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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기철 李起哲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청산행』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유리의 나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꽃들의 화장 시간』 등이 있음. poet3943@hanmail.net
한림정역에서
통일은 통일호를 타고 오지 않았다
지구의 끝까지 느릿느릿 닿을 것 같았던
통일호 기차는 이제 정거장 이정표에서 사라지고 없다
나는 옛 통일호 완행열차가 밤이면 창마다 등꽃 같은 불을 밝히고
지구 바깥으로 가듯 느리게 가던 한림정 역두에 서서
맨발로 레일을 밟으며 이 시를 생각한다
과꽃 같은 외롬 하날 도시락에 담고
칸칸마다 피워 들던 추억의 잎사귀를 매만지며
도랑물보다 더 천천히 흘러가는 경전선(慶全線)
굽이 도는 길마다 이별 한 주머니씩 남겨둔 사람들은
지금은 모두 중년이 되었거나 세상을 떴다
그들이 살던 집 댓돌 섬돌 툇마루는 깊어
산그늘도 여기서는 잠시 쉬고 간다
저녁이면 비로소 아궁이가 환하던 동네
명절이면 회귀성 어종처럼 왁자한 아들과 손주들은
떠나고 나면 빨랫줄에 걸린 갓 마른 손수건처럼
눈썹 끝에 오래 한들거린다
쌍떡잎 같은 마을이 통일호 불빛에 흔들리고
가락지꽃이 피었다 지는 시골집 마당은 명절이어야 한번 반짝인다
방에는 열두달이 함께 들어 있는 연력(年歷) 한장이
커다란 사진 속 얼굴 아래 바둑판처럼 붙어 있고
불과 열집 안팎의 동네는 반도의 소품으로 점 찍혀
일만분의 일로 축약한 여행지도에도 없다
하루에 세번 장난감 기차가 오고 가지만
지금은 회색빛 추억이 되어 철새의 군락지로 은거한다
나는 여기, 뉘 집 행랑방을 빌어 하룻밤을 묵으면서
간이역 축대며 슬래브 지붕이며 댓돌과 푸른 간판을 눈에 담았다가
팔자에도 없는 소목장이 되어
아무도 믿지 않을 통일호 역사 하날 내 집 마당 가운데 옮겨 지으려 한다
아무려면 어떤가, 기와장이 단청장이 석수 따위
기둥과 보 공포 짜기 서까래 깎기는 도편수에게 맡기고
나는 자잘한 대패 끌 장도리나 주워 나르면서
누구라도 옛날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면
이 축대며 댓돌에 앉아 꼬리연처럼 희미해져가는 통일호를
여송연처럼 피워 물게 하고 싶다
노랑나비가 왔다 가면 정적의 휘장을 걷고 고추잠자리가 날아오는
번지 밖에 지은 내 집 마당 통일호 역사에는
괘엑- 소리 지르며 달려오는 장난감 기차가 산모롱이를 돌아
굽잇길에 익숙한 농부처럼 칙폭칙폭 짚신 끄는 소리로 다가오면 좋겠다
그러면 그 둘레 어딘가에는
민들레를 아미에 꽂고 오는 오월과 자미화를 데리고 오는 팔월이
올해도 의좋은 형제처럼 나란히 다녀갈 것이다
그래, 언젠가 이 땅에 통일이 오면
우리 집 마당에 지은 통일호 역사에도
예 듣던 기적소리가 잠든 마을과 산천을 깨우며
마을 바깥 저문 강물 끝으로 천천히 달려갈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는 백살이 넘어도 꼭 살아 있을 것이다
아니 무덤 속에서도 나는 살아 있을 것이다
저녁별
채소도 아닌데 어떻게 시를 가꾸느냐고
사람들은 핀잔하고 새는 노래한다
이런 때는 사람보다 새가 시를 가꾼다
열 사람이 모여서 보남파초의 생각을 깁고
노주빨의 말잔치를 벌이다가
그도저도 안되면 두레상처럼 둘러앉아
좋은 시 다섯편으로 비빔밥 먹는다
산속 마을은 골마루처럼 깊어 실로폰바람 지나가면
마당가엔 아직 이름 불리지 않은 풀꽃 있어
단추꽃 댕기꽃이라 짐짓 불러보는데
꽃나무는 저 부르는 이름인 줄도 모르고
나흘 전 흙에 묻은 상추씨만 젖니 같은 이파리 밀어올린다
시는 읽는 것이지 가꾸는 것 아님을
아무도 말하고 아무도 말 아니해도
여기서 실낱같은 생각 하나 가락지 낄 수 있다면
하늘 스무평 공짜로 얻은 양은 되지 않을까
열 사람 가고 혼자 남은 저녁에 말 걸면
저녁이 저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라고
달빛을 끌어다 방석을 내주기도 한다
이럴 땐 슬픔이 새끼 쳐 쫑알대지만
나는 그에게 줄 좁쌀 다섯알도 마련하지 못했다
사람은 가도 저녁은 남아 담요처럼 깔리는 적요
왔다가는 가버리는 하루에 시비 걸 마음은 없으나
어느 하루도 공으로는 다녀가지 않는
밤이 떨어뜨리고 간 바늘 같은 저 저녁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