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이주혜 李柱惠
2016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자두』 등이 있음.
leestori@hanmail.net
장편연재 2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폭폭해.
시옷은 이 말을 여자 어른들의 언어로 기억한다. 이 말이 깃든 장면은 등장인물만 바꿔가며 비슷하게 재생된다. 시간은 주로 오후, 소리도 공기도 나지막이 가라앉는 때다. 어린 시옷으로서는 정확한 촌수와 관계를 헤아릴 수 없는 친척 여자들이 비스듬히 열린 대문을 쓱 밀고 들어와,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는 시옷의 머리통을 무심히 쓰다듬고 마루에 걸터앉는다. 손님의 기척을 느낀 할머니나 엄마가 방에서 나와 여자(들)를 맞는다. 손님은 신발을 벗지도 집 안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저 마루에 엉덩이를 걸친 채 안과 밖의 경계에 모로 앉아 할머니나 엄마가 내온 시원한 보리차나 식혜 따위를 받아 든다. 유리컵에 든 마실 것을 반쯤 들이켜고 탁 소리가 나게 컵을 내려놓은 다음에는 다만 마당에 고인 오후 햇빛을 보러 왔다는 듯 잠시 그쪽을 넌지시 볼 뿐이다. 그 시선은 철 따라 화단에 핀 모란이나 장미, 봉숭아, 샐비어, 맨드라미 쪽으로 미끄러지기도 하지만, 꽃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는다. 할머니나 엄마도 손님의 용건을 서둘러 캐묻지 않는다. 고요가 오후 공기보다 더 낮게 가라앉아 마당을 스멀스멀 채우기 시작할 때 손님의 입에서 혼잣말인 듯 한숨인 듯 한마디가 터져 나온다.
폭폭해.
아짐, 나 폭폭해 죽겠어.
그 말은 목구멍 언저리가 아닌, 한층 더 깊숙한 가슴팍 안쪽을 찢고 바로 터져 나오는 것만 같다. 그 말을 신호로 할머니나 엄마는 폭폭한 그 사람과 이마를 기울이고 나직한 음성으로 대화를 나눈다. 폭폭함의 사연일랑 시옷은 모른다. 폭폭한 사람이 눈물을 보인 적이 있던가. 그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폭폭함이 슬픔의 영역이라는 것쯤은 어린 시옷도 감지한다. 또한 어른들의 영역이라는 것도 영민한 시옷은 안다. 폭폭한 사람의 사연이 폭폭한 사람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시옷은 뒷마당으로 돌아가거나 아예 대문 밖 골목으로 나가 논다. 늦은 오후, 시옷의 집 마루는 폭폭한 여자 어른들이 잠시 앉았다 가는 간이역 같은 곳이다.
어른이 된 시옷은 어느날 문득 폭폭하다는 말이 아니고선 표현할 길 없는 어떤 감정과 맞닥뜨린다. 이 마음을 정확히 폭폭함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의문이 든 시옷은 인터넷에 ‘폭폭하다’라는 단어를 검색해본다.
폭폭하다
몹시 상하거나 불끈불끈 화가 치미는 듯하다. 전북 지방의 방언이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
어쩐지 이 풀이는 어린 시옷이 목격했던 폭폭함과는 거리가 있다. 뿌연 아지랑이 같은 음색으로 ‘폭폭해’ 하고 내뱉었던 여자들은 ‘몹시 상하거나 불끈불끈 화가 치미는 듯’ 보이지는 않았다. 시옷은 내처 다른 사전을 검색해본다.
폭폭하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애가 타고 갑갑하다. (전라북도 방언사전)
이쪽이 한결 낫다. 폭폭함을 호소하는 여자들은 ‘애가 타고 갑갑해’ 보였다. 가슴팍 바로 안쪽에 묵직한 어떤 것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차가운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고 가끔은 주먹으로 제 가슴을 툭툭 치기도 했으니까. 수십년 만에 자신의 폭폭함을 마주한 시옷은 기억 속에서 (거기 묻혀 있는 줄도 몰랐던) 폭폭함의 풍경 하나를 건져 올린다.
시옷은 엄마와 함께 동네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시옷의 걸음으로는 조금 벅찬 경사길을 다 오르면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계단이 나왔고, 그 위는 철길이 지나가는 둑이었다. 시옷의 동네와 건너편 동네를 구분하는 그곳을 사람들은 ‘철둑’이라고 불렀다. (시옷의 동네 사람들은 건너편 동네를 ‘철둑 너머’라고 불렀는데, 거기선 시옷의 동네를 뭐라고 불렀을까? 그들도 이쪽을 ‘철둑 너머’라고 불렀을까? 그렇게 공평하게 헛갈렸을까?) 철둑 너머에는 ‘철둑 너머 할머니’와 ‘철둑 너머 할아버지’가 살았다. 철둑 너머 할아버지는 시옷 할머니의 남동생, 철둑 너머 할머니는 그 부인이었다. 그러니까 시옷 아빠의 외삼촌, 외숙모였다. 기차가 지나가지 않을 때 조심조심 철둑을 건너 반대편 계단으로 내려가면 철둑 너머 동네가 시작되었다. 거기서부터 좁고 긴 골목이 둥근 언덕을 가르마처럼 누비며 지나갔고 골목마다 작은 집들이 따개비처럼 붙어 있었다. 그 작고 낮은 집 하나에 철둑 너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았다. 시옷의 할머니보다는 한참 어리고 시옷의 엄마보다는 한참 나이가 많은 철둑 너머 할머니는 시옷을 볼 때마다 머리통을 힘껏 쓰다듬어주고 주머니에서 눅눅해진 과자나 사탕을 찾아 쥐여주는, 몸집이 작고 마른 사람이다.
철둑 너머 할머니는 고기를 먹지 않아.
그를 설명하는 여러 말 중 가장 자주 들었던 말. 철둑 너머 할머니는 언제나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며 사는 사람이고 살생으로 얻은 것은 절대 입에 대지 않는다. 그래서 보살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몸이 영 부실하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철둑 너머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사람들은 철둑 너머 할머니가 부처님 말씀을 깊이 새기고 산다는 사실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자식이 없다는 사실을 한줄의 인과관계에 꿰어 맞추기를 즐겼다.
철둑 너머 할아버지는 약주를 참 좋아하지.
그래서 호인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여태 철부지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기를 먹지 않는 할머니와 약주를 좋아하는 할아버지는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수레를 끌고 할머니는 수레를 밀며 철둑 너머 동네를 벗어나 도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장으로 갔다. 부부의 수레에는 계절마다 다른 것이 실렸다. 배추나 무 같은 푸성귀는 물론 마른 고추나 대파, 쪽파, 생강, 마늘 같은 양념 재료들이 실리기도 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수레 가득 실은 그것들을 동네에서 가까운 작은 시장에 가져와 팔았다. 작은 시장 상인들이 부탁한 것을 사다 나르기도 하면서 남은 것은 시장 한쪽 노점에서 팔았다.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시옷의 집에 들러 팔다 남은 배추 한두포기나 무 한단을 내려놓고 가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와 할머니는 서둘러 마실 것을 내오고 만들어둔 김치나 밑반찬을 덜어주었다. 철둑 너머 할머니가 마루에 앉아 엄마와 함께 배추나 무를 다듬고 있으면 철둑 너머 할아버지가 이따금 빈 수레에 시옷을 태워주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시옷을 태우고 마당을 몇바퀴나 돌아주었다. 할아버지의 수레에서 비릿한 풀냄새가 풍겼다. 시옷은 수레 양옆을 꼭 잡고 까르르 웃으며 속도감을 즐겼다. 한바퀴 더요! 한바퀴 더! 약주를 좋아해서 호인이고 철부지인 철둑 너머 할아버지는 시옷의 ‘한번 더!’를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결국 엄마가 마당으로 내려와 시옷을 나무라며 그만하라고 말릴 때까지 할아버지는 시옷을 수레에 태우고 마당을 돌고 또 돌았다. 할머니가 마침 매실주가 잘 익었다고 술상을 봐주면 철둑 너머 할아버지는 이 또한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마루 위로 올라왔다. 그런 날은 철둑 너머 할머니와 시옷의 할머니, 엄마와 시옷이 한 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할머니는 술상에 제사를 지내고 남은 육전이나 조기구이를 올렸지만, 철둑 너머 할머니와 함께 먹는 밥상에는 고기도 비린 것도 올리지 않았다. 시옷은 옆의 술상을 곁눈질하며 나물 반찬과 된장국만으로 밥을 먹어야 했지만 철둑 너머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저녁은 언제나 즐거웠다. 저녁상을 물리고 어느새 불콰해진 철둑 너머 할아버지와 철둑 너머 할머니가 빈 수레를 끌고 시옷의 집을 나서면, 할머니와 엄마와 시옷은 골목 밖까지 나가 부부의 수레가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흔들리며 멀어지는 것을 배웅했다. 할아버지가 끄는 수레는 평소보다 버겁게 오르막길을 오르겠지만 말짱하고 야무진 철둑 너머 할머니가 수레 뒤를 단단히 밀고 갈 것이므로 걱정할 것 없다고 할머니는 말하곤 했다. 시옷은 부부의 수레가 철둑을 건널 때 마침 기차가 지나가지 않기를, 근처에 사는 개들이 짖어 순한 그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없기를 조용히 기원했다.
기억 깊은 곳에서 떠오른 그날, 시옷은 엄마와 함께 철둑 너머 할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남색 철문을 열고 좁은 마당에 들어섰을 때 화단에 쪼그리고 앉아 호미로 흙을 일구던 철둑 너머 할머니가 시옷을 보고 가수가 되었담서? 장하다, 장해, 하고 말한 걸 보면 시옷이 방송국 어린이합창단에 들어간 다음의 일이 분명했다. 가수가 되지도 않았고 장한 일을 하지도 않았지만, 시옷은 할머니의 칭찬에 조금 의기양양해졌다. 그러나 가볍게 들떴던 시옷의 기분은 엄마의 한마디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늦은 오후 시옷의 집에 찾아왔던 여자 어른들처럼 엄마가 철둑 너머 할머니의 집 마루에 엉덩이를 걸치자마자 한숨인 듯 토로인 듯 이렇게 말했다.
외숙모, 나 폭폭해 죽겠어요.
그날 엄마는 폭폭했다. 늘 폭폭한 여자들을 맞이하던 엄마가 철둑 너머 할머니의 집에서 폭폭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시옷은 엄마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깜짝 놀라 폭폭함의 영역 밖으로 벗어날 생각도 못하고 철둑 너머 할머니의 좁은 마당에 서서 멍하니 엄마 쪽을 쳐다보았다. 엄마는 기어이 할머니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가 작고 야윈 손으로 엄마의 너른 등을 쓸어주었다. 푹 푹 푹 푹. 때리듯이 쓸어주었다. 엄마의 가슴속에 똬리를 튼 묵직한 것을 당신 손으로 쑥 내려가게 할 수 있다는 듯, 엄마의 폭폭함 따위 맨손으로 쓸어버릴 수 있다는 듯, 할머니의 손길은 집요하고 일정했다. 어깨가 넓고 키가 큰 엄마가 몸집이 작고 마른 할머니에게 안겨 있었다. 할머니가 먼저 일어나 엄마의 손을 잡더니 방 안으로 이끌었다. 두 사람은 시옷을 마당에 그대로 세워두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천장이 낮아 언제나 그늘의 냄새가 풍기는 할머니의 안방에서 엄마와 할머니가 주고받는 말소리가 드문드문 새어 나왔지만, 시옷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시옷은 마당에 서서 할머니가 내팽개치고 간 호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초봄의 화단에는 아직 검은 흙만 있었다. 할머니는 올봄 어떤 식물을 심고 키우려는 걸까. 철둑 너머 할머니의 화단에는 채송화며 봉숭아, 샐비어, 맨드라미, 과꽃 같은 일년생 꽃들이 여름까지 자라고 피었다. 늘 응달인 축축한 화단에서 식물들은 오직 할머니의 정성을 먹고 자랐다. 고기를 먹지 않아 보살이고 몸이 영 부실한 할머니가 조막만 한 손으로 꽃을 피우고 꽃씨를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또 꽃을 피우길 반복했다. 땅이 모자란 할머니는 시장에서 플라스틱 화분이나 스티로폼 상자를 주워다가 거기에도 꽃씨를 심었다. 화분에 꽃이 피면 할머니는 집 밖 담장 아래 그것들을 나란히 세워두었다.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동안 할머니의 담장 아래에서는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제각각인 꽃들이 사람보다 먼저 손님을 맞았다. 언젠가 엄마가 알뜰살뜰 키운 것들을 왜 집 밖에 내놓느냐고 물었을 때,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웃으라고.
지나가는 사람들, 이쁜 꽃 보고 한번씩 웃고 가라고.
철둑 너머 할머니와 함께 마당으로 나온 엄마의 눈자위가 빨갰다. 할머니는 시옷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챈 사람처럼 놀란 얼굴을 하더니 허리춤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천원짜리 지폐를 허둥지둥 꺼내 시옷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우리 강아지, 가수 돼서 장하고 터 팔아서 장하다.
그러곤 엄마의 등을 또다시 힘껏 쓸어내리며 말했다.
질부는 암시랑 걱정 말고 잘 먹고 잘 자기만 하소. 이번 애기도 내가 잘 받아줄랑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엄마는 시옷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지도 않았다. 시옷은 종종걸음으로 엄마 뒤를 따라 골목을 빠져나오고 철둑을 건넜다. 시옷은 철둑 너머 할머니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시옷이 가수가 되었다는 할머니의 말은 틀렸지만, 터를 팔았다는 말은 옳을 것이다. 시옷의 집에 찾아온 친척들은 시옷을 볼 때마다 이렇게 묻곤 했다.
너는 언제나 터를 팔 생각이냐?
어른들은 엄마의 배 속 ‘터’에 아기가 생기는 일이 오직 시옷의 소관인 것처럼 말했다. 시옷은 기억에도 없는 그 터를 아기 동생에게, 이왕이면 남자 아기에게 팔아야 했다. 시옷이 열살이 되도록 엄마에게 아기가 생기지 않는 것은 시옷이 아직 터를 팔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옷이 언니나 누나가 되지 못하는 건 오직 시옷의 탓이었다. 시옷의 머리통을 함부로 쓰다듬으며 놀림인지 타박인지 모를 질문을 던지는 어른들의 논리에 따르면 그랬다. 언제 터를 팔 거냐는 어른들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시옷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터라는 것을 팔 수 있는지 몰라 답답했다. 철둑 너머 할머니와 할아버지처럼 수레를 끌고 시장에 나가 팔아야 하는지 성냥팔이 소녀처럼 눈밭에 서서 가련한 목소리로 터 사세요! 터 사세요! 외쳐야 하는지. 그런데 지금 철둑 너머 할머니가 터를 팔아 장하다고 시옷을 칭찬한 것이다. 어떤 노력도 시도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터를 팔았다! 칭찬도 받고 천원짜리 지폐도 받았다. 시옷에게 드디어 아기 동생이 생겼다. 그런데 왜 신나지 않을까? 어른들이 종용했던 숙제를 끝냈는데 왜 하나도 가뿐하지 않을까? 시옷은 저만치 앞서가는 엄마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열살에 언니나 누나가 되는 일을 시옷은 기다렸던가? 아니, 그보다 난데없이 폭폭함을 토로한 엄마가 바랐던 일인가?
시옷은 애니처럼 병원에서가 아니라 집에서 태어났다. 지금 사는 집 안방에서. 엄마의 산실에는 할머니와 철둑 너머 할머니가 있었고, 엄마의 몸 밖으로 밀려나온 시옷을 제일 먼저 받아준 사람이 철둑 너머 할머니였다. 그는 시옷의 탯줄을 끊고 얼룩덜룩하게 태지가 묻은 몸을 더운물에 씻긴 뒤 미리 준비한 강보에 폭 싸서 녹초가 된 엄마 옆에 눕혀주었다. 시옷의 첫울음이 터진 후 문밖에서 기다리던 남자들의 헛기침이 잦아졌다. 철둑 너머 할머니는 산실을 잘 갈무리하고 나서야 미닫이 방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
뭐여?
시옷의 할아버지가 성급하게 물었고, 철둑 너머 할머니는
아무것도 아니고만요.
작게 대답하고 방문을 다시 닫았다고, 언젠가 어른들의 수다를 엿들은 적이 있다. 어른들의 부주의함에 시옷은 단단히 상처를 받았지만, 누구에게도 그 일을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게 태어난 시옷은 그후로도 여러번 비슷한 문제로 마음을 다쳤다. 상처는 잔잔했고 일상적이었다.
너는 언제나 터를 팔 생각이냐?
그 무수하고 일관된 질문에 마음을 찔릴 때만 해도 시옷은 훨씬 더 큰 상처가 기습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 강아지, 터 팔아서 장하다.
상처가 때론 칭찬의 형태로 올 수도 있음을 시옷은 몰랐다. 시옷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터를 팔아버렸고, 이제 시옷에게서 터를 샀다는 아기 동생이 철둑 너머 할머니의 손을 거쳐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며 문밖에서 초조하게 서성일 남자 어른은 없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시옷이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아빠는 얼마 전 사라졌으니까. 아기 동생은 무엇으로 태어날까? 시옷처럼 아무것도 아니게 태어나 시옷의 잔잔한 상처를 고스란히 물려받을까? 아니면 시옷은 되지 못했던 어떤 것으로 태어나 집안 어른들의 기쁨이 될까? 어느 쪽이든 아기 동생은 철둑 너머 할머니의 손으로 세상에 나올 것이고, 철둑 너머 할아버지의 수레를 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시옷의 가슴 안쪽에 묵직한 어떤 것이 똬리를 틀고 내려가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엄마의 것이었던 그것이 어느새 시옷에게로 옮겨왔는지 몰랐다. 폭폭해. 폭폭해 죽겠어. 그러나 시옷에겐 폭폭함을 호소할 사람도,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갈 마루도 없었다.
*
아, 폭폭해.
내 과제물 일기를 읽고 난 고슴이 불쑥 말했다.
고슴님은 ‘폭폭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림자의 질문에 고슴과 도치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시옷님 일기를 읽고 나니 그 마음이 뭔지 알 것도 같아요. 정말 뾰족한 것이 마음을 폭 폭 찌르는 것 같지 않아요?
고슴은 폭 폭 하고 말할 때마다 집게손가락으로 허공을 한번씩 찔렀다.
나는 경북 출신인데,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
마웨는 그날 과제에서 열일곱살에 완행열차를 타고 고향 산골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을 때의 장면을 자세히 묘사했다. 그는 기차 맨 끝 칸에 기대서서 하염없이 멀어지는 고향을 바라보며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오리라, ‘주먹을 부르쥐고’ 다짐했지만 ‘모종의 사건’ 때문에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그래도 성공하셨잖아요.
도치의 말에
그렇지.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서울 한복판에 이층집 짓고 사니 대단히 성공한 셈이지.
대답했다.
아이씨, 개부럽다.
고슴의 어린애 같은 말투에 다들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마웨는 성공한 연장자로서 한턱내겠다고 제안했고, 수강생들과의 뒤풀이는 원칙적으로 불가하다는 림자를 제외하고 수강생 넷이서 전직 대통령도 즐겨 먹었다는 연희동의 유명 칼국숫집에 갔다. 도치는 마웨가 사준 수육에 소주를 마시며 어떻게 해야 개처럼 벌 수 있냐고 자꾸 물었고, 마웨는 큰 소리로 소주를 추가 주문한 뒤 자신의 성공담을 전부 일기로 써서 발표할 예정이니 기다려달라고 대꾸했다. 그러곤 기다려라, 개봉박두! 하고 외쳤는데, ‘개봉박두’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고슴은 안주도 없이 자꾸만 소주를 들이켜며 우린 언제쯤 반지하 아니면 옥탑방, 옥탑방 아니면 반지하를 벗어나냐! 아, 더럽게 폭폭하네! 말해 또다시 모두를 웃겼다.
일행과 헤어져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조금 전 고슴의 탄식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던 순간을 자꾸 곱씹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청년의 딱한 현실을 마냥 귀엽고 재미난 에피소드로 소비해버리고 만 것은 아닌지, 과거로 돌아가 내 웃음을 박박 지워버리고 싶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다른 수강생보다 고슴에게 눈길이 가는 건 어쩌면 해준의 또래라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를 두잔이나 마셔서일까? 나는 어느새 해준에게 문자메시지를 적고 있었다. 어떻게 지내? 새 학기는 잘 준비하고 있어? 독립한 원룸은 괜찮아? 불편한 데는 없어? 난방은 잘 되고 온수도 잘 나와? 그러나 쏟아지는 질문은 어떤 것도 문자메시지가 되지 못했다. 이 모든 질문을 한마디로 요약해줄 문장을 찾아야 했다. 보고 싶다. 폭폭하진 않니? 아직도 엄마가 미워?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겨우 한 문장을 찍어 보냈다.
밥 잘 먹고 있어?
버스를 타고 집 앞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버스에서 내려 오피스텔까지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에도, 집에 들어가 곧장 욕실에서 샤워하고 나올 때까지도 해준은 내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았다. 나는 창 너머 언론사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떤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고층 건물의 모든 창에 불이 훤히 밝혀져 있었지만, 안쪽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집으로 돌아갔나? 무사히?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들이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 다녀왔어,라고 말하는 풍경을 상상했다. 문득 내겐 다녀왔어,라고 말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해준도 석구도 마찬가지겠지. 해준이 빈집에 들어가 불도 켜지 않고 어두운 방에 오도카니 서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 해준의 얼굴은 석구의 얼굴로 바뀌었고 어느새 내 얼굴로 변했다. 불안이 목덜미를 싸늘하게 훑고 내려갔다. 해준은 어릴 때부터 밥 먹어라, 밥 먹었니?같이 밥에 관한 잔소리를 유난히 싫어했다. 나는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리고 언론사 건물이 보이는 창의 암막커튼을 소리 나게 닫았다.
*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단다.
이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시옷의 할머니였다. 할머니 오른쪽에 바짝 붙어 시장이나 방앗간에 갈 때 간혹 검고 흰 제비가 시옷의 무릎 높이까지 낮게 스쳐 날았다. 시옷이 소스라치게 놀라면 할머니는 세상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제비가 낮게 나니 비가 오려는가보다. 제비는 좁은 골목길에서도 사람들 몸에 충돌하지 않고 용케 낮게 날았다. 제비가 바짝 다가올 때 얼른 주먹을 폈다 쥐면 따뜻한 그 몸을 만져볼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제비는 시옷의 작은 주먹에 잡히는 일 따위 없다는 듯 매끄럽게 호를 그리며 시옷의 무릎 사이를 빠져나가곤 했다.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고 알려준 사람이 할머니였다면, 비가 오려고 할 때 왜 제비가 낮게 나는지 알려준 사람은 제비다방 남자였다. 제비가 뭘 먹고 사는지 아냐? (절레절레) 제비는 파리나 벌 같은 날벌레를 먹고 살아. 그런데 제비는 웬만하면 땅에 내려앉는 법이 없어서 먹이도 날아가면서 잡아채 먹지. 비가 오려면 기압이 낮아지는데, 아, 기압이 뭔지는 아냐? (절레절레) 비가 오기 전 공기에 물기가 가득 차서 무거워진다는 뜻이야. 빨래한 옷이 물기를 먹어 무거워지는 것처럼. 아무튼, 공기가 무거워지면 작은 날벌레들은 높이 날기 버거워. 날벌레가 낮게 날면 그것들을 먹어야 하는 제비도 낮게 날 수밖에 없겠지? (끄덕끄덕) 먹고사는 일이 그렇다. 먹이가 낮게 날면 나도 같이 낮아질밖에. 먹이가 곧 나야. 높이 살고 싶으면 높은 것을 먹어. 알겠냐, 꼬맹아?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 응접실 창밖으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시옷은 남자가 저 큰 몸으로 골목길을 낮게 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남자가 골목 안을 요리조리 날아다니며 공중에 뜬 라면이며 담배를 잡아먹는다. 남자는 따뜻한 김을 피워 올리는 커피잔을 잡아먹으려다 어느 집 시멘트 담장에 부딪쳐 추락한다. 남자의 코가 깨진다. 시옷은 남자의 통증까지 상상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담배 연기가 싫으냐? 남자는 시옷의 표정을 오해하고 얼른 황도 통조림 빈 깡통 안에 담배를 비벼 껐다. 사내자식이 까탈스럽기는.
엄마와 할머니가 부엌에서 저녁을 차리느라 분주한 시간이면 시옷은 몰래 응접실에 들어가 제비다방 남자와 놀았다. 남자와 함께 놀면 재미가 있었다. 남자도 남의 집 응접실을 지키는 게 영 따분했는지 시옷이 찾아가면 반가워했다. 아빠의 전축으로 듣고 있던 음악을 끄고 「고향의 봄」 카세트테이프를 틀어주기도 했고, 벽에 세워둔 자신의 기타를 가져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합창곡에 맞춰 기타 줄을 뜯기도 했다. 시옷은 남자의 반주에 맞춰 가만가만 노래를 불렀다. 남자는 방송국 어린이합창단 지휘자 선생님처럼 시옷의 음색이나 리듬감을 칭찬하지는 않았지만, 귀찮은 기색 없이 몇번이고 기타 반주를 해주었고, 간혹 어떤 구절은 직접 노래하기도 했다. 시옷은 남자와 함께 스피커 앞에 나란히 앉아 「고향의 봄」을 흥얼거리는 시간이 좋았다.
남자는 아빠의 책장에서 제멋대로 책을 꺼내 읽고 있기도 했다. 아빠의 책들은 전부 글자가 작고 절반 넘게 한자가 섞여 있었다. 아빠가 사라지기 전 시옷은 두꺼운 책을 읽는 아빠 옆에서 국민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안데르센 동화 전집을 꺼내 읽곤 했다. 시옷은 특히 『인어공주』를 자주 읽었는데, 마지막 페이지에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어 공중으로 흩어지는 삽화를 무척 좋아했다. 아지랑이처럼 뿌옇게 사라지는 인어공주의 모습을 몇번이고 바라보면서 시옷은 (사랑이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절대 사랑 따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기도 했다. 제비다방 남자는 어려워 보이는 아빠의 책도 시옷의 동화책도 아빠가 가끔 엄마에게 사다주었던 여성잡지나 소설책도 닥치는 대로 꺼내 읽는 눈치였다. 시옷이 응접실에 들어갈 때마다 다른 책들이 탁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비가 오기 전 제비가 낮게 나는 이유를 들려준 날 남자는 아빠의 책장에서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는 백과사전 전집 중 한권을 뽑아왔다. ‘지읒’으로 시작하는 것들을 설명하는 권이었다. 남자가 ‘제비’ 항목을 찾아 페이지를 펼쳤다. 입속이 붉은 새끼 제비들이 둥지 안에서 어른 제비를 향해 뺙뺙 입을 벌리고 우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남자는 제비에 대해, 제비의 습성에 대해 백과사전 속 설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어주었다. 남자는 노래할 때보다 책을 읽을 때 목소리가 더 좋았다.
제비는 참새목 제빗과의 조류로, 아, 목이 뭐고 과가 뭔지는 알아? (절레절레) 그건 나중에 중학생이 되면 배울 거야. (끄덕끄덕) 시옷은 제비에 왜 참새 목이 달렸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귀 기울여 남자의 말이나 듣기로 했다. 남자는 제비 항목을 다 읽은 김에 ‘종달새’ 항목으로 넘어갔다. 종달새를 본 적 있어? (절레절레) 나는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들판이 넓은 고장에서 자랐는데, 거기선 종달새를 쉽게 볼 수 있어. 「종달새의 하루」라는 노래를 알아? (끄덕끄덕) 가사에 종달새의 습성이 아주 잘 나타나 있지. 남자는 기타를 들고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굽어보면 보리밭이 좋아 보여
종달새가 쏜살같이 내려옵니다
비비배배거리며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하다 하루 해가 집니다
밭에서 쳐다보면 저 하늘이 좋아 보여
다시 또 쏜살같이 솟구칩니다
비비배배거리며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하다 하루 해가 집니다
하늘에 있을 때는 보리밭이 욕심나고, 보리밭에 있을 때는 하늘이 욕심나고, 종달새는 변덕쟁이에다 욕심쟁이구나, 시옷은 생각했다. 할머니는 늘 남의 것을 탐내면 업을 짓고 업을 지으면 벌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시옷은 함부로 욕심을 냈다간 반드시 댓가를 치른다고 배웠다. 사랑을 탐낸 인어공주처럼, 드레스와 메리제인 구두를 욕심낸 언젠가의 시옷처럼, 성공을 꿈꾸고 사업을 확장한 아빠처럼. 하지만 남자의 기타 줄이 ‘오르락내리락하다’ 부분을 경쾌하게 뚱땅거린 덕에 시옷의 기분도 조금 가벼워졌다. 한번 더 불러볼까? (끄덕끄덕) 남자는 시옷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이곤 다시 반주를 시작했다. 시옷은 아까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노래했다. 비비배배거리며 오르락! 내리락! 이 부분은 새끼 제비처럼 짹짹 뺙뺙 신나게 불렀다.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시옷의 노래도 남자의 반주도 뚝 그쳤다. 엄마가 문간에 서서 시옷을 노려보았다. 엄마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옮겨가더니 잠시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나갔다. 시옷은 잔뜩 주눅이 들어 엄마 뒤를 따라갔다. 꼬맹이 너무 혼내지 마십쇼! 제가 심심해서 놀자고 했슴다! 등 뒤에서 한껏 불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시옷의 손목을 아프게 움켜잡더니 부엌으로 끌고 갔다. 부엌문을 닫고는 시옷의 양어깨를 단단히 쥐었다. 엄마는 시옷을 무섭게 노려보며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한번만 더. 저 남자 옆에 가면. 엄마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엄마가 죽는다. 알았니? 엄마가 죽어. 시옷은 엄마를 올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였는지도 몰랐던 눈물이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박자 맞춰 뚝 뚝 떨어졌다. 시옷이 제비다방 남자 옆에 가면 왜 엄마가 죽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단단히 굳어 해쓱해진 엄마의 얼굴은 정말 당장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보였기에 시옷은 다시는 남자 옆에 가지 않겠다고, 남자와 즐겁게 노래하지 않겠다고, 남자를 욕심내지 않겠다고, 무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다.
*
해준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지난번 내가 보낸 메시지의 답장은 아니었다. 해준은 석구와 나를 카카오톡 단톡방에 초대했다.
아빠 엄마, 안녕! 이번에 누구 찍을 거야?
해준은 내가 물어본 밥 이야기는 하지 않고 보름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선거 이야기를 했다. 그즈음 어딜 가도 나오는 주제였지만 해준이 나와 석구를 초대해 대선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해가 바뀌고 새해 안부도 묻지 않았던 해준이, 석구가 고향으로 내려간 후 침묵으로 내게 불만을 표시했던 해준이 선거 때문에 몇달 만에 먼저 연락을 해왔다. ‘다짜고짜’, 해준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이 단어가 떠올랐다. 석구가 떠나고, 학원을 정리하고, 세 식구가 8년 넘게 전세 계약을 갱신해가며 살았던 아파트에서 이사를 나오고 하는 동안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았던 해준이 다짜고짜 내 표의 향방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면 해준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는 듯이 해준이 보낸 메시지를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전화를 걸어 물어볼까? 아니, 해준은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다. 문자에는 문자로, 카톡에는 카톡으로, 메일에는 메일로, 그게 해준과 석구에게 익숙한 의사소통 방식이었다.
그건 왜 물어?
나는 잠시 후 답장을 보냈다. 평소와 달리 해준은 곧장 메시지를 보냈다.
이 나라가 너무 걱정돼서.
넌 누굴 찍을 생각인데?
이번에는 곧바로 답장이 오지 않았다. 해준은 무엇을 가늠하고 있을까?
내가 기억하는 첫 대통령선거는 1987년이었다. 직접 경험했든 역사책에서 배웠든 이 나라 사람이라면 대부분 아는 수십년 만의 대통령 직선제 선거였다. 시내에서 꽤 떨어진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그해 여름은 오후만 되면 열린 창문을 통해 교실로 밀려들었던 매캐한 최루가스 냄새로 기억된다. 교실 여기저기서 재채기가 터졌고 어쩔 수 없이 창문을 닫으면 교실은 곧바로 답답한 찜통이 되었다. 그러나 교사들도 학생들도 ‘데모’하는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대기에 늘 매운 냄새가 떠돌던 그때 사람들은 울분과 기대감을 동시에 느끼며 시간을 견뎠다. 이번에는 뭔가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9시 뉴스 시그널이 끝나자마자 지겹게 봐야 했던 학살자 출신 대통령을 이제 화면에서 치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정말로 ‘갈아엎어’버릴 수도 있으리라고. 민주주의, 신기루와도 같은 그 실체를 이번에는 제대로 목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모이면 언제나 정치 이야기를 했다. 고문을 받다가 죽은 대학생의 이야기를 했고 시위 현장에서 최루탄을 맞고 사경을 헤매는 또다른 대학생의 이야기를 했다.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밤 통학버스 안에서 여학생들은 안타까운 목숨들을, 호헌철폐 독재타도, 그 선명한 구호를 입에 올렸다. 그렇게 일상처럼 매운 냄새 속을 오가던 중 학살자 일당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1987년 6월 29일 당시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특별 선언하면서 1987과 6·29는 영원히 고유한 숫자로 남았다. 이제 사람들은 선거 이야기를 나눴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구체적인 이름들을 입에 올렸다. 선거권이 없는 내 또래 학생들도 마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처럼 너라면 누굴 찍을 것이냐? 나라면 누굴 찍을 것이다,와 같은 가정법 대화를 나누었다. 누구 때문에 누가 될 것이다, 누구만 아니면 누가 될 수 있다, 누구 때문에 누가 되면 어떡하냐,와 같은 복잡한 정치공학적 대화가 유행했다. 분위기는 뜨거웠다. 다들 선거에 몰입했다. 모두가 나라를 걱정했다.
1992년 선거부터 내게도 투표권이 생겼다. 대학생이었고 3당 야합으로 배반의 상징이 되어버린 여당 후보 낙선운동에 참가했다. 그 사람이 되면 이 나라는 망한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수업을 빼먹고 거리에 나가 호소문이 인쇄된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비판적 지지’라는 말을 처음 배웠고, 그에 따라 내 표를 주었다. 여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날, 함께 낙선운동을 했던 친구들과 늦도록 술을 마시며 자정이 넘은 시간에 학교 앞 가로수를 붙들고 엉엉 울었다. 이 나라는 이제 망했다고, 다 끝났다고 울부짖었다. 그 꼴사나운 모습을 학교 앞 상점 사장들이 목격했고, 한동안 분식집, 복사가게, 서점에 가면 사장들이 애국자 납셨냐고 놀리며 공짜 밥을 주거나 물건값을 깎아주었다.
1997년 선거는 5년 전 함께 여당 후보의 낙선운동을 벌였던 친구들과 불화한 기억으로 남았다. 반드시 정권교체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진보정치를 투표로 응원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을 비난했다. 무책임하다, ‘나이브’하다는 말을 들었다. 정권교체도 진보정치도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었으므로 우리의 논쟁은 늘 안타까움으로 얼룩졌다. 전선을 제대로 그어야 한다는 것에 모두 동의했지만, 어떤 게 제대로 그은 전선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완전히 달랐다. 여러가지 경우의 수가 동원되고 다양한 확률이 계산되었지만, 결국 어떤 후보를 찍느냐의 문제로 귀결되었기에 다들 상대방의 표를 내 쪽으로 끌어오려고 골몰했다. 친구들은 내 표가 사표가 될 것이고 적에게 이로울 뿐이라고 걱정했고 나는 진보정치의 큰 흐름을 위해 멀리 봐야 하지 않겠냐고 친구들을 설득했다. 결국 친구들은 정권교체를 얻었고 나는 친구들을 잃었다.
엄마,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안 되잖아. 그건 막아야 하잖아.
해준의 호소는 25년 전 친구들과의 불화를 떠올리게 했다. 해준의 목표는 92년의 나처럼 특정 후보의 낙선, 그리고 다른 후보의 비판적 지지인 걸까? 아니면 97년, 나와 불화했던 친구들처럼 진보정치의 성장보다 최악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지 않도록 막는 게 더 시급하다는 입장일까? 해준도 그때의 나와 친구들처럼 나라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까?
엄마는 오랫동안 지지해온 후보와 정당이 있어.
내 메시지에 해준은 곧바로 답장하지 않았다. 넌 늘 그런 식이지? 너 혼자 고결하지? 97년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냉소했던 친구가 떠올랐다. 해준도 같은 마음일까? 지금 생각해도 괴로운 건 당시 내 친구의 마음도 지금 해준의 마음도 나라를 걱정하는 순도 높은 진심임을 내가 잘 안다는 사실이었다.
석구가 뒤늦게 단톡방에 들어와 (봄을 맞아 고향집 묵은 화단을 정리하느라 카톡을 늦게 확인했다고 했다) 안부를 전했고, 그후 석구와 해준은 다양한 이모티콘을 섞어가며 열띠게 선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해준은 언제나 나와 같은 후보를 지지했던 석구가 이번에는 누굴 찍을 생각인지 궁금해했고, 석구는 여전히 고민이 많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사람이 당선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면에서 해준과 의견일치를 보았다. 97년 대선 당시 무책임한 투표라고 나를 비난했던 친구들에게 그건 진보정치가 싹을 틔우기도 전에 짓밟는 잔혹행위 아니냐며 맞섰던 사람이 석구였다. 해준은 20대 여성으로서 여성혐오를 팔아 표를 구걸하는 사람들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했고 석구는 그렇다면 여성 후보를 찍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해준은 선거역학상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 않냐고, 여성혐오 세력의 당선을 막기 위해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하기로 했다고 대답했다. 석구는 무엇보다 딸을 가진 아빠이자 지금 현실에 책임이 있는 기성세대로서 청년 해준의 생각을 지지한다고 결론을 지었다. 해준이 축포를 터뜨리며 환호하는 강아지 이모티콘을 보냈다.
엄마는?
해준이 두 손을 간절하게 앞으로 모으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강아지 이모티콘을 보냈다. 해준이 이렇게 뜨거운 아이였구나. 단톡방에는 내가 모르는 해준이 있었다.
엄마는 좀더 고민해볼게.
해준도 석구도 한참 잠잠했다.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단톡방 안에서 잠시 가족의 형태를 띠고 모인 이 집단이 조용히 어긋나고 있었다. 아니, 어긋난 사람은 나 하나일 것이다. 기성세대로서 청년 해준에게 빚진 마음을 고백하는 석구, 딸 가진 아빠로서 여성혐오 세력의 당선을 기필코 막아야 한다고 마음먹은 석구가 왜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어 가족을 깨뜨린 일에 대해서는 내게 사과하지 않는지, 나는 선거보다 그런 게 더 궁금했다. 나라를 걱정하며 모인 이 안에서 왜 나만 개인적인 일로 상처받고 분노하는지, 왜 저들은 내가 아닌 나의 투표만 궁금해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해준이 안녕 또 만나, 하고 손을 흔드는 강아지 이모티콘을 보내자 석구가 정중하게 두 손을 모아 절하는 펭귄 이모티콘을 보냈다. 해준아, 우린 정말로 안녕할 수 있을까?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말들을 메시지로 보낼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말없이 카톡 앱을 종료했다.
*
두툼한 방송국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수영장 물속에 머리끝까지 잠길 때처럼 귀가 잠시 먹먹해졌다. 압도적인 고요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시옷은 방송국 어린이합창단에서 배웠다. 그날 스튜디오는 유난히 조용했다. 5월 말 가정의 달 특집으로 편성된 노래자랑 프로그램에 출연해 2절 솔로를 부를 단원을 뽑는 날이었다. 심사위원으로 노래자랑 프로그램의 연출자와 작가까지 와서 지휘자 선생님이 연주하는 피아노 옆에 의자를 갖다놓고 앉아 있었다. 지휘자 선생님은 그동안 함께 연습한 대로 화음을 넣어 노래를 부르다가 2절이 시작되면 한 사람씩 차례로 솔로를 부르게 했다. 결국, 단원 수만큼 노래를 계속 불러야 했는데, 심사하는 김에 연습까지 시키려는 뜻 같았다. 단원들은 각자 자리를 찾아 합창단용 삼단 계단에 올라갔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었다. 유력 후보는 합창단에서 가장 깊고 성숙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6학년 소프라노 여학생과 묵직한 음량을 자랑하는 6학년 바리톤 남학생이었다. 시옷도 내심 2절 솔로를 욕심냈지만, 큰 기대를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막상 단 위에 올라가 서 있으려니 심장 뛰는 소리가 귓속까지 쿵쿵 울렸다. 그 소리가 옆 사람한테까지 들릴까봐 흘낏 양옆을 살폈지만, 다들 자기만의 긴장에 빠져 다른 사람은 신경 쓸 틈이 없어 보였다.
쟁쟁하게 귀를 막는 고요를 찢으며 지휘자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었다.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던 전주가 들려오자 다들 자동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벌렸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피아노 옆의 연출자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고 단원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작가는 무릎에 올려놓은 메모판에 뭔가를 열심히 기록했다. 누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목이 졸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인지 지휘자 선생님이 매서운 목소리로 더 크게! 입 벌리고! 가슴 열고! 하고 연달아 외쳤다. 같은 노래를 세번 정도 불렀을 때야 비로소 단원들의 목청이 평소처럼 트였다.
어찌어찌 시간이 흐르고 시옷이 솔로를 부를 차례가 되었다. 심장이 노랫소리보다 더 크게 울렸고 귓속만이 아니라 온몸이 진동했다. 시옷의 심장은 합창곡 박자와 어긋나게 뛰었다. 꽃 동네 새 (쿵쾅) 동네 나의 옛 (쿵쾅) 고향 파란 (쿵쾅) 들 남쪽에서 바(쿵쾅)람이 불(쿵쾅)면. ‘냇가에’ 부분에서 시옷은 박자를 놓쳐버렸고,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에서 음정이 흔들리고 말았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를 부를 때는 속울음이 터지는 바람에 발음이 뭉개졌다. 망했다. 얼핏 바라본 지휘자 선생님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완전히 망했다. 그때부터 남은 열번 정도의 노래를 어떻게 불렀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시옷은 넋이 나가버렸다.
모두 돌아가며 솔로를 부르고 지휘자 선생님이 휴식을 선언했을 때 단원들은 전부 녹초가 되어버렸다. 단 위에 그대로 주저앉거나 큰 소리로 탄성을 내지르는 아이도 있었다. 프로그램 작가가 음료수와 빵을 나눠주자 단원들은 무대 바닥에 앉거나 방청석의 빈 의자를 찾아가 간식을 먹으며 쉬었다. 어른들은 그사이 머리를 맞대고 자기들끼리 소곤거렸다. 시옷은 입맛도 뚝 떨어져 제 몫으로 받은 크림빵을 뜯어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아까의 실수가 떠올라 먹을 것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지휘자 선생님과 연출자가 열띤 대화를 나누었고 작가는 주로 들으며 메모판에 간간이 뭔가를 끼적였다. 단원들은 흩어져서 간식을 먹는 동안에도 심사위원들 쪽을 자꾸만 흘끔거렸다. 다들 욕심내고 있다고 시옷은 생각했다. 다들 마음이 있었어. 시옷은 어쩐지 다른 단원들에게 미안해졌다. 합창단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다 상대적으로 나이도 어린 편이면서 몇년 동안 합창을 배워온 사람들을 제치고 솔로 자리를 탐냈다니. 이건 반칙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차라리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잠시 후 지휘자 선생님이 시옷과 유력 후보로 여겨졌던 6학년 소프라노와 바리톤을 피아노 옆으로 불렀다. 다들 입을 다물고 피아노 쪽으로 다가가는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누군가 빵 봉지를 구기는 소리가 크게 들릴 만큼 압도적인 고요가 찾아왔다. 지휘자 선생님이 세 사람에게 최종심사를 시작할 테니 한 사람씩 피아노 반주에 맞춰 「고향의 봄」 2절을 다시 불러보라고 했다. 잠잠했던 시옷의 심장이 다시 날뛰었다. 또 한번 욕심내도 될까? 지휘자 선생님이 나이가 어린 순서대로 부르라고 했다. 시옷은 들고 있던 빵과 음료수를 바닥에 내려놓고 피아노 바로 옆에 섰다. 맑은 소년을 좋아하는 지휘자 선생님이 고개를 돌려 시옷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세 사람의 노래가 모두 끝나자 지휘자 선생님이 단원들에게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심사는 어른들끼리 더 의논해서 결정할 것이고 결과는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했다. 단원들은 삼삼오오 수군대며 스튜디오를 떠났다. 친구가 없는 시옷은 맨 뒤에서 천천히 무리를 따라 나갔다. 스튜디오 문을 지나자 고요가 깨지며 공기의 파편이 단숨에 시옷의 귀를 향해 몰려왔다. 수영장 물속에 잠겨 있다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을 때처럼 팟! 찻! 하는 마찰음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다리가 휘청거렸다. 시옷은 스튜디오 안보다 조금 서늘한 방송국 현관을 천천히 가로질러 본관 밖으로 나갔다.
저 앞에서 커다란 노랑나비가 나풀거렸다. 연분홍 꽃잎이 나비 위로 분분히 떨어졌다. 시옷은 손등으로 눈을 훔치고 다시 나풀거리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애니였다. 애니가 연노랑 드레스 자락을 나풀거리며 꽃비 속을 맴돌고 있었다. 큼직한 리본을 달아 양 갈래로 묶은 애니의 곱슬머리가 함께 나풀거렸다.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애니의 윤곽을 비추자 애니는 금방이라도 햇살이 비치는 방향으로 떠오를 것만 같았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시옷이 있는 데까지 들려왔다. 애니는 순정만화 주인공보다 더 순정해 보였다. 애니가 왜 여기에 있지? 헛것을 보는 건가? 시옷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몇번 깜박여봤지만, 방송국 정문 옆 우람한 벚나무 아래서 즐겁게 꽃비를 맞고 있는 사람은 분명 애니였다. 그 순간 어쩐지 시옷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때 누가 큰 소리로 시옷의 이름을 불렀다. 애니 엄마가 벚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시옷을 향해 손짓했다. 애니 엄마는 학부모회의에 갈 때처럼 세련된 양장을 차려입고 미장원에 다녀온 듯 부풀린 머리를 하고 있었다. 시옷은 애니 엄마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 애니도 합창단에 들어가려고 시험을 보러 왔단다.
애니 엄마가 어쩐지 자랑스러운 얼굴로 벚나무 아래 애니를 가리켰다. 순간 시옷을 발견한 애니가 곧장 시옷을 향해 달려와 얼떨떨하게 서 있는 시옷을 와락 끌어안았다. 애니는 어느새 시옷보다 키도 몸집도 더 커져 있었다.
애니가 너랑 같이 방송국에 다니고 싶다고 며칠을 졸랐는지 모른다.
애니가 끌어안은 시옷을 놔주고 시옷을 내려다보았다. 애니의 눈망울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애니가 노래를 잘했던가? 애니의 노래는 시옷의 집 마당에서 고무줄놀이를 할 때나 들어봤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애니와 시옷은 이런 노래를 숨차게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했다. 뜀을 뛰며 숨차게 부르는 노래는 허리를 펴고 서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르는 노래와 다를 것이다. 어쩌면 애니는 생긴 것처럼 순정하게 노래하는 아이일지도 모른다. 저 하얗고 보드라운 볼살을 움직여 입을 크게 벌리고 노래하면 큼직한 리본과 곱슬머리도 함께 경쾌하게 까딱이겠지. 노래하는 애니는 아름다울 것이다.
먼저 가렴. 동네에서 보자꾸나.
애니 엄마가 시옷의 머리통을 가볍게 쓰다듬고 애니 손을 잡고 방송국 본관 쪽으로 걸어갔다. 애니가 헤어지기 싫은 것처럼 아랫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시옷 쪽을 자꾸 돌아보았다. 시옷은 애니가 본관 출입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거기 서서 손을 흔들었다. 애니가 사라지자 꽃비도 멈추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점점이 뿌려진 벚꽃 잎을 밟으며 버스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심장이 계속 두근거렸다. 그리고 언덕길을 다 내려가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시옷은 그 두근거림의 이유를 깨달았다. 애니 엄마나 애니 때문에 지휘자 선생님이 시옷의 정체를 알게 되면 어쩌지? 시옷이 사내자식도 맑은 소년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버리면 어떡하지? 저만치 시옷이 타야 할 버스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시옷은 머릿속을 어질어질하게 흔드는 아득함을 느끼고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버스는 그런 시옷을 정류장에 혼자 세워두고 가버렸다.
*
마웨: 어쩐지 그 시가 떠오르네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림자: T. S. 엘리엇의 「황무지」요?
마웨: 예, 그거요. 제가 참 좋아하는 시거든요.
고슴: 암송해주세요.
마웨: 아이고, 암송은커녕 그 유명한 첫 구절만 겨우 압니다.
도치: 제가 검색해서 읽어드릴까요?
마웨: 그럼 감사하죠!
도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은 따뜻했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렸다. 여기까지 읽을게요.
(고슴과 마웨가 손뼉을 친다.)
림자: 마웨님은 왜 시옷님 일기를 읽다가 이 시가 떠올랐을까요?
마웨: 글쎄요. 제가 늙어서 그런지 벚꽃 잎이 흩날리는 걸 볼 때마다 4월은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듭디다. 나는 여기저기 쪼그라들고 검버섯만 늘어가는데 저것들은 늘 새롭게 아름답구나 싶어 미치도록 부러워요. 봄이 잔인한 건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뒤흔들기 때문이라잖아요. 겨우내 이만하면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봄이 자꾸 더 살고 싶다고 나를 흔들어요. 봄이 나를 추하게 만들지요. 잔인하죠. 아주 잔인해. 그런데 시옷이는 어린 나이에 꽃을 보고도 아름다운 줄 모르고 그저 자기가 소박하게 욕심낸 것들이 망가질까봐 전전긍긍하잖아요. 어린애가 이렇게 가엾어도 되나 싶어.
고슴: 마웨님, 너무 과몰입하신다!
마웨: 과몰입이 뭡니까?
고슴: 일기를 드라마처럼 보고 계신다고요.
도치: 그만큼 시옷님이 일기를 리얼하게 썼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소설처럼 그럴듯하게 포장을 잘했다는 뜻일까요?
고슴: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시옷님 일기는 소설 같아요. 시옷님, 솔직히 말해봐요. 이거 전부 사실은 아니죠? 조금씩 가공한 거죠?
마웨: 시옷님이 일기에 거짓말을 썼다는 말입니까?
도치: 거짓말은 너무 과격한 말이고 일기라도 약간씩 가공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원래 사실과 허구 사이 경계가 늘 분명하지는 않잖아요.
고슴: 허구가 거짓말이지 뭐.
림자: 고슴님 말처럼 글쓰기에서 거짓말은 꼭 부정적인 의미를 갖지는 않아요. 순도 백 퍼센트의 진실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철학적 질문도 던져볼 수 있고요. 일기는 자신의 경험을 진술하는 것이지만, 경험을 진술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이라는 회로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완벽한 재현은 불가능하니까요.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일기가 소설이 되기도 하고 소설이 사실의 진술이 되기도 하는 게 글쓰기의 연금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안 그래도 이 부분에 관해 여러분께 보여주고 싶은 글이 있어서 슬라이드를 만들어왔는데……
(림자가 자신의 노트북으로 다가가 큰 화면에 슬라이드를 띄운다.)
경험 자아는 “지금 아픈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자아이고, 기억 자아는 “전체적으로 어땠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자아이다.
(다음 슬라이드로 천천히 넘어간다.)
경험과 경험의 기억 사이의 혼동은 강력한 인지적 착각이다. 이런 혼동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 경험이 엉망이었다고 믿게 만든다. 하지만 경험 자아는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기억 자아는 가끔 틀리지만 점수를 매기고 우리가 삶 속에서 배운 것을 지배하고 결정을 내린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미래 경험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 미래 기억의 질을 최대로 높이는 법을 배운다.
(고슴과 도치가 핸드폰으로 화면을 찍고 마웨는 공책에 베껴 쓴다. 한참 후에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간다.)
이것이 바로 기억 자아의 폭압이다.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8.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화면을 갈무리하고 한동안 침묵한다. 전부 ‘폭압’이라는 단어를 골똘히 보고 있는 것 같다.)
림자: 여러분의 일기는 어쩌면 미래 기억의 질을 최대로 높이는 방식이 아닐까요?
*
집에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고 엄마는 안방에 이불도 덮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그 무렵 엄마는 눈을 감고 누워 있을 때가 많았다. 늘 속이 메스꺼웠고 어지러웠으며 피곤했다. 할머니는 전부 엄마의 배 속 터에 아기가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기 때문인지 아니면 시옷이 자꾸 제비다방 남자와 놀고 싶어한 탓인지 엄마는 늘 시옷에게 화난 얼굴을 했다. 시옷이 안방으로 들어가 찌푸린 얼굴로 잠든 엄마를 내려다보고 조용히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엄마가 눈을 반짝 떠 시옷을 보았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엄마의 이마에 깊은 골이 졌다. 시옷은 아기 동생이 엄마의 다정함을 빨아먹고 사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자 아기가 조금 미워졌는데, 그때 부엌에서 할머니가 시옷을 불렀다. 시옷은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대접에 담긴 달걀을 푼 다음 할머니가 구워 반듯하게 잘라놓은 김을 접시에 조심스럽게 담고, 밥상에 수저를 놓았다. 얼마 뒤 시옷은 할머니와 함께 상을 들고 안방으로 갔다. 엄마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 요 위에 앉아 있었다. 엄마의 얼굴이 까칠했다. 셋은 둥근 밥상에 둘러앉아 조용히 밥을 떠먹고 국을 떠먹었다. 밥상 한가운데 놓인 뚝배기 안에서 잔뜩 부풀어 올랐던 달걀찜이 푹 꺼질 때까지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렸다. 터무니없이 큰 소리에 시옷은 깜짝 놀라 수저질을 멈추었다. 엄마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교동입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엄마가 수화기를 든 채로 시옷 쪽을 바라보았다. 시옷은 숟가락을 든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엄마의 통화를 엿들었다.
예.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엄마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시옷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 전화기 앞에 앉은 채로 말했다.
네가 솔로로 뽑혔다는구나.
엄마는 이 말을 철둑 너머 할머니 앞에서 폭폭해 죽겠어요, 하고 말할 때처럼 했다. 한숨인 듯 탄식인 듯, 아지랑이같이 뿌연 음색으로. 시옷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입을 벌리고 엄마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밥상 위에서 엉켰다. 시옷은 기뻐해야 할지 놀라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시선을 먼저 돌린 건 엄마였다. 엄마가 밥상 앞으로 돌아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눈을 살짝 내리깔고 덧붙였다.
단복을 새로 맞춰야 한다더라.
단복이라니? 지난번 합창단이 학교에 와서 노래할 때 입었던 그 감색 세일러복을 말하는 건가? 시옷은 궁금했다.
오천원이래.
엄마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엄마의 밥은 영 줄어들지가 않았다. 엄마는 밥을 먹는다기보다 일정한 속도로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내렸다 반복할 뿐이었다. 시옷은 숟가락으로 아욱된장국을 휘저으며 무엇이 엄마를 폭폭하게 했는지 헤아려보았다. 시옷이 솔로로 뽑혀서? 돈도 없는데 오천원이나 주고 단복을 맞춰야 해서? 아니, 그전에 매일 백원씩의 차비를 들여가며 쓸데없이 방송국에 다녀서? 사내자식도 아니면서 합창단에서 소년 흉내를 내며 거짓말을 하고 다녀서? 괜히 아기 동생에게 터를 팔아 엄마를 힘들게 해서?
오천원이라니, 한번 입고 말 옷이 비싸기도 하지.
내내 조용했던 할머니가 한마디 했다. 시옷은 목이 턱 막혀 더는 밥을 밀어넣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시옷에게 오천원이라는 화폐 단위는 많은 것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오천원은 당시 버스 요금의 백배, 노점에서 사 먹을 수 있는 국화빵이 백개, 노래자랑 특별방송에 출연해 「고향의 봄」 2절 솔로를 부를 수 있는 3분 30초 정도의 시간, 그리고 고모들과 이모들에게 돈을 빌려 사는 게 지긋지긋해진 엄마의 불행을 조금 더 무겁게 만들 누름돌. 시옷에게 오천원어치 노래는 엄마에게 오천원어치 폭폭함과 같다. 등가교환. 먼 훗날 시옷은 오천원짜리 물건과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어린이합창단 감색 세일러복 한벌 값이라고?)
*
버스는 이른 봄의 들판을 옆에 끼고 일정하게 달렸다. 30년 전에도 나는 버스를 타고 같은 길을 내려갔다. 내 기억 속에서 또다른 고유한 숫자가 되어버린 1991년 5월이 지나고 동아리 1학년 후배였던 석구가 사라졌다. 그해 봄 석구는 동아리 회장이었던 내 손에 이끌려 거의 매일 이어지다시피 했던 거리 시위에 나갔다. 죽음의 소식이 연달아 들려왔던 참담한 봄이었다. 청춘들이 경찰의 과잉진압에 목숨을 잃었고, 폭력 정권에 항거하며 목숨을 던졌다. 우리는 학생회관에 모여 늦도록 화염병을 만들고 다음 날 배낭에 나눠 담고 종로나 을지로로 나갔다. 백골단에 쫓겨 을지로 뒷골목을 뛰어다녔고 우르르 넘어지며 신발과 가방을 잃어버렸다. 어느날 물대포가 등장했다. 신촌의 한 대학 정문 앞에 고립되어 죄수들처럼 한데 웅크린 채 경찰이 쏜 물대포를 고스란히 맞아야 했던 날, 석구는 입고 있던 외투를 서둘러 벗더니 내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늘 내 손에 이끌려 겁먹은 눈망울로 시위에 나갔던 1학년 석구가 그 순간은 나를 자신이 보호해야 할 성별로 인식한 것 같았다. 혼자 최루액을 뒤집어쓴 석구는 온몸에 붉은 수포가 돋아난 바람에 한동안 피부과 신세를 져야 했다. 나는 석구에게 연고를 건네며 다시는 허튼짓하지 말라고 화를 냈고 석구는 그저 순한 얼굴로 웃으며 등을 돌리더니 제 손이 닿지 않는 뒷덜미에 연고를 발라달라고 부탁했다. 석구의 피부염은 오래도록 낫지 않았지만, 계속 이어진 집회와 시위에 나가자는 내 청을 한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랬던 석구가 거리에서 전경에게 붙잡혀 경찰 버스를 타고 난지도 쓰레기매립장까지 실려 갔다가 가까스로 돌아온 후 사라졌다. 동아리 회장으로서 나는 석구의 과사무실에 찾아갔고 석구가 휴학계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아리 사람들이 모여 어떻게 할지 의논한 끝에 회장인 내가 석구의 고향에 찾아가 어떻게 된 일인지 들어보고 다시 돌아오도록 설득하기로 했다. 과사무실에서 받은 석구의 고향집 주소는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고장이었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 버스를 여러번 갈아타고 석구의 고향집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오후가 깊었다. 녹이 슬어가는 붉은 철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시멘트를 바른 마당 한가운데 평상에서 중년의 여자와 석구가 이른 저녁을 먹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석구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런 석구를 보고 내 마음이 턱 내려앉았다. 석구가 엉거주춤 평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사했구나. 석구의 피부는 아직 얼룩덜룩한 자국이 남았지만, 염증은 거의 가라앉아 있었다. 석구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놓여 나는 남의 집에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는 실례를 스스로 용서하고 말았다. 나는 석구 모에게 인사를 건넸고 무람없음과 싹싹함 사이를 넘나들며 그들의 밥상머리에 끼어 앉았다. 석구 모가 찬이 부실하다며 텃밭에서 보드라운 부추를 쑥쑥 잘라 오더니 금세 부추전을 부쳐 내왔다. 평상 바로 옆에 큼직하고 넓적한 잎을 단 나무가 있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타닥타닥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서울 선배님, 꽃이 필 때 왔으면 좋았을 텐데. 저게 자목련이랍니다.
석구 모는 내게 말을 놓지 않았다. 석구는 어쩐지 부끄러운 얼굴로 부엌 냉장고에서 막걸리 한병을 꺼내왔다.
목련은 역시 자목련. 붉은 등을 잔뜩 매단 것 같지요.
석구 모가 내 잔에 막걸리를 따라주고 내처 자신의 잔을 채웠다. 석구 모가 잔을 들고 건배했다.
우리 석구 태어난 날, 저 애 아버지가 기념으로 심은 나무랍니다. 나무도 제 주인이 누군지 아는지, 비실비실한 애를 닮아 처음 몇해는 영 비실비실하더라고요. 저 애 아버지가 어느날은 나무 둘레를 도나스 모양으로 깊이 파더니 거기에 변소 똥을 퍼다 나르지 않겠어요? 아휴, 냄새가 말을 못했지. 그런데 이듬해 꽃이 어찌나 탐스럽게 피어나던지! 붉디붉은 꽃이 주먹보다 큼직하게 열리는 거라!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거라! 내가 그걸 보고 몸서리를 쳤어요. 저 욕심 봐라. 징그럽다, 징그러워. 꽃을 키우고 싶어서 똥을 퍼다 나르는 사람도 징그럽고 고약한 똥을 먹고 피보다 붉은 꽃을 피우는 저 나무도 징그럽고. 하! 그래도 우리 서울 선배님, 저 꽃을 한번 봐야 하는데. 꽃이 다 져버려서 어쩌나.
석구 모는 그렇게 말하고 막걸리를 단숨에 들이켰다.
저녁 밥상을 물리고 석구 모는 설거지라도 하겠다는 나를 뿌리치다시피 부엌에서 몰아내더니 석구더러 함께 동네나 한바퀴 돌고 오라고 일렀다. 석구는 마을 뒤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는 비자나무 숲으로 나를 데려갔다. 해가 길어져 아직 어둡지 않았다. 늦봄의 숲이 보드라운 바늘잎을 바람결 따라 하늘거리고 있었다. 석구는 저녁 밥상 앞에서도, 숲까지 걸어오는 동안에도 말이 없었다. 왜 갑자기 휴학계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커녕 내가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놀랐다거나 벌써 날이 저물고 버스도 끊겼는데 어떻게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보다 한걸음 앞서서 숲길을 천천히 걷는 석구의 어깨는 서울에서 봤을 때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수굿하게 내려앉은 그 어깨에 대고 이러저러한 말들을 추궁하듯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나도 말 없는 석구 뒤를 따라 말없이 비자나무 숲을 걸었다. 쏴아아아. 바람이 불 때마다 침엽이 서로 부딪치며 연푸른 초록 비를 흩뿌렸다.
날이 저물자 석구 모가 자신의 이부자리 옆에 내 잠자리를 봐주었다. 석구 모와 석구는 안방에서 함께 9시 뉴스를 봤다. 뉴스 화면에 전경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는 ‘폭력적인’ 대학생들의 모습이 나왔다. 화면은 전투복에 옮겨붙은 불을 끄느라 정신없이 몸부림치는 전경을 확대해 보여주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어느 대학 총장의 단호한 얼굴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고 일갈하는 시인의 얼굴이 교차 편집되어 흘러나왔다. 5월 8일 전민련 소속 운동가 김기설의 분신 이후 수없이 반복해서 봐야 했던 화면이었다. 그들의 언어가 뱀처럼 화면 밖으로 기어 나와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석구가 갑자기 텔레비전을 껐다. 그는 나직이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를 건네고 제 방으로 건너갔다. 석구 모가 조금 어색하게 하품하더니 시골 사람들은 원래 일찍 자고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밭으로 나간다며 일어나 전등 스위치를 껐다. 나는 석구가 없는 방에서 그날 처음 만난 석구 모와 나란히 누웠다. 잠이 올 리가 없었지만, 석구 모가 신경 쓰지 않게 잠든 척 숨을 고르게 쉬려고 애썼다. 석구 모의 숨소리는 나긋했다. 밤하늘이 흐려서 달빛도 새어들지 않았다. 방 안은 온통 까맸다. 눈을 뜨고 있어도 옆에 누운 석구 모는 모를 것이다. 나는 숨소리만 고르면서 눈을 뜨고 어둠을 응시했다. 그제야 내가 어떤 무례를 범하고 있는지 실감이 났다. 그때 석구 모가 끙 하고 뒤척이는가 싶더니 한숨인 듯 탄식인 듯 한마디 했다.
그런데 꽃이 진 게 꽃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석구 모는 일찌감치 밭으로 나간 뒤였다. 석구 모의 이부자리는 말끔히 개어져 있었다. 서둘러 이불을 개고 마루로 나가자 내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던지 석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루에 조각보를 씌운 밥상이 놓여 있었다.
아침 먹고 제가 터미널까지 바래다드릴게요.
석구가 보자기를 들치자 흰쌀밥과 미역국 한쌍이 마주 보게 놓여 있었다. 석구 모는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하나도 반갑지 않을 아들의 학교 선배를 위해 밥상을 차려놓고 노동하러 갔구나. 목이 턱 막혔다. 석구에게 왜 휴학계를 냈냐거나 언제쯤 돌아올 생각이냐는 질문 같은 건 목구멍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었다. 그저 고단한 사람이 차린 밥상을 그대로 물릴 수 없다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석구와 버스를 한번 갈아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석구가 서울 가는 표를 끊어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터미널 매점에서 따뜻한 캔커피를 사서 건넸다. 우리는 말없이 대합실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마침내 출발시간이 되어 버스에 오르려는데 석구가 말했다.
고추밭 일만 거들고 올라갈게요.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석구가 눈을 내리깔고 덧붙였다.
기다려주세요.
버스가 출발하고 터미널을 빠져나가는 동안 창밖으로 멀어지는 석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꽃이 진 게 꽃의 잘못이 아니라면, 꽃이 또 필 때까지 몇번이고 기다릴 수도 있지 않겠냐고.
시외버스터미널은 30년 전 그 자리에서 시 외곽 쪽으로 옮겨가 있었다. 버스를 갈아탈 자신이 없어서 미리 알아본 전화번호로 콜택시를 불렀다. 기사는 석구의 고향집까지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나는 행여 기사가 말이라도 시킬세라 양쪽 귀에 에어팟을 끼고 좌석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았다. 택시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경기도 지역번호였다. 사모님, 금싸라기 땅이 나와서 연락드렸습니다. 알짜배기 주상복합 매물이 나왔어요. 경기도 지역번호로 시작하는 전화는 주로 부동산 투자를 권했다. 서울 지역번호는 대출이나 보험 가입을 권유했다. 고객님, 당장 암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시잖아요. 낯선 목소리가 협박과 회유를 섞어 말했다. 그들의 무례와 절박함을 상대하기가 버거워서 언제부턴가 낯선 번호는 받지 않고 통화거부 버튼을 눌렀다. 그들은 늘 미래를 걸고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미래를 위해 부동산에 투자하고 미래를 위해 암 보험을 들라고. 그러지 않으면 나의 미래는 빈곤과 질병으로 불행할 것이라고. 그들은 나의 현재와 과거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오직 미래, 안락하고 다행해야 하는 나의 미래만을 언급했다. 온갖 전문용어와 통계수치를 곁들여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그들의 말은 결국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어쩌려고 그렇게 살아요? 그렇게 대책 없이 살면 어떡해요? 대책이라니. 대책은 미래를 도모하는 말. 내겐 미래가 없었다. 석구와 해준에게서 떨어져 나와(아니다, 그들이 먼저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혼자 살면서 나는 미래를 완전히 부정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무작정 걷기 시작했을 때 그 무수한 발걸음 끝에 도달한 결론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미래는 없다. 없음이야말로 미래의 본질이다. 삶은 계속 현재를 밟아 과거를 양산하는 일이다. 그러나 낯선 목소리들은 계속해서 미래를 속삭였다. 미래의 안녕을 위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투자하라고. 나는 빨간색 통화거부 버튼을 누르며 속으로 대꾸했다. 나는 거부한다. 투자를, 안녕을, 미래를.
그러나 전화는 끈질겼다. 통화거부 버튼을 누르는 족족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차라리 그냥 전화를 받고 거부 의사를 확실히 밝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받자 상대방이 살짝 짜증을 섞어 말했다. 만년필 AS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만년필이라니?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내 손으로 직접 만년필을 포장해 경기도 주소지로 발송했던 게 기억났다. 석구가 생일 선물로 주었던 만년필의 뚜껑이 도무지 열리지 않아 품질보증서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힌 수리센터에 수리를 맡긴 게 보름 전이었다. 남자는 왜 이제야 전화를 받냐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한 것과 다름없는 원망을 담아 빠르게 용건을 전달했다.
만년필 뚜껑이 열리지 않는 건 배럴, 그러니까 몸통 안에서 잉크가 말라붙어서일 때가 많아요. 그래서 따뜻한 물에 24시간 넘게 담가놓았는데도 열리지 않네요. 아무래도 뚜껑과 배럴이 접착제 같은 걸로 단단히 붙어버린 모양인데, 혹시 배럴에 금이 가서 수리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이상하네요. 아무튼, 지금으로선 뚜껑을 부숴서 열어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렇게라도 열어볼까요?
그 방법밖에 없다면 그렇게 해야겠죠.
그럼 동의하신 걸로 알고 뚜껑을 깨보겠습니다. 그 안의 사정부터 확인해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배럴 상태가 괜찮으면 뚜껑만 다른 부품으로 교체해드릴 수 있거든요.
예, 그렇게 해주세요.
남자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만년필의 사정이라니. 석구의 손처럼 따뜻하고 새의 등뼈처럼 가벼웠던 만년필에게 어떤 사정이 생긴 걸까. 새로 낸 넓은 국도를 달리던 택시가 익숙한 옛 도로로 들어섰을 때 아까 그 번호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남자는 서둘러 용건을 쏟아냈다.
아,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아요, 고객님. 뚜껑을 깨뜨려봤는데 배럴에 세로로 길게 금이 가 있더라고요. 거기 붙어 있던 접착제가 녹았다가 굳었는지 뚜껑과 단단히 붙어 있었어요. 그래서 뚜껑이 꼼짝도 하지 않았던 거고요. 아무래도 과거에 한번 수리를 받은 흔적이 있는데, 정말 수리를 맡긴 적이 없습니까?
남자의 말투는 흡사 취조와도 같았다. 새 제품을 선물받았고 한번도 수리를 맡긴 적이 없다는 내 말에 남자는 들릴락 말락 한숨을 쉬었다.
뭐, 어쨌든 만년필 사정은 그렇습니다. 뚜껑은 깨졌고(당신이 깨뜨렸지) 배럴도 쪼개졌고(당신이 쪼갰잖아) 남은 건 펜촉뿐이네요.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할 수 있죠?
마침 저희에게 같은 모델의 뚜껑과 배럴이 있어요. 새것은 아니고요. 다른 제품을 수리하다 나온 중고 부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고객님 것과 같은 색깔은 아니에요. 검정뿐인데, 그걸로라도 갈아 끼워 보내드릴까요?
살짝 열어놓은 택시 창틈으로 초봄 들판의 두엄 냄새가 몰려들었다. 나는 누군가 부지런히 일구어놓은 들판의 검은 흙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걸 같은 만년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걸 왜 자기한테 묻느냐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선택은 고객님 몫이고 저희야 의뢰받은 대로 일할 뿐이죠.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요?
망가진 잔해를 그대로 조립해 보내드리는 방법이 있죠. 폐기물과 다름없지만, 일종의 기념으로요.
그리고요?
그리고 펜촉만 보내드리는 방법이 있겠네요. 살펴보니 펜촉은 아주 멀쩡해요. 사용감도 별로 없고, 또 금 도장 제품이라 튼튼하기도 하고요. 누가 뭐래도 펜촉은 만년필의 심장 아닙니까?
결국, 쓸모가 있지만 내 것이 아닌 만년필과 내 것이지만 쓸모없는 만년필 (혹은 만년필의 심장)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이었다. 나는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택시는 어느새 석구의 고향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익숙한 담장 너머로 한껏 붉은 것이 우뚝 솟아 있었다. 석구와 나이가 같은 자목련이 꽃을 잔뜩 매달고 있었다.
*
애니의 장래희망은 탐정이었다. 애니는 소머즈나 원더우먼처럼 금발을 휘날리며 범인을 잡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왜 경찰이 되지 않고?
시옷의 물음에 애니는 간단히 대답했다.
경찰 옷은 안 예쁘잖아.
애니는 시옷을 데리고 탐정놀이를 했다. 시옷은 언제나 애니의 조수였다.
뛰어난 탐정 옆에는 항상 훌륭한 조수가 있어.
뛰어난 탐정은 어떤 탐정인데?
시옷이 묻자 애니는 어느 담벼락에 붙은 작은 벽보를 가리켰다. 도화지보다 조금 큰 종이에 사람들 얼굴이 나란히 인쇄되어 있었다. ‘현상수배범 명단’, 벽보 맨 위에 굵직한 글씨가 보였다. 사진은 인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전부 남자 어른이었고 둥근 얼굴 네모난 얼굴 정도만 구별할 수 있었다. 각 얼굴 아래 ‘폭력’ ‘사기’ ‘강도’ ‘절도’ 등의 죄목이 쓰여 있었다. 맨 아랫줄에 다른 얼굴보다 조금 앳되어 보이는 남자 사진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불법’ ‘집회’ ‘시위’ ‘선동’ ‘학생회장’같이 시옷에겐 한없이 낯선 단어가 쓰여 있었다. 벽보 맨 아래에는 무엇보다 크고 선명한 빨간색으로 ‘범죄 신고 112 간첩 신고 113’이 보였고, 신고 포상금의 액수도 쓰여 있었다.
뛰어난 탐정은 저 사람들을 잡아서 오천만원을 받는 사람이지.
애니가 살짝 고개를 치켜들고 뽐내듯 말했다. 오천만원이라니. 시옷은 그게 어느정도의 금액인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버스 요금이 오십원, 합창단복이 오천원인데 오천만원은 버스를 몇번 타고 합창단복을 몇벌 살 수 있는 돈일까? 이것은 나눗셈의 영역이었고 시옷은 산수를 잘 못했다. 시옷은 잘 모르는 영역을 욕심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니는 반드시 뛰어난 탐정이 되어 오천만원을 벌겠다고 큰소리쳤다.
오천만원으로 뭘 하려고?
애니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라는 듯 눈을 깜박이며 시옷을 보았다. 그러곤 한참 후에 대답했다.
꼭 뭘 해야 해? 그런 큰돈은 가지고만 있어도 좋을 거야.
시옷은 언제나 좋은 장난감을 양보하는 애니가 오천만원을 벌게 되면 더도 말고 딱 오천원만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딱 오천원, 노래자랑 특별방송에 출연해 3분 30초 동안 「고향의 봄」을 떳떳하게 부를 수 있게 해줄 금액만 줬으면.
애니는 파출소 담벼락에 붙은 현상수배범의 얼굴을 하나씩 골똘히 쳐다보는 것으로 탐정놀이를 시작했다.
잘 외워둬. 저 얼굴 중 하나를 오늘 만날지도 몰라.
애니는 얼굴들을 외운 뒤 파출소에서 중앙동 방향으로 출발했다.
평범한 아이들처럼 보여야 해.
평범한 아이들이 어떤 건데?
탐정 같지 않은 아이들이지. 방과 후 피아노 학원에 가거나 학교 놀이터에 가는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길을 걷다가 아까 외운 얼굴들과 비슷한 사람이 보이면 그때부터 미행이 시작되는 거야.
곧바로 신고하지 않고?
증거가 없잖아. 수상한 사람을 끝까지 쫓아가 증거를 확보한 다음에 경찰서에 가는 거야. 그래야 실수하지 않지.
애니는 수상한 사람들은 언제나 티가 난다고 주장했다. 여름인데 긴소매 옷을 입은 사람. 남자인데 머리가 긴 사람. 여자인데 담배를 피우는 사람. 노인인데 허리가 굽지 않은 사람. 화창한 날씨에 울면서 걸어가는 사람.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는 사람. 그렇게 조금씩 특이한 사람들을 발견하면 운이 좋은 거라고 했다. 남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은 사연이 있기 마련이거든. 사연이라는 말에 시옷은 괜히 속이 켕겼다. 애니는 내키는 대로 한 사람을 찍은 다음 약간의 거리를 두고 그를 따라갔다. 그렇게 낯선 동네, 낯선 골목에 접어들었다가 그 사람이 어느 집으로 들어가면 그 앞에서 잠시 수상한 기척이라도 들리나 귀를 세웠다가 별일 없으면 교실에서 몰래 주워온 분필 토막을 꺼내 그 집 담벼락에 작게 가위표를 그렸다.
무슨 표시야?
수상한 집이니 계속 지켜봐야 한다는 표시.
그러나 애니가 가위표를 그린 집에 다시 찾아간 적은 없었다.
그날 탐정놀이는 방송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애니는 입단 시험에 통과해서 시옷과 함께 방송국에 다녔다. 지휘자 선생님은 합창곡을 새로 배우려면 시간이 모자란다고 걱정했지만, 노래자랑 프로그램 연출자가 합창단에 애니 같은 ‘꽃’이 필요하다고 선생님을 설득했다는 말을 나중에 애니 엄마에게 들었다. 애니 엄마는 선생님에게 시옷을 안다고 말하지 않았거나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고, 눈치가 빠른 애니는 시옷이 합창단에서 사내자식으로 통하는 걸 첫날에 바로 알아채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시옷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뛰어난 탐정은 입이 무거운 법이지.)
날이 좋았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잖아. 애니는 시옷보다 아는 게 많았다. 시옷에게 5월은 그저 방송에 나가 무사히 솔로를 불러야 하는 달이었다. 버스정류장 앞 담장에 붉은 장미가 피어 있었다. 애니는 장미 넝쿨을 따라 걷자고 했다.
장미도 보고 탐정놀이도 하고, 일석이조잖아.
여기서 집까지 걸어가자고?
응, 걷다가 수상한 사람을 만나면 미행도 하고. 남은 버스비로 학교 앞에서 국화빵도 사 먹자.
다리가 아플 텐데?
그럼 그때 버스를 타면 되지.
애니와 시옷은 익숙한 중앙동 거리에 들어섰을 때부터 매운 냄새를 맡았다. 둘은 번갈아가며 재채기했다. 누가 공중에 고춧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았다. 시옷은 낯선 공기에 벌써 겁을 먹기 시작했지만, 애니는 씩씩하게 앞장서 걸었다. 오, 오늘은 공기부터 수상해. 예감이 좋아. 애니는 자꾸만 주춤거리는 시옷의 손을 잡아끌었다. 극장이 모여 있는 거리가 나왔다. 아빠가 시옷을 데리고 「킹콩」이나 「메리 포핀스」를 보여주었던 극장도 보였다. 동시상영. 절찬리 상영. 개봉박두. 시옷은 머리 위 간판에 쓰인 커다란 글자를 속으로 읽으며 애니를 따라갔다. 애니가 시옷을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더니 속삭였다.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어. 미행 시작이다, 조수.
애니가 고갯짓으로 가리킨 앞쪽에 아빠 또래의 남자가 낙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양옆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상상력이 풍부한 애니였지만 애니가 가리킨 남자는 시옷의 눈에도 제법 수상쩍어 보였다. 입고 있는 옷도 드라마 「113 수사본부」에서 간첩들이 많이 입고 나오는 옷이었고 무엇보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또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걷는 게 아니라 자꾸만 여기저기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애니와 시옷은 남자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걷는 속도를 조절하며 뒤를 밟았다. 최대한 평범한 아이들처럼 보이게 애쓰면서. 남자는 건물마다 흘낏거리며 거리를 통과하더니 잠시 후 품에서 묵직해 보이는 검은 물건을 꺼내 입에 가져다 댔다. 남자 쪽에서 아빠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출 때 들렸던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라마에서 봤던 무전기였다. 애니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시옷을 보았다.
(간첩이다!)
(간첩이야!)
애니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시옷은 뛰어난 탐정 애니가 눈앞의 간첩을 어떻게 처리할지 기대감을 품고 애니와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무전기에 대고 뭐라 뭐라 길게 말했다. 애니가 갑자기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옷은 애니를 따라잡느라 종종걸음을 치며 속닥였다.
신고하러 가는 거야?
그러나 애니는 시옷의 말을 못 들은 사람처럼 앞만 보고 빠르게 걸었다. 잔뜩 굳은 애니의 얼굴을 보고 시옷은 깨달았다. 애니는 겁을 먹었구나. 뛰어난 탐정 애니가 진짜 간첩을 보고 겁을 먹었다. 시옷은 애니를 따라 걸음을 서둘렀다. 극장 거리 초입으로 돌아갔을 때 저만치서 와아아! 함성이 들렸다. 애니와 시옷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거리 입구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무리 뒤쪽에서 탕! 탕! 하는 폭음이 들렸고 군복 비슷한 옷을 입은 남자들이 몽둥이와 네모난 방패를 들고 나타났다. 9시 뉴스에서 본 전경이었다. 언젠가 시옷이 물었을 때 아빠가 말했었다. 경찰은 도둑을 잡고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전경은 데모꾼을 잡는다고. 데모꾼이 뭐냐고 묻자 아빠가 뉴스 화면을 가리켰다. 화면 속에서 대학생 수백명이 서로 팔짱을 끼고 무리를 지어 원래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넓은 도로를 걷고 있었다. 그들은 뭐라고 큰 소리로 외치기도 했고 주먹을 쥔 팔을 공중에 휘두르기도 했다. 화면 속 데모꾼은 거칠고 야만적으로 보였다. 극장가 초입에 갑자기 나타난 무리는 뉴스에서 본 데모꾼들 같았다. 그 뒤를 전경들이 쫓고 있었다. 전경들은 장총처럼 생긴 것을 하늘에 대고 탕 탕 쏘았고 거기서 고춧가루보다 훨씬 매운 가루가 뿌옇게 흩어졌다. 애니와 시옷은 데모꾼들 사이에 휩쓸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방향을 돌려 데모꾼들과 같은 방향으로 뛰었다. 탕! 탕! 소리와 저벅저벅 군홧발 소리가 뒤를 바짝 쫓아왔다. 애니와 시옷은 데모꾼들 사이에 끼어 눈앞도 옆도 어른들의 몸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흘낏 돌아본 애니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시옷은 애니의 손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순간 애니가 시옷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애니가 있던 자리에 어른들의 몸 몇개가 순식간에 쌓였다. 사람이 넘어졌어! 어린애가 깔렸어! 질서! 질서! 잠깐만요! 사방에서 데모꾼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대학생 언니가 애니의 몸을 깔고 넘어진 사람들을 마구 밀어냈다. 애니가 넘어진 자리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빈자리가 생겼다. 대학생 언니는 소머즈처럼 괴력을 발휘해 넘어진 사람들을 밀쳐내고 개구리처럼 엎어져 꼼짝도 하지 않는 애니를 일으켰다. 얘! 괜찮니? 괜찮아? 애니는 눈을 뜨지 않았다. 시옷은 꼼짝 않고 서서 온몸을 덜덜 떨었다. 애니가 백지장 같은 얼굴로 눈을 뜨지 않아 너무 무서웠다. 아까 목격한 간첩보다 훨씬 무서웠다. 누가 뒤쪽에서 시옷의 어깨를 와락 잡았다. 시옷은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꼬맹이, 여기서 뭐 해? 제비다방 남자였다. 남자는 데모꾼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남자가 쓰러져 있는 애니를 보고 사태를 파악했는지 대학생 언니에게서 애니를 뺏다시피 안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시옷도 무작정 남자 뒤를 따라 달렸다. 대학생 언니도 몸을 일으켜 달리기 시작했다. 시옷은 남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그때 뒤쪽에서 대학생 언니의 비명이 들렸다. 얼핏 뒤를 돌아보니 전경이 언니의 머리채를 붙잡고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괴력을 발휘해 애니를 구했던 언니가 전경 손에 머리채를 붙잡힌 채 속절없이 끌려가고 있었다. 언니의 비명이 처참하게 극장가를 흔들었다. 달리는 동안에도 시옷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시옷은 흐느끼면서도 남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아니 대학생 언니처럼 전경에게 질질 끌려가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달렸다.
제비다방 남자는 데모꾼들과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가 싶더니 어느 좁은 골목길로 방향을 틀었다. 골목이라기보다는 사람이 다닐 것 같지 않은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통로였다. 남자는 애니를 세워 안고 좁은 통로를 빠져나갔다. 남자는 미로 같은 길을 요리조리 통과했다. 그러다가 시옷이 제대로 따라오는지 뒤를 돌아보더니 달리는 속도를 조금 줄였다. 시옷은 숨을 몰아쉬며 남자의 뒤통수만 보고 계속 달렸다. 미로가 끝나자 자동차가 오가는 큰 도로가 보였다. 중앙동 한복판, 아빠와 함께 와본 적이 있는 낯익은 거리였다. 남자가 큰길 변에 있는 어느 건물로 쑥 들어갔다. 남자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갔다. 남자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문에 달린 종이 쨍그랑 경쾌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시옷은 남자 뒤를 따라 유리문을 통과하면서 문 바로 옆에 걸린 길쭉한 세로 간판을 알아보았다. 제비다방이었다.
제비다방 마담이 놀란 얼굴로 다가와 남자에게 다방 안쪽의 길쭉한 소파를 가리켰다. 남자가 애니를 푹신한 소파에 눕혔다. 마담이 병원으로 가야지 애를 여기로 데려오면 어떡하냐고 남자를 나무랐다. 남자가 애니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애니를 깨우는 사이 마담이 주방에 들어가 찬물에 적신 수건을 가지고 나와 애니의 뺨에 문질렀다. 얘! 일어나봐! 얘! 두 사람이 한참 동안 애니를 두드리고 문지르고 하자 애니가 눈을 떴다. 애니가 제비다방 남자와 마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 표정이 없던 애니의 얼굴에 겁이 실렸다. 애니가 벌떡 윗몸을 일으켰다. 시옷이 애니 쪽으로 다가갔다. 애니가 시옷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갑자기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마담이 애니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어디 아픈 데는 없니? 어디가 아픈지 말해봐. 애니는 마담의 말을 못 들은 사람처럼 큰 소리로 악을 쓰며 울었다. 제비다방 남자가 시옷에게 애니의 집 전화번호를 아느냐고 물었다. 시옷은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를 따라 전화기 쪽으로 갔다. 남자의 전화를 받고 20분 정도 지나자 애니 엄마와 아빠가 제비다방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두 사람은 요란하게 다방 안을 가로질러 애니가 앉은 소파 쪽으로 뛰어왔고, 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애니를 안고 사라졌다. 뼈가 부러진 곳은 없는지 머리를 다치지는 않았는지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애니 엄마 아빠는 시옷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오직 애니만 보였을 것이다.
애니 가족이 사라지자 어수선했던 다방 안이 적막해졌다. 마담이 드문드문 앉아 있던 손님들에게 일일이 다가가 소란을 피워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카운터로 돌아온 마담이 엉거주춤 서 있는 시옷을 보았다. 시옷도 아주 오랜만에 마담과 제대로 마주 보았다. 마담은 그새 볼살이 패었고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시옷을 보는 마담의 얼굴은 예전처럼 한없이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시옷을 미워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이쯤에서 마담에게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늘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머릿속으로 인사말을 준비하고 마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아빠가 돈을 갚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시옷이 고개를 들었을 때 마담이 한없이 슬픈 표정을 하고 시옷을 내려다보았다. 옆에 서 있던 제비다방 남자가 헛! 하고 웃었다. 마담에게 미안한 마음은 시옷의 진심이었다.
*
석구는 집 안에 없었다. 대문은 열려 있었다. 석구 모는 2년 전 이 집에서 자다가 조용히 숨을 거둘 때까지 평생 대문을 잠근 적이 없다고 했다. 처음 동아리 후배 석구를 찾아 이 집에 찾아왔던 30년 전 이후로 집은 몇차례의 수리와 단장을 거듭했다. 석구가 내려와 또 손을 봤는지 화단에 엉망으로 웃자라 있던 풀도 깨끗이 정리되어 있고 집 뒤쪽 텃밭의 검은 흙도 일년 농사를 준비하며 말끔하게 일궈져 있었다. 석구는 고향집에 내려온 후 올해 첫 농사에 기대가 컸다. 석구 모가 쓰던 안방에 석구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어머니의 방을 쓰기로 한 모양이었다. 방 안에 희미하게 석구의 냄새가 떠돌았다. 석구는 어디에 있을까? 정말로 죽어버렸을까?
죽어버려.
해준이 만들고 초대한 가족 단톡방에 결국 나 혼자 남았다. 석구가 나가기 직전 내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였다.
죽어버려.
보름 동안 잠잠했던 단톡방이 대통령선거 결과가 확정되자 요란해졌다. 아주 늦은 시간이었다.
우린 망했어.
해준과 석구는 그 시간까지 개표방송을 보고 있었다.
완전히 망했어.
두 사람은 이모티콘을 붙이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래서인지 지난번보다 웃음기가 싹 사라진 듯한 정색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나라를 걱정했다. 그러다가 해준이 불쑥 내게 물었다.
엄마는 누구 찍었어?
갑작스러운 질문이 추궁 같았다. 나는 어쩐지 불쾌해졌고 대답하지 않으려다가 한참 만에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가 찍고 싶은 사람 찍었어.
설마, 기어이 3번을 찍은 거야?
해준은 노골적으로 나를 원망했다.
엄마 싫어!
어린 해준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 해준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를 싫어했고 그 싫음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유치원 재롱잔치에 오지 않아서, 초등학교 학부모총회에 아빠만 보내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없고 늘 아빠가 맞아주어서. 아기 해준을 키운 사람은 석구였다. 석구는 육아휴직을 하고 해준을 키웠고, 복직 후에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었다가 데려오는 주 양육자 역할을 맡았다. 해준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혼자 지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자 석구는 퇴직을 하고 육아와 가사노동을 맡았다. 만약 나와 석구의 역할이 바뀌었다면, 내가 해준을 키우고 가사노동을 전담하고 유치원 재롱잔치나 학부모총회를 챙기고 석구가 밖에 나가 돈을 버느라 해준 옆에 없었다면 해준은 석구를 원망했을까? 그러나 나를 싫어하고 거부하는 해준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무슨 유치한 감정싸움인가 싶었다. 더 크면 나아지겠지 믿었다. 어른이 되면 나를 이해하겠지. 같은 여자니까, 이런 생각도 했다. 그러나 해준은 성인이 되고 대학에 가서도 나를 향한 감정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이제는 대통령선거 결과를 두고 나를 새롭게 원망하고 있었다.
엄마는 찍고 싶은 사람을 찍을 권리가 있어.
석구가 대신 말했지만, 그의 두둔이 반갑지는 않았다.
엄마, 정말 무책임하네.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1도 없다는 거 엄마도 알잖아. 엄마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런 결과가 생긴 거야. 나는 뭐 진보가 싫은 줄 알아? 고귀한 이념 같은 거 모르는 줄 알아? 엄마는 늘 엄마밖에 몰라.
기시감. 97년 대선 때 불화했던 친구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비난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말을 20년도 더 흐른 지금 딸에게 듣고 있다니, 아득해졌다.
이제 우리나라는 망했어. 혐오 장사로 표를 얻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엄마는 고상하게 투표했겠지만, 엄마 같은 사람들이 만든 엉망인 나라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어 불안하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야. 딸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으면 엄마가 그럴 수는 없었어.
해준은 장문의 메시지를 속사포로 쏟아내더니 인사도 없이 단톡방을 나가버렸다. 현해준님이 나갔습니다. 문장이 뺨을 후려치는 것 같았다. 딸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으면. 나는 해준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던가. 불쾌함이 순식간에 죄책감으로 돌변했다. 해준과의 실랑이는 언제나 죄책감의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으로 끝났다.
이 방은 어떻게 할까?
한참 후 석구가 메시지를 보냈다.
해준이도 없는데, 우리 동시에 나갈까?
아니, 아직 할 말이 남았어.
석구가 물음표 세개를 머리 위에 띄우고 갸우뚱거리는 곰 이모티콘을 보냈다.
사과해.
또 그 소리야?
사과해.
말했잖아. 사과할 수 없다고.
왜?
널 사랑하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사과해? 그걸 원해?
응, 원해.
당신은 자존심도 없어?
생각지 못한 공격이었다. 공격에는 공격으로 맞서야 한다.
너야말로 자존심 때문에 추한 욕망을 사랑으로 포장했잖아. 잊었어? 네가 한 건 사랑이 아니라 성폭력이었어.
석구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 그냥 죽어줄까?
그런 수동공격은 지긋지긋했다.
죽어버려.
이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보고 석구는 단톡방을 나가버렸다.
그냥 콱 죽어버려.
나는 나 혼자 남은 단톡방에 아무도 보지 않을 메시지를 찍었다.
얼마 후 해준이 전화를 걸어왔다. 해준이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은 좀처럼 없었으므로 나는 당황해 핸드폰 화면에 뜬 해준의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피스텔에서 불광천까지 걸어가 봄꽃이 피기 시작한 천변길을 따라 은평구 신사동까지 걸어가던 중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가까운 벤치를 찾아가 앉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호흡을 한번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엄마! 아빠가 연락이 안 돼요. 핸드폰도 안 받고 카톡도 안 읽어요.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너무 걱정돼요.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아빠 말투가 좀 불안했거든요. 엄마가 시골집에 가보면 안 돼요? 제발 부탁드려요.
해준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나는 일단 해준을 달래고 당장 석구의 고향집에 가보겠다고 약속했다. 전화를 끊고 곧바로 석구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만 흘러나왔다. 천변길에서 도로로 올라와 택시를 잡아타고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그리고 간단히 짐을 싸서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까지 가는 택시 안에서 계속 석구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꺼져 있었다. 죽어버려. 단톡방에 남긴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석구가 정말로 죽어버렸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급히 터미널로 가고 있는 건 순전히 해준 때문임을 알았다. 엄마는 엄마밖에 모른다고, 나를 원망하는 해준 때문이었다. 정신과에서 비상용으로 받은 항불안제를 챙겨 지갑 동전 칸에 넣어 왔다. 급하면 삼킬 게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듯 가방 속에 손을 넣어 지갑을 꼭 쥐어보았다. 시외버스가 서울 톨게이트를 빠져나갈 무렵에야 불안하게 뛰던 심장박동이 조금 가라앉고 해준이 난생처음으로 내게 깍듯한 존댓말을 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은 우물 속에 잠겨 있었다. 저 위에 둥근 하늘이 보였다. 하늘 한쪽이 붉게 젖어갔다. 곧 붉은 기운이 우물 속으로 뚝뚝 떨어졌다. 핏덩이 같은 얼룩이 떨어지며 어깨를 때렸다. 우물 안이 붉어졌다. 핏덩이가 꽃잎이 되어 둥둥 떠올랐다. 목련은 역시 자목련. 꽃잎이 모두 떨어지고 저 위 하늘은 다시 온전한 원이 되었다. 꽃이 진 게 꽃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아니! 그건 꽃의 잘못이야! 나는 둥근 하늘에 대고 소리쳤다. 당신 잘못이야! 사과해! 누가 내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핏덩이가 꽃잎으로 떠올라 맴도는 우물 속에서 나는 속절없이 흔들렸다. 놔줘. 아파.
눈을 떴을 때 석구의 얼굴이 보였다. 석구의 방이었다. 석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석구가 오지 않자 한동안 가라앉았던 불안이 정수리부터 온몸을 차갑게 적셨다. 한겨울 얼음 연못에 빠진 것처럼 몸속 깊이 떨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지갑 동전 칸에서 항불안제를 꺼내 삼켰다. 그리고 석구의 방 안을 정신없이 맴돌며 약효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거기까지 기억났다. 어느새 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창밖이 컴컴했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서서히 정신이 들면서 석구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도 천천히 깨달았다.
다행이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네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석구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웃었다.
죽어버리라며.
안 되겠어, 네가 죽으면.
왜?
네가 죽으면 해준이 슬플 테니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해준의 번호를 눌렀다. 통화연결음을 확인하고 석구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석구가 핸드폰을 받아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문틈으로 해준아, 아빠야, 하는 석구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다. 나는 생각했다. 다행인가? 다행일 것이다. 그런데 대체 행이 얼마나 있어야 다행인 걸까?
*
애니는 갈비뼈에 금이 갔다고 했다. 넘어지면서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혀 찢어진 이마는 다섯 바늘이나 꿰맸다고 했다. 날이 저물고 나서야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애니 엄마가 시옷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말해주었다. 애니는 당분간 합창단 연습에 나갈 수 없다고 했다. 의사가 갈비뼈가 붙을 때까지 움직임을 조심해야 하는데 호흡이 중요한 노래는 갈비뼈에 무리라고 했단다. 애니는 이마를 꿰매고 가슴에 깁스를 하는 내내 큰 소리로 울부짖다가 지금은 진통제와 진정제를 먹고 잠들었다고 했다. 시옷은 애니가 보고 싶었지만, 이마에 반창고를 붙이고 가슴에 깁스를 하고 여기저기 멍이 든 애니는 보고 싶지 않았다. 아는 사람 중 가장 예쁜 사람인 애니가 망가진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엄마가 전화를 끊고 시옷을 불렀다. 일어나보라고 했다. 엄마는 시옷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고 눌러보았다. 아파? (절레절레) 여기는? (절레절레) 엄마는 시옷의 셔츠를 들춰서 배와 등을 확인해보고 바지통을 걷고 종아리를 살펴보았다. 멍든 데 없어? (절레절레) 넘어지지 않았어? (절레절레) 엄마가 시옷의 몸에서 손을 떼고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아랫배가 팽팽하게 당겨서 잠에서 깨어났다. 방 안은 컴컴했고 옆자리 엄마의 숨소리는 고단하고도 일정했다. 시옷은 방 뒷문을 열고 뒷마루로 나갔다. 뒷마루 끝에 화장실이 있고 화장실 바로 옆에는 응접실로 들어가는 뒷문이 있었다. 소변을 보고 화장실에서 나왔는데 응접실 안에서 기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비다방 남자가 늦게 돌아온 모양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기타를 치고 있다니. 엄마가 알면 또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기타 소리는 응접실 문 바로 앞에서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 정도였기에 사실 안방에서 잠든 엄마가 기타 소리에 깰 일은 없었다. 그러자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고 지금이야말로 엄마 눈을 피해 제비다방 남자 옆에 갈 기회라고 생각했다. 시옷에겐 핑곗거리도 있었다. 아까 애니를 구해줘서 고마웠다고 말하면 될 것이다. 시옷은 엄마에게 들리지 않도록 문손잡이를 아주 천천히 돌려 응접실 문을 열었다. 문을 조금 열자 틈새로 기타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응접실 안은 전등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그러나 전면 창 커튼이 반쯤 열려 있었고 그 틈으로 달빛이 제법 환하게 비쳐들고 있었다. 희붐한 빛 속에 사람들의 윤곽이 보였다.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소파 앞 바닥에 앉아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그 사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윤곽만 봐도 두 사람은 서로 좋아했다. 시옷은 처음 들어보는 선율과 달빛과 다정하게 포개진 두 머리에 빠져들었다. 기타 소리에 간혹 사람의 흥얼거림이 끼어들었다. 기타를 치는 사람은 제비다방 남자였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도 그일까? 아니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편안히 휴식하는 또다른 사람일까? 그때 갑자기 빛이 터졌다. 응접실 천장의 샹들리에가 폭죽처럼 켜졌다. 기타 연주가 그쳤다. 두 머리가 떨어졌다. 기댔던 사람이 눈부신 듯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제비다방 남자는 놀란 눈을 하고 시옷 쪽을 보았다.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시옷 바로 뒤에 엄마가 서 있었다. 엄마의 손이 전등 스위치 위에 올라가 있었다. 엄마는 잠옷 바람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추워서 떠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제비다방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옆의 남자는 팔로 얼굴을 가린 채 뒤로 몸을 돌렸다. 제비다방 남자가 엄마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친구에게 사정이 생겨서 당분간 머물 곳이 필요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비다방 남자는 시옷의 집 응접실을 차지한 이후 처음으로 불량하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더러워.
엄마의 말에 남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일그러졌다. 엄마는 남자를 세워두고 응접실 전등도 켜둔 채로 시옷의 손목을 잡아채고 안방으로 돌아갔다. 엄마의 떨림이 시옷의 손목을 통해 옮겨와 어린 몸을 마구 흔들었다. 시옷은 뒤늦게 재채기를 터뜨렸다. 두 남자의 주위에 매캐한 냄새가 고여 있었다. 그날 오후 극장가에서 처음 맡았던 냄새와 같았다.
그날 우리는 물가를 걸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