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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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판식 朴判植

1973년 경남 함양 출생. 200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밤의 피치카토』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가 있음. lifediver@hanmail.net

 

 

 

요람에서 요람으로

 

 

삼일을 깨어 있다 한번 눈 감으면 사일 동안 잠만 자는 그것은

사람의 아기와 똑같은 것을 먹고 자라는데

생후 육개월이 되면 고양이나 개의 마음을 읽어 원하는 대로 다루고

일년이 되면 자기 덩치의 대여섯배나 되는 물건도 들어올리고

삼년만 되어도 성인 머릿속의 생각을 정확하게 맞출 뿐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 꿈과 감정을 제멋대로 휘젓기도 한다

그리고 생후 오년이 되면 완전한 성체가 되어 독립해서는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작은 신 흉내를 내게 된다

 

그것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면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며

장갑과 신발을 만들어 신으면 미움과 걱정도 사라지고

그것의 뿔로 목걸이나 반지 장식을 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행운을 얻게 된다

한번 마시면 백통의 대나무 술을 축내고

하루에 스무갑씩의 담배는 예사로 피워대는 그것이 자신의 마을에 찾아올까봐

현명한 촌장들은 삼사톤쯤 나가는 바위를 마을의 입구에다 놓아두었는데

 

자금성의 영락제처럼 끈질기게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을 것만 같은 그것도

사람의 나이로 십팔세만 되면 방탕한 생활을 한 결과

그해의 첫눈이 내리는 날 밤에 피를 토하며 죽는데

어린아이가 그 냄새를 맡으면 자라서 주정뱅이가 되거나 창녀가 된다

 

나는 오늘 어린 그것 여섯마리가 포대 속에 담겨져 있는 걸 보았다

그것은 얄팍한 인간의 선행에도 고마워하지 않고

악에 대해서도 똑같이 냉담한데

우리와 너무나 흡사한 얼굴을 하고 있어,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 자루에

손을 대었다가 병이 나고 말았다

 

어려서는 가위 눌리고 잘 앓으면서, 또 어른이 되어서는

평범하고 시시한 생활로 하루하루를 허비하면서도 꿈에서조차 영원히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그것, 구름을 가르고

하늘의 실을 잡아당겨

천둥과 함께 막 지상으로 떨어지는 그것

 

 

 

크로노미터

 

 

사촌은 서른이 넘었는데도 아직 어머니 속을 썩이고 있다

유부녀를 잠시 만나더니, 지금은 건강식품 방문판매를

하겠다고 돈을 빌리러 다닌다

 

누군가의 인생이 갑자기 급커브를 그릴 때는

누구라도 그에게서 한걸음쯤 물러서야 하는 법이다

 

엄마 눈치 보느라 주차장에 나와

쭈그려 앉아 담배 피우는 이혼녀나

고깃집에서 종이봉투에 쇠수저를 넣고 있는

옆집 아주머니의 새 아르바이트를 볼 때도 그렇다

 

흰색 보드판 앞에서 젊은 고물상 주인이

늙은 여자와 가벼운 실랑이를 벌일 때도

그들의 배후에서 천장 없는 가건물로 폐품들이

더 올라갈 수 없는 높이로 올려지고 있을 때도

 

나는 생각하게 된다

늘어난 양말 속에 넣어둔 탓에 흘려버린 돈 구천원을 찾으려고

횡단보도와 구제옷가게와

석바위시장을 지나 일하는 다방 안까지 샅샅이 뒤지고

돌아온 뚱보 그녀를

 

인생은 얼마나 더 큰 커브를 돌다 쓰러져야만 끝나는 게임일까