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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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재은 李在恩

1996년 출생. 2020년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으며 등단.

jaenini@naver.com

 

 

 

기르는 사람들

 

 

도마뱀을 먼저 발견한 건 의주였다.

일을 마치고 역으로 마중 나온 의주와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의주는 조금 상기되어 있었는데 얼마 전 마음먹고 산 터치형 선풍기 두대 중 한대의 조작부가 완전히 고장 나버렸기 때문이었다. 마트에서는 곧장 서비스센터의 번호를 알려주었고 상담원은 터치패드 고장은 고객의 과실이므로 유상 수리가 원칙이라고 했다. 구만구천원짜리 선풍기를 고치는 데 삼만오천원이 들었다. 무더위에 선풍기를 이고 걸어갈 자신은 없어서 택시비까지 더하면 남는 게 없었다.

그냥 새로 살 거야.

의주가 말했다. 나는 그런 의주가 며칠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선풍기를 고치러 가자며 나를 흔들어 깨울 것을 알고 있었다. 맞장구를 치는 대신 의주의 등에 달라붙은 티셔츠를 집어 올려 슴슴 바람이 통하게 해주었다.

의주는 함께 걷다가 음, 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는 저녁 메뉴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는데 그래서 한 박자 늦게 그것을 알아챘다. 의주는 내가 따라잡지도 못하게 성큼성큼 앞서가더니 인도와 도로 사이에 설치된 배수구 앞에 풀썩 쭈그려 앉았다. 짧은 티셔츠가 말려 올라가면서 등이 훤히 드러났다. 마침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었고 사람들이 그런 의주를 흘끔 보면서 건너왔다.

뭐야?

방금 여기서 뭔가 움직였어.

나는 의주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뜬 채 배수구를 내려다보았다. 격자무늬 쇠살대 아래의 낙엽과 담배꽁초 탓에 의주가 가리키는 것이 잘 안 보였다. 부러진 나뭇가지로 마른 낙엽 더미를 헤집자 틈새를 비집고 삐져나온 세모난 머리통 하나가 눈에 띄었다. 파충류의 머리였다.

도마뱀인가봐.

이렇게 생겼었나.

나도 모르게 미심쩍은 투로 말했다. 위로 올라오려는 중이었는지 사람들을 피해 숨어 있던 건지 미동조차 없어서 어쩌면 죽은 게 아닐까 싶던 찰나 도마뱀이 몸통을 수축시키며 호흡했다. 빌딩과 상가 건물로 둘러싸인 역 주변까지 어떻게 흘러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만 가자.

나는 의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의주는 조금만, 하고선 한참을 더 말 없는 도마뱀과 씨름했다. 신호가 한번 더 바뀌고 차들이 정지선에 멈춰 섰을 때, 의주는 무언가 결심한 듯 말했다.

데려갈까?

데려가서 어쩌려고.

내가 키우고 싶어.

함부로 주워가면 안 돼. 죽을 수도 있어.

그냥 여기 둬도 어차피 죽을 텐데.

거의 죽은 걸지도 모르지, 의주가 덧붙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말릴 새도 없이 잠깐만 있어봐, 하더니 바로 옆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갔다. 몇분 뒤 2리터짜리 생수 한병과 가위를 들고 나온 의주가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나는 한발 물러나 볼라드에 걸터앉은 뒤 의주가 배수구 옆 도로에 물을 콸콸 버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의주는 페트병을 반으로 잘라 도마뱀이 들어갈 자리와 덮개를 만들었다. 그다음엔 아주 조금 남은 물을 도마뱀이 있는 쪽으로 흘려보냈다. 그러는 동안 나도 어느새 의주의 곁에 서 있었다. 도마뱀은 고개를 삐죽 들고 동태만 살필 뿐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는데 기다려보라는 의주의 말대로 잠깐 기다리자 조금씩 지상을 향해 기어 올라왔다. 생각보다 움직임이 굼떠서 보니 몸통 아래에 있어야 할 긴 꼬리가 보이지 않았다. 다 태우고 남은 향처럼 절단부가 까맣게 오그라들어 있었다.

그래서 여기 숨어 있었나봐.

의주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도로 위로 올라온 도마뱀은 마른 나뭇잎의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핥아 먹었다. 아래턱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배를 불린 도마뱀이 두 인간과 헤어지려는 듯 몸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로 가면 차도였다. 곧 신호도 바뀔 것이다. 내가 주저하는 동안 의주는 단번에 몸통 아래쪽을 잡아채 준비해둔 페트병 안에 집어넣고 입구를 막았다.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의주가 말했다.

이름은 핀이라고 지을까?

핀?

선풍기 얘기하다 본 거니까.

팬은 좀 이상하지 그러니까 핀으로. 나는 그것참 실없는 이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쁘지 않아서 핀, 하고 작게 불러보았다. 핀이 그새 기운을 차렸는지 자꾸만 페트병 옆면을 타고 올라오려고 했다. 의주는 불안한지 페트병을 감싸 안았다. 그 모습이 꼭 여름날 곤충채집통을 품에 안고 거리를 쏘다니는 아이들 같아서 사진을 몇장 찍어두었다.

버스를 타고 다섯 정거장을 지나 시장 앞에서 내렸다. 에어컨 바람을 쐬다 나와서인지 바깥 공기가 더 습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사는 황제맨션은 시장 끄트머리에 있었다. 시장 초입에 들어서자 잊고 있던 저녁 생각이 났다.

뭐 먹지?

배고파?

아니.

그래도 먹어야지.

그럼, 밥을 같이 먹어야 식구지.

나는 의주가 자주 하는 농담을 따라 하고선 작게 웃었다.

그럼 떡이나 사 갈까, 그러자 하며 자주 가는 떡방앗간 앞에 다다랐는데 마침 기름을 짜는지 사방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가판대를 유심히 보고 있자 안에서 주인 할머니가 나왔다. 세 팩에 오천원. 인절미와 절편, 그리고 약밥을 차곡차곡 쌓아 건네는 통에 얼결에 받아 들었다. 옆에 있던 의주가 참기름이 든 초록색 유리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얼마예요? 구천원. 이만원을 내고 거스름돈을 챙겨 나오려는데 할머니가 의주에게 들고 있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도마뱀이에요.

도마뱀?

할머니는 목에 걸고 있던 돋보기안경을 쓰더니 페트병 안을 유심히 살폈다. 색색의 큐빅이 박힌 안경 줄이 흔들거리며 반짝였다. 의주가 괜히 내 눈치를 보았다.

생긴 게 영 도마뱀이 아닌데.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럼 뭔데요?

나야 모르지.

할머니는 무심히 대꾸했다.

얼른 놔줘. 밖에 사는 건 집에 들이는 게 아니야.

할머니가 손사래를 치면서 물러났다. 의주가 무어라 대꾸하려 해서 내가 대신 그래야죠, 하며 말을 잘랐다. 할머니는 대뜸 자기 얘기를 꺼냈다.

우리 삼촌은 밀렵꾼이었는데 어릴 때 삼촌 집에 놀러 가면 다른 건 몰라도 냉동창고 문만큼은 절대로 못 열게 했어.

왜요?

나중에 몰래 열고 들어갔는데 죽은 꿩이 수십마리는 족히 널브러져 있었거든.

살아 있는 핀을 두고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았으나 흘러내리는 카디건을 고쳐 입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구렁이 잡아다가 술도 담가. 동네 아저씨들이 매양 모여서 저거 언제 딸까 그것만 기다리는 거야. 키우던 것도 때 되면 잡아먹어.

왜들 그랬을까요.

오래오래 살겠다고.

그분들 지금 다 살아 계세요?

다 죽어서 거름 됐지.

그 말에 의주가 긴장이 풀렸는지 와하하 웃었다. 그러곤 서비스로 받은 참깨 한봉지를 들고 나오면서 꾸벅 인사했다.

할머니는 오래오래 사세요.

그래. 걘 꼭 놔주고.

그럴게요.

이번엔 나보다 의주가 먼저 대답했다.

 

이것저것 산 것들을 양손 가득 들고 시장을 벗어났다. 붉은 벽돌로 지은 구옥들이 조밀하게 늘어서 있었다. 집마다 내놓은 잡동사니에서 수산코너의 환한 조명 아래 놓인 생물들과는 또다른 고요한 생기가 느껴졌다. 한풀 꺾인 의주가 핀이 든 페트병을 건네며 말했다.

네가 대신 놓아줘.

나는 망설이다가 덥고 늦었으니 일단 집에 데려갔다가 날이 밝으면 생각해보자고 했다. 그러자 의주가 기뻐했다. 의주와 같이 지내면서는 이런 식으로 내가 벌이지 않은 일에 가담하게 되는 순간이 많아졌다.

곧 동네 뒷산으로 이어지는 언덕에 다다랐다. 4층짜리 연립주택이 ‘가’부터 ‘마’까지 줄지어 있었다. 외벽의 금색 글씨는 칠이 다 벗겨져 황제인지 횡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의주와 집을 합쳐 이 동네로 이사한 지 반년이 넘었는데도 정작 나는 일이 바빠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적었다. 프리랜서인 의주만이 동네 곳곳을 꿰고 있었다. ‘횡재 나동’으로 보이는 건물의 꼭대기 층이 우리 집이었고 옆집에는 집주인이 살았다. 간이계단을 올라가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옥상이 있어 선택한 집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집주인이 열심히 텃밭을 가꾸기 시작해서 잘 올라가지 않게 되었다.

집이다, 집.

의주가 중앙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자동문이 열리고 우리는 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

 

현관문을 열자 바닥에 널브러진 신발들 사이로 주인 모르는 파란색 슬리퍼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의주는 또 누구야, 하며 투덜거렸고 거실 소파 위에 누워 있던 영이 머리만 일으킨 채로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영은 동네에서 작은 분식점을 운영하는 친구였다. 여느 분식점처럼 떡볶이도 팔고 김치볶음밥도 팔았는데 밖에서 보면 예쁜 까페 같아 젊은 커플들이 주로 찾아왔다. 언젠가 의주와도 까페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기 머쓱해 이른 저녁을 먹은 적이 있었다. 바깥에서는 비가 한창 내리고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턴테이블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엘피를 구경하다가 주문한 음식을 만들던 영과 눈이 마주쳤다. 눈 주변이 어둡고 퀭해서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떡볶이 소스가 그릇에 말라붙을 때까지 그렇게 셋이서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영은 오랜만에 사람들과 보내는 밤이라며 눈가가 촉촉해졌는데 그 말에 그만 마음이 약해져 언제든 외로우면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말해버렸다.

문제는 그런 말을 한 게 한두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밤마다 동네 곳곳에서 만난 친구들이 우리 집으로 모였다. 점차 세면대 위에 한번 쓰고 버리지 않은 일회용 칫솔들이 늘어나서 의주와 나는 아침마다 이거 문제 있다, 하며 이마를 짚었다. 종종 물건의 자리나 쓰임이 뒤바뀌는 경우도 생겼다. 어느날은 책상 가위를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잃어버렸나 싶었는데 설거지통에 들어 있었다. 누구니?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내자 모두 나는 아니야,라고 답했다. 보다 못한 의주가 그럼 이 집에 유령이 사니?라고 보냈다. 그것 말고도 식당에서나 쓸 것 같은 대용량 쓰레기통을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비워야 한다거나, 택배를 대신 받아주었는데 물건만 쏙 빼가고 상자는 버리고 간다거나 하는, 이건 아니지 않니? 묻게 되는 순간을 종종 맞닥뜨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뒤치다꺼리를 하고 나면 공허한 마음이 사라졌다. 의주에게 너도 그래? 묻자 응, 그래도 이러니까 사람 사는 것 같지,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둘이 있으면 불면증 때문에 번갈아 가며 깨는 날이 허다했는데 사람들이 놀러 오는 날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피곤해서 둘 다 잠을 잘 잤다.

개중에는 술을 사 오는 친구도 있고 적당한 안주를 포장해 오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보통 전 주인이 놓고 간 패브릭 소파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조금 취하면 스멀스멀 내려와서 기대어도 있다가 친구들이 떠나면 방 안으로 들어가 언제 잠든지도 모르게 잠에 빠졌다. 의주와는 같이 자기도 하고 의주가 소파에서 먼저 잠에 들기도 했었다. 덕분에 집 안에서도 늘 어딘가 떠다니는 것처럼 지냈다. 그래도 하루에 해야 할 일들은 착실히 해냈다. 빨래를 하고 빨래를 개고 여름이 오면 선풍기를 꺼내고 겨울이 오면 두꺼운 이불을 준비하면서. 그러다보면 짐짓 너그러워지기도 해서 집주인이 없는 틈을 타 옥상에 올라가 텃밭의 쌈채소를 구경하거나 사람들과 약속을 잡았다.

 

의주가 핀을 데리고 방에 들어가 있는 동안 나는 밀린 집안일을 돌봤다. 시장에서 사 온 곡식을 통에 소분해 넣어두는 김에 창고 정리를 했다. 며칠 전 분리수거함을 비웠는데 벌써 반쯤 차 있어서 보니 음료 캔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하나씩 꺼내어 찌그러뜨린 뒤 창고 문을 닫고 나왔다. 시장에서 사 온 떡과 과일을 그릇에 담고 얼마 전 근종절제술을 받은 영을 위해 요깃거리 대신 내어줄 루이보스 차를 끓였다. 의자를 꺼내며 의주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씻는 중이라기엔 조용해서 갸우뚱하며 방문을 열자 의주와 영이 엎드려 누운 채 노트북으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실소가 터졌다. 욕실용품이 담겨 있던 플라스틱 바구니는 어느새 핀의 집으로 변해 있었다. 젖은 휴지만 깔아두자니 휑해 보였는지 휴지심으로 이동 통로까지 만들어놓았다. 의주는 영상을 같이 보자며 내게 손짓했다.

도심 근처의 국립공원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였다. 파나마모자를 쓴 연구원들이 등산용 스틱으로 땅을 짚으며 산을 올랐다. 계곡에 다다르자 그들은 짐을 풀었다. 번식기를 맞은 개구리들이 물 위를 뛰어다니고, 뒤집는 바위마다 도롱뇽알이 붙어 있었다. 핀도 저런 곳에서 살다가 온 걸까, 생각했다. 햇살 아래서 짝짓기하고 사냥도 다니며 여기저기 쏘다녔을 텐데, 어쩌다…… 딱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화면 속에서 핀이 튀어나왔다. 뾰족한 주둥이부터 이어지는 흰 줄무늬와 올리브색 몸통, 네개의 다리에 도드라진 다섯개의 발가락. 되감아 보아도 틀림없이 핀이었다.

핀이다. 우리는 정말 핀을 만난 것처럼 기뻐했다. 영상 속 핀은 꼬리가 무척 길었다. 그때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줄장지뱀은 애벌레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십니다. 뱀이라니? 나는 화면 바깥의 핀을 쳐다봤다. 입맛을 다시기는커녕 태평하게 몸을 기댄 채 졸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의기소침해졌다. 이거 키워도 되는 걸까……

우린 한배를 탄 거지.

영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의주는 벌써 포털 사이트에 줄장지뱀에 관한 정보를 검색하고 있었다.

얘네는 뭘 먹고 살지?

벌레 같은 거 먹지 않나?

찾아보자.

밀웜? 파리도 먹나?

파리 먹는대.

내일 나가서 잡아 오면 되겠다.

그나저나 밤새 배고플 텐데.

영과 의주 둘이서 머리를 맞대는 동안 핀은 그러거나 말거나 만사가 다 귀찮은지 소란스러운 사람들 틈에서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걸 보니 휴지를 돌돌 말아버리듯 걱정이 사그라졌다. 나는 방문을 닫고 나와 미뤄둔 설거지를 하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였다. 고무장갑을 끼고 뜨거운 물을 틀자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면서 시야가 뿌예졌다.

 

*

 

의주와 처음 만난 것은 삼년 전 여름, 엄마의 추도회에서였다.

엄마가 떠난 지 아홉달이 지났을 무렵, 대학교 과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누군가 엄마 일로 내 연락처를 물어보았다는 전화였다. 무슨 일로 나를 찾나, 또 무언가 내 선에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을까 번호를 넘긴 뒤 연락을 기다리면서 조금 긴장했다.

전화를 건 상대는 앳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잠시 통화할 수 있을까요? 물었다. 나긋나긋한 말투에 곧 경계가 느슨해졌다. 여자는 자신을 선생님의 오래된 제자라고 소개했다. 예전에 선생님 집에 초대받아서 간 적도 있어요, 덧붙이기에 대학 제자이겠거니 싶었다.

곧 선생님 1주기잖아요. 여자는 자연스레 운을 띄웠다. 나는 순간 그런가요? 하고 반문할 뻔했다.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며 바쁘게 지내려고 노력하느라 그동안 시간을 전혀 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제자들이 많아요. 1주기에 저희끼리 작은 까페를 빌려서 추도회를 열려고 해요. 선생님 작품도 걸고 얘기도 하고요.

여자는 내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엄마의 일에 관해서라면 나는 왠지 확신이 없어져서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딸로서 도울 일이 있다면 기꺼이 돕겠다고 에둘러 답했다. 여자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목을 가다듬으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아, 선생님, 제 이름은 의주예요. 이의주.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엄마와 많이 가까운 사이였나보네요. 내가 묻자 의주는 제가 받은 것이 많아서요,라고 답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그 말이 맴돌았다. 무엇을 주었을까? 훗날 의주와 가까워졌음을 느꼈을 때 나는 한번 더 그 질문을 했다. 엄마가 너에게 무얼 주었어? 내 질문이 당돌하게 느껴졌는지 의주는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유리컵의 바닥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웃었다.

엄마는 통원치료 중에도 세군데 대학에 출강하며 학생들을 만났다. 비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외부 강의나 학습지 교사 일도 계속했다. 지금 그만두면 영영 일이 끊길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물려받을 재산도 엄마의 노후를 짊어질 자신도 없었으므로 나서서 말릴 수 없었다.

 

엄마의 사정이 어려워진 것은 할아버지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부터였다. 회화를 전공하던 엄마는 할아버지의 권유로, 그러나 자신은 별다른 꿈 없이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당시 유학길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들은 그림을 그리거나 영화를 만들거나 요리를 배우러 빠리에 온, 그러니까 뚜렷한 동기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엄마는 그들과 자신은 유학 시절 내내 옷차림부터 달랐다고 선을 그었다.

나는 맨날 원피스에 구두에 어디 놀러 온 사람처럼 꾸미고 다녔는데 걔들은 청바지에 티셔츠 한장 입고 와서 내 기를 죽여놓는 거야.

엄마는 언젠가 함께 아침을 먹으며 이런 얘기를 했다. 엄마는 종종 내게 미안한 일이 생길 때마다 일찍 일어나 버터를 두른 프라이팬에 식빵을 바싹 구운 뒤 황설탕을 솔솔 뿌려 만든 토스트를 따듯하게 데운 우유와 함께 내어 주었다. 둘 다 아침을 잘 챙겨 먹지 않아 드문 일이었다. 이거 참 영양가 없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두조각을 다 먹었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빠리 생활에 대한 에피소드를 장황하게 풀어놓으면서도 좀처럼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는데 꽤 오랜 시간 동안 엄마와 나에게 아버지는 금지어로 남아 있었다. 대신 엄마는 내가 커가는 속도에 맞춰 힌트를 주듯 아버지에 관한 정보들을 하나씩 알려 주었다. 상상 속에서 그는 낡고 품이 큰 진회색 롱코트 안에 와인색 머플러를 두르고 언젠가 내 앞에 나타날 것 같았다. 나중에 사진으로 만난 아버지는 다소 왜소한 체격의, 어딘지 굴곡져 보이는 사내였다. 화가였고 엄마보다 아홉살 많았으며 대학교수라고 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는 조금 실망했다.

결혼도 전에 임신 소식을 알리자 할아버지는 엄마에 대한 지원을 모두 끊었다. 엄마가 빠리에 머무를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엄마는 내가 세살이 될 무렵 모든 걸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로부터 남겨진 돈을 보며 짐작했을 뿐이다. 엄마는 곧바로 석박사를 마친 뒤 시간강사 자리를 얻었다.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았는지 따르는 제자들이 생겼다. 틈틈이 그린 그림으로 단체전에 참가하거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엄마는 바쁘게 지내다가도 한번씩 풀어졌다.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서 식탁에 앉아 위스키 한잔을 마시며 나를 빤히 바라보곤 했다.

나는 너를 키워야 하니까 너를 포기하기도 했어……

당시에 나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피곤함에 절어 빨갛게 충혈된 눈을 한참 마주하고 있었을 뿐이다.

 

*

 

의주는 추도회를 준비하는 동안 내게 딱 한번 부탁해왔다. 추도회에서 사진과 영상 촬영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추도회는 그로부터 석달 뒤인 어느 가을 저녁에 열렸다. 이날이 오긴 오는구나 싶어 아침 일찍부터 눈이 떠졌다. 후암동의 서점을 대관했는데 그건 추도회와 관련된 나의 유일한 제안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않게 대관 비용을 내주고 싶었고 오래전 엄마와 스치듯 가본 곳이기도 했다. 밥을 먹고 산책하다 들른 그 서점에서 엄마는 내게 그림책 한권을 선물했다. 아주 얇은 책이라 엄마가 다른 책을 고르는 걸 기다리는 동안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사백년을 산 느티나무가 어느날 갑자기 저주에 걸려 몸집이 작아져버리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작아진 대신 걸어다닐 수 있게 되자 나무는 사람들 눈을 피해 마을 곳곳을 누빈다. 자유를 얻었지만 걸을 때마다 떨어지는 이파리들에 나무는 점점 야위어가고 나중에는 볼품없이 작아져 제 모습을 내려다볼 수조차 없게 된다. 나무는 그래도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저주에 걸린 나무는 마침내 바다로 향하고 영영 마을로 돌아오지 않는다. 짧지만 장마다 수채화가 있어 한번 더 들여다보게 되었다.

삽화를 엄마 제자가 그렸어.

계산하고 돌아온 엄마가 말해주어서 나는 무언가로부터 풀려난 듯 들고 있던 에코백에 책을 넣었다.

 

의주는 일찍 도착해 먼저 온 사람들과 엄마의 작품을 나르고 있었다. 목소리만 듣다가 얼굴은 처음 보는 자리라 덩달아 긴장하며 인사를 건넸는데 의주가 반갑게 맞아주어 고마웠다.

서점 안에 사람들이 들어찼다. 따로 시작한다는 싸인 없이 정각이 되자 의주가 추모사를 낭독한 뒤 작품에 대한 해설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이 다음 작품으로 이동할 때마다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다가 문득 찰칵 소리가 거슬려 촬영을 그만두고 사람들에 섞여 작품을 감상하기로 했다.

엄마는 주로 일상의 풍경을 그림에 담았다. 대부분 물감에 물을 탄 듯 부드러운 색감이어서 평온한 인상을 주었다. 멀리서 보면 전체적으로 밋밋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의주는 그 점을 언급하며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림의 질감을 살펴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이미 보고 지나간 한 작품 앞에 멈춰 서서 의주의 말대로 그림의 세부를 살폈다. 호수에 돌을 던진 순간을 포착한 듯 사방으로 물이 튕겨져나가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으니 싹이 난 양파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목은 ‘스윙’으로 내가 태어난 다음 해에 완성된 작품이었다. 먼 타국에서 낳은 아기를 업고 집 근처 호숫가에 가서 라켓을 휘두르듯 돌을 던지는 엄마를 떠올리니 그거대로 엄마다워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의주와는 추도회 이후에도 종종 만났다. 그 시기 의주는 미술관에서 보조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었다. 멋진 일 하시네요. 저녁 무렵, 학교 안 까페테리아에 앉아서 북돋아주자 의주가 열 손가락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큐레이션 빼고 다 해요. 오늘도 공 닦다가 왔어요. 전시장에 볼풀로 꾸며놓은 포토존이 있거든요.

볼풀이요?

네. 왜 어릴 때 감자탕집 가면 늘 있었잖아요.

있었죠. 지금도 있나?

글쎄요. 아무튼 공은 닦으면 닦을수록 빛은 안 나고 정전기만 일어나요.

의주는 다리에 달라붙는 공들을 떼어내는 시늉을 하며 그래도 일년의 계약기간은 꼭 채우고 나올 거라 했다.

선배들도 그랬어요. 적응할 만하면 떠나고. 우린 그런 선배들 보면서 두런거리고. 뭐랄까, 저에게 미술관은 꼭 철새도래지 같아요.

의주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희망찬 미래를 점치지 않았다.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아 보여서 그 부분이 좋다고 짚었더니 의주는 그럼 우리도 아무렇지 않게 말 놓아볼까요, 뜬금없이 물었다. 내가 그래 그러자, 대답했고 의주는 친구가 된 기념으로 나에게 비밀을 하나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곤 자신이 그룹홈 출신임을 고백했다.

그게 뭔데?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의주의 눈이 살짝 풀려 있었다.

관리인과 아이들이 한집에서 사는 거야.

일곱 식구가 함께 지내던 그룹홈에서 의주는 맏이였다. 보통 어릴 때부터 그룹홈 생활을 시작하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의주는 열여섯살 무렵 입소해 자신보다 많게는 여섯살 어린 동생들과 삼년을 지냈다고 했다.

선생님을 거기서 만났어. 매주 미술을 가르치러 오셨거든. 일종의 집단치료인 셈이지. 토요일마다 물어보셨어. 의주야, 의주는 여기서 나가면 어디로 갈 거니? 내가 아무 생각도 없는걸요, 대답하면 선생님은 내 어깨를 붙잡고 또 말했어. 다음주엔 꼭 말해주렴.

엄마가 여러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생각지도 못한 얘기였다. 의주는 꽤 많은 아이들이 엄마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엄마가 봉사를 다닌 그룹홈이 한군데가 아니라는 사실도. 추도회를 열게 된 것 역시 그룹홈 커뮤니티를 통해서라고 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점원이 돌아다니면서 마감이 십분 남았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 공원을 한바퀴 돌기로 했다. 걷다보니 손이 꽁꽁 얼어버렸고 그날 나는 의주를 집에 데리고 갔다. 식탁에 앉아 동이 틀 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의주의 얘기를 들었다. 의주가 술에 취해 너도 아무거나 이야기해봐, 중얼거려서 나는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아직도 여름, 하면 쏟아지는 빗방울보다 플라타너스 아래로 투둑투둑 떨어지던 송충이들이 먼저 떠올라. 나뭇잎을 갉아 먹다가 바람 불면 아래로 툭, 예고 없이 떨어져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복슬복슬한 털들이. 생각해보면 그건 여름이 지나간 뒤 가을장마가 시작될 무렵의 풍경인데도, 내 기억은 그 계절 어딘가에서 혼동되곤 해.

어릴 적 살던 동네에는 플라타너스가 많았어. 주기적으로 살수차가 와서 농약을 뿌려대도, 이상 증식하는 벌레들 때문에 잎들이 누렇게 변해가는 걸 전부 막을 수는 없었어. 어느 해 송충이떼가 동네에서 한창 기승을 부렸을 시기에, 엄마는 독에 쏘일 수 있으니 플라타너스 아래로 절대 가까이 가지 말라고 어린 내게 당부했어. 그 약속을 지키려고 나는 낮에도 그늘을 피해 땡볕으로만 다녔는데, 어느날 갑자기 팔등으로 떨어진 송충이에 모두 소용없는 일이 되었어. 사흘 밤낮을 벅벅 긁어서 독 오른 피부가 아무는 데 한달이 걸렸어. 엄마는 참을성 없는 나를 나무랐어. 해충 문제가 지속되자 구청에서는 대대적인 수종 교체작업에 나섰어. 동네의 늙은 나무들이 모조리 잘려 나갔고, 그 자리에 새로 심은 묘목이 다시 자라 완전한 그늘을 이룰 때쯤 엄마가 병에 걸렸어.

그래서일까,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열어둔 창문 바깥의 나무였어. 오전에 비가 내렸는지 창틀이 젖어 있었어. 창문 닫는 것을 잠시 미루고, 어느덧 내가 사는 층만큼 자란 나무를 바라보기로 했어. 새 가족이 꼭대기에 둥지를 튼 모양이야. 엄마는 집을 착각해 날아든 새들이 실외기에 옹기종기 앉아 있을 때마다 언젠가 장대로 새집을 무너뜨릴 거라고 말했지만 그러지 않을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

 

거기까지 말했을 때 마침 주변이 밝아왔고 의주와 내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식탁에도 빛이 내려앉았다. 잠자던 새들이 깨어나 부지런히 지저귀기 시작했다. 의주가 술을 깨보겠다며 베란다로 나가 찬바람을 쐬는 동안 나는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암막커튼을 치자 방 안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이제 잘까? 내가 물었고 의주가 침대 안쪽으로 들어가 누웠다. 나는 의주의 등을 껴안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

 

닫혀 있던 방문을 열고 의주와 핀이 들어왔다.

뭐 해?

그냥. 영은?

집에 갔어.

의주는 협탁에 핀의 집을 올려두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핀이 사부작거리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고요함이었다. 아직 열대야가 시작되기 전이어서 열어둔 문을 통해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도 휴가 갈까? 다들 휴가계획을 세우는 것 같아.

의주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휴가 말고 에어컨을 새로 달까봐.

나는 천장에 달린 에어컨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옵션으로 있던 것인데 켤 때마다 물이 뚝뚝 떨어져서 한번도 제대로 작동해본 적은 없었다. 집주인은 꼭 고쳐주겠다는 말만 반년째 되풀이했다.

견딜 만하지 않아?

왠지 내년 여름에도 그렇게 말할 것 같은데. 땀 뻘뻘 흘리면서.

둘밖에 없는데 궁상맞게 살지 말자, 농담 섞인 내 말에 그제야 의주가 알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핀 말이야, 잘린 꼬리가 다시 자라는 데 한달 정도 걸린대.

한달을 기다리려고?

더 걸릴 수도 있고 아예 자라지 않을 수도 있대. 에너지를 엄청 써야 한대.

안 돼. 정들기 전에 놔주자.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져.

어차피 집에 있는 건 나일 텐데.

의주는 그렇게 중얼거리다 내 옆에서 먼저 잠들었다. 새벽에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핀을 찾았다. 핀은 휴지심을 발판 삼아 벽을 타려고 했다. 네개의 다리에 각기 돋아난 발가락에 힘을 주고 바닥을 지탱하면서. 미끄러져도 또 한번. 2리터짜리 페트병보다 위아래로 한뼘 정도 더 커진 공간에서 핀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라 생각하자 핀이 숫자를 세며 팔굽혀펴기 하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핀, 나오고 싶어? 조용히 물었고 핀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잠든 의주 몰래 지붕처럼 덮어둔 신문지를 슬며시 옆으로 치워두었다.

 

다음 날 눈앞에 무언가 아른거려 눈을 떠보니 언제 왔는지 모를 영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잠이 덜 깬 척 돌아누웠다. 이봐요, 일어난 거 다 봤어. 다시 눈을 뜨자 영과 눈이 마주쳤다. 영이 눈 마주친 김에 너도 같이 나가자며 의주에 이어 나까지 일으켰다. 핀을 굶길 거야? 영이 졸졸 따라다니며 재촉했다. 반쯤 뜬 눈으로 티셔츠와 바지를 갈아입었다.

너는 핀을 맡아줘. 언제 준비를 마쳤는지 멀끔해진 의주가 핀의 집을 내게 건넸다. 주말 아침부터 이럴 일이야? 계단을 내려오면서 물었지만 영과 의주는 저만치 앞서가느라 듣지 못했다. 나는 털레털레 그 뒤를 쫓았다.

챙겼어?

응, 챙겼지.

영의 물음에 의주가 바람막이 점퍼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비닐봉지 몇장을 꺼내 흔들었다.

집 앞에 있는 생태공원에 도착하자 천변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영이 비장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쓰레기장 근처로 가야겠지.

우리는 공원 구석에 있는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가까워질수록 습한 공기와 함께 부패한 냄새가 훅 끼쳐서 코를 틀어막았다. 의주는 귀에 들러붙는 파리를 손으로 휘휘 내쫓으면서 영을 바라보았다.

네가 유인해. 내가 잡을게.

영이 말했다. 둘은 여러장의 비닐봉지를 들고 땀을 흘리며 쓰레기장을 누비고 다녔다. 몇십분간의 사투 끝에 여러마리의 파리가 모였다. 나는 비위가 상해 핀을 들고 멀리 떨어져서 걸었다.

벤치에 앉아 쉬고 있자 멀리서 영과 의주가 걸어왔다. 의주는 비닐봉지를 내려쳐 파리들을 기절시킨 뒤에 핀의 집에 조심스레 쏟아주었다. 핀은 우수수 떨어지는 파리들에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순식간에 파리를 먹어 치웠다. 구석으로 떨어진 파리 한마리가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날개를 파득거렸다. 핀이 날갯짓을 하는 파리를 낚아채려는 사이 그보다 잽싼 파리가 뚫어둔 숨구멍을 통해 날아갔다. 핀은 먹이를 놓친 것이 아쉬운지 계속 밖으로 나오려 했다. 의주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제 집에 가자, 말하며 무릎을 탈탈 털고 일어섰다.

 

집에 와서 잠깐 기대어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늦은 오후였다. 집 안을 둘러보자 영도 없고 의주도 없었다. 영은 가게 오픈 준비를 위해 나갔을 터이고 의주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핀도 사라지고 없었다. 다 어디로 간 걸까. 현관문이 조금 열려 있어서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 복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의주가 1층에 쪼그려 앉아 무얼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사진을 찍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큰 소리로 의주를 부르는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

거기서 뭐 해.

핀 찍는 중.

집에서 찍지 않고?

해 지기 전에 찍어주려고.

밥 먹게 올라와.

의주는 답장하지 않고 위를 올려다보며 팔을 들어 올려 큰 원을 만들었다. 나도 그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로 찰칵 찍었다.

 

호기롭게 말해놨지만 밥솥에 쌀을 안쳐둔다는 것을 깜빡해 밥이 없었다. 다행히 냉동실에 얼려둔 호밀 식빵이 몇장 남아 있어 오랜만에 영양가 없는 토스트를 만들기로 했다. 버터를 발라 빵을 굽고 황설탕 대신 흑설탕을 솔솔 뿌린 다음 열기가 남아 있는 프라이팬에 의주가 좋아하는 스크램블에그까지 만들었다. 그때 의주가 핀이 든 플라스틱 상자를 안고 들어왔다.

나 핀을 놓아줄까봐. 의주가 토스트를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어?

밖에 나가서 얘기 많이 하고 왔어. 핀이 인간들 지겹고 그만 떠나고 싶대. 의주가 장난스러운 투로 대답했다.

사실 아까 전에 계단을 내려가다가 상자를 엎을 뻔했어.

안 다쳤어?

핀이 튕겨져나갔어.

도망치는 걸 잡아왔구나.

당연히 도망갈 줄 알았는데 나도 핀도 몸이 굳은 채로 가만히 있었어. 무서웠어. 나중엔 놓아줘도 도로 통 안으로 들어갈까봐. 거기가 제집이라는 듯이.

의주는 방금 전 일을 떠올리면서 정말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의주가 문득 대견하게 느껴졌다.

내가 핀이었다면 지금 네 머리통을 쓰다듬었을 거야.

그게 뭐야.

어디에 놓아줄지는 생각해봤어?

아직. 산이 좋을까, 원래 있던 하수구가 좋을까?

산에 놔주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오히려 산이 싫어서 도망쳐온 거면 어떡해? 내가 물었다.

떡집 할머니가 그랬잖아. 인간은 몰라도 핀은 야생이니까 살아남을 거야. 의주가 대답했다.

조금 아쉽네.

우리는 핀의 모습을 눈에 담으면서 얼마간 말이 없어졌다.

영이 말해줬는데, 동남아에도 찡쪽이라는 도마뱀이 산대. 거기선 찡쪽이 집에 오면 운이 들어왔다고 믿는대.

핀도 우리에게 그럴까? 의주가 덧붙였다.

글쎄, 뭐라도 두고 가지 않을까. 나는 대답한 뒤 고개를 돌려 우리의 거실을 통과하고 있는 불그스름한 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고 있네.

쥐가 있다고?

의주는 아까부터 덜덜거리는 선풍기의 머리를 들어 올려 바람의 방향을 바꾸다가 잘 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나는 그 말에 파스스 웃어버렸고 핀은 여전히 사방이 투명한 자신의 집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