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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전문영 全文英
1984년 서울 출생. 2013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cestpureperte@gmail.com
잔일
아이가 처음으로 몸을 뒤집는 순간은 거의 신화적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이의 등을 잡아당기고 바닥으로 배를 끌어내리는 정교한 작업
스스로를 과녁 삼는 화살에만 가능한 최대각의 부채꼴
아이들만이 장난감 지폐로 살 수 있는 물건들이 있다
두더지들이 울면서 추는 춤을 멈춰보려고 피아노에서 하나씩 뜯어낸 건반 같은 것들
배를 내보이는 개처럼 진짜 지폐를 앞뒤로 팔랑팔랑 뒤집으며 멋쩍게 항복해도 소용없다
우리의 몫은 장황한 걸 싫어하면서도 정작 그 장면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찢어진 카드들
남의 패가 뒤집히기 전까지는 모두가 납작하다고 믿으며 만족하는 박자들
죽은 듯이 자야 하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과 이미 죽은 자들을
전부 침대에 눕힐 수는 없으니 전부 묻는다는 규칙이 추가되었고
어떤 바다에서는 물조차도 설굳은 가시에 불과하다
두더지들이 무지갯빛 포화를 축제로 착각할 수 있듯이
우리도 두더지들이 물의 처음을 파고들 때
그 앞발의 놀림을 허우적거림과 구분하지 못할 것을 염려했다
자전거 바퀴에서 빠져나갔던 바람이 여전히 구르고 있더라는 소문은 거의 믿고 싶었다
공중화(空中花)
옆구리가 쑤신다
한 젊은 화가가 동네 버스의 기사가 되었다
벽돌을 깬 나머지도 당분간은 벽돌이고
화가가 정류장을 그리지 않아도 기사는 달릴 수 있을 테지만
기사가 버스로 지나간 자취를 그림으로 분류하자면
승객 노릇에 서툰 나는 외화면으로 빠져주는 게 낫겠다
옆집에서 며칠째 못을 박고 있다
더는 뒷걸음칠 곳이 없어 벽에 그림이라도 걸 생각일까
그림 속으로 도주한 많은 사람들이 모험을 겪은 뒤 얌전히 버스를 타고 귀가한다
어떤 얼굴들은 그림의 뒤편에서 태우면 어째서인지 머리카락으로 더디게 되돌아온다
나야 못이 옆집의 어디에 맺히든 상관없기에 내게 못은 매달린 사막과도 같고
못의 딱딱함을 가로챈 다음 옆집 벽에 쇳물이 고이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모래가 사막을 밀며 요동치는 힘으로 못이 그림을 버티고 있다고
마치 조개가 갯벌에 발을 들이밀듯이 자신의 곁을 만들며
나는 빈 가방을 뒤집어 모래 속에서 못을 골라낸다
옆집에 걸린 그림의 껍질을 벗겨내듯이 내 방 벽을 긁다보면
내 옆구리까지 손끝이 닿고 거기 박힌 못에 손마디가 걸린다
내가 산점투시 기법으로 서정적인 얼굴을 전시하고 있다면
그건 내 볼을 매만진 손길들을 몰래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소매치기와 도둑이 분화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늘 버스의 앞좌석에 타고 내린다
그러니 기사는 뒷좌석에서 못을 발견한 뒤 의아하게 여겨도 된다
그는 능숙한 도둑의 습관처럼 주머니에 못을 챙겨 넣을 수도 있다
못만 잔뜩 박아놓은 그림도 있다는 걸 나는 몰라야 하고
돌 안에는 돌밖에 없다 결정끼리의 결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