 진단과 포용국가를 위한 정책적 대응 방안 연구」)를 흥미롭게 봤습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연령을 막론하고 한국사회가 공정하지 않다는 평가가 굉장히 높게 나오는데요, 기성세대보다 청년세대에서 경쟁의 부정적 효과에 대한 인식과 경쟁에서 도태된 것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태도가 두드러지는 것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또한 젊은 세대 내에서 경쟁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이들일수록 능력주의에 기반한 공정성을 강하게 지지하는 경향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쟁 상황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거나 자원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는 ‘공정’과 능력주의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좀더 강하게 나타났어요. 그간 ‘20대 남성’들이 주로 공정성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단순하게 그려졌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라고 이 자료가 말해주는 것이죠. 이를 보며 저는 그간 ‘청년’에 내포된 이질성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고, 우리가 불평등 문제를 다룰 때 소수의 목소리만을 듣고 해결책을 도출해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의 이야기를 퍼다 나르는 식의 보도를 반복하는 언론에 의해서 불평등 혹은 세대 갈등이 과도하게 편향되어 대표된 측면이 있고요. 그러다보니 어떤 것이 불평등인가, 다른 이가 경험하는 삶은 어떠한가에 대한 상상도 그만큼 빈약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에 접근하는 첫번째 발걸음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만 해도 강의를 하면서 어떤 학교에서 몇학년 학생을 만나느냐에 따라 듣게 되는 삶도, 현실 인식도 굉장히 상이해요. 여러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통로를 최대한 확장하는 게 가장 먼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에요.
이남주 저도 다양하게 듣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는데, 다만 그렇게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다는 접근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희석하거나 약화시킬 우려도 있을 듯합니다.
김소라 경제 불평등이 지속되는 방식, 그리고 불평등 문제의 복잡성에 접근하기 위해 그러한 접근이 더욱 유효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경제성장의 문제에서 누군가에게는 4차 산업혁명이나 지식산업의 성장이 장밋빛 미래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플랫폼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노동시장이 양극화되고 비정규직 문제의 양상이 달라지는 현실은 불평등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또한 디지털 성폭력 연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웹하드, 다크웹, 채팅 어플리케이션 등 온라인 플랫폼들은 성폭력을 확대재생산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4차 산업혁명은 새로운 성차별과 폭력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거죠. 그래서 최근 미래의 성장 동력으로 여겨지는 산업에서도 그에 종사하거나 연관되어 있는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천현우 경제 불평등과 관련해서, 현실적인 문제로 노동격차를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차이가 얼마 정도 나나요?
주병기 종업원 500인 이상 대기업 대비 평균임금 비중(2017년 기준)이 한국은 54.2%예요. 다른 선진국들은 이보다 낫죠. 미국, 일본, 프랑스는 이 비율이 각각 88.7%, 88.1%, 72.8%거든요.
천현우 여기가 바로 지옥이로군요.(웃음) 정규직하고 비정규직의 임금 차이 관련해 현실적으로 더 살펴봐야 되는 부분이 뭐냐면, 재벌 대기업과 소속 정규직은 사실 담합구조입니다. 적어도 제가 몸담고 있는 제조업에서는 그렇다고 봐요. 노조와 연결 지어서 봐도 그렇습니다. 근속연수에 비례해 임금이 오르는 연공급제에 더해 노조가 방어해주는 무적의 고용보장체제에서, 이걸 받아주는 재벌 고용자측은 ‘이것 봐라, 정규직들 이렇게 철밥통인데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뽑을 수 있냐’ 하면서 사람 뽑는 걸 회피하고요, 노조는 이에 대해 ‘재벌들의 프레임이다’라며 노노갈등의 핵심 사안을 회피해요. 정규직 노조도 자신들이 보호받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나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죠. 제가 모 공장에 있을 때 정규직 현장직 초봉이 4500만원쯤 되고, 비정규직으로 들어가면 여지없이 최저임금이라 임금이 두배가량 차이 났습니다. 그나마 그 회사는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구조가 있기 때문에 많이 입사를 합니다. 물론 실제로 흔한 일은 아니지만, 신분격차가 눈에 빤히 보이기 때문에 비정규직들은 죽어라 일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열심히 해도 정규직이 못되면 급여는 계속 최저임금이에요. 제가 다녔던 공장이 만드는 제품은 다른 데서 안 하는 특수성이 있어서 이직도 어려웠는데, 그렇게 몇년 정체되면 커리어패스 박살 나는 겁니다. 차별의 예시는 임금뿐이 아닙니다. 양승훈 교수의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오월의봄 2019)를 보면, 거제도는 매우 좁은 사회고 두 거대 조선소 양강 체제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 회사들의 정규직이 지역사회에서 ‘갑’입니다. 여기서 차별이 어떻게 드러나느냐 하면, 작업복 입고 시내로 나가면 가게에서 꼭 이렇게 묻는답니다. ‘원청이세요?’ 이런 데서 미치는 겁니다. 대다수 하청 노동자들은 생활 속에서 계급의 차이를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남주 말씀해주신 사례도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야 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만 해도 돌봄, 젠더, 고용 유형별 임금격차 등이 불평등 심화와 관련한 중요 문제로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언론이나 문화적 요인들도 불평등을 사회적으로 구조화하는 데 작용하고 있고요. 차별에 의해서 불평등이 발생하거나 더 강요되는 상황이 이런 경우 말고도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불평등 문제 극복,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
이남주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극복에 대한 이야기를 곳곳에서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굉장히 복잡하기 때문에 극복 방안에 대한 강조점도 저마다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주병기 앞서 이야기된 것처럼 불평등과 차별의 다양한 양상이 존재하는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다양한 차별들 사이의 상관관계가 상당히 높다는 점입니다. 결국 사회라는 것은 ‘힘의 대결’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미제스(Ludwig von Mises)는 시장경제가 민주주의적 투표 같은 것이라고 했어요. 사람들이 소비를 통해 투표한다는 거죠. 이 투표 시스템은 과연 공정한 것이냐 생각해보면 결국 소득이 많은 사람이 투표권이 많단 얘기니까 불공평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 간 힘의 불균형이 소득·자산격차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얘기죠. 그런데 이것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역사를 보면 더 큰 힘의 불균형이 시장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노동과 자본, 큰 기업과 작은 기업 간의 협상력의 불균형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을까요?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나 플랫폼 노동자 같은 경제적 약자들이 현재의 시장구조에서 분배에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고 봅니다. 그 힘이 임금, 노동시간과 여가의 선택권, 일터의 안전과 건강까지 결정하는 거거든요. 현재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 이 모든 결정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보니 월급이 낮은, 고용이 불안정한 쪽이 일하다 죽을 위험도 훨씬 높아지고 노동시간도 선택하지 못하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결국 공정거래와 노동권 등에 대한 법과 제도의 개혁이 지속돼야 이런 힘의 불균형 문제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이남주 그렇다면 우리가 얼마만큼의 불평등을 문제로 삼고 어느 수준으로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한 감각 없이는 관련 정책이나 합의가 만들어지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 대안을 찾기 위해서도 이러한 고민이 필요하겠는데요.
주병기 최근 우리 사회에서 능력주의에 대한 주장이 그 가치에 비해 과다 재생산되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능력주의는 공정성에 대한 대안이 아니에요. 절차적 공정 외에는 빈껍데기나 마찬가지고 결국 능력있는 사람이 아무리 많이 가져도 문제 삼지 않는다는 얘기와 다름없습니다. 자본주의사회는 이미 능력주의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불공평해서 문제가 되고 있잖아요. 얼마만큼의 불평등이 공정한 불평등인가에 대해서도 능력주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상식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는 동시대인의 총의(consensus)가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어느 때보다도 교류가 활발한 현대사회에는 동시대인들의 도덕적 공감대 같은 것이 있다고 보고, 그 속에서 기준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진국들을 보면 같은 자본주의사회지만 불평등도는 다 다릅니다. 그만큼 다양한 자본주의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죠. 이 다양성 속에서 우리의 기준점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발전하려면 그 기준점은 ‘잘사는’ 나라에 두어야 되겠죠. 격차가 작으면 인센티브가 없어서 혁신이 안 일어난다는 주장도 일각에서 하는데, 독일이나 스웨덴은 격차가 작은데도 혁신이 잘 일어납니다. 북유럽 선진국들은 소득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는데도 경제발전이 다른 나라에 뒤처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잘살고 사회 통합도 잘 이뤄지고 있어요. 다시 말해서 공정해도 잘살 수 있다는 겁니다. 공정도 우리의 목표고 잘사는 것도 목표면 두개를 다 추구할 수 있으면 좋은 거잖아요. 그래서 자산, 소득불평등의 기준점은 적어도 OECD 평균을 목표로 하고 이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차별과 기회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하겠고요. 다른 나라를 보면 그간 다양한 정책 실험이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의 적극적 차별철폐조치도 있고, 유럽 사회복지제도도 있습니다. 교육에서의 기회평등도 추구해야 하지요. 지금 한국 교육은 소모적인 경쟁으로 인한 낭비가 심각합니다. 특히 계층 간 고등교육 격차가 심화되는 지금과 같은 교육 기회의 불평등 상황은 교육 재정을 낭비하고 인재를 방치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우리 사회를 이끌 지도자, 도전적 기업가, 혁신가들이 부잣집에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천현우 저는 좀더 미시적인 차원에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최근 ‘광주형 일자리’를 설계하신 분을 만났어요. 저는 광주형 일자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우선 임금이 정규직 노동자와 하청 노동자의 중간인 3500만원 정도 돼요. 그리고 연공급제가 아니라 직무급제에요. 힘든 직무일수록 돈을 더 받는 구조인데 저는 이게 훨씬 합리적이라고 보거든요. 또 산업단지 차원에서 노조를 꾸려서 협상력을 가지고 노사정민 협의를 하고요. 처음 광주형 일자리 도입한다고 했을 때 정규직 노조는 당연히 반대했습니다만 이제는 이런 식으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김소라 능력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에 동감하는 까닭이, 한두차례 시험을 통해 정해진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체제가 문제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사람들이 능력을 갖추게 되는 과정이나 그 능력이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과정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그렇다면 이 능력주의를 극복하고 소득격차를 해소할 방안이 무엇일까. 저는 돌봄노동에 대한 가치평가가 제대로 이뤄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OECD 국가 중에 가장 큰데, 이는 여성들이 주로 종사하는 일의 임금 수준이 굉장히 낮고 노동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여성이 하는 돌봄노동이 숙련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임금 수준이 낮은 것이 그같은 현실을 잘 보여주죠. 그런데 돌봄노동이 정말 미숙련 노동일까요? 노동의 가치는 어떻게 측정되어야 할까요? 돌봄노동이 사회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재평가되고 그에 따라 임금 수준이 높아져야 소득 불평등이 줄어들지 않을까 합니다. 한편으론 현재 한국에서 돌봄이 시장화되고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돌봄이 상품화되어 경쟁 논리에 매이고 돌봄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임금은 상승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고요. 그래서 돌봄을 공공부문으로 흡수해 가치를 조정하고 일정 수준의 소득을 보장하는 등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천현우 노동을 시장 관점에서 해석하는 데 너무 익숙해지다보니 제대로 된 가치평가나 노동 존중이 없어요. 단적으로 ‘이백충, 삼백충’ 이런 멸칭이 생겨나는 게 현실이잖아요. 시장가치가 적은 일이니까 대우를 그만큼밖에 못 받는 거 아니냐는 식이죠. 근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필수노동에 하루하루 빚지고 살아요. 청소노동자들이 딱 하루만 없어져도 길거리가 난리 나겠죠. 간호사들이 하루만 파업해도 문제가 심각합니다. 우리 사회의 근간을 지탱하는 노동자들이 시장가치가 아니라 일의 중요성만큼 대우와 존중을 받아야 하는데 이게 잘 되지 않고 있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결국 대표성의 불평등을 개선해야 된다고 봅니다. 아까 얘기했던 언론의 문제도 결국 대표성의 문제거든요. 하청 노동자들이 사회에서 주로 불리는 게 사망사고 때예요. 죽지 않으면 불러주질 않는단 말입니다. 사실 수로만 따지면 하청업체에 일하는 사람들이 훨씬 다수인데, 이걸 왜 소수자 문제처럼 다루는지 모르겠어요. 수많은 필수노동자들이 다양한 불평등의 문제를 마음껏 떠들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목소리를 통해 현실을 알고 논의를 해보자는 구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김소라 ‘수업은 온라인으로 할 수 있지만 급식은 온라인으로 할 수 없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특정한 노동들이 계속해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같은 현실에 문제제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좋은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말만 반복되면 좀 허황되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천현우 선생님이 글에서 용접노동을 하면서 느끼는 자부심이나 보람을 내비치는 것을 종종 보았는데, 읽으면서 공감이 됐습니다. 저만 해도 시간강사이긴 하지만 학생들이 뭔가를 상담해오거나 변화한 모습이 보이면 거기서 느껴지는 뿌듯함이 있거든요. 단지 어떤 일의 소득을 높이는 것뿐 아니라 그 일이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이라는 의미 부여가 함께 이루어지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재인정부의 노력은 어떠했는가
—
이남주 촛불혁명 이후 문재인정부가 출범하면서 이런저런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평등이 워낙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복합적인 문제고, 5년 새에 많은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성과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좀 복잡할 거 같아요.
천현우 경험을 말씀드리면, 당장의 삶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 당시에 제가 창원 성산구에서 용접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故) 노회찬 의원 지역구죠. 문재인 당선이 확인되자마자 그렇게 사이 안 좋던 원청과 하청 직원이 한데 모여서 막 얼싸안고 그랬거든요. 이제 살기 좋아질 거다 하는 기운이 있었는데 정작 이후로 원청들이 인소싱(insourcing)으로 들어와서 하청 노동자들을 몰아내버렸어요. 몇년 후 그 원청 직원들이 퇴임하고 나서는, 노조 소속이 아니던 정규직들을 바지사장으로 앉혀 일하던 곳을 5인 미만 사업장으로 쪼개서 최저임금으로 사람을 막 굴리는 거예요. 이런 걸 보면 실질적 불평등은 전혀 해소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 현장에서 보면 불평등이 50대에서 더 심하다고 느껴집니다. 정규직 아저씨들은 휴식시간에 노후, 주식, 부동산, 자식 대학 얘기를 하는데, 하청업체 소속 아저씨들은 주식도 비트코인도 모릅니다. 이분들은 노동소득이 아직도 불안정한 상황이라 다른 데 눈 돌릴 여력이 없어요. 그런데 국가가 이런 분들에 대해서 대체 뭘 해주고 있으며 뭘 해줄 수 있느냐. 그러다보니 복지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사람이 먼저다’라고 했는데 최저임금 빼고는 달라진 게 없다고 욕하는 게 비정규직 현장의 정서입니다. 그래도 지역적으로 보면 ‘메가시티’론이 불이 많이 당겨진 상태이고 부울경 메가시티가 실현되면 지역 불평등 문제가 어느정도 해소될 거라는 기대가 있고요. 또 하나 기대할 만한 게 ‘제조업 르네상스’ 정책입니다. 공장 부지들이 하나둘씩 스마트 산단으로 바뀌어가요. 산업이 고도화되면서 위험한 일은 기계에 맡기고 노동력은 고부가가치 노동으로 옮겨갈 겁니다. 제조에서 제어로, 또 안전 관리로 노동력이 옮겨가는 거죠. 이렇게 되면 산재 비율도 줄일 수 있고 여성노동자 고용비율도 늘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에 따른 구조조정이 우려되기도 합니다. 숙련된 노동자들이 노동구조 변화에 따라 실직하고 나면 지금으로서는 고용노동부 직업교육 6개월 받고 비숙련자들도 할 수 있는 일에 배치되는 길밖에 없거든요. 이전의 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많은 이들이 결국은 도태됐고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어요. 조선업 위기 때 있었던 일이 반복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남주 기술변화와 그로 인한 구조조정이 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이러한 문제 또한 최근 수년간 불평등이 심화하는 이유로 작용해온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에 관해서는 어떻게 체감하고 계신가요?
천현우 안타깝지만 결국은 각자도생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교육·재교육이 잘 이루어져야 하거든요. 그런데 또 하나 큰 문제가 지방의 교육차별입니다. 어쩌면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싶을 정도예요. 지방에서 내일배움카드로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비교적 열악해요. 교육을 받으러 서울로 가거나 사설 교육이라도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돈 없고 나이 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다음으로 넘어갈 다리가 무너진 듯한 느낌이 들죠. 저는 그나마 젊어서 정책 지원을 받을 수도 있지만, 40~50대 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옆에서 봐도 감이 안 와요. 제가 국무총리실 산하 청년정책조정위원회에도 참여하고 있어 정보접근성 측면에서 남들보다 월등하게 유리한데도 저 자신이 구조조정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딱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오거든요. 정부 차원에서 교육 사다리를 잘 확충해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주병기 보통 정권만 바뀌면 복지가 확충되고 소득 불평등이 없어지면서 변화가 빠르게 체감될 거라고 기대하는데, 그런 기대에 못 맞추는 건 사실입니다. 문재인정부가 그래도 열심히 했던 것 중 하나가 노인공공일자리를 늘린 겁니다. 이 정책의 타깃은 60대 이상이라 50대는 어떻게 보면 사각지대인 거고요, 그래서 그런 ‘쓸데없는’ 일자리 대신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비아냥도 많았죠. 그런데 사실 연금 혜택이 낮은 현실에서 60대 이상의 살 길을 만들어주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노인빈곤율이 심각하고 사회복지도 안 좋은데 노인일자리 만드는 것에 대해서 비판의 목소리가 큰 걸 보면서 참 허탈하더라고요. 또 현 정부 집권 초반, 빠른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어요. 어떤 사람은 경제 망한다고 했고요. 그러나 모든 정책은 단기적으로 충격(shock)으로 작용합니다. 그 충격에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이 적응하는 과정을 거친 뒤 최종결과가 바람직한가를 평가해야 되는데, 단기적인 충격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에만 초점을 맞춰서 정책을 포기하라고 하면 아무 정책도 시행할 수 없는 거죠. 물론 정부는 단계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부작용들을 고려하고 이를 완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같이 만들어야 합니다. 문재인정부도 순서나 타이밍의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보완책을 많이 만들었어요. 소상공인 수수료 인하, 근로장려세제, 일자리 안정자금 등이 그것이죠. 최근 통계를 보면 몇십년간 OECD 1, 2위 하던 한국의 저임금근로자 비율이 지금은 빠르게 감소하고 있어요. 상당히 놀라운 일입니다. 고용률도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어서 소득 양극화가 개선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여요. 최저임금 인상을 빼고는 이런 변화를 설명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을 때까지 복지와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정책적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봐요.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는 장기적 과제를 수행하면서 과도기에는 실업부조나 근로장려세제 등을 통해 불평등을 줄여야 합니다.
천현우 이번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에 대해 결국 자산 불평등이 커지면서 실패했다는 평가가 많은데, 최하층을 끌어올린 효과는 분명 있다고 봅니다. 그래도 밑바닥이 조금 높아졌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김소라 불평등 완화가 직접적으로 체감되지 않는 것은 현실에서 주변부화 되어 있는 이들이 정책 대상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일례로 중대재해법의 제정과 시행은 잘한 일이지만, 50인 미만 사업장에 법 적용이 유예되는 것을 보면 가장 먼저 보호받아야 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배제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정책의 실효성에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또한 정책과 법률이 잘 시행되려면 행정조직이 제대로 작동해야 하는데, 과연 그러한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디지털 성폭력 관련 법률과 정책만 봐도 문재인정부에서 짧은 시간 동안 놀라울 정도로 많은 법률·정책 제안이 이루어지고 제도화되었는데요, 정작 형사사법체계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정부가 법률과 정책의 입안, 시행 공포 외에 실질적인 변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느냐 하는 아쉬움이 생겨요. 정부 조직의 구성원들을 설득하고 사회적 합의를 마련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보니 부정적인 평가를 하게 되기도 합니다.
주병기 선출되는 권력이 아무리 사회문제에 대응해도 선출되지 않은 공권력의 담합체가 움직이지 않으면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죠.
이남주 정책은 정부 차원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들에게 그에 맞춰 어떤 행위를 하자고 요청하는 건데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번 정부의 정책적 움직임에 아쉬운 점이 좀 있습니다. 최근에만 해도 왜 재난지원금을 모두에게 주지 않았는지 아쉬움이 남는데요, 적극적인 방향 제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는 메시지를 준 셈이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또 하나는 정부의 행위는 담론이 대단히 중요한데 자꾸 정책을 던지고 말아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책이 담론화되고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동의가 되어야 정책의 의도가 말단에까지 관철될 수 있는데 그런 힘은 잘 보이지 않더라고요. 한편 문재인정부의 불평등 대응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만든 결정적인 사안은 부동산 문제입니다. 여러 노력에도 결국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비판에 놓여야 했는데요, 이 문제는 자산, 금융 차원의 불평등과도 연결해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천현우 지방도 지방 나름이겠지만 대체로 지방에서는 부동산 문제가 이슈가 안 됩니다. 사봐야 별로 오르지 않기 때문에 부동산 투자라는 옵션이 없습니다. 제 주변 사람들은 비트코인으로 많이 빠졌죠. 공장에서 누구 한명이 대박 나면 골치 아파집니다. 오전까지만 해도 일하던 사람이 오후에 환전하러 간다고 안 보여요. ‘7억을 땡겼다’는 거예요. 그럼 현장 분위기는 뒤숭숭해지고 결국 답은 비트코인이라며 일이고 뭐고 다 쓸려나가는 거죠. 그런데 이런 투자나 금융 관련 문제는 기본적으로 자산이 적은 사람이 불리한 게임입니다. 같은 차원에서 왜 가난한 사람들이 더 높은 이자를 내야 하나요? 이자도 부담되지만 문턱이 높아 빌리는 것도 어렵죠. 그래서 비싼 사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극한 상황에 내몰리게 돼요. 이런 위험한 현실이 일확천금의 유혹에 더 쉽게 빠져들게 하는 것 같고요. 이렇듯 가난한 사람들이 리스크를 더 많이 짊어지는 상황을 개선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주병기 문재인정부 들어서도 시장소득 불평등이 높아졌습니다. 비정규직과 플랫폼 노동의 증가에 따른 전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지만, 노동시장의 양극화가 심한 한국은 더 심각하게 여겨야 하죠. 다행히 소득재분배를 강화하는 정부의 정책기조, 소득주도성장 정책, 복지와 사회안전망 확충 등으로 가처분소득 불평등은 낮아졌어요.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 불평등이 심화된 것 또한 전세계적인 추세인데요, 우리나라도 2016년부터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자산가치가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죠. 글로벌 자산시장에서 주식, 부동산 등은 모두 투자의 대안인지라 다 엮여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정부가 이런 글로벌 경제의 흐름을 바꾸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강남처럼 투기 세력들이 타깃으로 삼고 있는 지역의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는 이번 정부의 목표는 과욕이었다고 보고요. 그보다는 서민 주거 안정이 바람직한 목표라 보지만 이렇게 했더라도 부동산 시장 과열은 여전했을 것이라 생각해요. 다만 정부가 처음부터 주거 안정을 목표로 했더라면 관심이 공공주택 공급 쪽으로 갔을 것이고 부동산 과열이 있더라도 지금처럼 비난을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핀셋 규제’만을 거듭하면서 정책 실패라는 비판에 직면했죠. 너무 많은 정책을 시행하다보면 그게 꼭 모든 문제의 원인인 것처럼 보여서 더 욕을 먹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든 자산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쉽지 않아요. 일단 불로소득을 최소화하도록 과감한 정책을 시행해야 합니다. 보유세는 지속적으로 강화하고요. 지금 한국 부동산 자산시장 규모가 GDP의 다섯배가 넘어요. 다른 선진국들은 두세배 정도거든요. 자산시장이 이렇게 큰 나라인데 자산세율이 너무 낮습니다. 장기적으로 임대소득을 비롯한 자산소득에 대한 과세도 강화해야 합니다.
김소라 주택 구입의 목적이 투기가 아닌 경우도 많잖아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실패로 이해되는 까닭 중 하나는 실거주와 자산 축적을 동시에 목적으로 하는 이들에게 제때 주택 구입을 못해 손해를 보고 있다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주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더 나아가서 정부가 ‘영끌’이니 ‘패닉 바잉’이니 하는 말을 하니, 변화하는 시장 상황 속에서 불안감을 느낀 이들의 행위를 비난하는 어조로 읽혀 문제를 악화시켰다고 생각하고요. 저는 지금 공공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요, 일정 기간 동안 안정적인 주거를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 주는 안정감이 있습니다. 주택시장 변동으로 인한 불안도 크지 않고요.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현재의 주거 안정성이 중요한 거죠. 주거 정책도 공공성을 확장해서 일정 수준 이상의 살 만한 주택을 보급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졌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남주 문재인정부의 설득 논리가 취약하다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주거 정책의 경우도 주거 안정이 목표라고 하면, 단계적으로 집값이 오르더라도 정부가 주거 안정을 위한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는 신호만 설득력 있게 발신했어도 지금 같은 상황까지는 안 되지 않았을까 해요. 부동산 문제가 수도권으로 다 집중되는 지금 상태에서는 그 해법이 균형발전과도 연결이 되어야 하겠고요. 천현우 선생님이 금융 불평등과 관련한 언급을 했는데, 부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금융서비스가 제공되고, 어려운 사람들은 빚의 수렁에 빠지는 상황이 코로나19 시기 더 증가했고, 이 또한 불평등과 연관된 주요한 문제 같습니다.
주병기 금융의 중요한 역할은 서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신용 제약을 해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산이 없는 서민들, 중소기업, 창업가 등에 대한 금융서비스가 매우 취약한 것이 현실입니다. 담보할 만한 부동산이나 자산이 없는 사람들은 돈 빌리기 어렵고 빌리더라도 비싼 이자를 내야 하죠.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 그에 대한 댓가로 이자를 높이고요. 금융이 취약계층의 기회를 살리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물론 부자들에게 대출하는 것보다 더 큰 노력과 전문성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이런 서비스로 금융기관이 어려워지는 게 아닙니다. 작지만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요. 문제는 이런 작은 수익에 금융기관들이 관심이 없습니다. 큰 기업, 고소득자, 자산가들을 상대로 한 담보대출 위주로 더 큰 돈을 쉽게 벌 수 있기 때문이죠. 금융기관이 쉽게 돈 버는 방법만 좇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서민대출, 중소기업이나 창업자를 대상으로 한 대출을 잘 하도록 의무를 부과하거나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미국만 해도 지역재투자법 같은 서민금융제도를 운영해요. 코로나19 상황에서 고신용자들은 돈을 빌려 자산에 투자해 큰돈을 번 반면 저신용자들은 더 어려워졌고 자산 불평등으로 상대적 박탈감도 커졌죠. 지금 같은 위기상황에서는 정부가 저신용자들을 보호하고 이들이 경제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채무조정과 회생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불평등 해소를 위한 차기 정부의 과제는?
—
이남주 그렇다면 내년에 들어설 새 정부에서 불평등을 실질적으로 완화하고 해소하기 위해 당장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천현우 저는 항상 ‘일자리’를 얘기합니다. 청년정책조정위에서도 과장을 조금 보태서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면 청년 문제, 소득 불평등 문제 90%는 잡을 수 있다’라고 주장하거든요. 그렇다면 정책 철학의 차원에서 ‘좋은 일자리’란 무엇인가부터 논의해야 하잖아요. 저는 좋은 일자리의 핵심은 ‘향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남주 향상성이라고 하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는 건가요?
천현우 예를 들어보죠. 연봉 1억을 주는데 업무가 ‘벽 보고 서 있기’라면 노동자와 사용자 양쪽에 다 비극이에요. 가치 창출도, 의미도 없이 비용만 엄청나게 치르는 셈이거든요. 가치의 향상과 대우의 향상이 동시에 필요한 겁니다. 일전에 노동연구원에 가서 지금의 지방 제조업 노동시장은 전태일 열사가 일하던 때보다 나아진 게 없다고 짐짓 세게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게 꼭 틀린 말도 아닌 게 당시 미싱사, 재단사는 계단식 상승 구조가 있었습니다. 기술이 나아지면 사장과 합의해서 임금을 올릴 수 있었어요. 숙련도가 높아지면 개인의 가치 창출에 따른 효능감도 늘고 그에 따라 회사와 사회의 인정과 물질적·사회적 대우도 합당하게 올라가야 하는데 적어도 지금 제가 있는 곳은 그런 구조가 없거든요. 결국 좋은 일자리의 핵심은 향상성을 복원하고 그에 따른 대우를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남주 그렇다면 그런 향상성을 확보한 좋은 일자리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천현우 원론적인 얘기지만 노사 간 타협이 필수조건이라고 봅니다. 기업에서 노동자의 숙련에 대해 제대로 대우하겠다고 하면 향상이 당연히 따라 올 겁니다. 향상이 다시 가치를 만들고 지속가능한 생태계가 만들어질 여지가 생기는 거죠. 노동자 측에서는 고용보장과 연공급제가 같이 지켜지는 지금의 구조에서는 향상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가만있어도 연봉은 올라가고 해고의 위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남주 최근 문화적으로든 교육으로든 노동을 자꾸 비가시화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산업구조가 고부가가치 쪽으로 이동하고 노동에 대한 의존도가 떨어지면서 제조업 비가시화도 빠르게 진행되었고요. 세계적 차원에서도 노동을 비가시화하면서 생기는 문제가 있다고 봐요. 어려운 일들을 하청에 맡기듯 국가 간에도 원청-하청 관계가 생겼고, 하청 국가는 오염이나 탄소배출을 많이 떠안게 되는데 시키는 쪽에서는 그런 문제란 아예 없는 것처럼, 그런 노동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죠. 이처럼 노동가치의 문제를 시장에 맡기면 필수노동이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으니까 좀더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소라 노동의 가치평가를 시장에만 맡기면 안 된다는 말씀과 같은 결에서, 저는 이번 정부가 정치적으로 어떤 문제를 논할 때 지나치게 다수결의 힘에 끌려다니지 않았나 싶어요. 대표적으로 차별금지법 제정 논란을 예로 들 수 있겠는데요. 사회에서 일정 정도 배제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이 소수자인데, 그들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자꾸 다수결의 논리를 들이대는 거죠. 합의를 마련하기 위한 다른 방식의 정치적 노력은 하지 않은 채로요. 정부가 인권, 노동권 등 중요한 가치에 대해서는 다수결의 원칙보다 공공의 선을 우선시한다는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정책 철학이 없다고 느껴지는 것도 이런 문제와 관련이 있고요. 합의를 못 만들어내도 좋고 실패를 해도 좋으니까 지나치게 다수의 이야기만 남는 방식으로 정책을 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남주 막상 담론의 헤게모니를 쥔 사람들이 숫자로 꼭 다수인 것도 또 아니죠. 발언권이 기울어져 있는 구도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주병기 이번 정부는 방향 설정은 적절했지만 여러 개혁 이슈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일관된 철학이 없었던 것이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선진 자본주의사회가 백년 동안 싸워왔던 과거 자본주의의 문제들, 노동 대 자본, 독과점, 정경유착, 부패 등 다양한 힘의 불균형과 그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 비효율성의 문제가 지금 한국사회에 응축되어 있다고 봅니다. 결국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나쁜 구조들을 걷어내야 합니다. 노동과 자본 간, 대기업과 협력업체 간, 재벌 오너와 소액 주주 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계층 간 힘의 불균형이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죠. 정부가 임기 초기부터 의지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노력했어야 했는데, 재벌개혁을 위한 법 개정도 너무 늦었고 그 수위도 너무 낮아요. 지금 우리의 노동시장에서는 대기업, 공기업, 공공부문 등 전체 고용의 20%가량의 소수만이 행복한 삶을 설계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나머지 국민들이 직면하는 노동시장은 불안하고 위험합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 중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장시간 노동을 하는 나라입니다. ‘산업재해공화국’이라고 불릴 만큼 작업장의 안전이 지켜지지 않아 OECD 회원국 중 산재 사망률도 부동의 1위예요. 매년 2천명의 산재사망자가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시급한 문제를 바꾸는 데도 기득권의 저항이 거셉니다. ‘김용균법’을 생각해보세요. 하청노동자의 비극적 죽음 때문에 법을 개정했는데 워낙 허술해서 정작 고(故) 김용균씨와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이 여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범의 재범률은 97%에 이릅니다. 이천 냉동창고 화재로 40명의 노동자가 희생되었는데 처벌은 벌금 2천만원이 전부입니다. 안전을 지키는 것보다 벌금 내는 게 더 이익이니 누가 지키겠습니까? 규제를 강화하면 회사들이 망한다고 하는데, 사람 살리는 규제 때문에 망할 회사면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합니다. 아니, 우리 정도의 경제발전 수준이면 이미 이루어졌어야 할 일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목소리가 사회에 잘 발화되는 환경이 먼저 만들어져야 합니다. 노동대중이 정치세력화 할 수 있어야 되고 시민단체나 언론에서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고요, 특히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 특수고용직 등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높여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안전, 보건, 복지 분야에서 일할 공공부문 일자리를 대폭 늘려야 합니다. 소득재분배 역할을 하는 사회복지지출 비중은 현재 11.1%로, OECD 회원국 평균인 20.1%의 절반 수준에 불과합니다. 사회복지지출은 고용승수가 가장 높아요. 사회복지를 확충하면 일자리를 효과적으로 늘릴 수 있다는 얘기죠. 복지와 사회안전망을 확충해야 열악한 노동시장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이남주 힘의 불균형이라는 상황 판단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도 연관돼 있고, 촛불에 대한 평가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촛불로 촉발된 변화가 힘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그렇게 가기 위해서는 어떤 선택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 한국사회를 판단할 때 개별적인 이슈에 대한 불만족이 있을 수 있고 문재인정부에 대해 여러 비판요소들이 있다 하더라도 저는 어쨌든 촛불 이후의 한국사회에는 힘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향의 역동성이 작동하고 있다고 보고, 이를 어떻게 발전시키느냐가 다음 정부 들어서도 중요한 이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천현우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본질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당장 제가 속한 청년조정위원회만 해도 노동자 출신은 저 혼자거든요. 대표성 차원에서도 힘의 불균형이 계속 느껴지는 상황인데, 이를 빨리 해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소라 한편으로 저는 ‘촛불정부’라는 수사에는 좀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촛불집회 당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발화되고 그 가운데 서로 논쟁도 하는 모습이었어요. 제가 생각했던 ‘촛불’이 지녔던 가능성, 모든 이들이 자신의 상황과 위치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론장이 이번 정부에서 잘 실현되었는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촛불과 현 정부를 바로 연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선 다소 회의적이고, 다만 정책적으로 촛불을 의식하며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려고 노력한 모습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후의 정치를 논할 때는 기본적으로 양당 중심의 질서를 벗어나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단적으로 양당 중심의 구조와 정쟁 속에 많은 문제가 ‘젠더 갈등’이라는 프레임으로 수렴되었습니다. 하지만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에서 볼 수 있었듯 정작 성평등에 관한 제대로 된 정치적 논의가 있었나 싶거든요. 앞으로는 지금의 구조를 벗어나 다른 정치적 가능성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주병기 이후의 과제로 또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공공부문의 불투명성과 부패 문제입니다. 경제적 힘의 불균형을 포함해 우리가 논의했던 모든 문제와 관련됩니다. 다음 정부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권력기구를 통해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권력기구들이 이러한 변화에 둔감하거나 변화를 거부한다면 절대 발전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권력기구라고 할 수 있는 검찰이나 사법부가 얼마나 시대에 뒤처지는지 놀라울 때가 많습니다. 비위를 저질러도 파면당하거나 탄핵되는 사례가 없어요. 다른 공직자에 비해 징계 수준이 터무니없이 낮습니다. 이건 국민들이 분노해야 할 일이에요. 지금까지 삼권분립의 틀 속에서 보호받다보니 시대변화에 따라갈 필요도 없었고, 도리어 공권력을 팔아 집단의 사익까지 추구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공조직을 떠난 사람과 조직이 하나가 되어 민간부문에서 돈벌이를 하는 거예요. 저는 이걸 구조적 담합에 의한 구조적 부패라고 부릅니다. 개개인은 스스로 부패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선배들이 해왔던 일들을 답습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사익 추구가 가능한 거죠. 이런 일이 한국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습니다. 이런 사회는 발전할 수 없어요.
이남주 중요한 권력기구일수록 그러한 카르텔화가 강한 것이, 국가 권력기구에 속해 있지만 그 구성원이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자기네 이익집단에 가 있기 때문이죠. 사법부, 금융계가 그러한 카르텔이 가장 강하고요. 새로 등장하는 영역이 군산복합체예요. 한해 50조원 이상씩 쓰는데, 인건비에 해당되는 병력운영비 40%를 제외하더라도 약 30조를 주무르는 힘이 있거든요. 현재 계획에 따르면 국방예산은 곧 70조에 달합니다. 이러한 힘이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에 미치는 힘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병기 권력을 사고파는 하나의 시장이 형성돼 있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만연한가는 이 시장의 전관들의 대우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고위직 검사로 퇴임한 전관 변호사가 한 사건에서 10억원의 수임료를 받고 한해 100억원에 가까운 소득을 벌고 있습니다. 이들의 권력에 대한 수요가 얼마나 많으면 가격이 이 정도일까요? 다른 정부부처도 마찬가지 입니다. 은퇴한 노동부 관료가 노조 탄압과 기업의 감독 회피를 위한 컨설팅 분야에서 일을 하면 감독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여러 국제기구들의 부패 관련 조사를 보아도 한국은 OECD 국가들 중 하위권입니다. 보통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들은 부패하지 않아요. 다시 말해 이 문제가 해결 안 되면 한국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선진국이 되긴 어렵다는 겁니다.
이남주 우리가 전통적으로 부패를 논의할 때 정경유착에 주목해 자본과 정치의 관련성만 살피는데, 사실 관료가 민간부문으로 넘어가는 게 더 뿌리가 깊고 발각도 어려워요. 이 경우는 당장 돈 받고 무엇을 해결해주는 게 아니라 장기적 거래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불평등 문제도 계속 악화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더욱이 과거에는 대개 개인적인 일탈 또는 문화적인 상황에서 부패가 발생하는 요소들이 국지적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구조적이고 기술적인 방식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러한 것이 결국 계층구조의 고착화를 초래한다고 보이고, 이 문제의 해결이 빼놓을 수 없는 과제겠습니다. 여러 관점과 영역에서 불평등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지점들을 짚어주셨는데, 한국사회의 대전환을 위해 불평등 해소는 반드시 필요한 문제인 만큼 오늘의 논의가 가지는 의미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대화 이후로도 불평등에 대한 논의와 해결 움직임이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이어지길 바라며 오늘 자리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11.1.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