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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 내가 사는 곳 ④
어떤 산책
박대우 朴大雨
출판편집자. 2017년부터 강원 고성에서 1인출판사 온다프레스를 운영하고 있음.
daewoob@gmail.com
‘만철이 형님.’ 가끔 마을에서 여럿이 모여 술추렴을 하는 날에는 그의 이름이 어김없이 들려온다. 대개 이런 식이다. ‘이거, 만철이가 딴 섭이야.’ ‘만철이 형님이 딴 거면 좋은 거지.’ 동네에서 여러번 마주치긴 하지만 한번도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적은 없다. 나와 비슷한 중키에 유독 두터워 보이는 가슴팍이 인상적이어서, 가끔 길에서 마주치면 속으로만 ‘저분이구나’ 되짚어볼 뿐이다.
나보다는 대략 열살이 많은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1987년 초 그가 막 스무살을 넘겼을 때, 자신과 동명이인인 김만철(金萬鐵)이 함경북도 청진항을 떠나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입국한 사건을 여러 지면과 방송을 통해 접했을 것이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그 둘이 서로 이름이 같다는 사실을 갖고 ‘만철이’에게 농을 걸며 웃어댔을까. 이곳 아야진의 인구 구성을 토대로 당시 풍경을 한번 그려본다면, 꼭 그러진 않았을 것 같다.
강원도 고성 아야진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 오래된 마을이다. 다만 한국전쟁 이후로는 내륙의 농부 위주였던 기존 인구 구성이 확연히 달라진다. 주로 함경도 출신인 이북 사람들이 전쟁통에 잠깐 해변에 터를 잡고 고향에 돌아갈 날만 기다리다가 분단이 고착화하면서 아예 그 자리에 눌러살게 된 것이다. 내가 살펴본 고성 인문지리지에서는 1990년대 중반 아야진의 인구 중 80퍼센트가 함경도 출신 이주자라고 밝히고 있다.
전쟁 이후 아야진은 장전, 거진, 대진과 더불어 청어와 명태잡이로 손꼽히는 어항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북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갔고, 변덕이 심한 어황이라는 현실적 조건 아래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을 살았다. 이곳 토박이 김만철씨 또한 함경도 출신 부모 밑에서 자랐으니 자연스럽게 바다 생활을 익혔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새 ‘해남(海男)’이 되었을 테다.
이런 배경을 가진 마을 사람들에게 김만철이라는 탈북자의 소식은 그저 우스개로 떠들 수만은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괜히 신문의 사진 속 그이의 얼굴을 뜯어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속에서 자기가 떠나온 고향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는 양 말이다. 우리의 ‘만철이 형님’은 본인과 동명이인의 삶을 얼마간은 예의주시하다가 어느덧 그이가 벌인 소동이 잊힐 즈음이 되었을 때부터는 가끔 마을 사람들의 언급으로 당시 이십대였던 자신의 처지를 새삼 되돌아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해남이다. 해남은 해녀와 다를 바 없이 일한다. 배를 타고 혹은 자력으로 뭍에서 20~30미터가량 떨어진 수심 7~8미터의 바다를 헤엄쳐 들어가 성게나 섭을 따온다. 다만 ‘만철이가 딴 섭은 맛이 더 좋다’라는 말에는 다른 해남, 해녀에게 던지는 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실려 있다. 마치 그이를 인정해주는 것이 공인된 덕담인 듯한 느낌.
그건 내가 그에게 갖는 경외감과는 다른, 어떤 느낌이다. 그는 오늘도 낡고 오래된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내 옆을 지난다. 스쳐가는 와중에 그 안경 너머의 무뚝뚝한 눈빛이 왠지 눈에 익은 듯하다. 영화 「그랑블루」(1993)에서 장 르노가 연기한 엔조의 표정과 비슷하기도 하다. 영화 속 엔조의 허세 같은 것을 빼고 난 뒤의 얼굴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그를 볼 때마다 나는 내가 품는 경외감과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갖는 감정 사이에서 조금은 가쁜 숨을 내뱉는다. 나는 그 심정에 가까이 가고자 하나 닿을 수 없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어김없이 ‘만철이 형님’을 만난다. 죽었다 깨어나도 ‘형님’이라는 호칭이 내 입에서 나올 리는 없지만, 입안에서는 혼자 ‘만철이 형님’이라는 말을 굴려보기도 한다. 이곳에 이사 오면서, 마치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 친구를 만난 것처럼 낯설면서도 신기한 ‘형님’이라는 단어와 재회한 것이 내겐 어떤 의미일까를 되새기면서.
내가 김만철씨를 처음 만난 건, 이곳으로 이사한 지 반년쯤 지나서 마을 의용소방대에 가입한 뒤 나간 첫 모임에서다. 이곳 의용소방대의 역사야 조선시대 세종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강원도 고성은 오래전부터 크고 작은 산불이 많이 발생했던 곳이어서 자생적인 소방 활동의 역사가 다른 지역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내가 속한 토성면뿐 아니라 죽왕, 간성, 거진, 현내 등 각 면의 인구가 계속 줄어가는 추세임에도 면 단위 소방대가 20~30명씩 인원을 계속 유지해가는 것도 ‘마을은 우리가 지킨다’라는 신조가 오래도록 전해왔기 때문이다.
의용소방대에 속한 이들은 그 면면이 다양하다. 바다를 접한 지역이다보니 아무래도 배를 운전하는 선장에서부터 어부, 그리고 횟집 운영자까지 바닷일을 하는 이들의 비중이 높다. 나머지는 아직까지 마을에 부모나 친척을 둔 도시(속초) 사람이거나 나처럼 외지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된다. 우리는 매월 최소 두차례 만나는데, 그중 한번은 저녁 교육 일정이 있는 날이다. 코로나19 전에는 모임이 끝나면 조촐하게 술자리가 이어졌다. 신입은 꼭 남아야 한다는 강권에 앉아 있는 게 약간 고역이긴 했지만, 마을의 속사정을 미주알고주알 듣기에는 그런 술자리만 한 것이 또 없었다.
소방대 선후배들은 내가 이십대 때 만난 이들의 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다. 남성성이 발현하는 정도 면에서 특히 그러하다. 다만 나의 주변인들이 대학을 졸업한 뒤 20여년간 저마다 직장과 가정을 경험하며 이제는 자신의 남성성을 어떻게 내보여야 하는지를 살피고 유의해왔던 반면, 이곳의 선후배들은 서로의 남성성을 더 벼려오지 않았나 싶다. 가끔 이들을 보며 오래전 그 느낌을 떠올리곤 한다. 순 날것처럼 다가와 마치 유물을 발견한 듯 어떤 때에는 반갑기까지 할 정도다. 이십대 시절의 지인들을 만난 느낌이랄까.
2019년 4월 산불 때가 생각난다. 우리 마을 의용소방대는 매해 3월부터 2개월간 봄철 야간 대기근무를 하는데, 그날은 마침 내가 당번을 맡은 날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양양군과 고성군(간성) 사이에 부는 양간지풍(襄杆之風)의 악명을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산불이 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비상연락망을 통해 몇몇 선배들이 곧장 사무실을 찾았다. 우리는 부리나케 차를 몰고 현장으로 향했다. 산불이 막 시작한 발화지점에 도착하니 불은 이미 크게 번져 그 일대 도로의 양편 숲을 모조리 태울 기세였다. 저 불길 건너편을 향한다는 것은 한눈에도 무모해 보였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소방대 선배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앞을 향해 뛰었다. 서커스에서 불의 고리 속으로 몸을 던지는 무용수처럼.
그때 나는 잠시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 모습이 1990년대 중반 서울 도심을 장악한 채 스스로 불길을 만들어내고 전진하던 친구들의 뒷모습을 상기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만 놓고 보면 내 이십대 시절 친구들과 의용소방대 선배들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내 친구들이 당시 좌파 사유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열의를 바쳤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로써 상징자본과 문화자본을 얻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그 시절의 자신을 대단히 부끄러워하면서 사회적으로 발언하기를 꺼린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가 그 틀만 바꿔가며 얼마나 질긴 생명력을 갖고 살아남는지를 안다면, 산불이 있고 난 뒤 우리 소방대의 술자리에서 그때 그 이야기가 얼마나 자주 입에 오를지도 짐작이 갈 것이다. 그리고 이 무용담들이 그저 안줏거리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구조를 더욱 단단히 하리라는 점, 즉 전투(산불)를 대비하여 더욱 일사분란한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를 다져갈 것이라는 점도……
20여년 전의 경험을 ‘성인남성 사회’의 원체험으로서 간직하고 있는 나에게는, 지금 이곳 고성에서 다시 목도하는 남성성이 ‘잠시 낯설지만 이내 익숙해지는’ 성질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완전히 깨닫게 해준다. 다시 말해 ‘남성성’은 ‘지역성’을 대표하는 제1의 성질이다. ‘지역’이란 이같은 남성성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세상인 것이다. 이곳에서 내가 수도권에서 살던 방식 그대로 기존의 생활태도를 드러내며 사는 것은, 그들에게 위화감을 준다. 나는 아직도 이런 면에서는 매우 껄끄럽게 지역의 면면과 부딪히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정확히는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아야진을 비롯한 속초, 고성, 양양 사람들 중에 미군 첩보부대에서 일한 이들이 적지 않다. 당시의 기록을 좇다보면 영동지역 사람들 중에 KLO(Korea Liaison Office) 소속으로 적진에 물자를 보급하는 일을 맡았다는 이야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들의 잔재는 곳곳에 남아 있는데 우리 마을 북쪽에는 그중에서도 가장 꺼려지는, 그리하여 누구도 큰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장소가 있었다.
바로 북파공작원 교습소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이 교습소가 1960년대부터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정확히 그곳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배웠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단지 괜히 그쪽을 지나다가 고초를 겪고 나온 이들이 적지 않아서 지금도 가기 꺼려진단다. 아무 이유 없이 두들겨 맞거나 음식이나 술을 갖다달라는 억지스러운 요구를 받는 일은 예사였고 그보다 더한 일도 있었다는 이야기다.(북파공작원은 공식기록상 1953년 휴전 이후부터 1972년 7월 남북공동성명 발표 때까지 존재했다. 그들의 존재가 공식화된 것은 2002년 법원 판결이 나고 국회에서 그들을 국가유공자로 우대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난 뒤부터다.)
여름을 제외하곤 나는 매일같이 그 북파공작원 교습소 부근을 지나쳐 걷는다. 지금은 그저 자취만 남아 있을 뿐 실질적인 교습은 이뤄지지 않을 테니 크게 걱정하진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곳을 지날 적마다 과거의 일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마을 사람들은 숱하게 두들겨 맞으면서 어떤 때에는 폭력에 반대하기도, 다른 한편으론 이를 체화하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유산과 앞으로도 계속 마주치고 다퉈야 할 것이다.
이곳으로 온 지 3년째 되던 즈음에 의용소방대 선배들은 내 가입 연수를 따져보더니 불쑥 이렇게 말했다. “네가 여기 온 지 벌써 그렇게 됐니? 그거 기념할 겸 야유회나 갈까?” “야유회요? 어디로요?” 그때 선배들의 말이 영화 「지중해」(1993)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2차 세계대전 중 지중해 외딴섬으로 파병된 군인 몇몇이 그곳의 생활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산다. 어느날 불시착한 비행기를 통해 전쟁이 끝나고 무솔리니 독재 또한 종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사실을 알기 바로 직전 그들은 섬의 한편에서 축구를 하는데, 그 장면에서 보여주는 군인들의 천진난만한 표정과 마을 선배들의 그것이 묘하게 닮아 있었다.
선배들은 바로 앞의 섬으로 배를 끌고 나가 육지에서 보이지 않는 동쪽 해안에 배를 대고는 수영도 하고 섭, 성게도 잡으면서 놀다가 소주 한잔 하고 돌아오곤 했단다. “이게 우리 야유회야. 옛날에 그렇게 다녀오는 게 참 재미있었는데……” 아쉬움과 섭섭함을 담아 말하는 것을 보니 나와 그렇게 가긴 어려울 듯했다. 이미 지나버린 어떤 과거 속의 풍경이 나로 인해 그저 잠깐 재현된 셈이었다. 하지만 도달하지 못할 공간에 대한 추억에 내가 잠시나마 함께한 것이 즐거웠다.
그 야유회 장소가 북파공작원 교습소를 마주한 무인도라는 사실은 또다른 관전 포인트다. 즉, 그들은 자신들을 모욕했던 이들의 맞은편에서 ‘민간인’으로서 신나게 놀면서 ‘모욕자들을 모욕하기’1를 실현해낸 것이다. 마을 선배들의 해학과 극복의 메시지를 은연중에 듣게 된 나는 괜히 가슴이 훈훈해졌다.
오늘 산책길에는 여러 생각을 하느라 걸음이 더디다. 반경 300여 미터 내에는 아무도 없는 곳이기에 강아지의 목줄을 풀어주고는 나도 복잡한 머릿속을 함께 풀어놓는다. 그러고는 더딘 걸음을 옮겨 청간정 앞바다에 닿는다.
청간정이 세워진 누대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면 청간천과 천진천이라는 두개의 하천이 만나 바다로 연결되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큰비가 내리거나 큰 파도가 치는 날에는 민물과 바닷물이 각기 들이닥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멀리 설악산 기슭의 발원지로부터 10여 킬로미터 흘러 내려오면서 이 물은 영동지역 지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화강암을 강한 힘으로 긁어내 자신의 흐름 속에 그 가루들을 섞어내다가 동해바다 앞에 가서야 이를 풀어놓는다.
나는 매일 아침 이곳 청간정 어귀를 걸으며 민물과 바닷물의 만남을 바라본다. 연중 가문 때에 그곳은 둑처럼 막혀 있다. 그러다가 민물이든 바닷물이든 한쪽의 힘이 세서 그 둑이 무너지는, 이곳 말로는 ‘갯터짐’이 발생하는 날이면 그 장관을 나만 보고 있다는 사실에 자못 우쭐대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다만 이 장관을, 민물과 바닷물이 “서로 애증으로 부딪는 한진여의 포말”2을 호젓하게 감상하는 일은 앞으로 쉽지 않을 듯하다. 이곳을 둘러싼 여러 건설현장이 물길을 가만히 내버려두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간정만 해도 바로 코앞에 지역 주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거대한 스포츠센터를 짓고 있다. 또한 대단지 아파트들이 무려 세곳에, 청간정에서 불과 반경 1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연이어 세워질 예정이다.
5년 전, 내가 막 이사 왔을 당시에는 그 풍경 속에 아파트가 없었다. 한동짜리 소규모 단지가 있긴 했지만 마을에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해수욕장은 철책으로 막혀 있었고 군인들은 아침저녁으로 순찰을 돌며 철책 출입문을 여닫았다.
고성은 면적이 서울과 엇비슷하게 넓은데 인구수는 3만명이 채 안 될 정도로 적다. 그만큼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곳들이 많다. 더군다나 22사단이 위치해 있고 훈련도 제법 자주 있어서 접경지역에 산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실감할 때가 적지 않다. 하지만 자본의 침투는 그와는 별개로 전방위적이다. 바우만(Z. Bauman)이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를 평가하며 설파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위기를 종말의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방목지가 고갈되었으니 새로운 숙주를 발견해내면 되는 것이다.3
코로나19로 인해 국가 간 이동이 어려워지자 사람들은 비행기가 아니어도 갈 수 있는 곳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이곳 아야진을 소개하는 영상에 ‘한국의 나폴리’ 같은, 미간이 찌푸려지는 수식어가 붙은 것도 그즈음의 일이다. 아침 산책길에 이 미지의 땅을 파내려가는 굴착기의 소리를 듣다보면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즉 팽창과 착취를 예비하는 미지의 공간이 있어야만 자본이 이를 숙주 삼아 계속 자본의 목숨을 연명할 수 있다고 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의 백년 전 사자후가 머릿속을 맴돈다.4
그리하여 나는 갯터짐이 막 일어난 청간정의 풍경을 보면서, 내 뒤로 울리는 굴착기의 소음을 동시에 생각한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이 명상과도 같은 걷기에서도 더이상 회피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손아귀를 실감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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