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백상웅 白象雄

1980년 전남 여수 출생. 2006년 대산대학문학상과 2008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시집 『거인을 보았다』 등이 있음. bluepostman@naver.com

 

 

 

산책

 

 

걷는다. 바람은 억새가 되고

저녁이 마저 눕는 길을

붉다 만 벚나무 잎사귀가 맴도는 불광천 여울 곁을

 

걷는다. 마른 잎사귀처럼 주저앉은 사람을

나는 모른다.

큰 걸음으로 걷는 사람을, 자전거 타는 사람을, 걷는 속도가 같은 사람을, 개와 함께 걸어가는 사람을

 

걷는다. 바람과 어떤 바람이 지탱하는 다리 밑을

열차가 달려가는 그 다리 밑을

천둥 같은 날을

 

걷는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익숙하므로

저기서부터는 낯선 길이므로

폭삭 내려앉은 낙엽들이 떠가는 천 옆을, 좁은 수로에 몰려 있는 메마른 어깨 곁을

 

걷는다. 슬쩍 부딪치자마자 애써 멀어지는 가벼운 사람을

나는 모른다.

어쩐지 처음 걷는 길을, 어깨가 굽어 있는 긴 그림자를, 낙엽처럼 망해버린 색깔들을.

 

걷는다.

나는 모른다.

 

여기 모르는 사람이

살아 있다.

 

 

 

국외자

 

 

가장 먼 데 있는 가장 먼 시간들이 먼저 떠났다.

 

얼어붙은 흙을 감싼 화분의 금 간 둘레가, 허공을 붙잡은 메마른 녹보수의 가지가

그들은 길 위에 있다.

눈발 날렸다.

 

죽는다는 마음보다 희미해지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들은 같은 자리에 서 있다. 가끔가다 웃었고, 쏟아지던 초록에도 다 사연이 있었다.

 

죽은 가지처럼 금이 간 머릿속이 하얗다.

화분에 담긴 평면의 세계도 하얗다.

눈은 쏟아지고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들은 다른 종족이다.

화분과 나무.

붙잡아야 하는 마음과 떠나야 하는 마음. 어리지도 늙지도 않았다.

 

가슴이 내내 냉골인 화분과 녹보수.

손끝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가고 싶거나 다녀왔던 저쪽의 방향을 가리키거나 서로의 어깨에 묻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는 일뿐.

 

전기장판의 열기에도 끝이 있다.

펼쳐진 눈구름에도 끝이 있다.

얼어붙은 물웅덩이는 가장자리부터 사라진다.

 

그리고 기억하는가, 오른 소매 끝이 가장 먼저 가슴을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