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특집│위기의 시대, 문학의 지혜

 

서정시가 필요한 시대

기후-생태 위기에 맞서

 

 

양경언 梁景彦

문학평론가. 평론집 『안녕을 묻는 방식』 등이 있음.

purplesea32@hanmail.net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 있고, 어디에도 갈 계획이 없습니다.”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 2022년 10월 30일 연설에서

 

 

1. 누가 책임지는가

 

지난 2015년 빠리기후협정에 참여한 국가들은 지구 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이내로 제한하자는 목표를 잡고 기후위기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약속했다. 그러나 최근 유엔기후변화협약 사무국이 분석한 바에 의하면, 193개 각국의 목표에 따른 온실가스 감축을 이행하더라도 이번 세기 말 지구 평균 온도는 산업화 이전보다 2.5도 높아질 것으로 예측된다.1 세계가 더욱 강화된 기후행동 계획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극한 기상이변, 예상치 못한 재난의 증가는 물론이고 지구상 여러 생명들의 삶의 질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상황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

기후문제는 “지구행성이 처한 총체적 난국(생물다양성 상실, 생태계 붕괴, 6차 대멸종, 담수 부족, 토지훼손, 산림파괴, 유해 화공물질 등)”과 함께 이해해야 하는 “기후-생태 복합위기”2이고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야기한 문제이자, 이대로는 사회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리라는 인식이 공유되는 요즘이다. 학계 및 사회운동 진영으로부터 제출되는 해결책이 ‘체제전환’에 대한 요구로 모이는 중에 앞서와 같은 소식이 들리면 우리는 또다시 답답해진다. 그간 기후문제의 심각성을 열심히 알려왔던 사람들은 절망감을 느낄 테고, 기후문제의 규모가 너무 크다 싶어 ‘현실적이지 않은’ 일로 여겨왔던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연해질 것이다. 이 글은 그 간극 사이에서 “‘나’라는 개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등 돌리지 않고 “뭐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을 품은 이들을 귀하게 여기는 자리에서3 시작한다. 기후-생태 복합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책임의 자리를 새기는 일은 ‘나’의 역할과 ‘우리’의 지향을 고정적으로 여기지 않을 때 이루어지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이 글은 우선 ‘나’의 실천과 개별적인 움직임의 의도를 곡해하는 입장과는 거리를 두고자 한다. 기후문제와 관련하여 사이또오 코오헤이(斎藤幸平)는 에코백이나 텀블러 사용같이 소비의 반경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노력이 자칫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고 여기게 만들어 정작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을 뒤엎는 대담한 활동에 나서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4 자본주의의 ‘폭주’로부터 벗어나야만 당면한 기후문제를 타개할 수 있다는 그의 절박함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지배적인 체제의 방식과 ‘단절’하고 ‘다른’ 상상력을 가동하는 실천을 요청할 때 우리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공백에 대해서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근대극복의 “저항운동”이 “현실 속에서 실행력과 지구력을 발휘하고 있다면 그것은 또한 ‘적응’의 사례들이기도” 하다는 백낙청의 지적5을 상기할 때, 체제전환을 위해서는 지금의 상황을 단번에 뒤집어놓을 공세를 개시하기보다(이 경우 오히려 파괴적인 언설과 외부적인 계기가 요청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과정을 설계하는 일이 필요하다. 요컨대 어떻게 체제전환을 이뤄나가는지와 관련해서는 지금 사회의 구성원인 주체들의 몫을 실질적으로 마련하고 그 필요성을 설득해나가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곳곳에서 이어지는 실천들의 의미를 축소해 ‘거대한 문제’를 상대하다가 위축된 이들의 소시민적인 행보로 여기는 입장 역시 경계해야 한다. 전영규는 기후위기를 “위기처럼 대할 수 있는 문학의 수행”을 강조하는 글에서 ‘나와 세상(타자)의 연결’에 대한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논지를 빌려 “‘전부’가 아닌 바로 이 ‘스토리’”에만, “지금 ‘이것’과 ‘여기’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6 조대한 역시 “커다랗게 다가오는 전지구적 위기와 재난 앞에서 그에 상응하는 거대담론을 이야기하는” 일보다 “본인의 자리에서 행하는 작은 행동과 그로 인해 조금씩 변화하는 주변의 모습을” “체감”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본다.7 자연의 본디 규모인 거대함을 깨닫고 그 앞에 한없이 왜소한 주체로서의 인간 형상을 떠올릴 때 우리는 그간 인류가 축적해온 지혜가 부질없이 느껴지는 상황을 겪기도 한다. 언급한 논의들 역시 사회 전반을 바꿔야 한다고 판단할 때 밀려드는 막막함, 무력감과 다투면서 제출된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변혁의 방향성을 품고 큰 변화의 과정을 겪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면서 스스로 삶의 감각을 바꾸어나가는 일이 과연 “전부”를 살피고 “거대담론을 이야기하는” 일과 동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언급한 논의들은 ‘거대한 문제’는 ‘거대하게’ 푸는 다른 방법이 있고, ‘개개인’은 그와 분리된 채 ‘거대하지 않은’ 소규모의 자리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는 편견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는 게 아닐까?

 

 

2. 기후-생태 위기와 ‘시인정신론’

 

문학은 개별적으로 맞닥뜨리는 현실의 사안들을 세계체제의 국지적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지구적인 과제와 삶의 과제를 통합하는 데 유효한 경로를 마련해준다. 시인 신동엽(申東曄)이 1961년 2월 『자유문학』에 발표한 글 「시인정신론」8을 경유해 기후-생태 복합위기에 놓인 지금 시기에 필요한 실천의 갈피를 구해보기로 하자.

제목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 「시인정신론」은 오늘날 ‘시인’이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현대사회에서 시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짚어내는 글이다. 이는 곧 시인이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떠한지에 대한 분석을 요할 텐데, 따라서 해당 글은 ‘시인정신론’이라는 제목을 내세웠으면서도 서두에서 “나는 지금 현대를 진단하려 한다”(88면)는 과감한 문장을 제출함으로써 글의 대부분을 ‘문명 비판’에 할애한다.

신동엽은 현대문명이 분업에 기초함으로써 특수한 분야의 전문 기능자들, 즉 단편적인 지식만을 축적하는 “맹목(盲目) 기술자들”이 서로 경쟁하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문학을 비롯해 철학·예술·과학·경제학·정치 등 각 영역이 “인생에의 구심력을 상실한 채 제각기 (…) 사방팔방 목적 없는 허공 속을 흩어져 달아나고 있”는 상황을 지적한다(88~89면). 이로 인해 “거대한 공장기구”가 버젓이 들어서고, “정치 전문 맹목 기능자들은 그 흙 묻은 발로 우리 백성들의 머리 위를 밟고 돌아다니면서 귀 익은 호령, 졸음 오는 연설들을” 할 뿐 아니라, 그런 이들에게 “우리 신상에 관련된 모든 처분권을 완전히 위임하고 살아가”는(97면) 현실이 가시화된다. 그러다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불안, 공포, 전제, 부도덕, 파멸”(93면)과 같은 현상이 마치 인간의 전신인 듯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이다.

신동엽은 지금 당장 눈앞에 드러난 세상만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현재 인류가 어느 위치쯤에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세계를 ‘원수성(原數性) 세계’ ‘차수성(次數性) 세계’ ‘귀수성(歸數性) 세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뜻 그대로를 살피면, 세계를 근본적인〔原〕 데서부터 출발해 두번째〔次〕 단계와 다시 돌아가는〔歸〕 단계에 이르기까지 원대한 흐름 속에서 형성되어가는 곳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땅에 누워 있는 씨앗의 마음은 원수성 세계”, “무성한 가지 끝마다 열린 잎의 세계는 차수성 세계”, “열매 여물어 땅에 쏟아져 돌아오는 씨앗의 마음은 귀수성 세계”(91면)라는 비유를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생명과 죽음이 다양하게 포진된 거대한 세계를 이처럼 순환하는 자연에 빗대면서 시인은 어떤 성질과 형태를 띠든지 모든 존재는 세계의 일부로 수용될 수밖에 없음을 알린다. 특히나 시인은 인류가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해온 문명 전체가 실은 차수성 세계 정도에 속해 있으며, ‘문명인’의 몫이란 “규범지어진 속에서나마 최대재의 원을 지향하여 신명을 다스려가”(92면)는 것임을 일러준다. 즉 원수성 세계에서부터 “차수성 세계 건축”(93면)을 이룰 때까지, 인류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여기’에 대한 책임을 떠나보낼 수 없다. 이는 기후학자 파울 크뤼천(Paul Crutzen)과 유진 스토머(Eugene Stoermer)가 인류가 지구 환경에 영향을 미친 시점부터를 별개의 지질시대로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며 내세운 ‘인류세(人類世)’ 담론의 범위에 준하는, 어쩌면 그를 넘어서는 인식의 규모를 보여주는 대목으로도 읽힌다. 이러한 개념들은 모두 현대문명이 초래한 기후 및 생태 문제를 ‘환경문제’와 같이 특정 영역으로 분리하지 않고, 인간이 초래했으면서 인간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도 함으로써 “세상의 맥락을 바”꾸어낸9 지금 이곳의 중대한 과제로 삼도록 한다.

동시에 시인은 차수성 세계에 속한 오늘날의 인간이 “교활하고 극성스런 어중띤 존재자로”(93면) 살아가려 할지언정 대지 위에 뿌리박은 세계의 일부인 한 ‘맹목 기능자’들이 판치는 흐름 자체를 없는 셈 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이들이 “대지 위에 나뭇가지를 세우고 그 위에 올라앉아 재주부리는 재미를 익히기 시작한”(같은 면) 기억을 간직한 사람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도 짚어낸다. 오늘날 인류 문명이 “오직 분업문화의 성과”(95면)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므로, ‘차수성 세계’에서 이룩된 성취를 내치지 않되 동시에 차수성 세계에서 빚어지는 문제들로부터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10 이처럼 시인의 관심은 어떻게 ‘종합’에 이를지에 할애된다.

차수성 세계를 형성하는 분업문화의 성취와 부정을 두루 겪는 능동적인 적응 노력으로 극복의 노력을 일구면서11 “대지에 뿌리박은 대원적(大圓的)인 정신”(100면)을 지닌, “인간의 모든 원초적 가능성과 귀수적 가능성을 한 몸에 지닌 전경인(全耕人)”(103면)을 추구해나가는 것. 다시 말해, 인류가 기거하는 곳이 곧 씨앗이 가지와 잎을 뻗어 올리다가 열매가 여물면 다시 돌아가기도 하는 대지임을 잊지 말고 ‘밭을 돌보는〔耕〕’ 사람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신동엽은 이것을 ‘시인’이 추구해야 할 정신이라 말한다. 이때 시는 한낱 언어의 공예품이 아니라, 시인이 차수성 세계에서 ‘전경인’ 상을 추구하는 노력 속에 쓰이는 것이자, “항시 보다 광범위한 정신의 집단과 호혜적 통로를 가”(102면)지는 것이 된다.

「시인정신론」에서 말하는 시를 쓰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태도는 1960년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대지가 점점 더 황폐해질 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대지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지금 인류가 다시금 스스로의 자세를 가다듬을 때에도 “대지 위에 뿌리박은 전경인적인 시인과 철인”(100면)의 정신은 절실히 요청된다.

기후-생태 위기에 응하는 우리의 시야 역시 지금 보고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감지하며 “이것이 전부”인지, “지금까지 보고 말한 것이 현실의 전부이며 진실의 전부인”지12 질문을 오래 지속시키는 총체성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삶 전반에서 근본적 변혁이 있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수록 “개인과 사회, 개인의 이력과 역사, 자아와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포착할 수 있는” 총체적인 시각으로 형성된 “사회학적 상상력”13이 필요하다.

「시인정신론」은 기후-생태 복합위기에 놓인 우리에게 전경인의 마음가짐으로, 조그만 씨앗에서 온 생명의 박동을 감지하는 시인의 자세로 생활에 임할 것을 지침으로 전한다. 전지구적 생태계의 일부임을 자각한 인간이 “본질적으로—다시 말해서 특정한 지위나 재산이나 전문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역사’를 만드는 힘”을 발휘하고 그 자체가 “‘시’의 세계”를 열 수 있다고14 믿을 때, 우리는 자연을 상대로 포악한 만행을 저지르는 인간이 아닌 지금 이곳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물리지 않으려는 인간의 자리를 사수할 수 있다.

 

 

3. ‘차수성 세계’에서 분투하는 시

 

신동엽이 ‘원수성 세계’ ‘차수성 세계’ ‘귀수성 세계’를 각각 봄, 여름, 가을에 비유하면서 인류 문명이 펼쳐지는 차수성 세계를 ‘여름이 무성한 시기’로 설명할 때, 우리 앞에는 마치 무성한 나뭇잎이 “좌충우돌, 아래로 위로 날뛰면서 번식 번성하여 극성부리”다가 “천만길 대지에로 쏟아져 돌아가기 위한 미미한 몸부림”(91~92면)을 이어가는 여름 풍경이 펼쳐지는 것 같다. 이는 최근 발간된 여러 시집의 제목에서 유난히 ‘여름’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나는 경향15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오래전부터 시의 단골 소재였던 ‘여름’이 요즘 들어 자주 등장한다 해서 곧바로 이를 이상기온 현상이나 기후위기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시인들의 환경감수성과 연결 짓는 건 다소 억지스럽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언어들이 ‘맹목 기능자’ 천지로 변해가는 차수성 세계의 “대지 위에서 자기대로의 목숨과 정신과 운명을 생활”(100면)하면서 시의 현장을 개시해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최근 시에 등장하는 ‘여름’에 대해서도 기후변화가 잠식해가는 세상을 상대하는 시 나름의 방식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자연과 인공이 뒤섞인 곳에서 빛의 양상을 탐문하는 시세계를 보여주는 김리윤의 시 「근미래」(『투명도 혼합 공간』, 문학과지성사 2022)에서는 “여름이 기억나지 않”는 이들이 나온다. 이들에게 ‘여름’은 대지로부터 이탈한 채 부유하는 존재가 겪는 상실감이 형성되는 배경이다. 조효제는 사회학자 리베카 엘리엇(Rebecca Elliott)의 의견을 참조하여 기후변화에 관한 감정의 핵심을 ‘상실’이라 전하면서, 오랫동안 인간이 자연환경과 어울리며 이어왔던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더이상 할 수 없어진 기후위기의 상황이 “정신적·심리적 공백과 비탄”16을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최근 시에 ‘여름’이 등장하거나 언급될 때, 이러한 기미가 읽히는 시편들에서 주목할 점은 그러한 상실감을 시가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일 것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심리적으로 영향을 끼쳐 많은 이들에게 ‘기후우울증’ ‘생태 비탄’ ‘환경 불안’을 야기한다는 보고가 늘고 있는 지금,17 어떤 시는 차수성 세계에 범람하는 불안과 공포와 파멸의 감각에 치우치지 않고 절망감에 맞서 사태의 심각성을 현실의 문제로 끌고 와 얘기한다.

 

오전에 비가 올 거라고 했다

전국에 폭염주의보가 발효되었다

 

사람들이 마른 우산을 들고 있다

열차는 지연 중

사고 처리를 한다고

 

다음 달 급여를 계산하던 중이었다

이런 날이면 뭔가 두고 온 것 같은데

그냥이라는 말이 있어 다행이다

 

오후 뉴스에서

내일은 꼭 비가 오겠다고 한다

 

저녁부터 폭우가 쏟아진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고 했다

좋은 날이 올 거라고 했다

—이종민 「대합실」 전문

 

이종민의 첫 시집 『오늘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창비 2021)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대체로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식들로 표현된다. 「대합실」 역시 마찬가지다. 시에 등장하는 ‘나’는 “비”와 “폭염” 소식을 전하는 종잡을 수 없는 일기예보와 열차 지연을 알리는 안내방송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사람들”은 “폭염주의보가 발효”된 상황에서 일기예보를 따라 “우산을 들고” 나왔으나 오전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는 틀리고, “내일” 온다던 폭우는 저녁부터 쏟아진다. 예측 불허의 날씨, 예상 불가능했던 열차 지연, (“다음 달 급여를 계산”해야만 하는 화자의 처지로 짐작하건대) 불확실한 전망과 같이 겹겹의 불안한 상황 속에서 ‘나’는 문득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어디서 들어본 말을 중얼거린다. 아마 화자에겐 다음의 질문들이 남겨졌을 것이다.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기본 조건들이 갈수록 불확실해져가는 현실에서, 또한 어떤 이의 삶 자체가 플랫폼이나 ‘대합실’과 같은 안정적이지 못한 장소로 비유되는 세상에서, 불안한 일들이 자꾸 벌어지는 게 정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문제일까. 또는 마냥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말에 수긍만 하면 될 일인가.

짐작할 수 없는 날씨와 불규칙적인 열차 시간, 불안정한 생활을 알리는 표현들이 축적되어가다가 도착한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고 했다/좋은 날이 올 거라고 했다”는 마지막 6연은 그래서 더욱 화자가 불만을 품은 채 내뱉는 말로 읽힌다. 기술 무장과 정치적인 책동으로 기후변화나 환경파괴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나빠지는 환경에 먼저 노출되어 불안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는 불평등한 세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떠도는 무책임한 말과 근거 없는 낙관이 화자에겐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 시의 ‘나’는 언뜻 보면 별수 없다는 듯, 주어진 상황을 짐짓 참아내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그냥이라는 말이 있어 다행이다”와 같은 구절이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종민 시에서 ‘참는 사람’의 모습은 이상하게 돌아가는 세상과 그에 무심한 이들과의 낙차를 형성하며 그이가 견뎌내고 있는 높아지는 긴장의 강도를 드러낸다. 「대합실」에서 ‘참는 사람’인 화자가 감내하는 ‘지금’ 역시 어떤 일이 당장 벌어진 한가운데이자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기 직전이라는 긴장이 생활의 형식 속에서 육박해온 때이다. 그 누구도 책임을 지겠다고 선뜻 나서지 않는 상황이 불러올 더 큰일에 대한 예감으로 “좋은 날이 올 거라”던 착각에 맞서면서, 이 시는 우리가 손을 써야 할 지점에 도착하고자 한다. 누군가에게는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글러버렸다고 판단되는 곳일지라도 그 글러버린 상황을 겪고 있는 누군가가 여기에 있으므로, “오늘은 오늘의 질문을/내일은 대답을 기다리러 가”(「가늠하다」)는 일을 멈추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종민 시는 체념하듯 일상에 매몰되는 태도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심하며 일상을 꾸려가는 태도를 구분하면서 후자에 다가선다.

기후-생태 위기 시대의 상실에 맞서 우리가 새겨야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가려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앞서 떠올려본 ‘여름’ 시, 또는 기후-생태 위기가 야기하는 불평등의 고통을 감지하는 시와 같이 일인칭 ‘나’의 정서가 사물과 세계에 대한 태도 속에서 발현되는 목소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전경인’의 정신을 추구하는 서정시는 이야기에 맥락을 입히고 그 이야기가 기억되도록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차수성 세계의 사건들을 적극적으로 들여와 분투하는 시들은 서정시의 존재조건이라 할 수 있는 사적인 내면의 공간을 공적인 영역으로 전환함으로써 지금 필요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4. 서정시가 필요한 시대

 

2000년대 초반 출간된 첫 시집들에 대한 잇따른 평가에서 ‘서정시’는 주요 논쟁거리로 다루어졌다. 서정시의 본질이 ‘주관성의 발로’에 있다고 할 때, 많은 논자들이 이를 ‘단일한’ 내면을 소유한 ‘일인칭’의 존재가 세계를 ‘장악’하는 차원의 표현을 꺼내놓는 것으로 해석하며 서정시 자체를 문제적으로 여긴 것이다. 어쩌면 ‘서정’과 ‘서정 아닌 것’을 구분하기 위해 시도됐던 이같은 논의가 서정시에 대한 고정된 이해(혹은 오해)를 형성하고 서정시는 낡았다는 편견을 조성하여, ‘서정시’라는 지목없이 ‘일인칭 시’로만 통칭되어 비평이 이루어지곤 하는 최근의 경향에까지 영향을 미쳤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일인칭 주어인 ‘나’가 기존의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말을 주체적으로 꺼내면서 세계와 관계 맺을 때 저절로 우러나오는 힘을 마냥 ‘독재적’인 것이라고 평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서정시의 존재조건으로서 서정시를 낳는 사적인 내면의 공간을 해석하는 작업”과 “서정 주체”가 사물과 세계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18를 섬세하게 읽어내는 과정이다. 어떤 서정시는 자연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나’ 자신을 혹독하게 성찰하고, ‘나’를 이루는 이들에 대한 (장악이나 정복이나 소유가 아닌) 연결의 감각을 동원하며, ‘나’의 실천을 ‘우리’의 지향 속에 정초해가는 일을 하려 한다. 이러한 시들이 지닌 가치를 대충 흘려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정시가 본래부터 품고 있던 친생태적인 지향을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기후-생태 복합위기 시대는 자신의 자리에서 출발해서 많은 이들과 공존하는 세상과 만나고자 하는 서정시의 풍성한 힘을 요청한다. 시가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적 효과의 최대치를 비평가가 앞서 재단하지 않기로 하고 다음 시를 읽는다.

 

해변에 가자

 

혼자라면 발자국이 두개, 아롱이 밤이와 함께 걸으면 발자국이 열개

 

스무개, 서른개……

 

셀 수 없는 무늬로 모래사장을 물들이자 파도가 다가와서 열개의 다리를 적셔도 멈추지 말자 첨벙첨벙 발을 구르자 각자의 감촉으로 햇살 아래 몸을 말리자

 

개 반입 금지

 

현수막을 운동장에서, 거리에서, 해변에서 만나게 된다 해도 걷기를 포기하진 말자 코너의 벚나무까지 달리기, 창 너머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멈추지 말자

 

비에 젖은 흙냄새, 실밥이 뜯긴 야구공, 풀숲에 뛰어들기를 끝내지 말자

 

열개의 다리로, 수많은 풍경 속에 발 담그기를 계속하자

 

바람에 흩날리는 제각각인 우리의 빛깔을 그림자와 그림자로 이으며, 킁킁 가끔 뒤돌아 서로를 확인하면서

 

모르는 길 밖으로 나서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가볍게 가볍게 땅에 그어진 선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으며

 

이 걷기를 계속하자

—정다연 「우리 걷기를 포기하진 말자」 전문(『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창비 2021)

 

‘나’는 각각 발자국을 네개씩 남기는 “아롱이” “밤이”와 함께 해변을 산책하는 중이다. 이 산책은 “해변에 가자”는 ‘나’의 제안으로 시작한 것이지만, 모래사장에 찍혔다가 파도에 지워지기도 하면서 “스무개, 서른개……”로 발자국이 계속 이어지는 과정은 ‘나’와 “아롱이” “밤이”가 함께해야만 유지되는 것이다.

시는 파도가 이들의 “열개의 다리를 적”시고 “햇살 아래 몸을 말리”는 모습, “열개의 다리로, 수많은 풍경 속에 발 담그기를 계속하”는 모습을 공들여 그린다. 드문드문 “개 반입 금지”와 같이 특정한 존재를 배제하는 말들이 끼어든다 해도 ‘나’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아름답고 따뜻한 장면을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 시가 “개 반입 금지”라는 동물혐오 표현에 맞서고 공존을 어렵게 만드는 경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의지를 내비치는 이상(“모르는 길 밖으로 나서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마지막 구절인 “이 걷기를 계속하자”는 ‘나’의 더 높은 차원의 각오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 시에서 ‘나’는 함부로 인간 외부의 시선을 참칭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지금이 언제나 ‘지금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정다연의 시는 지금을 제대로 보고자 겸허함을 발휘하는 동시에 “강한 상호성”을19 요청하며 용감하게 다음을 약속한다.

 

나무가 아니라

나무의 그림자가 우거져 있었다

우는 건 새가 아니라 새의 마음이었다

 

숲으로 가 숲을 보는 대신

눈을 감고 숲의 고요를 떠올렸다

잠을 자려다 문득

내가 원하는 건 잠이 아니라

잠 속의 산책이 아닐까

행복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까

 

숲의 그림자와

그림자의 숲

잠 속에서 나는 어딜 걷고 있는 걸까

 

새는 안 보이는데 자꾸 새의 그림자만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갔다

누군가 날아가는 새떼를 가리키는 데도 여전히

발밑에 떨어진 그림자만 보고 있었다

거기서

새의 마음을 찾으려는 것처럼

 

눈을 뜨지 않아도

눈꺼풀 너머로 볼 수 있었다

새를 기르지 않아도 새를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조온윤 「그림자 숲」 전문(『햇볕 쬐기』 창비 2022)

 

조온윤은 ‘지금’에 포함되어 있는 ‘지금 너머’를 감지하는 방법을 위의 시와 같이 마련한다. 이를테면 무언가를 생각할 때 당장 떠오르는 것만 생각하다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의 길이를 연장하는 방법으로. ‘나’는 “나무”를 살필 때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보고 만족하는 게 “아니라” “우거져 있”는 “나무의 그림자”까지 헤아린다. “새”의 소리를 들을 때도 어떤 표정이 거기에 깃들었는지 단정하는 게 “아니라” 그 소리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떠올리며 “새의 마음을” 가늠한다.

이런 방법을 취하는 이라면 “숲”을 볼 때도 울창한 숲 그 자체만이 아닌 “숲의 고요를”, “잠”에 들 때도 단지 잠에 빠지고 마는 게 아닌 “잠 속의 산책”을, “행복”이라는 관념보다는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상황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존재를 대하든지 그 존재가 거기 있는 이유와 맥락, 이면에 대해 사유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역할과 행위의 배면에 놓인 이유와 맥락, 이면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생각할 줄 안다. 그리고 이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나’를 지탱하는 세상의 맥락이 있다는 믿음으로 연결되고(“눈을 뜨지 않아도/눈꺼풀 너머로 볼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누군가나 무언가가 가까이 없더라도 그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유지한다면(“새를 기르지 않아도 새를/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세상 어딘가로 그 마음이 전해지리란 걸 알아가는 행위에 닿을 것이다.

생태 담론은 “잃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는 세계와 환경이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갖도록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적 토대와 안전을 보장해주어야”20 풍부해질 수 있다. 그러한 믿음이 없다면 변혁을 위한 길조차 낼 수 없을 것이다. 조온윤의 시는 세상에 대한 감각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면서 우리가 여전히 머물고 있는 ‘여기’에 대한, 떠날 수 없는 ‘지금 이곳’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길을 마련한다. 여러 존재들과 상호의존적인 그물망을 이루는 세상의 구성원으로서 우리에겐 그런 믿음의 권한이 있다. 또한 우리 삶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 한, 그 믿음을 구축할 힘 역시 우리에게 있다.

시의 역할과 시인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태도를 떠올리고 ‘시인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자고 제안하는 일이 어딘가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요즘, 신동엽이 ‘전경인’의 정신을 거론했던 배경을 짐작해보건대, 그것은 이처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잊혔던 우리의 가능성을 깨우고자 함이었는지 모른다.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의심하고,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회의하는 틈에서 기후-생태 위기 시대의 서정시는 ‘나’로부터 시작되는 움직임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물결의 일부임을 자각하게 만든다. “인류수 나뭇가지 위에 피어난 뭇 나뭇잎들”이 모인 “한 씨알”(104면)은 우리가 그를 어떻게 돌보는지에 따라 우주를 펼쳐낼 수도, 혹은 척박한 대지에 그저 묻힐 수도 있다. 이 글은 그 씨앗이 가진 변혁적 가능성을 틔우기 위한 움직임으로 우리가 우리 앞에 당면한 위기에 맞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그랬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쓰였다.

 

 

  1. 「최후 방어선 1.5도인데… 유엔 “이대로면 지구온도 2.5도 상승”」, 한겨레 2022.10.28 참조.
  2. 조효제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창비 2022, 18면. 조효제는 “탄소를 도려내기만 하면 된다는 탄소감축 만능론”에 대한 염려를 전하면서 현재의 위기를 ‘기후위기’가 아니라 “기후-생태 복합위기로 간주한다면, 탄소감축은 기본이고 그것에 더하여 우리가 지구-자연을 대하는 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으리라 본다(같은 책 201~202면). 이러한 문제의식에 동의하면서 이 글은 현재 인류가 봉착한 상황을 ‘기후-생태 복합위기’라 칭한다.
  3. ‘기후싸이렌’의 경보음을 들은 사람들이 “뭐라도 해야지”라고 마음먹는 일을 “‘낭비’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글로 이현정 「기후정의의 정치적 주체 되기」,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 참조. 인용은 37면.
  4.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5면 참조.
  5. 백낙청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비 2021, 115~17면 참조.
  6. 전영규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을 위한 지구 생존 가이드」, 『문학동네』 2021년 겨울호 참조.
  7. 조대한 「기후위기와 미적 재현의 효용」, ‘2022 요즘비평 5차 포럼: 창백한 푸른 점의 우리가’ (2022.10.27) 발표문 참조.
  8. 신동엽 「시인정신론」, 『신동엽 산문전집』, 강형철·김윤태 엮음, 창비 2019 참조. 이하 이 글의 인용은 『신동엽 산문전집』을 기준으로 하며, 인용 시 괄호에 면수만 표기.
  9. 조효제 『탄소 사회의 종말』, 21세기북스 2020, 81면.
  10. 그간의 연구에서는 ‘차수성 세계’를 비판적으로만 대상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박지영은 ‘차수성 세계’를 “우주 생명의 질서로부터 이탈한 문명 역사 전체의 세계”로 보면서 시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세계는 원수성적 세계로 회귀하고자 운동하는 귀수성적 세계”로 해석하고(박지영 「유기체적 세계관과 유토피아 의식」, 강은교 외 지음 『민족시인 신동엽』, 구중서·강형철 엮음, 소명출판 1999 참조), 김화선은 “차수성의 세계에서 귀수성의 세계로의 이행 속에 이미 신동엽은 근대의 전도를 예비하고 있”다고 보면서 “적대적 이행 속에서” 배태되는 “근대극복의 의식”을 읽는다(김화선 「탈주와 회귀의 상상력-신동엽론」,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6집,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1999 참조). 이러한 논의는 원수성·차수성·귀수성 세계를 선형적인 운동을 이루는 과정으로 보이도록 유도하면서 시인의 시도를 ‘근대 극복’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해석한다.
  11. 이와 같은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백낙청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 앞의 책 참조.
  12. 황정아 「리얼리즘과 함께 사라진 것들」, 『개념비평의 인문학』, 창비 2015, 229면.
  13. 조효제, 앞의 책 55~56면.
  14. 백낙청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 /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창비 2011, 216면.
  15. 최근 2~3년 사이 시집 제목으로 ‘여름’이 언급된 사례로는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창비 2020), 임승유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문학과지성사 2020), 민구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아침달 2021), 박은지 『여름 상설 공연』(민음사 2021), 권누리 『한여름 손잡기』(봄날의 책 2022), 주하림 『여름 키코』(문학동네 2022), 전욱진 『여름의 사실』(창비 2022) 등을 꼽을 수 있다. 시집마다 ‘여름’이 상징하는 바에 대해서는 섬세하게 일별할 필요가 있겠으나, 이때 여름은 대체로 불분명했던 인간의 감각이 강렬한 계절감과 섞이며 분명해지는 시기로 상정된 듯하다.
  16. 조효제, 앞의 책 41~42면.
  17. 리베카 헌틀리 『기후변화, 이제는 감정적으로 이야기할 때』, 이민희 옮김, 양철북 2022, 180면.
  18. 정은귀 「루이즈 글릭과 서정시의 귀환: 입장료 1달러 시의 수행성을 다시 생각하며」, 『안과밖』 2021년 상반기호 207~208면.
  19. 사회-생태 전환을 위해서는 “생존과 번영을 위해 상호성에 입각한 협력이 중요”하며 특히 이를 가능하게 하고 강제할 수 있는 ‘강한 상호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조효제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286면 참조.
  20. 조효제 『탄소 사회의 종말』, 5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