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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주혜 李柱惠
2016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
소설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장편소설 『자두』 등이 있음.
leestori@hanmail.net
장편연재 3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머리 긁어봐.
밥상 맞은편에서 엄마가 말했다. 시옷은 오른손의 숟가락질을 멈추지도 않고 왼손만 대충 들어 뒤통수를 긁었다. 이제 시옷은 오른손으로 국을 떠먹거나 젓가락질을 하면서도 왼손으로 머리를 긁을 수 있다. 엄마는 벌써 며칠째 밥상머리에서 시옷에게 머리를 긁어보라고 요구했고 시옷은 건성건성 구는 것처럼 보여도 일부러 뒤통수에서 가장 아래쪽을 골라 긁었다. 심사가 뒤틀리면 아예 대놓고 목덜미를 긁었다. 시옷이 뒤통수 아래쪽을 긁을 때마다 엄마의 눈빛은 크게 흔들렸고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즈음 엄마의 감정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요동쳤고 시옷은 그런 엄마가 미웠다.
머리 한번 긁어봐.
엄마가 처음 이렇게 말했을 때 시옷은 어리둥절하게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정수리 한가운데를 살짝 긁었더랬다. 엄마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시옷의 손이 향하는 방향을 집요하게 쫓아갔다. 시옷의 손이 정수리 바로 위를 맴돌다 이마 쪽으로 내려가면 엄마의 얼굴에 잠시 빛이 들었고 뒤통수에 가까워지면 단박에 어두워졌다.
앞쪽을 긁을수록 기다리는 사람이 빨리 돌아온단다.
엄마의 아리송한 요구의 의미를 알려준 사람은 할머니였다. 영이 맑은 아이에게 머리를 긁어보라고 시킨 다음 아이가 이마에 가까운 자리를 긁을수록 기다리는 사람이 빨리 돌아온다고 믿는 일종의 점술이라고. 시옷이 정수리 뒤쪽을 긁을 때마다 엄마가 숟가락을 딱 내려놓고 이부자리에 드러눕는 일이 반복되자 보다 못한 할머니가 몰래 정답을 알려주었다. 할머니는 시옷과 단둘이 부엌에서 밥상을 치우면서 누가 들을세라 나직이 속삭였다.
이마 쪽을 긁어. 그래야 네 아빠도 빨리 돌아오고 네 엄마 맘도 편해진다.
진짜요? 내가 이마를 긁으면 진짜로 아빠가 돌아와요?
할머니는 김칫국물이 떨어진 밥상을 행주로 훔치다가 손을 멈추고 물끄러미 시옷을 보았다. 할머니 눈빛도 밥상머리의 엄마처럼 흔들렸다. 이윽고 할머니가 고개를 떨구고 행주질을 마저 하며 말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냐? 게다가 네 엄마는 산 사람 두 몫이지 않으냐?
다음 날 아침 엄마가 또 머리 긁어봐, 했을 때 시옷은 보란 듯이 뒤통수 한가운데를 벅벅 긁었다. 엄마가 소리 나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할머니가 흐느끼듯 한숨을 토해냈다. 나무 관세음보살. 시옷은 엄마가 바라는 것을 주고 싶지 않았다.
더러워.
엄마의 그 말이 한밤중 응접실에 내던져졌을 때 방금까지 기타 선율과 두 남자의 노래로 안온했던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었고 불량하면서도 늘 당당했던 제비다방 남자는 초라하게 찌그러들었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시옷은 잠옷 바람으로 응접실 문부터 열어보았지만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벽에 기댄 채 축 늘어져 있던 남자의 국방색 배낭도, 남자가 소중하게 보듬어 안고 연주했던 기타도 사라졌다.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함께 나직나직 노래했던 친구라는 남자도 없었다. 제비다방 남자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남자가 머무는 동안 응접실에 자연스럽게 배어들었던 담배 냄새도, 전날 밤 시옷의 재채기를 일으켰던 매캐한 최루가스 냄새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남자는 정말로 응접실에 머물다 갔던 걸까? 혹시 이 모든 게 미욱한 시옷의 착각이나 꿈은 아니었을까? 아니다. 시옷은 남자와 함께 가만가만 불러보았던 「고향의 봄」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의 길쭉한 손가락이 은회색 기타 줄을 튕길 때의 은근한 반동을 목격했다. 사내자식이 제법이네, 하고 하얀 담배 연기를 푸슬푸슬 피워올릴 때 살짝 기울며 웃는 입 모양을 보았다. 남자는 분명히 시옷의 곁에 존재했다.
먹이가 곧 나다. 높이 살고 싶으면 높은 것을 먹어.
할머니 눈에는 ‘영 불량해 뵈고’ 엄마 눈에는 ‘더러웠지만’ 시옷에겐 이런 말짱한 말도 해줄 줄 알았던 남자가 이제 없었다. 시옷은 빈 응접실의 싸늘한 공기를 노려보며 엄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사라지고 엄마와 할머니가 각자의 불행과 시름에 빠져 시옷을 모른 척했을 때 함께 노래를 듣고 노래를 불러준 유일한 사람이 제비다방 남자였다. 그런 남자를 엄마가 쫓아냈다. 제비다방 마담의 돈을 갚지 않고 도망친 사람은 아빠였고 남자는 ‘제 어머니가 엽차 팔아 모은 눈물겨운 돈’을 돌려받으려고 했을 뿐인데, 엄마는 남자를 추악한 악당 보듯 했다. 그래놓고 인제 와서 자꾸 시옷에게 머리를 긁어보라고 하다니. 아빠가 얼마나 빨리 돌아오느냐가 오직 시옷의 손길에 달렸다는 듯 모든 책임을 시옷에게 떠넘기고 있지 않은가. 엄마가 밉고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머리 한번 긁어봐.
엄마가 요구할 때마다 시옷은 뒤통수 쪽을 긁어댔다. 엄마는 노여운 눈길로 시옷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시옷이 집에 돌아오려는 아빠의 길목을 일부러 막고 있다는 듯이. 밥상 위에서 시옷과 엄마의 시선이 얽히며 불꽃을 튀겼다. 할머니의 한탄이 뒤늦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아이고, 나무 관세음보살.
토요일 오후, 엄마가 애니네 집에 병문안을 다녀오라고 했다. 애니가 방송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위대를 만나 다친 지도 일주일이나 지났다. 엄마와 조용히 불화하느라 시옷은 그동안 애니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날 시위대 밑에 깔린 애니를 구해준 사람은 어느 용감한 대학생 언니였고 쫓아오는 전경을 피해 기절한 애니를 안고 뛰어준 사람은 제비다방 남자였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엄마가 새롭게 미워졌다. 시옷은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입을 비죽이 내미는 것으로 자신의 원망을 표현해보았지만, 엄마는 그저 자기 할 말만 했다.
병문안은 빈손으로 가는 게 아니야. 이거라도 가져가.
엄마는 화단에 핀 붉은 모란을 이파리와 함께 잘라 꽃다발을 만들어주었다. 봉오리 상태보다 조금 더 벌어진 모란은 소담해 보였다. 모란은 아빠가 가장 아끼는 꽃이었다. 빚쟁이가 되어 사라지기 전 아빠는 봄마다 모란이 피기를 기다렸고 꽃이 피면 친구들을 불러 마당 평상에서 늦도록 술을 마셨다. 시옷이 할머니 심부름으로 안주 접시를 들고 가면 불콰해진 아저씨들이 앞다투어 지갑을 열고 시옷의 손에 지폐를 쥐여주었다. 그런 밤은 늦도록 자러 가지 않아도 엄마한테 혼나지 않았고 부엌에 맛있는 음식이 잔뜩 쌓여 있어서 좋았다. 올해 모란은 아빠 없이 혼자 피었다. 아무도 모란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가 빨리 돌아오길 바라며 매일 시옷에게 머리를 긁어보라고 닦달했으면서 아빠가 가장 아끼던 모란을 다섯송이나 댕강 잘라 꽃다발을 만들었다.
애니보다 애니 엄마가 더 모란을 반겼다. 애니는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프릴이 잔뜩 달린 하얀색 잠옷을 입은 애니는 애니메이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의 클라라처럼 파리했다. 애니 엄마는 유리 화병에 모란을 꽂아 애니의 책상에 올려놓고는 쟁반에 담은 쿠키와 오렌지주스를 가져다주었다. 애니 엄마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애니는 순식간에 클라라에서 명랑한 하이디로 변신했다.
왜 이제 왔어?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잖아!
애니는 처음 입이 트인 사람처럼 일주일 동안의 이야기를 쉬지 않고 쏟아냈다. 병원에 가 엑스레이를 찍고 깁스를 하는 동안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 아니 그전에 대학생들 밑에 깔렸을 때 눈앞은 깜깜하고 온몸이 짜부라지는 느낌이 들어서 이제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었다고 했다. 평소에는 학교 가기 싫어 죽는 줄 알았는데 일주일이나 결석하고 집에 가만히 있으려니 지루해 죽을 것 같다고 했다. 애니는 죽는다는 말을 많이 쓰고 있었다. 시옷은 그날 시위대에 휘말리기 직전 낙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무전기를 들고 있었던 ‘진짜 간첩’을 보자 애니가 겁을 먹고 얼어붙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장래희망이 탐정이고 늘 시옷보다 씩씩하게 앞서 걸어갔던 애니도 사실은 겁쟁이였던 걸까? 시옷은 자기보다 키가 한뼘이나 더 큰 애니가 한참 어린 동생처럼 느껴졌다. 시옷은 애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많이 아팠어?
응, 아파 죽는 줄 알았어.
무서웠어?
응,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이제 괜찮아. 내가 왔으니까.
응. 근데 있잖아.
어.
나, 아프다.
시옷은 화들짝 놀라 애니를 놓아주었다. 애니는 깔깔 웃으며 남은 이야기를 마저 들려주었다. 일주일 동안 엄마 아빠를 졸라 얻은 인형과 장난감을 자랑했고 병문안을 와준 학급 친구들 이야기도 했다. 「들장미 소녀 캔디」의 테리우스를 닮은 반장 남자애가 장미 꽃다발을 들고 병문안을 왔다고 말할 때는 시옷의 어깨를 괜히 툭툭 쳤다. 시옷은 엄마가 보낸 모란 꽃다발이 부끄러웠다. 장미 꽃다발은 분명 꽃집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사 와 고급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시옷은 풀이 죽었지만, 애니는 그런 시옷의 마음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 참! 보여줄 게 있어.
지금껏 새 장난감과 인형을 실컷 보여줘놓고 뭘 또 보여준다는 말인지. 방금까지 어린 동생처럼 안쓰러웠던 애니가 순식간에 욕심쟁이 큰언니로 보였다. 애니는 한껏 들떠서는 시옷에게 당장 옷장을 열어보라고 했다. 아무리 환자라지만 침대에 가만히 앉아 이래라저래라 하는 애니가 이제 못된 공주님 같고 시옷은 구박받는 시녀 같았다. 시옷은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마지못해 애니의 옷장을 열었다. 화려한 드레스가 잔뜩 걸린 애니의 큼직한 옷장 맨 앞쪽에 감색 세일러복이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방송국 어린이합창단 단복이었다.
이리 가져와봐.
시옷은 옷걸이째 단복을 꺼내어 들고 애니 곁으로 갔다. 애니의 새하얀 침대보 위에 내려놓은 감색 단복은 근사해 보였다. 애니는 지금은 합창단 연습에 나갈 수 없지만 가정의 달 특집방송 녹화 당일에는 이 단복을 입고 방송국에 가 노래할 거라고 말했다.
연습을 못했는데, 괜찮겠어?
시옷의 물음에 애니는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웃었다.
입만 벙긋벙긋할 거야. 엄마가 그러는데 무대 맨 앞에 세워준다고 약속했대.
누가?
프로그램 피디 아저씨가.
시옷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약속을 한 사람이 지휘자 선생님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감색 세일러복을 입고 무대 맨 앞에 서서 방긋방긋 웃으며 노래하는(아니, 노래하는 시늉을 하는) 애니는 정말 예쁠 것이다. 애니는 감색에 잘 어울리는 빨간색 리본을 달고 고개를 살짝 까딱이면서 노래하겠지. 하지만 그날 시옷도 애니 옆에서 맑은 목소리로 「고향의 봄」 2절 솔로를 부를 것이다. 시옷이 사랑하는 애니의 얼굴과 지휘자 선생님이 사랑하는 시옷의 목소리가 함께 전파를 타고 온 도시에 퍼질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이다.
너도 단복 샀어?
애니가 물었다. 시옷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시옷만 보면 머리를 긁어보라고 하면서도 단복을 살 오천원은 주지 않았다. 매일 방송국에 다녀올 차비 백원을 줄 때도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돈이 있는데도 일부러 안 주는 게 아니란 걸 아니까 엄마를 원망할 수는 없었지만, 특집방송 녹화일이 다가올수록 끝내 단복을 구하지 못할까봐 막막했다. 어쩌다 단복 이야기를 꺼내도 엄마는 못 들은 척했고 할머니는 나무 관세음보살만 찾았다.
근데 너, 남자 단복을 입어야 하는 거 아냐?
애니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시옷도 단복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남자 단복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방송국 어린이합창단에서 시옷은 ‘빈소년합창단에 들어가도 손색없는 미성의 소유자’이자 ‘맑은 소년’으로 통했다. 막막했던 마음 한 귀퉁이가 툭 터지며 눈물이 쏟아졌다. 밖에서 애니 엄마와 아빠가 들을까봐 한껏 숨을 죽였는데도 울음은 점점 격해질 뿐이었다. 애니가 어쩔 줄 몰라하며 시옷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깁스를 한 채로 시옷을 맘껏 안아줄 수도,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었다. 애니의 눈시울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애니는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저도 같이 울었다.
울음이 잦아들자 애니가 책상 첫번째 서랍을 열어보라고 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서랍 속에 애니가 말한 분홍색 보석상자가 있었다. 상자 안에는 애니가 문방구에서 사 모은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반지와 목걸이가 가득했다. 장신구를 쏟아내니 밑바닥에 두번 접은 천원짜리 지폐가 나왔다. 모두 삼천원이었다.
너 가져.
온갖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큰돈이 생겼다는 기쁨부터 시옷네가 가난해졌다는 것을 애니도 알고 있구나 싶은 초라함, 그래도 아직 이천원이나 모자란다는 막막함, 애니 엄마가 알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엄마가 알면 당장 돌려주라고 할 텐데 싶은 야속함까지 모두 억센 손아귀가 되어 시옷의 작은 몸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시옷은 어지러워 눈을 질끈 감았다.
이천원도 구해볼게. 요즘 엄마 아빠가 내 말은 거의 다 들어주거든.
욕망이 자존심을 이겼다. 시옷은 오른손에 지폐 석장을 꼭 쥔 채로 애니를 와락 끌어안고 말했다.
녹화 날까지는 꼭 구해야 해!
*
마웨: 아유, 그 돈 내가 주고 싶네.
고슴: 40년 전 오천원이면 지금 물가로 얼마나 될까요?
도치: 검색해보니 1980년에 짜장면이 오백원 정도였대요. 오천원이면 짜장면 열그릇 값이네요.
마웨: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면 저 애기 만나서 오천원 주고 싶어. 애가 짠하잖아. 짜장면 열그릇이 문제야? 백그릇도 사줄 수 있어.
고슴: 그럼 40년 후의 시옷님한테 짜장면 백그릇 사주시면 되겠네요. 저는 옆에서 짬뽕 한그릇만 먹을게요.
도치: 저는 탕수육이요.
마웨: 거, 시옷님 일기나 마저 들읍시다.
*
특집방송 녹화를 일주일 앞둔 날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시옷이 국민교육헌장만큼 어려운 ‘비상계엄령’이라는 단어를 똑똑히 기억하는 건 그 말을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서도 엄마의 입을 통해서도 여러번 들었기 때문이었다. 일요일이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할머니 방에 느긋하게 엎드려 철 지난 만화잡지를 뒤적이고 있는데(아빠가 사라진 후 시옷에게 월간 만화잡지를 사주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가 미닫이문을 드르륵 거칠게 열고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 시옷을 잡아 일으켰다.
따라와.
시옷은 쭈뼛거리며 엄마를 따라 안방으로 갔다. 방 한가운데 엄마가 책상 대신 사용하는 작은 밥상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 물에 불어 귀퉁이가 찢어진 천원짜리 지폐 석장이 놓여 있었다. 시옷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 돈 어디서 났어?
애니가 준 돈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으면서 깜박 잊고 돈을 그대로 넣어둔 채 빨래통에 던져 넣었던 모양이었다.
어서 말하지 못해?
시옷은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시옷은 그 순간에도 오직 저 찢어진 돈으로도 단복을 살 수 있을까와 엄마의 밥상에 놓인 저 돈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너 설마…… 훔쳤니?
엄마의 말투에 경멸이 뚝뚝 묻어났다. 시옷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엄마를 노려보았다.
이게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
엄마가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전화기 옆에 놓인 먼지떨이를 집어 들었다.
이리 와.
시옷은 엄마 말을 무시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가 먼지떨이를 거꾸로 쥐더니 무릎걸음으로 달려와 손잡이 막대로 시옷을 때리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대나무 막대가 한껏 휘어지며 시옷의 종아리와 허벅지에 무분별하게 닿았다.
말해! 이 돈! 어디서! 훔쳤어!
엄마는 매질 한번에 단어 하나씩을 강조하며 시옷을 때렸다. 다리에 불이 붙는 것 같았지만 시옷은 입술을 더 세게 깨물고 울음을 참았다. 엄마의 악다구니가 점점 커졌다. 밖에서 들으면 시옷이 엄마를 때리는 줄 알 것이다. 시옷은 울지도 않고 소리도 지르지 않겠다고, 그러는 순간 엄마에게 지고 말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엄마는 숫제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안방 문이 드르륵 열리며 할머니가 뛰어 들어왔다.
아이고! 관세음보살!
할머니는 엄마 손에서 먼지떨이를 뺏어 멀리 던져버리고 동시에 바닥으로 쓰러지는 시옷을 감싸 안았다.
아이고, 우세스러워라. 이게 무슨 일이냐그래.
엄마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어깨를 격하게 들썩이며 씨근거렸다. 엄마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었다.
얘가 글쎄 돈을 훔쳤어요!
아니야!
시옷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훔치지 않았어!
할머니와 엄마가 더 해명해보라는 듯 동시에 시옷을 보았다.
애니가 줬어.
거짓말하지 마! 애니가 뭣 때문에 이렇게 큰돈을 줘? 너, 설마, 애니네 집에서 훔쳤니?
관세음보살!
아니야! 애니가 줬어!
애니가 왜?
애니가…… 합창단복 사라고……
순간 셋 다 각기 다른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시옷은 말을 맺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다시 깨물었고, 할머니는 두 눈을 질끈 감았으며, 엄마는…… 엄마는 얼굴 근육 전체를 씰룩이며 떨었다. 방 안에는 잠시 세 사람의 숨소리만 들렸다. 이윽고 엄마가 천천히 전화기 쪽으로 가 수화기를 들었다. 드르륵. 드르르륵. 드륵. 드르르르륵. 다이얼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상대가 전화를 받기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는 싸늘한 눈빛으로 할머니 품에 안긴 시옷을 바라보았다.
지휘자 선생님? 여기 교동입니다.
시옷은 할머니 품에서 풀쩍 튀어오를 만큼 놀랐지만, 엄마는 여전히 시옷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통화를 이어갔다.
죄송하지만, 앞으로 저희 아이, 합창단에 못 보냅니다. 선생님도 뉴스 보셨죠?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잖아요. 세상이 너무 험해서 아이를 밖으로 내보낼 수가 없어요. 지난번에도 방송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위대를 만나 크게 다칠 뻔했어요. 예, 압니다. 아니요, 녹화도 못합니다. 아이가 많이 놀랐어요. 아직 어린 나이잖아요. 선생님이 이해해주세요. 예. 그럼 전화 끊겠습니다.
엄마는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에도 시옷을 향한 시선을 풀지 않았다. 격하게 오르내렸던 엄마의 어깨가 잠잠해졌다. 그때 시옷은 깨달았다. 엄마는 지금 시옷에게 징벌을 가하고 있다고. 시옷이 소중히 여기는 걸 정확히 파악하고 그걸 빼앗으려 한다고. 시옷은 할머니 품에서 벗어나 벌떡 일어났다. 다리가 아파 잠시 휘청였지만, 곧 자세를 펴고 엄마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주저앉은 엄마의 배가 유난히 불룩해 보였다. 시옷은 엄마와 엄마의 배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리고 밥상 위에 처참한 꼴로 놓여 있는 천원짜리 지폐 석장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날카로운 통증이 종아리를 후벼팠다. 시옷은 온 힘을 다해 목구멍을 열고 소리쳤다.
엄마 미워! 죽어버려!
관세음보살!
시옷은 두 여자를 방 안에 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
딸들은 왜 그렇게 엄마를 미워할까요?
마웨가 진심 궁금한 얼굴로 내게 물었지만, 그건 내가 더 궁금해하는 문제였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근히 집요한 데가 있는 마웨가 이번에는 림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아니 림자님도 엄마를 미워합니까? 우리 집에도 나이 마흔이 다 되었는데 맨날 제 엄마랑 죽어라 싸우는 딸년이 하나 있거든요.
림자가 웃지 않고 대답했다.
엄마와 딸 사이에는 한 몸이었던 시절부터 주고받아온 수많은 물질과 감정이 있어요.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쉽게 파악되지 않는 지형도가 펼쳐지지요. 그 복잡한 관계를 단순한 한마디로 표현하려다보니 오히려 갈등과 불화가 도드라지는 게 아닐까요? 수많은 관계 중 왜 엄마와 딸의 관계만 유난히 가깝고 살뜰해야 하는지 저는 그게 더 이해가 안 돼요.
마웨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기어이 고슴에게도 물었다.
고슴님이 말해봐요. 요즘 젊은 딸들도 엄마와 사이가 안 좋습니까?
고슴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엄마가 없어서 모르겠네요. 아, 제가 말 안 했던가요? 저 보육원 출신이잖아요.
*
시옷은 학교가 파한 후 집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방송국으로 갔다. 차비가 없어서 걸어가기로 했다. 지금 집에 가면 엄마는 차비를 주기는커녕 집 밖으로 못 나가게 막을 것이다. 애니와 함께 방송국에서 집으로 걸어온 적이 있으니까 거꾸로 방향을 잡아 가면 될 것 같았다. 녹화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았으므로 연습에 빠질 수는 없었다. 2절 솔로를 부르기로 한 시옷이 녹화에 빠진다면 지휘자 선생님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시옷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다정한 지휘자 선생님을 흡족하게 할 것이다.
도로 표지판을 찾아보며 방송국 방향으로 걷는 동안 시옷은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수수께끼 놀이를 했다. 엄마는 왜 지휘자 선생님한테 전화했을까? 시옷을 벌주려고. 엄마는 왜 비상계엄령 핑계를 댔을까? 합창단복 사줄 오천원이 없어서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쪽팔리니까. 엄마는 왜 시옷을 벌주려는 걸까? 시옷이 미우니까. 엄마는 왜 시옷이 미울까? 이 질문은 답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시옷은 중앙동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다. 오른쪽에 제비다방 건물이 보였다. 시옷은 2층 창문에 하나씩 붙은 ‘제’ ‘비’ ‘다’ ‘방’ 네 글자를 쳐다보았다. 엄마는 왜 시옷이 미울까? 시옷이 제비다방 남자를 좋아해서. 엄마는 왜 제비다방 남자를 싫어할까? 제비다방 남자 때문에 아빠가 사라져서. 아니다. 제비다방 남자 때문에 아빠가 사라진 게 아니다. 아빠가 사라지는 바람에 제비다방 남자가 돈을 받으러 찾아온 것이다. 다시 물어보자. 엄마는 왜 제비다방 남자를 싫어할까? 제비다방 남자가 응접실을 차지하고 있어서 아빠가 맘 편히 집으로 돌아올 수 없으니까. 엄마는 왜 아빠를 기다릴까? 역시 대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엄마는 왜 폭폭한 마음으로 아빠를 기다리는가? 배 속 아기 때문에? 그럼 왜 아빠는 엄마 배 속에 아기가 생겼는데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시옷이 이마를 긁지 않고 일부러 가장 먼 목덜미를 긁어대서? 그런 주제에 노래 욕심이나 부려서? 결국, 모든 게 시옷 때문인가? 시옷 때문에 아빠가 돌아오지 않고, 아빠가 돌아오지 않아 엄마는 불행하며, 엄마는 불행해서 시옷을 그토록 미워하는가? 아기 동생이 생겼으니까 엄마에겐 더이상 시옷이 필요하지 않은 걸까? 울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울면 진다. 시옷은 엄마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지휘자 선생님이 벌떡 일어나 시옷을 향해 달려왔다. 선생님이 시옷의 어깨를 와락 붙잡고 말했다.
네가 올 줄 알았다.
(끄덕끄덕)
선생님은 네가 올 거라고 믿었어. 너는 씩씩하고 용감한 녀석이니까.
지휘자 선생님은 눈자위가 빨개질 정도로 시옷을 반겼다. 시옷이 단원들 사이에 가서 서자 옆자리 여자애가 시옷을 보고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날 선생님은 그 어느 때보다 격정적으로 피아노를 쳤고 단원들의 노랫소리도 우렁찼다. 시옷은 지휘자 선생님의 말처럼 ‘씩씩하고 용감한 녀석’이 되어 2절 솔로를 힘차게 불렀다.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수수께끼 놀이를 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시옷의 머릿속이 온통 단복 걱정뿐이었다. 애니가 약속한 이천원을 구해준다고 해도 엄마에게 삼천원을 뺏겼으므로 단복을 구할 가능성은 다시 사라졌다. 눈앞에 돈이 보인다면 엄마 의심대로 당장 훔치고 싶었다. 하지만 집 안 어디에도 시옷이 훔쳐낼 돈은 없었다. 할머니도 엄마도 고모나 이모가 한번씩 주고 가는 쌀과 반찬, 소소한 현금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돈이 있었다면 엄마는 몰라도 할머니는 단복을 사라고 주었을 것이다.
동네에 도착했을 때는 다리가 몹시 아팠지만(방송국까지 왕복으로 걸어서 다녀온 건 처음이었다) 시옷은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애니네 집에 들렀다. 애니는 침대에 누워 새로 나온 만화잡지를 보고 있었다. 시옷이 들어가자 애니는 만화잡지를 내팽개치고 침대 머리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 계엄령인지가 선포되어 거리에 군인들이 깔렸다는데 방송국에 어떻게 다녀왔는지, 특집방송 녹화는 그대로 진행하는지,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시옷은 그 모든 질문을 무시하고 불쑥 물었다.
이천원은 구했어?
애니는 무슨 소리냐는 듯 어리둥절하게 시옷을 보다가 이윽고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아, 까먹었다! 미안.
시옷은 애니의 어깨를 와락 붙잡고 말했다.
녹화가 며칠 안 남았어!
그리고 전날 엄마에게 삼천원을 들키고 얻어맞은 일이며 엄마가 지휘자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합창단에서 빠지겠다고 말한 일까지 좀 전의 애니보다 더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애니는 그 어여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많이 아팠어?
시옷은 바지를 걷고 종아리를 보여주었다. 첫날 붉은 기가 돌았던 피멍이 어느새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애니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놀랐다. 애니는 엄마 아빠한테 맞아본 적이 한번도 없을 것이다. 애니는 애니 엄마 아빠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지옥엽이었으니까. (물론 시옷도 전날까지는 엄마 아빠에게 한번도 맞아본 적이 없었다. 시옷은 애니만큼 소중한 금지옥엽은 아니었지만 구박받는 천덕꾸러기도 아니었다.) 애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애니가 앉은 자세 그대로 양팔을 벌렸다. 시옷이 안기자 애니가 시옷의 몸을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단복을 구해줄 거야.
애니가 포옹을 풀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시옷은 애니의 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약속해.
약속해.
그날 밤 시옷은 마구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누가 불에 달군 칼로 종아리를 깊숙이 찌르고 있었다. 아니, 무딘 도끼날로 종아리 살을 뚝 베어내고 있었다. 다리! 내 다리! 시옷은 잠결에도 정확히 오른쪽 다리를 가리키며 울부짖었다. 누군가 시옷의 발목을 붙잡았다. 엄마였다. 엄마가 발길질하는 시옷의 다리를 잡고 오른 발목을 앞쪽으로 홱 꺾었다. 발목이 부러졌다고 생각한 순간 신기하게도 방금까지 종아리를 쥐어짜던 통증이 물러났다. 시옷은 어리둥절하게 실눈을 뜨고 희붐한 새벽빛에 드러난 엄마의 실루엣을 쳐다보았다.
쥐가 났어. 이제 괜찮으니까 다시 자.
엄마가 일어나더니 뒷문을 열고 나갔다. 화장실에 다녀오려는 모양이었다. 시옷은 다리를 난도질당하는 것만 같았던 통증을 떠올리며 흠칫 몸을 떨었다. 엄마에게 얻어맞고 피멍이 든 다리로 방송국까지 왕복으로 걸어 다녀왔으니 다리에 쥐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앞으로 며칠은 더 방송국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밤마다 쥐가 나면 어쩌나 무서웠다. 그 끔찍한 통증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스르르 다시 잠이 들려는데 종아리에 뭔가 닿았다. 그것은 축축하고 따뜻했다. 엄마가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시옷의 종아리를 감싸고 가만가만 주물렀다. 엄마의 손길이 닿는 자리마다 처음엔 욱신거리다가 이내 묘하게 시원해졌다.
얼른 자. 눈 감고.
엄마의 목소리가 낮게 잠겨 있었다. 시옷은 늦도록 이어지는 엄마의 손길을 느끼며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
배운 적이 없는데 아는 노래가 있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나는 이 노래를 알았다. 보육원에서도 학교에서도 따로 배운 적이 없는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이 노래가 얼굴도 모르는 내 엄마에게서 왔다고 믿는다.
과제 일기를 낭독하는 고슴의 목소리는 평소 말하는 소리보다 조금 높고 청아했다. 어느새 봄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다. 지난가을 연희방글스튜디오 홈페이지 사진에서 보았던 정원의 꽃나무들이 차례차례 피었다 지더니 지금은 담장 밑의 모란과 작약이 탐스러운 봉오리를 열기 시작했다. 곧 담장 위를 기어가는 넝쿨장미에도 진분홍 장미꽃이 다글다글 피어날 예정이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는 제법 더워서 요 며칠 정원으로 향하는 통유리창을 활짝 열어둔 채 수업을 했다. 맑고 높은 고슴의 목소리가 열린 창을 넘어 연희동의 봄 정원으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가끔 나를 버린 엄마가 밉지 않으냐고 묻는다. 믿기지 않겠지만 살면서 단 한번도 엄마를 원망해본 적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사춘기가 시작되었고 매일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 넘쳤다. 내겐 후원자들이 선물한 비싼 핸드폰도 있고 심지어 노트북까지 있었지만(내 짝은 그런 내가 부러워 자기도 보육원에서 살고 싶다는 철딱서니 없는 소리를 하곤 했다) 나는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학교 앞 문방구에서 만원짜리 샤프를 훔쳤다. 당연히 들킬 줄 알았고 들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했다. 내게 늘 다정했던 담임선생님이(자주 내 손을 잡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역시 보육원 출신이라 어쩔 수 없다고 눈에 띄게 실망할지, 적당히 엄하고 그런대로 친절한 보육원 원장선생님이 화를 참지 못하고 매를 들지,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담임선생님은 실망하는 대신 내 손을 잡고 기도하는 횟수를 늘렸고 그러면서 가끔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원장선생님은 ‘보육원 출신이라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며 앞으로 갖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다. 물건을 훔치다 들켰어도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쪽팔려서 그 문방구에 다시 못 가고 훨씬 먼 문방구로 돌아가야 했던 점 빼고 내 삶은 더 나빠지지 않았다. 그때 처음 엄마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엄마라면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내지 않았을까? 너 같은 애 낳아서 창피하다고 매를 들었을까? 아니면, 엄마가 무능해 샤프 하나도 못 사줘서 이런 사달이 났다고 내 손을 잡고 서럽게 울었을까? 어느 쪽이든 엄마였다면 담임선생님이나 원장선생님처럼 산뜻하고 우아하게 반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엄마가 없어서 생긴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엄마란 그렇게 질척거리는 감정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 같았으니까. 내가 살면서 엄마를 한번도 원망해본 적이 없는 까닭은 엄마가 나를 버린 게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육원 출신이라고 하면 무조건 엄마에게 버림받았다고 단정한다. 그렇지 않다고, 내 엄마는 나를 버린 게 아니라 뺏겼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나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참 긍정적이고 착하다며 나를 칭찬한다. 누구도 내 엄마의 사정 같은 걸 짐작하지 않는다. 내가 혹시 모를 가능성을 이리저리 짐작해보는 것은 내가 긍정적이어서도 착해서도 아니다.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아는 노래임을 알았고, 내 엄마에게서 온 노래라고 생각했다. 아기에게 오래도록 각인될 노래를 한 시절 반복해서 불러주었던 사람이라면, 행여 사정이 생겨 아이를 직접 키울 형편이 못되었더라도 적어도 아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듯 버릴 사람은 아닐 거라는 믿음이 내겐 있다. 그게 내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엄마를 사랑하진 않아도 원망하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이다.
고슴이 잠시 낭독을 멈추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고슴이 가만히 목을 가다듬더니 갑자기 노래를 한곡 불러도 되겠냐고 말하곤 겸연쩍은 듯 하하 웃었다. 다들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시 후 고슴의 노래가 봄밤의 공기를 일렁이며 지나갔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
특집방송 녹화 당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시옷은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전날 오후 마지막 연습을 마치고 지휘자 선생님은 단원들을 세워놓고 말했었다.
다들 수고 많았다. 드디어 내일 우리는 실전에 나설 것이다. 오전 10시까지 각자 단복을 입고 말끔한 모습으로 오길 바란다. 두달 가까이 연습해온 우리의 실력을 보여주자. 알았나?
지휘자 선생님은 전투에 나서는 사령관처럼 비장하게 말했고 단원들도 그에 맞춰 힘차게 예! 하고 대답했지만, 시옷은 ‘단복’이라는 말에 숨이 턱 막혀버렸다.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는 시옷을 지휘자 선생님이 불러 세웠다. 선생님은 시옷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허리를 숙이고 시옷의 양어깨를 가만히 붙잡았다. 선생님의 다정한 눈빛이 시옷의 눈에 닿았다.
우리 맑은 소년, 내일 잘해보자.
시옷은 그 말이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와 같은 말임을 알았다. 시옷이 집으로 돌아와 엄마 눈치를 봐가며 저녁을 먹고, 바로 옆 도시에서 ‘폭도’들이 난동을 피우고 있다는 소식을 아홉시 뉴스에서 흘려듣고, 엄마의 채근에 씻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애니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단복을 구해주겠다던 애니는 이번에도 약속을 깜박 잊은 걸까? 시옷은 늦도록 뒤척이다 눈물을 매단 채로 잠들었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 끝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겁게 짓눌렸다. 할머니가 아침상을 들고 왔지만, 모래 한줌을 집어삼킨 것처럼 목구멍까지 깔깔했다. 시옷은 입맛이 없다고 말하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할머니가 굶으면 힘 빠진다고 두번 세번 다그치자 엄마가 딱 잘라 말했다.
놔두세요. 한끼 굶는다고 안 죽어요.
시옷은 엄마가 미웠지만, 그쪽을 노려볼 힘도 없어서 그저 윗목에 길게 누워 천장을 쳐다보았다. 미색 천장 여기저기 누런 얼룩이 보였다. 어떤 것은 기와지붕에 물이 새면서 생긴 얼룩이었고 어떤 것은 쥐 오줌 자국이었다. 집에 아빠가 있을 때는 직접 지붕에 올라가 비 새는 구멍을 막았고 천장 위로 쥐들이 우다다다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면 집 안 곳곳에 쥐약을 놓았다. 아빠가 사라진 집은 빠르게 허술해졌다. 시옷은 무책임하게 사라진 아빠를 원망했다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애니를 원망했다가 지휘자 선생님의 기대 어린 눈빛을 떠올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정말, 다, 끝났다.
초인종이 울렸다. 일요일 아침 일찍 시옷의 집에 찾아올 만한 사람은 없었다. 엄마가 일어나 마루로 나갔다. 엄마가 인터폰을 누르는 소리, 딸깍하고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시옷은 어떤 기대감도 없이 천장의 얼룩 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저 큼직한 눈사람 모양 얼룩은 하나로 세야 할까, 둘로 세야 할까. 엄마가 열어놓고 나간 문틈으로 애니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시옷은 벌떡 일어나 마루로 나갔다. 시옷을 보자마자 애니 엄마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애니가 지금 당장 너를 데려오라고 울고불고 난리다. 미안해서 어쩌니?
애니가 드디어 신호를 보냈다! 애니 엄마가 엄마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일요일 아침부터 정말 죄송해요. 애니가 다친 후로 부쩍 어리광이 늘었는데 오늘은 막무가내네요. 애들 밥은 제가 챙겨 먹일게요.
시옷은 얼른 옷을 갈아입고 애니네 집으로 갔다. 애니는 용케 오천원을 구한 걸까? 지금이라도 방송국 지정 의상실에 가면 단복을 살 수 있겠지? 방송국까지 걸어가면 리허설에 지각할지도 모르니 애니한테 차비로 백원만 더 빌려달라고 해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바빠서 시옷은 애니네 집 거실에서 파자마 바람으로 신문을 보고 있는 애니 아빠한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애니 방으로 들어갔다. 애니는 그새 몸을 움직이기가 나아졌는지 침대에서 나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시옷이 들어가자 애니가 다가와 시옷을 와락 끌어안았다.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시옷은 깜짝 놀라 애니를 살짝 밀어냈다.
오천원 못 구했어?
응.
애니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시옷의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시옷은 땅속으로 꺼지듯 애니의 침대에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애니가 시옷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너는 오늘 카메라 앞에서 아주 멋지게 「고향의 봄」을 부르게 될 거야.
애니 엄마는 아침마다 애니를 거울 앞에 앉혀놓고 촘촘한 빗으로 머리를 빗겨준다고 했다. 애니는 엄마가 머리를 당겨 묶을 때마다 얼굴 가죽이 벗겨지는 것처럼 아프다며 그 시간이 정말로 싫다고 했지만, 그런 풍경에 들어가본 적 없는 시옷은 그저 거울 앞의 애니가 부러웠었다. 오늘은 시옷이 그 자리에 앉았다. 시옷은 애니의 타원형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애니의 감색 단복은 시옷의 몸에 헐렁하게 컸다. 어깨가 평소보다 커 보였고 처음 입어본 주름치마도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애니는 시옷에게 자기 단복을 입혀놓고 예쁘다! 예뻐! 연거푸 탄성을 질렀다. 시옷은 애니의 칭찬이 과장임을 알았다. 시옷의 눈에 자신은 누나 옷을 훔쳐 입은 사내아이 같았다. 애니가 거울 앞에 의자를 끌어다놓고 시옷을 앉혔다.
손님, 원하는 스타일이라도 있으세요? 혜은이처럼 해드릴까요, 이은하처럼 해드릴까요?
애니의 능청에 시옷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웃었다. 애니는 진짜 미용사처럼 진지한 눈빛으로 거울에 비친 시옷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거울 속에서 만났다.
나한테 맡겨. 최고의 하루로 만들어줄 테니까.
애니는 촘촘한 머리빗으로 시옷의 짧은 머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반곱슬인 시옷의 머리는 애니의 말을 잘 들었다. 애니가 책상 서랍에서 해바라기 모양 머리핀을 가져와 앞머리에 꽂아주었다. 핀을 꽂으니 조금은 여자아이처럼 보였지만 애니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애니가 서랍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왔다. 상자 안에 각기 다른 모양의 립스틱이 세개 들어 있었다.
엄마가 쓰던 거야.
애니는 립스틱을 하나씩 열어 시옷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 대고 어느 색깔이 어울릴지 가늠해보았다. 빨간색, 분홍색, 다홍색 립스틱이 차례차례 시옷의 얼굴 옆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그래, 이거야.
애니는 짤따란 토막만 남은 빨간색 립스틱을 끝까지 밀어 올리고 시옷의 입술에 바르기 시작했다. 시옷의 입술이 빨간색으로 번들거렸다. 시옷이 보기엔 영 어색했지만, 애니는 자꾸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립스틱을 칠했다. 시옷의 입술이 점점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다 됐어. 일어나봐.
시옷은 애니가 시키는 대로 의자에서 일어나 한바퀴 빙그르르 돌아보았다. 주름치마가 살짝 부풀었다.
완벽해! 오늘은 네가 주인공이야!
애니가 다가와 양손으로 시옷의 뺨을 감쌌다. 애니의 커다란 눈망울이 시옷의 코앞에 다가왔다.
잊지 마. 오늘 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거야. 알겠지?
(끄덕끄덕)
약속해.
(끄덕끄덕)
애니가 준 동전으로 버스를 타고 방송국 앞에 내릴 때만 해도, 아니 방송국까지 긴 언덕길을 올라가는 동안에도 시옷은 자신이 있었다. 애니의 말대로 시옷은 오늘의 주인공이라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할 거라고 되뇌었다. 하지만 총 든 군인 두 사람이 지키고 서 있는 방송국 정문을 지나 유리로 된 본관 출입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자 자신감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시옷의 심장이 무섭게 날뛰기 시작했다. 유리에 비친 모습은 시옷의 눈으로 봐도 너무 이상했다. 아니, 기괴했다. 장난꾸러기 사내 녀석이 누나 옷을 훔쳐 입고 엄마 화장품까지 몰래 바르고 나온 것 같았다. 시옷은 출입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문 너머로 안내데스크 위에 걸린 벽시계가 보였다. 리허설 시간이 다 되었다. 시옷은 눈을 질끈 감고 출입문을 밀었다.
그날 시옷을 보는 지휘자 선생님의 표정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이름 붙일 수 있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지휘자 선생님은 놀란 얼굴로 시옷의 치마를, 앞머리에 꽂은 커다란 꽃핀을, 그리고 붉게 칠한 입술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선생님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 표정의 이름은 경악이었다. 선생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시옷을 보기만 했다. 벌써 무대 위에 올라가 리허설을 준비하던 단원들 사이에 술렁임이 지나갔다. 시옷에게 가장 먼저 말을 건 사람은 노래자랑 프로그램 작가였다.
어머, 얘! 너 왜 이러고 왔어?
시옷은 질문을 한 작가 대신 지휘자 선생님을 보고 말했다.
나는 남자가 아니에요.
너, 여자애였어?
이번에도 시옷은 작가의 질문에 지휘자 선생님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지휘자 선생님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제 어른이 된 시옷은 두번째 표정의 이름도 정확히 안다. 경악, 다음은 혐오였다. 선생님이 혐오가 가득한 얼굴로 시옷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제비다방 남자를 볼 때의 엄마 표정과 비슷했다. 지휘자 선생님이 와락 달려들어 시옷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평소처럼 다정한 손길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분노하고 있었다. 시옷은 어깨가 아팠다.
네가. 감히. 나를.
선생님은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피아노 쪽으로 가버렸다. 지휘자 선생님과 피디와 작가가 피아노 옆에 모여 뭔가를 의논했다. 피디와 작가는 이따금 시옷 쪽을 흘끔거렸지만, 지휘자 선생님은 눈길 한번을 주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속울음이 비어져 나왔지만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참았다. 여기서 울면 정말로 끝장이다. 혀끝에서 인공적인 립스틱 맛이 났다. 잠시 후 지휘자 선생님이 무대 쪽으로 다가가 6학년 소프라노 언니를 불렀다. 언니는 선생님을 따라 피아노 옆에 가서 섰다. 선생님이 언니에게 뭐라고 묻자 소프라노 언니가 시옷 쪽을 한번 흘낏 보고 지휘자 선생님에게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나누는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시옷은 들은 것처럼 선명하게 이해했다.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고 소프라노 언니가 「고향의 봄」 2절 솔로를 부르기 시작했다. 언니의 깊고 풍성한 목소리가 동굴 같은 스튜디오 안에 가득 차올랐다. 작가가 시옷에게 다가와 말했다.
넌 그만 집에 가도 돼.
시옷은 작가를 밀쳐내고 피아노 옆으로 달려가 건반 위를 우아하게 움직이는 지휘자 선생님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솔로예요. 내가 노래할 거예요.
소프라노 언니의 노래가 끊겼다. 시옷을 보는 지휘자 선생님의 표정이 또 한차례 바뀌었다. 그것의 이름은 경멸이었다. 선생님은 시옷의 손을 천천히 뜯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이거 놔라. 더럽구나.
경비아저씨가 들어와 어린 시옷의 몸을 단박에 들어 올려 스튜디오 밖으로 끌어낼 때까지 얼마나 오래 피아노 옆에서 난동을 피웠는지 시옷은 정확히 기억할 수 없다. 그저 ‘더럽구나’라는 지휘자 선생님의 말이 신호였다는 것, 간간이 작가와 피디가 시옷을 붙잡아보려 했다는 것 정도만 기억한다. 어느 순간부터 동굴 같은 스튜디오 안에 시옷이 악을 쓰는 소리만 울렸고 어느새 바닥에 드러누웠는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조명이 쏟아질 듯 위협적으로 보였다. 도리질을 치다가 찢어진 악보 조각이 바닥에 흩어진 걸 봤을 때는 목이 아프도록 비명을 질러대는 와중에도 이제 정말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이 의식 언저리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곧 경비아저씨가 시야에 들어왔고 드러누운 시옷을 가볍게 안아 들더니 그대로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다. 스튜디오 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를 듣자마자 시옷은 악쓰기를 멈추었다. 경비아저씨가 본관 출입문 바로 앞에 시옷을 내려놓고 말했다.
쪼끄만 녀석이 커서 뭐가 되려고 벌써부터 난동을 부리냐?
시옷은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다시 스튜디오 쪽으로 내달렸지만, 금세 경비아저씨에게 붙들렸다.
이놈, 저기 군인 아저씨들 안 보이냐?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고 싶으냐?
시옷은 군인이 무섭지 않았다. 그들은 시옷이 모르는 영역이었다. 지금 시옷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지휘자 선생님이었다. 시옷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아니 사내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자마자(그 둘은 엄연히 다르다) 180도 바뀌어버린 선생님의 태도였다. 어제만 해도 기대를 가득 담은 눈빛으로 시옷을 바라보았던 선생님이 오늘은 경악과 혐오와 경멸을 담아 시옷을 노려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시옷에게 달라진 건 없었다. 시옷은 여전히 맑은 소리로 노래할 수 있었다. 시옷이 입은 치마 단복이나 머리핀, 붉게 칠한 입술 같은 것을 변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변신이라기보다 매일 갈아입는 옷처럼 사소한 변화가 아니던가. 그토록 사소한 것들이 커다란 너울이 되어 시옷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수 있다니, 시옷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옷의 성별을 오해한 건 지휘자 선생님이었는데 왜 시옷이 비겁한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친 것처럼 분노하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지. 어린 시옷의 머리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거대한 수수께끼였다.
등 뒤에서 본관 출입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시옷은 등이 떠밀리며 세계의 언저리로 쫓겨나는 것 같았던 그 느낌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된다). 눈물은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악을 썼는지 유리 조각을 삼킨 것처럼 목이 아팠다. 시옷은 뒤를 돌아 출입문 통유리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훨씬 더 기괴하게 일그러진 아이가 거기 있었다.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헝클어졌고 애니가 꽂아준 머리핀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주름치마는 한쪽으로 홱 돌아가 있고 먼지가 묻어 더러웠다. 입술 주위에 빨간색 립스틱이 잔뜩 번져 있었고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두 뺨에 눈물과 콧물이 얼룩져 있었다. 시옷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보았지만, 립스틱 자국이 더 흉하게 번질 뿐이었다. 단복 소매 끝으로 문질러도 말끔히 닦이지 않았다. 시옷은 체념하고 인제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애니가 기다리는 동네로, 아무도 반기지 않을 집으로. 정문을 지나가는데 총을 든 군인들이 철모 아래로 시옷을 흘끔거렸다. 시옷은 버스 정류장을 그대로 지나쳐 내처 걸었다. 주머니에 애니가 빌려준 차비가 있었지만 집에 서둘러 갈 필요는 없었다. 시옷은 그냥 걸었다. 급할 것 없이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 곳곳에 군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총을 든 채 커다란 건물마다 지키고 서 있었다. 저들은 누구로부터 건물을 지키고 있는 걸까? 뉴스에서 보았던 폭도들로부터? 화면 속의 폭도들은 공공기관 건물을 점령하고 불을 질렀고 경찰을 향해 총을 쏘았다. 오늘 지휘자 선생님과 합창단원들에게 시옷도 폭도로 보였을 것이다. 폭도란 난폭하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새롭게 눈물이 쏟아졌다. 스튜디오 안에서 다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눈물이 나왔다. 아까는 억울했고 지금은 서러웠다. 시옷은 사내아이가 아니라서 노래를 뺏겼다. 시옷은 노래를 잃고 잔뜩 잠긴 목으로 억억 울며 걸었다. 오월의 한복판을 울며 걷는 시옷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시옷이 노래를 뺏기고만 그즈음 바로 옆 도시에서 무고한 시민 수백명이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꼭 10년 후의 일이다. 스무살 시옷은 대학 선배들이 보여준 광주항쟁 당시의 사진과 영상을 보고 열살 때 자신을 떠올렸다. 지척에서 아무 죄 없는 이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쓰러지고 폭도로 몰리는 억울한 누명을 썼는데 자신은 고작 노래 하나 뺏겼다고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울었다니, 스무살 시옷은 열살 시옷의 철없음에 경악했다. 그리고 10년 만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노래를 뺏기고 억울해했던 어린 자신이 부끄러워 더는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고. 다시는 노래하지 않겠다고. 열살 시옷은 노래를 잃었고 스무살 시옷은 노래를 버렸다.)
*
아, 그만 좀 울어요.
짜증이 가득 실린 고슴의 한마디를 듣고서야 나는 내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방금까지 내가 써온 과제물 일기를 읽고 있었는데 어느새 가쁜 숨을 몰아쉬며 흐느끼고 있었다. 내 어깨를 살짝 감싸 안고 등을 쓸어내리는 사람은 림자 같았다. 강의실 안에는 헉헉대는 내 과호흡 소리만 들렸다. 낭독 도중에 발작이라도 일으킨 걸까.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지만, 가슴과 어깨는 저 혼자 격렬히 오르내렸다.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어보세요.
림자가 하나 둘 셋, 들이마시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내쉬라고 옆에서 가만가만 숫자를 세어주었다. 하나 둘 셋, 들이마시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내쉬고. 내 몸이 커다란 파이프가 되어 힘겹게 숨을 토해냈다.
잘하고 있어요. 혹시 약 가진 거 있어요?
림자가 혹시 껌 가진 거 있냐고 묻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지갑 동전 칸에 늘 챙겨 넣고 다니는 비상용 항불안제를 떠올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림자가 강의실 구석의 음료 바에서 찬물을 한컵 받아왔다. 내가 손을 바르르 떨며 약봉지를 찢고 살구색 알약을 삼키는 동안 고슴과 도치와 마웨가 말없이 그러나 골똘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다. 너무 창피해 한시라도 빨리 사람들 곁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일기쓰기교실의 홍보 문구가 떠올랐다. 지난가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두 계절이 지나도록 여전히 일기 속의 나를 놓아주지 못하는 내가 너무 한심했다. 놓아주기는커녕 기어이 일기 속의 나에게 압도당해 다른 수강생들 앞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말았다. 바닥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얼굴에 뜨겁게 달군 돌을 던졌다. 열살에 노래를 뺏기고 스무살에 노래를 버렸다고 해놓고 쉰살이 넘어서도 여전히 그 순간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니, 수치스러워 얼굴을 어디에 묻어버리고 싶었다.
언니!
누가 등을 찰싹 때리며 말을 걸었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고슴이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언니라니, 나는 고슴이 다른 사람과 착각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기까지 했다.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늘 단도직입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고슴답게 거침이 없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나는 무슨 말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아까, 언니 막 우는데 그만 울라고 짜증 낸 거요.
아, 그거. 괜찮아요.
나는 괜찮지 않았지만 빨리 고슴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고슴은 나를 놓아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제 고슴은 스스럼없이 내 팔을 붙잡아 팔짱을 끼고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어른이 어린애처럼 엉엉 우니까, 막 겁이 나더라고요. 언니 정병 있는 거 알았으면 안 그랬을 거예요. 미안해요.
정병?
정신병이요.
숨이 턱 막혔다. 매일 항불안제와 항우울제를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 정신병 맞지 싶은데도 고슴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정병’이라는 말이 마음을 쓱 베고 지나갔다.
괜찮아요(그러니까 빨리 꺼져줘).
언니! 오늘 기분도 거지 같은데 술 한잔 사줄래요?
예?
맥주 딱 한잔만 사주세요. 방금 애인이랑 싸워서 딱 죽고 싶거든요.
도치님이랑 싸웠어요?
에이, 수업도 끝났는데 무슨 도치님. 그리고 말 놓으세요. 내 이름은 김수현이에요. 아무 특징 없는 흔한 이름이죠. 도친지 도둑놈인지 그 새끼는 이재민. 걔 이름도 뭐 별거 없어요. 보육원 출신이 다 그렇죠, 뭐.
내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고슴이 내 팔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에이, 농담이에요. 보육원 출신만 할 수 있는 농담이요. 말은 이렇게 해도 막 기죽고 그러지 않으니까 걱정 마세요.
딱 한잔만 마시자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1차로 간 술집에서 소주를 두병이나 마시고 2차로 노래방까지 오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고슴은 소주 두병을 거의 혼자 다 마셔놓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소주 한잔을 천천히 한시간 넘게 마신 내 얼굴만 새빨개졌다. 고슴은 소주를 마시는 내내 도치, 아니 이재민의 험담을 했다. 동갑인 주제에 공부 좀 잘해서 조금 좋은 대학에 다닌다고 애인을 철모르는 애새끼 취급한다, 무슨 말을 못하게 일일이 지적하며 잔소리한다, 지난주에도 과제 일기에 왜 보육원 출신인 걸 밝혔느냐, 왜 물건 훔친 이야기를 발표해 보육원 출신을 향한 편견을 키웠느냐, 밤새도록 훈장질을 하더라. 듣다보니 고슴은 아까 강의실에서 내게 짜증을 낸 것을 사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인과 싸운 다음 속풀이를 하기 위해서 나를 붙잡았던 게 분명해 보였다. 소주 두병을 다 마시도록 내내 이재민을 욕했으면서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다며 노래방에 가자고 했다. 살면서 노래방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내 말을 고슴은 믿지 않았다. 고슴은 이번 달 용돈이 뚝 떨어졌다고 술값도 내가 내게 하더니 노래방 비용까지 떠넘기고 자기는 카운터 옆 냉장고에서 캔맥주 세개를 꺼내 들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들어가본 노래방은 텔레비전에서 봐왔던 모습과 똑같아서 별로 낯설지 않았지만 고슴이 무슨 조종기처럼 생긴 큼직한 리모컨을 주며 노래를 예약하라고 했을 때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노래를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리모컨을 다시 돌려주자 고슴은 두번 권하지 않고 혼자 리모컨을 척척 눌러가며 여러 곡을 예약했다. 귀가 먹먹하게 느껴지는 노래방 안에 큰 소리로 반주가 시작되었다. 고슴은 캔맥주를 따서 한모금 길게 들이켜고 노래를 시작했다. 몸이 저절로 흔들릴 만큼 신나고 빠른 곡이었다. 고슴이 노래방 기계 앞으로 나가 쿵쿵 뛰며 노래를 부르다가 어느새 탬버린을 가져와 내 손에 쥐여주었다. 나는 왜 이러고 있나 싶으면서도 고슴이 부르는 노래에 맞춰 성실하게 탬버린을 흔들었다. 쟁쟁 공기를 울리는 스피커의 진동과 공간에 배어 있는 희미한 담배 냄새 같은 것을 감각하며 평소와는 전혀 다른 말투로 담담하게 진술했던 고슴의 일기들을 떠올렸다. 그곳이 어딘지 몰라도 자꾸 말을 달리자고 외치며 노래하는 저 김수현은 감정의 동요 없이 담백하게 써 내려간 일기 속 고슴과 같은 사람일까. 두 사람은 어느 문장에서 비로소 마주치고 헤어졌을까. 아니, 애초에 만나기는 했을까.
아, 숨차.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 다음 노래는 언니가 불러요.
세곡이나 연달아 부른 고슴이 숨을 헐떡이며 선 채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핸드폰만 챙겨 들고 룸 밖으로 나갔다. 고슴이 예약해둔 노래의 전주가 시작되었다.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노래방 기계 화면에 푸른 들판의 이미지가 뜨고 익숙한 곡조가 흘러나왔다. 「고향의 봄」이었다. 나는 마이크를 들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입 모양으로만 가만가만 「고향의 봄」을 불렀다. 간주가 들리고 2절이 시작되었을 때 잠시 위기의 순간이 있었지만, 억울하지도 서럽지도 않게 담담한 얼굴로 2절을 마저 불렀다. 어느새 목구멍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온 시옷의 목소리를 나는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고향의 봄」을 끝으로 더이상 노래가 나오지 않았다. 예약곡도 고슴도 없는 룸 안이 무섭게 고요해졌다. 조명 혼자 천천히 돌아가며 흰색 벽에 알록달록한 빛 조각을 뿌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고슴은 오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보니 시간은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적요가 길어졌다. 오월의 봄밤 난생처음 와본 노래방 안에서 난데없이 나를 덮쳐온 어떤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석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석구는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원래 밤잠이 없는 석구가 불안한 음성으로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석구가 놀랄까봐 빨리 용건부터 말했다.
내가 해준이에게 노래를 불러준 적이 있어?
석구는 그게 헤어진 전남편에게 한밤중에 전화를 걸 만큼 중요한 문제냐고 웃음기를 섞어 물었다.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야. 내가 정말로 해준이에게 노래를 불러준 적이 없어?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말해봐. 내가 그렇게 형편없는 엄마였니?
석구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석구가 전화를 끊었을까봐 석구야, 하고 불러보았다. 석구가 다정한 음성으로 응,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조금 기다렸다가 말했다.
있어.
있어?
응. 해준이 태어난 날.
내가 해준이를 낳은 날?
응. 간호사가 나한테 해준이를 안겨주고 병실로 보냈어. 우린 같이 네가 분만 후 처치를 받고 올 때까지 기다렸어. 그런데 아직 눈도 못 뜬 해준이가 계속 에에에 울더라고. 나는 태어난 지 몇분 되지 않은 아기가 부서질 것만 같아 손을 댈 수 없고 젖을 줄 수도 없어서 쩔쩔맸지. 그때 네가 간호사 부축을 받으며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병실로 들어왔어. 그리고 아기 옆에 누웠지. 내가 아기가 계속 운다고, 어쩌면 좋으냐고 하니까 간호사가 원래 그러는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나가버리더라고. 아직 젖을 먹이기도 이르니 그냥 울게 놔두라고. 내가 어쩔 줄 몰라 병실을 오락가락하는데 네가 해준이 쪽으로 돌아눕더니 그 작은 가슴을 토닥이며 노래를 불렀어.
내가? 정말?
응.
무슨 노래?
엄마가 섬 그늘에, 하는 노래 있잖아. 은근히 서글픈 노래인데 네가 그 노래를 참 달콤하게 부르더라. 나도 네가 노래하는 걸 그날 처음 들었어.
기억나지 않아.
내가 기억해. 네가 그 노래를 2절까지 천천히 부르며 해준이를 토닥이자 신기하게도 해준이가 울음을 멈추고 다시 잠들었어. 신비스럽고도 아름다운 장면이었는데, 나는 그때 좀 질투를 했던 것 같아. 나는 그날 해준이를 처음 만났는데 너와 해준이는 내가 모르는 어떤 시간을 공유했던 게 분명해 보였거든.
다행이다.
뭐가?
해준이에게 노래를 불러준 적이 있어서.
왜? 해준이가 또 뭐라고 해?
아니. 기억해줘서 고마워.
나는 전화를 끊었다. 아직 고슴은 오지 않았다. 나는 노래방 책을 뒤적여 「섬집 아기」를 찾았다. 그리고 고슴이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대로 그 노래를 시작할 수 있게 미리 번호를 입력해두었다.
*
시옷은 경계에 서 있다. 나는 그 선을 알아본다. 꿈속은 밤이다. 캄캄한 공간에 오직 시옷과 시옷 앞을 가로지르는 선이 있다. 내 의식은 꿈속의 시옷을 멀리서 바라볼 뿐 경계 앞에 선 시옷의 마음과 생각은 조금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내 꿈에 찾아온 시옷은 40년 전 저 문턱 앞에 서봤던 어린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시옷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안다. 꿈속에 빛을 조금 보태보자. 희붐하게 빛이 새어들며 시옷 앞에 문이 하나 드러난다. 가장자리부터 녹이 슬어가는 청록색 철제 대문이다. 대문은 처음 페인트를 칠했을 때의 허술한 붓 자국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시옷은 아직 모르겠지만 나는 저 녹색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 지붕 대신 평평한 옥상이 있는 작은 단층집. 그 좁은 공간에 방 두개와 작은 거실, 부엌 하나를 쓰는 가구와 부엌 딸린 단칸방을 쓰는 또다른 가구가 산다. 손바닥만 한 마당과 수돗가, 실외 변소는(이 공간은 도무지 ‘화장실’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두 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한다. 집은 야산 바로 아래 서 있어서 언제나 응달이다. 폭우라도 쏟아지면 야산의 흙이 무너져 집을 덮칠까봐 조바심을 쳐야 한다. 재래식 변소에서 사시사철 악취가 풍기고 여름이면 암모니아가 올라와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다. 음식물 쓰레기를 조금만 허술하게 관리하면 당장 굵직한 지네가 꼬인다. 좁은 옥상 빨랫줄엔 자그마치 여덟명분의 빨래가 널린다. 시옷은 이제 저 문 너머에서 살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생활에 적응하느라 한동안 어지러울 것이다. 변소에 다녀올 때마다 토악질을 할 것이고 욕조가 없어서 좁은 부엌에 고무대야를 끌어다놓고 거기서 목욕을 할 것이다. 예전 집의 절반도 안 되는 안방에서 아빠 엄마가 아기 동생의 옹알이에 기쁨의 탄성을 지르는 동안 두 사람이 누우면 딱 맞는 작은 방에서 할머니의 쓸쓸한 독경 소리를 자장가 삼아 도무지 찾아오지 않는 잠을 하염없이 기다릴 것이다. 시옷은 그 집에서 기다림을 배울 것이다. 그러나 기다리는 대상의 실체가 없기에 그 기다림은 영원할 것이다. 아빠가 돌아오고 아기 동생이 태어나지만, 시옷은 늘 집 안에 어느 한 자리가 비어 있음을 느끼고 자꾸만 누구를 기다릴 것이다. 봄이면 엄마 심부름으로 빨래를 널러 옥상에 올라갔다가 문득 해 지는 방향을 바라보며 막무가내로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보려 할 것이다.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있으면 야산에 기우뚱하게 자라는 산벚나무에서 검붉은 열매가 후드득 떨어지며 시옷의 정수리를 때리기도 할 것이다. 앗. 열매의 충격으로 기다림에서 깨어나면 문득 저 아래 시멘트 바닥의 단단함을 가늠하며 까마득한 추락을 상상해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꿈속의 시옷이 저 문턱을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대로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훨훨 날아가버렸으면 좋겠다. 하릴없는 바람인 걸 알지만 시옷이 내 꿈 밖으로 도망쳤으면 좋겠다. 그러나 시옷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시옷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청록색 대문을 힘주어 민다. 문은 끼이익 비명을 지르면서도 잘도 열린다.
넘어가지 마.
시옷이 내 말을 알아들었나? 꿈속의 시옷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순간 나는 깨닫는다. 시옷은 문턱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전부 알고 있다고. 알면서도 기어이 저 경계를 넘어가려 한다고.
넘어가지 마.
나는 사정한다. 시옷은 나를 보고 웃는다. 그 웃음이 말한다. 더는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이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때라고. 저 너머에 어떤 음험한 세계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경계를 넘어야 한다고. 세계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통과하는 법이라고. 어린 시옷이 제법 어른스럽게 말한다. 손을 뻗어보지만, 시옷은 잡히지 않는다. 시옷은 멀리서 내게 인사하고 문턱을 넘어간다. 순간 이야기는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
시옷은 낯선 곳에서 잠을 깼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천장은 여기저기 누런 얼룩이 진 시옷의 집 천장이 아니었다. 이 천장은 깨끗했다. 코끝에 닿는 냄새도 낯설었다. 왈칵 겁이 났다. 시옷은 눈을 몇차례 깜박이며 정신을 차려보았다. 그리고 기억해냈다. 이곳은 시옷의 집이 아니라, 엄마와 둘이 잠시 신세를 지러 온 큰이모의 아파트라는 것을.
시옷이 맨날 목덜미를 긁어대도 아빠는 결국 집에 돌아왔다. 시옷에겐 한없이 잔인했던 봄이 지나가고 순서대로 여름이 찾아왔을 때 아빠도 이제 자신의 차례라는 듯 대문을 넘어 성큼성큼 마당으로 들어섰다. 할머니와 엄마는 아빠의 등장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덤덤하게 아빠를 맞았다. 시옷만 놀라 아! 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빠가 시옷을 끌어안고 번쩍 위로 들어 올렸다. 시옷의 세계가 기우뚱했다.
우리 딸, 그새 쑥 컸네. 쌀가마니보다 무거워졌어.
흰소리부터 하는 걸 보니 진짜 아빠가 맞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밥부터 차려야겠다며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갔고 엄마는 아빠가 내려놓은 짐가방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아빠와 시옷만 남았다.
아빠 보고 싶었어?
(끄덕끄덕)
아빠 보니까 좋아?
(끄덕끄덕)
좋은데 왜 울어?
아빠가 시옷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자기도 울었다. 시옷은 아빠가 갑자기 들이닥쳐 놀라서 울었고, 아빠 생각만큼 아빠를 간절히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 게 미안해서 울었다. 아빠는 시옷을 한번 더 꽉 끌어안고 마당에 내려주었다.
시옷은 아빠가 돌아오면 모든 게 예전과 같아질 거라고 믿었다. 엄마는 다시 다정해지고, 할머니는 한숨을 쉬지 않으며, 아빠는 유쾌하고 호탕한 시옷만의 아빠가 되어 매달 신간 만화잡지를 사주고 자전거를 타고 함께 극장에 가 재미있는 영화를 보여줄 거라고. 그러나 아빠가 돌아온 후 집 안은 어지러운 속도로 예전과 달라졌다. 엄마는 무서울 만큼 배가 커지면서 신경질과 짜증이 늘어갔고 할머니는 방바닥이 꺼질 정도로 무겁게 한숨을 쉬어댔으며 아빠는 뭘 해도 잔뜩 기가 죽어 있었다. 시옷을 따돌리고 어른들끼리만 숙덕거리다가 조용히 다투기를 반복하더니 언제부턴가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조상 대대로 살면서 아빠도 태어나고 시옷도 태어났던 이 집을 팔고 급한 빚부터 해결하기로 했다는 것은 어른들이 수군거리는 걸 조각조각 엿듣고 알았지 누구도 시옷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해주지 않았다. 시옷은 그림자처럼 집 곳곳에 숨어서 어른들이 흘리는 이야기의 조각을 주워 들고 자신의 앞날을 예측했다. 시옷네는 도시에서 가장 집값이 싼 동네로 이사하기로 했다. 철둑 너머 할머니네 집보다 한참 더 들어가야 나오는 그 동네는 하수구 같은 개울이 있고 조금만 더 들어가면 공동묘지가 나온다고 했다. 묘지에는 한국전쟁 이후로 세상을 떠난 군인과 경찰들이 묻혀 있어서 군경묘지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애니가 알면 그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고 물을 것이다. 묘지 옆이라니, 무서워서 어떻게 살아? 그러나 그곳엔 묘지를 떠도는 귀신보다 먹고사는 일이 훨씬 무섭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산다는 걸 시옷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다.)
이사할 집이 정해지자 어른들은 빠른 속도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가져갈 수 없는 대부분의 짐을 팔거나 버렸다. 워낙 크고 오래 살았던 집이라 정리할 물건이 많았다. 다락방에서, 방마다 딸린 벽장에서, 부엌에 딸린 곁방에서, 또 뒷마당 창고에서 시옷이 처음 보는 물건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이 조상 대대로 써온 옛 물건이었다. 개다리소반이 잔뜩 나왔고 사극에서나 보았던 나무 궤짝과 작은 장롱도 여럿 있었다. 한자가 가득한 누런 옛날 서적과 종이로 만든 우산, 누가 썼는지 모를 갓도 나왔다. 애니 아빠가 골동품상을 데려와 괜찮은 물건들은 좋은 값에 팔아주었다. 나머지는 고물상에 헐값으로 넘겼다. 오래된 물건들만 버리고 가는 게 아니었다. 옷장에 걸린 아빠의 양복들과 엄마의 양장들도 거의 다 정리했다. 아빠가 아꼈던 서재의 책들도 전부 팔았다. 수레를 끌고 온 고물상 아저씨가 노끈으로 묶어놓은 책들을 즉석에서 무게를 달아 현금으로 바꿔주었다. 책이 가득 실린 아저씨의 수레바퀴가 한껏 짜부라들었다. 제비다방 남자가 시옷에게 읽어주었던 백과사전도 모두 수레에 실렸다. 시옷이 좋아했던 안데르센 전집도 한데 묶여 나갔다. 누구도 시옷에게 저 그림책들을 팔아도 되겠냐고 묻지 않았다. 많이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때쯤 시옷도 많은 것을 체념한 상태였으니까. 누구도 자신이 아끼는 물건을 따로 챙기지 않았다. 할머니는 시집올 때 해왔다는 소중한 유기그릇을 고물상에 넘겼고 엄마도 큰맘 먹고 산 본차이나 그릇 세트를 절반 넘게 버렸다. 미색 바탕에 노란 테두리가 그려진 그 그릇을 시옷은 계란 그릇이라고 불렀다. 계란 그릇이 처음 시옷의 집에 들어왔을 때를 시옷은 똑똑히 기억했다. 동네에서 가장 넓은 시옷의 집 마당이 임시 상점이 되었다. 아저씨는 수레 가득 그릇을 싣고 왔다. 동네 여자들이 잔뜩 몰려와 그릇을 구경했다. 아저씨는 동그란 접시 하나를 번쩍 들고 이 무늬는 영국에서 디자인했고 독일 현지 기술로 구웠으며 프랑스 코스요리에 맞춤하게 세트를 제작했다고 자랑했다. 무엇보다 장점은 아무리 내던져도 절대 깨지지 않는 강인함이라며 시옷의 집 토방에 접시 하나를 냅다 던져버렸다. 쨍그랑!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동네 여자들이 헉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아저씨 말대로 접시는 깨지지 않았다. 누군가 짝짝짝 박수를 쳤다. 아저씨는 묘기를 선보이는 서커스 단원처럼 각기 다른 크기의 접시를 연달아 토방에 내동댕이쳤다. 놀랍게도 그릇은 전혀 깨지지 않았다. 여자들이 앞다투어 그릇 세트를 샀다. 엄마도 애니 엄마도 가장 구성품이 많은 세트를 샀다. 동네 사람들이 전부 집으로 돌아가자 아저씨는 마당을 내주어서 고맙다며 엄마에게 찻주전자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엄마는 그 찻주전자를 아껴 썼다. 영국 귀족들이 홍차를 담아 마실 것처럼 생긴 우아한 그 주전자를 시옷도 욕심냈지만 엄마는 다른 건 몰라도 그 찻주전자만은 혼자 썼다. 며칠 후 그릇 파는 아저씨를 우연히 만났다. 골목 안에는 아저씨와 시옷뿐이었다. 아저씨의 수레가 골목 바닥에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렸는지 한쪽으로 훅 기울었고 수레 가득 실려 있던 그릇이 와르르 쏟아졌다. 시옷은 눈앞에서 접시와 대접 수백장이 한꺼번에 산산조각 나는 순간을 목격했다. 방금까지 온전한 그릇이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쓸모없는 파편이 되어 골목 한가운데 쌓였다. 아저씨보다 시옷이 더 당황했을 것이다. 아저씨가 신나게 내동댕이쳤던 접시는 하나도 깨지지 않았는데 그저 수레가 기울면서 한쪽으로 쏟아진 그릇들은 전부 사금파리가 되었다. 아저씨가 난처한 얼굴로 시옷을 보았다. 시옷은 아저씨의 시선에 붙들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마어마한 비밀을 혼자 목도한 것 같았다. 그때 아저씨가 가만히 손을 들더니 검지를 세워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시옷은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아들었다. 쉿! 시옷도 검지를 들어 입술에 댔다. 엄청난 비밀을 간직한 엄마의 소중한 찻주전자도 고물상 수레에 실렸다.
응접실 짐을 정리하는 날, 아빠의 전축을 들어낸 자리에서 세모난 플라스틱 조각을 발견했다. 시옷은 누가 보기 전에 얼른 발로 밟아 감추었다가 몰래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제비다방 남자의 물건이었다. 남자는 기타를 칠 때 그것을 손가락 사이에 쥐고 기타 줄을 튕겼다. (그런 물건을 기타 피크라고 부른다는 것은 시옷이 대학에 가서 알게 된다.) 시옷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매끄러운 플라스틱 조각을 매만지면서 가끔 제비다방 남자를 생각했다. 아빠는 제비다방 마담의 빚을 갚았을까? 제비다방 남자는 여전히 매캐한 최루가스 냄새를 묻히고 다닐까? 설마 애니가 보여준 현상수배범 전단의 대학생들처럼 경찰에게 쫓기며 컴컴한 곳을 헤매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좀처럼 답이 없는 질문이 떠오를 때마다 시옷은 남자의 기타 피크를 닳도록 어루만졌다.
용달차를 불러 군경묘지 옆으로 이사하는 날 엄마와 시옷은 큰이모 집에 갔다. 아침저녁으로 손발과 얼굴이 퉁퉁 부어 걷기도 힘들어하는 임신부에게 이사 일은 무리였다. 아빠와 할머니가 친척들을 불러 짐을 옮기고 정리하는 며칠 동안 엄마와 시옷은 큰이모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큰이모 집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5층 아파트였다. 엄마와 시옷이 들어서자 이모는 엄마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큰이모는 엄마에겐 엄마 같은 존재였다. 큰이모는 시옷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엄마를 아기 취급했다. 틈만 나면 침대에 누워 쉬라고 했고 밥때가 되면 얼굴이 많이 축났다며 자꾸 고기반찬을 엄마 숟가락 위에 올려주었다. 큰이모는 엄마의 불행을 한탄하다가 어김없이 아빠와 할머니를 원망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아빠야 그렇다 치고 할머니 욕은 왜 하냐고 쏘아붙였더니 큰이모가 호탕하게 웃으며 시옷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가 최씨 핏줄 아니랄까봐, 편드는 거냐?
이모가 반달 모양으로 자른 복숭아를 포크에 찍어 건네며 덧붙였다.
근데, 너 그거 아냐? 네가 편드는 너네 할머니는 최씨 아니다?
시옷은 깜짝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복숭아를 씹었다.
나도 알아요. 할머니도 최씨 아니고 우리 엄마도 최씨 아니에요. 나랑 아빠만 최씨예요.
아이고, 우리 애기 똑소리 나네. 누나 노릇 잘하겠다.
시옷의 심장이 연달아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할머니와 엄마가 자신과 다른 성씨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지적당하고 놀란 가슴이 큰이모의 ‘누나 노릇’이라는 말에 연거푸 날뛰었다. 엄마의 저 불룩한 배 속에 남자 아기가 들어 있다는 말인가? 큰이모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엄마가 알려주었을까? 그렇다면 엄마는 왜 시옷이 아닌 큰이모에게만 엄청난 비밀을 들려주었을까? 엄마와 시옷은 성이 다르고 엄마와 큰이모는 성이 같아서? 좋겠다. 시옷은 속으로 말했다. 정말로 시옷이 누나가 될 예정이라면 아기 동생은 시옷에겐 없는 어떤 것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다. 그 아이는 시옷처럼 사내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노래를 뺏길 일은 없을 것이다. 좋겠다. 이번에도 시옷은 속으로만 말했다. 좋겠다. 여러번 말했더니 좀 쓸쓸해졌다. 어디에도 시옷의 편은 없는 것 같았다. 누구는 시옷과 성씨가 달라서, 누구는 시옷과 성별이 달라서 시옷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았다.
엄마는 큰이모 집에서 내리 잠만 잤다. 밥때가 되어 큰이모가 깨우면 겨우 몇술 뜨는 시늉만 하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맘고생이 얼마나 심했으면 친정에 와서 저렇게 죽은 듯이 잠만 자겠냐고, 큰이모는 끌탕을 했다. 책도 없고 장난감도 없고 함께 놀 또래도 없는 큰이모 집에서 시옷은 종일 심심했다. 애니가 보고 싶었다. 이모와 이모부 단둘이 사는 아파트는 세간도 별로 없어 구경할 물건조차 없었다. 시옷이 심심하다고 몸부림을 치자 큰이모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며 낡은 사진첩을 한권 가져다주었다. 거기 엄마의 소녀 시절 사진과 결혼식 사진이 있었다. 흑백사진 속에서 젊은 엄마와 아빠가 웨딩드레스와 양복을 입고 긴장한 얼굴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사진들 속에 지금보다 훨씬 젊은 할머니와 이모, 고모들의 모습도 보였다. 사진첩을 거꾸로 넘길수록 엄마가 시간을 거슬러 오르며 점점 젊어졌다. 시옷은 교복을 입은 한 소녀의 사진과 마주쳤다. 소녀가 입은 교복은 방송국 어린이합창단복과 비슷한 세일러복이었다. 소녀는 두꺼운 책 한권을 무릎에 얹어놓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시옷은 그 소녀가 엄마란 걸 알았고 동시에 엄마란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사진들 속에서 소녀는 불행이라곤 조금도 알지 못하는 얼굴로 천진하게 웃었다. 사진첩 속 소녀는 한껏 사랑받고 있었다. 소녀의 미래는 온통 행복으로 도배된 것처럼 보였다. 미래를 향해 반짝이는 소녀의 눈빛을 보고 어느 누가 감히 불행을 점치겠는가? 시옷은 다시 교복 입은 소녀의 사진으로 돌아갔다. 소녀의 골똘한 눈빛에 점점 노여움이 묻어났다. 소녀가 시옷을 노려보았다. 전부 너 때문이야. 소녀가 시옷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말했다. 너만 아니었어도. 시옷은 얼른 사진첩을 덮었다. 오직 행복만 누리길 축원받으며 자란 소녀의 미래가 고작 자신이라는 걸 알아서 시옷은 두려웠다. 엄마가 자신을 왜 미워하는지 전부 이해한 것 같아서 시옷은 떨었다.
*
엄마, 전화 연결이 안 돼서 음성메시지 남겨. 일부러 안 받는 건 아니라고 믿어. 엄마 요즘 컨디션이 별로라고 아빠한테 들었는데, 어디 많이 아픈 건 아니지? 생각해보면 엄마랑 나, 불필요한 싸움에 시간을 허비했던 것 같아. 내가 원하는 건 그저 평범한 엄마였는데, 엄마는 늘 어려운 사람이었거든. 나보다 일이 더 중요하고, 내가 있는 집보다 일이 있는 직장이 훨씬 소중한 사람. 난 그게 서운했어. 언젠가 유치원 버스가 오려면 30분이나 남았는데 엄마 출근 시간에 늦는다고 30분 동안 나 혼자 버스정류장에 서 있게 했잖아. 꽤 추운 날로 기억해. 아파트 진입로 옆에 꼼짝없이 서서 오가는 차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했어. 나는 보호받아야 하는 어린아이인데, 언제라도 달리는 자동차 사이로 뛰어들 수 있고 나쁜 사람한테 유괴당할 수도 있는 약자인데, 엄마는 고작 30분 늦지 않는 게 나보다 훨씬 중요해서 어린 나를 그 춥고 무서운 길바닥에 혼자 세워두고 가버렸구나. 너무 서러웠어. 나를 최우선으로 사랑하지 않는 엄마가 미웠어. 버스 시간이 가까워지자 다른 아이들이 엄마나 할머니 손을 잡고 하나둘 정류장으로 나왔어. 나는 혼자 서 있는 내가 창피했어. 다른 아줌마들이 아빠는 어디에 가고 혼자 서 있냐고 물었어. 생각해보면 그때 나를 주로 보살피고 유치원에 데려다준 사람은 아빠였는데, 그날도 아빠한테 급한 일이 생겨서 엄마가 대신 나를 챙겼던 건데, 나는 엄마부터 원망했어. 유치원에 아빠와 함께 오는 사람은 나뿐이었거든. 나는 내가, 우리 가족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정상이 아닌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이야. 지금도 엄마를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하고 아득해져. 우리 사이엔 아직 풀어야 할 실타래가 많지. 그래도 엄마가 다른 ‘평범한’ 엄마들과 다르다며 원망했던 건 미안하게 생각해. 평범이나 정상 같은 말들을 내가 오해했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엄마. 나 다음 학기에 독일에 가. 우선 2년 정도 머물 거야. 일이 잘 풀리면 그곳에서 석사 과정까지 밟을지도 몰라. 오래전부터 바라고 욕심냈던 길인데 이제야 한걸음 디디게 되었어. 연락을 받고 기뻐하는 와중에 이상하게 엄마 생각이 먼저 나더라. 지난번 선거 때 엄마는 늘 엄마밖에 모른다고 모진 말 했던 게 마음에 걸렸어. 그리고 내게 기쁜 소식을 듣고 엄마도 조금 기뻐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러면 나도 나밖에 모르는 건가? 엄마, 우리 만나서 이야기하자. 나 맛있는 거 사줘. 아빠 빼고 우리 둘만 만나서 수다도 떨고 쇼핑도 하자. 이것도 소위 정상적인 모녀관계에 대한 환상인가? 몰라. 그런지 아닌지는 만나서 확인해보자. 또 전화할게. 그때는 꼭 내 전화 받아줘.
*
시옷은 엄마와 함께 새집으로 향했다. 큰이모가 택시비를 쥐여주었지만, 엄마는 길이 좁은 동네라 택시가 가지 않을 거라며 큰이모 모르게 걸어서 갔다. 시옷도 앞으로 학교까지 먼 길을 걸어 다녀야 하므로 미리 길을 익혀두는 게 좋다고 했다. 시옷과 엄마는 예전 동네에서 철둑을 건너 ‘철둑 너머 동네’ 깊숙이 들어갔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몇군데나 지나자 하수구 같은 개울이 시작되었다. 수위도 낮은 게 여름이라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개울 양옆으로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집들은 전부 낮게 엎드려 있었다. 엄마 말대로 개울을 끼고 걷는 길은 좁고 포장도 안 된 흙길이었다. 택시는커녕 수레가 지나가기에도 어려워 보였다. 할머니와 아빠는 짐을 어떻게 날랐을까? 악취를 피해 코를 감싸 쥐고 입으로만 숨을 쉬었더니 금세 숨이 차올랐다. 엄마도 내내 씨근거리며 걸었다. 가끔 야트막한 시멘트 담장 너머로 악다구니를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싸움이 흔한 동네였다. 시옷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얼굴도 모르는 이웃의 고함과 비명을 들으며 이 흙길을 지나다닐 것이다.) 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시옷보다 엄마가 더 깜짝깜짝 놀라며 배를 어루만졌다.
이윽고 두 사람은 청록색 철제 대문 앞에 도착했다. 시멘트 계단 두칸을 올라야 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대문 위에 주황색 꽃이 잔뜩 피어 있었다.
능소화구나.
엄마가 한숨 돌리듯 나직하게 말했다. 나팔처럼 생긴 주황색 꽃이 줄줄이 매달린 넝쿨나무가 철제 대문 위에 화관처럼 얹혀 있었다. 시옷은 새집의 첫인상이 태양과 같은 색깔의 예쁜 꽃이라는 사실에 마음을 놓았다.
다행이다.
시옷의 마음을 읽었는지 엄마도 더 묻지 않고 덧붙였다.
다행이네.
그때 청록색 문이 벌컥 열리며 누가 앞으로 쏟아졌다. (그건 정말 ‘쏟아졌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동작이고 장면이었다.) 그뒤로 웬 여자의 고함이 이어졌다.
신발 찾아오기 전에는 집에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아, 빌어먹을 새끼야.
대문에서 쏟아진 남자애가 시옷 앞으로 굴러떨어진 것과 동시에 열린 문틈으로 구정물이 쏟아졌다. 엄마와 시옷은 미처 피할 새 없이 구정물을 뒤집어썼다. 여자가 빈 바가지를 들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가 엄마와 시옷을 보았다. 여자는 억! 하고 목 졸린 소리를 냈다. 남자애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옷은 남자애를 알아보았다. 4학년이 시작되자마자 담임선생님한테 불려 나가 교탁 위에서 때가 잔뜩 낀 배를 드러내야 했던 눈이 아름다운 그 아이였다. 여자 뒤로 아빠와 할머니가 나타났다. 할머니가 관세음보살을 외치며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 엄마와 시옷의 얼굴을 닦았다.
사람이 서 있는 줄 몰랐지. 기척이라도 하지, 어쩜 좋아.
여자가 말을 더듬으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순간 엄마가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긴 울음을 토해냈다. 아빠와 할머니가 엄마를 붙잡아 일으켜 집 안으로 데려가는 동안에도 엄마는 푸념 같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바가지 든 여자도 뭐라 뭐라 중얼거리며 뒤를 따라갔다. 대문 앞에는 눈이 아름다운 아이와 시옷만 남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옷은 코끝을 찌르는 시큼한 냄새가 구정물을 뒤집어쓴 자신의 몸에서 나는 것인지 바로 옆 개울에서 올라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동네에 살려면 새로 배워야 할 게 많아 보였다. 이 동네와 이 집에 관해서라면 눈이 아름다운 저 아이가 시옷보다 아는 게 많을 것이다.
안녕.
시옷이 말했다. 시옷은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자연스럽게 집과 동네에 관해 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남자애의 인사를 기다렸다. 눈이 아름다운 아이는 표정 한번 바꾸지 않고 퉤 소리를 내며 침을 뱉었다. 하얀 거품이 낀 침 뭉치가 시옷의 발치에 떨어졌다. 시옷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남자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시옷이 걸어온 방향으로 뛰어갔다.
안녕.
시옷은 남자애의 뒤통수에 대고 한번 더 말했다. 대문 앞에 시옷 혼자 남았다. 시옷은 살짝 열린 대문을 쳐다보았다. 대문 위를 지나가는 청록색 페인트 자국을, 사자 얼굴 모양 문고리를, 앞머리처럼 늘어진 능소화 줄기 하나를, 저 멀리 살짝 드러난 야산의 둥근 등을 차례차례 보았다.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넘었지만, 저 문턱을 넘어가야 비로소 여름이 시작될 것 같았다. 시옷은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대문을 밀었다. 끼이익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새집의 인사말로 여기며 시옷은 경계 너머로 성큼 한발을 내디뎠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