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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강산
1959년 충남 금산 출생. 198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 『물속의 발자국』이 있음. lks5929@hanmail.net
겨울, 여름 나무 아래서
이 나무 아래, 여기가 맞다
그 여름을 만난 곳
나는 그때 여름이 감추어둔 겨울을 못 보았다
물끄러미, 세 사람이 나무 밑을 지나 카메라 속으로 들어간다
이제 곧 유리창이 열려 있는 시내버스를 향해
찰칵, 찰칵 걸어갈 것이다
나무도 뒤따라갈지 모른다
버스를 놓치면 사람들처럼 그 여름에 닿지 못할 것이므로
이 나무 아래, 여기가 맞다
아이 셋 혼자 키우는 여자를 찍은 곳
나는 그때 여자가 감추어둔 아이들의 겨울을 못 보았다
여름이 그랬듯 여자는 내게 겨울을 감추었지만
카메라는 보았을 것이다, 생각하니 이 겨울이 그 겨울 같다
시내버스는 여름부터 유리창을 열어두었는지 모른다
여자의 겨울이 못내 궁금해 나처럼 가슴 한겹을 뚫어놓았을 것이므로
여기가 맞다, 이 나무 아래
나 모르게 겨울을 향해 내가 떠난 곳
나는 그때 겨울이 되어서야 여름 나무를 올려다보는 나를 미처 못 보았다.
모항(母港)
바다는 모두 떠나보내고 일몰만 남겨두었다
바다는 잘 익은 감빛이다
겨울 바닷바람에 떨며
나는 저 바다의 숲 왼쪽 모퉁이에 감나무 한그루 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감나무 아래 장독대가 있고 앞바퀴가 휘어진 자전거 옆에 쭈그려 앉은 사람이 어머니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나는 방바닥으로 뚝뚝 햇살방울이 듣는 붉은 기와집, 옛집 풍경의 갯벌 속으로 빠져들 것이고
그러면 엊그제 마지막 남은 앞니를 뺀 어머니가 나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릴 것이다
보일 듯 말 듯, 한번도 골짜기를 보여주지 않는 바다
한번도 골짜기를 들여다보지 못한 어머니
그러나 뒤꼍 장독대의 귀뚜라미 울음 같은, 그 어렴풋한 말이 무슨 말이든 나는 다 알아들을 것이므로
짐짓 못 들은 척 감나무만 바라보다가
홀로 서해까지 달려온 내력이라도 들킨 것처럼 코끝이 시큰해지다가
우우우,
원순모음이 새나오는 어머니의 닭 똥구멍 같은 입속으로 피조개빛 홍시 몇알 들이밀 것이다
—마포에서 탈출한 곰소 남자, 생의 절반을 잘라냈어요.
—지금쯤 청양 외딴집의 여자 가수는 밤바다를 노래하고 있을 거예요.
—다들 감나무만 바라보고 있을 거예요.
바다는 일몰마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았다
나는 저 바다의 숲 어딘가 틀림없이 감나무 한그루 서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