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김행숙 金杏淑
1970년 서울 출생.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가 있음. fromtomu@hanmail.net
8時가 없어진다면
지나가고, 또 지나가고, 또 지나갔으니
8시처럼, 목요일 저녁처럼, 여름날의 긴 오후처럼 돌아오는 중이겠군요
봄에 여름이라고 부르고, 여름에 가을이라고 부르고, 가을에 겨울이라고 고쳐 부르는 것이 당신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둥근 것들, 해와 달, 아침에 나갔다가 밤에 돌아오는 구두들의 닳은 굽, 뉴욕제과점 모퉁이를 돌아 언덕을 오르는 마을버스들, 자꾸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가방,
그러나 나는 어느샌가 한눈을 팔게 됩니다, 미안해요
그사이에 8시가 없어지면 당신이 어떻게 돌아올 수 있겠어요, 8시가 없어지면
8시 5분이, 9시가, 없어지고, 다음날 아침이 없어지고, 여름날의 소낙비가 없어지고, 가을날의 천둥이 없어지고, 눈물을 흘리는 얼굴이 없어지고, 겨울 눈꽃축제가 없어지고, 새싹이, 연둣빛 새싹이,
옆집은 한달 보름째 빈집입니다, 세상의 모든 옆집이 빈집이면 내가 어떻게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어요
캄캄한 하늘에 당신이 무한한 원을 긋고 있는 중이라면
타인의 창
유리로 만든 것들은 우리를 속이기 쉽습니다. 저 창문은 액자 같고,
그곳에서 가장 먼 나뭇가지에라도
나는 걸려 있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신이 찾을 수 있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그곳입니다. 당신의 눈빛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곳에,
내 슬픔의 무게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구덩이를 팝니다. 많은 것들이 꺼질 듯 매몰되었습니다. 아아, 나는 멸망인 척해도 멸망이 아닙니다. 나는 그림인 척해도 그림이 아닙니다.
창밖이 진짜 어떤 세상인지 압니까?
구덩이에 빠져서 낮과 밤과 다음날 아침이 비슷하면 어떤 기분인 줄 아세요? 기분이 구덩이 같고 흘러내리는 흙 같아요.
모든 옆집의 창문 같은 그곳,
유리의 주인인 당신의 눈빛을 상상하면 나는 그림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삶의 카펫에 누군가 주제를 정하고 문양을 찍는 것 같습니다. 카펫은 밟으라고 있는 겁니다.
이런 내 마음의 소리가 당신에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내 절망이 당신에게 스러질 듯이 원경(遠景)으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찌푸린 눈빛처럼 내가 나를 보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눈빛에 항상 걸려 있는 나의 살가죽을 쓰고 다니면 세상의 모든 옆집들
창문이 빛을 반사하고, 창문이 눈물을 흘리고, 창문이 눈동자를 키우고, 창문이 문서를 작성하고, 창문이 강간을 증언하고, 창문이 창문의 창문을 낳고,
창문이 자꾸 질문을 만들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은 안 만들어줘요. 그곳에 당신이 있었다면
내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어느 이웃집 꼬마처럼 돌멩이를 손에 쥐면 그때 그곳이 생각납니다. 그곳에 돌멩이를 던진다면, 그것은
당신의 눈알을 당신의 얼굴에서 빼앗아 그 얼굴로부터 멀리 던져버리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눈알을 으깨는 기분으로 나는 돌멩이를 손에 꼭 쥐고 있습니다. 내가 보이는 그곳,
그곳에 당신이 있을까?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