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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허은실 許銀實
1975년 강원 홍천 출생. 2010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등이 있음. crazyhuh@hanmail.net
물려 입은 잠
이를 꽉 물고 사나봐요
교근이 뭉쳐 있어요
한의사는 침을 놓으며
힘 빼세요
저는 머리가 아픈걸요
다 연결돼 있으니까요
앞뒤상하좌우동서남북이요
자세가 나쁘면 중심이 틀어집니다
남의 옷을 오래 물려 입어서 그래요
선생님은 자신의 이 가는 소리에 깨본 적이 있나요
왜 어떤 말들은 잠의 바깥으로 도망쳐 나올까요
여기서 짧은 잠을 자고 간
누군가의 머리 냄새
이제 그만 시들어도 될까
우린 너무 급하게 늙었어요
누구요
누가 이토록 고단한 거요
내 것일 리 없다
이 천년 묵은 피로가
자고 나면 늘 어깨가 아프고
손바닥에서 아직도 철봉 냄새가 난다
따뜻한 바위에 눕고 싶어요
수세기 비애와 피로를 누이고
돌에 입을 씻고
돌 속으로
잠자러 가요
그러나 선생님 우리는
서 있습니다 볼링핀처럼
쓰러지려고
금이 가는 치열
앙다물고
우리는 오늘 일어납니다
내파
이 컵은 깨질 것이다
생각하는 찰나
컵은 손을 벗어난다
여름은 내내 미열이었고
물건을 자주 놓치는 날들이었다
나는 쓰려고 한다
깨지기 직전의 컵과
컵을 놓친 손에 대해
깨지려고 하는 것들에 대해
쓰려고 할 때
나는 존재하느라 으깨어진 것 같아*
유리잔은 조용히 땀을 흘렸다
모두가 고요한 오후였다
얼음이 쩍 갈라진다
갈라지는 순간의 얼음은
갈라지려고 한다
얼음이 자기를 가르는 오후
난간 위의 발이 떨어지는 순간
봉숭아 씨방은 이제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다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
여름 오후의 닫힌 동공 속
앰뷸런스 소리가 도시를 길게 찢는다
--
* 마르그리트 뒤라스 『이게 다예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