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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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 宋在學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얼음시집』 『진흙얼굴』 『검은색』 『푸른빛과 싸우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내간체를 얻다』 『기억들』 등이 있음. re6666@hanmail.net

 

 

 

얼음일까 거울일까

 

 

바다의 심정을 이러니저러니 모르겠어

파도도 마찬가지

갈매기의 날갯짓이야 해끗한 치정이려니 하지만

일출도 매양 눈맵시부터 자근자근 달라지지만

바다만은

늘 출렁이다가

하늘과 서로 근심할 때

소스라치며 딱딱해진다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지평선까지 죄다 얼어버리는 면적이란

내 몸의 습지까지 냉큼 포함해서겠지,

선뜻 단정 지으면서도

그게 산산조각 난 이야기들을 비치기 위한

다뉴세문경 청동거울이라면, 오

지레짐작한다

 

 

 

위와 헛묘

 

 

위(胃)의 날문부에 봉분이 생겼다는 것은 딱딱한 아랫배를 만져보면 알겠어, 내가 자주 게워내는 노란색 액체란 울음을 움켜잡았을 때의 발명품이다 점막의 긴장이 아니더라도 위의 천공은 죄다 옛 무덤의 발굴이다 증상만을 본다면 내 위 속을 금속 날개의 비행기가 느리게 통과하는 중이다 어딘가 새겨진 비문의 간섭으로 이사금이든 마립간이든 신라왕의 계보도 외울 수 있지

 

저번 투약만으로 다스려야 했는데 다시 몇달 치 처방을 받았어 삼키고 나면 몇시간은 편안하거나 쓰라린 알약들이야 내 위 속 모래가 흐르는 유사(流砂)의 행렬이라는 감정은 벌써부터였지 차라리 해안선이라면 수월했을 터인데 이미 나는 적수의 뒤편 흑수의 앞쪽으로 발목까지 잠겼다

 

죽은 자가 내 몸에 글씨를 남겼다 주섬주섬 부패가 진행되어서 신물이 역류하는 이 사람의 용모파기를 보라 누구나 자신을 응시하는 그림자를 가지니까 스스로 어디선가 죽고 있다는 격정 또한 독백이겠다 꿈을 빌린 무덤 군락에는 새떼가 모였다 새 발자국이 분분하였으니 어쩌면 무덤은 먼 곳에 있고 내가 가진 터럭은 전실에 불과하겠다 피 흘리는 점자 손가락이 비문을 더듬고 있다 위 속의 무덤이야말로 벚꽃만 남긴 채 텅텅 비어서 내 삭신과 나의 앞날을 기다리는 아가리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