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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장은영 長恩暎

201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슬픔의 연대와 비평의 몫』 등이 있음.

pome01@hanmail.net

 

최민우 崔旻宇

2012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머리검은토끼와 그 밖의 이야기들』, 장편소설 『점선의 영역』 『발목 깊이의 바다』 등이 있음.

daftsounds@gmail.com

 

황인찬 黃仁燦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 등이 있음.

mirion1@naver.com

 

 

황인찬 안녕하세요. 가을호에 이어 겨울호 문학초점 사회를 맡은 시인 황인찬입니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자리해주신 선생님 두분께 모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호는 아쉽게도 비대면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행히 직접 뵙고 말씀 나누게 되어 더욱 기대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민우 안녕하세요. 최민우라고 하고, 소설을 씁니다. 문학초점에 함께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장은영 저는 평론을 쓰고 있는 장은영이라고 합니다. 시와 소설을 창작하는 작가분들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작품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감각을 공유해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왼쪽부터 장은영 최민우 황인찬.

왼쪽부터 장은영 최민우 황인찬.

 

 

조해진 『완벽한 생애』(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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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첫번째로 이야기 나눌 작품은 조해진의 소설 『완벽한 생애』입니다. 2020년 1~2월 그리고 2021년 4~5월이라고 하는 두개의 시간을 축으로 삼아 직장을 그만둔 뒤 영등포의 집을 에어비앤비로 내놓고 제주로 떠난 윤주, 윤주의 집에 한달간 머물게 된 시징 그리고 윤주의 친구 미정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서로 교차하고 엇갈리는 궤적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모두 자기 집 없이 떠돌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띄어요.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시대적으로 중요한 질문을 여러 인물들을 통해 흥미롭게 엮어냈습니다.

 

최민우 작가가 그간 집중해온 윤리라는 문제가 이번 작품에서도 섬세하게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인물들은 모두 자기 나름의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어요. 윤주는 이른바 ‘낙하산’으로 영화음악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 자리에 들어갔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 생계를 농담거리로 삼는 걸 듣고 충동적으로 직장을 그만둡니다. 제주 제2공항 건설 반대활동을 하고 있는 미정은 자신보다 훨씬 치열한 다른 활동가의 삶을 보면서 자신의 신념에 대해 고민하는 한편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버지의 과거를 용서하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시징은 2014년과 2019년 홍콩시위 현장에 있던 인물이고요. 이들이 집 없이 떠돌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집뿐만 아니라 윤리를 찾아서 돌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태도나 입장을 찾아 헤매는 거죠. 어떻게 보면 이 작품에서 ‘집’이란 정착할 수 있는 윤리의 은유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은영 집 찾기와 새로운 윤리에 대한 탐색을 연결시켜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거주와 노동의 형태가 ‘정박’ ‘정주’에서 ‘유목’ ‘유랑’으로 전환된 사회체제에서 불안정한 노동에 종사하는 계층은 늘 집을 찾아다녀야 하는 비자발적 유목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필연적이기보다는 우연한 계기를 통해 이동하고 그 과정에서 타인을 만나게 돼요. 타인을 만나 관계를 맺는 방식이 유목적 삶에서 비롯하는 거죠. 그런 점에 주목하면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던지는 문제 중 하나는 떠나고 이별하기를 반복하는 삶의 현실에서 요청되는 관계의 윤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에요. 삶의 배경이 되는 몇몇 사건들이 산발적으로 등장하면서 하나의 서사로 존재할 수 없는, 동시대라는 장을 보여주는 데 무게를 두고 있죠.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선과 악을 명확히 판단하거나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는 책임과 관계의 윤리라는 점을 강조하는 듯해요.

 

최민우 ‘내가 왜 이렇게 살까’보다는 ‘내가 과연 이래도 될까’ 하는, 답을 내리기보다는 꼬리에 꼬리를 물듯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에요. 작가의 전작들과 연결되는 치열한 질문이 반가웠습니다. 분량은 짧은데도 영등포와 제주, 홍콩과 베트남 등 다양한 공간을 작품에 끌어들여 스케일이 크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장은영 작가는 전작들에서 역사적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개인의 삶을 밀도있게 서사화한 바 있지요. 『로기완을 만났다』(창비 2011)도 그렇지만, 『단순한 진심』(민음사 2019)의 경우도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해외로 입양됐던 주인공이 자기 이름의 기원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추체험하는데, 개인의 삶과 역사적 상황이 만나는 지점들이 잘 드러난 작품이었어요. 그에 비하면 『완벽한 생애』는 비정규직 문제, 난개발 문제, 국가권력과 시민의 자유 등 현재의 사회적 의제들과 그 안에서 갈등을 겪는 개인의 삶을 공시적으로 다루는 데 집중한 작품이라고 보았습니다.

 

최민우

최민우

최민우 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이 소설은 동명의 단편을 확장한 것이라고 하죠. 소설의 시간축이 모두 동시대에 머물러 있다보니, 인물들이 가진 문제의 입체적인 측면, 과거나 역사적 맥락을 거슬러 짚어낼 수도 있었을 측면은 충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쉽다기보다 그 이야기를 더 읽고 싶은 쪽입니다. 단편의 주인공이었던 윤주의 이야기는 어느정도 분명한 궤적을 그리는데 시징과 미정의 이야기는 여전히 길 위에 있는 것 같아요.

 

황인찬 그런데 소설의 시작점 자체가 ‘거할 곳 없음’이잖아요. 거할 곳이 없고,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불안하게 여기는 인물들이 종적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축을 제대로 의식하기란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예를 들어 시징은 홍콩시위의 복판에 있던 인물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자신의 삶에 아주 가깝다고 의식하지 못하고 “정의와 자유의 실체가 무엇인지”(69면) 알 수 없다고 여깁니다. 기계적으로 시위에 참가했던 시징은 그 속에서 은철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겪고 나서야 시간 혹은 역사로, 자신의 이전에 있던 일과 자신 앞의 다른 것들로 고개를 돌릴 수 있게 됩니다. 미정 역시 아버지의 과거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다 마지막에야 가까스로 아주 작은 이해에 도달하게 되고요. 요컨대 이 소설은 말씀하신 시간적인 층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바로 그 자리까지 인물들을 도달시키는 데 주력한 듯합니다.

 

장은영

장은영

장은영 동시대의 사건들을 통해 역사적 진실과 개인의 진실이 과연 일치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건 아닐까 해요. 예를 들어 미정은 정의와 신념을 중시하는 법학도로서 베트남 양민학살에 가담했던 한국 군대의 폭력성과 비윤리성에 대한 증오를 아버지에게 그대로 투영합니다. 미정에게 아버지는 한 개인이 아니라 한국 군대로 환원된 셈이죠. 그런데 제주에서 만난 보경 언니로 인해 그 생각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요. 미정은 활동가인 보경 언니가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마음마저 가지기도 했지만, 그녀가 부실공사 사고로 자식을 잃은 고통을 계기로 활동가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한 개인의 진실이 가진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다시 바라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죠.

 

최민우 과거를 캐묻는 미정에게 아버지가 “나는 사람은 안 죽였다”(123면)고 말하는 대목에서 실은 좀 짓궂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미정의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윤리적으로는 정당화할 수 없을지 몰라도 전쟁이니 생존을 위해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그럼 미정은 계속 고뇌의 무간지옥을 헤맸을까요. 그 장면은 문제의 해결이라기보다는 모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제 말은 이 소설의 치열한 윤리적 고민이 어찌 보면 외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단련되기보다 인물의 내면을 맴돌고 있지는 않은가 싶은 거죠. 스스로를 회의하고, 단죄하고, 심판하면서요. 그런 면에서 저는 시징이라는 인물에 유난히 끌렸습니다. 시징은 은철과의 관계를 통해 퀴어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됐고, 만나지 못할 걸 각오하면서도 그가 살았던 동네를 찾아 바다 건너 영등포까지 왔죠. 다른 인물들이 상황에 떠밀리듯 이동한 것과는 달라요.

 

황인찬

황인찬

황인찬 한편 윤주가 시징에게 보내는 편지는 소설에서 중요한 감정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메모를 완성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방 어딘가에 두고 나왔지만, 윤주는 끊임없이 시징에게 마음속으로 편지를 쓰고, 그 말들이 그대로 시징에게 전달되는 듯해요. 다소 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시징과 윤주는 이 편지들을 통해 접점을 만들어갑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윤주가 시징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에 소설 전체가 성립되고 모양을 갖추게 된 셈인데, 관계의 윤리를 고민하고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변화의 시작을 만드는 이 소설이 편지 쓰기, 타인에게 말 걸기라는 행위를 통해서 촉발되었다는 점이 또 재미있기도 합니다.

 

최민우 소설 마지막 장 ‘편지들’은 독자들에게 ‘우리의 대화는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인물들이 정말로 만나게 되건 그렇지 않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듯 끝나거든요. 꼭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자면 마주 보는 것, 대화를 시작하는 것 이후를 고민하는 소설을 보고 싶다는 바람도 있어요. 섬처럼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마주치고 엇갈리며 소통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서사는 우리에게 익숙한 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대화를 시작하면 전보다 훨씬 난감하고 지난한 문제가 생겨날 수 있겠죠. 이 부분을 파고드는 작품은 제가 과문해서겠지만 많이 접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끝으로 이 소설의 문장도 꼭 언급하고 싶어요. “평소보다 우울하거나 고독할 땐 무얼 하며 시곗바늘의 균등한 간격을 견디는지”(24면) 같은 문장을 만나면 이게 소설 읽는 재미지, 하는 감흥이 물씬 일어요.

 

 

박상영 『1차원이 되고 싶어』(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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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할 얘기가 무척 많지만 이쯤에서 박상영 작가의 첫번째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로 넘어가볼까 합니다. 상담가 ‘나’가 과거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익명의 메시지를 받고 청소년 퀴어로서의 과거를 회상하는 소설입니다. 지방의 D시를 배경으로 한 ‘나’와 윤도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이자 ‘나’의 성장담이기도 한데요. 우선 소설이 가진 민속지적 성격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웃음) 캔모아나 MSN 메신저같이 1990년대, 2000년대 초반의 장소적·문화적 지표에 대한 방대한 서술을 작가 특유의 입담으로 쏟아내 읽는 즐거움이 상당합니다. 특히나 동시대를 경험한 독자들은 소설과의 거리감이 단숨에 좁혀지는 경험을 했을 듯해요. 박상영이라는 유머러스한 작가를 거쳐 재현된 이 시대, 세계가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해서 작가의 역량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가 애정을 담아 불러내는 이 풍성한 목록, 특히 대중문화 작품들은 퀴어인 ‘나’를 발견하고 지탱하게 해준 것이기도 합니다.(“세상에 나를 위한 서사가 이토록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55면) 동시에 많은 이들이 웃으면서 떠올릴 수 있는 기호들 사이로 많은 이들에게서 이해받지 못하는, 그래서 고립감을 느끼는 청소년 퀴어의 이야기가 배치됨으로써 그 낙차로부터 묘한 쓸쓸함이 자아내지기도 하고요. 소설이 그토록 많은 기호들을 등장시킨 까닭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장은영 박상영의 소설을 읽는 건 항상 기대되는 일입니다. 심각한 얼굴로 읽지 않아도 몰입하게 되는 건 작가의 ‘츤데레 화법’이 주는 재미 덕분일 거예요. 주인공들이 ‘아닌 척’하는 상황들이 많은데, 진지한 마음을 어쩔 수 없이 숨기고 위선과 가식 혹은 찌질함을 연기하는 복잡 미묘한 감정에 대해 독자는 인간적 연민마저 가지게 되는 거죠. 대개 일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박상영 소설의 주인공들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실은 자신이 처한 현실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에 진심인 인물들이거든요. 이번 장편에서도 작가의 특징으로 언급되어온 ‘농담’이 발휘되는데, 단지 웃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을 숨기거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발휘된다는 점에서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자극합니다.

 

최민우 저 역시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늘 다루는 책 중에서 가장 두꺼운데 읽으며 막힘이 없었고 문장의 흐름도 박상영답게 시원시원했습니다. ‘무늬’라는 여성인물을 통해서는 작가의 이전 단편 「재희」(『대도시의 사랑법』, 창비 2019)가 떠오르기도 하고, ‘나’의 어머니가 재개발 소식에 “정말 할렐루야지 않니?”(244면) 할 때는 「우럭 한점 우주의 맛」(같은 책)의 어머니도 떠올랐고요. 단편에서도 늘 이야기가 터질 듯 넘쳐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 기세가 장편으로도 이어지는 것이 감탄스러웠습니다. 작품의 이런 생기는 작가가 자신이 쓰고 있는 세계를 잘 알고 있고 그 세계를 표현할 언어를 자신있게 선택한 데서 나오는 것이겠죠. 한편 소설의 구성은 마치 5부작 드라마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시체’와 ‘과거’로 눈길을 끄는 ‘과거로부터 온 편지’로 시작해 이 편지가 각 장 사이에 배치되어 다음 장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죠. ‘윤도’의 아지트라 할 컨테이너, 학교, 캔모아, 노래방, 머큐리랜드 등의 공간은 커다란 세트장처럼 느껴지고, 그 안에서 주된 갈등이 벌어집니다. 어찌 보면 전형적이다 싶으면서도 막상 읽을 때는 그게 또 잘 먹힙니다.

 

장은영 좀 고전적 바람인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장편을 읽을 때 운명적 난관이나 사건을 겪는 인물들의 삶이 역사적 시간이나 현재의 사회적 맥락과 만나는 서사가 핍진하게 드러나길 기대하곤 하는데요, 이번 소설은 인물들의 삶이 현실이라는 지평과 깊이 연결되지 못하는 것 같은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앞선 말씀처럼 인물과 서사가 다소간 세트장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들어서예요. 예를 들어 ‘나’와 윤도가 은밀하게 만나는 컨테이너가 그렇습니다. 컨테이너는 어떤 외부의 힘도 작용하지 않는 밀폐된 공간, 무중력 공간과도 같아서 그 안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관계가 현실적 맥락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어요. ‘비밀 관계’를 위한 설정이기는 했을 테지만 이것이 현실에서 탈각된 것으로 수렴되어 읽힐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주요 인물들은 욕망이 좌절될 때마다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의 대학에 합격해 D시를 벗어나겠다는 결심으로 갈등을 수습해가지요. 어쩌면 서사의 배경인 D시 역시 컨테이너와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의 갈등이 현실적 지평과 만나지 못하고 무화되어버리는 공간이 된 게 아닐까, 그러다보니 퀴어 청소년들이 부딪치는 삶의 난항과 현실의 잔혹함에 대해서는 접근할 여지가 줄어드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아쉬웠습니다. 현실적 문제들을 좀더 박상영 스타일로 과감히 제기해주었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황인찬 서두에 민속지적인 성격을 이야기한 이유 중 하나가 청소년 퀴어의 삶, 그 자체의 실감 나는 재현이었습니다. 사실 서울 퀴어의 삶과 지방 퀴어의 삶은 매우 다르고, 청소년 퀴어의 삶은 더욱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로 간다’는 그 강렬한 열망은 퀴어들에게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라 할 수 있는데요, 이곳에서 떠나야 한다, 가족을 떠나 살아야 한다는 것을 퀴어들은 청소년 시절에 절감하게 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이 그리는 폐쇄된 세계, 전망이 잘 보이지 않는 작고 좁은 세계 자체는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강력한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토록 작은 세계에서 자신을 자신답게 느끼게끔 하는 것은 사실 윤도에게로 향하는 사랑뿐이니까요.

 

최민우 사실 작품 속 인물 중 내면에서 가장 많은 갈등을 겪는 이는 윤도와 태리일 겁니다. 윤도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받아들이려 분투하는 ‘나’와는 또 다르게 ‘얘가 좋은데, 그래도 이러면 안 되는데’ 같은 복잡한 고민을 안고 있을 거예요. 태리는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동성애자라고 놀림받고 왕따를 당하죠. 근데 말씀처럼 대학 진학을 통한 탈출이 서사의 중심이 되다보니까 성적이 나쁜 윤도와 태리의 존재감이 점점 희미해집니다. 공부를 잘하는 인물들, 그러니까 ‘나’가 상담가로 성공하고, 무늬가 스타트업 CEO가 되고, 태란 누나가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판사를 거쳐 변호사가 되는 동안 윤도와 태리는 성공의 서사에서 내쳐지는 거죠. 태리는 캐나다에서 간호사가 되었다고 짧게나마 뒷이야기가 나오지만 윤도는 어떻게 됐는지 소식도 제대로 알 수 없어요. 소설의 결말이 정리되지 않은 듯한 인상을 주는 건 그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유년 시절에 ‘나’에게 가장 큰 갈등과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던 두 인물이 애매하게 퇴장하는데 ‘나’의 갈등과 죄책감이야말로 이 작품의 서사를 이끄는 심리적 동력이니까요.

 

장은영 다른 인물들도 뒷심을 충분히 보여주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무늬는 자기 목표를 위해서 거침없이 직진하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한편 친구와의 의리를 지킬 줄 아는 매력적인 여성 청소년이에요. 무늬와 태란같이 이런 강단있는 인물들이 가족과 사회에서 겪는 갈등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가 궁금한 지점인데 열심히 공부해서 꿈을 이룬다는 선택은 현실적이면서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주인공의 선택도 아쉬운 감이 있어요. 더구나 주인공 ‘나’에게는 현실에서 떠나고 싶다는 욕망도 있지만 윤도와 단둘이 선으로 연결되는 ‘1차원’적 세계에 있고 싶다는 욕망도 있어요. 십대 시기는 세계와 부딪히는 내적 충동이나 에너지는 강한 데 비해 갈등을 해결할 방법을 찾는 역량은 적을 수밖에 없는데요, 사랑을 실현하고 싶은 동시에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나’의 이 상충하는 욕망과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문학적 가능성 안에서 좀더 다양한 경로를 살펴봤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황인찬 박상영 소설의 인물들은 사실 투쟁을 하거나 세계와 맞서 싸우지는 않죠. 세계 안에서 때로는 순응하고 때로는 버텨가며 아등바등하는 그 삶을 농담으로 승화하고 입담으로 풀어냄으로써 일정한 거리감을 형성하고, 그로부터 어떤 윤리적인 지점을 끌어올린다고 생각하는데요. 많은 독자들이, 그리고 저 역시 박상영의 소설을 깊게 사랑하는 이유는 그런 방식을 통해 우리의 삶을 매우 냉정하게 바라보는 한편, 마냥 절망하지 않도록 한다는 점 아닐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소설이 어른이 된 ‘나’의 시점에서 좀더 조망되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습니다. 회상 속의 십대 청소년인 ‘나’는 자조나 농담을 하기에는 너무나 절박한 면이 있어서요. 물론 그 절박함과 애절함의 생생함에 또한 깊게 빠져들어 읽었지만요.

 

장은영 전작과 달리 이번 소설에서 ‘나’의 세계에 제3자의 시선이 개입한다는 점도 눈여겨보면 좋겠습니다. 결말에서 ‘나’의 죄책감을 해소해주는 건 희영의 편지예요. 희영은 사실 ‘나’를 중심으로 한 세계에서는 시선이 드러나지 않는 제3자였는데, 결국 그로부터 위로를 받는 셈이죠. 저는 그걸 세계로부터의 인정이라고 보고, ‘나’의 세계가 외부 세계와 만나야 할 필요성을 작가가 감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맥락에서 퀴어서사에 대한 전망을 보태자면 사랑의 정상성/비정상성이나 가족 안에서의 갈등 문제만이 아니라 앞으로 퀴어가 자율적인 존재로서, 시민으로서 인정받는 문제도 첨예하게 다루어지면 좋겠어요. 가령 퀴어 정치인, 퀴어 군인, 태란 같은 퀴어 법조인 등 근대적 젠더를 극복하지 못한 국가 시스템을 건드리는 캐릭터가 등장하면 어떨까요? 존재를 걸고 농담을 던지는 박상영식 퀴어서사가 이후로도 더욱 빛이 나길 바라고, 그런 작품을 기대하겠습니다.

 

 

신종원 『전자 시대의 아리아』(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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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신종원 작가의 소설집 『전자 시대의 아리아』로 넘어가볼까요. 2020년에 데뷔한 작가인데 벌써 작품집이 나왔어요. 아주 부지런히 작품을 발표하고 빠르게 묶어 선보인 셈이죠. 저는 그야말로 복고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작가의 말에서도 “위대한 걸작들은 그들을 태어나게 한 손보다, 정신보다 오래 살아남아 우주와 대등한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이들은 잊히는 법도, 죽어 없어지는 법도 좀처럼 모르고”라며 “동시대의 많은 목소리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301~302면)한다고 말합니다.

 

최민우 작가의 신춘문예 당선소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수록작들의 제목도 그렇고, 읽기 전에는 무척 실험적인 소설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인상을 품었어요.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까, 이제 첫 소설집을 낸 작가에게 해도 괜찮은 말인가 싶지만, 견실한 노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공을 많이 들인 ‘뉴트로’ 소설입니다. 독특한 문학적 장치가 여기저기 매설되어 있지만 그것들을 걷어내고 보면 비교적 분명한 ‘스토리’가 눈에 띄어요.

 

장은영 등단작이 「전자 시대의 아리아」였죠. 형식의 파괴라는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했는데, 이렇게 작품을 모아서 읽어보니 저 역시 작가가 형식 실험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서사의 흐름을 멈추게 하는 요소들이 존재하는 건 사실입니다. 일본어나 부호가 삽입되어 독해를 방해하고, 장면이 갑자기 전환되거나 유령, 소리, 거미 등 비인칭 서술자가 개입하는 서술방식은 과감하게 느껴지는 일탈인데 그런 시도들이 형식적 실험이라기보다 서사를 통해서는 전달하기 어려운 주제를 전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되더라고요.

 

최민우 가만 보면 이 소설집은 어딘가에 깃들어 있거나 남아서 떠도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같아요. 그렇다면 그것과 공존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해소’해야 하는가가 서사의 동력이 될 수 있겠죠. 그래서 말인데 실은 저는 「밴시의 푸가」나 「전자 시대의 아리아」를 ‘퇴마 이야기’로 읽었어요. 「밴시의 푸가」를 보면 도서관에 깃들어 있는 ‘유령’이 도서관의 책을 이것 좀 보라는 듯 헝클어놓고 있죠. 여기에 규칙이 있음을 깨닫고 탐구하는 인물 루나가 있고, 그 이전에 도서관 유령의 존재를 눈치 채고 마찬가지로 규칙을 찾던 사서 채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루나는 채경이 도서관을 떠나기 전 함께 햇볕을 받으며 유령 이야기를 나눴던 여자의 딸이었고, 루나는 그때 엄마 배 속에서 이미 도서관 유령의 존재와 규칙에 대해 들었던 거예요.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루나가 “새로 완성된 도서 배치도를 읽다가 불현듯 떠오른 오래된 프르동을 흥얼거”리자, 유령들이 말합니다. “마침내 우리는 사라지게 된다. 안녕. 안녕. 안녕히.”(36면) 이처럼 ‘맺혀 있던 것’이 사라지고 ‘성불’하는 이야기인 거죠.(웃음)

 

장은영 음악/음향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를 따라가는 것도 재미있는 독법이었습니다. 「전자 시대의 아리아」에서 알 수 없는 음향을 두려움과 연결시킨 점이 흥미로워요. 식민지 시대 고문시설로 쓰이던 건물에 남은 음성 혹은 음향들은 폭력적인 역사와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불안감을 보여주지요. 고문의 기억이 음향으로 남아 있는 건물은 체제와 권력의 억압을 상징하는데, 이 건물 안에서 사람들은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해”(52면)라는 소리를 거부하지 못하고 지시에 따릅니다. 마치 죽음의 수용소에서 독일군이 수감자들에게 들려준 음악이 복종을 강화한 것처럼요. “병사, 헛, 하나가, 헛, 상자를, 헛, 집어, 헛, 던진다”(59면)처럼 행동 묘사에서도 리듬을 발견할 수 있는데, 작가가 음악/음향적 요소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느껴져요. 한편 이 소설에서 청각적인 요소는 두려움, 불안, 죽음과 연결되어 있어요. 작가가 끼냐르(P. Quignard)의 『음악 혐오』에 크게 영감을 받은 흔적이기도 한데 거기서 나아가 음악을 예술만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로 확장시키려는 시도가 흥미로워요. 이런 맥락에서 소설 중간에 끼어드는 일본어도 특징적입니다. 어디로 갈 것, 혹은 ‘차려’ 같은 명령어들이 아예 히라가나로 적혀 있는데 식민지 시대의 비극처럼 우리의 기억에 전승되는 시대적 폭력의 흔적, 다시 말해 현재의 시점에서는 독해할 수 없는 과거의 고통을 시각적·청각적으로 기억하고 재현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인찬 소설이 관심을 두고 있는 소재들이 기록이잖아요. 음악도 도서관도 마찬가지고, 건물이나 「옵티컬 볼레로」에 나오는 광학 촬영물도 그렇죠. 그런데 이 기록들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의미가 없어져버린 것들입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 이제 효용이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들, 깃들어 있는 것, 남아서 떠도는 것들 그리고 과거의 예술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아주 강한 갈망 같은 게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듯합니다.

 

장은영 ‘전자 시대’란 예술의 아우라가 붕괴된 기술복제 시대에 대한 명명이라고 생각돼요. 소설에서 소리나 시각적 이미지는 녹음기나 광학렌즈를 거치는 순간 아우라를 잃고 왜곡되거나 기형화되고 있지요. 작가는 그런 식의 기록보다는 「작은 코다」에서 세이렌이 ‘다대포 후리소리’를 전수받는 것처럼 불완전한 기억과 전승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전승될 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것, 아우라 혹은 유령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무의식적 기억이 이어진다고 보는 것 같아요. 그런 이유에서 원형적 심상을 환기하는 신화적인 모티프를 많이 끌어들이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황인찬 그런데 왜 이것들을 돌아봐야 하지, 질문해보면 소설에서 답을 충분히 찾을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효용이 남아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지 혹은 지금 우리에게 아름다움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나 가치가 남아 있지 않다고 느껴서 과거로부터 찾으려는 것인지. 이 공란이 소설을 더 읽어낼 수 있게 할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요.

 

최민우 많은 문학작품이 작은 것, 우리가 평소에 알면서도 의식하지 않아 왔던 존재를 들여다보면서 ‘의미 없는 것의 의미’를 탐구합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집 속 ‘지나가버린 것들’에게도 ‘이제는 의미 없음’이라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말장난 같을 수도 있지만 그게 이 소설집에 은근히 배어 있는 향수의 감정을 설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향수는 덧없음에서 오니까요. 작가가 집중하는 주제를 현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 태도가 과시적이고 난삽한 현학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야기라는 틀로 제시된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어요. 그 지나가버린 것들의 이야기가 마냥 막연하지만은 않고 독자에게 주는 여운이 있다고 생각해요. 여운에 이르는 여정이 약간 험난한 건 사실이지만요.

 

황인찬 읽는 즐거움으로 보자면 말잔치가 많은 소설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구체적인 고유명사들이 하나하나 무게감을 갖고 힘을 발휘한다기보다는, 말들이 펼쳐지면서 만들어지는 긴장감이나 리듬감이 텅 비어 있는 것처럼 작동해요. 이를테면 「밴시의 푸가」에서 유령의 규칙을 해독할 노트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올 때(“1) 제목 첫 글자를 읽어나가기. 예시: [카]드 뉴스 만들기|[니]트 디자인과 니팅 (…) 2) 표지 색상을 똑같이 베껴 칠하기. 예시: 갈색|검정색|검정색” 24면)를 보면 문장이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시각적이며 청각적으로 작용하죠. 소설집 전체에서 발견되는 이런 대목을 읽을 때는 쾌감 같은 걸 느끼기도 했어요. 문장 자체에서 자아내지는 쾌감도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여러모로 고전적이라는 말이 작가를 설명하기에 알맞은 단어 같습니다.

 

최민우 개인적으로는 소설이 전제하는 듯 보이는 서양, 정확히 말해 유럽 문명에 대한 동경에 대해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 동경에 한국의 구체성이 충돌할 때 어색해지는 순간이 있어요. 미국과 러시아와 동유럽을 넘나들며 바이올린 엘가(「저주받은 가보를 위한 송가집」)의 역사가 전개되는 도중에 별안간 ‘이게 얼마짜리인지 아느냐’며 박물관 큐레이터가 호들갑스럽게 끼어드는 대목처럼요. 하지만 그 어색함을 피하겠다고 과거에 대한 동경이나 환상으로만 소설을 끌고 가기도 어렵겠죠. 동시대의 현실이 환기되는 순간 발생하는 난관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세이렌이 민요를 배우는 「작은 코다」나 원룸 보일러실에 아라크네를 집어넣은 「멜로디 웹 텍스처」 같은 작품에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지만 아직은 과제가 남아 있는 듯해요. 작가가 잘 해결하리라 믿고, 앞으로의 작품을 기대하겠습니다.

 

 

이근화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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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이제 시집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이근화의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로 시작을 해볼까요. 2004년부터 활동한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에요. 세번째 시집부터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네번째, 다섯번째 시집을 거치며 이근화의 다음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더 분명하게 생겨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은영 초기 시집에서 나타난 발랄하고 경쾌한 감각들이 현실과 만나면서 발생시킨 무게감 같은 걸 변화의 지점으로 말씀하신 것 같아요. 그럼에도 특유의 입담이나 명랑성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가볍게 툭 터치하는 듯한 감각적 명랑함을 유지하며 현실의 무게를 다루는데요, 그렇다고 처지지도 않고 붕 떠오르지도 않는 절묘한 절충 같은 것이 느껴져요. 예컨대 「너는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를 보면 “나의 인생은 끝났다”라는 진술에 담긴 절망을 시인은 다른 가능성으로 바꿔냅니다. 이 시에는 팔다리가 없는 토르소처럼 결핍되어 보일지라도 그 ‘없음’의 상태에서 오히려 자유와 해방감을 얻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시적 주체의 바람 혹은 삶의 자세가 담겨 있어요. 그러니까 온통 무엇이 되고 싶다는 요구와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욕망으로 숨 막히는 세계에서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름답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싶다는 역설적 욕망인 거죠. “인생은 끝났”지만 “하나의 방에서 다른 방으로”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이는 시예요.

 

최민우 “팔다리가 없어도 좋아요/흔들고 구르고 털어내도/내 몸은 나의 것” “이렇게 시원할 수가”라 말하는 균형 감각일까요. 저도 그 시를 읽으면서 단호함과 온기가 절묘하게 공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블랙」을 보면 “모서리가 찢긴 비닐”에 대해 “아직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고 “봉인의 즐거움으로 몸을 떨” 것이고 “낭자한 비린내를 뭉텅뭉텅 삼킨다”고 하는 한편 “사랑으로 영원히 목이 마르겠지”라고 해요. 절망으로 떨어지려는 마음을 끌어당기는 장력이 느껴집니다.

 

황인찬 시인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에서 요즘에는 통 보지 못했던 튼튼한 기개가 느껴집니다. 층간소음에 대한 시 「좋은 이웃들」에서 제가 주목한 부분은 “거시기 거시기 할 때마다/나는 숨을 참고/거시기 거시기할 때마다/조용히 웃고”였어요. 제게는 이 문장이 ‘나는 이 시를 아름다운 데까지 굳이 끌고 갈 마음이 없어’라는 말처럼 들렸거든요. ‘그냥 내가 지금 서 있는 방식을 보여주는 거야’라는 식인데, 시인이 시와 함께 살아가면서 터득한 의연한 멋이 느껴지는 지점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최민우 저는 ‘초조해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아는 사람」에서 화자는 지하철에서 아는 사람을 만납니다. ‘인사를 할까’ ‘나를 봤을까’ 같은 생각을 하며 초조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애써 무시하지도 않아요. “어떤 인사로도 내 마음을 담기 어려울 테니/그냥 지나가기로” 하고 “이것이 나의 반가운 마음”이라 정리합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낯설고 불안한 것들, 혹은 어쩌면 감추고 싶었던 것들에 전전긍긍해 하기보다는, 이 역시 삶의 일부이니 받아들이고 흘려보내겠노라는 태도를 시집 전반에 걸쳐 드러내는 듯해요. 이 점이 말씀하신 의연함과 맥이 닿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시에서 묘사되는 현실은 만만치 않거든요. 「1918년」에는 의사가 시인의 어머니에게 올해가 몇년이냐 묻자 어머니가 1918년이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웃었다는 주석이 달려 있죠.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가능한데, 시인은 시 속에서 이를 “내 인생은 백년 전의 것이어서 훌륭합니다”라며 가뿐히 뒤집어요. 층간소음에 시달리거나(「좋은 이웃들」) 신용카드 분실이 신용을 상실한다는 두려움으로 연결되는(「귀가 접힌 고양이처럼」) 고단한 현실을 단단하고 경쾌한 어조로 받아 넘긴다는 데 이근화 시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장은영 「귀신들은 즐겁다」에서 귀신들은 “보이지가 않아서/밥을 먹지 않아서” 즐겁습니다. 여기서 주어를 인간으로, 서술어를 반대로 바꾸어 읽어보면 인간은 보이기 때문에 괴롭고 밥을 먹기 때문에 괴롭죠. 식별되는 존재라서, 노동을 해야 하는 존재라서 괴로워요. 귀신은 “사랑하지 않으므로 열렬하므로” 즐겁다는 표현도 같은 방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열렬하지 않게 사랑하니 사랑마저도 괴로운 것이겠죠. 돌려 말하고 있지만 인간의 현실적 삶에 대한 반성적인 시예요. 사랑마저 누추해지는 현실을 돌아보면서 시인은 절망에 갇히지 않고 그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다른 삶의 자세와 방식에 대한 가능성을 얘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세계의 질서와 규범 속에서 주체화되는 존재가 아닌, 불투명한 비의미의 존재로서 살아가보는 방식을요. 귀신처럼 즐거워지기 위해서는 이미 정해진 삶의 방식, 현실의 질서나 흐름, 미디어가 재생하는 이미지나 욕망에서 벗어나 가벼워져야 하죠. 불가능한 얘기 같지만 사랑에 빠지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귀신처럼 즐거워지는 건 이미 우리가 경험해본 적 있는 삶의 방식일 수도 있어요.

 

최민우 「물방울처럼」에서 그런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크고 환한 별이 뜬다면 내 머리 위의 일은 아닐 것이지만/어떤 기다림 위에 명랑할 것, 지치지 말 것”이라고, “지키기 못할 약속”임을 알면서도 “중얼거려”보는 거죠.

 

황인찬 그런 의미에서 시집의 제목도 참 절묘합니다. 지금 이 순간 육박해오는 현실을 ‘뜨거운 입김’이라고 하면, 그걸 느끼려면 얼마나 가까워야 해요. 그런데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라고 하는 것은 또 얼마나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이겠어요. 육박해오는 현실을 예민한 거리감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가 함축된 제목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나’의 실감이 약해지는 지점과 그럼에도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 묘한 감흥을 느끼기도 했는데요. 이를테면 「춤추는 눈사람」의 “나는 여자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나는 남자다, 아니 조금 여자다”와 같은 진술에서는 ‘나’ 혹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흐려지는데, 시적 화자의 순간적인 어떤 정동들은 강하게 느껴져요. 분명히 존재하는데 실감이 약해진 것처럼 존재하는 방식으로 시가 펼쳐져 있는 거예요. 그것을 또한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려서 놀라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은영 하나 덧붙이자면 ‘우리’라는 주어는 이근화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예요. 이근화 시인이 점점 사랑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교감과 위로의 공동체’(『우리들의 진화』)와 ‘취미의 공동체’(『차가운 잠』)를 지나 이번 시집에서는 ‘사랑의 공동체’로 좀더 구체적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세상의 중심에 서서」를 보면 도서관이라는 사랑의 공간이 나와요. 마지막에 가서 “우리는 우리는 우리는/세상의 중심에 서서/구멍 난 내일”과 “헌신짝 같은 어제를/조용히 끌어안”는데, 그럴 수 있는 것은 이곳이 “도서관이었기 때문” “그것이 우리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죠. 여기서 ‘우리’가 지금까지와 다른 우리로 진화했다고 보는 이유는 사랑을 나누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에요. 도서관이 언어를 매개로 한 사유의 공간이란 점을 생각하면 ‘우리’란 함께 토론하고 대화하면서 비로소 사유하는 존재로 거듭나는 상태라고 해석돼요. 서로의 언어가 만나면서 축적되는, 네 것이나 내 것으로 귀속될 수 없는 통합된 사유의 힘으로 우리는 희망이 없는 미래와 절망뿐인 과거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현재의 공동체가 되는 거죠. 그것이 이근화가 말하려는 ‘사랑의 공동체’가 아닐까 합니다.

 

 

이지호 『색색의 알약들을 모아 저울에 올려놓고』(걷는사람)

 

황인찬 이지호 시집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2011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의 두번째 시집입니다. 지난 시집에 이어 사물들에 깃든 시간과 내력에 대한 깊은 관심이 드러나고 있어요. 사라져버린 것들, 소멸을 앞둔 것들을 살피며 말을 건네고 또 확인하려는 모습입니다. 특히 농촌과 도시의 삶이 서로 충돌하는 장면들을 예리하게 포착하는데요, “수직으로 다 몰려가고 수평은 빈곤으로 좁”(「흙 받습니다」)아진 지금의 상황에서, 시골 소읍의 낡아가면서도 생성을 그치지 않는 빈 “움막”이나 방, “외곽”으로 흐르는 “더딘 물”(「허수아비」)을 그리면서 “소멸로 향하는 세대의 여백”(「지방무형문화재 제29호」)를 두루 바라보는 시선이 근래의 시에서는 쉽게 찾아보지 못한 것이라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장은영 이지호 시인은 전통적인 서정의 언어로 세계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몰입하며 시를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포착된 장면이나 성찰의 순간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면서도 지금의 시대적인 위기 담론들을 담은 시집이에요. 전체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는 전염병이나 멸종위기 동물, 팬데믹 같은 사회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2부에서는 1부의 연장선상에서 불모의 흙과 영토, 대지로서의 인간의 몸에 대한 시들이 등장합니다. 제가 흥미롭게 읽은 건 후반부의 시들이에요. 특히 3부에서는 농촌을 배경으로 소외되거나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으려는 시편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어요. 시인이 노인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이유도 그들이 이 세계로부터 밀려나고 방치되며 사라지고 있는 존재라는 맥락에 있는 것 같아요.

 

최민우 저도 비슷한 감상이에요. ‘전통적인 시’라고 할 만한 인상에 부합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그만큼 친근하게 다가오는 한편으로 시상이라고 할까요, 그에 대한 설명을 시인이 자상하게 모두 해줘서 그 이상을 탐색하거나 몰입할 여지가 조금 적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철학」이나 「울음이 지극하다」 같은 시가 제게는 그랬어요. 그런데 그런 자상함이 ‘늙음’과 결합하자 다른 방향에서 독자를 움직이는 힘이 생겨난다고도 느꼈습니다. 「지방무형문화재 제29호」에서 “소멸로 향하는 세대의 여백은 풍경만 다를 뿐 다른 길은 없다.”고 단호하게 문장을 맺을 때 사라져가는 전통에 대한 절절한 감정이 제 마음에 쑥 들어왔거든요. “평생 그림자처럼 달라붙은 흙”을 신발에 묻히고 다니는 노인들의 나들이를 그리는 「노인들」도 늙음이라는 상태에서 생겨나는 페이소스가 잘 드러나 있고요.

 

장은영 「노인들」은 시골 버스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따스한 서정으로만 풀어내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습니다. “발가진 것들, 치매며 중풍이며”나 “그냥 지나치는 정류장처럼 가까운 친구는 다 떠났다” 같은 구절에서처럼 병과 죽음이 언급되는데, 노인들만 남겨진 농촌이란 도시인들이 상상하는 전원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채 방치된 장소란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그래서 “가벼운 발걸음 더 멀리 간다/주저함 없는 흙 묻은 신발/그래도 셋이서 같이 가는 봄날 나들이다”라는 마지막 구절이 마치 죽음을 향해 가는 것처럼 들렸어요. 팬데믹을 거치면서 드러난 한국사회의 체제적 결핍으로서 돌봄이란 문제를 떠올려보게 되고요. 남아 있는 자들끼리 서로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농촌의 노인들은 사회적 돌봄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계층이에요. 문득 우리 시에 새로운 농촌시가 등장할 때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황인찬 “함께 있어/기댈 곳이 있어/내 편이 있어/생명의 위치는 심장에 있다//유리창으로 쏟아지는/햇빛도 함께이다”(「호모 심비우스」)라면서 공생의 미덕을 환기하며 삶의 매력을 확인하는 모습이나 “기일도 없이 숨어 있는 위기의 식물들 동물들”(「멸종 달력」)처럼 우리 삶의 위기를 느끼는 모습 등 자연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화해를 도모하거나 치유를 받는 시편들이 다수 눈에 띕니다. 「지금 암소는」에서도 가장 자연적인 순간들을 그려냄으로써 그 안에서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 즉 스스로까지 치유하고 회의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기도 하고요. 전통 서정시의 문법을 따르고 있는 시들이 반가운 동시에 익숙하기도 한 시집입니다.

 

최민우 그런데 ‘전통 서정시’라 할 때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지도 얘기해보고 싶어요. 저는 이 시집에서 시인이 내면에 모종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고, 그 신념에 대한 근거를 사회와 자연과 역사 등에서 찾아서 표현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전통적’이라는 인상은 여기서 오는 것일까요?

 

장은영 전통 서정이란 세계의 기쁨과 환희 혹은 고통과 슬픔에 내가 동화될 수 있다는 시적 자아의 믿음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합니다. 타자나 세계를 동일화하려는 욕망 같은 한계도 있지만 전통 서정이 주는 안정감도 있을 겁니다. 각자의 현실과 미래가 너무 불안한 시대잖아요. 시적 자아가 세계, 특히 자연세계와의 감응을 보여주며 결핍된 것들의 회복 가능성을 보여줄 때 서정적 위로를 얻기도 하죠. 다만 이지호의 시에서 서정적 울림을 주는 대목은 자연세계와의 감응보다는 자기 성찰적 자세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정체성」이란 시를 보면 “이름과 가리키는 내용이 서로 어긋날 때//서로 끊어져 소통되지 못할 때//말의 의미가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하고 표류할 때”라고 말해요. 기표와 기의의 균열, 소통 불가능성, 의미의 해체 등이 시인에게는 자신이 누구인지 존재의 본질을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들인 거죠.

 

황인찬 「쏙도 붓을 안다」도 흥미롭게 읽었어요. “아침 갯벌, 새로운 초서가 상소문으로 읽힌다”라는 문장은 쏟아지는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붓을 이용해 쏙을 잡는 장면을 두고 쏙도 문자가 궁금하다는 상상력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그 모습을 “새로운 초서”라고 말하는 것, 나아가 그것을 “상소문”이라고 말하는 시적 도약이 매우 빛났습니다. 이처럼 사물을 관찰하고 거기서 우리 삶을 끌어올려 더 먼 곳까지 보내는 것이 시인의 특장으로 보여요. 한편 시가 도달한 지점은 상대적으로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시가 쏙과 붓이라는 소재에 다소 함몰되어 있고 “당쟁”이니 “선비”니 하는 말들도 우리 삶에 좀처럼 붙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거든요. 이 시집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치유와 화해의 자세 또한 그런 점에서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소재에서 삶을 끌어올리지만, 그런 탓에 우리 삶이 시적 소재 안에 갇혀 있다는 인상을 준달까요. 「나는 민들레를 부른다」 같은 시도 마지막 구절 “나는 흰민들레를 아리랑 정서라고 부른다”라는 문장 자체가 주는 명료한 힘이 있지만 “하얀 민들레꽃이 피었”고 “민들레의 위치는 심장에 있”고 “내 세상이던 너를 잃었다”는 형상화 과정은 다소 전형적이기도 합니다.

 

장은영 「나는 민들레를 부른다」는 분단이라는 현실을 환기하는 작품인데 “하얀 민들레꽃” “아리랑 정서”처럼 민족적인 것을 환기하는 상투적인 표현들이 아쉬움을 남깁니다. 그런데 저는 한국시의 독자이자 평론가의 입장에서 분단이라는 소재를 시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시도는 반갑습니다. 분단은 한국인의 감각과 정서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이후로는 시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는 주제가 되었어요. 분단에 대한 경험과 상상력이 문학장 안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인데, 지금 우리 세대가 어떻게 분단을 미학적 경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골 빈집의 노숙자를 그린 「호박침대」는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정서적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 같아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예의를 잃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인데, 한동안 탈주체적 발화를 구사하는 시들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전통 서정에서 출발한 이지호 시인은 언어를 매개로 세계와의 관계를 성찰하면서 자신의 발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탐색하는 것 같습니다.

 

 

장혜령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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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마지막으로 장혜령 시인의 첫 시집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입니다. 장혜령 시인은 시집에 앞서 산문집(『사랑의 잔상들』, 문학동네 2018)과 소설(『진주』, 문학동네 2019)을 출간하는 등 다방면에서 여러 활동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시를 구성하는 방식 또한 산문하고 가깝다는 인상이 들었습니다. 그 점이 시집에서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고요.

 

최민우 저는 ‘서사’가 있는 작품들을 특히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등단작이자 시집에 첫 시로 실린 「눈의 손등」의 “내가 스물셋이었을 때, 남자는 서른둘이었다.”를 읽는 순간 시 속의 세계에 말 그대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기분이었어요. 「검은 돌은 걷는다」는 짧은 환상소설 같죠. 연작시 「새벽의 창은 얇은 얼음처럼 투명해서」는 액자 속 액자 구성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들을 읽는 동안 ‘서사’는 있지만 ‘소설’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졌어요. 「정원사」는 식물적 상상력을 통해 공포와 두려움의 감각이 천천히 쌓여가는 서사적 구성을 갖고 있는데, 그렇다고 이걸 소설로 바꿀 수 있느냐 하면 당연히 그럴 수 없거든요. 이 시가 소설이라면 한강의 『채식주의자』 같은 작품일 수도 있겠지만 「정원사」는 여전히 「정원사」라는 시예요. 서사를 취하며 시를 만드는 이 감각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습니다.

 

장은영 장르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집이죠. 시집보다 먼저 나온 『진주』는 ‘소설’이라고 되어 있지만 하나의 서사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그 안에 시나 이미지가 포함된 비서사적 글쓰기 방식이 결합되어 있어서 딱히 무슨 장르라고 칭할 수 없는 형태를 띠고 있어요. 이때 경계를 작위적으로 넘나드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스타일로 만들어 독자들을 수긍하게 만드는 힘이 곧 작가의 역량일 텐데, 장혜령의 경우 충분히 설득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집을 보면서 어떠한 것을 시적 대상으로 삼는 방식과 산문의 대상으로 삼는 방식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가령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2003년 정치학 강의 시간에 있었던 일은 『진주』에도 나오지만 「죽은 꽃이 우리를 지켜본다」라는 시에서는 또 다르게 그려집니다. 이 시에서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사유하기를 강조하는 “정치학 선생”의 태도가 “크고 붉은 장미 한 송이”에 대한 탐미적 태도로 형상화되어 있어요. 마지막 연에서 꽃의 아름다움에 취한 선생을 보고 학생들이 킥킥거리는 장면도 흥미롭죠. 학생들의 현실적 감각에서 보자면 꽃은 무용하고 쓸모없는 것이므로 꽃을 사랑하는 정치학 선생이 우스꽝스러워 보입니다. 반면 미학적 감각을 지닌 정치학 선생은 현실체제의 감각에 저항하며 감각을 재분배하는 주체인 거죠. 『진주』에선 사유의 힘이 강조되었다면 시에서는 미학적 감각이 강조되어 있어서 장혜령 시인이 산문과는 다른 문법과 감각으로 시에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었어요.

 

황인찬 장혜령의 시가 가진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내러티브를 작동시켜도 그게 핵심이라기보다는 언제나 스타일, 문체, 문장이 중심을 이룬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저는 사실 서사 자체보다 앞의 말을 뒤에 나오는 말이 받고, 앞의 시를 뒤에 나오는 시가 받고 다른 작가의 글을 받아서 이어가는 힘에서 이 시집이 매력을 발휘한다고 느꼈어요. 「검은 돌은 걷는다」에서는 ‘검은 돌’을 집요하게 반복하며 앞의 문장을 이어받는 식으로 시가 전개되고, 「비유는 흐르지 않는다」에서는 “나의 문학 선생”이 등장해서 칠판에 글씨를 쓰는데, 나는 그것을 따라서 생각을 계속 이어가게 됩니다. 「새벽의 창은 얇은 얼음처럼 투명해서 2」는 「새벽의 창은 얇은 얼음처럼 투명해서 1」과 「검은 돌은 걷는다」를 이어서 쓰는 시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추동이 계속되며 시가 앞으로 나아가거든요. 말 그대로 쾌감을 주는 문장들이었습니다.

 

최민우 「후쿠시마에서 인간은 기차처럼 긴 심연 모를 그림자다」에서는 “그로부터 도시가 마멸되고, 여자들이 마멸되고, 아이들이 마멸되고, (…) 이윽고 모든 것이 마멸되었다는 기억조차 마멸하고 마는 마멸의 마멸이 있다.”라며 “마멸”이라는 단어를 반복함으로써 시를 이끌고 있어요. 같은 단어가 되풀이되면서 단지 시각이나 청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단어적 이미지라고 할까요, 단어 자체가 물성을 띠게 되는 듯한 효과가 강조되는데, 그러다 나중에는 “마멸이란 단어 속에서 구멍 뚫린 그림자를 보”게 되는 인상적인 결말에까지 이르지요.

 

장은영 문장들이 읽는 재미와 쾌감을 주는 이유는 통합된 시적 이미지로 수렴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장혜령의 장점은 이야기를 시적 이미지로 전환하여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솜씨라고 생각하는데요, 「교향시」가 인상적입니다. “요제프 수덱”이라는 사진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횃불”이 나오고 “동이 터오고” “태양”이 뜨고 “고통”을 느끼는 등, 빛과 흰색의 이미지가 연속적으로 등장하죠. 사진이라는 예술에 빛이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말이에요. 시인이 시각적인 것을 서사와 이미지로 바꾸어놓은 셈이죠. 산문적인 문체가 강한데도 시적 매력을 지니는 이유는 이처럼 이미지를 놓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황인찬 한편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제는 불가능해진 아름다움에 대한 강한 그리움과 향수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이 시집은 2020년대 문학사의 자장 안에서 파악된다기보다는 그와는 다른, 독자적인 지향을 갖고 있다는 인상인데요. 어떤 구체적인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와 대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시를 쓰는 행위 자체를 통해 글쓰기가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고자 몰두한다는 인상이 더 강하단 뜻입니다. 아름다움에 아주 적극적으로 복무하는 시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런 점에서 또 고전적이라는 느낌도 받았어요.

 

최민우 저 역시 3부까지 읽었을 때 문학이나 예술의 아름다움에 대한 고백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4부에서 아버지가 호명되고, 5부로 넘어가며 이스라엘, 이라크, 시리아, 후꾸시마 등 현실세계의 공간들이 등장하면서 앞의 시들과는 분명히 달라진다고 느꼈습니다. 그때부터는 ‘나’가 ‘세계’와 계속해서 접촉하는 듯합니다.

 

장은영 심미적·예술주의적이라는 느낌도 들지만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기보다는 정치미학적으로 읽을 여지가 더 커 보여요. 시인의 말에서 “보이지 않는 그 힘으로 이 세계가 나아가고 있음을.” “시를 쓰며, 알 것 같다.”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아요. 보이지 않는 그 힘이라는 건 시를 쓰며 경험하는 예술적·미학적 충동일 텐데 그 충동이 현실체제 안에서 주어진 감각을 해체하고 감각을 재분할하며 다른 지점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인 거죠. 혁명의 파괴적 충동까지 가는 건 아니지만 “자기 자신을 부수면서 쓰는 문장이 있다. 부서지면서 쓰이는 문장이 있다.”(「백지는 구두점의 무덤이다」)는 문장은 장혜령의 글쓰기가 감각을 갱신하는 매개이자 자기갱신의 방법이라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었습니다.

 

황인찬 어느덧 오늘 자리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두분께서 귀한 말씀을 많이 나눠주셔서 풍성한 자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감과 인사를 덧붙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은영 최근에 나온 작품들을 통해서 우리 문학의 다양한 얼굴을 만나본 듯한 기분입니다. 장점과 아쉬움, 기대와 전망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나눠서 작품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작품을 읽는 것만 아니라 그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건 더욱 즐거운 일이라는 걸 두분과 말씀을 나누며 알게 되었고요.

 

최민우 폐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고 생각하면서 왔는데, 두분 덕에 무사히 끝까지 앉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즐겁고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황인찬 팬데믹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요즘, 이렇게 잠시나마 두분을 뵐 수 있어 참 기쁘고 반가웠습니다. 또 인사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1.10.21.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