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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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격변하는 세계, 기로에 선 한국경제

 

 

김양희 金良姬

대구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공저서 『코로나19, 동향과 전망』 『경제학들의 귀환』이 있음.

 

남종석 南鍾錫

경남연구원 경제산업연구실 연구위원. 공저서 『노동, 운동, 미래, 전략』 『성공의 덫에서 벗어나기 1』이 있음.

 

이용우 李龍雨

국회의원. 국회 정무위원회·연금개혁특위 위원. 저서 『두 발로 선 경제』가 있음.

 

이일영 李日榮

한신대 교수. 저서 『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경제』 『뉴노멀 시대의 한반도경제』 『혁신가 경제학』 등이 있음.

 

 

왼쪽부터 이용우 이일영 김양희 남종석 ©김준연

왼쪽부터 이용우 이일영 김양희 남종석 ©김준연

 

 

이일영(사회) 안녕하세요, 진행을 맡은 이일영입니다. 나라 안팎이 어지럽고 민생은 어려운 상황인데, 이번 겨울은 날씨마저 유난한 것 같습니다. 한겨울 한파를 뚫고 좌담에 참석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대화 주제는 ‘격변하는 세계, 기로에 선 한국경제’입니다. 지난 한해 세계경제 상황을 되짚어보고 국내에서 어떤 일이 쟁점이 됐는지, 앞으로 한국경제는 어떻게 변화할 것이며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해법을 모색해볼 수 있을지 논의해볼까 합니다.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분들이 모여주셨습니다. 먼저 참석하신 선생님들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김양희 저는 경제학을 연구합니다. 지난 3년 동안은 대학을 휴직하고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에서 개방형 직위인 경제통상개발연구부장으로 있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세계가 격동했고 그 기간 동안 외교안보와 경제를 같이 볼 수밖에 없는 여러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주로 경제안보, 그리고 제가 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으로 여기고 있는 러시아-우끄라이나 전쟁이 세계경제 질서에 미치는 영향 등에 천착하고 있습니다.

 

남종석 저는 경남연구원에서 연구위원으로 있습니다. 주로 산업경제, 경남지역 탈탄소화와 관련된 연구를 합니다. 대학에 연구교수로 있을 때는 대기업-중소기업 간 거래관계 및 연관 산업 등을 주로 분석하고 연구했습니다.

 

이용우 198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서 ‘사회구성체 논쟁’이 한창 진행될 때 한국사회의 구조와 산업을 분석해 경제학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이후 현대경제연구원에 입사해 여러가지 사회현상을 살피고 경제적 전망을 분석하며 기업경영 실무를 도왔습니다. 그러다가 금융권에 쭉 몸담았고, 2016년 카카오뱅크 공동대표를 지내기도 했고요. 그 과정에서 금융회사는 정부의 규제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중요한데, 정작 관료들은 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엉뚱한 정책을 내놓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21대 총선에서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에 당선되어 지금은 정치권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정책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세계 정치·경제 차원에서 바라본 2022년

이일영 2022년은 글로벌 정치·경제 구조의 격변이 있었던 시기고 우리는 명실상부 엄청난 변화의 과정, 대전환기에 있습니다. 지난 한해 발생한 사건 중 무엇이 진짜 중요한 일인지, 2022년은 어떤 해였는지를 짚어보면 좋겠습니다. 세계경제의 여러 상황 때문에 경제안보 문제가 부각되고 있으며 국가가 이에 전략적으로 잘 대응하고 있는가 하는 걱정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김양희 말씀처럼 2022년은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분수령을 이루는 시기였습니다. 요즘 ‘격변’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작년을 돌아보자면 이 격변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가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정세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면 처방전이 완전히 일그러지기 마련이니까요. 저는 최근 세계경제의 변화를 ‘보호주의 진영화’라는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핵심은 각자도생, 철저한 자국이기주의이고 이를 위해 보호주의(관세 부과나 수입 제한 등을 통해 무역경쟁으로부터 자국 경제를 보호하려는 경제정책)와 진영화가 적극 활용되는 양상입니다.

 

이일영 어떻게 보면 세계가 19세기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계기가 중요했다고 보시나요?

 

김양희 특히 우끄라이나전쟁이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우끄라이나전쟁은 크게 세가지 충격을 가져왔습니다. 첫번째로 경제논리를 압도하는 안보논리가 등장했고, 두번째로 보호주의의 진영화가 공고해졌습니다. 우끄라이나전쟁은 그전까지 다소 관망세를 유지하던 유럽이 안보위기에 직면해 미국 측에 기우는 계기가 됐고 보호주의 진영화의 외연을 확장하는 분수령이 됐어요. 세번째로 이 전쟁은 에너지전환, 기후전환을 가속하는 촉진자가 됐습니다. 그런데 최근 정세를 자칫 ‘신냉전’으로 읽어버리는 것은 오독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즘 경제학에서는 탈세계화를 논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위험할 수 있고요. 과거의 냉전구도와 달리 오늘날 전선은 각국의 이기주의에 입각해 움직이며, 다층적이고 유동적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회색지대가 존재하고요. 단적으로 인도나 사우디아라비아가 미·중 어느 편인지 말하기 어렵죠. 상당히 파편적이고 가변적인 진영화가 복잡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남종석 신냉전, 탈세계화 운운하는 것은 수사적 분석에 가까운 것 같고, 저 또한 공급망에 큰 충격을 준데다 군비경쟁을 촉발시킨 우끄라이나전쟁이 세계경제의 중요한 분기점 같습니다. 그리고 WTO(세계무역기구)체제가 사실상 거의 붕괴되고 있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붕괴를 누가 주도하고 있느냐 하면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 미국이거든요. 이는 우리나라의 미래전략과도 관련되는데, 세계 공급망이 워낙 촘촘히 연결되어 있어 완전한 디커플링(탈동조화)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겐 미국만큼 중국도 상당히 중요한 파트너이고, 미국의 봉쇄전략이 중국에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미칠지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겁니다. 우리가 하나의 진영을 선택해야만 하는가가 큰 쟁점이 될 거예요.

 

이일영 미·중 갈등은 그간 양국의 상호 관세 부과나 기술 분쟁 등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어왔는데, 2022년에 특히 주목하는 사건이 있는지요.

 

남종석 예를 들어 미국이 ‘반도체법’(미국경쟁법)을 통과시킨 게 대표적이죠. 자국 내 반도체 연구와 생산을 지원하겠다는 법인데, 미국과 전략적 경쟁구도에 있는 국가들에 신규 투자를 할 경우에는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조항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이용우

이용우

이용우 저는 장기간의 세계질서 전반을 감안해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2022년에 그 다층성이 더욱 크게 표출되기는 했지만, 세계경제는 늘 불안정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7년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체제가 성립하며 세계무역의 기본 규범이 마련되지만, 이 또한 출발과 동시에 붕괴 위험을 안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다보니 훗날 장기간의 우루과이라운드(우루과이에서 시작되어 1986~94년 7년간 이어진 다자간 무역협상) 끝에 1995년 WTO체제를 출범시키게 된 것이고요. 이른바 ‘세계화’ 역시 소련이 붕괴되면서 일극화라는 강압적인 질서 속에서 발생한 현상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계경제에 안정적인 시기가 얼마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일영 좀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2022년을 이해할 필요도 있다는 말씀인데, 어느 시기가 특히 분기점이 되었다고 보시나요?

 

이용우 제가 주목하는 세계경제의 분기점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입니다. 2001년 중국이 WTO체제에 들어오며 자유무역질서에 편입될 때,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는 자신들이 무역상의 이익을 얻는 것은 물론 중국 내 시민사회의 성장 같은 변화들이 있으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2008년 서브프라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그게 완전히 오판이었음이 드러났죠. 미국이 휘청이자 중국이 그 공백을 채웠고,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이 꽤 곤란한 상대가 되었습니다. 2008년 이후로 이런 복합적인 상황이 누적되다가 지난해 크게 표출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일영

이일영

이일영 2008년이 중요한 변곡점이었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일본과 중국의 GDP(국내총생산)가 역전되어 중국이 세계경제 2위로 올라서는 시점이 2010년이었습니다. 2010년대에는 세계질서, 과학기술, 거시경제 분야에서의 큰 변화가 중첩되는데, 그래서 저는 이 시기를 ‘뉴노멀’ 시대로 볼 수 있다고 한 바 있습니다.

 

남종석 2008년 세계금융위기는 1980년대부터 진행된 금융화의 최종적 결과이기도 합니다. 한때는 중국이 그림자금융 등 금융산업 문제가 심각해 내부적으로 붕괴될 수도 있다고 여겨졌는데 결국 그러지 않았죠. 당시 공산당이 주도적으로 산업 구조조정을 이끌었고 자국 제품의 해외시장 의존도를 크게 낮췄습니다. 또 2000년대부터 합작투자를 통해 외국 기술을 수입하면서 자체적인 공급생태계를 구성했고요. 이처럼 중국이 여러 산업에 걸쳐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이 되고 자체 공급망까지 구축하자, 2015년 무렵부터 미국은 중국을 본격적으로 ‘전략적 경쟁’ 대상으로서 견제하게 됩니다. 전략적 경쟁이란 경제에서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경쟁 대상으로 본다는 것인데, 이것이 첨단무기 제조와 관련된 반도체 수출을 억제하는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요. 이제는 경제와 안보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요.

 

김양희

김양희

김양희 그전에는 공급망과 기술 정도에 국한되었던 보호주의 진영화 영역이 우끄라이나 전쟁 이후 방위산업으로 확대되었고 거기에 에너지, 물류, 금융까지 가세했습니다. 심지어는 보건위기나 기후변화 대응도 진영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고요. 그러나 상호의존성이 너무나 높기 때문에 미·중 간에 완벽한 디커플링은 불가능하고 대중 봉쇄를 미국 단독으로 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바이든이 보호주의를 ‘진영화’하는 겁니다. 그런데 미국이 중국을 강하게 제약하며 어느정도 막아주고 있는 것이 우리한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중국은 이미 인공지능과 양자 컴퓨팅 영역에서 우리를 저만치 앞서가고 있고 반도체, 배터리, LNG선 분야에서도 우리를 바짝 추격하고 있으니까요. 보호주의 진영화에 따르는 어려움도 많지만, 이 시기를 현명히 활용할 방법 또한 고민해야 합니다.

 

이일영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2022년은 각자도생과 보호주의 진영화가 한층 강화된 해인데, 그 격변의 기원을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는 코로나19가 경제에 준 타격도 크기 때문에 그 연장선에서 2022년을 파악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미·중 경쟁도 팬데믹 시기를 거치며 더욱 심화되었고요. 지금의 세계경제 질서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한국경제는 항상 외부적 요인에 영향을 크게 받아왔기 때문에 세계경제 흐름 속에서 기회요소와 위기요소를 잘 살피는 일이 앞으로도 계속 중요하겠습니다.

 

심화되는 인플레이션, 2023년 연착륙은 가능한가

이일영 올해는 작년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경제는 심리다’라는 말도 있어서, 어두운 전망이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진 않을까 걱정도 들고요. 최근 ‘난방 대란’에서도 보듯이 인플레이션 문제가 특히 심각합니다. 2023년은 한국경제가 여러 위기 국면에서 연착륙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기로에 선 중요한 시점이라 생각되는데,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남종석

남종석

남종석 미 연준(연방준비제도)의 양적완화 정책이 2015년경 점차 끝나다가 코로나19 이후 다시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시중에 화폐가 많이 풀리게 됐어요. 그게 곧바로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공급 쪽 불안정이 심화되자 결국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공급 불안정에는 에너지위기, 식량위기도 있지만 노동력 문제도 있습니다. 미국을 보면 코로나19로 노동시장에서 철수했던 노동력이 적절한 수준으로 복귀가 안 되면서 노동 수요가 증가하고 임금 상승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현상을 안정시키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연준이 금리를 높이고 있는데, 2022년 초만 해도 제로금리 수준이었던 미국의 기준금리가 최근 4.5~4.75%까지 올랐죠. 한국도 크게 올라 현재 기준금리는 3.5%이고 대출금리는 그 두배 이상인데, 우리의 금리 인상은 연준을 따라가는 측면이 무척 큽니다.

 

이용우 전 조금 다른 차원에서 보고 싶습니다. 한국은행이 미 연준의 금리를 쫓아갈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주되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의 가계부채 문제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이대로 둘 수 없는 상황까지 온 것도 사실이거든요. 저금리 상태가 유지되면 부채를 제약하기가 어렵습니다. 금리 인상이 어느정도 필요한 거죠. 특히 지난 2년간의 ‘영끌’ 사태는 너무 과도했습니다. 그런데 정치권, 제가 속한 더불어민주당에서도 문제의 핵심을 보기보다 대증적 요법만 고민하니 답답하기도 합니다. 물론 연착륙은 필요합니다만 금리 인상으로 영끌 세대의 부담이 커졌으니 지원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것을 정부가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 고민스러운 측면도 있습니다.

 

이일영 그런데 우리나라의 부채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 문제가 터지면 1980년대 일본 버블 사태처럼 가는 것 아닌가 우려스럽습니다.

 

김양희 사실 한국의 가계부채가 상환능력을 생각할 때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최근 보도를 보면 금리가 오르니 사람들이 부채를 많이 갚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갚을 능력이 된다는 얘기일 수도 있는 거죠. 그리고 우리 가계부채 문제를 일본 상황에 바로 대입하긴 어렵습니다. 일본은 부채의 주역이 개인이 아닌 기업으로, 한두채 집을 사는 게 아니라 대규모 휴양지 개발 등에 소니나 토요타 정도를 빼면 거의 뛰어들었기 때문에 그 스케일이 달랐어요. 그래서 후유증도 컸고요. 섣불리 일본화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남종석 맞습니다.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은행들이 스트레스 테스트(금융시스템의 취약성을 측정하고 건전성과 안정성을 평가하는 제도)를 강화했고, 건전성을 유지해온 상황입니다. 주택담보대출이 많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지불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엄격하게 검증하고 있고요. 원금과 이자 부담 때문에 가계 소비가 위축되어 총수요 측면에서 문제가 될 수는 있으나, 저축은행을 포함해 시중은행이 상당히 탄탄하고, 기업들 역시 부채 비율이 안정적인 편입니다. 제가 계산해보니 한계기업을 제외하면 대기업의 부채 비율이 평균 130%대 수준, 중소기업의 부채 비율은 230% 이하입니다((주)한국기업데이터 2020년 자료 기준). 전세계적으로 보아도 매우 낮은 수준이죠. 외환위기 이후 한국 기업들이 정말 대단한 것은 부채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성장해왔다는 점이에요.

 

이용우 하지만 건설업과 부동산시장의 자금 사정은 큰 문제가 될 겁니다. 부동산 PF(부동산 개발에서 발생하는 미래 현금을 상환재원으로 보아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 과정의 리스크가 상당히 높고 구조가 취약해요. 부동산시장 위축으로 이미 미분양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인데, 앞으로 공사비 지급이나 대출원리금 상환이 어려워지며 연쇄적인 부도로 이어질 위험이 큽니다. 또 서민경제에 있어서도 전세자금대출의 보증이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는 점은 문제입니다. 생계형 대출이라고 보기 때문에 검증 절차가 약하고, 그러다보니 영끌 사태 같은 것도 가능했고요.

 

이일영 한국 금융과 기업의 기초가 탄탄하다는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서민이 체감하는 현실은 훨씬 심각한 것 같습니다. 2022년 4/4분기에 마이너스 0.4% 성장 수치가 나온 건 충격입니다. 경기 위축이 연쇄반응을 낳아서 경제가 정상화되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염려도 들어요.

 

남종석 말씀하신 경기 위축의 연쇄적 반응은 우려해야 할 일입니다. 기업부채가 생각보다 안정적이라 해도 가계부채는 크게 증가했고 그만큼 이자부담도 큽니다. 지금 같은 고금리시기에 가계는 소비지출을 줄이고, 이는 서비스산업의 침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용우 의원님 지적처럼 부동산시장도 문제인데, 대출이 묶이면서 건설업 등에서 위기가 확산될 겁니다. 수출 감소로 인한 제조업 정체와 건설업 위기가 심화하면서 현재 투자율도 크게 감소하는 국면입니다. 민간소비, 수출, 투자가 맞물리며 동시에 위기가 심화된다는 거죠.

 

김양희 얼마 전 한국은행의 요청으로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대한 발제를 했습니다. 한국은행이 왜 공급망 재편에 대해 물을까 궁금했는데, 인플레이션에 끼칠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인플레이션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합니다. 세계경제 전반에서 경제논리보다 안보논리가, 효율성보다 회복력이 중시되는 상황이라 과거만큼 물건을 저렴하게 수입하기 어려워지고 물가는 꾸준히 올라 서민경제가 팍팍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중요한 것이 정부의 역할이고, 최후의 보루로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데 현실은 좀 갑갑합니다.

 

남종석 지금은 경기부양책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거시적 사고를 하지 않기 때문에 경기부양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 보입니다. 정책은 경기 역행적으로, 즉 경기가 안 좋을 때 정책적 개입을 해야 하는 것인데 정작 현 정부는 경제를 시장에 맡기겠다고 하고 있어요. 어떤 면에선 정말 ‘대단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석열정부는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가

이일영 자연스럽게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온 것 같습니다. 2022년 외부에서 격변의 모멘텀이 있었다면 내부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습니다. 5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윤석열정부가 출범했습니다. 경기가 안 좋을수록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말씀에 동의하는데요. 현 정부가 외부로부터 발생하는 위기에 어떻게 대응해왔는지 평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양희 제가 세계경제를 보호주의 진영화라고 규정하는 이유도 그냥 신냉전이다 탈세계화다 하면 우리가 움직일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현 상황을 적절히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이를 위한 큰 그림이 안 보이네요. 가령 경제안보가 굉장히 중요해졌고 경제와 안보를 따로 얘기하기가 어려워진 상황인데도 거버넌스가 가진 한계가 너무 큽니다. 경제안보를 담당하는 부서가 과학기술부·국방부·환경부·기획재정부·산업부·외교부로 나뉘어 있고, 심지어 중복되는 부문에서는 서로 주도권 다툼을 해요. 그럴수록 각 부처의 독자성을 존중하면서도 문제를 잘 조정해내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역할이 너무 중요한데 잘 안 되고 있어요.

 

이일영 정부조직 개편은 보통 새 정부 출범 전후로 이루어지는데, 이를 통해 정부의 방향을 정립하고 공표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그런데 윤석열정부는 여성가족부 폐지다 뭐다 말은 많았는데, 정작 이렇다 할 논의나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위기나 전환기에는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중요할 텐데요.

 

김양희 윤정부는 현재 정부조직이 너무 비대화되어 있다는 차원으로 개편에 접근하고 있는데, 그렇게 시장논리로만 접근하면 정작 정부 본연의 기능과 역할은 망각하게 됩니다. 중소기업 지원책만 해도 그렇습니다. 국내 대기업은 대외환경 변화에 대한 정보 습득이나 대응방안 모색이 그럭저럭 가능하지만 중소기업은 그렇지 못합니다. 저한테 강연 요청을 하는 사기업도 대기업뿐이에요. 수출통제나 환경규제 등 시시각각 변하는 정책, 공급망의 재편으로 중소기업의 애로사항이 커지고 있는데, 정부가 이를 해소하는 일에 좀더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이용우 워런 버핏은 “수영장 물이 빠졌을 때 비로소 누가 발가벗고 헤엄쳤는지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투자자로서 주식시장을 비유한 말이지만, 이를 현 상황에 적용해보면 금리가 올라가는 시점에 와야 누가 위기관리(hedge)를 제대로 했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죠. 지금은 무엇보다 코로나19가 거의 종식되어가며 양적완화가 끝나고 긴축재정, 즉 통화를 환수하는 시기입니다. 금리가 올라감으로써 발생하는 문제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 정부가 고민해야 하죠. 특히 취약계층이 더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데, 그 안전망을 정책적으로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 고민이 부족해 보여 큰 문제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감세도 할 수 있고 증세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엔 뭐가 맞고 틀리다 하는 정확한 정답이 없습니다. 금리가 올라가며 충격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지금은 두터운 보호장치를 마련해야 해요. 그런데 세금을 줄여주면 투자가 늘어난다? 현 정부의 이런 방침은 경영학적으로도 성립이 안 되고 역사적 사례를 봐도 말이 안 됩니다. 투자는 기대수익률이 높을 때 이루어지지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는 전부 현금을 챙기고 방향을 관망할 뿐 아무도 투자 안 하거든요.

 

남종석 IMF(국제통화기구)가 전망한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1.7%인데, 별다른 경제충격이 없는데도 1%대로 예측된 것 자체가 충격적입니다. 그간 아무리 낮아도 잠재성장률이 2% 초반까지는 나왔는데 이를 하회하는 예상치인데다가 일자리 증가폭도 10만여개 정도로 대폭 감소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한해간 증가한 일자리 수만 해도 60만개를 넘었거든요. 지금부턴 정말 대응이 중요한데, 단기적으로도 장기적으로도 가계에 대한 현금지원 정책보다는 경제의 강건성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시장의 자율성이니 자유니 하는 말만 운운하고 있어요. 이런 개념적 언어가 대통령 차원에서, 정치적 필요로 인해 나온다고 해도 정책 현장은 달라야 하고 구체적 움직임들이 만들어져야 해요.

 

이일영 지난해 4/4분기의 마이너스 성장 수치에 주목하고 긴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IMF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 역시 예사롭지 않습니다. 기획재정부가 작년 12월 하순에 내놓은 한국의 2023년 성장률 전망치도 1.6%에 불과합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올해 미국과 유럽의 성장세도 좋지 않을 것으로는 전망됩니다. 반면 중국은 코로나19 봉쇄가 풀리고 회복에 대한 정부 의지가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요.

 

이용우 여러 좋지 않은 지표가 많지만, 자금시장도 큰 걱정입니다. 작년 가을부터 굉장히 안 좋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해 11월 레고랜드 사태도 있어 채권시장이 불안정한데, 한국전력공사는 한전채를 계속 발행하고 있고 산업은행도 산은채를 발행할 수밖에 없어요. 올해 구조조정이 중요한 쟁점이 될 상황에서 결국 너도나도 다 채권을 발행할 텐데 큰일 났다 싶죠. 지난 1월에도 롯데건설이 1조 5000억원의 부동산PF 관련 채권을 매각해서 겨우 유동성 위기를 봉합했거든요. 태영건설도 문제였는데 모회사 티와이홀딩스에 긴급자금을 차입했고, 이 티와이홀딩스는 글로벌 사모펀드인 KKR(콜버그크래비츠로버츠)에서 돈을 차입했습니다. 그런데 그 금리가 13%나 된다고 해요. 이런 게 다 알려졌으니 누가 투자를 할까요. 이 상태로 몇달 지나면 어떻게 될까, 이게 제일 걱정이 됩니다.

 

이일영 채권시장과 부동산시장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어 정부의 개입이 필요한 상황으로 보입니다. 부동산시장에 관련해서는 얼마 전 이용우 의원님이 주도해 민주당에서 ‘정부는 미분양주택 매입과정에서 주거복지 달성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라는 기자회견문을 발표(2023.1.18)하셨죠? 미분양주택을 정부가 매입하되 건설사에 지나친 특혜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임대주택을 조성해야 한다는 요지였는데, 좀더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용우 우리나라 공공주택 비율은 현재 8% 정도입니다. 영국이 18%, 프랑스는 17%로 보통 유럽의 다른 나라가 15~20%에 달하는 것에 한참 못 미치죠. 미분양주택 매입을 기회로 활용한다면 공공주택을 빠르게 확보할 수 있어요. 그런데 지난해 12월 LH(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전세매입임대사업의 일환으로 서울 강북구 아파트 일부를 15% 할인가로 산 일이 충격적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정부가 미분양아파트를 50% 가격에 사겠다고 했습니다. 기업은 손해를 보더라도 자금 유동성을 가져갈 수 있고, 정부는 주거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었죠. 그런데 15%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한 건 너무 큰 리스크를 감수하는 무분별한 투자예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에 가깝습니다. 정책 담당자들이 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럽고, 시장논리를 강조해온 윤석열정부의 기본 기조와도 어긋나는 조치라 더 황당하고요. 공공주택 구입에서 핵심은 그 매입비용을 부담할 주체가 어디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잘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재정적 수요는 얼마고, 그걸 어떻게 조달해야 하며, 그 조달은 누가 부담해야 할까라는 차원부터 다시 접근해야 합니다.

 

김양희 얼마 전 대통령실에서 ‘대통령은 1호 영업사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정부의 존재 의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정부는 영업사원으로서의 역할도 분명 있고 세일즈외교도 해야겠으나 기본적으로는 시장 실패가 발생할 경우 시장의 대체재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정부와 재정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인식하고 재정립해야 합니다.

 

현 정부의 노동개혁·연금개혁 방안에 대하여

이일영 윤석열정부는 좀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선거과정에서도 정책비전을 부각하지 않았고, 정부 출범 후 120대 국정과제를 열거했지만 뚜렷한 방향성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정책이 없다는 평가가 이어지다가 새해가 되어서 3대 개혁과제로 연금·노동·교육 개혁을 명시적으로 언급했는데, 이런 윤석열정부의 정책 방향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요.

 

남종석 무엇보다 경제의 거시관리 측면에서 윤석열정부가 전하는 메시지가 전무합니다. 이명박정부 때는 세계금융위기, 건설업 위기에 대응해 4대강사업이라도 진행했습니다. 물론 그로 인한 환경적 재앙이 컸지만, 어쨌든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공공투자를 통해 건설경기를 부양하겠다는 목표가 있기는 했어요. 윤석열정부에서는 구체적 정책이라고 나온 것이 말씀하신 3대 개혁인데, 우려스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우선 노동개혁 정책에서는 노동시간 선택근로제 확대가 주요 쟁점 중 하나입니다. 현재 1주당 법정노동시간은 40시간이고 초과근무시간을 1주당 12시간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정부가 도입하려고 하는 건 ‘노동 월’을 기준으로 하는 제도입니다. 노동시간을 월 단위로 적용하다보니, 한주에 몰아서 많은 초과근무를 할 수도 있다는 게 골자입니다. 이에 대해선 노조원 절반 이상 동의를 받거나 노사협의회를 통한 노동자 측 동의가 필요한데, 문제는 노사협의회의 대표가 누가 되어야 하는지 명확지 않고 노사협의회가 사용자 측 의도대로 흘러갈 가능성도 충분히 크다는 겁니다.

 

이일영 노조 조직률이 낮은 한국 상황에서는 많은 경우 노사협의회에서 동의 절차가 진행될 텐데, 결국 사용자의 일방적인 이해로 귀결될 가능성을 염려하시는 거네요.

 

남종석 게다가 현재 선택근로제 개편안은 1일 단위의 최대 근로시간을 규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퇴근 후 다음 출근시간까지 11시간을 보장하라고만 되어 있는데, 가령 오후 5시에 퇴근했다가 다음 날 새벽 4시에 출근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건강권이 심각하게 침해될 수 있어 걱정스럽죠.

 

이용우 저는 조금 생각이 다른데, 카카오뱅크에 있을 때 직원들에게 주 최대 52시간만 지키고 근무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독려해봤습니다. 이후 근무시간 통계를 내보니 일부 직군을 제외하면 주 52시간을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노동자에게 자율권을 좀더 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시간의 탄력성이 좋으면 무조건 자본에 유리하다는 식으로 딱 잘라 접근하지 말자는 겁니다. 노동자들의 동의를 받고 몇가지 기준만 둔다면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저는 민주당도 무조건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대안을 내는 게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남종석 그렇더라도 1일 노동시간, 1주당 노동시간의 최대치 한계는 설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노동개혁의 또다른 쟁점은 직무급제 임금체계 개편안입니다. 근속연도가 아닌 업무 강도나 난이도에 따라 임금 기준을 다르게 두는 체계로 가겠다는 건데, 이를 위한 기본 설계나 연구는 보이지 않고 ‘직무급이 세대 상생형 임금체계다’라는 말만 앞세우고 있습니다. 연공서열제 방식에서는 장기근속자의 임금이 계속 올라가고 그만큼 기업의 임금 부담이 늘어나 신규고용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죠.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내용은 현실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나라 노동자의 평균 근속연수는 7년 정도이고 이후 이직을 하면 대체로 임금이 줄어듭니다. 노동자의 임금이 최고점을 찍는 연령은 40세 정도예요. 누적적인 연공서열이 작용할 여지가 적다는 의미죠. 지금의 개편안이 겨냥하는 것은 결국 연공서열제가 비교적 잘 지켜지는 곳, 즉 노조가 있는 대기업이나 공공부문으로 보입니다. 정부가 노조의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에요.

 

이일영 연금개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문재인정부 때도 이 부분에는 거의 손을 못 댔습니다.

 

이용우 지난 1월 3일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전체회의가 있었습니다. 현재 국민연금은 저출생 고령화에 따라 기금이 바닥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노동시장에 신규 진입하는 청년층이 돈을 더 내고 덜 받게 되리라는 예측이 많아 세대 간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연금고갈 시기가 언제인지가 아니라, 이 제도가 지속가능하도록 전반적인 보장성을 논의하고 연금제도를 구조적으로 재편하는 일입니다. 이번 특위에서 여야가 공히 합의했던 게, 연금개혁에서도 ‘노인빈곤율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노인빈곤율은 40% 정도로, OECD 평균인 13.5%(2019년 기준)보다 훨씬 높습니다. 은퇴 후 한달에 필요한 최소 비용이 얼마인지, 그중 개인이, 국가가, 연금보험이 얼마씩 부담해야 하는지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연금개혁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세금에서 지급하는 기초연금과 국민연금보험은 서로 성격이 다른데, 이러한 제도 전반을 잘 살펴서 전체적인 보장성을 따져봐야 해요. 지금처럼 급여에 따른 연금의 계산식이나 요율만 조정하고 구조적인 개혁은 꾀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실패한 틀에 갇혀버리는 셈입니다.

 

남종석 우리나라의 노인빈곤율이 높은 이유 중 하나는 연금수령 시점과 퇴직 시점에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노동자가 50대 중반이면 퇴직을 하니 연금을 받기까지 10년 정도 시차가 있어요. 노동 공급 측면에서도 인력 부족이 장기적 문제가 될 터라 연금개혁은 노동개혁과 함께 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연금고갈이 꼭 돈을 못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급 방식을 현재의 적립식에서 부과식으로 바꿀 수도 있으니까요. 적립식은 개인이 경제활동기에 낸 금액을 기금으로 적립해두었다가 나중에 연금으로 돌려받는 방식이지만, 부과식은 의료보험처럼 당해 연도 경제활동인구에 부과된 보험금으로 그해 연금수령자에게 연금을 제공하는 방식입니다. 유럽 대부분 국가가 이같은 방식을 따르고 있죠. 국민연금의 적립액이 고갈된다고 해서 꼭 연금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말이에요.

 

이일영 그런데 부과식에 대해서는 적잖은 이들이 거부감을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남종석 부과식은 내가 낸 보험금을 나를 위해 적립해두는 것이 아니라 그해의 수령자들에게 지급한다는 것이니 말씀처럼 사회적 합의가 중요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를 방기한 채 실상과 동떨어진 이야기만 한다면 진보든 보수든 포퓰리즘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요. 처음에는 큰 변화가 충격적일 테니 대중이 이를 수용할 수 있도록 메커니즘을 구축해가야 합니다. 에너지 문제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그동안 정말 저렴하게, 겨울에도 반팔을 입을 정도로 에너지를 이용해왔습니다. 에너지 가격 인상과 관련해서는 충분한 토론과 사회적 학습이 필요하고, 각자가 변화를 받아들이며 그 변화에 맞추어 가계를 어떻게 꾸려나갈지 계획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용우 그러나 지금은 여야의 협력적 거버넌스가 굉장히 무너져 있어요. 이런 상태면 경제는 움직이질 않습니다. 보험료 문제에 있어서는 국가가 국민의 재산을 빼앗아 자기들 좋은 일만 한다는 식의 로빈후드 발상에서 우리가 좀 벗어나야 할 필요도 있겠죠. 우리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하려면, 공동체를 복원하려면 내가 얼마까지 부담하는 것이 마땅하고 또 자랑스러운가 하는 사고방식으로 접근하지 않고서는 논의가 나아가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생산기지로만 변모한 지역의 현실

이일영 이야기의 초점을 지역으로 돌려보기로 하죠. 남종석 박사님이 경남 지역에서 지역 산업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전통적으로 영남 지역은 우리나라 제조업의 기지 역할을 해왔는데 한국경제의 구조가 바뀌면서 겪고 있는 변화가 있는지, 지역이 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남종석 자동차산업, 중공업, 기계산업 등이 모여 있는 영남은 이미 2010년대부터 생산기지화되고 있습니다. 생산기지화된다는 건 신규 설비투자도 정체되고 R&D(연구개발) 역량도 약화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고급 수준의 R&D는 수도권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해도 지역에서 중위적 수준의 R&D 역량까지 약화되는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대로 가면 영호남 역내투자는 역외투자·해외투자와 대체관계가 되어 수도권과 해외에 자원을 내어주고 탈산업화될 것이라 개인적으로는 미래를 암울하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주요한 이유는 젊은 인력이 다 수도권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인데, 여기엔 임금 차이도 한몫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이 일종의 ‘남북국시대’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남북국시대라는 표현은 작년의 영호남 경제관계관 회의에서 들었던 모 박사님의 비유인데, 저는 그 비유가 매우 현실적인 진단이라고도 봅니다.

 

이용우 그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현대중공업의 R&D센터가 판교에 지어지는 일 아닌가요? 물론 경기도는 R&D센터를 유치하고 싶었을 테고 인력들도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으려고 했을 겁니다. ‘판교 밑으론 안 내려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이럴 때 국가가 나서야 하는데 지금 정부는 그런 역할을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지방정부에서도 인력을 끌어들일 인센티브를 만들어야 하는데, 인센티브는 주지 않은 채 왜 지방 인력이 자꾸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느냐만 묻고 있지요.

 

김양희 바이든 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Inflation Reduction Act)을 보면서도 제일 우려되는 부분이 국내의 제조업 붕괴 가능성입니다. 우리만 아니라 유럽도 비슷한 염려를 하고 있어요. IRA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재생에너지, 전기차, 배터리 등에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주요 소재를 북미에서 생산해야 하고, 중국산 광물이나 부품을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미국이 제조업을 다시 부활시키겠다는 선언이며 이를 통해 해외 기업들을 자국으로 끌어들이려는 거죠. 게다가 유럽연합은 미국에 맞대응해 초대형 산업정책 ‘그린딜 산업계획’(Green Deal Industry Plan) 등을 운운하며 역보조금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각국의 보조금 경쟁이 심화되면 우리 제조업은 이중 삼중으로 위기를 겪을 수도 있어요.

 

남종석 유럽연합의 인구가 4억 5천만여명, 미국은 3억 4천만여명 정도고, 중국은 14억이 넘죠. 반면 우리는 주력 제조업과 관련해 자체 시장이 없습니다. 생산라인을 해외에 두고 현지 생산을 하는 직접투자라고 해도 지금까지는 판매망 구축의 한 수단으로 활용해왔지 주요 공급망은 국내에 의존했습니다. 예를 들어 베트남 현지 생산 증가가 국내 부품생산도 증가시키는 방식이었어요. 그런데 미국이 의도하는 바는 공급망까지 미국에 구축하라는 겁니다. 2028년까지 전기차 배터리 주요 소재가 북미에서 100% 제조되어야만 보조금을 주겠다는 거죠. 한국의 초국적기업 입장에서 보면 보조금 혜택을 받는 미국 투자가 하나의 선택지일 수 있습니다. 그런 수순으로 가면 한국은 탈산업화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용우 IRA가 처음 이슈가 되었을 때 민주당 비대위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미국에 투자하면 안 된다, 투자하지 마라, 일부러 목소리를 더 높이기도 했습니다. 야당이 이렇게 말해줘야 정부여당이 미국과의 협상에 지렛대(leverage)로 삼을 수 있지 않겠어요? 외교전략은 서로 간에 주고받는 정교한 사인, 암묵적인 룰이 있거든요. 야당 반대를 협상 도구로 이용해 고차원적인 전략을 펼쳐야 했는데, 당시 손발이 전혀 맞지 않았어요. 각각의 조직이 해야 하는 역할과 전략이나 협치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면 사태의 해결은 더 어려워집니다.

 

지역 경제문제의 돌파구가 될 탈탄소전환

이일영 지역이 생산기지로 계속 후퇴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IRA 문제까지 겹치며 탈산업화를 걱정하게 된 상황입니다. 국가 경영의 리더십 차원에서 이런 장기적인 흐름에 대응할 태세를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전에는 광역별 ‘메가시티’를 만들자는 논의도 있었는데, 지역이 크게 뭉쳐서 정치력을 발휘해보자는 의도였죠.

 

남종석 10년 이상 지역 침체가 지속되어왔지만 전략적 대응이랄 것은 딱히 없었습니다. 그러다 경남에 김경수 지사가 부임하면서 제조업 디지털전환, 탈탄소화, 메가시티 전략 등을 제시해 문제의식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초광역 수준에서 지역연합을 설치하고 공동의 어젠다를 개발하려면 우선 인적자원을 개발할 수 있는 주체적 역량이 필요합니다. 또한 고급인력이 지역에 정착하도록 기업 투자를 이끌어내야 하고요. 특히 저는 영남권만 아니라 영호남이 같이 연합해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영남과 호남에 위치한 철강(포항 광양 등)이나 화학(울산 여수) 산업은 모두 탈탄소산업으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경남에 선도기업이 있는 발전산업과도 연결되는데, 탈탄소화 과정에서 LNG나 수소 등 가스터빈 기술이 향상되고 풍력산업도 터빈 제조역량을 키우면서 전반적인 기계산업 고도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여수에서 포항에 이르는 동남권 제조단지의 탈탄소화와 구조 고도화, 디지털전환은 초광역적인 공동 노력이 있어야 실현될 수 있다고 봅니다.

 

김양희 말씀처럼 지역 산업의 위기는 파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제조업의 지반 침하가 무척 심각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고도의 기술을 가진 고급인력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가령 조선업만 봐도 그렇습니다. 보호주의의 진영화 속에서 우리가 반사이익을 얻는 분야 중 하나가 LNG선입니다. 러시아에서 유럽 각지로 파이프라인을 통해 운송하던 천연가스가 끊기면서 LNG선이 필요해졌는데, LNG선을 잘 만드는 것도 한국이고 해상에 부유식 터미널(FSRU)을 잘 만드는 것도 한국이에요. 그런데 지금 조선업에 사람이 없습니다. 고급기술 영역에 인력이 부족하다보니 이주노동만으로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대학교육이나 노동시장 문제와 연결해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가 중요해졌어요.

 

이용우 우리나라에는 폴리텍(고용노동부 산하의 기능대학)이라는 좋은 체제가 있으니 폴리텍과 그 지역 학교들이 구조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고급인력을 생산해줘야 합니다. 교육개혁을 이야기할 때 대학 정원만 논의되는 현실인데, 이 또한 교육개혁의 중요한 의제로 만들어야 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스템을 디자인해야 합니다. 제 지역구(경기 고양)는 도농복합지역이라 농지가 많고 이주노동자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제대로 된 숙소를 제공하고자 해도 농지에는 건축을 할 수 없다는 제약이 따라요. 또 저희 지역에 동국대병원·명지병원·차병원 등 뛰어난 병원이 많은데도 소아과·흉부외과 등은 인력이 없어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사회를 바꾸어가려는 개혁은 기존의 틀을 깨는 일이 필요합니다. 지역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새로운 제도 혁신, 이민 포용성 등 여러 차원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일영 큰 개혁을 위해서는 협력적 거버넌스가 필요할 텐데요. 경제구조에 지속가능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 인식을 공유하고 협력적으로 움직여야 변화가 가능하겠죠. 그런데 지금 한국정치는 진영주의가 너무 강해 서로 적대하면서 현재 상황을 그대로 가져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종석 대표적으로 탈탄소화 문제가 그렇습니다. 문재인정부에서 중요하게 제안했던 게 그린뉴딜로, 저는 굉장히 중요한 어젠다라고 봤습니다. 지역 제조업은 조선이나 중화학공업 같은 소위 굴뚝산업,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이 많은데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탈탄소화가 중요해지며 제조업에도 첨단화가 필요해진 상황입니다. 탄소세, 탄소국경조정제도 같은 세계적 흐름에 대응하려면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더 적극적인 관심과 정책도 있어야 하고요. 그런데 석탄발전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전 정부는 신재생에너지를 강조했고, 현 정부는 원자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정책 연속성이 없는데다가 이게 굉장히 이상한 구도로 흘러가면서 서로 남 탓만 하고 있어요. 그리고 현 정부에서 원전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신한울 4, 5호기 말고는 뭘 더 안 하거든요. 원자력이 친환경에너지로 인정받으려면 고준위폐기물처리 기준에도 부합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은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정부가 방향을 선회해야 하고, 탈탄소화 산업에 길을 열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가령 재생에너지 중 해상풍력은 2050년까지 연평균 11% 성장할 것으로 추정돼요. 흥미로운 게 이제 막 해상풍력 산업에 진입한 한국기업들의 터빈 제조역량이 세계적인 기업인 베스타스, 지멘스, 미쓰비시 등을 바로 추격하는 수준이에요(「국제 해상풍력 리포트」Global Offshore Wind Report, 2022). 한국은 풍력발전에 필요한 생산기술을 매우 빠르게 습득하고 있고 대단한 잠재력을 가졌다고 평가받죠. 이런 분야에 투자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는 제조업 부문이 전통적인 중화학공업에서 탈탄소산업으로 잘 전환되면 시장을 선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에 고급인력을 정착시키는 문제도 산업의 탈탄소화에 따라 많은 부분이 달라질 겁니다.

 

김양희 우리한테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중국이 만만치 않습니다. 미국이 중국을 막아주고 있는 이 시간이 골든타임이라고 봅니다. 길게 봤을 때 어쨌든 미국은 내리막길이고 중국은 오르막길이니 지금 기회를 우리가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특히 최근 흐름을 보면 단순히 기술발달이라거나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은 적확하지 않고, 기술의 형질이 전환됐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민용으로도 군용으로도 쓰이는 ‘이중용도’(dual use) 기술 품목의 급속한 확산이 그런 예입니다. 횡단기술(transversal technology) 역시 무척 중요해졌는데, 횡단기술은 특정 산업에만 해당하지 않고 전산업에 파급효과를 주는 기술로 AI, 양자, 바이오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횡단기술 부문에서 중국이 미국을 앞서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주력산업에서 우리 경쟁력이 떨어지는 속도, 중국이 쫓아오는 속도가 생각 이상으로 빠를 수도 있어요.

 

세계시장에서 한국의 기회를 찾는다면

이일영 한국은 수출 의존도가 매우 높은 경제구조인데 최근 무역 상황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지난해 무역적자 규모가 역대 최대인 472억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연간 기준으로 무역수지 적자가 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8년 이후 14년 만에 처음입니다. 어찌 보면 비상 상황인데요. 이러한 위기를 돌파할 한국경제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용우 중국에서 발생하는 산업 문제들을 보면 한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 정보공개 수준이 경제발전과도 깊이 관련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중국은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있고, 우리는 우리 경제의 특성을 잘 활용해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2000년대 증권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세계 10대 산업 순위를 자주 들여다보았는데, 우리나라만큼 다양한 산업 영역에서 세계 3위 안에 들어간 나라가 없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남종석 맞습니다.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해외의 유수 사례를 들며 한국이 어서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경제 수준만 놓고 보면 유럽은 이미 1990년대부터 엉망이었어요. 우리가 닮고 싶어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 국가를 꼽자면 미국 정도일 겁니다. 미국은 금융업과 의약·항공·우주 등 첨단산업의 강호이고, 최근 들어 제조업의 기반까지 다시 다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항공기나 제약 부문 정도를 제외하고는 자체적인 생태계를 갖추고 있는 몇 안 되는 국가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만의 생산성이 높다고는 하지만 대만은 반도체회사 TSMC 딱 하나거든요. 독일만 하더라도 화학과 기계 분야에서 탁월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조선, 배터리와 반도체 산업의 기반이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범용소재인 석유화학·철강에서부터 기계·전기자동차·조선·전자 그리고 배터리·반도체 등에서도 세계적인 선두그룹에 속하죠.

 

김양희 미국 바이든 정부는 출범 초기 4대 핵심품목, 즉 반도체·배터리·핵심 광물·의약품에 대해 전략적으로 제조업을 키우겠다고 했습니다. 그중 우리에게 애초 해당사항이 없는 광물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품목을 모두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한국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사람들도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작년부터 주식시장에 ‘태조 이방원’이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하죠. 태양광 패널·조선·이차전지·방산·원전의 앞글자로 이게 유망 종목이라는 거예요. 한국이 제조업을 잘하기 때문에 강점인 분야입니다.

 

이용우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나라가 마스크 물량 걱정 없이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던 이유도 제조시설과 생산기술이 있었기 때문이죠. 미·중 경쟁과 진영화 속에서 이를 기회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글로벌 자본 입장에서는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투명하면서 생산능력도 있는 한국을 훨씬 신뢰할 수 있을 겁니다.

 

이일영 한국이 가진 강점이 그처럼 적지 않다고 할 때, 이를 좀더 살려나가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남종석 한국의 산업기술, 제조업이 강점이라고는 하지만 첨단화가 꼭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자동차산업은 자율주행의 고도화로 기계산업은 로보틱스(로봇robot과 기술technics의 합성어)가 중요해질 것이고, 항공산업 분야에서는 도심 항공 교통체계(Urban Air Mobility)가 더욱 부상할 겁니다. 우리의 전통 제조업 분야인 철강만 해도 최근 수소를 통해 철을 만드는 수소환원제철 같은 기술을 발전시키려고 하죠. 수송기계를 비롯해 기계산업 전체가 이같은 변화 중에 있고, 탈탄소화와 디지털화는 함께 가고 있어요. 미국이 1990년대 금융화·탈산업화 이후 역외로 빠져나갔던 제조업 산업 기반을 다시 들여오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도,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사실상 USMCA(미국·맥시코·캐나다협정) 혹은 북미 내 제조업 생태계를 자체적으로 구축하고 고도화하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추세에서 우리 경제의 동력을 잃지 않으려면 제조업의 고도화에 노력이 필요합니다.

 

김양희 진보진영에서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저는 경제안보적 측면에서 한국의 방위산업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크게 세가지 측면에서 그 중요성을 논해볼 수 있는데요. 첫번째로 방산은 기본적으로 수출보다도 자주국방을 위해 중요합니다. 물론 수출이 산업의 발전을 촉진하는 매우 중요한 토대이긴 하나, 지금 같은 비평화 시대에 무기를 자체 생산할 수 있다는 엄청난 장점을 강화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두번째, 제조업의 기술력 발전과 연결해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방산은 기계·전자·화학·IT 및 항공우주산업 등 제조업이 고르게 발달해야 가능하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은 글로벌 과점산업입니다. 이 방산을 제조업 부흥의 마중물로 삼아야 합니다. 세번째로 방산은 보호주의 진영화 시대에 진영 내 거래에 국한될 수밖에 없고, 우리에게 중요한 신남방지역에서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강점을 가진 거의 유일한 분야라서 중요한 레버리지로 키워야 합니다. 앞으로 방산 수출 철학과 원칙에 대한 다각적인 논의가 필요합니다.

 

이일영 방위산업이라는 게 종합적인 제조업 역량이 필요한 분야인 것은 맞지만, 지정학적으로 민감한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세계적 갈등에 끌려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전쟁에 개입할 수 있으니까 위험한 산업일 수 있죠. 한국이 이러한 위험을 세심하게 판별할 수 있는 능력과 경험이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방위산업은 세계적으로도 국내적으로도 경쟁시장 원리가 작동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제어하고 조절할 수 있는 정치적·정책적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자칫 괴물산업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경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용우 신남방지역 언급을 하셨는데, 신남방정책이 우리 경제에 중요하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문재인정부는 신남방정책을 수립하며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교역에 상당히 공을 들인 바 있죠. 그런데 현 정부는 미국 편향적인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선회했습니다. 인·태 전략이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는 목적이 강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태 전략과 신남방정책은 교집합 관계에 있는데 현 정부가 신남방정책을 일방적으로 폐기함으로써 정책 연속성에 혼란을 가져온 것입니다. 대외전략은 꾸준히 이어가며 발전시켜나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어요.

 

김양희 저는 정부가 인·태 전략을 수립한 자체는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동북아에 근린 우호 국가가 없고, 한중일 삼국 간 세력전이 중첩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 같은 옆나라와의 지역가치사슬(RVC) 구축은커녕 경쟁과 배제가 난무하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우군이 많은 쪽으로 지역의 외연을 최대한 확대해야 합니다. 그 지역이 인도·태평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렇다고 국내정치적 이유로 신남방정책과의 정책적 연속성을 끊어버리는 식은 곤란합니다. 인·태 전략에만 힘을 실으면 중국 입장에서는 한국이 고유의 정책을 버리고 미국이나 일본에 편승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전부터 신남방정책을 펼쳐왔는데 미국·일본과도 공통분모가 있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협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우리의 의도와 미국의 의도가 분리되면서 대중관계를 좀더 부드럽게 풀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일본을 대하는 태도에도 도덕주의 같은 게 너무 커진 면이 있는데, 거기서 벗어나 일본과의 협력도 불가피한 구체적 현실을 봐야 합니다.

 

관행을 깨는 정책과 협치의 복원, 반드시 필요하다

이일영 오늘 세분의 말씀을 종합해보면 시스템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크게 보면 정부조직의 역할이나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이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부의 조정적 역할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정치적·정책적 협조와 협치를 할 수 있는 문화, 경영, 제도 등도 정비가 필요하겠죠. 한편으로 내외의 위기도 있지만 가능성과 기회도 열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고리로서 탈탄소화와 그린화에 대한 정부나 정치권의 역할이 필요하겠고요. 마지막으로 한말씀씩만 마무리 발언으로 덧붙여주시면 어떨까요.

 

이용우 저는 세상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누구 하나가 틀린 건 아니거든요. 서로 다른 지점들을 타협해나가며 길을 찾아야 하는데 현재 우리 정치권은 낡은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다고 봅니다. 특정 현안을 놓고 둘로 나뉘어 싸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적대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욱 발전적인 논의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관행을 깨고 다양한 의견을 논의의 장에 내놓는 일이 필요해요. 현재 우리 사회의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부족한 신뢰자본을 어떻게 채우고 극복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결국은 더 입체적인 논의를 이어가야 합니다.

 

김양희 우리나라는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의 국제경쟁력이 극단적으로 다른 것 같습니다. 분명 뛰어난 경쟁력과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나라인데 그 주역은 대개 공공영역이 아닌 민간영역에 있습니다. 행정부나 국회와 같은 공공부문은 아무래도 철저한 ‘내수산업’이라 그런지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문제는 앞으로는 효율이 아닌 회복력, 경제논리보다는 안보논리가 더욱 중요해지므로 공공부문의 역할도 점점 더 중요해진다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새로운 위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남종석 지역에서 연구를 하면서 젊은 층을 어떻게 유치할 것인가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모두 인구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정치적인 수준에서 보면 이미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밀집해 살기 때문에 지역경제를 위한 정책은 후순위로 밀리고, 균형발전은 수사로만 그친 채 실제 이루어지는 것은 별로 없어요. 현재 흐름을 역전시킬 수 있을 만한 과감한 정책들은 별로 고려되지 않는데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남이든 호남이든 남부권에 투자하는 기업들에 더 큰 인센티브를 줘야 하고, 연구기반 대학이나 전문기술인력 양성 대학을 지역에 만들어야 합니다. 더불어 남부권이 자체적인 광역망에 기초한 경제권을 구축해야 한다고도 봅니다. 정부는 이를 위한 인프라를 지원할 필요가 있죠. 현재는 모든 것이 서울을 중심으로 돌아가요.

 

이일영 적대적 정치가 최대 문제인 것 같습니다. 회복력의 시대,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공공부문이 거기에 맞는 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고요. 또한 한국이 수도권 중심으로 고립되지 않으려면 결국에는 좀더 포용적인 거버넌스를 갖춰야 하겠습니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강대국들이 각자도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포용하고 이웃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나가며 새로운 발전모델을 구축하는 길밖에는 없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2023년 포용과 회복의 방향으로 우리가 체질을 바꿔나간다면 그것이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전환의 길이 될 수 있겠습니다. 미국이 부르는 길, 중국이 부르는 길만을 따라가서는 막다른 길에 부딪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고민을 해가면서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보자는 다짐으로 오늘 좌담을 마무리하면 어떨까 합니다. 감사합니다.(2023.1.27.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