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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도시 주변부 소년의 형이상학

박판식 시집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함돈균 咸燉均

문학평론가, 평론집 『얼굴 없는 노래』 『예외들』 등이 있음. husaing@naver.com

 

 

26822000년대 이후 젊은 시인들에게서 관찰되는 뚜렷한 흐름은 오랫동안 한국시의 주를 이루어왔던 농경사회적 감수성에 기반한 자연서정시가 사실상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바꿔 말해 한국시의 또다른 축을 형성해왔던 ‘시적 모더니티’는 이 세대에 이르러 그들 자신의 자연스러운 ‘몸’이 되었다.

그러나 박판식(朴判植) 시집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민음사 2013)는 이 세대의 온전한 ‘몸’이 된 ‘모더니티’에도 누락된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기차에서 바라보는 63빌딩이/기껏해야 내 상상력의 한계”(카프리올)라고 말하는 감수성은 대도시의 주변부, 상경(上京) 거주민의 것이라는 점에서 동세대 시들과는 다르다. 주목할 점은 이 정서가 “재봉사인 그”의 것이라는 점이다. “분홍 구름과 높이가 다른 지붕”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에 ‘시크하게’ 편입되지 못한 “무산계급”(「찬드라의 손」)의 시선으로 포착될 때, 그것은 전통적인 자연이나 낭만적 대상이 되지 못하며, ‘모던한’ 도시의 기표도 되지 못한다. 그래서 ‘서울’은 이 시집에서 ‘실존적’ 우수나 고독의 장소가 될 수도 없다.

“우아할 수” 없는 “식료품 가게 점원”에게 도시는 관조나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시체나 기형의 신체”(「결별의 불」)로서 감각되는 현실이다. 이 현실은 “점박이 돌인 줄 알고 주었던 알은 이불 속에서 자극을 주어도 무엇으로도 태어나지 않”(「공()」)는 체험의 장이며, “세계는 왜 나에게 즐겁게 봉사하지 않는가”라는 인생론을 배태하게 하는 ‘아르케’(궁극적 원인)다. 화자는 “서울은 형이상학 과잉입니다”(「성()서울」)라고 말하지만, 이 원인으로서의 서울이 정말 ‘형이상학’의 대상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만일 이 공간이 “운명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결별의 불」)는 인생론을 가능하게 한다면, 그것은 “잠실 야구장에서 느끼는 영세적 기분”과 “스크린 경마장을 들고 나는” 것으로밖에 “구원”을 바랄 수 없는 “노동자들의 물결”이 도시의 진정한 주인공이라는 화자의 ‘형이하학’적 체험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의 옷을 찢어질 듯 움켜쥔 채/말없이 오열하고/사는 데 너무 지쳐서/누가 자신을 벼랑 끝에서 밀어 주기만을 바라는” 서울에서 “승려와 무장 게릴라”는 구분되지 않으며, “마르크스주의는 종교입니까 과학입니까”라는 물음은 착종되어 있다. 혁명가에게서 구도승을 보며, 정치경제학에서 구원을 찾는 이 시집의 “세계의 끝”(「찬드라의 손」)은, 이런 아이러니한 도시 체험을 통해 서울이라는 형이하학적 공간을 형이상학적 세계로 ‘상승’시킨다.

그렇다면 그의 시는 흔히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는 계열의 어떤 시적 경향과 비슷하다는 것인가. 이 시집의 시적 정서는 도시 주변부 거주민(혹은 상경한 도시 정착민)의 것이며, 노동계급의 것일 뿐 아니라, 세대적으로 볼 때 “가난한 집 착한 남자애들”(「물벌레의 하루」)의 것이라는 점에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시집은 소년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그 목소리를 몸에 내장한 자의 것이다. 어떻든 이 목소리 역시 도시의 주변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배수구 가장자리에서 생겨난 꿈”을 꾸며 “아이들과 정글짐을 오르내릴 때마다/사마귀 난 손이 부끄러”(「옮기다」)웠던 유년의 기억은, ‘죽지 않은 시간’이 되어 “나를 물고” 있는 현재라는 점에서 후일담 소설의 목소리와는 다르다. 이 ‘부끄러움’이 “저의 남성적 태도를 가져가 버렸”다고 할 때, 우리는 이 시집에서 발산되는 모호한 정체성의 실체가 실은 계급과 성별과 세대 모든 면에서 총체적으로 꿈을 거세당한 주변부 도시 거주민의 ‘모더니티’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는/지하철에서 만난 아이에게 사탕과 과자를 준다”(「모르는 척」)는 도시적 풍경의 불모성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치 않다.

“비에 젖은 채 거리를 가로지”르는 개를 보며 “갈수록 잃어버릴 길이 줄어든다”(「」)는 넋두리에는 ‘잃어버린 길’을 걸어온 자의 형이하학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시집을 ‘체념’에 관한 시로 읽는 것은 곤란하다. “평균율에 관한 미감” “생존의 욕구 때문에 화가 나는” 화자는, “태어나지 않는 것들의 가벼움으로, 이상한 농담을 잘 하는 동생이/있었으면, 하고 상상”(「당신의 이름이 태어난 자리」)한다. 시인은 “내 인생은 태어나지 않은 딸과 늘 동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딸’이야말로 박판식 시의 천사일 것이다. 시인은 “죽은 개는 나와 어울린다”고 말하지만, “신은 아마 절름발이일 것이다”(「번쩍거리다」)라는 시적 형이상학은 주변부적 삶의 불모성을 체감한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신비이기도 하다. 박판식 시의 모더니티도 이 ‘주변부’ 어딘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