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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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郭在九

1954년 광주 출생.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사평역에서』 『한국의 연인들』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와온 바다』 등이 있음. timeroad99@hanmail.net

 

 

 

도라지꽃

 

 

대청마루 위

할머니와 손녀

감자 세알이 화안하다

 

기둥에는 두해 전 세상 떠난

할아버지의 붓글씨가 누렇게 바래 붙어 있는데

山山水水無說盡이라 쓰인

문자의 뜻을 아는 이는 이 집에 없다

 

할머니가 감자 껍질을 벗겨

소금 두알을 붙인 뒤

손녀의 입에 넣어주는 모습을

마당귀 도라지꽃들이 보고 있다

 

도라지꽃은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

할머니가 시집온 그날도 그 자리에 머물러 꽃등을 흔들었다

도라지꽃에서는 구들장 위 한데 모여 잠을 자는 식구들의 꿈 냄새가 난다

눈보라가 날리고 얼어붙은 물이 쩡쩡 장독을 깨뜨리는 무서운 겨울밤을

할머니는 아가야라고 부른다

 

도라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대청 위 할머니도 손녀도 감자를 담던 사기그릇도 보이지 않는다

주련의 글귀도 사라지고

먼지가 뿌연 마루 위를

도라지꽃들이 바라보고 있다

 

 

 

Balloon man

 

 

모든 풍경은

내가 나를 기념하는 방식이다

 

Grand open이라

쓰인 플래카드 앞에서

허수아비를 닮은 한 사내가

긴 허리와 긴 팔을 반으로 꺾어 쿨럭이며

마치 세상의 끝이라도 온 듯 춤을 춘다

 

장맛비

미친 듯 쏟아지는 밤

 

시내버스에서 뛰어내린 한 소녀가

사내의 긴 팔을 붙들고

내력이 없는 지상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