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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안토니오 다마지오 『느끼고 아는 존재』, 흐름출판 2021
느낌에서 앎으로, 마음의 존재로
최진석 崔眞碩
문학평론가 vizario@gmail.com
닐 블롬캠프 감독의 「채피」(2015)는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 로봇 채피가 우연히 범죄에 휘말리면서 겪는 소란을 묘사한 영화다. 처음에는 어린애 수준에 불과하던 채피의 지능은 경험과 각성을 통해 점차 성숙해지고, 마침내 인간적인 우정과 애정마저 깨닫기에 이른다. 예컨대 영화의 후반부에서 엄마처럼 따르던 욜란디가 총에 맞자 그녀의 의식을 컴퓨터에 전송한 후, 자신과 같은 로봇으로 다시 옮겨놓음으로써 되살리고 마는 것이다. 「트랜센던스」(2014)도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2016년에 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이 벌어진 것을 생각하면, 마치 데이터 정보처럼 의식을 여기저기 옮겨놓거나 재생시킨다는 아이디어가 전혀 낯설지 않은 시대가 바야흐로 도래한 듯싶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본다면, 의식을 낯선 신체로 전송하고 저장한다는 발상이야말로 저 유구한 데까르뜨주의의 반복이 아닐지 의심스럽다. 문제 삼고 싶은 것은 ‘모던한’ 시대와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던한’ 시대에도 여전히 되풀이되는 그 이분법이 놓치고 있는 지점이다. 정말 의식과 신체는 별개의 것이며, 휴대용 데이터 저장장치처럼 아무렇게나 연결 짓거나 분리시킬 수 있을까? 둘 사이를 잇고 끊는 매개는 존재하는가? 있다면 과연 무엇인가? 데까르뜨가 의식과 신체 사이를 잇는 필연의 다리로서 ‘송과선’을 가정했다면, 신경과학자이자 뇌과학자인 안또니우 다마지우(António Damásio)는 『느끼고 아는 존재』(Feeling & Knowing, 2021, 고현석 옮김)를 통해 ‘느낌’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느낌’은 단순히 신경말단의 자극-반응 기제가 아니라 의식과 앎(지식), 심지어 자아의 기원과도 연관되는 동적 감각의 ‘발생기’를 가리킨다.
뇌과학이 근대 자연학, 특히 생물학의 전제들을 차례차례 무너뜨리고, 나아가 인간학마저 근본부터 다시 검토할 것을 요구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한가지 예로 프로이트가 창안하여 20세기 인문학을 온통 뒤흔들어놓은 정신분석학마저 뇌과학 앞에서는 한낱 불투명한 가설처럼 보일 정도다. 데까르뜨의 ‘코기토’(cogito)는 물론이고 (무)의식을 필두로 한 인문사회과학적 분석들 또한 휴머니즘의 한계에 갇힌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다마지우의 입지는 대단히 흥미롭다. 그가 신경학과 뇌과학이라는 첨단과학에서 출발하여 스피노자라는 근대철학의 특이점과 연결 짓고 새로이 해석하는 모험을 감행하는 까닭이다. 지난 십여년간 한국의 지식사회에서 급격히 부상한 ‘감응’(affect, 정동情動)은 명백히 스피노자에 기원을 둔 개념으로서 의식과 신체라는 데까르뜨적 이분법을 돌파하기 위해 안출되고 정련된 용어이다. ‘느낌’은 그 연장선상에서 다마지우가 주의 깊게 세공한 것으로, “생명체 내부에 있는 생명의 상태를 드러내는” 사건을 말한다(Looking for Spinoza, 2003). 이전까지 감응에 대한 논의가 주로 무의식적 감각이라는 인문학적 지평에서 다루어진 반면, 다마지우는 신체 내부의 생명활동과 관련된 감각의 발생을 우선적으로 참조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이채롭다. 그에 따르면 느낌은 외적 자극에 대한 반응이기보다 내부 장기들과 신경계의 운동을 수용하고 조직함으로써 생명체의 개별성을 구성하는 ‘표현적 메커니즘’에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느낌은 생명현상의 부차적 작용을 넘어서 의식과 지식을 형성하고 자아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진화적 촉발현상이라 불러도 좋을 법하다.
재미있게도 느낌은 지능의 진화와도 분리 불가능하게 결부되어 있다. 판단과 인식의 유의미한 단위인 뇌가 없는 바이러스조차 자기 내부와 외부 사이의 원활한 신진대사를 통해 신체적 항상성을 유지한다. 이는 자신에게 적합한 DNA나 RNA를 구별하고 수용/기피할 수 있는 ‘비명시적 지능’이 바이러스 안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사 과정은 신체와 신경계가 결합하고 작용하는 일련의 메커니즘을 만들어내며 느낌의 진화를 일으킨다. 느낌은 “신경계가 우리 내부와 직접적인 접촉을 하기 때문에” 존재하며, 이로부터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은 우리 내부의 상태에 대응한다”는 진술이 도출된다(97~98면). 이 같은 느낌의 내용물이 바로 마음이 겪는 경험으로서 감응과 결부되어 인간의 의식을 형성하게 된다(103~104면). 단순화를 무릅쓰고 요약한다면, 신체는 신경계를 통해 내부의 변화와 작동을 기록하고 그 내용물을 느낌의 형식으로 집약시킨다. 느낌은 그렇게 경험된 마음의 상태로서 자연적 원초성(배고픔, 목마름, 고통, 쾌락 등)과 사회적 관계성(수치, 배신, 존중 등)을 함께 담아낸다는 점에서 의식과 지식에 연동되어 있다(느낌과 의식, 지식은 마음과 순환적 관계에 있다). 이 점에서 다마지우는 느낌과 앎이 별개가 아니라 진화적 연장선상에 함께 놓인 것이라 단언한다. 근대 철학에서 의식이 배제해야 할 적으로 간주했던 느낌은 실상 의식 자체가 탄생하기 위한 터전이었던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처음 던진 질문에 답해보자.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미래에 인간의 의식은 데이터 정보처럼 뇌-신체에서 분리되어 컴퓨터 회로로 전송, 저장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의식은 신체와 신경계가 결합하여 이루어낸 진화의 역사, 즉 느낌에서 앎으로의 기나긴 결합과 적응 및 작동의 관계 속에서 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체와 신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느낌은 애초에 발생할 수도 없고, 느낌이 없다면 그것의 축적이 이루어내는 의식과 지식도 있을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마음도 존재할 수 없다. 마음은 유기체의 느낌 및 자아의 관점으로 이루어진 생명의 특성인 까닭이다(느낌과 의식, 마음이 선형적으로 발생하지는 않음에 주의하자). 데이터로 복사된 의식은 설령 그런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더라도, 컴퓨터에 옮겨지는 순간부터 신체와 신경계를 결여하고 있기에 그러한 생명의 고유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별것 아니면서도 새삼 놀라운 존재임을 상기하게 된다.
철학과 신경학, 뇌과학을 한데 엮어 사고하고,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인간의 특이성을 규명하려 한 다마지우의 탐구는 대단히 흥미로운 만큼이나 난해하기로 소문이 났다. 스피노자와 감응이 그 출발점에서 언급된 데 반색해서 읽기 시작해도, 너무나도 낯선 용어와 설명 방법 등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포기하는 사람도 여럿 보았다. 그럼에도 비명시적 지능이라는 가장 날것의 차원에서 고등한 명시적 지능의 단계까지 생명현상을 통합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나, 형이상학의 언어로 치장되었던 정신과 신체의 관념적 요소들을 실제 작동의 차원에서 해명하고 연결 지으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늘 새로운 기대를 낳는다. 특히 인간지성의 작동방식에 더욱 가까이 수렴해가고 또 이를 넘어서기까지 하는 인공지능의 등장은 느낌에 기반하는 지성/지능의 도약적 진화에 대한 전망을 불어넣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몸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아직 모른다”라는 스피노자의 물음에 응답하기 위한 다마지우의 새로운 탐구는 벌써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