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다은 金多恩

『시사IN』 기자. 저서 『혼밥 생활자의 책장』 『마음은 굴뚝같지만』(공저) 등이 있으며 팟캐스트 ‘혼밥 생활자의 책장’을 제작하고 있음.

midnightblue@sisain.co.kr

 

박경희 朴卿喜

시인. 시집 『벚꽃 문신』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등이 있음.

rud4151@naver.com

 

양경언 梁景彦

문학평론가. 평론집 『안녕을 묻는 방식』 등이 있음.

purplesea32@hanmail.net

 

 

 

 

왼쪽부터 양경언 박경희 김다은 Ⓒ 신나라

왼쪽부터 양경언 박경희 김다은 Ⓒ 신나라

 

 

양경언(사회) 여름호 문학초점 시작해보겠습니다. 저는 오늘 사회를 맡은 문학평론가 양경언입니다. 좌담이 진행되는 오늘은 절기상으로 입하(立夏)를 앞두고 있어 계절의 변화가 두드러지는 때인데요, 팬데믹 상황이나 대선 이후의 향방을 각계각층에서 고민하는 등 우리 사회 역시 변화를 준비하는 움직임이 분주한 것 같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문학이 세상에 건네는 이야기를 예민하게 감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활동영역에 계신 분들이 문학을 접했을 때 어떠한 구체적인 사유를 마련하는지도 궁금한데, 폭넓은 이야기를 나눠주실 두분 모실 수 있어 기쁩니다. 한분씩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박경희 안녕하세요. 시를 쓰는 박경희라고 합니다. 이런 좌담 자리가 처음이라 무척 떨리네요. 기차를 타고 오는 내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지?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혼자 묻고 답하면서 왔습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김다은 『시사 IN』 기자이자 책 소개 팟캐스트 ‘혼밥 생활자의 책장’을 제작하는 김다은입니다. 저는 사실 계간지를 매번 챙겨 읽지는 못하고 이따금 궁금한 주제나 대담을 중심으로 읽어왔는데요, 워낙 문학계의 전문가들이 만들고 읽는다는 느낌이 있어서 섭외를 받았을 때 조금 긴장을 했습니다. 그래도 대중적인 관점에서 독자들을 대변해 질문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고요, 팟캐스트 진행하듯이 궁금한 것은 묻고 배우고 하겠습니다.

 

양경언 좋습니다. 세대와 연령과 영역을 넘나드는 여성들이 소설과 시에 대한 수다를 나눈다고 생각하며 시작해보겠습니다.

 

 

김지연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196_397

양경언 『마음에 없는 소리』로 시작해보면 좋을 듯해요. 2018년부터 그야말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해온 김지연의 첫번째 단편집입니다. 지방과 서울을 오가는 청년세대, 퀴어 커플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담긴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는데요, 감상부터 자연스럽게 나누어볼까요?

 

김다은 우선 표지가 작품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어요. 소설 속 인물들이 대부분 원색처럼 쨍하거나 테두리가 또렷하기보다 파스텔톤의 표지 그림처럼 흐릿하고 투명도가 높았거든요. 생을 마감한 인물부터 살아 있지만 마치 죽기 직전의 상태인 듯한 인물들, 누군가에게 져주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사는 사람 등 이들은 ‘투명인간’처럼 자신의 무게를 가볍게 만든 인물들로 느껴졌어요.

 

양경언 표현이 재밌어요. ‘투명인간.’ 한편으로는 땅에 발붙이려고 애쓰는 몸짓이 느껴지기도 하죠.

 

박경희 서울에서의 퍽퍽한 삶과 그로 인한 귀향, 결혼 압박, 잘 풀리지 않는 연애와 사랑 등 30대 여성의 현실적인 고민들이 많이 투영되어서인지 오늘 이야기할 소설 가운데 가장 쓸쓸하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읽었어요. 가령 「굴 드라이브」에서 ‘나’는 결혼 생각이 없지만, 삼촌은 조카의 말을 무시하듯 월 300만원짜리 일자리가 있다고 속여 고향에 오게 해요. 남자를 소개해 결혼시킬 작정인 거죠. 이처럼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말을 해도 다른 인물들이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느낌이 강하기도 했어요. 그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제게는 크게 다가왔고 소설이 툭 던져놓은 ‘마음에 없는 소리’가 큰 파장을 일으키더라고요. 바다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어요. ‘파랑’ ‘바다’의 이미지가 눈앞에 그려지기도 하고, 돌멩이를 던지면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이 떨어질 것 같고요.

 

양경언 배경으로 바다에 인접한 지역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풍경으로서만이 아니라 말씀하신 파장과 깊이를 확보한 소재로 나온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책에 첫번째로 배치되어 있는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은 옛 연인과의 여행을 회고하는 소설인데요, 둘이 나체로 편하게 놀 수 있는 개인 해변을 찾아 갔다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할머니를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나와요. “근처 조선소가 망한 뒤론 다 빠져나갔”다며 “나 같은 늙은이들뿐이”(19면)라는 할머니의 말을 통해 이전에는 산업적으로 흥한 지역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죠. 경제적으로 쇠락하면서 희미한 색채를 가진 지역이 되었다는 역사적·사회적 사연이 소설과 잘 엮여 들어가더라고요. 작가가 이런 순간의 장면을 단편의 규모에 맞게 포착하고 조명한 뒤 아련함을 남기는 데 능한 것 같습니다. 그 아련함이 배경이 되어버린다기보다 내 삶에서 지울 수 없는 순간에 포함된 장면으로 남는달까요. 지역이 기능적으로 쓰였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김다은 귀향의 목적지인 지역은 주인공을 환대하지 않는 곳으로 나와요. 철학자 레비나스(E. Levinas)는 집을 ‘자신이 원할 때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공간’으로 정의하면서 내가 정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음으로써 세계와 내가 건강한 거리감을 가질 수 있다고 했는데, 사실 이 작품 속 인물들에게 고향이나 집은 안정감을 주는 공간은 아니잖아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떠돌이처럼 표류하는 여성 인물들을 보고 있으니 씁쓸한 마음이 들어요.

 

양경언

양경언

양경언 그러면서도 씩씩하고 단단한 인물들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한발 한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도 하고 앞으로 할 것들을 마련해나가기도 하고. 「마음에 없는 소리」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반년 만에 때려치우고 취업에도 번번이 실패한 35세 여성 ‘선미’가 청년사업 신청 제한 나이에 걸려 지원금도 없이 식당을 개업하는 이야기예요. 친구들은 선미에게 다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라는 둥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고”(189면)라고 한마디씩 하죠. 하지만 곧 39세까지 청년으로 인정한다고 시 정책이 바뀌고 소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삶은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고 거기엔 아주 많은 공을 들여야만 한다”(194면)는 선미의 말로 끝나요. 나는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 거라는 식의 힘, 에너지가 분명히 느껴져요.

 

김다은

김다은

김다은 「결로」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일단 이 소설은 반전이 많고 참 치밀하게 짜여 있다 싶었어요. 피규어 중고거래를 하기 위해 낯선 동네에 가서 한시간 정도 판매자를 기다리면서 일어나는 일인데요. 슈퍼 앞에서 할머니들과 함께, 초반에는 잘 모르는 사이니 거짓말도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거기서 스미는 따뜻함이 인상적이죠. 그런데 결말에 가서는 주인공이 할머니가 선물로 준 카디건을 헌옷 수거함에 넣어버려요. 저는 이 대목이 거의 독자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져서 무척 충격적으로 다가왔는데, 조금 더 읽어나가면 주인공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가 설명돼요. 근데 그것도 충격적이에요. 할머니들에게 죽지도 않은 동생을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카디건을 보면 자신이 한 잔인한 거짓말이 계속 떠오를 것 같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거죠. 마지막에는 주인공이 샤워를 하고 나와 “물기가 마르니 몸이 가벼워지는 듯했다. 일일이 다 따져가며 기억할 힘이 조금 생겨나는 것도 같았다”(96면)고 해요. 인물들이 하는 마음에 없는 소리, 거짓말들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고안해낸 현실과의 ‘거리 두기’ 방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또 이 단편은 주고받는 대화에서 작가의 내공이 잘 드러나는데, 할머니들의 생생한 말들이며 유머가 좋아서 말을 잘 다룰 줄 아는 작가구나 싶었어요.

 

양경언 “다 큰 동생이 그걸 누나한테 사 오라고 시켜?” “언니예요.” “하여튼.” 이런 대화 곳곳이 재미있는데, 앞 세대의 고정관념을 살짝 건드리면서도 거기에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이 방식이 무척 자연스러워요. 작가가 삶의 리듬을 탈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리듬이 가라앉지 않게 계속 끌어올려주는 이런 대화의 매력은 「사랑하는 일」에서도 잘 드러나죠.

 

박경희

박경희

박경희 「사랑하는 일」의 주인공 은호는 레즈비언이에요. 은호의 정체성을 무시로 일관하는 엄마와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지 않느냐며 은근히 말하는 아빠, 대놓고 저주를 퍼붓는 할머니 등 은호가 자신의 가족, 그리고 파트너 영지와 맺어가는 관계에 대한 소설이죠. 은호와 영지가 가끔 유머를 담아 “헤테로들 하여튼”(226면) 하며 성소수자의 사랑은 그와 얼마나 다르고, 지난한 어려움들과 싸워야 하는지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는데요. 은호의 엄마 아빠, 동생 영호와 그의 아내, 은호와 영지의 관계까지 이 소설에서 그려진 다양한 관계들을 보며 저는 사랑이라는 것은 각자 다른 시선을 가지고 각자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느껴지더라고요. 범주화하면 동일한 집단이라고 상상하기 쉽지만, 각각을 들여다보면 각자의 사정과 다름이 항상 있는 거죠.

 

김다은 소설에는 두번의 ‘커밍아웃’이 나오는데요, 소설이 시작되자마자 은호가 엄마에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는 게 첫번째고, 곧이어 파트너 영지가 자신이 에이섹슈얼(무성애자)임을 은호에게 말하는 두번째 커밍아웃이 있어요. 성소수자 안에서 또다른 커밍아웃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단편은 가족에게 커밍아웃한 성소수자의 외부적 갈등만 아니라 자신의 동성 파트너와 겪게 되는 내부적 갈등도 흥미롭게 엮여 있는 거예요. ‘(동성 간의) 사랑하는 일’을 아주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이야기로 만들었어요. 더구나 이 단편에서는 ‘마음에 없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 마음에 있는 소리들을 직접적으로 발화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앞쪽에 포진된 단편들에서는 주인공들이 지방 출신, 성소수자, 여성 등의 정체성을 가지고 삶을 유지하는 전략으로써 자신의 농도를 투명하게 줄여가며 살고 있다고 생각됐는데 여기서는 아주 선명하게 내가 누구인지를 발화하는 인물이 나오죠.

 

양경언 근래 많은 작품들이 성소수자들의 섹슈얼리티를 다루는데 이 소설은 그런 실감의 차원에서 발군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 사실 은호 가족이 무척 화목하게 느껴지기도 했거든요. 우여곡절은 있지만 그래도 레즈비언 딸, 누나를 대하는 모습에서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집이구나 싶었고, 주인공 은호 역시 그런 것 같았어요. 그래서 오히려 은호라는 인물이 어떤 ‘안전한’ 체제와 규범의 작동 속에서 형성되었는지, 은호가 자신의 삶을 위해 그 규범을 허물어야 한다고 판단할 때 어떤 식으로 발버둥을 칠 수 있는지 소설이 잘 포착한 것 같았어요.

 

박경희 「작정기」를 읽으면서는 스스로를 많이 투영했던 것 같아요. 여행지에서 길을 알려주는 사람이 지도의 바깥을 가리키며 당신은 지금 여기서 벗어나 있다고 말하잖아요. 지도의 바깥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인물이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어요. 우리는 늘 줄타기를 하는 삶을 살고 있고, 그 속에서 방황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다보면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지도 바깥에 있고요.

 

김다은 저는 한편으로 내가 너무 젊은 여성들이 나오는 소설에, 그 인물들에 스스로를 이입하고 있나 싶기도 했어요. 「공원에서」는 여성으로서 느끼는 안전하지 않은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고, 여성이 폭행을 당하는 장면도 나오다보니 스스로 작품에 너무 밀착되는 느낌이 드는 거죠. 그럴 때는 소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굉장히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해요.

 

양경언 인물이 그려지고 사건이 전개되면서 세상에 대한 시야가 소설에 드러나게 되는데요, 그것이 소설 그 자체의 자의식에 갇혀 있는지 아닌지를 가늠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이를테면 소설이 지금 세상에 대한 해석을 시도할 때 그 이야기가 창조적 자기 망각이 섞인 폐쇄적인 프레임에만 속박되는지, 아니면 소설이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하는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인상을 남기면서 이어지는지 여부를 말하는 건데요. 후자의 경우 등장인물들의 의외성이 발견되기도 하고 서술자 그 자신도 알지 못한 어떤 면이 깨우쳐지기도 하면서 성찰의 폭을 넓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 경우 독자 역시 작품에 마냥 몰입하면서 자신의 인식을 굳히는 데만 소설을 활용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독서를 할 수 있을 테고요. 이런 어려운 역할을 해내는 작품을 예민하게 구별하는 독서가 필요하겠다 싶습니다. 김지연의 소설은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 속에서 만난 인물들과 지금 현실을 돌아보게 만들고, 다음으로는 무엇이 펼쳐질지 호기심을 가지고 함께 살펴나가도록 만들어주는 듯해 반가웠습니다.

 

 

이서수 『헬프 미 시스터』(은행나무)

 

196_403

양경언 다음 책 『헬프 미 시스터』로 넘어가볼까요? 이서수 작가는 최근작들을 통해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에 처한 여성 인물들이 엄마나 여동생 등 주변과 맺고 있는 관계를 활력있게 그려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작가의 두번째 장편인 이번 소설도 비슷한 분위기로 전개돼요. 사실상 가장인 주인공 수경은 사내 성폭력 피해를 당한 뒤 직장을 그만두었고, “네 명의 성인이 거주하는 집에서 단 한 명도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 없”(12면)는 채 넉달을 지내요. 소설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수경과 가족들이 각자 자차 배송, 뚜벅이 배달, 대리운전 등 플랫폼 노동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수경을 중심으로 주변인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조명돼요.

 

박경희 김지연 소설 「공원에서」도 그랬지만, 수경에게 일어난 일이 너무 마음이 아파요. 믿었던 상사가 가해자가 되는 사건인데, 모텔 주인의 신고로 미수에 그쳐서 다행이다 싶으면서 어쩜 여성들에게는 이런 위협이 항상 있는지 싶어요. 수경은 그 기억을 이겨내고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인물인데, 빚으로 집을 날린 아빠 천식이나 집에 틀어박힌 전업투자자로 항상 돈을 잃는 남편 우재 등 남자 인물들은 그렇게 천하태평 할 수가 없어요. 유일하게 이리저리 애쓰고 다니는 게 큰조카 준후인데, 그나마도 게임을 통해 불법적으로 돈을 벌죠. 여자친구 은지를 지켜준다고 하는 행동이지만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고요. 이 가족을 책임지는 수경이 너무 안쓰럽기도 하고, 왜 이렇게 답답하게 살까 싶기도 했습니다.

 

김다은 수경이 전형적인 ‘K-장녀’구나 싶었죠. 소설에서는 ‘직업’이라는 외부노동에 가려져 있지만 가사노동의 대부분도 수경이 담당한다고 짐작되죠. 소설의 시작만 해도 수경이 큰 상처를 입고 집에서 지내는 상황인데 요리를 하고 있잖아요. “우리…… 진짜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돼”(14면)라는 말도 수경 입에서 나오고요. 그런데 수경이 감당하는 짐이 너무 커서 그런지 오히려 주변 인물들이 좀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수경의 남편 우재나 아빠 천식이 그래요. 천식의 경우 아직도 스스로를 미남이라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중년 아저씨인데, 그런 사람 특유의 세상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그려져서 양가적 감정을 갖게 되는 거예요. 소설적으로는 이상하게 호기심을 일으키는 인물이 더 매력있으니까요. 하지만 더 좋은 캐릭터는 여러 사건 속에서 ‘자기답게’ 문제를 해결하고 능동적으로 변화하는 인물이라고 봐요. 그런 관점에선 수경의 엄마 여숙이 가장 좋았고요.

 

양경언 여숙과 친구 경자는 병원에서 청소노동자와 ‘나이롱’ 입원자로 만나죠. 여숙은 “서울과 지방에 각각 한 채씩 집을 갖고 있”(45면)는 등 계급적 격차가 나는 경자와도 아무런 열등감이나 부침 없이 자연스럽게 친해질 만큼 천진한 구석이 있는 인물이에요. 물론 수경은 같이 배달을 하겠다고 따라 나선 엄마에게 “여기 놀러왔어?”(31면)라며 답답해하지만요. 작가의 다른 단편 「미조의 시대」(『악스트』 2021년 3/4월호)에는 밑천 없이 집을 구하러 다니는 젊은 여성이 나오는데 그 속의 엄마 캐릭터도 여숙과 같은 해맑은 면이 있거든요. 딸이 지쳐서 집에 돌아오면 ‘나 시 썼는데 좀 볼래?’라고 말해요. 연배가 있는 여성들이 생활에서 발현하는 유연하고 귀여운 구석들을 작품이 포착하는 건데요. 이번 소설에서도 여숙과 같은 인물을 통해 가족의 생계를 담당하는 여성 구성원들이 상황에 억눌려 마냥 비참한 상태로 있지만은 않다는 걸 일러줍니다.

 

김다은 수경의 가족은 원한 것도 아닌데 전통적인 대가족을 이루며 살게 됐잖아요. 어찌 보면 무척 퇴행적인 모습이에요. 가난 때문에 다 같이 모여살고 있는 모습이 처음엔 신자유주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역행한 모습이라고 생각됐어요. 여숙과 천식이 롯데리아에서 키오스크를 다루지 못해 엉뚱하게 햄버거를 먹게 되는 장면이 상징적이죠. 근데 결말부에서 스마트폰으로 앱을 다룰 수 있게 된 여숙이 키오스크로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주문한 다음에 “양천식. 우리가 진화했나봐”(272면)라고 하는 거예요. 어찌 보면 소설 속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인물이 여숙인 거죠.

 

양경언 이 가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이 살기에는 어딘가 묘한 관계들이에요. 우재는 장인, 장모와 같이 사는 사위이고, 조카 준후도 있죠. 준후의 여자친구 은지도 뻔질나게 집에 드나들고요. 서로 눈치를 많이 볼 수도 있는 관계인데 자연스럽게 이어지려는 이들의 노력이나 서로 아끼는 모습이 비치면 또 흐뭇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작가가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포착하고 사연을 다뤄주고 싶어한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그래서 소설의 구성이 병렬적으로 배치된 것으로 읽히기도 했어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설명된 뒤 그다음 사람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전개되잖아요. 인물마다 품고 있는 각각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경희 동의해요. 인물들이 서로 부딪치거나 좀더 끈적하고 징그러운 면이 발견되는 식의 진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가족이 다 웃는 것으로 끝나는 결말이 조금 아쉬웠어요.

 

김다은 저는 보라라는 캐릭터가 아쉬웠어요. 보라는 초반에 동성(同姓)인 수경을 좋아하면서 자신을 퀘스쳐너리(성적 정체성을 탐색 중인 사람)로 정의하는데, 그러곤 서사에서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할 때는 젠더퀴어로 추정되는 파트너를 데려와요. 그런데 이 인물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너무 적었고, 그래서 갑작스러운 느낌이 들었어요. 보라의 배경과 선택들에 서사가 좀더 붙었다면 훨씬 더 퀴어적이고 사랑스러운 인물이 되었을 것 같거든요.

 

박경희 젊은 세대의 인물 중에서 은지가 인상적이에요. 가수의 꿈을 가졌지만, 가족에게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인터넷 채팅으로 미성년자 성매수자를 꼬여서 문화상품권이나 기프티콘을 챙기는 일상을 살고 있죠. 그러다 신상 폭로 협박을 당하기도 하고요. 정말 은지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있거든요. SNS에 올려뒀던 신상 때문에 자기가 했던 일들이 세상에 알려질까봐 두려워하는 은지를 보니까 너무 안타까웠어요. 우리 세대가 현재를 산다면, 이 아이들은 미래를 살아가야 해요. 저는 은지 또래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보니까 마음이 더 갔어요. 이 아이들이 잘 커줘야 하는데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고요. 소설보다 현실이 더 하거든요. 어른으로서 책임감이 들었고 안타까웠습니다.

 

양경언 은지가 무서울 때 움츠리기보다는 더 악을 질러버리는 캐릭터라서 매력적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위험에 처할 때 준후가 믿을 구석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여중생이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흥분하는 남자들”(221면)을 향해 “진실을 말해줄 테니 잘 들어. 나는 각오하고 하는 거야. 각오!”(217면)라며 일갈하고 이죽거리죠. 자기 과시적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길러지는 은지라는 캐릭터의 힘이 또 있어 보였어요.

 

김다은 십대를 포함해 작품 속 인물들이 모두 노동을 하고 있고, 또 노동하는 존재로서 사회에 구성되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여기서 작가가 플랫폼 노동이라는 소재를 무척 적극적으로 가져오는데 꼭 플랫폼 노동인 이유가 있었을까, 어떤 의미일까 궁금하더라고요. 두분은 어떠셨어요?

 

박경희 최근에는 주변과 관계를 맺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죠. 플랫폼 노동은 이처럼 뿔뿔이 개인화된 사회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나 역시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하고 있는데, 플랫폼 노동은 부수적인 수입이 필요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일”(341면)이라고 하는 작가의 말을 보니 익숙한 세계라서 더욱 잘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양경언 소설 속 가족이 전통적인 형태로 결합되어 있는 공동체랑은 다른데요, 이런 가족 구성원들이 따로 또 같이, 헐겁게 그러나 함께 움직이는 상황이 플랫폼 노동의 형상으로 등장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특히나 플랫폼 노동을 돌봄노동과의 연장선상에서 계속 제시하고 있어요. 시설관리 노동을 했던 여숙의 과거라든지, 다른 사람과 대면하지 않아도 된다며 시작한 플랫폼 노동에서 오히려 이웃의 사정을 살피게 되는 에피소드의 등장이 그렇죠. 또 우재나 천식같이 강인하고 단단한 육체노동자의 모습이 아닌 이른바 ‘남성성’이 결여된 사람들도 함께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플랫폼 노동에 대한 작가의 현실인식이나 해석이 수경네 가족 구성원들의 사연과 긴밀하게 엮인 문장이 더 나왔어도 좋았겠단 생각이 들어요.

 

김다은 그런 맥락에서 이 소설의 언어를 더 정제하면 한 가족을 중심에 둔 르뽀 기사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세대별·젠더별 플랫폼 노동사(史)라는 점에서 흥미로웠지만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을 조금 더 만나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또 ‘헬프 미 시스터’라는 여성 전용 심부름 앱이 중요한 장치였는데 기대와 달리 많은 기능을 하진 못한 것 같아요. 여성 연대랄지 기존과 다른 ‘시스터’들의 관계 맺기를 보여주는 단서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심부름 요청에 바로바로 반응하지 않으면 별점 깎기가 이루어지는 등 시장경제 논리가 적용되는 서비스라서 약간 혼란스럽기도 했어요.

 

양경언 동의해요. 소설의 제목이 ‘헬프 미 시스터’인 만큼 이것이 단지 앱의 이름으로만 내세워진 게 아님을 일러주는 이야기가 더 나왔으면 좋았겠다 싶습니다. 그래도 이 장편 덕분에 플랫폼 노동 현장의 일면이 가시화된 미덕을 새겨보자면, 작가가 이번 작품을 통해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꿈틀대는 가족서사, 움직이는 노동서사를 구성하는 인물들과 장면들을 짚어내준 듯해요. 활달한 인물과 생생한 장면을 포착하는 역량이 있는 작가가 다음 작품에선 어떤 전망을 마련해줄지 기대해봅니다.

 

 

박서련 『마법소녀 은퇴합니다』(창비)

 

196_409

양경언 여성 인물의 생동감 있는 이야기 혹은 여성 사이의 관계로부터 출발해 다양한 사람들과 접속되는 역동성에 대해서까지 대화가 이어졌는데요. 『마법소녀 은퇴합니다』로 넘어가볼까 합니다.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를 활용하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박서련의 네번째 장편입니다. 전작에서도 그랬듯이 여성들이 관계를 맺어나가면서 역사의 물결을 형성해나가는 서사를 귀엽고도 힘있게 그리는 데 능한데요, 이번 책에서는 ‘마법소녀’라는 콘셉트로 이야기를 풀고 있습니다.

 

김다은 근데…… 이렇게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만드는 건 반칙이 아닌가요?(웃음)

 

박경희 특히 재미있었던 것이 주인공의 나이였어요. 10이 되기 전 한수가 모자란 아홉수는 흔히 재수가 없다고 여겨지잖아요. 주인공도 스물아홉에 이르러 300만원의 카드빚 때문에 다리에서 떨어져 죽으려는데, 갑자기 누가 택시를 타고 나타나 “당신은 지금 죽을 운명이 아니”고 “마법소녀가 될 운명이”(18~19면)라고 말을 걸면서 소설이 시작되죠. 그렇게 다른 마법소녀 아로아의 도움으로 각성을 하게 된 ‘내’가 또다른 마법소녀 이미래의 위협에 맞서 세계를 구하는 내용이에요. 동양과 서양의 판타지적 요소가 잘 얽혀 있달까요? 여기에 「세일러문」으로 대표되는 마법소녀 만화의 캐릭터까지 풍부하게 들어 있고요. 정말 읽는 재미가 있었어요.

 

김다은 작가의 말을 보면 마법소녀 장르에 대한 애정이 무척 크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어요. 일단 저는 이 소설에서 여성 인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가 무척 좋았고, 페미니즘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위문화 콘텐츠인 마법소녀 장르를 훌륭하게 패러디하면서, 문학의 성(性)이 전통적으로 남성으로 대표되어왔던 맥락에 맞서 마법‘소녀’여야 한다는 것을 유의미하게 환기해요. 서로의 상처를 적극적으로 치유하면서 여성이 어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그 잠재성을 퀴어하게 풀어내고요.

 

양경언 소설 속에서 마법소녀가 각성하기 위해서는 ‘트리거’가 필요하다고 해요. 그런데 그 트리거는 대부분 결핍입니다. 가령 “부모님을 잃은 아이가 사고를 미리 알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끈질기게 생각하다가 예언의 마법소녀가 되는”(114~15면) 것처럼요. 그러니까 이 소설은 취약성이라는 것을 감추거나 어떻게든 보완하고 채워야 된다는 식이 아니라 취약성 자체가 다른 이들과 연결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고, 취약성을 통해서 그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다는 식으로 발상을 전환시켰죠. 자살하려는 여성으로부터 소설이 출발하는 것도 젊은 여성들의 자살률이 심각한 한국사회의 현실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 데서 온 상상력 같아요. 젊은 여성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래도 어쨌든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하고 싶은 작가의 간절함이 반영된 듯합니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라는 발랄한 제목을 접하고 귀여운 소설을 예상하면서 읽었는데 단지 유쾌하기만 한 차원을 넘어서고 있어 감격하기도 했어요.

 

김다은 이 소설은 확실히 여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때의 ‘능력’이라는 것이 ‘여성들에게는 이만큼 잠재력이 있습니다!’ 하는 텅 빈 구호가 아니라, 각각의 인물들이 자신만의 구체적인 마법력을 갖고 그걸 발휘해 세상을 구한다는 점이에요. 대개 문학에서 ‘마법적인 것’이 비유나 은유로 활용되어온 점을 생각해보면, 마법소녀가 누군가의 농담에나 나오는 존재가 아니라 ‘전국마법소녀협동조합’에도 가입하는 등 실재한다는 설정이 제게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주었어요. 없는 취급을 하지 않고 ‘진짜 있다’고 말해주는 것 말이에요.

 

박경희 마법을 가지려면 소중한 무언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설정에서, 나한테 가장 소중한 게 뭘까 질문을 던져보게 되는 점도 재미있더라고요. 그리고 세계가 처한 위협이 기후변화고, 주인공이 죽으려고 했던 까닭은 비정규직을 전전하다가 일이 끊겨서 카드 리볼빙을 막지 못해서이고, 그래서 주인공의 마구(魔具)는 신용카드라는 웃기고도 슬픈 일이 일어나는데요. 이런 사회적인 문제점을 자연스럽게 던져두고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모습에서 소재를 다루는 힘이 세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김다은 이미래를 저지하는 큰 결투를 치른 뒤 소수였던 기존 마법소녀들의 힘이 줄어들고 그 힘이 일반인들에게 조금씩 나누어지는 것으로 세계의 모습이 바뀌죠. 그렇게 우리가 새로운 전선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결말도 이 작품다웠어요. 강력한 힘을 독점한 한명의 영웅이 아니라 성실한 생활의 달인들이 세상을 구하는 거죠.

 

양경언 특히 세계멸망의 위협이 기후위기라면 누구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거죠. 저는 주인공의 마법, 그러니까 ‘값을 치르는 마법소녀’의 등장도 의미심장했어요. 주인공의 마구인 신용카드는 뭔가를 지불하고 그것만큼 얻는 일종의 계약이잖아요. 이렇게 자유주의 계약 주체가 주요하게 형상화된다는 것이 현 사회상을 반영한 것 같기도 해요. 좀더 연결 지어서 보면 ‘준 만큼 얻을 수 있다’ ‘어떤 기여가 있어야 성원권을 획득한다’는 식의 시대정신이랄까요. 우리가 함께 뭔가를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점이 발랄한 힘으로 다가오면서도, 한편으로 그런 주체를 마냥 지지하기에는 고민이 됐어요. 작가의 최근작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민음사 2022)이라는 소설집에서도 엄마나 나이 든 여성을 바라볼 때 혹은 젊은 여성이 스스로를 생각할 때 오롯이 개인주의 혹은 자유주의 주체를 전제하는 면이 있다고 느꼈거든요.

 

김다은 “가능한 한 폐 안 끼치고 죽는 방법 없을까?”(8면)가 소설의 첫 문장이에요. 그러면서 자기가 300만원 때문에 죽는 것을 사람들이 몰랐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너무 부끄러우니까,라고 하죠. 요새 사람들이 가난을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로 인식하는 현상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아로아라는 인물은 어떻게 보셨어요? 아로아가 갑자기 사랑고백을 해서 깜짝 놀라긴 했지만 천연덕스러운 모습이 꽤나 사랑스럽기도 했습니다.

 

박경희 아로아는 차림새도 그렇고 무척 독특하죠. 상냥하게 주인공의 운명을 일깨워주는가 하면 주인공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마법소녀라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해도 꿋꿋하게 웃는 얼굴로 “다시 해봐요!” “되고 있잖아요. 천잰데?”(80~81면) 하고 격려해요. 그러다 자신의 예언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자 어디론가 훌쩍 사라지더니, 수습한답시고 절절한 사과의 편지를 남기기도 하고요. 약간은 얼빠진 것 같기도 하고 우왕좌왕하는 캐릭터인데 주인공의 모험을 이끌기도 하죠.

 

김다은 말씀처럼 아로아가 급하게 떠났다가 다시 등장하는데 그때 “나 보고 싶었어요?”(105면)라고 해요. 이렇게 유치할 수가 없는데 겪어보고 싶게 낭만적으로 그려져 있더라고요.(웃음) 또 아로아가 프릴이 달린 ‘여성스러운’ 옷을 입고 있고 말투도 상냥해서 고정관념을 가지기 쉽지만, 주인공에게 먼저 고백을 한다든가 주인공을 끝까지 지켜주고 끌고 가는 등 성별 이분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물인 것도 매력적이었고요.

 

양경언 박서련의 단편들을 보면 ‘견디는 여성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가령 「기미」(『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라는 소설에서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죠. 아로아는 예언 능력을 가진 마법소녀로 세계종말과 같은 무시무시한 일이 앞으로 어떻게 벌어질지 알고 계속해서 현재를 ‘견디는’ 인물로 읽혀요. 그런 점에서 박서련이 자주 그리는 인물의 어떤 판타지적 버전이 아로아가 아닐까 싶기도 했어요.

 

김다은 『헬프 미 시스터』의 수경을 보면서 약간 답답했던 까닭이 다른 여성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계속 누군가의 언니, 이모, 숙모로 책임을 지고 돌봄을 수행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어서였거든요. 근데 아로아와 주인공은 낭만적 관계 안에서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거나 받지 않아서, 그래서 ‘숨쉬기 편안한’ 관계로 느껴졌어요.

 

양경언 ‘은퇴합니다’가 제목인 것도 흥미로워요. 이제 얼마든지 또다른 방식으로 움직여갈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히기도 하거든요. 마법소녀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능력이 마냥 희생적으로 다른 이들을 위해서만 쓰이는 게 아니라 저 자신을 살리고 돌보는 데에도 쓰인다는 것, 결국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스스로를 변형시켜 앞으로 나갈 때 이로운 방향이나 새로운 시작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은퇴’라는 종결의 의미가 담긴 표현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겠다 싶어요. 각자가 이렇게 움직일 때, 상호의존적인 관계 역시 균형감 있게 형성되어 서로를 살리는 길을 계속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작품 속 인물들이 알리고자 애쓰는 게 느껴집니다. 작품의 제목과 소재가 던지는 환상적인 감흥의 기저에 이처럼 현실의 문제들을 넘어서고자 하는 기운이 풍부하게 충전되어 있는 작품이에요.

 

 

김명기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걷는사람)

 

196_413

양경언 이제 시집으로 넘어가볼까요. 김명기의 세번째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입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활동을 시작해서 시인의 실제 삶과 체험을 서정의 한 축으로 삼는 작품세계를 구축해왔습니다. 아까 김지연 소설에서 출향했다가 귀향하는 여성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도 했는데 이 시집 역시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의 삶과, 유기동물 구조사로 일하는 모습이 생생히 드러나 있습니다.

 

박경희 김명기 시인은 온몸으로 시를 써요. 그의 삶이 시가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다고 할까요. 시인은 오호쯔끄해까지 나가는 원양어선을 타고 일하다가 고향인 경북 울진으로 돌아왔어요. 고향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고 해요. 제가 시인을 알게 되었을 때는 중장비 기사를 하고 있었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일하는 공간이 딱딱하고 차갑고 자신을 억누르는 느낌이 든다고 했어요. 딱딱한 기계를 움직이며 일하는 모습이 스스로 보기 싫고 힘들다고요.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산림감시원이 됐어요. 산을 돌아다니면서, 갓 피기 시작한 새싹 봉오리, 듬직하게 서 있는 나무의 마음을 읽으며 변화하는 자신을 보게 된 것 같아요. 그다음에 간 곳이 유기동물 보호소예요. 거기에서 사람에게 폭력을 당하고, 버려지고, 어떻게 감당이 안 되어 안락사시키는 동물들을 목격하며 삶과 죽음을, 그 경계에 서 있는 자신을 본 거예요. 어쩌지 못하는 동물들을 보면서 그렇게 괴로워했어요. 시를 쓰는 것도 너무 힘들어했지만, 저는 그가 쓴 시를 읽고 깜짝 놀랐어요. 이 사람은 정말 온몸을 다해 시를 썼구나, 삶을 썼구나, 모든 감각을 다 열어놓고 영혼까지 가져다가 시를 썼구나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시집을 읽으면서 내내 아팠고, 쓸쓸했으며, 두근거렸어요. 슬픔과 사랑이 이 시집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아니까.

 

양경언 특히 어떤 시가 인상 깊으셨어요?

 

박경희 「공터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라는 시는 수녀원 뒷산 공터에서 만난 개 파티마를 미국에 입양 보내는 이야기예요.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몰골로 갓 낳은 새끼를 돌보던 파티마는 시인이 “젖 뗄 무렵 새끼들을 안고 나서자” 그때서 “저도 데려가 달라고 처음으로 짖”었다고 하죠. 말 못하는 개가 마치 자기 새끼부터 구하는 게 순서라는 걸 아는 듯한 장면을 포착하는 데서 시인의 측은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요. 「절망을 견디는 법」에서는 “보증 서 준 친구가 야반도주를 하고/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은 이야기가 나와요. “통장에서 빚이 빠져나가는 날이면/세상 있는 모든 욕을 끌고 와/저주를 퍼부었”는데, 몇해가 지난 어느날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지 않는 거예요. 돈을 모두 갚은 거죠. 드디어 끝났다, 그저 후련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시인은 “그제야 도망간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져요. 그에게 “보내는 욕설과 저주의 힘으로/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고 “이제 나는 원래 그렇게 살던 사람 같”은데 다 끝나고 나서야 “너는 그 많은 욕과 저주를 어떻게 견뎠을까” 하고 친구의 삶을 뒤돌아보는 거예요. 이렇게 시가 아파요. 사람이 구석에 몰리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조금의 여유가 생기자마자 주변을 봐요. 최근에 울진에 산불이 나 시인의 집이 탈 뻔했어요. 집 옆 조릿대 밭에 불이 붙어서 활활 타니 시인도 감당이 안 되어 포기했는데, 갑자기 헬기 한대가 날아와 물을 쏟아 부었다고요. 시인의 집은 괜찮았지만, 집을 잃은 분들의 소식을 듣고 새카맣게 탄 산과 들을 보며 무척 괴로워했어요.

 

김다은 산불 났을 때 울산 현지 취재를 갔었는데 그때 모습이 떠오르네요. 나무가 다 탔는데 멀리서 보면 위가 파래요. 보면 살아 있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저 나무들 살았나봐 하는데 다시 보면 밑둥이 새까매요. 불이 밑으로 번져서 그런 거죠. 사실은 다 죽은 나무들이에요. 말씀을 들으니 시인의 모습이 푸른 잎을 위에 달고 있지만 밑둥은 다 타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삶을 살아낼 것인가 고민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양경언 스스로 끊임없이 통증을 느끼면서 구성하는 시인의 현실인식이 인상적이에요. 자기 몸에서 느끼는 통증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알게 되는 주변의 통증, 앓고 허물어진 것들에 마음이 갈 수밖에 없어요. “닮는다는 건 먼 훗날의 슬픔을 미리 보는 일”(「닮은 꼴」)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내가 아픈 만큼 아픈 다른 누군가, 그렇게 서로가 닮아 있기 때문에 닿아 있는 것, 이런 얘기들을 계속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와 닮은 것에 닿으려는 마음이 강하다보면 닮지 않은 것과의 어떤 경계나 배타성이 만들어질 수도 있잖아요. 저는 시인이 이 경계를 어떻게 구축해갈까에 집중해서 시를 읽어나갔어요. 그러다보니 내 시선에 상대의 시선이 맞붙는, 그래서 두 시선이 동등하게 자리하는 시편들이 눈에 띄더라고요. 이는 닮은 존재 앞에서 나와 그를 완전히 포개놓는다거나 너무 마음 아파한 나머지 어떻게든 끌어안으려고 하는 태도와는 다른 것이죠. 「검은 개」는 유기견 보호 활동을 하는 중에 만난 개를 그리는데 “버린 놈보다 비좁은 견사에 가둔/너는 더 나은 놈이냐고 묻는 것 같다”라고 하죠. 이렇게 내가 개를 보는 시선과 함께 개의 시선을 통해 나를 보게 되는 상황이 시에 만들어지고 “폐허 아닌 폐허에서 우리는 서로 낯을 익힌다” 같은 진술을 통해 나와 개가 동등한 관계로 그려져요. 「죽은 개를 치우다」도 죽은 개의 모습을 통해 사회의 폭력성이 드러나는 한편, 그 폭력으로만 환원되지는 않는 이 개의 존엄 같은 것이 균형 있게 그려져 좋았습니다.

 

김다은 「목수」라는 시도 좋아요. “사람들이 몰려들고 구급차가 달려올 때 마디 굵은 손으로/바닥을 짚으며 일어서려던 사람” 같은 구체적인 묘사가 무척 힘있고 ‘살고자’ 한 행위가 생생하게 담겨 있어서 고맙게까지 느껴졌어요. 누가 삶을 쉽게 포기하겠어요? 살고 싶다는 절박한 마음을 시인은 허투루 보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양경언 공사장에서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순간의 풍경을 스케치한 시인데, 사고를 당한 이의 안타까운 모습만 조명하지 않지요. ‘나’와 점심을 함께 먹을 때 그가 했던 말, “못질할 때 말이여 첫 대가리만 때려보면 알어”라는 대목에서는 노동자의 단단한 자부심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이런 디테일이 시인이 전하는 슬픔을 복합적으로 만들어요.

 

김다은 유기동물 이야기, 무참하고 참담한 죽음,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약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되는지라,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그려낼 것인가가 시집에 있어 무척 중요한 문제였을 거예요. 너무 윤리적·당위적으로 접근하면 문학성 자체가 흐려져버리는 일이 생기기도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실려 가는 개들」에서 유기견들이 트럭에 실려서 가는 마지막 장면 “낡은 트럭의 속도만큼 숭고는 멀어지고/어느 몸뚱이에선가 창살 밖으로 튀어나온/때 묻은 털깃이 한 올 한 올 떨리고 있다”에서 시인이 의도적으로 유지한 거리감이 인상적이었어요. 뭘 말하고 싶은지 명확하게 느껴지면서 대상을 비참하게도 동정하게도 만들지 않고 과다하게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 시선이 빛나더라고요.

 

양경언 유기동물과의 만남에서 누가 누구를 ‘구조’하는가 하는 질문도 이 시집이 던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소위 ‘구조’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존재를 우리는 그간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있었는가, 시혜적으로만 접근하지는 않았나 하는 문제까지 모두 포괄한 질문이 시의 기저에 있는 것 같아요.

 

박경희 「유기동물 보호소」의 마지막 구절 “슬픔은 다 같이 슬퍼야 견딜 수 있다”에서는 장례식장 풍경도 그려지더라고요. “흰 슬픔 검은 슬픔 누런 슬픔/큰 슬픔 작은 슬픔/슬픔이 슬픔을 알아”보는 깊은 애도가 느껴지고요. 좀 전에 양경언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본인을 투영하면서 나도 슬프고 너도 슬프고 다 같이 슬퍼야만 이 세계의 비극들을 견딜 수가 있는 거죠.

 

양경언 그런데 계절과 자연을 바라보는 시편들이 묶인 4부에서는 시인의 저력과 독특한 시각이 충분히 발휘되지는 않은 듯해요. 가령 1부의 「청량리」 같은 시에서는 “인도에선 부랑아도 신비롭다던 말”을 한 사람의 면전에 “부러우면 신비롭게 살든가” 하고 냉소한 자기 자신을 “혀끝에 담지 않고 뱉어낸 말에서/모든 비하가 기어 나온다”고 한번 더 돌아보는 성찰을 하잖아요. 그런데 4부의 시편들은 그런 꼿꼿한 시선보다는 자연에 안겨버린 감상이 드러나는 것 같더라고요. 같은 자연을 다루어도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거라는 기대가 있어서였는지 아쉽다고 느꼈습니다.

 

김다은 3부까지는 부마다 주제가 선명한 편인데 4부는 다양한 소재를 다루기도 해서 집중도가 조금 떨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청량리」 얘기가 나왔는데 1연에 “익명의 절망이 모여 이런 평온한 풍경이 되다니”라는 구절이 있잖아요. 저는 이 구절이 시집 전체를 설명하는 말 같아요. 각각 너무나 고통스러운 절망의 사연들이 모여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담담한 풍경이 되더군요. 그 풍경들을 시의 언어로 다시 빚어낸 시인의 마음이 정말 깊고 애절했습니다.

 

 

황미현 『이렇게 가벼운 주머니』(천년의시작)

 

196_419

양경언 다음으로는 황미현의 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렇게 가벼운 주머니』라는 시인의 첫 시집이에요. ‘이렇게 가벼운’이란 표현을 시집 전체의 제목으로 내세웠으면서도 “흔들린 일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자유가 깃들 수 있었을까”(5면)라는 ‘시인의 말’을 보면, 첫 시집을 내면서 이룩한 해방감이 단순하게 성취된 것만은 아니라는 인상을 남깁니다. 주위를 발견하고 관계 맺는 방식이 빚어내는 색채가 김명기 시집과 완전히 달라요.

 

박경희 빛, 꽃, 봄, 햇살, 햇볕, 씨, 씨앗, 색깔 같은 단어들이 시에 자주 등장해요. 그래서인지 시인이 생명력을 화두로 삼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특별히 재미있었던 건 제목이었어요. ‘배추가 소란스러울 때’ ‘물수제비는 언제 나는가’ ‘황소가 춤출 때’ ‘해바라기 육아법’ 등 평범한 사물을 톡톡 튀게 표현했더라고요. 특히 「해바라기 육아법」은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염려와 근심들이 해바라기 씨앗처럼 얼굴에 빼곡히 박혀 있다며, 나를 키운 엄마의 얼굴까지 연결을 시켜요. “나는 엄마의 얼굴에서 자랐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으로 남지요. 다만 시집에서 형상화된 생명력이 대부분 자궁에 대한 이미지나 은유로 수렴된다는 점이 조금 걸렸습니다. 근본적으로 탐구해보겠다는 시인의 의도는 알겠지만, 다른 방식도 담겨 있으면 더 좋았겠다 싶었죠. “은밀한 달의 우묵한 뒷모습”(「망설이는 구석」)이나 “초승달은 밤마다 한쪽 눈에만 밑줄을”(「밑줄」) 그리는 것처럼 달이 상징하는 바도 같은 맥락 위에 있어요.

 

김다은 「더도 덜도 아닌 딱 한 칸」의 “한 칸”도 “형제들 다 거쳐 간/(…)/딱 한 칸”으로 자궁을 가리키고 있고 「봉투의 힘」의 “봉투”도 마찬가지로 작용하죠. 저도 비슷한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양경언 기존에 익숙하게 활용되던 상징이 시집 곳곳에서 보이기는 해요. 하지만 읽어나가다보면 시인의 큰 강점은 주변을 탐구하는 시선에 있는 것 같아요. 길고 깊게 들여다보는 시선을 가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눈앞에 컵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걸 두고 컵이구나, 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 적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컵이 가지고 있는 모종의 시적인 순간을 발견하고, 그렇게 관념을 뚫고 실제 이 세계의 생명력 혹은 어떤 쾌청한 에너지가 솟아나게 만들어요. 「익숙함에 대한 반론」이라는 시는 “익숙”이라는 단어를 계속 파고들어가면서 우리가 익숙하다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사실 미숙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짚어내요. “한 번도 배우지 않은 생을/하나의 이름으로 익숙하게 불리며 산다”고, 그러니까 ‘익숙’이 되기 위해 ‘미숙’이 기여하고 역할했음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보게 되면 무언가 다른 것들이 보일 거라는 시인의 메시지처럼 들리거든요. 이는 시인의 시 쓰는 방식을 일러주는 시편으로도 읽혀요. “씨앗을 묻어 놓고/미숙하게 싹을 기다린다.”라는 구절도 그렇고요. 그런 방식을 통하면 「양동이」 같은 시가 나오는 것 같아요. “양동이라는 말 참 좋아요”라는 아기자기한 맛이 우러나오는 구절로 시가 시작하는데요, ‘양동이’라는 말 자체도 음성적인 자질 덕분에 동글동글하게 들리니 재밌잖아요. 그런 양동이는 “찌그러뜨려도 좋고/멀리 집어 던져도 좋”죠. 그렇게 양동이를 이렇게 저렇게 살펴보다가 시인은 “양동이의 안쪽이 궁금”하다고 합니다. 그 안에는 “무지개를 구겨 넣”을 수도 “하루치 햇살”도 “밤의 어둑함”도 다 들어갈 수 있어요. 사물이 낯설게 그리고 새롭게 발견되는 순간이죠. 시인은 이렇게 단어 하나로부터 어떤 사물의 ‘안쪽’을 발견하는 방식, 그 내면의 무궁무진함을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김다은 말씀하신 ‘미숙’의 긍정성을 바라본 작품으로 「말랑말랑한 관계」가 떠올라요. 미숙한 것을 부족하고 결핍된 것이 아니라 아직 ‘말랑말랑’하니 부드럽고 유연한 것으로 그려냈죠. 이 시는 “아이와 노인이 서로/말랑말랑한 말을 떠먹여 주고 있다”라는 구절로 시작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 가는 다 자라지 않은 말들//하나로 뭉쳐지는 것이 아닌/한쪽으로 옮겨 붙는 저 말랑말랑한 관계”라는 문장으로 끝이 나는데요. 이들은 “이빨 없는 말들” “혀가 없는 말”을 쓰기 때문에 서로 “다정하게/녹여 먹”을 수 있습니다. 연대기적으로 수직관계에 있는 존재를 소통할 수 있는 내 옆의 존재로 그려낸 시라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박경희 저도 인상 깊게 읽은 시예요. 노인이 되면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죠. 그렇게 약한 존재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말랑말랑한 관계를 맺어요. “모두 이빨이 없는 말들,/혀가 없는 말이라 다정하게/녹여 먹는다”라는 대목은 그림이 그려지는 듯해요.

 

김다은 「싱거운 공중」이라는 시도 재밌었어요. “짠맛은 가장 무거운 무게이고 물은 가장 가볍”다고 하죠. 소금같이 무거운 것들이 밑으로 쭉 내려앉고 나면 공중으로는 “싱거운 물만 길어 올리”게 되고요. “무거운 물을 꽃피우는 일엔 싱거운 공중이 있습니다.”라는 마지막 구절에서는 소금기 없이 공중에 흩뿌려지는 물방울같이 가벼운 정서가 환기되고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어요. 그런데 아까 잠깐 자궁에 대해 이야기도 나왔지만, “그때 엄마는 초봄이었나 늦봄이었나/아직 꽃 피어 있을 때”(「무의식에 관하여」) 같은 구절은 다소 상투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양경언 긴장감 있게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확 풀려버리는 시편들도 있어요. 「울고 웃는 연기」는 장례 과정을 살피는 이야기예요. 바로 앞의 시 「환복하는 나비」를 보면 시인은 죽음을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으로 가져오는 것을 중시하는 듯 보이거든요. 그래서 그 뒤에 나오는 이 시도 앞서 나온 시의 연장선상에서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부분을 포착해주려나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재를 물속으로 밀어 넣는 것으로/장례는 끝이 나지만/연기는 검게 울고 또 희게 웃는다”라고 나른하게 마무리돼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긴장된 물음이 남겨지기보다는 사람들이 울고 웃듯 죽음 역시 울고 웃으며 제 갈 길을 간다는 식으로, 삶과 무관한 자리에 죽음을 남겨놓거든요. 소재 자체가 무겁다보니 조심스럽게 완성된 시였을까 싶기도 했고요. 설령 가볍게 느껴질지언정 생명력을 경쾌하게 포착하는 시인이라면 무게가 남다른 소재에서도 다른 중력을 작동시킬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박경희 첫번째 시 「고욤나무」에는 시인이 시집 전반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 같아요. “감나무가 죽으면/그 옆에서 삐쭉 고욤나무가 새로 돋았다.” “꽃 진 자리에 삐죽 돋아나는 초록의 미안함들”과 같은 구절이 나오죠. 새로움이 솟아나는 곳에는 슬픔같이 깊이 묻힌 다른 것이 있다는 거예요. 잘린 부분에서 가지가 나오고 싹을 틔우고 꽃이 피고 지고, 그렇게 되풀이되는 과정을 다루면서 끊임없이 생겨나고 반복되는 희망을 찾아보려는 것이 시인의 마음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양경언 시집이 「고욤나무」로 시작해 「해바라기 육아법」으로 끝나잖아요. 목차만 봤을 때는 시인이 뭔가를 길러내는 상태만을 상상했는데, 시의 관심은 자신이 길러지는 데 있었어요. 그러니까 길러진 존재인 동시에 또 무언가를 길러내기도 하는 자신에 대한 시가 이 시집에 실려 있는 거죠. 씨앗에 기원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동시에 그 씨앗이 여물도록 스스로 움직이는 과정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시편들 사이로 보입니다.

 

김다은 두분 말씀에 동의해요. 덧붙이고 싶은 것은 희망이라는 게 어찌 보면 참 쉽기도 하고 무척이나 어렵기도 할 텐데, 독자로서 ‘이것은 희망을 말하는 것이야’라고 다가오는 면이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는 점이에요. 씨앗, 새순과 같은 편안한 비유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언어나 세계를 낯설게, 새롭게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죠.

 

박경희 씨앗도 다 같은 씨앗은 아니겠죠. 누구에게는 문젯거리일 수도 있고 한쪽이 찌그러지거나 돌연변이처럼 이상하게 자라는 씨앗일 수도 있어요. 씨앗 하나로 ‘희망’까지 다른 여지없이 연결되면 놓치는 것들도 많을 거예요.

 

양경언 희망이 간단하게 구해질 수 있는가, 그렇게 구해진 그것을 희망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하는 차원의 질문 역시 황미현 시집을 읽는 중에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소진되지 않는 어떤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여기에서 뭔가 시작해보겠다, 움틔워보겠다 하는 첫 시집만의 의지를 읽을 수도 있겠고요. 첫 시집이 도약의 ‘가벼운’ 몸집을 담았다면 그 도약은 일상의 숱한 떨림과 또 마주하고 버텨내야 할 거예요. ‘씨앗’을 키워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과 숨이 깃들어야 하는지가 응축된 ‘주머니’도 시인의 이후 활동 속에서 펼쳐질 수 있길 바라봅니다.

 

 

조온윤 『햇볕 쬐기』(창비)

 

196_424

양경언 ‘희망’이라는 커다란 말이 불쑥 오갔는데요. 조온윤의 『햇볕 쬐기』도 그런 희망과 닿아 있는 ‘다음’, 혹은 내일이나 이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편에 선 시집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편안하거나 마냥 씩씩하기만 한 방법은 아니고 수행을 하면서 ‘잘’ 가보겠다는 의지가 비치기도 합니다. 2019년에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의 첫 시집입니다. 어떠셨어요?

 

김다은 사물들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조심스럽고 다정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시집 초반의 「묵시」 같은 시를 보면 “식탁 위에는 햇볕이 한줌 엎질러져 있어/(…)/두 손을 컵처럼 만들어 햇볕을 담아봅니다//이건 사랑받는 말일까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어봐요. 그래서 ‘햇볕 쬐기’라는 제목 자체가 시인이 이 시집을 통해 보여줄 어떤 태도겠구나 짐작했지요. 실제로 빛이 쏟아지는 것처럼, 제가 그 따뜻한 빛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시집을 읽었고요.

 

양경언 ‘햇볕 쬐기’라는 표현 자체에도 이미 모두가 쬘 수 있는 햇볕이란 의미에서 평등한 나눔에 대한 상상력이 깃들어 있죠. 「묵시」에서도 평등하게 골고루 나누는 가치에 대해서 시인이 고민하고 있구나 싶은 구절이 있었어요. “내가/창가에 앉아 있는 날씨의 하얀 털을/한 손으로만 쓰다듬는 사람인가요?/그렇지 않습니다” “왼손과 오른손을 똑같이 사랑합니다”와 같은 구절이 그러한데요. 몸의 모든 기관을 골고루 움직여야 자신이 하는 일이 편향적이지 않게 이뤄진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 같아요. 이것은 햇볕이 어디에나 가닿는 방식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해요. 또 햇볕이 내리쬘 때는 요란스럽지 않죠. 그런 평등한 나눔이 침묵의 힘으로 충족되면서 이루어진다는 의미도 될 것 같아요.

 

김다은 “매일 빠짐없이 햇볕 쬐기/근면하고 성실하기/버스에 승차할 땐 기사님께 인사를 하”기(「중심 잡기」) 같은 구절도 있는데, 이렇게 묵묵히 삶을 유지해나가는 태도와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양경언 역으로 그렇게 묵묵히 삶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은 세상이라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네요.

 

박경희 저는 예전에 본 단편영화가 생각났어요. 「햇빛 자르는 아이」(1998, 김진한 연출)라는 작품인데, 부모가 방문을 잠그고 일하러 나가면 여자아이가 동생을 돌봐요. 그런데 빛이 새어 드는 창문 너머로 아이들의 노는 소리가 들려 동생을 업은 채 밥상을 밟고 올라가 밖을 내다보다가 그만 넘어지고, 그 사고로 동생이 죽고 말아요. 햇빛이 싫어진 아이는 무정하게 햇빛을 자르기 시작하는데, 그 장면이 떠올랐어요. 영화에서 햇빛은 희망을 상징하고 있지만, 그걸 좇는 이들은 애처롭죠. 『햇볕 쬐기』에도 끊임없이 빛이 나와요. 시인은 여러 장면을 통해 시집 전체에서 빛을 소중히 다루고 있어요. 하지만 그런 모습은 한편 빛에 닿지 못한 자신은 얼마나 힘든지, 빛을 놓치고 싶지 않아 어둠 속에서 나오려 하는 듯한 면도 담고 있죠. 시인의 이름도 따뜻함〔溫〕이 깃들어 있는 ‘온윤’이라 묘하기도 했습니다.

 

김다은 그렇게 말씀하시니 정말 애틋하고 슬프네요.

 

박경희 잡히지 않는 빛을 잡으려고 애쓰고, 잡히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다고 믿으며 끊임없이 달려가는 사람 같더라고요. 그런 맥락에서 ‘수행’이라는 말씀을 하신 게 아닐까 싶어요. 그냥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 계속 묻는 거죠.

 

양경언 사실 빛의 속성은 만져질 수 없다는 데 있잖아요. 만져지지 않는 그것을 어떻게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진짜란 무엇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는 이런 질문들 역시 타래로 품고 있어요. 「원주율」에서는 헌혈하고 나오는 모습이 그려지죠. “한 사람을 위해 팔을 꺾는 사람들과 있었다/우리가 햇빛 속에 함께 있음을/무수한 뼈를 엮어 만든 포옹이라 느낄 때” 같은 구절은 꼭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만 한다는 태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겐 이미 팔을 꺾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뼈에 새겨진 약속 같은 게 있고 그러한 약속은 비밀처럼 숨겨져 있다가 햇볕을 받았을 때 그 햇볕 아래에서 ‘따뜻한 포옹’처럼 이뤄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햇볕은 물성이 있는 이들의 연결 속에서 높아지는 온도로 만져지는 것이자, 구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요컨대 시인은 살아서 감각하는 걸 믿는다고 해야 될까요.

 

김다은 빛과 빛이 주는 안온함에 대한 갈망이 주요한 시집이지만 「밤도 밖도 밝던」은 빛이 사라진 순간에 대한 환상적인 이미지를 그리고 있어요. 화자는 밤 산책을 나서죠. 손에는 삼각김밥, 길고양이 선물 같은 것을 넣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요. 그러다 자신이 손을 집어넣은 것이 비닐봉지가 아니라 밤이라는 걸 알게 돼요. “밤의 주인이/나를 아무 데나 흘리고 가버릴 것만 같다”, 그리고 이 밤의 여정 끝에 “젖은 나무 위에서/흰 빛을 품던 밤을 본 적 있다/태어날 빛을 위해/사라지는 어스름이 아름답다”라고 말해요. 어둠과 빛이 서로 경쟁하지 않아요. 겸손하게 서로를 보호해주죠. 어둠 속에 있어도 그 어둠이 품고 있는 빛이 우리를 동시에 감싸주는 이미지가 연상됐어요.

 

양경언 그 빛이 사라졌을 때 어둠에 도취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도 있어요. “빛의 테두리가 지워”져도 “구별을 짓기 위해 어둠 속으로 두 손을 마중 보낸다”(「검은 돌 흰 돌의 시간」)는 표현을 보면, 진정한 빛이란 “눈을 질끈 감으면 툭, 끊어지는”(「빛과 산책」) 게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뭔가 더듬어나가고 움직이면서,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지금 이 자리에서 경험하는 건 무엇인지와 같은 구별 속에서 성취되는 것임을 일러줍니다. 그런 구별은 멈출 수도 없고, 계속 해나가야 한다고요. 첫 시집을 여러 작법을 넘나드는 화려한 언어로 꾸리거나 자기 자신만의 목소리를 의기양양하게 세상에 내놓는 자리로 여길 수도 있었을 텐데, 조온윤은 그런 자의식을 좀 내려놓는 방식을 택한 것 같아요. 순박하고, 어질다고 느껴질 정도예요.

 

박경희 「단체 관람」이라는 시에서는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면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뒷모습이 쓸쓸해지고 있다는 걸/앞은 모른다”라고 읊조리죠. 우리가 가지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면을 포착하려는 시인의 자세가 느껴져요. 「적정 온도」는 제목도 시도 모두 인상적이었는데 “오늘도 우리는 호의도 적의도 없이 안녕을 건넵니다”처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일들을 객관화해서 툭툭 던져놓는 힘이 있어요. 최근에 읽은 최지인 시집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창비 2022)도 좋았는데, 저는 두 시집이 말 그대로 ‘적정 온도’를 가지고 쓰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양경언 한편의 시가 그리는 풍경을 현실의 한 장면과 바로 등치시켜 읽으면 의미가 고정될 위험이 있습니다만 이를 무릅쓰고 말해본다면, 「공복 산책」의 “보리수 대신 천막으로 그늘을 치고 그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앙상한 것들은 왜 자꾸 단단해지는가/추운 계절과 싸우기 위해/가로수가 가지를 흔들며 계체량을 줄여갈 때” 같은 구절은 단식투쟁을 하는 이들과 연결되어 읽히기도 해요. 그러다 시가 문득 “이봐,/우리는 무엇으로 살고자 하는 거지?”라고 묻는데, 시인이 계속 탐구해가고자 하는 궁극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여졌어요. 조온윤의 시에 대해 ‘따뜻한 온도’ ‘조심스러운 태도’라는 말을 많이 나누었는데, 이런 단단함 덕분에 시집의 성질이 싸울 줄 모르는 착함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보다 싸우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온유함에 가깝겠죠.

 

김다은 오늘 읽은 시집 세권이 각자 느낌이 정말 많이 달랐고 개인적으로는 김명기 시집이 가장 인상 깊었지만, 조온윤 시집을 읽으면서는 밑줄 치는 걸 포기했어요. 정말 다른 차원의 매력이 있었거든요. 시인은 일상적인 순간을 가지고 와서 그 안에 있는 전혀 다른 세계를 독자 앞에 보여줘요. 그 장면을 만나는 순간 감각이 열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 안의 또다른 세계에 대한 단서들을 보여주고 감정을 도약시키는 게 시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정말 좋은 시들을 읽어서 기뻐요.

 

박경희 저는 시를 많이 접하다보니 소설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면이 있어요. 시대의 문제와 호흡하는 아픈 청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마법소녀 은퇴합니다』는 움츠려 있던 제 마음을 펴주었어요.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과도 함께 읽으며 소설이 환기하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 나눠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다은 소설에 대해 한마디만 덧붙이고 싶어요. 최근 여성서사가 많이 나오고 그 안에 퀴어 코드가 많이 개입되는 것은 정말 기쁘고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가끔은 특정 정체성이 소설 속에서 불필요하게 사용된다고 느낄 때도 있어요. 이제는 단순히 소수자를 대변하는 것뿐 아니라 좀 다른 모습의 이야기들이 문학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방식에 대해서도 작가와 독자가 모두 같이 고민해보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양경언 생활에 대한 실감, 삶의 구체성이 살아 있는 문학작품을 기대한다는 의견에 저 역시 동의합니다. 최근 들어 혐오와 차별과 분열의 정황들이 가시화되고 있는데, 오늘 우리가 만난 작품들 전반에는 주위를 살피려는, 그러면서 다시 옆과 연결되고자 애쓰는 몸짓들이 그려지고 있었어요. 문학이 우리 시대를 향해 외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찾아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자리는 이렇게 마무리할까요? 긴 시간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2022.4.24.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