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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 내가 사는 곳 ③
넓을 광(廣), 큰 덕(德)에 산다
김해자 金海慈
1961년 전남 신안 출생.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 『무화과는 없다』 『축제』 『집에 가자』 『해자네 점집』, 산문집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등이 있음.
haija21@naver.com
속이 출출한데 입맛은 없고 마침 비가 내리는 저녁, TV에서 친구들끼리 곱창구이에 소주를 마시거나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깔깔거리는 장면이 나오면 울컥 그립다. 현관문 열고 5분만 걸어가면 치킨집과 식당이 즐비하던 도시 골목골목이. 우리 마을은 구멍가게 하나 없다. 며칠째 눈은 펄펄 내리는데 언덕 빙판길에 갇혀 백여 미터 내려가면 닿는 이웃집 가기도 망설여질 때, 여기 첩첩산중에 적막강산으로 사는구나 새삼 실감한다. 한밤중 바퀴 위에 노란 별 여럿 달고 꽁무니에는 붉은 별을 매단 채 2차선 도로를 달려가는 버스가 반갑기도 하다. 어디 아프리카 오지도 아니고 버스가 반갑다니. 스스로도 이상하다 싶지만 사위가 어두워지며 소리들이 사라지고 나면 매번 그렇다. 나도 별처럼 점 하나구나, 깜박깜박 명멸하며 내가 여기 살고 있구나. 인천과 서울 빼고는 가장 오래 살고 있는 이 변방이 내 마지막 자리가 될 것도 같다.
오가는 차들 뒤로 풍서천이 흐른다. 광덕산 망경산 태화산이 내려보내는 물줄기가 풍세와 천안 시내 수도꼭지다. 사람도 물자도 심지어 무 배추도 서울로 올라가는데 나는 왜 반대 방향으로 흘러왔나. 6년 살던 아랫집에서 백여 미터 위 산자락으로 옮긴 다음부터 동네 곳곳을 자주 내려다보게 된다. 지붕 모양도 색도 집의 나이도 각각이다. 함석지붕 슬라브지붕 양철지붕 그리고 잔디가 깔린 목조주택과 현대식 스틸하우스까지. 그 지붕 아래 몸 하나 누이기 위해 평생 가까이 걸리는 사람들도 있다. 거주지가 표시되는 주민등록 초본을 떼다 알았다. 이 집에 들어오기까지 내가 스무번 가까이 옮겨 다녔다는 것을. 인천의 숱한 자취방들은 기록되지도 않았으니 유목민이나 다를 바 없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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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역에서 버스로 40여분 걸리는 데서 산 지 8년째다. 천안이라고는 하지만 공주와 아산이 더 가까운 천안의 동남쪽 끝인, 광덕면에서도 내가 사는 보산원리는 진짜 꽁지다. 여기서 서쪽으로 다섯리(2킬로미터) 정도 가면 아산이고, 남쪽으로 십리 정도 가면 공주고, 북쪽으로 십리 가면 천안시, 동쪽으로 더 가면 세종이다. 키가 칠백 미터인 광덕산과 육백 미터를 채운 망경산이 경계다. 그러니까 천안과 아산과 공주의 끝들이 모인 곳이다. 끝은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넓을 광(廣)에 큰 덕(德)인 광덕면이다. 대덕리 무학리 매당리 신흥리 보산원리 광덕리 등, 리 단위로 적게는 오십 많게는 백여가구가 모여 오천여명이 살고 있으니 아파트 단지 하나는 되는 규모다.
규모는 작아도 유래와 역사가 깊다는 광덕사가 있어서인지 버스가 자주 다니는 편이다. 광덕사 입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신 칠백살 호두나무가 아직 열매를 달고 있다. 몇년 사이 30분 간격이던 버스가 15분 간격으로 바뀌어 위급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동네 어르신들은 버스를 이용한다. 버스 타고 병원 가고 장에 가고 복지관에 간다. 물론 승용차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늘어간다. 주로 귀촌한 젊은이들이다. 여기서 젊은이라 하면 여기서 어른들 기준으로 칠십대 전반까지를 가리킨다.
추어탕 먹으러 가다 느닷없이 임영자씨가 말했다. “고마워. 늙은이랑 놀아줘서.” 별말씀 다 하신다니까. “유통기한이 지났는디 폐기처분도 못하고 사는 게 늙은이”란다. “금 가고 깨진 항아리는 소금단지로라도 써먹”는데 늙은이는 어디 쓸 데가 없단다. 일흔다섯인 임영자씨는 늙은이와 젊은이의 경계선에 있다. 8년 사이 초상 없는 해가 없었다. 양로원 가는 분도 해마다 는다. 작년 여름까지 경운기 몰고 딸기밭에 가던 아흔네살 어르신을 올해는 볼 수 없다. 팽나무 옆 정자에 앉아 계시던 여든다섯살 어르신도, 한달간 두유만 자시다 깔끔하게 돌아가신 아흔여덟세 할머니도 이젠 못 본다.
동네 뒷산 평평골 처처마다 뭐가 있는지 훤히 꿰뚫고 있는 맹대열씨에게 산나물 얘기를 듣다, “달래가 어딨어요?” 묻자 “땅에”라는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정답이다. 땅을 일구다 어느새 땅속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내가 있다. 마을회관 앞에서 엊그제 인사한 어른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 앞을 뒤집으면 뒤가 되듯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구나 실감하며 시나브로 나도 노인이 되어간다.
“정월 지나면 달래 나고 냉이 나고 홑잎(화살나무 순) 나지. 3월 가면 쇠어서 못 먹어. 엄나물도 홑잎 날 때 나고 오갈피도 그 무렵이고. 나무두릅 장대로 잡아당겨서 따고, 그담에 고춧잎 나고 취 나고. 오갈피, 엄나무 잎은 다 써.” 채취의 대가인 맹대열씨 말이다. ‘땅은 쓰다’고 받아 적는다. 쓰니까 약이 된다고 받아 적는다. 맹대열씨가 밥 먹으러 오라 해서 가보면 산나물들이 밥상에 가득하다. 한여름에도 참가죽나무와 냉이와 오갈피순나물을 얻어먹기도 한다. 채취의 달인 맹대열씨 냉동실엔 데쳐서 넣어둔 산나물들이 층층이 차곡차곡이다. 밥에 넣어 먹고 말려서 차로도 먹으라고 굵은 둥글레뿌리 한 봉다리를 건네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맞은편 망경산이 놀이터였다는 그를 따라다니면 나뭇잎도 채소로 보인다.
이 동네 살면서 평생 먹은 것보다 많은 나뭇잎들을 먹었다. 덕분에 냉이나 달래나 두릅 정도만 알던 나는 일부러 키우지 않아도 땅 위에 먹을 것들이 지천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숲은 나무에 열린 나물들이 진열된 돈 안 받는 슈퍼마켓이었던 것이다. 맹대열씨가 전세 사는 반지하 집에는 동백나무와 철쭉들이 큰 화분이나 스티로폼 박스에 담겨 철철이 핀다. 바로 앞에 논이 있는 집 입구엔 철 따라 마늘과 대파 심지어 배추까지 시퍼렇게 잘 자란다. 꽃과 어우러진 그 작은 텃밭에서 소화에 좋다는 방아잎이며 차조기들이 우리 밭으로 이사 오고, 들깻가루 듬뿍 넣은 토란탕과 깻잎지짐이가 우리 집 식탁으로 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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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는 땅 소유주에게 백만원 언저리쯤 되는 연세(年稅)를 내고 사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 평생 쫓겨나지 않고 살 수는 있지만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집만 자기 것이고 땅은 주인 것이라는 이상한 구조다. 우정인씨도 소유권은 없지만 농사지을 수 있는 밭 백여평에 철 따라 온갖 것을 다 심고 거둔다. 땅이 없는 임영자씨도 집 울타리 벽에 흙을 퍼 넣고 시멘트로 막은 다음 거기에 상추나 파 등을 심는다. 바깥쪽에도 화단을 만들어 온갖 꽃을 심는다. 세상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작물을 키우는 사람과 꽃을 키우는 사람. 그걸 모두 키우는 사람.
내가 알기로, 동네에서 가장 농사를 많이 짓는 분은 전(前) 반장님 유석문씨다. 밭농사는 물론 논농사도 꽤 짓는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유씨 문중의 땅과 소유주가 서울에 있는 땅들을 혼자 힘으로 경작한다. 어느날은 리어카를 끌고 모를 나르는가 하면, 어느날은 산자락 밭에서 말뚝을 박고 있기도 한다. 부인이 천안 시내에서 칡즙과 호박즙과 양파즙을 내는 장사를 하기에 거둬들인 작물 대부분은 가게로 간다. 땅 없는 동네 어른들에게 감자나 고구마, 서리태 등을 내어먹기도 한다(여기서는 ‘판다’고 하지 않고 ‘내어먹는다’고 한다). 봄이면 산에 올라가 칡도 캐고 쓰러진 나무들도 톱으로 잘라 아궁이 옆에 쌓는다. 매운탕에 소주를 마시며 생선 좋아하냐고 여쭸다가 실없는 사람 된 적이 있다. “뭐 기억할 만큼 많이 먹어봤시야 좋아하지.” 역시 정답이다. 유석문씨 어매 김영자씨는 올해 아흔네살인데, 젊었을 적에 광덕 호두를 담은 다라이(대야)를 이고 삼십리길 걸어 중앙시장에 다녔다고 한다. 광덕산부터 망경산 태학산 설화산 태화산 평평골 등 높은 산으로 에워싸인 “깡촌 중에 깡촌”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깡냉이죽 깡보리밥만 기억난다” 한다. 그래선지 깡말랐고 깡도 세고 깡소주도 즐긴다. 원샷으로 마셔 금세 두병 거뜬히 비운다.
유석문씨는 대략 열마지기 논과 이천여평쯤 되는 밭농사를 짓는데 어김없이 때를 지킨다. 나는 유석문씨가 감자 심으면 따라서 감자 심고 고구마 심으면 따라서 고구마 심으면 된다. 유석문씨 집 옆에는 삼백여평 되는 텃밭이 있는데 만지고 싶을 정도로 흙이 좋고 잡풀도 없이 늘 깨끗하다. 지나가다 보면 하우스에 기대어 두줄로 서 있는 늘씬하고 통통한 대파가 수천대는 되는 것 같다. 하우스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뚜껑을 열기도 하고 덮기도 한다.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 말하는 그는 하늘을 어쩔 순 없어도 바람과 햇빛과 물을 조절하기는 하는 것 같다. 그 많은 농사를 짓고도 이거저거 제하고 나면 일년에 천만원 좀 안 된다고 한다. 유석문씨는 손마디마다 툭 튀어나와 끝이 뭉툭 구부러져 있다. 수십만번 수백만번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힘준 자리마다 생긴 노동과 상처의 흔적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농사만 짓는 사람은 거의 없다. 농사지으면서 도축장 일 가거나, 식당이나 반찬가게 다니거나, 가까운 절에 출근해서 공양주로 일하기도 한다. 남의 묘소를 벌초해주기도 하고 나물 한 다라이 밀개차에 싣고 버스 타고 중앙시장 나가기도 한다. 함석지붕 일 다니고 알루미늄 섀시 문이나 유리창호 일과 상하수도 고치는 일도 하고, 도배를 하거나 경비 일이나 일당 잡역부로 나서기도 한다. 선거철엔 투표안내문과 선거공보물을 집집마다 넣는 알바를 하기도 하고, 선거감시단이 되기도 한다. 농사로는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선거 때는 정치 얘기만 안 하면 된다. 자신들의 이해와 배치되는 선택을 지치지도 않고 계속 해대는 걸 몇년마다 지켜봐야 하는 절망과 비관과 울화증을 들키면 안 되니까. 밭에 나가 땀이라도 흘리고, 어김없이 잎 돋고 꽃 피는 산과 들을 쏘다니며 더 깊이 호흡해야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중국에서 오는 마늘 관세를 50퍼센트 깎아서 울화통 치민 농민들이 트럭에서 마늘을 내동댕이치고 지근지근 밟고 있다. 최근에는 여기서 십리만 걸어가면 나오는 수철리 왼편 산 174-1번지에서 포대기에 싸인 어린아이 갈비뼈와 은비녀, 신발, 유해를 휘감은 밤나무 뿌리가 햇볕 아래 드러났다.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로 총살당한 최소 208구의 이 시신들을 안은 채 60년 이상을 살아온 밤나무는 보았을 것이다. 흰 저고리 입은 여인네들이 아이들 손잡고 산에 오르는 것을. 버선발에 은비녀 꽂은 여인들 가슴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을. 산골짝 나무마다 둥지 튼 소쩍새 뻐꾸기 민초들의 피와 눈물을 머금은 나무도 함께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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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봄이다. 봄에는 기지개 켜고 나가 돌이라도 고르고 자투리땅에 꽃씨라도 심어야 한다. 일어나자마자 밭으로 튀어나가 꽃이 피었나 본다는 게 금방 한두시간이 지나 있다. 마거리트가 수백송이 꽃을 단 봄날, 옆집 박성대씨가 “저 이쁜 흰 꽃이 뭐냐”고 물었다. 다음 날은 새벽에 도배 일 갔다 돌아온 김미희씨가 똑같이 묻는다. “몇송이 드릴까요?”에 웃음으로 답하길래 한아름 꽃을 옆집으로 이사 보냈다. “시금치 잘됐네” 칭찬 한마디에 분홍 뿌리가 실한 시금치 한 양푼이 윗집 살던 권용임씨에게 가고, “상추 잘됐네” 감탄에 상추 수십장이 이정희씨 품으로 간다. 텃밭은 자라나는 식료품점이다. 갈지 않고 비료도 안 주는데 철 따라 잘도 자란다. 일명 무경운 무농약 음식물비료 요법이다.
나는 풀을 확 뽑지 못한다. 병이다. 풀마다 달라서 망설인다. 그 작은 것들이 어떻게 어울려 자라는지 보고 싶어서 웬만하면 내버려두다 덕도 본다. 대파나 상추 아욱 심어놓으면 고양이가 파헤치고, 연한 콩잎은 고라니가 와서 따먹고, 옥수수 고구마 익으면 멧돼지가 파먹는데 풀이 중간중간 있으면 고양이도 고라니도 건드리지 않으니 풀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나를 ‘어여 동생’이라 부르는 양승분씨는 풀을 뽑아주려 해도 뭘 키우는지 알 수 없어서 못 뽑겠단다. 꽃밭인가 작물밭인가 풀밭인가 헛갈릴 때도 있지만 키워서 먹을 건 다 먹는다. 그나마 이백여평 빌린 땅은 이웃들에게 정상으로 보이나보다. 이랑마다 제초용 비닐을 일부 씌우고 감자 비트 오이 고추 콩 깨 옥수수 등을 일렬로 심었으니까. 비트는 혈압에 좋다고 해서 키워 이 집 저 집 나눠 먹었고, 보령 사는 김환영씨가 보내준 토종오이씨도 어느새 주렁주렁 열려서 이웃집으로 열심히 배달하는 중이니까.
낮은 여름이다. 여름은 열심히 일해 꽃을 피운다. 나는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 밭에 나가는 것 같다. 젊었을 땐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을 경멸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끄러워했다. 돌아보니 공장 밥과 밭에서 일하고 난 후 먹는 밥이 가장 맛있었다. 가끔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 그려질 정도로 거룩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상추가 나면 상추를 뜯고, 상추가 시들해지면 군데군데 삐죽이 솟은 왕고들빼기를 따서 쌈 싸 먹는다. 엊그제 땄는데도 부추가 두뼘 이상 자라 가위로 자르다보니 큰 다라이 가득이다. 이렇게 자연이 나를 부르고 밭이 내게 일을 시키며 식단도 얼추 짜준다. 호박 나면 호박 지져 먹고 가지 열리면 기름 살짝 둘러 구운 다음 양념장 발라 먹고 오이고추와 오이가 열리면 된장에 찍어 먹으란다. 보름 동안 백원도 안 쓰고 지나가는 날들도 많다. 한평도 넓다. 서울과 인천, 우리 딸과 후배와 친구들이 사는 그곳에 이 작은 밭 한뙈기 옮겨다주고 싶다.
내 스스로 일한다고 잘난 척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이 나를 부려먹는 것 같다. 나를 소환하는 데 일등은 풀이다. 풀 매다 자주 풀이 죽는다. 농사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게 많지 않은가. 삶도 잘 살리기보다 죽이려 드는 게 많다 싶기도 하다. 6월 장마 지나 한창 풀들이 기세 좋을 때는 모기와 벌에 쏘여 눈탱이가 밤탱이 된 언니들 얼굴이 내 거울이다. 풀 잡으려면 얼굴이나 팔 엉덩이 허벅지 어디 대여섯군데는 물릴 각오를 해야 한다. 하루 이틀 사흘 붓고 몹시 가렵다. 먹는 것은 푸성귀 몇줌뿐인데, 모기 뜯겨가며 땀으로 범벅 되어가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다. 돈으로 환산해서는 이해가 안 가는 것들이 삶에는 많다.
대파가 부르면 종일 대파를 까고 쪽파가 많을 땐 쪽파를 사흘 내리 깐다. 도시에 나갈 때면 아침부터 푸성귀를 뜯고 싸느라 바쁘다. 일명 만원 꾸러미다. 그 꾸러미 하나로 후배는 한달 가까이 먹는다고 한다. 집에 친구들이 오면 정말이지 싸줄 게 한보따리다. 하지만 땅이 나를 소환할 때 해놓지 않으면 줄 게 없다. 맞춤할 때 안 거두면 금방 억세지거나 물러버리니까. 친구가 와서 담가둔 대파장아찌와 쪽파김치 두통을 인천으로 실어 보냈더니 스무명이 한자리에서 ‘쫑냈다’ 한다. 그후 별명이 생겼다. 일명 ‘대농’. 삼십평짜리 텃밭 두개 짓다 이제는 넓고 넓은 도지가 생겼으니 대농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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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볕이 잠시 사라진 오후, 깻잎 몇장 따려고 나갔는데 바람이 심상치 않더니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린다. 내친김에 깻잎 사촌 차조기와 추부깻잎까지 따고 있는데 비가 쏟아진다. 처마 밑으로 몸을 피하고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장대비를 본다. 빗줄기에 시야가 가려지는 중에도 오는 비 다 맞고 있는 뒷산의 소나무 형제 백그루의 붉은 둥치가 더 붉어지고, 봉숭아와 분꽃과 서양아욱 꽃들이 짙은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근사하다.
나이 탓이기도 하겠지만 산촌에 살면서 날씨에 민감해졌다. 구름 모양과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방향을 가늠하는 일도 잦다. 얼굴이 붉어질 만큼 헉헉거린 뒤라 피부에 와닿는 선선하고 청량한 촉감이 좋다. 한난조습과 지수화풍의 오묘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날씨는 어쩌면 만물의 생사에 절대적인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날씨가 이러면 진짜 농사 못 짓것어”라는 말을 해가 갈수록 더 많이 듣는다. 갈수록 비가 몰아서 오고 가뭄 또한 길어지고 있다. 물에너지도 빛에너지도 부익부 빈익빈이다. 올해는 낮은 덥고 밤은 추워서 6월 초순까지 보일러를 켰다는 집들이 많다.
사이렌 소리가 나더니 대피하라는 방송이 나온다. 폭이 웬만한 강 이상인 풍서천에서 낚시하거나 피서하는 사람들이 서둘러 자리를 정리할 것이다. 한시간 동안 40밀리미터 폭우가 쏟아진다는 기상예보가 나오고 있다. 비 오기 전 약통을 메고 땅콩밭과 깨밭과 서리태콩밭 고랑을 다니던 전 이장님 이종관씨가 어느새 사라졌다. 소낙비가 잠시 그치자 소독차가 언덕까지 올라와 하얀 연기를 피우며 붕붕거리다 내려간다. 나도 틈을 타 앞마당 물청소를 한다. 우리 집은 참새가 살기에도 안성맞춤이라서 지붕 밑에 참새 가족이 몇이나 사는지 셀 수가 없다. 동서북 세 방향에서 새들이 드나든다. 새들이 집 지은 볏짚과 스티로폼과 흙 부스러기, 배설물이 비 오면 더 많이 흘러내린다. 비 올 때 청소해야 품이 덜 든다.
청소하는 중 양승분씨한테 전화가 온다. 방금 열무김치를 담가서 한통 담고 느타리버섯 조금 넣어 보냈다고. 올봄 양승분씨는 밭에 굵은 쇠막대를 설치하다 손등이 찢겨나가 열바늘을 꿰맸다. 하마터면 뼈와 인대와 관절이 나갈 뻔했다. 붕대 위로 퉁퉁 부어 있는 게 보기만 해도 열이 나는 것이 느껴졌다. 통증을 견디는 동안 조석으로 반찬 해 들고 그의 집을 오가던 봄날이 지나간다. 전화를 끊고 있는데 양승분씨 남편 이종관씨가 정말 김치 든 쇼핑백을 들고 언덕으로 올라온다. 약 치러 올라오는 길에 김치 심부름까지 한 이종관씨는 다시 밭으로 내려가고, 나도 다시 호스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물청소를 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종관씨를 세번이나 만났다. 계획하지도 않고 굳이 필요를 따지지 않아도 마주치고 주고받으며 산다.
구름도 비도 참새도 이웃도 인연 따라 흘러오고 흘러간다. 여기 살면서 담벼락이 반쯤 기울거나 무너지고 녹슨 양철 지붕이나 이끼 자욱한 함석을 머리에 이고 있어도, 제집 하나 갖고 사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 새삼 느끼게 되었다. 백평도 채 안 되는 채마밭 하나가 누군가에겐 얼마나 귀한 장소인지. 꽝꽝 밟아대고 호미와 괭이와 낫을 휘둘러도 무너질 일 없는 대지 위에 철 따라 씨 뿌리고 모종 심고 가꾸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를.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붙박여 살아내는 땅은 얼마나 다른가를. 차 타고 국도를 휙 지나갈 땐 정말 몰랐다. 지상에 내 집 하나, 그 집 하나가 단순히 몸 집어넣는 널빤지와 흙과 쇠가 대충 섞인 구조물만이 아닌 것을. 몸이 단지 영혼 혹은 정신이 부리는 형식이 아니듯이.
논이 사라지고 산이 깎여나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이곳, 나는 유토피아가 아닌 싸움과 소음 잘 날 없는 인간의 땅에서 산다. 옆집 닭 우는 소리에 깨고 몇집 건너 개 짖는 소리 들으며 잠든다. 이곳이 더 개발되어 비싸지거나, 그 무엇으로도 유명해지거나 떠들썩해지지 않기를 빌며. 늘 처음인 듯 자연과 인간의 경이로움에 놀라며 때로 앙모하고 추앙하는, 철없는 내가 아직은 맘에 든다. 품 넓은 대지에 기반한 상상력은 딱 흘린 땀과 고뇌만큼만 허락하는 것 같다. 봄과 가을을 기다리지만 우리가 실제 사는 것은 여름과 겨울뿐인 것 같다. 당연히 고생이지만, 평생 고생하고 살아온 사람들은 고생이라 말하지 않는다. 나 또한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지 않으니, “잘 견뎌냅시다” 속삭이며 작은 씨앗들을 흙 속에 숨겨놓는다. 기후위기라는 전대미문의 시대에 땅과 뭍 생명들이 더는 망가지지 않기를 간절히 빌며 몸으로 써내려간 대지의 이야기들을 받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