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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영재 李永在
1986년 충북 음성 출생. 201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jayajing@naver.com
개미들을 구분하는 취미
이 혁명과 그 혁명은 다르다고
뭐라고 하는지 잘 못 들었다 결국 코가 큰 친구와 마시고 발가락이 긴 여자와 잤다 어제의 라면과 오늘의 라면을 구분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위치가 뒤바뀐 토마토를 구분하는 것에 실패했다 어제 봤던 로봇을 조립하는 사람과 내일 볼 야채를 파는 사람의 얼굴은 같다 어차피 얼굴과 관계없이 둘은 같은 사람이다
비둘기와 비둘기, 비둘기가 빵 부스러기를 쪼아 먹는 공원에 앉아 있었다 같은 사람 둘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하나의 과일이 칼로 나뉘면서도 악수를 하지 않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어떤 책에서 본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네모난 책이었고 아마도 금지되지 않은 책이었다 어쩌면 전혀 읽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앞의 사람이 사간 것과 같은 붕어빵을 먹었다 같은 사람이 서로 다른 이름을 부르는 데 익숙해져버린 것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지려 할까
나는 배고파,라고 말하며 책임에서 한발짝 비켜섰다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입이 큰 친구와 마시고 손가락이 긴 여자와 잤다 악수를 하고 헤어졌던 두 사람은 다시 같은 두 사람과 만나 키스를 하며 공통적인 여관방을 상상했다 네모난 여관방이었고 책 한권 놓일 필요 없는 곳이다 붕어빵을 더한 붕어빵을 먹으며 그 여자를 만족시키지 않은 것이 만족스러웠다고 생각하는데 공중전화에서 벨이 울렸다 받지 않았다
암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편지를 남자는 접었다 저 남자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도 틀렸다 다행히 우리가 온전히 다른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한입 베어 문 토마토에 잇자국이 생겼다 그제야 내 이가 이렇게 생겼다는 걸 알았다 야채를 파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고 지나쳤다 나는 누군가와 다르기 위해 편식을 한다 누군가는 오로지 완성된 로봇을 위해 반성을 해야 하지만
이 불온과 저 불온은 같은가 어쩌다보니 코가 크고 입이 큰 친구와 마셨다 코가 크고 입이 큰 남자와 여관방에 들어가는 그를 배웅하고 집으로 오는데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로봇을 조립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틀리게 접힌 편지를 펴지 않고 씹어 먹었다 어금니로 씹는 느낌은 이 토마토보다 저 토마토가 낫겠지만 문밖의 고양이는 배가 부르기 때문에, 나는 보다 현명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만들어진 로봇은 여자였고 발가락이 손가락보다 길었다 목욕을 하고 나와 상쾌한 기분으로 목욕을 했다 토마토가 사라졌다 사라진 토마토를 먹으며 지도를 펼쳤다 혁명을 피해 등산을 해야 할 것이다
등산용 모자를 빌리기 위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수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어차피 둘은 같은 사람이니까 상관은 없지만 내게 조금의 반성이 필요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에 잔 여자 얘기를 늘어놓다가 친구가 며칠 전에 잔 여자 얘기를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패턴이었는데 친구와 나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를 가졌다
먹어버린 토마토를 가방에 챙겼다 어제 갔던 공원에 갔는데 공원이 사라져 있어 안심이 됐다 비둘기들에게 동전을 몇개 던져주고 키스를 하는 여자 둘을 봤다 모자 없이 등산을 할 수 있을까 내리막뿐인 산을 올라가는데 코가 크고 손가락이 길고 입이 큰데다 발가락까지 긴 노인이 모자 없이 산을 내려가다 철조망을 넘어 산속으로 사라졌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리막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등산을 그만두었다 꽃을 보면 반성을 해야 할 것 같아 빈 가방에서 먹어버린 토마토를 꺼내 다시 한번 먹었다
부른 배가 불쾌해 오르막이었을 내리막에서 똥을 쌌다 냄새가 없어 더욱 불쾌했다 코가 큰 친구는 왜 코가 작고 발가락이 긴 여자는 왜 발가락이 짧은지에 대한 생각이 잠깐 들었다 불쾌해 다시 똥을 쌌다 여전히 냄새가 없다 모두 모자 없는 노인 때문이다 나는 본 적 없는 노인보다 옳고 늙어버린 노인에 비해 젊다 비해서, 대체 어떤 똥에 비해 어떤 똥이 냄새가 나는 걸까 비해서, 비해서 결국 나는 노인이 사라진 철조망보다 옳다 옳기에, 나는 매 순간 특별하고 다르게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등산에 실패한 채 기분 좋게 내려왔더니 친구가 죽어 있었다 처음 보는 친구였다 같기에, 닮을 필요조차 없는 개미들을 피해 걸었다 같은 액수의 월급을 받는 개미들이 개미들을 향해 사진을 찍었다 행진은 개미들의 몫이라고 헤드라인에 적혀 있었는데 왜 모든 개미들이 입과 코가 큰데다 발가락과 손가락이 긴 건지 생각했다 나와 잤던 여자가 내 옆에서 걷고 있었다 내 뒤엔 분명 비둘기인 개미들이 있었는데 나는 실제보다 사진이 잘 받지 않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아 그런데, 설마 내가 개미들을 구분하는 취미를 가진 적이 있었는지
위하여
문을 닫으면
소리가 멈추고 키스를 하던 혀들이 멈추고
방아쇠를 당기던 손가락이 멈춘다
다시 한번 문을 닫으면
나는 서 있다
문 너머에 대해
문 너머에 있는 괄호가
쓴다
나는 어느 문도
열거나 닫을
자격이 없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결코 같지 않은 자세로
공백을 집어삼킨 공백 사이를
걷는 괄호
과연 문은 필요한 적이 있었나 가능성의
가능성을 향해
문을 문이 아닌 문으로서
다시 읽을 수 있을까
적을 수 없는 너머의
너머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