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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크리스티나 램 『관통당한 몸』, 한겨레출판 2022
오직 정의를 요구한다
정용숙
鄭容淑/춘천교육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jungys@cnue.ac.kr
전쟁을 위해 성노예를 착취한 것은 일본군만이 아니었다. 나치독일의 성착취는 그보다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이루어졌다. 그러나 ‘과거청산 모범국’에서도 그 이야기는 금기 중의 금기, 최후의 금기였다. 배제되고 소외된 전쟁 피해자들이 늦게나마 불려 나올 때도, 성노예와 전시 강간 피해자들은 숨죽이고 침묵했다. 이 주제는 독일에서도 2000년대에 들어서야 공론화되었으며 2009년 비로소 이 일의 일부를 정면으로 마주한 학술연구서(Das KZ-Bordell )가 나왔다. 그 연구서의 저자인 로베르트 좀머(Robert Sommer)는 자기 책을 거꾸로 꽂아놓는다고 했다. 책등에 인쇄된 제목에 무심코 눈이 갈 때마다 피해자들의 고통이 떠올라 괴롭기 때문이다. 지구 곳곳에는 그보다 더한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주 많고, 지금도 생겨나고 있다.
영국 저널리스트 크리스티나 램(Christina Lamb)의 르뽀 『관통당한 몸: 이라크에서 버마까지, 역사의 방관자이기를 거부한 여성들의 이야기』(Our Bodies, Their Battlefield, 2020, 강경이 옮김)는 이런 고통에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쓴 불편한 책이다. 시리아와 이라크는 물론 콩고민주공화국과 나이지리아와 르완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아르헨띠나, 버마와 필리핀까지, 무력 분쟁에서 결코 빠지는 법이 없는 성적 공격의 피해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말을 듣고 기록했다. 이 책의 모든 이야기가 다 끔찍하지만, 특히 어린 여자아이들과 아기들을 겨냥한 잔학행위는 절망적이다. 피해자의 말마따나, 말하기 힘들지만 모르고 있기는 더 힘들다.
성폭력에 대한 고정관념은 전쟁만큼이나 강력하다. 오래된 문명의 탄생 신화와 전설부터 강간 이야기로 넘쳐난다. 강간은 원래 전쟁의 일부이고 어쩔 수 없다는 체념. 이것이 현실이 될 때, 전쟁터에서는 여자인 것이 더 위험하다. 적의 여성을 욕보이기(사기 꺾기와 보복), 충격을 주어 떠나도록 만들기(영토 확보), 여성들을 임신시켜 인구 구성 바꾸기(인종청소)와 같이 그 본질은 ‘성욕’ 따위가 아니라 테러 공격이다. 강간은 여성의 몸에서 벌이는 전쟁이다. 성은 그 어떤 물리적 화학적 무기보다 값싸고 효율적인 파괴 무기라고, 피해자와 조력자와 관찰자 모두가 잘라 말한다.
피해자들에게 끔찍한 트라우마를 되살리도록 요청하는 일은 30년 경력의 강인한 분쟁지역 기자인 저자에게도 내적 갈등을 일으켰다.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오직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고 그 행위의 댓가로 유죄판결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치유될 수 있을까? 강간 피해자는 “그 자리에서 죽든 나중에 죽든 그 모든 시련을 겪고 나서는 결코 다시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186면)다고 말한다. 피해자가 당하는 것은 “느린 살인”(25면)이다. 강간의 집행자와 명령자는 이를 정확하게 알았다. 강간이 의도적이고 전략적인 전쟁 무기인 이유다. 분쟁지역 남성의 약 25%가 성폭력 피해자라는 연구가 있다(441면). 강간으로 태어난 “나쁜 기억의 아이들”(170면)과 “보이지 않는 아이들”(204면) 그리고 “삶을 도둑맞은 아이들”(252면)도 피해자다. 강간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국제사회는 늦게나마 이를 문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1998년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가 강간을 제노사이드 범죄의 일부로 처벌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었다. 강간죄 기소를 관철하고 낭독 직전까지 빠져 있던 성폭력 죄목을 최종 판결문에 추가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여성 판사의 역할이 없었더라면 나오지 못했을 역사적 판결이다(179면). 여기에 이르기까지 피해 여성들은 강간이 학살과 고문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외국인 남성들 앞에서 수없이 증언을 반복해야 했다. 그러나 이 역사적 판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고, 용기를 냈음에도 다른 곳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음에 그들은 절망한다.
1996년부터 2017년까지 무려 22년간 계속된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의 재판에서는 체계적 강간과 노예화를 고문과 살상무기로, 그러니까 전쟁범죄로 다룰 수 있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기나긴 재판이 이어지는 동안 전범 밀로셰비치는 선고받지 않은 채로 죽었다. 강간과 성고문이 자행된 수용소였던 비셰그라드의 호텔은 국제적 여행 앱에서 손님을 받고, 아무것도 모르는 관광객들은 피바다였던 처형장에서 수영을 한다(214면). 전시 강간 가해자가 처벌받은 사례는 드물고 그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다. 전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다른 분쟁지역에서 전시 강간은 멈추지 않았으며, 지금도 우리는 우끄라이나에서 같은 일이 계속되고 있음을 듣는다. 이 책이 지적하듯, 강간을 범죄로 인정하지 않는 ‘불처벌 문화’가 아직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르완다 제노사이드의 불똥이 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20년 이상 강간 피해자 의료지원에 헌신한 무퀘게 박사는 2018년 노벨평화상 수락 연설에서 아프리카에서 발생하는 강간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정치적 의지와 법적 장치를 요구했다(376면). 콩고의 경우 자원 약탈로 점철된 식민지 역사가 고스란히 현재의 비극으로 이어지고 있다. 범죄자들은 지역의 권력자이며, 분쟁의 이유는 IT산업에 필요한 자원 때문이다. 강간 발생지를 지도에 표시하면 그대로 자원 매장지의 지도가 된다. 나이지리아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보코하람’의 탄생은 빈곤, 문맹률, 기후변화가 합쳐진 결과다(75~76면). 우기가 줄면서 호수가 오그라들고 땅이 바짝 말라버린 지역에서 미래를 포기한 젊은 남성들이 과격 무장세력에 끊임없이 모여든 것이다.
국제사회의 정치 지도자들은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까? 그렇지 않다는 반례는 넘쳐난다. 우선 글로벌 강대국들은 기후변화의 마지막 피해자일 테고 광물자원의 수혜자다. 이라크전쟁의 예도 있다. 2004년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 수감자 학대사건은 성적 폭력이 전쟁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통제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으로 통한다. 미국정부는 사과는커녕 침묵으로 일관하며 논의 자체를 봉쇄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만들어낸 군‘위안부’가 이후에도 아시아 지역에서 주로 미군의 필요로 지속되었음도 떠올려봄직하다. 우리는 어떠한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인들은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군‘위안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공감과 가해자에 대한 분노라는 집단 정동이 현실의 ‘미투’에 대한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군대와 국가가 폭력적 목적으로 성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방식은 해당 사회의 성문화에 뿌리를 둔다. 여성의 ‘순결’이 귀중한 자산일수록 공격 효과도 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 성노예의 체계적 운영은 국가 주도로 일본과 서유럽의 제도화된 성매매를 응용한 독창적 발상의 산물이었다. 역사적 경험은 이처럼 성매매와 성폭력이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푸른 헬멧’(국제연합평화유지군)이 분쟁지역 성매매의 주요 고객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책은 군대의 ‘여성화’가 성적 폭력을 감소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조심스레 내보인다. 그러나 또한 가해의 조력자와 은폐자 중에는 여성도 있었다고 말한다. 아부 그라이브의 고문자 중에도 여군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여성이 군대를 ‘접수’하면, 또다른 괴물이 되지 않고 군대와 전쟁의 본질적 폭력성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가능한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